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힘


선지자선교회 1981년 12월 4일 금새 

 

 본문:로마서 3장 10절~18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는 과거에 지어놓은 죄가 있고 또 현재 짓는 죄가 있고 앞으로 지을 죄가  있습니다. 지어놓은 죄는 악령과 사망과 하나님의 대적인 심판법에 벌써 매이게  된 것이고, 현재 짓고 있는 죄는 이 세 가지가 자기에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적으로 자기가 지을 죄는 현재는 사망과 상관없지만 앞으로  사망이 자기를 와서 해할 것이요, 또 마귀가 해할 것이요, 또 하나님과 대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과거의 죄에 대해서나 현재의 죄에 대해서나 미래의 죄에  대해서 이것을 정리하는 것은 곧 나를 해하는 마귀를 정리하는 것이요, 사망을  정리하는 것이요, 나를 원수로 멸하시는 그 심판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현실 속에 일곱 가지가 들어 있는데, 이 네 가지는 한편,  한편 하나입니다. 그 역사가 하나라 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 죄라  말은 아니고 그 역사가 하나입니다. 마귀, 죄, 사망, 심판의 하나님 이 넷이  같이 역사합니다.

그러기에, 이 넷이 같이 역사하는데 우리와 직접 연결되는 그 연결은 뭐이냐  하면 죄입니다. 죄의 연결이 없으면 그 나머지 셋의 역사는 우리에게 해를  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셋은 마귀, 사망, 심판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 죄를 끄내끼를 가지고  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하는 역사를 합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의 하나님도  우리를 붙들지 못하고 사망도 우리를 붙들지 못하고 마귀도 우리를 붙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귀를 직접 대적해 가지고 어떻게 해 볼려고 해도 이거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우리가 이길 힘은 없습니다. 또 사망을 아무리 내가 안  당할려고 애를 써도 사망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벗어나는 하나만 되는 방편은 죄를 청산하는 것이 그 방편입니다.

죄만 우리가 벗어나면 마귀는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사망도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넷은 역사적으로는 하나인 것을 언제든지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넷은 하나입니다. 마귀는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요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두워지는 것이 마귀 때문에 어두워집니다. 속는 것이  마귀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왜 그렇게 타락했느냐? 마귀가 와 가지고 타락을 시켰습니다.

사람이 어두워지는 것이 뭣 때문에 어두워지느냐? 마귀가 들어서 어둡게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를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었을 때에, 이 천년설에, 천년이라는  것인데, 마귀를 무저갱에다가 천년동안 가둬 놨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옳고 바르게 이렇게 해서 천년동안 안 죽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간혹은 마귀의 유혹 받아 범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으로 인해서 범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있는 것은 그때 천년왕국시대에도  죽었습니다. 백살 먹어서 범죄한 자는 백살 먹어 죽고 9백살 먹어서 범죄한 자는  9백살 먹어 죽고, 그러나 대부분은 마귀를 가둬 버리니까 범죄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범죄하는 일이 없었다 그말은 삐뚤어지게 하는 일이 없었다  그말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와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삐뚤어지게 하는  그것이 자기의 성공입니다. 삐뚤어진 그것이 죄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옳은 생각을 가질려고 해도 옳은 생각은 가져지지 않고, 또 옳은  소원을 가질려고 해도 옳은 소원은 가져지지 아니하고 삐뚤어진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옳은 소원을 가진다고 하면 대단히 참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옳은 소원은 알면서도,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지만, 몰라 그런 것이 아니라 알고는 있지만 잘못된 소원이  자꾸 생겨져서 노력하고 싶은 소원과 나쁜 동무들하고 이렇게 섞여서 못된 짓  하는 그것이 소원이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성 비판적으로는 옳고 그른 걸 안다고 해도 속에 그 본능이  그것을 싫어해서 삐뚤어진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술 먹는 그 귀신이 들린  사람은 술을 안 먹을려고 자기가 온갖 결심과 노력을 해도 술 먹게 하는 마귀  그놈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술을 먹게 하니까 술을 안 먹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도 다 그와 같습니다. 마귀가 처음에 죄가 없을 때에는 자기한테  와서 꾀우지만 딱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귀 시키는 대로 제가 안 하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마귀가 우리를 꾀우는 것, 우리를 속이는 것, 이래서 모든 꾀우는  욕심, 참 그것은 자기에게 해로운 것인데 그 욕심이 자꾸 생겨진다고. 그것을  가리켜서 미혹의 욕심이라. 잘못된 욕심을 미혹의 욕심이라, 성령의 소욕은  생명의 소욕인데, 자기를 꾀우는 미혹의 욕심이 누가 그렇게 하느냐? 마귀가  들어서 그렇게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참 그가 모든 면으로 민첩하게 했습니다.

아주 민첩하게 했습니다. 이랬지만 예수님께서 나와 지금 이 음식 그릇에 손을  같이 넣는 자가 나를 잡아 죽일 자라 하는 그 표시를 할 때에 그만 이 가룟  유다가 속에 ‘날 말하는구나!’ 하면서 섭섭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감정이  생겼습니다. 섭섭한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때에 ‘나로구나.’ 오히려 반성해서 회개하면 그놈이 물러갈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고 섭섭함을 가질 때에 ‘마귀가 그 마음에 들어갔다.’ 이랬습니다. ‘그  마음에 들어갔다.’ 이랬어.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마귀 시키는 대로 해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슨 사건을 만날 때에 그 사건을 이래야 되느냐 저래야 되느냐? 참  바로 처리하면 성공이요 행복이요 잘못 처리하면 절단나는 것인데, 마귀가  접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접선해서 하나님이 옳고 바르게 이것 가르쳐 줄  터인데, 하나님이 옳게 가르쳐 줄려고 하지만 죄를 가지고 있으니까 마귀라는  놈이 와 가지고 제가 주장을 해 가지고 삐뚤어지게 가르쳐 주니까 그 사람이  망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가 잘 몰라도 자기보다 뒤떨어진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옳은  생각을 가졌으면, 옳은 비판을 가졌으면, 옳은 평가를 가졌으면 그만 그러면 그  사람은 옳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옳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대개는 보면 삐뚤어진 판단, 삐뚤어진 평가, 좋은 것은 가치가 적다고  하고 자기를 해할 것은 가치가 많다고 하고, 믿는 사람들이 자기 현실에서 자기  심신의 기능과 접촉한 모든 만물을 자기 것 만드는 것이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이렇게 평가가 되지 아니하고 평가가 삐뚤어졌으면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면 두고 갈 것 그것이 자기에게는 더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심신을  거기다가 기울여 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왜 가치없는 것은 가치있다고 마구 심신을 다 기울이고 가치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같이 그렇게 판결을 지워서 믿음은 팽개치고 세상과 세상에  대한 욕심은 그렇게 열심히 가지게 되는가? 그것이 자기 혼자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마귀가 와 가지고 점령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귀가  와 가지고 우리를 해하는 것은 ‘뭐 한 가지 면으로 해한다, 두 가지 면으로  해한다.’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헬 수 없을 만치 여러 면으로 우리를 해하는데 그 해하는 방편은 처음에는 와  가지고 우리를 꾀웁니다. 좋은 것을 주어서, 보기에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  좋은 것을 주어서 꾀우고 또 그다음에는 사람을 속여서 꾀우고 달래기도 하고  명예도 주면서, 지위도 주며, 권세도 주면서, 돈도 주면서 오만 걸 주면서  꾀웁니다.

왜? 그거는 제가 제 자유로 할 수 있습니다. 제것입니다. 왕이기 때문에  제것입니다. 이래 꾀우다가 안되면 이제는 협박입니다. 꾀우다가 안되면 위협을  줍니다. 무력을 줍니다. 꾀워서 안 넘어가는 사람은 그 무력에 잘 꺾어지게  됩니다. 무력에 안 넘어가는 사람은 꾀우는 데에 잘 넘어가게 됩니다.

고난에 용감스러운 사람은 달콤한 데 잘 넘어가고 달콤한 것에 안 넘어가는  사람은 고난에 잘 넘어가고 이러니까 마귀라는 놈이 우리를 거머쥐고 마구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밀었다 당겼다 이러니까 그에게 피동이 안 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이 피동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피동이 안 되지 성령의 도우심 외에는 피동 안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들은 마귀에 피동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철학가라도, 어떤 종교가라도, 의지가라도 벌써 자기가 종교를 말하고  철학을 말하는 그것이 마귀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자기대로의 그 하나 사욕을  정한 것입니다. 자기대로의 하나 사욕을 정해 가지고 사욕을 지금 자꾸 건설해  나가고 있는 것이 저만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빠트려서 죽도록  그렇게 만드는 역사를 합니다.

이래서 마귀가 우리에게 출입을 하고 접하고 있으면 뭐 백방으로 우리를  해한다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마귀라는 놈이 우리에게 접선되어 있으면 한 가지  두 가지 면으로 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참, 천하에 있는 사람들의 지혜가 다  그게 마귀 지혜입니다.

별별 종류의 지혜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 마귀 지혜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그  마음을 누가 주관하는고 하니 악령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2장에 보면  공중의 악한 신이 그들의 마음을 다 주관하고 있는데, 우리들도 그전에는 그가  주관했었는데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그놈이 주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주관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꾀우기는 꾀웁니다. 안 믿는 사람은 꾀우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꾀우지 않고 명령입니다. 명령이니까 마귀 명령대로 그대로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입지 못한 사람은 악령이 왕권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명령을  합니다. 이러나 구속을 받은 자에게는 왕권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살살 달래서  꾀웁니다. 꾀워 가지고 죄만 지으면 그때부터 그에게 왕이 아닌 것이 왕 노릇을  합니다. 왕 노릇 합니다. 왕 노릇 하는데 예수님의 공로를 접선을 시켜버리면 왕  노릇은 못 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내가 배척하려면 배척하고 자유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마귀가 우리에게 얼마나 해한다는 것, 제직회도 해보면 제직회에  마귀라는 놈이 와 가지고 마구 두루 돌아다니면서 우는 사자같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마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들어갈까?’  이러다가 그 사람의, 사람이 말 한마디 하는 그 말 한 마디를 타고 들어가  버립니다. 말 한 마디가 삐뚤어졌을 때에 말 한 마디를 타고 들어갑니다.

그래 가지고 삐뚤어진 말을 다른 사람이 ‘그거 삐뚤어졌다.’ 이럴 때에  마귀라는 놈이 그 속에서 역사를 합니다. 그 사람이 삐뚤어질 때에 ‘아, 내가  삐뚤어졌다. 잘못했습니다.’ 하면 마귀는 그만 급하게 쫓겨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삐뚤어진 걸 삐뚤어졌다 할 때에 그때에 ‘이것은 나를 공격한다. 나를  해한다. 지금 나와는 대립이다.’ 요렇게 생각을 해서 그 사람이 그만 감정을 딱  가지게 됩니다. 그때에 ‘요거는 나를 반대한다. 요거는 나를 미워한다. 요거는  나를 대적한다.’ 하는 그 자기가 어떤 자기입니까? 새사람 자기입니까 옛사람  자기입니까? 고것이 옛사람 자기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바꾸어진다는 것은 찰나에 바꾸어집니다. 어떻게 민첩하게  바꿔지는지? 그럴 때에 퍼뜩, 숨어 있던 옛사람이 퍼뜩 나와 가지고 ‘아, 나를  공격하는 말이다. 이건 나를 대적하는 말이다. 나를 미워한다. 나를 이렇게  미워한다.’ 이놈이 이렇게 하니까 어리석게 이 심신이라는 것은 그만 그 미혹을  받아 가지고 ‘그래. 나를 미워하네. 안됐다. 대적해 나가야 되겠다.’ 그럴  때에 저 마귀라는 놈이, 또 저 마귀가 사로잡고 있는 그놈이 딱 있다가 말하기를  얼른 그 회의가 마치면 찾아갑니다.

가 가지고 ‘오늘 그 말을 왜 하지?’ 연습을 시킵니다. ‘왜 하지?’ ‘뻔한 것  아니야?’ ‘그래, 나도 그거 들을 때 좀 섭섭했어. 감정이 났어.’ 착 둘이  찰떡같이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갑니다. ‘야, 점심 먹으로 가자. 우리 다방으로  가자. 차 먹으러 가자. 어디로 가자.’ 끕니다. 그게 마귀에게 끌려서 죽는  일이지만, 참 기가 차도 그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고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누가 퍼뜩 말하기를 ‘얘, 너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옛사람이가 새사람이가?’ 하면 그때에 그 사람이 복이 있으면 ‘가만히 보자.

그거 틀렸나 안 틀렸나? 틀렸는데, 틀린 걸 틀렸다 하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 사랑인데 왜 내가 감정이 됐을까? 이게  옛사람이로구나. 옛사람의 감정이구나.’ 어떤 사람은 ‘그거 옛사람이가 새사람이가?’ ‘아, 뭐 뻔하게 옛사람이지.’  옛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옛사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옛사람 벗어나지 못해.

옛사람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이유는 뭐이냐? 옛사람의 줄이 강하다 그거요.

이래 가지고 그만 혈육정실로, 지방정실로, 동류정실로, 자기 명예정실, 명예와  정이 들어 가지고, 권세에 정들어 있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정이  들어 있다 말이오. 그놈들이 나서 가지고 그만 그때에 마귀와 하나가 돼 가지고  이제는 마귀의 미혹을, 마귀의 편이 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이래 가지고 그말 한 마디 할 때에 그말 한 마디를 통해서 저 사람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그놈이 또 그말 할 때에 그 사람이 있다가 옆에 사람이 ‘아,  그것은 뭐 옳은 말인데, 옳은 말인데 뭐 그것 서로 섭섭해 할 것이 없는데,  감정될 것이 없는데’ 이말 하니까, 마귀가 안 들어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그말  딱 하니까 ‘뭣 때문에, 편은 뭣 때문에 돼? 한편이로구만?’  마귀라는 놈이 한편으로 말하니까 옆에 밖에서 ‘봐라. 아무것이하고 한편으로  말하네. 그 사람 나쁘면 나쁜 그 사람에게 하지 옆사람까지 막 몰아대서 공격할  것은 뭐이냐?’ 딱 마귀라는 놈이 ‘그래. 참 그렇다. 저거끼리 한편이면 나는  이리 한편되겠다.’ 이 마귀라는 놈이 요리 조리 건너가고 그저 기회를 노리면서  들어가는 것이 환하이 눈에 보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 환하이 보이오.

이래 가지고 사람을 꾀워서 망치게 합니다.

마귀라는 놈이 우리에게 해하는 방편이 많고 그 해가 굉장히 많은데 이 마귀는  아무라도 싫어합니다. 불신자도 마귀를 싫어합니다. 불신자도 마귀를 싫어해요.

이래서 ‘호사다마라’ 좋은 일에는 마가 많다. 방해하는 마가 많다. 마귀를  싫어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마귀라면 다 싫어해요. 믿는 사람들은 으레  싫어하고.

싫어하지만 암만 싫어해 봤자 마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놈을  대적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마귀를 대적해서 이놈을 쫓아내는 길이  뭐입니까? 뭐이지요? 죄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 제대로 뻐드러져 죽습니다. 죄  문제만 해결하면 그런 것 거기 못 있고 가 버립니다.

누가 말하기를 ‘쥐는 먹을 것만 없으면 그놈이 오지 않는다.’ 먹을 것 없으면  안 와요. 쥐는 먹을 것 없으면 안 옵니다. 그 모양으로 죄만 없으면 마귀 그놈은  세력이 자기 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마귀의 세력은 죄인데 그놈도 달아나고 또  사망도 손들고 소용없어. 사망도 그것도 달아나고, 내게 있어 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또 내게 대해서 노하신 하나님의 노도 그만 없어져 버립니다. 죄  없으면 하나님의 노가 즉시 없어져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를 이것을 정리한다는 것이 이렇게 큰 문제가 해결이 되고,  그만 죄를 범하면 내가 아무리 뭐 의롭게 살려고 어떻게 뭐 결심을 하고 어떤  것을 구상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현재에 우리가 할일이 뭐이냐?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 할일이 뭐이냐?  할일 두 가지뿐입니다. 두 가지는, 내 심신의 기능을 영생 만드는 것이 이거  하나 할일이요, 지금 현실에서 접촉한 모든 만물을 그것을 내것 만드는 것이  이것이 할일인데, 이 두 가지가 할일인데, 이 두 가지를 할려고 하면 한쪽 손에 무엇을 잡아야 됩니까? 한쪽 손에는 무엇을  잡아야 되지요? 죄를 잡고, 한쪽 손에는 죄를 잡고, 또 한쪽 손에는 뭘 잡아야  됩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잡아야 됩니다. 이 둘을 잡아 가지고 한데 붙이면 그만  해하는 것 넷은 절단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또 나를 유익되게 하는 그 배후의  둘도, 이 둘만 접해 버리면 그 둘도 나와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제는 안보법, 영생법, 생명법으로 행하면 즉시 영생이 돼  버린다 그 말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죄를 찾아서 정리한다는 것 이것이  아주 슬기로운 일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의 피공로와 이 죄와 둘을 합해서 내가 그 둘을 가지면 이  죄는 절단나 버립니다. 절단이 나면 동시에 진리,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나와 한편이 돼 버립니다. 한편이 되는데, 실상으로 그것이 산  것이 되는데 산 것으로 한번 행하면 그만 영생됩니다.

산 것이 그대로 산 것이 돼 가지고 있어도 그 현실에서는 산 것이 돼 가지고,  이게 살았기 때문에 ‘네가 새로 죽을래, 산 이대로 살래? 살았는데 네가 살아난  산 이대로 영생을 할래, 살아난 이것이 죽을래?’ 요 두 가지의 갈래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이것이 영생하는 것을 가리켜서 생명이 승리하면, 생명이  승리하면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하는 그말은  생명이 승리하게 하겠다 그 말이오. 이미 예수님의 피로 얻은 생명이 이것이  승리하는데, 얻은 생명이 다시 집니다. 져 버리면 그 뭐이냐?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죄를 찾는 것이 중대한 문제인데 죄를 대충 찾을려면 여기에  간추려서 몇 가지를 말해 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면 의인은 어떤 것이 의인인가? 의인은,  불의는 자기 주관, 자율, 피조물의 주관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의인데, 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그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서 하나님으로 인한 생각, 마음, 뜻, 소원, 하나님으로 인하여 마음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 이것이 의인데, 내가 마음을 쓰는 것이나 몸을 쓸 때  하나님으로 인하지 아니한 그 움직임이 내게 있는가 그것을 찾는 것이 대단히  첩경입니다. 이 죄가 제일 많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로 인해서 움직이는, 돈으로  인해서, 사람으로 인해서, 애정으로 인해서, 감정으로 인해서, 또 분으로  인해서, 명예로 인해서, 인간으로 인해서, 권세로 인해서, 어떤 피조물로  인했든지 그것은 다 불의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의인 없다 말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임이 없고 모두 다 피조물로 인해서 움직임이라.

그러면 의 이것을 찾는 것이 아주 죄 뭉텅이를 찾는 것입니다. 또 “깨닫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가 없다 그말은 아무나따나 깨달음이 없다 말 아니오. 바른  깨달음이 없다 그 말이오, 바른 깨달음이. 바른 깨달음은 어떤 것이 바른  깨달음인가?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지 둘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 거기 대해서 바른, 바른 깨달음이 혹 둘이 될 수 있습니까? 요거 한번  똑똑히 알고 가요. 바른 깨달음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대해서 바로 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옳게 바르게 하는 것이 둘 셋 될 수 있습니까, 하나 외에는  없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하나 외에 혹 있을 수 있소? 하나 외에 있을 수가  없지. 하나 그것만이 참이지. 그것만이 진리이지. 그렇지 않겠소?  하나만이 바로 깨닫는 것이 있을 수 있지 둘 있을 수가 없어. 점과 점 사이에  제일 가까운 것은, 저기와 여기와 같다는 그 사이에 가까운 것은 줄을 튕기면  가까운 것은 하나요 둘이오? 한 개밖에는 있을 수가 없어. 제일 가까운 거는  하나뿐이지. 그렇지 않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바른, 거기 대해서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인데 그게 깨달음이라 말이오. 그 깨달음을  가져야 돼. 그 깨달음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깨달음인데,  하나님의 깨달음을 그 사람이 받아서 자기 깨달음을 삼는 것 그 외에는 바른  깨달음이 없다 그 말이오.

“깨닫는 자도 없다” 말은 믿음으로, 믿음으로 깨달은 자가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하나님의 깨달음 그 깨달음을 자기 깨달음으로  삼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되어졌을 때에는 이게  바른 깨달음이 되는 것이라 그 말이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닥쳐도 하나님이면 다 해결이 되고 하나님이면 다 복이 되는데, 자기가  만가지의 그 생활에서 하나님만으로, 하나님만으로 이 일은 해결지울 수 있고,  하나님만으로 성공될 수 있고, 하나님만으로 복될 수 있고, 하나님만으로 살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인데 이런 하나님으로 알고 자기의 전생활에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런 죄를 우리가 여기에 종류 있는 이 종류대로 찾으면 우리 죄가 거의  다 찾아집니다. 내가 자 “저가 나를 안즉 내가 높이리라” 하나님이 말씀했는데  내가 매사에, 범사에 ‘아, 여기에는 하나님 만나야 되겠다. 하나님하고  의논해야 되겠다. 하나님에게 물어야 되겠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한편 돼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이오. 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현실에서는 죄 문제가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걸  죄라고만 생각지 마십시오. 죄와 마귀와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와 한덩어리로  연결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죄 문제 그것은 해결할 수 있지만  하나님 진노는 해결 못합니다. 우리가 죄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마귀를  어떻게 대항해 이길 수 있습니까?  인간들이 죽기 싫어하지만 다 죽는데, 사망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말이오. 그러나  죄 문제만 해결되면 마귀도 사망도 하나님의 진노도 다 멈춰진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제일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왼쪽 손에는 이것을  잡아야 되겠고, 오른쪽 손으로는 주님의 보배 피공로를 우리가 붙들어야 하고 이  둘을 일치를 시켜버리면 내가 싫어하는 것 넷은 정리돼 버리고 내가 원하는  셋과는 한덩어리가 됐습니다.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그다음에 생명법,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하나님이 요렇게 하라 하는 대로 해 버리면 그만 영생돼  버렸습니다. 그 현실의 것은 완전히 영생으로 그만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영생이 돼 버렸습니다. 영생된 자는 다시 죽이지 못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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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856 순생과 순교의 가치/ 베드로전서 1장 5절-6절/ 790829수새 선지자 2015.11.22
2855 순생순교의 힘은 어디서 자라는가/ 요한복음 21장 15절-19절/ 880306주새 선지자 2015.11.22
2854 순생없이는 순교없다/ 고린도전서 9장 23절-27절/ 871103화새 선지자 2015.11.22
2853 순수한 예수를 믿으라/ 요한계시록 17장 9절-14절/ 880627월새 선지자 2015.11.22
2852 순전하고 신령핝 젖/ 베드로전서 2장 1절-3절/ 860211화새 선지자 2015.11.22
2851 순종 하나만 가질 것/ 로마서 8장 26절-36절/ 840225토새 선지자 2015.11.22
2850 순종으로 한 몸 되는 관계/ 에베소서 1장 19절-23절/ 840221화새 선지자 2015.11.22
2849 순종의 원리/ 고린도전서 3장 16절-17절/ 800427주전 선지자 2015.11.22
2848 순종해본 사람이 권찰직 감당/ 누가복음 5장 10절-11절/ 86071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2
2847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 에베소서 5장 19절-27절/ 791027토새 선지자 2015.11.22
2846 스룹바벨 성전/ 학개 2장 1절 19절/ 820527목새 선지자 2015.11.22
2845 스스로 믿음 확정/ 고린도후서 13장 5절/ 1960. 4. 25. 월밤집회 선지자 2015.11.23
2844 스스로 속는 이유는/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890625주전 선지자 2015.11.23
2843 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791210월새 선지자 2015.11.23
2842 스스로 조심하라/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831202금새 선지자 2015.11.23
2841 스스로 조심하라/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850818주후 선지자 2015.11.23
2840 승리의 힘/ 로마서 3장 9절-18절/ 811129주전 선지자 2015.11.23
2839 승리의 힘/ 로마서 3장 9절-18절/ 811130월새 선지자 2015.11.23
» 승리의 힘/ 로마서 3장 10절-18절/ 811204금새 선지자 2015.11.23
2837 승리의 힘/ 로마서 3장 9절-18절/ 1981. 11. 29.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