2015.12.11 13:58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
본문 : 롬 6:5-11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오전에 회개에 대해서 증거를 하려고 생각을 가졌었는데 지난 주일 설교한 설교를 유치반 중간반의 부장들이 가르치는데 그 뜻을 똑똑히 모르고 가르치는 것 같아서 다시 지난 주일에 증거한 것을 한번 더 증거할 필요를 가지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물질에 관한 과학보다는 더우기 탁월한 세밀성과 절대성을 가진 것입니다. 물질도 물리에 어긋나면 어긋난 것만치 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물질 과학이 아닌, 말하자면 인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경은 틀린 것만치 심판을 받기 마련이고 멸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바로 알고 또 행하는 데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절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라 말은 예수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다' 그 말은 본받아도 되고 안되고 하는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죽는 일이 되어야 되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요, 또 처음 익은 열매요, 절대적인 표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본받는다 말은 딿른다는 그 뜻을 주로 가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결되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따라 연합한 자가 되면 연결된 자가 되면 또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그 부활의 공로를 인해서 또 연결된 자가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그저 인간들이 원하고 사모하고 수고하고 해서 되는 것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나를 따라 오지 못한다' 고 말씀을 했습니다. 또 '목숨을 애끼는 자는 다 멸망을 가질 것이고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살리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따라야 구원이 이루어지지' 그저 제 욕심대로 살고 싶은대로 살고 남은 찌꺼기 쓸데없는 찌꺼기 그런 것 주 모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것 가지고 저만 속았지 구원은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출세를 하려고 하는 데에도 그런 찌꺼기 가지고는 안될 것이고 또 물질이나 권세나 지위 그런 것도 얻으려고 하면 그런 찌꺼기 가지고는 안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천국을 얻으려고 하는 우리가 아예 그 사람의 그 사상이 세상 것 할대로 하고 남은 그 찌꺼기 그거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 이 구원을 가지려는 그런 천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자기의 소유를 전부 자기의 몸 전부 생명 전부 자기의 인격 전부 이 전부를 다 쏟아 기울여서 이루어야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래도 은혜입니다. 왜? 역사의 모든 이종교가들이 무엇인가 타락했지마는 인생의 근본 지위의 본능상 자기들에게 무엇인가 이상적인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취해 볼 그런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땅 위에서 어떤 종류의 욕망을 달성해도 달성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그게 아니라고 불가내서 참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에게는 제일 좋은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 만물의 탁월하게 허락되어 있는 이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상 그렇게 찾고 또 동정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 모여 가지고 이종교라는 종교가 됐습니다. 불교니 그런 것들이 다 이런 인간의 본능 심리에서 추상하고 추측하고 추론한 그것이 불교의 불경이요.
그들의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큰 소망입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해결을 지우시고 우리에게 우리만 전심전력을 다 기울이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분의 입법한 그 법에 위법하지 안할 수 없습니다. 이미 위법된 것이 원죄요 또 자기로 될 것이 본죄입니다.
불의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악령이 그 속에 주격이 되어서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자율로 행동한 그 모든 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씀했습니다. 인간이 제가 중심 되어서 자기가 자기로 자기의 주가 돼 가지고 사는 그 생애를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과 일단 원수된 그 원수를 어떻게 해결 지울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해결 지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하늘나라와 하늘나라에 속한 것은 먼저 예수님의 공로를 입지 않고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못하고 이루지도 못하고 또 가져봤자 누리지도 못하는 완전히 딴 차원의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인간으로서 절대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될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대속에 대해서는 그만 두고 예수님의 이 대속의 원리에 대해서 지난 주일날 증거한 것이 다 흐미하기 때문에 다시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어야 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을 시켜 주신다 하는 계약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연합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 하는 그 모형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으심이 기본이며 원형 죽으심입니다. 우리의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과 꼭같은 죽음을 우리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꼭같은 죽음을 우리가 죽어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건설구원적으로 활동적으로 자기의 생애적으로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 공로를 법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적으로 있는 것은 택한 자면 이 공로를 입게 되기 때문에 다 부활도 하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가지마는 하늘나라에서 실력을 갖추는 것이라든지 그 영광을 마련하는 것은 이것은 자기가 만난 것 같은 자기 노력으로 노력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건설구원이라 이렇게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구원 건설구원, 건설구원은 다 같이 하늘나라에 부활해서 들어가기는 들어갔지마는 하나님에게 대한 필요있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나 모든 인류와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나 자신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지는 이것이 하늘나라 생애의 실력이요 영광이라 가치라 부요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본 은혜를 받아 가지고 이 은혜를 힘입어서 은혜 생활을 할 때에 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해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라 또 실패하는 그 건설을 가리켜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 그렇게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서 부활해 가지고 살 때의 자기의 실력 그 기능을 건축하는 것이나 영광을 건축하는 것이나 명예를 건축하는 것이나 자기의 모든 영광을 건축하는 자기와 자기 행위와 자기의 소유에 대한 그 생애로 말미암은 그 건설을 가리켜서 비유한 것입니다.
이 건설은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이 하늘나라의 영생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선정이 되고 인간의 공로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자가 영광의 차이 실력의 차이 하나님의 등용의 차이 환영의 차이 만물의 대우의 차이 만물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든 존재들에게 필요있는 그 차이는 천인만인이 각각 다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련하려고 지금 예수 믿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 믿는 행위를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영은 벌써 구원 얻었고 우리의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말합니다. 마음은 영이 아닙니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모형이 영이요.
육이라는 것은 마음과 고깃덩어리 둘을 합해서 육이라고 말합니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지마는 짐승도 혼이 있고 육이 있다고 말한 그 짐승과 같은 우리의 심신으로 된 이것을 가리켜서 육이라고 성경에 가르칩니다. 이 육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영은 주님의 대속의 의를 입어서 영생을 가졌지마는 아직까지 육은 하나님의 구속을 입지 못해서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련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진리와의 관계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이 관계점을 지금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히 가고 가도 변하지 아니할 관계를 완전한 관계를 평가적으로 온전한 관계를 하나님과 피조물들에게 환영과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을 받을 수 있는 이 관계를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 관계를 세상에 있는 동안에 조성하려는 것이 우리의 건설 구원인 것입니다.
계시록에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든지 그것은 무궁세계의 옷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자기는 벗을래야 벗을 수 없고 입고 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세마포 옷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일생이라는 그 나래다가 한 현실 한 현실로 씨를 받아서 일생의 생애를 건설한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베옷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기에 회개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 자기 행위가 그를 딿겠다 말했고 '하늘나라에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외모라 말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두고 갈 것들이 다 외모입니다. 용모가 암만 잘나도 그거는 외모입니다. 그 사람의 이 세상 지식이나 권세나 지위나 영광이나 소유나 명예나 어떤 거 구비해도 그것도 외모입니다. 그 외모로 하늘나라에서 평가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그 사람이 모든 면이 구비했다고 하늘나라 가 가지고 구비되는 것 아닙니다.
홍포입은 부자는 그렇게 구비했지마는 물 한 방울을 가질만한 권세가 없었습니다.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로 왕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 터이니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마련하는 것은 세상에서 마련하지마는 영원무궁 세계의 하늘나라의 것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마련입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마련하나 영원불변의 것을 변하는 세상 속에서 마련합니다. 날마다 죽어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을 마련합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죄없는 온전한 것을 마련합니다. 모든 인간이 저 잘난 재미로 사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으로 사는 이 탁월한 생애를 그 인격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이런데 이런 것을 찌꺼기 가지고 일주일 동안 엿새 동안은 썩어질 돈 두고 갈 명예 지위 없어질 행락 이거 위해서도 있는 정력을 정성을 다 기울여서 실컷 다 들여서 다 진액 뽜서 바쳐 놓고 내일은 주일이라 일 못 할 터이니까 열두시까지는 괜찮다 해서 열두시까지 땅의 일을 위해서 전부 다 기울이고 주일날 와서 고깃덩어리가 와 앉아봤자 피곤해서 전폭적으로 졸고 앉았으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지루합니다.
이것 가지고 이루는 구원 아닙니다. 이 구원을 이루는 이 구원의 방편과 이 자료부터 우리의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이 구원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 다하고 뜻 다하고 힘 다하고 성품 다하고 이것 다해서 몇 해를 살든지 자기의 생애의 그 모든 전체를 다 통해 가지고 이것을 사용해서 마련하여야 될 지극히 크고 세밀하고 어렵고 힘드는 이 구원을 우리가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기독자의 이 건설구원에 있어서 안일주의는 대적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주장 자기 조브라운 견해, 이 영계와 물질계의 무한을 전체로 삼는 이분의 뜻을 하나 알면 둘도 모르는 요 꿀밤딱정이 같은 요런 소범위에 있는 제 주관을 제 모든 지식을 요것을 표준해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평하면서 그것을 위주로 이 하나님을 저를 잣대로 삼아 가지고 재 가면서 해 볼라 하는 이런 것은 망령입니다. 망상입니다. 아주 망상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 구원을 이룰려면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바쳐놓고 구원 이루어야 됩니다. 바쳐놓고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요구하면 즉시 즉시 내 될 수 있는 이 준비를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루지 제 욕심대로 다 살고 남은 찌꺼기 썩은 것도 그것 가지고 안되는데 하나님을 대우하면서 일국의 왕도 정권자도 이거 가지고는 안될 터인데 하물며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찌끼 가지고 되라는 것 망령입니다. 자기만 자기가 속지 하나님은 업수이 여김을 절대 받지 않습니다. 저만 제게 흠뻑 속았습니다.
그러기에 잘난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속습니다. '지혜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낸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예수 안에는 문벌 좋은 자 학벌 좋은 자 세상에서 높은 자 큰 자 이런 자들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바로 이룬 사람들이 숫자가 있기는 있지마는 극히 소수라고 말했습니다. 왜? 지난 주일날 설교한 것이 부장들이 증거하는데 왜 증거가 그것이 삐뚤어지고 근방에 가다 마느냐 하면 구원 이루는 구원의 자원의 관념을 잘못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자가 앉아서 비용을 예산치 않겠느냐 비용이 모자라면 안세워야 되지 모자라는 비용으로 세웠다가는 준공 못하면 도리어 수치를 당한다 누구든지 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있는 것을 다 내어놓지 안하면 이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내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두 가지 죽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죽음을 가지는 이것이 우리 할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일을 당신이 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이 부활을 시켰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이하에 되면 '그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했습니다. 그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두 가지 죽음을 죽어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이 삶으로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님의 이 사활의 공로로 단번에 진리와 성령으로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됐지마는 우리의 심신은 단일체가 아니고 수많은 세포의 조직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 육체의 구원은 여러 수백 수천번을 통과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종합 구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속을 이루는 데에는 그저 간단하게 두 가지 죽음을 죽는 죽음으로서 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죽음 없이는 구원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말은 있는 전부를 다 해야 이 구원이 이루어지지 다하지 안하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오. 두 가지 죽음을 죽어야 이루어진다 그말은 죽음은 최종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기울이는 그것이 마지막 다 기울이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두 가지 죽음을 죽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말은 다 드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 드려도 남음이 없이 싹 다 드려 끝이 나 버려야 이것이 이제 완전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일은 두 가지 죽음입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거는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말입니다. 두 가지 죽음은 우리가 죽는 죽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는 죽음이 어떤 죽음인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 이유로 죽으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신 죽음입니다. 두 가지 이유로 죽는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그 죄를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또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불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벌써 자기가 중심이 됐고 자기 위주인 자기가 주체가 된 원죄가 범한 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합니다.
자기 중심 자기 사욕 자율 이것으로 이것이 왕이 돼 가지고 하나님 외에 딴 것이 주체가 주권 왕이 돼 가지고 행동한 그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합니다.
우리가 해 놓은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또 하나님과 우리와 원수된 이 원수된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멸하는 데에는 이 세 가지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멸해지지 죄지은 값을 불의의 값을 하나님을 대적한 값을 그 값을 다 치러야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지 이 값을 치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이거는 없어졌다 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없어졌다고 말해도 그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마귀는 속에서 비웃고 조롱하면서 다시 상소할 것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에 관련돼 있기 때문에 이것이 댓가는 영원한 사망이요 영원한 수치요 영원한 불행이요 영원한 고통이요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 값을 받아야 이것이 없어지지 값을 받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의 댓가를 받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되어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으로 우리를 대신하는데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이 형벌 받는 데에 동참하셨는고로 우리의 수많은 사람의 영원한 형벌을 그 무한하신 분의 단번으로 사죄와 사죄가 된 것입니다. 이 불의를 사했습니다. 죄를 사했고 불의를 사했고 원수된 이 원수를 사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외부적 고난입니다. 이것은 외부적 고난 외형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의 외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의 내부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죄의 벌을 다 받을 뿐만 아니라 악령이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님을 죄를 짓게 만들려고 달라들었습니다. 죄를 짓게 만들려고 달라들어서 오만 방편 다 쓰고 마지막에 최종적인 죽음을 가지고 달라들어서 범죄케 하려고 했지마는 주님은 범죄하지 아니하려고 함으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죽으신 일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 벌로 죽으시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이 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세상 권세를 가진 악령과 세상 권력과 방편이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까지 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의를 행하시려고 할 때에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전체가 방해해서 십자가에 마지막에 죽는 것까지로 방해를 했지마는 예수님은 죽었지 방해를 안당했습니다. 죽으셨지 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복종을 끊지 안했습니다. 중단하지 안했소.
복종하고 복종이 계속 되고 복종 못하게 하고 복종 못하게 하는 세력이 복종 못하게 하려고 죽기까지 해도 복종하는 것으로서 죽어 끝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의에 대하여 죽으심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이 원수된 이 댓가를 댓가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받았습니다. 죽으신 것은 우리의 형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외부의 형벌을 받아 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배신한 자요 물러가라 우리의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이 배반을 예수님이 대신 걸머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할라 하니까 못하게 할 권리가 없다 말입니다.
대신 했으니 우리의 모든 원수 된 것이 예수님에게 다 부담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원수니까 저주하면서 물리쳤지마는 이렇게 물리쳐도 입으로는 원수된 형벌을 받아서 죽어갔고 껍데기 고깃덩어리는 형벌 받아서 죽고 속에 심령과 그 고깃덩어리의 그 기능은 마음의 기능은 하나님과 화친하는 이 화친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무리 저주하고 던져버려도 발길로 차버리고 해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친하는 이 화친을 놓지 안하고 화친의 줄을 거머쥐고 화친으로 예수님은 세상을 끝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53장에 말씀하시기를 '그의 영혼을 자기 백성의 속건제물로 바쳤고 그의 모든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나 실상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다' 하는 것을 거기에 선지자가 성령이 말씀해 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세 가지 죗값으로 이상이 없는 영원한 고난 속에서 범죄케 하려 해도 범죄하지 아니하고 우리 대신까지 짊어져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그 순종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달라붙어 가지고 하나님하고 화친하라는 이 화친을 이 세 가지 대속을 놓지 아니하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다시 예수님을 범죄케 할 방편이 없습니다. 의를 중단케 할 방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불목케 할 방편과 힘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함이라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과 땅 아래 있는 물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고 빌립보 3장 9절 이하에 되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죽음을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두 가지 우리의 죽을 죽음입니다.
우리가 내게 있는 죄를 형제에게 있는 죄를 우리는 이 죄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의 전부를 다 기울여야 할 우리들입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 기울여야 할 우리들입니다. 다 기울이고 최종적으로 생명까지 기울여 죽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생명을 말하는 것은 그 밑에 모든 것을 다 쌓아 올려 가지고 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또 우리는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함으로 세상이 우리를 죄 짓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죽었지 죄 짓지 안해야 됩니다. 우리는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있는 죄를 없애기 위해서 죽어야 하고 또 없는 죄를 새로 만드는 이 죄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하고 내게 와 내게서 일어나는 것과 이웃에게 일어나는 것 이미 있는 것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들이 인본들이 제가 왕이 돼 가지고 주장하는 세상에 모든 불의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을 가지고 날뛰는 이 불의, 이 불의의 무더기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은 제물로 바쳐져야 됩니다.
우리는 죽을 생명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죽을 생명이요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의를 건설하니까 세상에 저희 세상에 깨진다고 해서 우리의 건설해 놓은 의를 방해하면 마지막에 생명이 끊어지는 거기에까지 방해를 당해도 생명은 그들은 끊어도 우리가 의를 건설하는 것은 그대로 건설하다가 앞으로 엎어져서 세상을 끝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요것이 내 속에서 나올 때에 이놈을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버려야 되고 내 몸 밖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이 세력들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투자해야 할 우리들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존귀케 공산주의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하나님과 화친하지 못하게 고문과 고행에서 생명을 취해도 생명을 줬지 우리는 하나님과 화친을 놓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이 죽음을 우리가 죽어야 할 이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죄를 멸하고 불의를 멸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의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을 이것을 계속 하기 위해서.
이런고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죄에 대해서 내가 희생되면 즉시 동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의의 사람으로 일어납니다. 의의 사람으로 일어나면 세상은 저의 편이 아니라고 우리를 대항해서 모든 악의 세력은 우리를 대항해 죽이나 죽을 때에 우리는 죽음으로서 우리의 사업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일단을 죽고 일단을 죽으면 이단의 사람이 일어날 때에 이단의 사람이 이단의 사람으로 삶으로 세상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두 가지 죽음으로 우리는 끝나고 이럴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하신 거와 같이 이 두 가지 죽음 넘어서 우리를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이 이 세상에서 두 가지 죽음을 죽으면 부활에 속한 부활에 연합한 자 되어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기능으로 세상이 해할 수 없는 인격으로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자들이 건축한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된 것입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두 가지 일차 죽음 이차 죽음 통과 후에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자기에게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 생명성 영생성의 것이 우리에게 다시 살아난 이것이 새사람이요 성화된 것이요. 이것이 세상이 해할 수 없는 것으로 살아난 것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참 자기라 말했습니다. 참 자기라.
예수님은 평가하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했습니다. 자기를 잃는다 말은 인간들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탐을 내다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예수 안에 있는 참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새사람 참사람을 잊어버리고 지옥 갈 옛사람이 자기인 줄 알고 자기 아닌 자기를 자기인 줄 알고 이렇게 사는 그거 세상 것 탐하다 그랬으나 세상보다 자기는 가치가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빼앗긴다 말은 현실에서 예수를 따라서 두 가지 죽음을 죽고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다시 예수님의 부활에 연결된 살려주시는 이 새생명에 속한 살리움을 받을 때에 이것은 다시 썩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죽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우리가 반석 위에 지은 집이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 죽지 아니할 것 썩지 아니할 것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욕된 것으로 영원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 아닙니다. 세상에서 받습니다.
세상에서 받아 가지고 받은 이것을 세상에서 받고 받고 연성하고 연성해 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추수해서 무궁세계에서 이것 가지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려진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믿는 사람이면 우리 할 일은 우리 성공은 우리의 지위는 우리의 능력은 뭐이냐? 우리의 지혜도 죽는 것이요 우리의 성공도 죽는 것이요 우리의 승리도 죽는 것이요. 우리의 수입도 죽는 것이요. 사는 것도 죽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슬기로움도 죽는 것이요.
우리는 두 가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요것이 기독자로서 가장 권위있는 것이며 승리있는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이며 존귀있는 것이며 평안한 것이며 쾌락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죄 불의 하나님을 떠나라는 자기 안에 요 자기를 자기가 죽일 때에 인간의 참된 쾌락이 거 나옵니다. 기쁨이 거기에 나옵니다. 능력이 거기에 나옵니다.
이 세 가지에 속한 이 악의 세력을 자기 안에 있는 걸 자기가 죽이고 나면 그 다음에 이제 자기 밖에 있는 것을 이것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에게 있는 티를 뽑을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이 말한대로 날마다 자기를 죽일 것 자기를 죽이고 난 다음에 자기 밖에 있는 이웃 속에 있는 것을 죽일 것 그리고 나면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된 이 새사람 속사람이 일어날 때에 이 사람으로 살라고 하면 세상에 저희 편이 아니고 저희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세상에 깨어지게 하는 세상을 파괴시키는 이런 죄악을 파괴시키는 산 자이기 때문에 살라 할 때에 세상은 나를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타도 할 때에 그가 타도해봤자 세상에 두고 갈 것 타도하지 세상에 두고 가지 안할 무궁세계 속한 것은 제가 타도 못합니다. 타도를 하나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있는 것을 그들에게 타도를 받으면서 새사람으로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이렇게 삽니다. 산다고 나의 세상 것을 세상 세력이 마구 타도를 합니다. 이거 뺏든다 이거 없어진다 죽여버린다 그것은 내 것이지마는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가져가지 못할 것들입니다.
이런데 그들은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지고 이것으로 위협을 줍니다. 위협을 주는데 내가 이렇게 삶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리로 인하여 죄짓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삶을 인하여 내게 속한 소유도 내게 속한 몸도 내게 속한 지위도 권세도 그들이 위협을 주며 뺏든다 깨트린다 깨트린다 하는데 고것을 그들이 깨트리고 빼앗고 깨트리고 죽이고 하는 그것이 고것이 땅에 속한 내 것을 영원한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옮겨주는 것이고 이것이 썩을 것을 썩지 안할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일시 보관하고 있는 이것을 영원히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고 영원히 나에게 쓸 수 있는 신령한 것으로 완전히 내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대적하는 껍데기를 가졌으나 실상은 나를 부요케 하는 자요 나를 존영케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가노라 하는 그 찬송을 하는 것이 깨달은 사람들의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수건을 벗고 육의 생각을 벗고 이걸 벗고 신령한 사람으로 살면 온 세상은 나를 응원하는 것 뿐이요, 나를 위하는 것은 미혹하는 것인데 미혹 안 받으면 유익되고 나를 조금 해하는 것은 조금 유익되게 하는 것이고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홀딱 다 뺏드는 그 강하게 대적하는 것은 나에게 강하게 유익되게 하는 이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의 할 일은 두 가지 죽음뿐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로 없어지는 것 죽는데 주님이 또 살려 주시면 살고 있는 것 다 바쳤는데 주시면 또 바치고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인해서 없어지는 것 하나님께서는 더 또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없어질 것을 주시면 또 없어질 것 단단히 깨닫고 굳게 잡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