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3 20:33
시험승리
1979. 10. 13. 토새
본문 :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은 변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서 성화되어 나가는 것이요 성화된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 닮아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요, 배워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요 이것이 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뒤에 따라가는 것.
믿음이라는 것은 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서 나는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 하나님같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내 자체가 믿음이요, 또 내 의사가 하나님 의사에 따라가는 것, 내 의사를 주장하고 내 의사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의사가 하나님 의사에게 복종을 해서 내 의사가 하나님의 의사를 하나님의 의사대로 내 의사가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요, 또 내 행동이 하나님이야 어찌 하시든지 내 행동대로 하던 우리가 내 행동이 내 행동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내가 인정하고 또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행동에 내 행동이 따라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래서 내 자체도 내 의사도 의사라면 욕심도 의사속에 들었습니다. 감정이나 그런 것도 다 마음의 움직임이라 말이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내 몸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그 능력의 움직임에 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그 신성 하나님께 이렇게 내가 따라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내가 그에게 화합되는 것, 그를 온전히 닮는 것 그와 같이 되어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된 것만치 하나님을 닮은 것만치 하나님과 하나된 것만치 하나님의 것을 내것으로 삼은 것만치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능력을 삼은 그 능력은 많든지 적든지 그 양은 영원 불변이니까 또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았으면 그 뜻은 아무도 꺾거나 깨지 못합니다. 그 뜻은 계속합니다. 또 하나님과 같이 된 성화된 그것은 아무도 멸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믿음이 된 것은 인내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된 그것은 인내할 수 있고 믿음이 되어 인내하는 그것은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온전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인데 이것이 어디서 되어 나오는고 하니 믿음의 시련에서 되어 나옵니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지는 이것이 믿음인데 하나님과 같이 되어질려고 하는데 하나님과 같지 아니한 그 요소를 제해버리는 것이 요게 시련이요 하나님과 같지 않은 요소를 발견시키는 것, 하나님과 같은 요소를 발견시키는 것.
그러면 하나님과 같이 된 것, 하나님과 아직도 같이 되어있지 아니한 것 요것을 발견하는 것이 요것이 시험이요 또 하나님과 같지 아니한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 같지 아니한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 그것을 제해버리는 것 요것이 시련이요, 또 하나님과 같은 것만 남겨놓고 하나님과 같은 것을 그것을 점점 드러내는 것 하나님과 같은 그것을 점점 드러내느 것 하나님과 같은 그것을 점점 키우는 것 하나님과 같은 그것만 남도록 하는 것 요것이 시련입니다.
시련은 세 가지 역사인데 그것을 발견시키는 것 또 하나님과 나와 다른 그것을 발견해 가지고 없애버리는 것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다른 그것을 발견해 가지고 없애버리는 것, 하나님의 능력과 내 능력이 이제 대립되는 내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라야 되는 것, 하나님의 능력에 대립되는 것 하나님의 움직임에 대립되는 것 그것을 제해버리는 것이 요것이 시련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같이 된 그것이 아주 희미합니다. 파묻혀서 하나님과 나와 같이 된 그것이 아주 아삼 아삼하게 보일 듯 말 듯 합니다. 그것을 환하게 점점 보여서 확실하도록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그 신성과 나와의 같은 것이 종자와 같이 있는데 그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것.
그러면 드러내면 커지지요 드러내면 커지지 않습니까? 키우는 것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가 종자적으로 나에게 와서 있지마는 마치 아름드리 나무도 종자는 쌀내끼만 하거나 그보다 더 작은 것도 있지 않소? 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맞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그 의사의 씨입니다. 그 산 의사의 씨요. 그것이 묻혀가지고 있고 그것이 희미해져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자꾸 자란다 그 말이오 그것이 아무 큰 것이라도 묻혀 있으면 그것이 한쪽 모때기 조만치밖에 더 보입니까? 그것 모양으로 하나님의사와 내 의사와 같은 것이 시작되고 생겨졌는데 내 의사한테 파묻혀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말이오.
그러면 내 의사를 자꾸 이것을 쓸어내고 파버리면 그 의사가 환히 보입니다.
요것 다 하나의 형편을 말하는 그런 하나의 형용사 하나의 비유사 그런 것이 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같지 않은 것은 제해버리고 같은 것을 키우고 같은 것이 점점 환하게 같은 것만 남도록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다른 것은 다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같은 것만 남도록....
요것이 시련입니다.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다른 것은 다 없애고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와 같은 것만 남게 하는 요것이 시련이요, 또 하나님의 움직임과 내 움직임이 다른 것은 제해버리고 하나님의 움직임과 내 움직임이 같은 것, 하나된 것 요것만 남겨둡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련이요, 시련에는 그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 내 의사와 하나님의 의사와 또 내 움직임과 하나님의 움직임과 다른 것은 태워버리고, 비유컨데 금에, 아주 금속에 돌도 섞였고 또 구리쇠도 섞였고 금도 섞여있는데 자꾸 불에다가 드리 꾸어 재끼면 이제 열도 열이 올라가면 돌이 탈만한 열이 올라가면은 타 버리고 돌은 없어지고 또 쇠가 탈만한 열이 올라가면 쇠가 타 버리고 그 구리쇠가 탈만한 열이 올라가면 구리쇠가 타 버리고 또 은이 탈만한 열이 올라가면 은이 타 버리고 이러니 나중에 남은 것은 뭣만 남습니까? 이제 금이 제일 안 탑니다. 금만 남는다 이거요. 그것을 가르쳐서 연단한다 이러는데 그것을 썼다 말이요. 그와 비슷하다 그 말이오
이래서 하나님과 나와 다른 것,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님의 마음의 움직임과 내 마음의 움직임이 다른 것,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다른 것, 또 하나님의 그 몸의 기능과 또 내 몸의 기능(하나님은 몸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기 쉽도록 하도록... ) 이것이 다른 것, 다른 것 이것은 없애고 같은 것만 남겨두는 요것이 시련인데 다른 것을 발견시키고 다른 것을 없애버리고 다른 것은 제하고 같은 것은 남겨두고 이런 것이 시련입니다.
그러면 금을 연단할 때 그 도수가 올라가야 연단이 되지, 그 흙이나 돌이나 이런 것이 탈만한 그런 열도에 머물고 있으면 거기 있는 쇠가 탑니까? 여반에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예? 그것은 십 년 있어도 안 탑니다. 암만 오래 있어도 안 타요. 그것은 도수가 좀 뜨거워지면 쇠가 탈만치 뜨거워지면 쇠가 타 버립니다.
또 그 열도를 가지고 계속해 있으면 구리쇠는 안 탑니다. 쇠는 타도 구리쇠는 안 타요. 인제 그보다 더 열도가 뜨거운 열도가 올라가면 구리쇠가 탑니다.
자, 은이 탈만한 열도로 올라가면 은이 타 버립니다. 또 금이 탈만한 열도로 올라가면 금도 타지요. 그러나 금을 쓰기를 목적을 하기 때문에 금이 타는 열도는 필요없어요.
이렇게 도수가 점점 올라가야 제일 처음에는 아주 약한 것이 타고 그 다음에는 올라가니까 좀 더 강한 것이 타고 좀 더 올라가니까 좀 더 강한 것이 타고 이렇게 탑니다. 세상 것도 666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1도 있겠고 2도 있고 3도 있겠고 100도 있겠고 200도 있겠고 600도 있겠고 이렇겠습니다. 666, 일도 있고 2도 있고 10도 있고 50도 있고 60도 있고 또 100도 있고 400도 있고 500, 600도 있고 이것 전부가 하나의 이치로 가지고서 우리에게 도를 알려주는 것뿐인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이 된 것 중에도 요것이 조그만한 어려움으로 그것이 없어질 것도 있고 또 아주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이제 내가 부인될 때가 있다 그 말이오 사람이 마지막에 죽을 지경이 되면 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마지막 죽을 지경이 되면 부인하지마는 평소에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소. 그러나 아주 중한 병이 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나서 죽을 지경이든지 무슨 바다에 빠져 죽을 지경이든지 그러면 그때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십시오' 그러면 그때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거요.
자기가 평안하고 이럴 때는 자기의 의견, 자기의 의사, 자기의 욕심 뭐 제대로 행동하는 것 다 합니다. 이렇지마는 조금 어려움이 오면 '어라, 이것 회개해야 되겠다' 조그만한 어려움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행동과 대립되는 나와 내 뜻과 내 행동이 조그만한 어려움에서 그만 고쳐질 것 있고 또 많은 어려움이라야 고쳐질 것 있고 더 큰 어려움이 오면 고쳐질 것 있고, 사람이 어려움이 제일 큰 어려움이 어떤 어려움인고 하니 마지막에 죽은 어려움이 제일 큰 어려움인데 죽는 그 어려움을 척 닥쳐놓으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자기를 부인합니다. 자기 의사도 부인해 버립니다. 자기 움직임도 다 이제 그때는 포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하나님께서 점점 하나님과 나와의 다른 것, 그 신성과 내 인성이 다른 것,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가 다른 것, 하나님의 행동과 내 행동이 다른 것 이 세 가지가 합해서 그만 하나님의 것 내 것 이렇게 말하겠는데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다른 것 요것을 다 없애버리고 다른 것을 다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꼭 같아져서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조금도 다름이 없고 같아서 하나님은 창조주요 나는 피조물이라 이제 그 본체가 하나 되지는 안하지마는 하나님과 나와에 다른 것이 완전히 변화가 되어서 내가 거기 동화가 되어서 거기 따라 성화가 되어서 그를 따라서 그와같이 됐다 말이오.
그를 따라서 그와같이 된 요것을 하나님이 목적해서 우리를 세상에 두시고 우리도 요것을 목적하고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다른 것이 요것이 평안하고 즐겁고 수월하고 아주 평안 무사할 때 요 다른 것이 많이 나옵니까? 그 어려울 때에 다른 것이 많이 나옵니까? 그 어려울 때 다른 것이 많이 나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어려울 때 다른 것이 많이 나오지요. 또 그러면 다른 것 요것이 제거되는 데에는 작은 어려움이라야 제거가 많이 됩니까? 큰 어려움이라야 제거가 많이 됩니까? 어려움이 없을 때 제거가 많이 됩니까? 남반에, 예!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뭐 하나도 제거 안돼요. 작은 어려움에는 작게 제거되고 큰 어려움에는 크게 제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일치된 그 씨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일치된 그 씨가 있는데 그것이 어떨 때 세력을 부립니까? 어려움이 없을 때에 세력을 많이 부립니까? 어려움이 없을 때에 세력을 많이 부립니까? 작은 어려움일 때 세력을 많이 부립니까? 큰 어려움이 있을 때 세력을 부립니까? 언제 세력을 부릴 수가 없습니까? 예? 그것이 언제 세도를 부리지 못하겠소? 여반에? 남반에?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이것이 들어 왕노릇 못하기 때문에 세도 하나도 못 부리지요. 어려움이 조그맨히 있으면 조그맨히 세도를 부릴 수 있고 큰 어려움이 와서 마지막 죽는 경우에 딱 닥치면 자, 하나님과 나와 같은 요소, 같은 종자 그것이 그때는 세도를 부릴 수 있소 없소? 세도를 크게 부리지요. 크게 부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과 일치되도록 할려고 애를 쓰니까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이 어려움이 말이오 어려움이 차차 차차 커지겠소 작아지겠소 없어지겠소? 요것 알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점점 커집니다. 커져야 그것이 나오지요.
어려움이 커진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려움이 커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과 내것이 다른 것이 많이 나타나니까 다른 것이 많이 나타나니 하나님과 나와에 하나님의 것과 내것이 대립되는 것이 없으면 어렵겠소 안 어렵겠소?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되는 것이 없으면 없을 때에 곤란이 있겠소? 곤란이 없지! 하나님과 나와 대립된 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곤란이 생겼소 안 생겼소? 하나님과 나와 대립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대립된 것이 크게 대립되고 많이 대립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에게는 고통이 많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자, 세상대로 살려고 하면은 고통이 있소 없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 사람이기 때문에 대립됨이 많이 나타날 때는 고통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걸 가르쳐서 어려움이 점점 커진다 그래 말했습니다.
어려움이 커지는 것은 뭐 밥이 없어 어려움이 커지는 것이 아니고 옷이 없어 어려움이 커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어려움이 커진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것과 내것이 대립이 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 대립되지 않을려고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하는 내이기 때문에 대립이 없을 때에는 평안하지마는 하나님과 대립이 생겨질 때는 이것 문제라 말이오.
시집가고 장가가서 부부가 된 것은 둘이 참 한 마음, 한 뜻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재미있게 살려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그 부부에게 남편과 아내의, 남편의 것과 아내의 것이 이렇게 대립이 없을 때에 고통이 있소 대립이 있을 때에 고통이 있소? 예, 대립이 있을 때 고통이 있죠. 대립이 크게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 고통이 적겠소 많겠소? 고통이 많지요. 그 고통과 같은 고통이라 말이오. 하나님과 나와에 하나되어 살려고 하는데 이제 이 대립되는 것이 차차 생겨지니까 고통이 생겨진다 그 말이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의 사는 생활에는 요 고통 말이오 다른 고통 아니고 밥 없어 고통되는 것이 아니고 물 없어 고통되는 것이 아니고 요 고통 말이오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어 가지고 살려고 나선 것이 우리고 또 이렇게 살아야 심판 안 받고 영생할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 화평을 맺어 이렇게 살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점점 어려움이 커진다 그 말은 시험이 점점 높은 시험이 온다 하는 말인데 높은 시험이 온다 말은 점점 어려움이 커진다 그 말인데 어려움이 커진다 그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된 그것이 점점 많이 발견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가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하나님의 것과 내것과 다른 요것이 다른 이것이 차차 차차 적어집니까? 많아집니까? 다른 것을 차차 고치니까 전체적으로 말하면 다른 것이 고쳐졌으니까 적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는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왜 그러면 고쳐놓은 것은 어짜고? 고쳐놓은 것은 고쳐놨기 때문에 그것은 볼 필요도 없고 나타낼 필요도 없고 지금 고쳐야 될 판이니까 하나님과 나와 대립된 것이 처음에 하나만 나타나도 비틀거렸는데 이제 둘이 나타나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셋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러니까 둘이 나타날 때는 잘 고쳤는데 셋이 나타나니까 고치기가 힘이 들지마는 막 힘을 써 가지고서 다른 것이 셋이 나타나는 것을 고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넷이, 열이 점점 고치도록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고칠 것을 많이 나타내 주신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살아갈수록 하나님과 자기와의 대립되는 이것 발견이 많아지면 그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요 적어지면 그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요? 남반에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많아지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지금 많아져 갑니까? 적어져 갑니까? 대립된 것이 적어져 가지요. 적어져 가지면 지금 고치는 단계에 자기에게 발견된 것이 이렇다 말이오. 그러면 종류적으로 종류의 그 숫자적으로도 많아지고 또 같은 종류라도 그 종류의 다른 면이 많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완전자고 우리는 불완전자기 때문에 이래서 이것이 점점 발견이 많이 되니까 고통이 많이 됩니다. 어려움이 많이 됩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여기 시험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은 자기는 하나님하고 하나되어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과 대립된 것이 살아갈수록 차차 차차 많이 됩니다. 많이 나타나니까 자기에게는 고통이라 그 말이오
바울이 자꾸 살아갈수록이 죄인 중에 죄인이라 괴수 죄인이라 자기는 점점 죄인되고 무능해진다 그 말은 하나님과 삐뚤어진 것이 점점 많아지고 또 하나님의 능력에 비해서 자기의 무능함이 점점 더 드러난다 그 말이지 그것은 고쳐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된 이것이 점점 많이 나타나니까 우리에게는 고통이 점점 커집니까? 적어집니까? 고통이 커집니다. 고통이 커지는 것은 왜 커집니까? 대립된 그것 때문에 고통이 커지지요. 그런데 그때에 그 고통이 커지는데 고통이 없어질려면 하나님과 나하고 대립되는 것이 없어지면 그 고통이 없어지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된 것이 없어질려고 하면 하나님이 고쳐서 대립된 것이 없어져야 되겠소 내가 고쳐 하나님을 따라가서 대립되는 것이 되겠소? 어짜든지 대립된 것이 없어져야 그 고통이 물러가겠는데, 자! 하나님이 나 따라와서 일치돼야 되겠소 내가 하나님 따라가서 일치돼야 되겠소? 예? 내가 하나님 따라가서 일치돼야겠지요. 일치가 되면 하나님과 대립되므로 고통하는 그 고통은 일치가 되었으면 있습니까? 없습니까? 녜! 그와 꼭 같은 형편, 현실이라도 그것이 일치가 된 사람에게는 그 아무것도 변하지 아니하고 그 형편 그 사정 그대로 있어도 자기에게는 고통이 안됩니다. 요것이 일치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제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될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지 하나님 배반하고 세상과 하나 되면 '어이쿠! 거기 갔더니마는 고통당할뻔 했다 여기 오니 평안하다' 거기 가서 자기가 그리 가 버리면 고통될 것이 뭐 있겠소? 하나님과 하나될려는 요것을 버리지 아니할 때 고통이 옵니다.
그러면 그때에 이렇게 고통이 오는데 하나님과 대립된 것이 많으므로 많은 고통이 오는데 하나님과 대립된 것이 많으므로 많은 고통이 되고 적으므로 적은 고통이 되어지는데 그 고통이 없어지는 비결은 하나님과 나와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니 일치될려고 하면 내 의사에 하나님 의사가 따라와서 한 의사가 되어야 되겠소 내 의사가 하나님 의사를 따라가서 한 의사가 되어야 되겠소? 내 의사가 하나님 의사를 따라가서 한 의사가 되어야 되겠지요. 또 내대로 움직이는 그 움직임에 하나님이 따라와서 한 움직임이 돼야 되겠소 내 움직임을 버리고 하나님의 움직임을 내가 따라가서 한 움직임이 되어야 되겠소? 내 움직임을 버리고 하나님 움직임을 따라서 한 움직임이 되어야 되겠지요.
또 내라는 자와 하나님과 대립일 때 내가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께 속하므로 대립됨이 없어져야 되겠소. 하나님이 내게 따라와서 내가 주체가 되므로 대립됨이 없어져야 되겠소? 하나님이 우리 따라 오겠소? 안 따라 옵니다. 이러니까 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내 주체가 내가 주장하는 내 주체가 이것이 하나님께 귀속되므로 하나님 주체가 내가 속함으로써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됨이 없어지지요.
그러면 이제 그로 인해서 왔던 고통은 그 배경은 그대로 변하지 아니하고 있어도 자기에게는 그 고통이 고통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었으면 내가 하나님 따라가 일치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나 따라와서 일치되었소? 내가 하나님 따라서 일치되었지요.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게 된 것을 뭣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지난밤에 무엇이라고 배웠지요? 믿음. 그렇게 된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게 믿음이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게 믿음인데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말한 대로의 그 순서가 이루어지는 그것을 가르쳐서 표시할 때 시련이라고 이렇게 표시한다 이거요. 그러면 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거라 말이오. 따르는 것.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따른 것이 온전히 돼서 하나님과 나와 배치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가 됐다고 하면 내라는 사람은 그대로의 생활하는 생활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겠소 중단하겠소? 영원히 계속할 수 있지요. 이 계속은 무엇이 해할 수 있겠소? 해하지 못하지요. 아직까지 않된 것이 있기 때문에 해하지요. 요것이 된 것만침은 사람이 그것이 삐뚤어진 사람이요 옳은 사람이요? 옳은 사람이지요. 의사와 행동은 옳은 것이요 삐뚤어진 것이요? 옳은 것이지요. 그러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 현실에는 시험의 현실이 돼야 되겠소 시험없는 현실이 돼야 되겠소? 시험의 현실이 돼야 되겠지요. 시험의 현실이 돼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과 내것이 그 대립이 되는 대립이 나타나는 현실이 돼야 된다는 말이오 대립된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원한다 말이오? 대립되는 그 현실 대립이 나타나는 현실을 원한다 말이지요. 시험을 원한다는 말은 대립된 것이 나타나는 그것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 시험이 없기를 원합니까? 시험이 있기를 원합니까? 시험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 시험이 없기를 원하는 사람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도 없네) 시험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 예, 나도 듭니다. 있기를 원하지요. 시험이 있기를 원하지요. 시험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과 시험은 어려움인데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된 것이 발견되어서 하나님과 나와의 화목이 깨어질 판이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된 것이 발견돼서 그 대립된 이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이것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시험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이 되는 이런 현실을 닥쳐서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 때문에 고통스러운 이 고통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예? 맞습니까? 시험이 없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시험이 있기를 원한다 말은 시험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고통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고통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무슨 고통? 하나님과 나와의 대립되므로 있는 고통, 그 고통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요것 이해가 됩니까? 요것 이해가 안되면 안돼. 그만 끊어져 버려.
요것 이해가 됩니까? 여반에 이해가 돼요. 저 뒤에 이것 모르면 범벅이 돼놔서 현실 닥치면 다 빵빵 넘어져버려요.
자! 우리 믿는 사람은 앞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과 나와에 대립됨의 고통, 그 고통이 점점 큰 고통이 나옵니까? 고통이 없습니까? 점점 큰 고통이 나오지요.
그러면 고통이 나왔으면 그 고통이 해결지워서 그 고통을 없앨 수 있소 그 고통을 없앨 수 없소. 그 고통을 없앨 수 있지요. 그 고통을 없애야 구원이 됩니까? 그 고통이 계속돼야 구원이 됩니까? 그 고통이 없어져야 구원이 되지요.
그 고통 없어지면 또 뒤에 고통이 새 고통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또 나오지요. 새 고통이 나오고 새 고통 없애니까 구원이 되고 새 고통이 또 나오고 그 고통을 없애니까 구원이 되고 이제는 큰 고통이 나오고 큰 고통 없애니까 큰 구원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요 시험 요 고통 요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기쁘게 하나님과 대립된 것이 뭣이 좋아서? 대립된 요것을 몰랐는데 대립된 것을 발견하여 대립된 것을 고치기만 하면 한없이 영광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요 고칠 소망에서 이제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지요.
이러기 때문에 요 시험이 아니면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요 시험에서 구원 이루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대립된 요 자기 것을 요것을 완전히 대립된 요 자기 것을 요것을 완전히 대립된 요것이 하나님께 굴복을 해서 하나님께 항복을 해서 대립이 된 요것을 끝까지 대립된 것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과 대립된 것은 이제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딿는 것,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딿는 것, 요 대립된 요것을 어쨌든지 대립된 요것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됩니다. 대립된 요것을 없앨 것은 없애는 것이 구원이 되고 대립될 그 대립된 것을 없애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므로 없어질 것은 굴복하므로 없애고 대립된 것을 없애야 될 것은 없애서 구원을 이루고 대립된 것은 하나님께 굴복하여 귀속하므로 없앨 것은 대립을 없애므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어쨌든지 하나님과 나와에 살아갈수록 대립이 된 것이 점점 발견이 되게 됩니다. 발견될 때는 대립된 요것을 없애고 하나님과 나와의 일치가 되는 요것이 믿음이요 온전한 믿음은 다 일치 돼 버리고 일치되지 않은 것이 없는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인데 요 일치가 돼 버렸으면 온전한 믿음이 되었으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세밀한 것도 어려운 것도 쉬운 것도 전부 하나님과 함께 동하고 정할 수가 있고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 무궁세계에서도 하나님과 동하고 정하는 것이 일치되어 하나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수족처럼 살 수가 있고 하나님의 몸처럼 살 수가 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그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