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20:50
영생
본문 : 요 6:52-59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양식은 자기의 몸을 자체를 유지시키는 것이요, 또 자체를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 자체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유지시키고 새롭게 하고 자라게 하고 하는 것이 다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를 대속하신 제물인데 예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 죄와 내 자율대로 산 불의와 또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다 대속하시려고 화목의 제물이 되신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 사실을 자기가 점점 생각하고 또 점점 더 확신하고 또 이렇게 대속하셨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아니하고 대속의 공로를 입은 생활을 하려고 하는 이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자기의 인격의 양식으로, 마음의 양식으로, 자기의 지식의 양식으로, 자기 행위의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 그것은 영생한다" 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된다.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영원히 살지마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아니한 것은 어떤 피조물과 어떻게 연결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때가 되면 죽고 망하고 썩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그렇게 지어 갖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먹음으로 하나님과 끊어지게 됐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것이 근본 사람들에게 삐뚤어진 제일 삐뚤어진 종자요 근원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짐으로 사람들에게는 사망이 들어왔고 인간들이 아무리 반대를 하고 어떻게 한다고 해도 부인한다고 해도 이 끊어짐으로 죽은 이 죽음을 받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신론자 저희들이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내나 이 인류의 대표자인 첫 아담이 범죄함을 인해서 그 정죄에 모든 사람은 다 정죄를 받았음으로 같은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해도 하나님과 끊어진 자는 죽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존하시는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이요 하나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영계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이 물질계 우주는 발등상 같은 외부의 것이 되고 또 영계는 그 속에 알맹이와 같이 그렇게 되어 있는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안에 들어 있으면 퍼뜩 생각해서 그릇과 같이 겉에 있는 그릇은 크고 안에 있는 그릇은 작다 이렇게 조부라운 이런 물리로만 생각 하지마는 영계는 무한히 크고 물질계는 그것은 유한한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보존된 것은 지옥과 하늘나라인데 지옥은 영계에 속한 것도 아니요 물질계에도 속한 것도 아니요 영계와 물질계 이 외에 하나님의 은혜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그 나라가 지옥입니다.
거기에는 고난이 세세토록 갈수록 고난이 심하나 또 죽지는 않습니다.
없어지지는 않는다 말입니다. 없어지지는 아니하고 고난만 심합니다.
왜 이렇게 둘을 하나님이 영원히 보존하시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것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은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영원히 보존시켜 피조물로 하나님과 자기에 대한 지식이 충만케 하려 함이요, 또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이렇게 생명과 평강이 넘치고, 또 연결이 되면 어디까지 연결이 되느냐? 하나님은 머리되고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몸과 지체, 한 몸에 머리와 몸과 같이 이렇게 하나님과 피조물이 연결되면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이것을 영원히 보여서 하나님과 연결은 생명과 평강이요 권능이요 하나님과 끊어지면 그는 영원한 사망이요 고통이라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둬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타락을 먼저 주신 것은 하나님과 끊어지면 어떻다는 이 기초 지식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한 한 방편이었습니다. 이 지식을 우리에게 알리는 학비라 할까 학자라 할까, 비유컨대, 그리하면 그 학비는 얼마가 들었느냐? 하나님이, 창조주가 피조물되어 오셔 가지고 이렇게 대속의 공로, 영원히 중보자로 대속하시는 이 일이 아니면 살릴 수 없는 그런 큰 희생을 자원하셔서 우리에게 지식과 모든 관계가 영원히 온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면 살고 더 이 맺어짐이 견고해지면 우리는 더 견고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비유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무엇으로 비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것을 말하면 그 추위로 말미암아 차가운 것으로 언 얼음은 차가움을 떠나면 녹아지는 것이 그것이 필연한 일입니다. 또 더운 불로나 무슨 열도로 인해서 생생한 차가운 것이 뜨거워졌으면 그것이 불에서 나오면 또 식어지는 것입니다.
불에 들어가면 뜨거워지고 오랫동안 불에 있으면 불과 꼭 같은 열도를 가지는 것이고, 차가운 것도 그 뜨뜻한 물이 차가운 것과 오래 있으면 나중에는 얼고 그 차가운 도수와 꼭 같은 도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상대방에게 동화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어떻게 지으셨느냐? 영원히 독존자, 자존자, 독립자로 이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았고 어딘가 속해서 살도록 했고, 또 저보다 큰 것에게 피동되어서 살도록 지으셨고, 다른 것의 인도와 보호와 은혜를 받아 무엇을 받아 가지고 살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에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 아닌 다른 것에게 받아 가지고 살지 제것만 가지고 살지 못하도록, 또 다른 것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움직여야 되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도록, 또 다른 것으로 인해서 그것이 보존되고 존재되지 저 혼자 독존하도록 이렇게 짓지를 아니했습터다.
그런고로 사람은 찰나도 저 혼자 움직임도 없고, 또 저 혼자의 힘으로 보존되는 일도 없고, 또 저 혼자의 것으로 제 자본 가지고 제가 사는 것도 없습니다. 얻지 않고 살면 차차 차차 쇠해집니다. 점점 줄어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이 없으면 망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도 영도 다 하나님과 연결이 돼야 되는고로 원죄로 죽은 우리 영을 하나님이신 성령의 감화와 또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 이 진리와 연결이 되어 죽은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래서 성령과 진리로 다시 살아났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살아났다" 물은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진리를 타고 들어가서 성령과 접선돼 가지고 살아난 것이 우리 영입니다.
영은 이렇게 살아났지 마는 우리의 마음과 이 몸은 연결이 완전히 되어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그 마음이나 몸이나 그 안에 있는 기능이 연결된 대로는 완전히 연결됐기 때문에 영원히 변동이 없습니다.
그대로에 연결로 더하지 아니하고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은 완전히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피공로와 연결이 됐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연결로 연결이 됐습니다. 또 우리 영 마음 몸이 법적으로는 완전히 연결이 됐습니다. 법적으로는 완전히 연결이 됐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나 몸이나 이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을 벌써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법적으로는 연결이 됐기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하고 정죄할 법이 없습니다. 로마인서 8장 1절 이하에 보면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이 몸이 하나님이신 성령, 성령이신 하나님, 이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이 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끊어진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연결된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한 마음의 활동 그 마음의 기능이나 또 몸의 기능이나 그때에 성령과 진리와 예수님의 피의 공로에 연결이 돼 가지고 움직인 그 심신의 기능은 그는 그 움직임으로 현실을 통과했기 때문에 다시 두 번 시험은 없습니다. 단번뿐인 것입니다. 이 단번을 연결로 통과했으면 영생이고 끊어짐으로 통과했으면 그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또 그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살아 있으면 그 다음 시간에 살 심신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이 현실에서는 살아났을지라도 그 다음 현실에 심신의 기능이 이 셋과 관계를 끊고 다른 사망에 속한 악령과 악성과 악습 이 셋으로 말미암아 연결해서 현실을 통과했으면 그것은 영원히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았다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기 행동적으로, 이 실지의 심신의 실제적인데, 이 심신도 법으로는 받았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아니하고 또 주격적으로는 그 영이 다 살아났지마는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영과 일치가 아니고 영과 그 단일체가 아니고 영과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피공로와 이 셋과 우리 마음이 연결됐을 때는 그때는 영생입니다.
전능자에 속했고, 전지자에 속했고, 완전자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음으로 부인하면 벌써 마음으로는 여기에서 끊어졌습니다.
끊어졌으면 사망입니다. 또 자기 행동으로 부인해서 달리 행동하면 이 행동으로는 끊어졌습니다. 잇기고 끊어지는 여기에서 살고 죽는 이것이 결정됩니다.
마치 공중에 매달아 놓은 물건이 줄이 끊어지면 땅에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끊어지면 사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줄로 매달아 놓은 그 줄이 실하면 더 견고히 매여지겠습니다.
우리는 마치 전기불 전구와 같이, 전구, 전기 전구와 같은 것인데 이것이 전기에 연결이 되면 불이 오고, 가는 선으로 연결이 되면 불이 희미하고, 튼튼한 선으로 연결이 되면 그 불이 밝고, 몇 시간을 장기간 써놨다가도 그 선에서 끊어지면 빛은 하나도 없이 새카매지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되면 우리가 세상에서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이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을 때에 목적하신 그대로의 참 만물의 영장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즉시 빛이 없습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인간 사상도 정신도 행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사람의 옳은 마음도 옳은 행동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잇기면 또 있습니다. 스위치를 끄면 깜깜했다가 끼우면 또 즉시 밝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이 즉시 될 수 있고 즉시 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동적으로, 자기가 어떤 현실을 만났든지 그 현실에 먼저 우리는 진리,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문서계시 진리, 진리와 연결이 됩니다. 진리를 생각합니다. 진리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고 하니 진리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공로와 연결을 시키고 또 진리는 하나님과 연결을 시킵니다.
"우리에게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니" 하는 증거한다 말은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말이요 또 우리에게 그 화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르는 것을 증거를 하면 그 증거를 받는 사람들은 증거하는 그 증거 그대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증거라 말은 우리를 그 화시킨다 말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말은 예수님을 그들에게 알려 가지고 예수님화 시킨다 그말입니다. 예수님화 시킨다.
"성령과 물과 피가 우리에게 증거한다" 그말은 이 셋은 하나인데 이 셋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을 이 물, 이 진리가 우리에게 알려 가지고 예수님의 퍼와 연결을 시키고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서 우리를 그 화되도록, 예수님의 공로화, 사죄의 공로로써 사죄의 것이 돼 버려서 사죄받은, 사죄받은 것이 되고 칭의 받아 의로운 것이 되어지고, 하나님과 화평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고 이럼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지는 이 연결을 가지도록 하는 이 역사가 있다. "성령과 물과 피가 우리에게 증거한다 이 셋은 하나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진리와 하나가 되면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가 되고, 진리와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신 성령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왜 세상에서 이렇게 천물이 되어지느냐? 왜 천물이 되어지느냐?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그것조차도 왜 천해지느냐? 왜 미국 나라나 저런 예수 믿는 나라가 점점 공산주의자들에게 점령을 당해서 이렇게 되어지느냐? 디것은 이 셋과 연결이 안 되고 하나님과 연결 안 돼서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가지지 아니하고 이 관계가 바로 맺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맺어진 자가 행동할 수 있는 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그 법칙대로 피조물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그것은 옳습니다. 옳지마는 샘에 생수가 나지 않으면 아무리 큰 물이 많은 물이라도 퍼내면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수구멍에서 생수가 자꾸 나오면, 물이 풍풍 솟아나오면 암만 퍼 써도 그것은 물이 마르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수요, 지킬 것 중에 더욱 지킬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생수의 근원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진장의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이 은혜가 내가 주는 것보다 점점 더 많아지니까 많이 줄수록이 점점 많아지고 더 커지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보급선이 끊어져 가지고 자꾸 주기만 하니까 결국은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고 그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사랑하고 축복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고 그와 같이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무한정으로 주실 터이니까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고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연결 가지고 그렇게 하란 말이오. 나무 가지가 원둥치에 붙어 가지고 곁가지에 자꾸 영양을 줄수록 붙은 대목가지는 점점 커집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원둥치에 붙지 않으면 곁가지에 줄 수도 없을 뿐 아니요 또 원둥치에 불었다 할지라도 그 곁가지에 뭘 자꾸 주지 않고 새 움이 나지 않으면 원가지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원가지가 둥치에 붙어야 그 다음 가지에게 얼마든지 줄게 있고 거기 끊어지면 못 주고 다 말라버립니다.
또 그 가지가 자꾸 곁가지가 나야 이 가지가 커지지 곁가지를 다 잘라버리고 아무데도 줄 데가 없으면 그 가지는 1년 돼도 안 크고, 2년 돼도 안 크고, 어떤 나무는 10년 돼도 안 크고 죽지도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또 어떤 가지는 대개는 안 주면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다 자연계시인데 성령과, 물은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과 진리와 피는 하나라. 진리와 하나가 되면 자연히 그 진리는 피와 우리와 하나되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되면 피와는 필연적으로 하나됐습니다. 진리로 인해서 피와 하나됐으면 하나님과는 필연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셋은 하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이 법칙을 성경 말씀에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 법칙대로 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우리가 입어서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이 되고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이 되면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진리는 우리를 피공로와 연결시키고 피공로는 하나님과 연결을 시킵니다.
자기가 아무리 진리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 진리가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시킨 그 연결을 가지지 않았으면 그 진리대로 지키는 것은 제가 자기중심으로 지키기 때문에 진리대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악입니다.
진리는 첫째로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의 것이다. 너는 주의 것이 되었으니, 네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 되었으니 주의 것이 되었으면 너는 죄 없는 것이다 의로운 것이다. 하나님과 화친의 자녀이다.' 이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의 이 공로를 입었으면 벌써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과 연결을 가진 자입니다. 이렇게 연결을 가졌으면 이는 전능에 연결을 가졌고, 전지에 연결을 가졌고, 완전에 연결을 가졌고, 주권자 주재자에게 연결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저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지배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떤 현실에서 살든지 이 셋으로 인해서 연결이 되면 그 현실은 내것이 되고 또 그것들도 나로 인해서 영원히 새롭게 새로와지는, 만물이 탄식하는 탄식이 끝나고 새로와지는 구원을 받게 되고, 내가 이 셋과 연결을 끊고 그것과 연결이 되면 우리는 그것과 함께 죽는 것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서 마음이 이 진리와 연결이 돼야 됩니다.
그걸 가리켜서 '이 시간에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찾는 그 뜻을 찾는 그것은 예수님의 피공로와 연결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논리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현실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어떻게 구원하신 그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마음의 양식이오. 예수님의 공로를 생각하면 마음이 힘을 얻는데 어떤 힘으로 얻느냐? 죄짓지 않는 힘을 얻고, 의롭게 하는 힘을 얻고, 하나님과 화친한 힘을 얻습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찾아서 행하게 되면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더 튼튼해집니다. 무죄함이 튼튼하고 의로움이 튼튼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이 더 튼튼해집니다. 그러면 이것이 영감으로 튼튼해진 것이요 하나님과 튼튼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무한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그 연결이기 때문에 자기를 통해서 무한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나타난 무한의 역사도 그것도 무한한 역사고 어떤 평범한 평신도를 통해서 진리와 영감대로 행동한 그 행동이 이루어져서 영생된 그것도 다니엘이 살아난 그 중량이나 꼭 같은 중량입니다. 다 영생이요 다 전능한 행위요 전지한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이 시간에 하나님의, 자기에게 하나님이 말씀한 뜻이 무엇이냐? 이 뜻은 자기에게 이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명중하는 그 뜻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왔느냐?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왔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온 것이 내 현실에 내게 대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요, 명령하는 것이요,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이것은 우리에게 못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입니다. 중보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 역사 있는데 하나는 멸망시키는 심판 역사 있고, 정죄해서 멸망시키는 심판 역사가 있고, 하나는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 되고 공로가 없는 데에는 정죄 심판, 정죄 멸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진리로 나타납니다. 이 현실에 '네가 말을 해라 말하지 말아라.
네가 기도한다고 대답해라. 기도 안 한다고 대답하지 말아라. 네가 안다고 해라.
모른다고 해라. 네가 행동 해라. 네 마음에 소원을 해라. 네 마음에 버리라.
이것은 네 마음에 버리라. 네 현실 이 현실은, 그거는 네 마음에 버리라. 이 현실은 네가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쉽게 말하면 '해라. 하지 말아라' 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뜻인데 이 뜻은 어디서 왔느냐? 예수님의 피공로를 통해서 왔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공로로 사죄받았기 때문에 왔고, 칭의받았기 때문에 왔고, 화친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요구하시고 교훈하시는 이 교훈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이것이 우리에게 못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왔는데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면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영생시키는 영생 역사요, 그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구원하는 그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 원수됐을 때는 우리에게 오지 못했는데 은총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가지고 나에게 왔기 때문에 내 현실에서 내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저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내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내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이 뜻은 이것은 사죄의 해결을 지운 자에게, 사죄의 권위를 가지고, 칭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지극 히 큰 능력의 역사가 나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내 현실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명중한 이것은 고거 하나님의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뜻은 곧 진리요, 그 뜻온 예수님의 피요, 그 진리는 성령이요,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우리를 구원하는 역사를 하는데, 증거라 하는 건 구원 역사라 말입니다. 땅끝까자 증거한다 그말은 구원 역사를 편다 그말이오. 구원 역사인데 이 셋은 셋이 아니라 하나라 그말이오. 하나라.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한한 능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그때 똘똘 뭉쳐 가지고, 매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이것이 있었지마는 그것이 똘똘 뭉쳐서 마지막에 지금 승리를 이루는, 최고의 승리를 이루게 되는 그 장소와 곳온 다니엘이 그때 당한 현실이요, 그때에 다니엘에게 하나님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진리로 이렇게 나타난 것,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뜻 이 진리로 나타난 것은 그때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리오 왕이 '기도 안 한다고 해라. 네가 그러면 사자구덩이 들어가 죽지 않느냐? 내가 이놈들에게 속았다.' 자꾸 사정을 하면서 '기도 안 한다고 대답만 해라.' 하는 그것이 다니엘에게는 영원한 사망, 하나님과 끊어지는 그것이오. 그럴 때에 '나는 기도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하는 그 말은 그것이 벌써 예수님의 공로를, 하나님을, 이 진리를, 이 셋이 하나되어 있는 이 하나에게 자기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그 대답하는 것은 몸의 행동이요 그 마음 가진 것은 마음의 행동인데 '나는 기도 안 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 기도하라 했기 때문에 기도는 나는 해야 된다.' 기도를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작정한 것이 마음의 연결이요 자기가 말로써 '나는 기도 안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야 됩니다.' 하는 것이 몸의 연결입니다.
이게 연결이 됐을 때에 사람 보기에는 내나 그전 다니엘과 꼭 같은 다니엘이지마는 연결된 그 다니엘을 사자구덩이에 넣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연결된 연결은 사자보다 강하고 사자를 지은 능력이요 사자를 주권하고 있는 모든 이 공간과 활동과 생명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 이 능력자와 연결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삼키지를 못했고,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때에 그 자리에서 '나는 절할 수 없습니다.' 하는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로와 소개하는 진리와 연결돼서 그 진리를 벌써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로를 똘똘 뭉쳐 가지고 와 가지고 지금 나타난 그 진리입니다. 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진리 하나뿐 아니라 피와 한덩어리 된 것이요 또 하나님과 한덩어리 되어 있는 그것이기 때문에 막바로 그게 전능자요, 전지자요, 완전자요, 절대자요, 주권자입니다.
내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그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왔기 때문에 그와 연결되면 하나님과 연결됐고 그와 연결된 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연결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된 그 촛점, 그 촛점, 그 절정, 요 냉냉 끄트머리, 요 발단, 냉냉 끄트머리 발단, 여기에와 연결 됐기 때문에 그 연결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됐지마는 그 연결은 예수님의 피공로 대속의 공로와 연결이 됐고 하나님과 연결이 됐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연결됐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다, 창조주와 연결됐기 때문에 그거는 피조물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연결된 자는 어떤 피조물도 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 생각하기를 '다니엘은 그는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가 간 사람인데 예수님의 퍼공로를 말하는 것은 그것은 해당치 않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구약 시대에 짐승의 피로 속량을 받으라는 것은 짐승의 피가 속량하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퍼공로를 앞에다 두고 소망을 하면서 그 행사를 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이 다 짐승의 피로 대속을 받은 것도 예수님의 피공로로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을 통해서 피 공로로 언제든지 사죄함을 받은 그것을 사죄 칭의 하나님과 화친의 이 대속을 받은 것을 믿은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인해서 그것이 완전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에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약속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말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선포해 놓은 선지자들의 예언한 모든 대속을 완성했다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현실에서 하나님과 그 뜻을 생각하는 이것이 모든 걸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뜻을 우리가 생각하려고 할 때에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생각할 권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먹어라, "피를 먹어라" 그러면 우리에게 힘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생각해서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것만치, 예수님의 것이 된 것만치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그러고 너희들이 이 세대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찾으려고 하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면' 예수님의 대속을 입으라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내가 밝아지고 또 진리에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공로가 더 나에게 더 입어지게 되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 연결이 더 되어지고, 이 셋은 하나입니다. 어느 모때기든지 접촉 해 가지고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막바로 예수님의 공로를 자기가 찾는 것이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 뜻대로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 구원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사망이 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것, 이북에서 지금 자꾸 이것 독을 피우고 있는 어려운 입장을 당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요패로 행하는 요 일을 빨리 빨리 해서 연성해라. 요 일을 빨리 빨리 해서 연성을 해라.
이래서 어떤 형편에 이르러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만 변동 안 하면 문제는 없다.
이 일만 변동 안 하면 문제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연습하고 숙달을 시켜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 뜻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그 뜻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잡으면 하나님도 잡았고 공로도 잡았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행했으면, 그와 나와 한덩어리가 됐으면, 그 뜻과 나와 하나됐으면 예수님의 공로와 나와 하나 됐고 하나님과 나와 하나됐기 때문에 그것이 영생입니다. 완전 승리입니다.
거기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 속에 들어갔으나 타지 않은 능력이 나왔고, 거기에서 사자구덩이 들어갔으나 찢겨 죽지 않는 그런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그때와 꼭 같습니다. 그것은 한 형식계시요. '봐라 이것 불 가운에서 안 타는 것 봐라.' 불과 같은 어떤 혹독한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이나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 되면 그는 영생이고 점점 영광스럽고 존귀해지지 천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떤 사자 같은 아주 맹수 같은 그런 맹수 같은 인간, 맹수 같은 어떤 것을 접했다 할지라도 이것만 연결이 됐을 때에는 다니엘에게 역사한 그 역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역사한 역사, 그 역사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이 그 역사 속에 네가 있고 그 역사가 너를 구원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이냐? 엘리야가 일생 동안 날뛰고 충성해도 '나밖에는 없다.' 그렇게 알았지마는 가짜입니다. 마지막에 세미한 음성 그것 듣고 난 다음에 세미한 음성으로 일생 동안을 성공했소. 이방인의 하사엘로 복수 다 했고, 예후로 복수 다 했고, 또 엘리사로 복수 다 했지 그전에는 만날 쫓겨다니고 만날 그때는 자기딴에서 의인이지 하나님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말이오.
이 세미한 음성이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우리 현실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세 가지,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 바쳐 사랑하여 순종할 것, 이것은 만능의 역사요, 이것은 영생이요, 이는 영광이요, 이는 권능이요, 이는 지혜요, 정복이요, 승리요, 이것이 믿음이라.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이 없고 더 큰 승리가 없다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소에 이 일을 자꾸 연습을 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떠들어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꼭 이 뭐 지금 아무리 세미한 음성, 불 가운데도 없었고, 바람 가운데도 없었고, 지진 가운데도, 아무리 세계를 움직이고 뭐 떠들어 쌓아도 소용 없습니다. 그런 일 닥칠 때에 승리를 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 못 하면 헛일이라 그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