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13:53
예수님 재림
1987. 7. 19. 주일오후
본문:베드로후서 3장 9절∼14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찬송 하나 합시다. 고대가가 그 몇 장입니까? 몇 장? 36장? 36장 찬송.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마태복음 24장에 주님이 신약 교회에 대해서 경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노아 홍수 때에 모든 사람이 다 헛된 것을 준비하고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다가 다 멸망받은 거와 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모든 사람들이 이 큰 사실은 등한히 하고 땅에 것만 생각하다가 자기가 뜻하지 아니할 때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고 온 우주가 다 불로 녹아지게 될 때에 그때에 주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도 이 영광스러운 영광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기본구원은 가졌지마는 영광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다 영광의 구원이 멸망받을 것이 노아 때와 같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재림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중요한 결말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죽음도 뭐라고 해도 죽음이라는 그것이 제일 큰 결말이요 시험입니다. 또 이 우주의 종말인 예수님의 재림도 제일 큰 일이며 모든 것에 결말이 되는 날입니다.
3장 1절 이하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다 무시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가졌다가 멸망받을 것을 또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이 모든 우주가 불에 타서 이 모든 형체가 없어집니다.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풀어진다는 말은 지금은 뭐 다 각각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형체와 색깔들과 종류들을 가지고 있지마는 그런 것이 다 불에 타 녹아져서 한 원소화됩니다.
풀어진다는 것은 모든 형체가 다 없어지는 것을 말하고 그 체질이 뜨거운 불에 다 녹아진다 그말은, 형체가 드러난다 그말은 뜨거운 불에 그 모든 수많은 원질들이 다 한 원소로 화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도 그와같은 순서로 창조하셨는데 일차 창조한 것이 근본으로 돌아가 가지고 다시 새로 만물을 새롭게 하는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불이 타서 모든 것이 다 풀어지고 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데 그때에 땅위에 인간들이 행동한 그 모든 행동은 낱낱이 다 드러납니다. 모든 일이 드러난다 이랬습니다.
지금은 뭐 여러가지로 숨겨 덮어 가루고 참 변호하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 참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을 이것을 아주 고쳐서 없앨 생각은 가지지 안하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덮어 가루어서 사람, 어리석은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안하면 그것이 된 줄로 안심하지마는 그것은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래서 오전에도 우리가 공부한 것이 어떻게 우리가 이 불심판에 멸망받지 않고 구원을 얻겠느냐? 이 불심판에 멸망받지 아니한 그것이 다 영생이 되고 하늘나라에 영원히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 불로써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이 우주 안에 물질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타서 다 원소화하는 그 불보다 하늘나라는 더 뜨거운 불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는 비유입니다. 이 불에서 타지 안하고 남아 있는 그런 것도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이 불에 타지 아니하고 여게서 통과된 것은 다 그리스도의 심판에 다 통과될런지 여게서는 통과해도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통과가 안 될런지 모릅니다.
이 불도 어떤 불인가? 이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이 말씀에 위반된 것들이 다 멸망받습니다. 또 창조주시며 대주재시며 모든 것에 주권을 가지시고 우리를 특수 구원을 입히시고 또 우리에게 소속시켜 모든 피조물들을 간접적으로 이렇게 구속을 입혀서 구속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이렇게 자존자 완전자이신 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들만 남아 있고 위하지 않는 것들은 다 불타서 멸하게 하십니다.
이래서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각각 건축을 하는데 풀과 나무와 짚으로 건축하는 사람도 있고 또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건축한 그것이 불에 타지 안하고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그것이 불에 타서 멸망받으면 해를 본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무슨 불인가? 그 불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불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씀의 불로 다 심판해서 소멸을 시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나타날 이 심판의 불은 하나님의 선포해 놓으신 이 말씀에 위반된 거, 이 말씀과 이질적인 것, 이 말씀과 동질의 것은 타지 안하고 이 말씀과 이질, 이 말씀과 다른 것 그런 것이 타고, 또 이 구속하신 하나님을 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요 구속의 목적입니다.
이런데 이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 것, 하나님에게 따르지 않는 것, 하나님과 동질이 되어 있지 않는 그런 것은 다 불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두 가지로 준비해야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가지고 준비해야 되는데 거룩한 행실은 구별하는 행실인데 무엇을 구별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여러가지 말씀이 다 있습니다. 행위에도 ‘이런 행위는 네가 아예 다 이것은 끊어버리고 고쳐라. 이런 행위를 갖추어라.
말도, 행동도, 마음도, 생각도, 일도, 소원도, 계획도, 경영도, 욕심도 뭐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이런 것은 못쓸 것이기 때문에 제거하고 이런 것으로써 갖추어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해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거룩한 행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잘못된 것은 낱낱이 다 구별해서 이것을 정리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입니다. 이 말씀에 위반된 것을 다 정리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요, 경건은 이 말씀에서 어떻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있으니 그대로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거룩은 하지 말라는 것을 다 제거해서 우리에게는 흠과 점과 주름잡힘이 없도록 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요 경건은 하나님이 갖추어 요대로 살라고 요대로 사람이 되라 하는 그대로 되는 것이 그것이 경건입니다.
에베소 6장 13절에 보면 “너희들이 악한 날에 모든 것을 이기고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것은 이 굉장히 악한 날이 있는데 악한 날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것을 다 소멸시키는 날이요 악한 날이 오기 전에는 모든 악한 것들이 의로운 것을 악화시킬라고 애쓰는 날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 것 이 피조물 저에게 중심된 이런 운동들과 사상들과 모든 역사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살지 못하도록 그렇게 방해해서 어떻게 하든지 경건 생활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방해를 합니다.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심판의 불이 와 가지고 이 경건치 못하는 것은 다 소멸시키는 그런 무서운 불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 불심판이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된 것을 다 소멸시키고 하나님 위하지 않는 것, 하나님 중심이 아닌 것들만 다 소멸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는 그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데에 만일 어느 하나라도 준비하지 못했으면 거게 구멍이 뚫혔으면은 그 구멍으로 불이 들어와 가지고서 다 소멸시킵니다.
그러면 구멍이 안 뚫혀야 갑옷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원수의 그 화살이 들어오지 못하고 막아야 효력이 있지 원수의 화전이 뚫고 들어오면 효력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이 선포해 놓은 계약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것을 회개해서 그 멸망의 화살이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도록 그렇게 방어해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게 대해서 조금 잘못 생각하면 의문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반된 것을 전부 다 회개해서 위반된 것이 하나도 없이 해라. 위반된 것이 있으면은 위반된 그 구멍으로 이 심판의 불이 들어와 가지고서 그 전신을 사르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멸망시키는 이 심판의 재앙의 불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선포해 놓은 계약 말씀대로 모든 면을 다 계약 말씀대로 철두 철미하게 회개를 해서 이 계약 말씀에 위반된 점이 없어서 멸망이 들어올래야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준비해라 이렇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게 대해서 의문되는 것이 있을 것은 그러면 회개에 대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신앙에 대해서도 천층 만층인데 어떤 사람은 회개를 할라고 그렇게 애를 쓰지 안하고 이미 회개가 돼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어떤 사람에 비해서는 탁월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장성하고 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성한 사람들도 있고 어린 사람들이 있으니 거게 비유하면 여게서 잠수복을ㅡ이거는 비유입니다ㅡ잠수복을 만드는데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몸에 알맞는 잠수복을 만들어야 되겠고, 몸이 큰 사람은 큰 사람대로의 잠수복을 만드는데, 큰 사람은 어린아이의 것을 입어서는 소용이 없고 또 어린아이는 자기에게 알맞는 것이 필요하지 더 큰 것이 필요 없다.
이와같이, 앞으로 하나님의 이 불심판의 재앙을 벗어나는 데는 바다에 가서 물이 들어오지 안해서 물 속에 다녀도 아무 상함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심판 불 속에 머물러도 아무 해를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는데 그 전신갑주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어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조그만한 잠수복을 입으면 되겠고ㅡ물에 빠져도 물이 안 들어오는 말이오ㅡ입으면 되겠고, 또 어른은 큰 잠수복을 입어야 감당하지 그렇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잠수복을 입으면 그 옷을 입고서 돌아다니는데 그 옷이 저 위에 공간에 호흡하는 그 호흡선이 있어 가지고서 밑에서 그래도 숨을 얼마든지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따라다니면서 그게 있어서 호흡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는 것처럼ㅡ이거 비유입니다.ㅡ그렇게 그 잠수복같이 우리는 위로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으니 이 불심판에 그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움 없이 다 피난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니 하나님의 전신갑주에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어린 사람은 어린 사람의 그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고 장성한 사람은 장성한 사람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 비유한다면 우리 서부교회서는 그래도 백 목사가 제일, 속으로는 잘 믿는지 못 믿는지 모르지마는 외부로는 제일 장성한 사람이라 이래 보이니까 암만 권사님이 입는 잠수복도 내게는 작아서 안 될 것이고 또 장로님들이 입는 잠수복도 내게는 작아서 안 될 것이고 더군다나 주일학생들 입는 것은 더욱 작아서 안 될 것이고 나는 내게 맞는 그 큰 잠수복을 준비를 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갑옷을 만들어 입는 데에도 원단도 많이 들겠고 옷도 큰 거와 마찬가지로 그 신앙이 장성할수록 그의 깨달은 것도 넓고, 또 아는 것도 넓고, 또 그가 관련 가지고 있는 것도 넓고, 맡은 의무와 책임도 다 크기 때문에 같은 동등의 것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차이가 많이 있다.
그러기에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 가지고 거룩한 행실로 자기의 거리낌 있는 것을 다 회개하는데 회개를 하되 어린아이와 같은 일학년 정도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겠고, 장성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그대로의 회개할 것을 회개하면 이 해를 받지 안할 것이고 또 장성한 사람은 장성한 사람에게 합당한 회개를 해야 이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10절에는 보면은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하다” 그러면 작은 것 가지고서 충성하는 사람은 그것이 만족하고, 그 사람은 작은 것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은 큰 것 가지면 또 큰 데도 충성할 수 있고, 하나 줘서 하나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은 둘을 주시면 둘 가지고 충성할 것이고 백을 주면은 백을 가지고 충성한다. 하나 줘서 충성 안 하는 사람은 둘 줘도 충성 안 하고 백 주면 백 가지고 충성 안 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정도대로 신앙이 어린 사람은 깨달음도 어리고 믿음도 어리고 모든 것이 어려서 다 정도가 다른데 장성한 사람에 요구하시는 그 회개를 요구한다면 어린 사람들은 다 절단나 버리고 최고로 장성한 사람의 구원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것을 여게서, 작으면 작은 대로 충성한 그것은 네가 크면 큰 대로 충성하는 그대로 의가 되어진다. 또 닷 냥중 가진 자는 닷 냥중을 다 가지고 해야 착하고 충성이 되어지고, 또 두 냥중 가진 자는 두 냥중 가진 것만 해 가지고 해도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가지고서, 전신갑주라 말은 말씀대로 깨끗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하는 거게 대해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요구도 다 다르고 명령도 다르니 일학년의 사람도 있고 아주 그 장성한 사람도 있으니 그 어린 사람은 어린 사람대로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가 있고 또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위하는 충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꼭 동등으로 될 것은 아니다. 동질은, 질은 같지마는서도 양은 동등으로 되지는 않는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혹 의문이 될까 해서 지금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을 보면은 그 사람이 차차 장성해서 장성해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과 가까와지면 그 사람에게는 사정을 많이 둬서 허물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안하시고 하나님과 가까울수록이 그 심판하는 것이 더욱이 신중하고 엄격하고 다 철두 철미하고 하나님과 먼 자에게는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도 그 아주 어린 간섭을 하고 먼 간섭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컨대 일학년은 일학년으로서 통과될 그 사람의 것을 이학년 된 사람은 이학년 것이라야 되지 그것 가지고 통과가 안 된다. 또 이학년으로서는 통과될 만한 그만한 정도의 회개라든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든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요구하는 아주 장성한, 세상으로 말하면 아주 대학원이나 그런 정도에 있는 사람은 국민학교 이학년 정도의 모든 준비 가지고는 다 낙제가 되고 통과가 안 된다. 그런 것을 성경에 많이 비추어 말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준비하는 데에는 다 각각 다르다. 그러면 비유컨대는 김가라는 저 사람이 통과된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보고서 ‘그 사람이 통과됐다면 나는 으례히 통과될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쉬운데 김가라는 사람은 이학년이라 통과가 됐지마는서도 너는 이학년 정도의 회개와 하나님을 위하는 그 경건 가지고는 통과 안 된다. 너는 그 백 배나 더 되는 그 거룩과 경건이 돼야 통과되지 너는 벌써 그보다 장성한 자이기 때문에 너는 통과가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통과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알 것이 아니고 각각 자기가 알 수 있다. 그러면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알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께서 ‘이거는 잘못됐다. 이거는 고쳐야 된다.’ 하는 것을 제가 알 수 있는 것, `이거는 잘못됐다. 이거는 고쳐야 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다 회개해서 고쳐야 이 전신갑주에 구멍이 뚫혀서 불이 들어오지 안하지 아는 걸 자기가 미련해 가지고서 회개 안 하는 그자는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고급의 회개를 모릅니다. 모르고 아주 어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저급인 그 회개를 알고 자기로서는 암만 고칠라 해야 이거밖에는 모르겠다.
자기가 아는 대로의 그 지식 정도를 주신 것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학년 정도로 주신 것도 있고 또 대학 정도로 주신 것도 있고 최고로 주신 것도 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각각 달라서 주신 대로 자기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대로 깨닫게 되고 알게 되니 하나님이 주신 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셔서 알게 하신 것은 다 회개를 해아 되지 자기가 하나님이 주셔서 알게 된 그것을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이 거룩과 경건에 준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기에 이 구원은 어떤 구원이냐? 이 경건은 어떤 준비냐? 이 경건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나 줬으면 하나 가지고 준비하면 됩니다. 그 사람에게 둘 줬으면 둘 다 가지고 준비해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백을 주었으면 백을 다 가지고 준비를 해야 되지 자기는 열을 받은 사람이 하나 받아 가지고 준비한 사람은 통과됐는데 열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 받은 사람의 정도의 거룩과 경건을 준비해도 저는 멸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혜 대로 받은 은혜를 다하지 않으면 이 준비는 안 된다 하는 그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회개, 거룩을 마련하는 데에 정도 차이가 있다, 또 경건을 마련하는 데에 경건 정도 차이가 있다 하는 요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안일주의로서 쉬운 것을 취할라고 애를 씁니다.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는 남의 것 쉬운 것을 취할라고 애를 쓰고 영광과 존귀는 크고 높은 것을 취할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원죄성이요 모든 본죄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제가 들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마련하는 데도 거룩은 차이 있다. 갑이라는 사람이 마련한 거룩과 경건을 갑은 통과해 들어갔는데 을은 그 거룩과 경건 가지고는 안 된다. 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다르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다르고 또 그이에게 모든 주신 그 은혜의 선물이 각각 다르다.
그런고로 오후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거룩과 경건을 가지고만, 거룩과 경건을 가지고만 이 불심판을 면할 수 있는데 이 불심판 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마는서도 그리스도의 심판은 불심판보다도 더 뜨겁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세밀하고 권위 있고 철두 철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불심판 이거는 하나의 초급 심판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은 고급 심판이오. 또 그리스도의 심판보다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하는 것은 최고급 심판입니다. 갈수록이 흠과 점이 없는 거게 영생이 되는 것이지 그 더러운 거 가지고서 통과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불심판을 우리가 면하는 데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 두 가지로만 이 환난을 면하는 준비를 할 수 있는데 이 거룩과 경건은 정도 차이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 사람은 통과된 거룩과 경건이라도, 이 사람은 그것 가지고 통과했지마는 이 사람은 그것 가지고 통과 못 한다. 이 사람은 제게 합당한 거룩과 경건이 마련돼야 통과된다. 이 사람보다 더 큰 이, 가운데 손가락 같은 이 사람은 이 사람 통과된 것 가지고 안 된다. 이 사람 통과된 거는 이 사람 통과될 만한 그 정도의 합당한 것이라야 한다. 이 사람 통과된 것도 이 사람에게는 통과 안 된다. 이 사람 통과된 것도 이 사람에게는 통과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과 경건은 그 차이가 많다. 그 차이는 왜 차이가 많으냐? 하나님이 각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은혜의 차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실력이 각각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많이 주어서 장성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장성한 거룩과 경건의 준비가 돼야 되지 어린 준비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면 장성한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누가 알 것이냐? 본인만 안다. 본인이 어찌 아느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읽고 상고하면서 고쳐볼라고 전심 전력을 들여서 애를 써서, 애를 써서 자기가 고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그것이 곧 자기가 받은 은혜다.
그러면 일학년이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자기의 고칠 것을 깨달았다고 해 가지고 그 사람이 장성한 사람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도달한 것은.
제가 여게 경험하는 데도 이 교인들이 뭐 자기로서는 참 고칠 것이 없다고 완전한 그 회개를 해서 이제 양심에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깨끗한 회개를 했다 할지라도 장성한 사람이 볼 때에는 그 사람이 모르는 게 많습니다.
모르는 게 많아도 그런 걸 말하면 도로 번민만 될 것이고 또 말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이 못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이 꼭 알려 주셔아 알아듣지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안하면 모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 주셔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거룩과 경건의 준비는 그 준비 차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실력이 차이 있어 차이 있다.
그래서 거룩과 경건은 그 차이 있다 하는 이 점을 여러분들이 잘 깨닫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차이 있다. 거룩과 경건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 있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공연히 다른 사람 보고 안심하기 쉽습니다. ‘저 사람 뭐 저 사람 보니까 나로 말하면 문제없다’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 사람은 통과가 돼도 자기는 통과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정도는 뭘로 알 것이냐? 자기로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구별해 가지고서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 자기에게 무슨 거리낌이 있나?’ 하는 것을 거리낌 있을 것을 자꾸 연구하고 깨달아서 고칠라고 애를 쓸 때에 자기로서 깨달아지는 그 전부는 다 고쳐야 됩니다. 깨달아지는 그 전부는 다 고쳐야 됩니다.
깨달아진 걸 고치지 못하고 있으면 참 비참한 자 됩니다. 뭐 세상에서 이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세상에서도 천하고 귀한 사람이 있어 가지고 자기 천한 것을 마음에 분히 여기고 존귀한 사람을 부러워 여기는데 무궁한 세계는 영원 무궁토록 천하고 귀한 것이 변동이 없습니다. 그대로 자꾸 성장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차이가 있으니 ‘나는 어느 정도를 그라면 거룩 준비를 하며 경건 준비를 해야 되겠느냐?’ 자기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고칠라고 애를 쓰는, 고칠라고 고칠 것을 찾아 애를 쓸 때에 애써지는, 그 애써서 알아지는 그것이 자기 정도입니다.
알아지는 그것은 다 고쳐야 됩니다. 알아진 것을 다 고치고 난 다음에 더 고칠 것을 알라고 애를 써도 알아지지 안하면 그것은 자기로서는 족합니다. 그러나 알아진 그것을, 알라고 애를 쓰지 안해서 알아지지 않는 것 있고 애를 써도 알아지지 안하는 정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그날까지 죽는 날까지 자기의 정도를 모르기 때문에 고칠라고 하는 여기에 전심 전력 기울이는 일은 계속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을 위하는 이 일도 자기로서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요렇게 하면 하나님 위할까? 요것도 요래 해야 위하겠다. 조래 해야 위하겠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을 위하는 그것도 연구해 가지고서 자기로서 깨달아지는 그것이 자기 정도이기 때문에 오늘 못 깨달은 거 내일 깨달아지니까 죽는 날까지 자꾸 깨달을라고 애를 써서 이 두 가지를 깨달을라고 애를 써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거룩으로 이렇게 잘못된 것을 고칠라고 애를 써서, 잘못된 줄 알고 고치지 안한 그 하나가, 그 하나가 들어서 자기에게는 마치 잠수복을 입었는데 구멍이 뚫히면은 그리 물 들어오면 저는 죽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뭐 물 들어오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알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의 거짓부리는 용납을 안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요거는 죄다 싶으면은 망령을 부립니다. 죄다 싶으지마는서도 ‘내가 아주 눈치 있게 아주 날쌔게 회개하면 되지 뭐. 오늘 요, 오늘에 요 죄 짓고도 내가 회개하면 되지. 다음만 안 지으면 되지.’ 네가 오늘이라는 지금 현재에 회개 못 한 것은, 회개 못 하고 요 다음에 회개하겠다 하면 절대 제가 회개는 안 됩니다. 바로 ‘요 시간 내가 회개해야 되겠다.’ 그 시간 회개 못 한 것은 요 다음에 미룬 회개는 백이면 백, 만이면 만 안 된다는 거 요거 알아야 됩니다.
그 마귀란 놈의 유혹입니다. ‘내가 지금은 이거 회개 못 해도 요다음에 회개하면 안 되느냐?’ 네가 네, 마귀의 복술에 제가 꼬여서 멸망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회개해야 될 것을 남겨 둔 그게 들어서 자기의 전체를 멸망을 시켜서 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서 뭐 불심판에 닥치게 되면 제가 무슨 일 못 하겠습니까? 그때 그걸 이겨야 되지 이기지 안하면은 무슨 죄라도 짓습니다. 불탈 때 마귀란 놈은 와 가지고 자꾸 시험합니다. 시험하면 그때 오만 짓 다 합니다. 뭐 못 할 것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긴 자는 자꾸 이기고 또 진 자는 자꾸 집니다. 이기는 자는 자꾸 이기고, 거룩한 자는 점점 거룩하고 더러운 자는 점점 더러워진다고 했습니다.
요거 하나 기억하고, 또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우리가 이 거룩과 경건 요 두 가지만 가지고 준비됩니다. 앞으로 심판의 불로 거룩과 경건만 해하지 안하고 다른 것은 다 멸망시킵니다. 그 불이 무슨 불인데? 하나님이 ‘없애라’ 하나님이 ‘하지 말아라' 예를 들면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있는 것은 이 불이 태워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다 없애버린 자는 이 불이 태우지 못합니다. 이 불이 상관이 없습니다.
또 이 불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거는 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안하는 것은 뭐 왕이라도, 위하지 안한 왕이라도, 위하지 안한 장관이라도, 위하지 안한 박사라도, 위하지 안한 학자라도, 위하지 안한 재벌가라도, 위하지 안한 미인이라도, 위하지 안한 미남이라도, 위하지 안한 어린아이라도 그만 하나님을 위하지 안한 그것은 전멸시켜 버립니다.
이라면 ‘어린 것들이 어찌, 위하지 못하지 않겠나?’ 아니오. 제가 보건대로는 오늘이라도 우리 서부교회 만일 이 불심판이 내린다면은 일학년이 제일 이 불심판에 통과해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님 만날 사람들이 유치반에 제일 많을 것이 다 그렇게 제가 보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진실로 믿습니다. 주님 위하는 거 외에 딴게 없어. 주님 위하는 것만 속에 가득 차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이든지 틀렸다고 알면은 즉시 고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제일 학자들, 제일 세상에 똑똑한 자들, 이 세상 모든 이 더러운 죄악에 많이 시달린 이 나이 많은 사람들 더럽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아주 더럽소. 뭐 이중 삼중 십중도 더 가지고 있고 속에 더럽고 고약한 죄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거 다 회개 안 하면 다 타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노아 홍수 때에 선언하시고 난 다음에 멸하실 때에 긍휼히 여기지 안했습니다. 괘씸히 여기고 물에서 다 빠져 죽을 때에 호독거리면서 뭐 ‘하나님’ 부르짖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눈 지끈 감고 다 퍼벌거리면서 다 뒈지는 것을 꼬시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말씀대로 방주 예비하라 할 때 방주 예비한 그것만 그 물이 침몰하지 못했지 다른 방주도 뭐 그거보다 큰 배도 많이 있었습니다. 큰 배 많이 있어도 소용 없어.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대로 모여진 방주라야 돼.
지금은 하나님께서 거룩과 경건, 모든 성경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자꾸 준비하도록 하는 것인데 거룩과 경건이 아닌 것은 다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 거룩과 경건을 우리가 준비한다고 해도 이거는 참 대단히 뚜렷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모르면 준비하지 못합니다. 다 자기대로는 양심에 가책되는 거 다 회개했다, 마음에 회개했다, 또 나도 주를 위한다. 다 자기로서는 스스로 만족을 하고 다 이제는 완전히 만점이 됐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얼마든지 속을 수 있도록 마귀 요놈이 자꾸 그렇게 꼬웁니다.
꼬우는데, 그래서 오전에 이 거룩과 경건이 준비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그 준비되고 안 된 것은 그 결과를 봐야 아는데 준비되고 안 된 것을 우리가 뭣을 무슨 표시판을 가지고서 알 수 있느냐? 거룩과 경건이 준비됐는지 안 됐는지 하는 것은 무슨 표시를 가지고서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오전 내 공부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 준비됐는지 안 됐는지 그 표시는 몇 가지를 보아서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녜, 손가락으로 다 올려서, 둘입니다.
둘로 올렸으면 됐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원하고 사모하고 고대하는 것, 원하고 사모하고 고대하는 것.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머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눈물 머금습니까? 눈물 머금는 이유가 뭐이겠소? 거룩한 행실, 모든 데에서 구별하는 거룩한 행실을 하면 세상에서는 섧습니다. 알겠습니까? 거룩한 행실 하면 세상에는 쓸쓸하고 ‘빈들판에서’ 그말 했습니다. 다 신앙 생활이라 말이오. ‘빈들판에서’ 다 쓸쓸하고 참 빈들판입니다.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 맞이하여 불탈 때에 불타지 안하고 주님 앞에 가책이 없고 하나님 말씀에 가책이 없어야 그날에 이 불심판을 다 면하게 되지 가책 있는 걸 두고서 회개하지 안하고 남겨 둔, 회개에 남겨 둔 그것이 구멍이 돼 가지고 그리 와서 멸망받는다. 잠수복에 구멍이 있으면은 물 들어와서 죽는 거와 마찬가지로 멸망받는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거리낀 것을,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나, 모든 자기가 이 사회에 대해서나, 가족에 대해서나, 친구에 대해서나, 물질적으로나 모든 이런 면에 대해서 깨끗하게 회개할라고 하니까 세상도 회개하는 사람을 볼 때에 ‘저거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성이 없다. 인간성이 없다.
저는 냉정한 인간이다. 아주 무정한 인간이다. 잔인한 인간이다.’ 그들은 이 회개하는 사람을 ‘잔인한 사람이라, 무정한 사람이라, 냉정한 사람이라,’ 이것 저것 돌보지 않는다고.
왜? 꺼루터부리한 인간적인 이 더러운 죄악에 타협성이 없이 깨끗이 회개할라 하니까 그들도 찹다고 징그럽다고 싫어하고 또 이 회개하는 사람도 세상에 대해서 회개하니까 세상이 다 마다고 자꾸 설설 돌려서 돌려버리요. 만일 저거끼리 앉아서 뛰고 굴리고 놀다가도 이 사람이 들어가면 그만 찬물 찍어 찌뜨리는 것처럼 그런 냉냉히 쌀쌀히 그만 차가워져 버린다 말이오.
이러니까, 뭣 때문에? 그 세상에서 너무, 거룩한 행실에 준비가 됐다 할 때에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이렇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땅에 속한 데에는 그 쓸쓸하고 외로우니까 그저 밤낮으로 주님밖에는 고대함이 없어. 그러니까 그 눈물은 세상이 쓸쓸하고 다 공허하고 주님밖에 바라볼 자는 없고 하니까 주님을 바라보니 눈물 나오고 세상이 쓸쓸하고 허무하니 외로우니 슬퍼서 눈물 나오고 이래서 눈물 머금는 걸 말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하는 그 말은 곧 이 세상이 쓸쓸한 빈들판이 돼.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자기가 죄를 상관치 아니하고 이렇게 살라 하면 친구도 많고 마구 들씬들씬 좋은데 이렇게 말씀대로 살라 하면 아무리 내가 그 사람에게 친절히 해도 친구가 떠나갑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아무리 수고를 하고 봉사를 할라 해도 죄를 용납지 안하고 죄를 타협지 안하면은 죄인과는 벌어집니다. 죄를 타협지 안하면 죄인과 벌어지요.
아무리 저를 좋아서 막 이 쌓아도 내가 죄를 짓지 안할라 하면 그 사람하고 당장 딱 벌어집니다. 이래 가지고 죄를 짓지 안하면 칼을 가지고 달려 듭니다. ‘죄 안 지으면 칼로 찔러 죽인다’ 이래 가지고 그 죄를 짓지 안할라 하다가 칼에 맞아 죽는 사람들이 많고, 죄를 짓지 안할라 하다가서 그 원수된 사람 많고 다 이렇게, 거룩한 행실 준비가 쉬운 거 아닙니다.
자꾸 이렇게 준비를 거룩한 행실로 준비를 하니까, 준비하니까 자기가 마음은 자꾸 주님에게로 가 있게 되고 세상과는 정이 떨어지고 그럴 수밖에 더 있겠소? 주님 싫어하는 거 다 정리하고 세상이 좋아하는 거 다 정리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거 정리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것이 세상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싫어하는 것이 세상이 좋아하는 죄입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세상 간부가 좋아하는 죄입니다.
이러니까 그 죄를 정리할라 하니까 세상은 나를 마다고 쓸쓸해지지, 또 주님은 기뻐하시도록 주님에게 싫어하는 걸 다 정리하니까 주님은 좋아하시지, 주님이 싫어하는 것을 정리하니까 주님은 좋아하시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걸 정리하니까 세상은 싫어합니다. 세상은 그걸 좋아하거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세상은 좋아하거든. 주님이 싫어하는 죄를 세상은 좋아하거든.
이렇게 되면 거룩한 행실의 준비가 자꾸 돼 가면은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은 주님에게 가서 있게 되고 세상에는 정이 떨어집니다. 세상에는 정이 떨어지고 세상에는 재미가 없고 세상에는 동무가 없고 세상에서는 외로와지고 주님밖에는 가까와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거룩한 행실. 이리 거룩한 행실 하면은 모두 다 이 세상에서 아무 정든 자 없으니, 정든 자가 없으니까 어서, 일편단심 준비한 것이 주님 만날 준비했으니까 ‘어서 주님이 왔으면 좋겠다.’ 주님이 기달펴진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기달펴지는 건 필연한 일이오. 우리가 이 세상 일로 그런 거 많이 보지 안해요? 오전에는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또 경건은 주를 위하는 준비입니다. 주를 위하는 거, 주를 섬기는 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 주님만 위하는 거, 주님만 중심하는 거. 이라니까 온 세상은 내가 접촉하는 사람마다, 접촉하는 사건마다, 접촉하는 사회마다 전부 저거 중심에 따라오랍니다. 그렇지 안해요? 저거 중심에 다 따라오랍니다. 다 저거 중심에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거 참 그 중심 하는데 내가 희생할라 하니까 그 중심이면 좋겠는데 그 중심할라 하니까 주님 중심 안 되고 주님 중심할라 하니까 그 중심 안 되고 이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저거와 한 덩어리 돼서 살자고 하는 이것을 하나님 때문에 주님 때문에 떼다 보니까 이거 기가 차고 눈물이 나오고 참 기가 찬다 말이오.
기가 차나 자꾸 떼고 주님 중심으로 이라다 보니까 처음에는 서로 떨어질 때 울고 불고 싫다 하지마는 자꾸 심하게 하루 이틀, 일 년, 한 달 두 달 이래 살다 보니까 그 사람들 하고는 자연히 정이 떨어지고 그 사람들과 나와는 그만 이래 벌어지게 돼 버리고 아무리 내가 붙을라 해도 그 사람들이 주님 중심으로 붙을라 해 가지고는 싫어한다 말이오. 주님 중심으로 붙으면 저거가 다 회가 절단나 버리고 모임이 절단나 버리고 단체가 절단나 버리기 때문에 싫어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주님 중심으로 하니 그 사람들과 자연히 멀어지고 자연히 멀어지니까 여게는 정이 떨어지니까 내가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고 나를 좋아하고 환영하는 주님 한 분밖에 없으니까 자연히 주님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그말이오.
이래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가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은 두 가지, 하나는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아이고, 오면 어짤꼬?’ 싶은 게 아니라 `구름타고 어서 와서 왔으면 좋겠다’ 왜? 너무 쓸쓸하고 너무 괴롭기 때문에, 너무 마찰이 심하기 때문에, 너무 외롭기 때문에.
너무 모두 마찰이 심하니까 ‘어서 주님 오시면 좋겠다.’' 주님 오시는 것이 기다려진다 말이요, 기달펴져.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봐.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어서 나타났으면 좋겠다’ 싶은 그 마음, ‘어서 주님이 재림하셨으면 좋겠다’ 그것은, 재림하시면 좋겠다 싶은 그것은 내가 거룩한 행실에서만 그게 되어지는 것이지 거룩한 행실 외에 딴 것으로 안 됩니다. 또 경건한 행실로만 되어지지 경건 생활 아닌 데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라고 또 하나는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는 거. 그러면 사모도 주님이 오실 그것만 장 생각해져. 주님 오실 그것만 생각해져. 간절함도 거게 있어.
그렇지 않겠소? 언제 춘향전을 보니까 거기 그렇대요. 그 춘향전에 지금 춘향이가 옥에 갇혀 가지고서 고문과 고형을 당하고 있는데 자기 남편 그 이도령이 오면은 그런 것 다 해결하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이 고문과 고형이 심하고 저거들이 저거하고 한덩어리가 안 된다고, 저거하고 한덩어리가 안 된다고서 막 고문과 고형을 하고 하는 데도 이도령을 바라보면서 그 수절을 지키고 이랬으니까 모진 고초를 당할수록이 자꾸 이도령은 더 사모되고 그 세상은 쓸쓸해서 있기가 싫다 그말이오. 그런 거나 그게 꼭 같애요.
이러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이렇게 준비하고 보니 자연히 어서 주님 오시기가 고대고 어서 오시면 좋겠다 싶으고, 또 항상 마음은 거게 가 있어.
마음은 항상 사모와 간절이 거게 있어. 사모와 간절이 거게 있고 주님의 재림만 고대해져요. 이것이 불심판을 면하는 준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실지로 해야 되는데, 우리가 실제로 해야 되는데 주님이 뭐 구름타고 오신다 하면은 다 모두 두려워 떨려서 겁이 나고 ‘아이고, 안 왔으면 좋겠다.’ 싶은, `아이구,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큰일 나겠다. 야 불타 가지고 이 전체가 불타면 어찌 되겠느냐? 전체가 불타면 어찌 되겠느냐?’ 우리가 주님 만나서 구원 얻는 것은 우리가 무슨 준비를 단단히 해 그런 게 아니고 주님이 다 준비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 좋아하고 주님이 나 좋아하면 다 돼 버렸습니다. 다 돼. 성공 다 돼 버리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이 거룩한 행실, 그저 달리 하지 말고 ‘내가 뭐 상급 받겠다 뭐 받겠다’ 그런 걸 가지고서 지금은 할 때가 지나갔어요. 늦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이 불심판으로 멸망받을 터이니까 불심판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내가 만날 때에 거리낄 게 뭐이냐? 불심판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 앞에 거리낄 거 뭐이냐? 거리낄 거 고것을 찾아서 고치기 위해서 ‘아이구, 이게 거리꼈나? 요거 고치자.’ 불심판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데에 거리낄 것이 뭐이냐 요 거리낄 걸 하나씩 둘씩을 회개를 해 봐요.
그냥 ‘내가 의인되기 위해 회개한다’ 그리 회개하지 말고, `내가 또 뭐 상급을 받기 위해서 회개한다’ 그리 하지 말고, ‘내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회개한다’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병낫기 위해서 회개한다' 그렇게 하지 말고 꼭 요 회개는 요렇게 해요.
‘주님이 구름타고 벌써 불심판을 가지고 오실 터인데 불심판 가지고 오실 때에 그때에 주님 만나는 데에 무엇이 거리껴 가지고서 나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될 터인데 무슨 한 토막을 내가 회개하지 안해 가지고 그 구멍으로 원수의 화살이 들어와 가지고 내가 찔려 죽을까? 이러니까 내가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데에 내가 거리낄 것이 뭐이냐?’ 거리낄 거 그것을 회개할 그 생각을 가지고서 하나씩 회개를 해 봐요.
고거 하나 회개하면 여러분들이 경험이 나오고 체험이 나옵니다. 그거 하나 회개하면, 반드시 고거 하나 회개하면 세상과 멀어집니다. 세상과 멀어집니다.
고거 하나 회개하면 세상과 멀어진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멀리 해 그런 게 아니고 세상이 나를 마다 한다 말이오. 멀어지고 주님과 가까와집니다.
또 하나 회개하면 세상에서는 점점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세상이 광야가 됩니다. 세상이 빈들판이 됩니다. 아무 무의 무탁의 의지할 곳이 없는 쓸쓸한 빈들판이 됩니다.
자꾸 회개할 거, 거리낀 걸 회개할수록 세상은 쓸쓸하고 외롭고 고적한 세상이 되어지고 모두 다 세상에는, 그러면 회개를 하면은 세상하고 자기하고 마찰이 많습니까 일치가 많습니까? 무엇입니까? 마찰이 많습니까 일치가 많습니까? 마찰이 많습니다. 왜? 인간의 생각은 마귀 생각이고 내가 회개해 하나님 생각대로 할라 하니까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어. 마찰이 많고, 회개 하나 할수록이 주님하고 나하고는 가까워집니다.
자꾸 주님하고 나하고는 가까워져서 정이 붙게 되고 가까워지고 세상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쓸쓸하게 돼지고 이러니까 요렇게 자꾸 회개를 해 가면은 자연히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간절히 고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고달펴져. 고대가 돼져.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고대가 된다 말이오. 기달펴져요. 기달펴지고, 또 내 생각은 항상 주님 구름타고 오실 때 거기 마음이 있어. 거게 항상 마음이 있어.
간절도 거게 있고 사모도 거게 있고 항상 거게 있어.
이렇게 준비를 하면 주님이 불심판을 가지고서, 이 우주가 불탈 때에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우리가 그때 뭐 두려워 떨려도 주님과 나와 평소에 정붙여 놓은 게 있고 내가 일생 동안 내가 주님 맞이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좋은 거 다 끊고 회개하고 이거 모두 준비했기 때문에 준비할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로해 주셨고 기뻤고 나하고 친밀해졌고 그 준비함으로 내가 좋던 세상이 멀어지고 자꾸 이래지고 주님과 가까와지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불이 와서 막 타도 주님과 가까운 그것이 나를 구원해요. 세상과 멀어졌던 그것이 내게 위로되고 주님에게 예물이 돼져요.
그래서, 우리가 이 준비를 자꾸 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은 저 위해 달라 하는데, 뭐 가면 말이오. 만일 백 명이 모인 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 전부는 단체 제 중심이오. 알겠습니까? 백 명 모인 단체는 그 단체는 전부 단체 저거 중심이오. 단체 중심이오. 단체 중심에, 하나님 중심 아니고 단체 중심에 따라갈라 하면 한 덩어리 돼 좋지마는서도 하나님 중심할라 하니까 거리끼지 안하는 것도 있지만 거리끼는 것이 있으니까 거리끼는 그것 때문에 기가 찬다 그말이오. 그것도 버리기는 싫은데.
또 백 명 단체가 분산해 가지고서 조를 나눠서 이 부 저 부 만일 열 부를, 십 부를 나눴다면, 십 부를 나눴다면은 부마다 전부 저거 중심입니다. 거게도 하나님의 중심은 맞지 안하지, 또 개인을 만나면 개인마다 저 중심이니까 개인만 해도 맞지 안하지 이러니까 자연히 세상에는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이 되고 자연히 이제, 서러우니까, 세상에서 서러우니까 주님 생각하면 눈물이 안 날 수가 없고 주님 고대하지 안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와 같다” 이랬습니다. 왜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쓸쓸하게 만드느냐? 주님하고 들어붙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쓸쓸하는 것은 주님하고 우리가 들어붙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우리가 하나씩 실천해 봅시다. 이 거룩한 행실을 하되 거룩한 행실을 하는 목적이 다르면 안 돼요. 목적을 무슨 이 세상에 별별 사이비한 목적이 많이 있는데 그런 목적으로 하지 말고 구름타고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 구름타고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내가 맞이할, 그 주님을 두렵지 안하고 기쁘고 즐거움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 거룩한 행실을 해 보자 그말이오.
요거 조고, “거룩한 행실” 요거 조거 구별해 가지고, 거룩이란 거는 구별인데 요거 조거 구별해 가지고서 ‘요거는 주님 만나는 데는 주님이 요거 섭섭해 그러는 거다.’ 주님이 섭섭해 그러는 것을 나는 좋아합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이 섭섭히 여기는 나는 좋아해요. 주님이 섭섭하게 여기는 건 마귀도 좋아해요.
주님이 섭섭해 여기는 것은 내 친구도 좋아하요. 주님이 섭섭해 여기는 것은 인간들도 좋아해요. 주님이 섭섭히 여겨.
그러니까 주님이 섭섭한 것을 회개할라 하니까 내게 대해서도 기가 차고, 옆에 이웃에 대해서도 기가 차고, 친구에 대해서도 기가 차고, 가족에 대해서도 기가 차고 기가 차, 기가 차.
이렇지마는 주님 섭섭히 여기는 것을 내가 둘 수 없어. 왜? 주님 섭섭히 여기는 것을 내가 두면은 내가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님 섭섭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은 주님이 섭섭한 걸 가지고서 가정을 다스리고 주님 섭섭한 걸 가지고서 가족들이 단합되면은 그 단합도 가정도 다 박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가정도 주님이 섭섭한 것을 다 제거를 해야 이 가정도 잘될 것이고 이 모든 게 다 잘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 섭섭한 일을 할 수가 없어. 이러니 이걸 하나씩 정리해 봐요.
이것을 하나씩 정리해서 거룩한 행실을 하면은 반드시 주님과 나와의 가까와지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는 그 모든 죄악으로 서로 친하던 것이 다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죄악으로 친하던 것을, 지금 백 목사도 과거에도 내가 몇 가지만 용납을 하고 이래 하면 나도 지금 들씬들씬 얼마든지 좋습니다. 이 교계에서 얼마든지 좋습니다. 얼마든지 좋아요.
그러나, 참으로 거룩한 행실을 할라 하면은 친구도 아무리 오늘까지 신앙 동지로서 서로 생사를 같이 하자 하는 동지라도 이제까지 내가 몰랐던 거룩한 행실을 깨달아 가지고서 ‘요거 거리낀다’ 거리끼는 걸 깨달아 가지고서 고거 하나 회개할라 하면은 그 친구하고 그 한 사건 때문에 이래 멀어져 버립니다.
이래 서로 하나가 돼 가지고 이래 하다가도 교리 하나가 맞지 안해 가지고서 그 교리 내가 양보하면은 좋을 터인데 교리 하나 양보 안 할라 함으로써 그 사람하고 그만 적이 돼 버립니다.
이러니까 거룩한 행실을 해 보면 주님의 재림의 날이 고대해지고, 주님의 재림의 날이 고대해지고, 또 세상에 대해서는 차차 차차 정이 뜨고 성글어지고, 또 하나님만을 위하는 이 모든 것을 정돈해서 갖출라고 이래 하면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은, 주님은 좋아하지마는 세상에는 섭섭해서 돌아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거룩과 경건을 준비해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되는 요게까지 준비가 되어져야 합니다! 이거 뭐 딴 길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이 이해가 돼서 하든지 못 하든지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그 느낌을 가지거든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그러면 정말로 되든지 안 되든지 나도 이제 남은 여생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써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정말 고대하고 무엇보다도 제일 고대해지고 제일 바라지고 내 마음이 다 거게 가서 기울어져 있도록 이래 한번 해 볼 욕심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요겁니다! 해 보십시오. 경험해 보면 압니다. 체험해 보면 압니다.
또 찬송 하나 합시다. 아까 찬송 몇 장이요? 36장? 녜, 36장 또 한번 해 봅시다.
요 한번 듣고 이제 한번 찬송하면 가사가 깨달아질 것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