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3 20:42
신년 첫 새벽
1989. 1. 1. 주새.
본문: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지난밤에 종전같이 송구영신하는 그런 예배를 보지 아니한 것은 오늘이 또 주일이라 그리 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겠다 하는, 지장되겠다 하는 그런 점에서 그랬고, 그렇게 세월에 세수하는 그 날을 정한 것은 나라마다 각각 좀 다릅니다. 양력으로 말하면 오늘이 초하루지만 또 음력으로 말하면 또 다릅니다. 각각 나라마다 모두 다릅니다. 이래서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니고 주일이 우리는 날 중에 제일 중한 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의논하다가 그만 둔 것입니다.
오늘은 89년 1월 1일 새벽인데 오늘은 초하루가 주일날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아무 때나 같지마는 우리는 더우기 새해에 새로와지는 그런 역사가 있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1절에 '유대인의 절기를 만났다' 하는 그 절기가 곧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늘입니다. 옛 것을 다 제해 버리고 새 날을 맞이하는 송구영신하는 그 절기의 날인데 그 날에 무슨 일 했는고 하니 38년 된 병자가 낫게 된 그 역사를 그날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38년이나 병들어 있던 그 모든 문제를 완전히 주님 만나 가지고 해결을 지워서 새롭게 됐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님이 계획적이라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난제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해서 새로와지는 날이라, 새로와지는 날이라 하는 것을, 묵은 것을 다 없애 버리고 새로와지는 날이라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이 춘하추동 사시 그것도 우리 구속을 이루는 데에는 뭐 그게 상관이 없지마는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정해 놓은 절기 그런 것도 이용을 해서 구원에 유익되도록 적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은 첫 날 첫 주일인데 반사 선생님들은 날이 좀 엊저녁에는 많이 어설펐는데 오늘 새벽에는 좀 많이 포근해집니다. 그러나 혹 비가 뿌리고 난 뒤에 얼었는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해서 다니면 뭐 괜찮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처음에는 두 다리로 다니다가 인제 세 다리로 다닌다는 것은 작지 짚고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네 다리로 다녀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어다니면 뭐 그만 별 상하는 일 없을 터이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 OOO조사님은 한창 때지마는 벌로 뛰어가다가 다쳐 가지고 오랫 동안 일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해서 낙상되지 않도록 잘 주의를 해서 그래 다니고, 자신이 기억을 해 봐도 하나님 말씀 설교를 듣고 이렇게 해석을 듣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봐야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경 소개하는 것이요 성경은 아닙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해도 그것은 성경을 바로 직접 자기가 연결하지 못해서 직접 은혜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 자지고 온혜를 받도록 중매쟁이와 같이 소개를 하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설교보다는 성경이 낫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젊을 때든지 늙어서든지 그 속에 꼭 박혀 가지고 있는 그 성구가 있다면 그 성구는 그 사람을 기어코야 구원하고 맙니다. 그 사람이 감당 못 할 가장 흔들려서 속에 마음이 둘 데가 없고 허뭇허뭇하게 물씬물씬할 그때에 그 말씀이 깨달아져 가지고, 어려움 당하면 깨달아지기 때문에 그 사람을 구원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더 어릴 때 그런 것은 그것은 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일학교 다니다가 낙심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들어 보면 자기가 어려움 당할 때에 어릴 때 자기 기억력에다가 담아 놓은 그 성구가 그 사람에게 깨달아질 때에 그 성구를 인해서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고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고 돌아온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주일학교는 종전에는 이렇게 가르치는 그 설교하는 일에 주력을 했지마는 지금은 그보다도 본문을 외우게 하는 데에 주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좀 더 장성한 그런 방편인데 어쨌든지 반사 선생님들은 다른 해석을 하는 것보다도 이번에는 더우기 본론이 본문만 기록해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본문만 기록했기 때문에 그 본문을 어쨌든지 학생들에게 외워서 그 속에 그만 돌에다가 각하는 것 모양으로 그이 기억력에다가 딱 박아 놓으면 박혀 있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언젠가 구원합니다.
이래서 설교는 성경을 소개하는 것이 설교요, 또 성경은 성신의 감동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을 우리가 받으면 비로소 거게서부터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거게 혹 잡것이 섞여 있을 수가 있습니다. 속은 안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법도대로만 행하는데 겉어머리 법도대로 행하면서도 속에는 아주 흉한 것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는 성령의 감동은 그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신의 인친다' 성신의 인을 받는다 그 말은 성신이 '됐다 내것이다' 인정하는 것인데 아무리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해도 성령이 인정할 수 없는 그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무슨 행위라고 말합니까? 혹 누가 압니까? 그것을 무슨 행위라고 말합니까? 율법의 행위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 그것은 율법의 행위.
율법의 행위는 아무리 해도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없고 율법의 행위는 할수록이 그 사람이 교만해진다 이랬어. 껍데기로 속에 감동 안 받고 껍데기로만 행하니까 다른 사람이 모르는 줄 알고, 또 저도 자기도 속아서 '내가 이렇게 했다' 싶으지마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고, 속에 주인은 제가 돼 가지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법적으로 이래 행동하는 것이고, 걸리지 않기 위해서 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지 속에 하나님을 위하는 중심은 없다 그거요.
그런고로 반사 선생님들은 오늘 첫 날 첫 주일인데 어쨌든지 자기에게 붙여 주신 그 학생들에게 이 성경 본문 명문을 그 속에 깊이 박아서, 이것이 아무리 깊은 죄 가운데 빠지고 해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징계로 어려움을 줄 때에는 이 말씀이 자기 기억력에서 솟아나와 가지고 자기 이성에 비추어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또 자기 모든 생활을 총지배할 수 있도록 이떻게 힘을 써서 전하도록 합시다.
다른 교회에 가나 뭐 어데 가나 예수 믿는 거는 한가지인데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가까운 교회로 가라' 이랬지마는 우리에게 일단 붙여서 우리에게 나오는 그 학생들은 그 학생들을 다른 교회로 보내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래도 가르치는 데에는 다른 뭐, 여기보다 잘 가르치는 교회도 있겠지마는 일반적으로는 우리 서부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잘 가르칩니다.
이래서 그 학생들에 하나하나 대해 보면 여게는 참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영감에 근거되는 요 진짜라 할 수가 있어. 다른 것은 모두 이렇게 안 가르칩니다. 안 가르치고 성경 가르치는 것을 아이들 듣기 좋도록 한다고 동화라 이럽니다. 동화라 하는 것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아마 여게 여러분들이 그 속에 박아 줬으면 그 아이들이 뭐 노트를 보고, 또 과자나 그런 것 주는 것, 이런 상급이나 무슨 선물 주는 그런 것을 탐해서, 또 여러 가지 비디오나 그런 걸 통해 갔다 할지라도 그들이 갔다가는 반드시 '아니다' 하는 것이 생각해지고 돌아오기 쉬울 것입니다.
아무 당기는 동무들이 많으면 끌려가지 그렇지 않으면 도로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학생들을 딴데 보내는 것은 그것은 내게 맡겨 준 그 자녀를 그 모든 불량자 원수들에게 납치돼 보내는 거와 같은 것이라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좋습니다. 내 자녀를 원수에게 납치돼서 그만 유괴해 갔다, 내 자녀를 도둑해 갔다 그렇게 생각을 할 만치 강하고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래서 꼭 본문을 외우도록 하고, 오늘 아침에 이 봉독한 말씀에는 겉사람이라 또 속사람이라, 겉사람이라 속사람이라 이렇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겉사람은 무엇을 가리킨 말인고 하니 이 심신, 이 심신 이것을 가리켜서 겉사람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한다, 그러면 이 심신은 날마다 썩어져 갑니다. 뭐 제가 아무리 위생 주의를 해서 칠갑을 하고 또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껍데기가 안 늙는 것같은 그런 사람 있지마는 실은 늙었습니다. 아무리 안 늙는 그사람이라도 죽는 날짜는 그 날짜에 죽고야 말지 안 늙는다고 지나가는 거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겉사람은 날로 점점 후패해 갑니다 자꾸 늙어져 가지고 쇠해져가고 흐려져갑니다. 그러나 속은 날로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새로와진다 하는 것은 자꾸 이거는 얼마든지 새로와질 수 있습니다. 새로와지는 것은 마치 때묻은 것을 닦으면 자꾸 깨끗해지고 깨끗해지고 또 이 식물들을 보면 젖잎은 떨어지고 속에 속잎이 나오고 속잎이 나와서 그래 가지고 자꾸 자라가게 됩니다. 속사람은 새로와진다는 것은 이 사람은 늙지 않는 사람이요 죽지 않는 사람이오. 늙지 않는 사람이요 죽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점점 새로와집니다.
이래서 내가 언제 저 서울에 있는 뭐 금식기도원이라고 하는데 거게서 집회했다고 그렇게 테이프를 누가 나한테 하나 갔다 줘서 내가 들어 보니까 그때에 그 설교하는 제목이 갱신이라 그래 돼 있습디다. 갱신이라, 다시 갱(更)자 새로울 신(新) 자, '다시 새로와지자' 하는 거게 대해 가지고 그 설교를 하는데 그뭐 설교하는 것은 그것은 새로와지자 해도 외나 속에 진짜의 뜻에서는 조금 삐뚤어진 그런 것도 좀 있고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새로와지자는 그 말 한 마디라도 얼마나 그게 귀한 말인지 모릅니다. 속사람이 새로와지는 것은 우리 속사람은 무엇이 속사람인고 하니 중생된 영이 속사람이고, 또 새로와지는 것은 우리의 심신의 이 심신의 정력이, 심신의 정력이, 심신의 정력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그 기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신의 정력은 그 날 돈벌이를 했든지 싸움을 했든지 죄를 지어서 행락을 취했든지 어쨌든지 하루 지내면 그 날에 해당되는 정력은 썩어져 버립니다. 그 날 정력은 없어집니다. 그뭐 자기가 호별 방문의 전도를 해도 그 정력은 없어졌소. 또 설교를 하면서 정력을 써서 설교해도 그 정력은 없어졌습니다. 정력이 없어졌는데 그 정력이 없어질 정력인데 없어질 정력이 없어질 기능이 되기도 하고, 없어질 정력이 없어질 기능이 아니고 영원히 있을 그 기능으로서 변화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여기 그러면 정구 친다고 테니스라고 정구 치는 이것도, 이것도 이거 한 시간 치고 나면 그만치 정력이 소모됐습니다. 그 없어졌습니다.
소모됐습니다. 그러기에 그때 후패해진다 말이요, 자꾸 썩어졌다 소모됐다 말입니다.
후패해지고, 겉사람은 후패해지고 속사람은 새로와진다 하면 이 정력을 테니스 치는 걸 자꾸 이래 하니까 테니스 치는 그 정력이 변해서 기능이 됐습니다. 무슨 기능이 됐느냐? 공을 던지고 받고 하는 이 기능이 됐습니다. 그 기능이 됐으니까 이 기능이 됐지마는 그 기능은 썩는 기능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를 위해서 심은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썩어질 기능을 마련하다 말이오. '그러나 그 정력을 가지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기능을 만드는 거는 뭐이냐 하면 그 정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진리를 줬습니다. 진리대로 사는, 진리대로 사는 요것을 그 정력 가지고 살면 진리대로 사는 그 기능이, 진리대로 행하는 기능이 됐습니다. 진리대로 실행하는 기능, 또 영감대로 실행하는 기능, 사죄를 주셨기 때문에 죄를 이기는 기능, 또 의를 행하는 기능, 하나님과 동거동행하는 기능 이걸 자꾸 연습했다 말이오. 그 정력, 없어지는 정력 가지고, 없어지는 정력 가지고 이것을 연습하니까 이제 썩어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날로 새로와진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일생 동안 사는 데에, 우리가 중생되기는 진리로 중생됐고, 영감으로 중생됐고, 예수님의 피 사죄로 중생됐고, 칭의로 중생됐고, 화친으로 중생됐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는 거로 중생됐고 이랬으니까 요걸로 살면 이 기능이 자꾸 자란다 말이오. 이 기능이 자라니까 하늘나라에서는 무슨 기능이냐? 이 세계 제일 노벨상을 받았으니까 아마 나를 하늘나라 가도 이 뭣이 있고 상급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제가 거창 있을 때에 그 부자집이 홍씨라고 부자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가서 내가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를 하니까 자기는 아주 뭐 그 동리에서 왕이고, 또 자기를 다른 사람이 나쁘다 소리 안 하고 자기 딴에는 제일 의인인 줄 알고 이러기 때문에 '나는 지옥 안 갑니다. 나는 천국 갑니다.' 그렇게 담대히 말합디다.
이래서 '그러면 한번 내 물어 보겠다. 법을 가지고 요걸 행했느냐 행했느냐' 하니까 전부 죄입니다. '이떻게 전체가 죄투성인데, 하나님 법에 이렇게 성경에 이랬는데 자기는 이것도 행하지 않고 하니까 전체가 죄 뭉텅이인데 어떻게 갈 수가 있다 해? 헛되이 속았다.' 그렇게 이래 말해 가지고 그 사람이 좀 교회 나오고 하다가 그래도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는가 나중에는 낙심을 하고 말아 버렸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진리와 영감과 사죄, 칭의, 화친, 중생, 그러고 영생 이것으로써 우리가 종자를 얻었어, 종자. 그 종자를 얻었어. 종자를 얻은 그것을 가리켜서 중생이라 그렇게 말해요. 종자를 얻었어. 그래서 피와 세령과 진리로 거듭났다 이랬어. 종자를 얻었는데 우리가 이 종자를 가지고 한 시간 살면 그만치 자랍니다. 두 시간 살면 그만치 자라요.
그러면 우리 썩어지고 없어질 이 정력을 가지고 이 새사람의 생활을 하게 되면 전부 새사람, 진리의 기능, 진리대로 행하는 진리 기능이 늙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래서, 종자를, 씨를 받았는데 이 써가 이미 심어져 가지고 예수 믿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은 움이 나왔다 말이오. 움이 텄다 말이오. 움이 텄어.
그러기 때문에 '부르심을 입고 택함을 입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랬는데 사람이 중생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중생하는테 씨가 심어진 것이오. 씨가 심어졌는데 그 씨가 지금 움이 터서 나오는 것은 뭣이 움이 터 나오는 것이냐 하면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그것이 움이 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 가운데 자꾸 이렇게 이 중생된 종자가 점점 자라는 것은 새사람이 자라는 거라.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새로와진다 그 말은, 새로와진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는 그 사람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백 점짜리가 만점이라고 하면 한 점짜리 하다가 한 점짜리는 그거는, 그거는 없어지고 한 점짜리가 두 점짜리가 됐고 그 다음에 팔십 점짜리 되고 구십 점짜리 되고 백 점짜리 되고 자꾸 점점 온전함을 향하여 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 진리대로 행하는 게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그게 점점 자라서 온전해지고 온전해지고 자꾸 온전해진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 깨달음도 그 사람이 자라고 있느냐, 자라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그것을 뮐 봐서 보느냐 하면 그 사람의 그 깨달음과 영감과 그런 것을 보아서 자신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이 자꾸 점점 더 깨달아지고 더 정확히 깨달아지고 더 넓게 깨달아지고 양적으로 넓게 깊게 깨달아지고 또 질적으로 더 강하게 깨달아지고 이렇게 자꾸 그게 자꾸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진리가 내게 점점 새로와져서 과거보다 더 좋아지고 더 좋아지고 자꾸 새로와져 더 좋아진다 말이오. 이렇게 더 좋아지고 더 좋아지고 그러면 질적으로도 더 진짜가 돼져. 질적으로도 더 진짜가 돼지고 또 양적으로도 점점 범위 넓게 깊게 길게, 그 사람이 그러면 하나 죄를 말한다면 일시의 죄뿐 아니라 숨어 있는 죄, 과거 죄, 또 현재 죄 미래 죄, 또 인인 관계 죄, 사물 관계의 죄, 또 이거 뭐 자꾸 그러면 자꾸 이렇게 널리 범위 나가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죄를 보는 눈이 더 자꾸 밝아지고 이렇게 범위가 넓어지니까 과거에 몰랐던 걸 완전히 죄로 이렇게 안다 말이오.
아까 그 노인이 '나는 죄가 없어. 나는 천국 간다.' 하는 사람은 몰라 그렇다 말이오. 그러면 자꾸 예수 믿으면 자꾸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이 가르쳐 주니까 알아지고 자꾸 넓어진다 말이오. 그러기에 그 사람은 성경을 모르고 모르면 그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 한다고 하는데 그 보면 잘못된 게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자꾸 가르쳐서 목사는 자꾸 그 사람이 죄인 줄 모르는 것을 자꾸 말해 가지고 죄로 인식시키는 것이 그것이 목사가 그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고, 또 의를 모르는 것을 의, 모르는 의 아는 의도 아는 의는 굳게 세우고 새로 또 모르는 새 의를 또 발견시키고, 새로 하나님과 끊어져 있는 것을 발견시켜서 또 하나님과 새로 연결을 가지고 그 사람이 또 새사람의 생활을 모르는 것을 알게 하고 이래 가지고 자꾸 이러니까 거게다가 배우는 재미를 가지고 자꾸 새로와지는 재미를 가지면 재미있지마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 오면 재미가 없고, 죄악으로 재미있던 사람은 교회 오면 꺽어져서 풀이 푹 죽여져야 됩니다. 또 의로 재미있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자꾸 교회 와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설교를 듣다 나중에 설교 듣는 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되고 자꾸 성경을 자꾸 읽음으로써 깨 달아져서 만족이 돼지고, 또 성경 읽는 것만이 아니고 성신의 감동을 받아야 그때가 좋지,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안 되고 설교해도 안 되고 영감을 받지 아니할 때는 마음에 만족이 없어 자꾸 영감받도록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 이래 놓고 여기 말씀하시기를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돌아보는 것이라 말은 우리가 가치로 여기는 것은 말이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가치로 여기는 것은 그뭐 다른 걸 가치로 여기지 않고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 아닙니까? 세상에 속한 그것을 가치로 삼는 게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 그거, '오늘 하루 살았다. 오늘 하루 살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까짓 거 벌어봤자 '아이고 오늘 나는 헛일했다' 자기가 이 속사람의 것 이것을 수입을 했으면 '오늘은 수입했다,' 그러니까 생활 가운데 가치로 여기는 것이 보이는 그런 여겨지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거 진리대로 행한 진리의 것을 가치로 기능 그거야 보여집니까? 안 보여. 행함은 보여지지마는 속에 기능은 안 보여진다 말이오. 진리대로 행하는 그런 기능은 보이지 않아.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기에 우리가 이 일욜 하기 위해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여러 가지 좀 환난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환난의 어려움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새로와집니다. 어려움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것이 없어지고, 또 죄를 재미있게 여기던 것이 없어지고, 자기가 이 땅에 소망이 없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이든지 마지막 죽는 그 시간에, 죽는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람은 제일 새로와졌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제일 깨끗할 때는 언제 깨끗하느냐? 깨끗한 것은 마지막 숨이 깔딱깔딱하며 죽으려 할 그때가 제일 깨끗하요. 그때 무슨 무슨 돈에 욕심이 있겠소 정욕이 있겠소 명예욕이 있겠소? 그때는 '다 이거 소용 없다,' 그때는 참 없을 것과 있을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모두 다 죽을 때는 '아이고 나를 한 달만 살려 주십시오. 나를 뭐 일 년만 살려 주십시오.' 죽음이 가까와 오면 자꾸 그러고 '일 년만 살려 주십시오' 할 때는 오히려 급하지 아니할 때요. '나를 꼭 한 달만 살려 주시면 한 달 동안을 어떻게 살겠다' 하는 그때가 제일 급한 때니까 잠시 고난당하는 그때라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에게 왜 어려움을 주시느냐? 어려움 주시는 그것은 필요 없는 어려움이 아니고 세상 줄을 끊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는 것이고, 자기가 왕이 되는 그걸 끊기 위해서 어려움이 되고, 그 사람이 교만하고 하다가 죽을 병이 들면 교만 하나도 없습니다. 다 꺾어져 버리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 모두 오는 그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오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 어려움 이거 가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귀하고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어려움이 오면, 어려움이 오면 '내가 평안하니까 이 구원을 이루지 못하니 이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다.' 그때 그만 구원 이루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여 달려들면 그 어려움 줄 필요가 없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 주십니까? 어려움이 필요 없습니다. 어려움이 필요 없는데 어려움을 왜 주느냐? 이 겉사람으로 사는 이놈을 죽여서 속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속사람으로만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오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오지 않는데 그 어려움이 오는 것은 뭐 오느냐? 의를 이루는 데에도 쉽게 이를 수 있는 의가 있고 어렵게 이룰 수 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의를 이루는 그 의를 더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 어 려움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제 벌로 오는 게 아니라 말이오.
그러기에 우리에게 어려움 오는 건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뭐이냐? 죄의 벌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징계로 어려움 오는 것 있고, 한 어려움은 의의 가치를, 의를 행하는 의의 가치를 더 크도록 하기 위해서 힘들게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부터 작정하기를 어쩌든지 내가 새로와집시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도 양적으로 자꾸 넓혀서, 모르던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다 깨달아서, 나쁜 것도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달아서 고차고, 좋은 것도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아서 하게 되고 이래서 범위 넓게, 깊게 높게, 길게 이렇게 해서 자꾸 우리의 생각이 자꾸 새로와져야 우리의 생활이 새로와질 수가 있고, 우리의 이루어 놓는 구원이 새로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병만 들어도 그만 '아이구' 내놓을 그런 것은 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건강 주고 평안 주니까 이 건강과 평안 가지고 보배를 이루라고 말이요, 속사람으로 살아서 보배를 이루라 하는데 이 보배를 이루어야 되는데 마귀 그놈이 우리를 꾀워 가지고 이 건강 가지고 전부 죄 짓는 데다가 다 폭 쏟도록 그렇게 만든다 말이오.
그거야 암만 해봤자, 마귀에게 꾀여서 어떤 것은 자기 명예 욕심, 또 자기 정서 욕심, 또 자기의 모든 정욕 욕심, 더러운 음욕이나 신경 욕심 이런 것들이 아무 가치 없어. 아무 가치 없는 거, 그만 그 보배를 거기다가 쏟아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1윌 1일 오늘 아침에는 평상 남은 때에 '날로 새로와지자.'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지는 이 일이 끊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새로와져야,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자꾸 이렇게 새로와지는 이 은혜가 우리에게 계속되기를 기도하고, 또 노력하고 하면 주님이 계속해 주십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또 실행 실천해서 체험하고 경험하는 거게 대해서 이루어 갈 것, 또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말고, 부장 선생님들이나 반사 선생님들이나 보조반사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붙여 주신 이 학생들을 뭘로 깨끗하게 할 수가 없어. 하나님 말씀을 그 속에 집어넣어서 박아 놔. 박아 놓으면 그 말씀이 그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가 못 살려.
우리는 뭐 같이 한 자리 있어도 그 사람 속을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은 그 속에 들어 놓으면 그 사람 속속들이를 알아 가지고 낱낱이 통솔해서 잘 관할해서 길러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재림에 대한 것을 그 아이들에게 단단히 박아 줘야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끌어다 놓고, 1월 1일에 끌어다 놓고 이 말씀으로 속에, 하나님 말씀은 뭐라 했습니까? 좌우에 날선 검이오. 이 말씀은 들어가. 이 말씀은 전하면 그 속에 파고 들어가. 아무리 괴퍅한 놈이라 욕을 해도 말씀을 딱 전해 놓으면 그 말씀이 들어서 택한 자면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라. 칼이라 말이오. 찌르면 들어가요. 그 말씀을 내가 가르치면 그 말씀이 속에 깊이 박혀 버려요,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