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3 19:33
스스로 조심하라
본문 :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뜻밖에 그 날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의 날, 불심판이 나타나는 날. 기독교에 대 박해가 일어나는 날, 땅에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칠 년 대환난이 계속되는 날. 주님은 공중 재림에서 지상 재림을 재촉하고 계시는 그때를 가리켜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게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 하는 덫은 그물을 말합니다 이 그물은 하나의 그때, 형용사인데. 불로 심판하실 터인데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물이라고 비유하셨는고 하니 하나님의 철저한 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원은 택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온갖 방편으로 교훈해도 받지 아니하고 제 맘대로 제 생각대로 제 욕심대로 제 취미대로 이렇게 자유 행위 하는 거게 대해서 심히 노여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물에 치이면 자유하는 고기도, 자유하는 날짐승도. 자유하는 모든 날버러지도 그를 잡을라고 하는 그 그물에 걸리면 다 그 자유가 그물에 걸려서 박탈되게 됩니다. 그러면 자유가 박탈되는 동시에 그 생명도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에는 사람들이 전부 제 맘대로입니다. 뭐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셨지만 이 성경 말씀에 자기의 자유 행위가 이 말씀 때문에 제재를 받는 사람들이 심히 없습니다. 또 자기 욕심이 이 말씀에게 제어를 받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의 취미 자기의 주장, 자기의 계획 이런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에 거리끼니까 이것은 중단을 해야 되겠다, 포기해야 되겠다, 이 말씀에 대해서 제 주장대로 하는 그 생활이나 모든 각종의 행동이 하나도 제재받지 안하고 제대로 행하기를 뭐 얼마든지 계속해서, 하나님은 아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권고를 하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지만 하나도 제재받지 안하고 제 주장대로 하는 여게 대해서 하나님은 심히 분노하십니다. 분노하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날이 임하면 마치 제 맘대로 공중에 바다에 놀던 그 모든 것이 다 그물에 걸려서 동시에 자유도 없어지고 생명도 뺏겨지는 거와 같이 이렇게 택한 자들이 되어질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공부시킬 때도 그렇고 또 자기가 스스로 연구해서 출세의 모든 계획을 가지는 것도 어쩌든지 자기 주장을, 자기 발언을, 자기 계획을, 자기 소원을 꺾지 안하고, 꺾여지지 안하고 어떤 방해물이 있어도 그런 것을 다 투쟁 능가하고 설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을 어릴 때부터 연습합니다. 부모들도 그것을 가르치고 학교에서도 그것을 가르치고 또 사회에서도 그것을 가르칩니다. 가르친다 말은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좋지 못하다고 이렇게 입법도 세우고 하지만 다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왕이요.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다 존귀한 사람이요,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승리하고 모든 유익을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뭐 자기의 주위 환경에서도 어쩌든지 아무것에게라도 꺾어지지 않고 지지 않고 그렇게 승리해서 모든 것을 점령해서 네가 이용하라 하는 그것이 인간들의 심리입니다. 그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큰 데서나 작은 데서나 단체에서나 개적으로나 자기를, 물론 잘못된 것을 꺾고 옳은 것도 꺾을라고 애를 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꺾는 연습을 하는 것이 그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자기를 꺾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성장시키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모든 노력입니다.
옳은 것도 꺾어진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물론 자기가 잘못된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다른 사람이 말하기 전에 제가 스스로 꺾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꺾습니다. 자기에게 잘못된 게 있으면 그것을 스스로 꺾어서 그것을 뿌리 뽑을라고 애를 쓰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훼방으로 하든지 꺽으라고 사랑의 충고로 하든지 할 때에는 감사함으로 달게 받아 가지고 꺾을라고 애를 씁니다.
옳은 것도 꺾을라고 애를 쓴다는 그 말은 옳은 것이 악에게 꺾어지는 것이 아니고 옳은 것이라도 할 수 있으면 자기를 꺾어서 그 옳은 것을 다른 사람이 하는 데에 자기는 따라가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따라서 살라고 애를 쓰고 그 다음에는 사람에게 따라서 살라고 애를 씁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라도 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삐뚤어진 것이라도 정복을 시키고 옳은 것이라도 정복을 시킬라고 애를 써서 자기를 나타낼라고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꺾어서 자기를 숨기고 나타내지 안하고 자기에게서 다른 사람을 나타내고, 옳은 걸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낼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는 뼈도 없고 속도 없고 아무런 창자 없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만 실은 단쇠와 같습니다. 쇠를 달궈서 녹여 놓으면 물렁물렁하게 물같지만 그 쇠는 모든, 불탈 수 있는 것들은 다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무른 거 같으나 실은 쇠보다도 더 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꺾지 못한 사람. 자기를 꺾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들의 그 자주장이, 자기 잘난 것이, 자기 주관대로 주권대로 자기가 왕노릇 하는 그것들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다 속박을 당해서 상당한 보응으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삽니다. 어떤 그 사건에 옳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자기가 꺾어서 명예 있을려고 하지 안하고 나쁜 것도 다른 사람이 꺾으면 꺾는데 따라갈라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삐뚤어진 걸 꺾지 못하면 자기가 삐뚤어진 것을 간접적으로 이렇게 둘러서 상대방에게 알려 가지고 상대방이 '이게 틀렸다' 하고 꺾으면 거게 찬동하고 따라가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옳은 데에 서고 뻐뚤어진 것을 꺾는 그런 일을 슬기롭게 할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에, 만일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옳은 것을 발견해서 주장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옳은 것에게 따라와야 할 터인데 할 수 있는 대로는 그렇게 안 할라고 애를 씁니다. 옳은 것이라도 설설 둘러서 해서 다른 사람이 그거 깨닫고 '이거라' 하면서 옳은 것을 말하면 '아, 그렇습니까?' 이제 자기는 처음 아는 듯이 거게 찬동을 하면서 따라갈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피조물들에게 순종하는 순종을 공부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그저 크나 작으나 제나름대로는 잘나서 자기 주장을 하는 그런 것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세상이요, 그런 것들이 아주 삼 밭에 삼대 들어섰듯이 꽉 들어서 가지고 있는 게 세상인데 이런 것을 다 주님이 그 날에는 모조리 다 거두어서 처형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 부인하기를 배우고, 자기 겸손을 배우고, 다른 사람 밑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지도나 지배나 받기를 힘쓰는 그런 연습을 해야 됩니다. 아무도 없으면 어짤 수 없어서 그거는, 사람들에게 암만 해도 사람들이 옳은 걸 주장해서 거게 지도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이면 어짤 수 없어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많이 스승되기를 원치 말아라. 네가 남의 지도자되기를 원하지 말고 뭐이든지 머리되기를 원하지 말아라.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또 모처럼 의로운 일을 했을지라도 영광을 받으면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나타내서 어떻게 되어진다는 그런 것은 백해 무익입니다. 다만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타나고 진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데에 이용당했으면 그거는 좋지만 그 외에 자기 단독으로. 자기가 뭣을 유명해지는 것은 그것은 큰 화덩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안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꾸 드러낼 때는 어짤 수 없어 그렇지만 자기가 유명할라고 하면 사망으로 박혀 내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는 자꾸 이것을 가리워서 그런 자 되지 안할라고 그런 위치가 해독 있는 줄 알고 피할라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이에게 지위와 권세를 줘 가지고 그로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거는 왜? 그는 실수하지 안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밖에는 들고 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3장 19절 이하에 주욱 내려 보면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영광이라고 칭하는 것은 나중에 모든 것이 다 진가가 드러날 때에는 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뭐 참 부끄러울 줄 모르고 부끄러운 것을 자랑하는, 이렇게 하고 돌아다니는 그것이 낯이 간지럽고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시면 다 구멍을 찾지 못해서 떨 것이요, 모두 다 거게 대해서 형벌받을 것이 얼마나 큰데 오히려 저는 지금 좀 칭찬 받을라고, 없으면 그것을 만들라고 돈을 들여서 만들고 뭐 이런 저런 조작배기로 자꾸 이렇게 간판을 만들라고 사람들은 애를 쓰는 것이 다 그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하는 그 조심은 사람들이 우리와 꼭 같이 다닐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권고와 협조와 또 경고해 주심을 가지고 자기가 조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가장 평온한 때입니다. 평온한 때에 그렇지 나중에 참 지느냐 이기느냐 승패의 결정이 되는 그 절정 마당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우리를 옳다 그르다, 바르다 삐뚤어졌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지도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끝까지 있으리라고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서 이렇게 예배를 한테 드리지만 그때는 나도 여러분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고 여러분들도 나를 만나지 못 할 것입니다. 왜? 다 세상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다 붙여서 세상이 이 구멍으로 끌고 가고 저 구멍으로 끌고 가고 이 자리로 끌고 가고 저 자리로 끌고 가 가지고 우리 단독 시험을 받습니다. 단독 시험을 받고 단독 연단을 받기 때문에 자기가 단독 조심하는 일을 연습해서 숙달시켜야 되지 다른 이로 말미암아 조심하는 그런 일을 '조심해라 주의 해라, 그 일을 하지 마라, 그라면 안 된다, 이렇게 해라' 하는 그런 것을 지금 듣기 싫어하지만 이 다음에는 그렇게 말해 줄 수도 없는 것이 그 또 그렇게 말해 줌을 받을 수도 없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너를 아끼고, 네가 너를 아끼고, 네가 너를 단속하고. 네가 너를 심사해서 해야 되지 다른 사람이 언제 너에게 대해서, 지금은 뭐 사람들이 남을 훼방하기 위해서도 간섭을 하고 남의 단점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도 악으로 좋아난 것이지 참 자기를 사랑함으로 그렇게 단점을 말 해 주고 또 장점을 북돋워 주는 그런 사람들은 아마 권찰님이 그 구역 식구에게나 그리 하고. 또 반사가 자기 맡은 학생들에게나 그리 하고, 또 교역자가 자기 밑에 있는 교인들에게나 만나면 그렇게 하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해 주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마 그런 것은 잠깐이지 이제 앞으로 '지느냐 이기느냐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이 결정 지워지는 그 마지막 결말 마당에 가 가지고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이 예수 잘 믿고 순교하자, 같이 다 신앙 지키자' 그런 생각은 그것은, 아예 그런 것은 다 포기하고 나 혼자 홀로 아무도 나 돕는 사람 없는 고독한 가운데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써 단독 전투에서 승리해야 된다는 그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하고 주의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항상 자신이 자신을 조심하기를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심이라 말은 잡을 조(操)자, 마음 심(心)자인데 우리 마음은 굉장히 빠른 것입니다. 빨라서 언제 뭐 하나로 시작하다 보면 쭉 연상돼 가지고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자기 있는 대로는 들은 대로는 온 세계를 다 삥 잡아 돌고 돌아다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도 간단하게 기도하라 말은 기도를 하다 보면 마귀란 놈 그 유혹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기이합니다. 어떤 기도하는 가운데에 어떤 물건이 하나 있으면 그 물건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 그 물건에 대해서 기도하다 보면 그만 그 물건에 관련된 것으로써 주욱 연상적으로 그 물건은 생산이 어디서 됐고 어디가 많고 적고 그걸로써는 어떻게 되고 그 물건 그걸 통해서 나중에 가서 보면 아주 엉뚱한 천리 만리 먼 데 가 가지고 자기가 엉뚱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서 '내가 어데 기도하다가 내가 이렇게 궁지에 빠졌느냐?' 이래 살펴보면 그걸 잘 되 찾아보면 어떤 물건 하나 말한 거게서부터 갈래길이, 미혹이 시작해 가 지고 엉뚱한 데에 가서, 그러면 기도하던 거 다 헛일 했습니다. 이러니까 기도하는 것을 어떨 때는 참 간절한 마음으로 한 이십 분이나 삼십 분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는뎨, 그 기도할라 하면 또 한 삼십 분 걸렸는 데 그라다 보니까 그만 나중에 엉뚱한 데 갔습니다. 엉뚱한 데 가서 기도한 것도 잊어 버리고 엉뚱한 데 갔어. 그래 그때 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면 다 헛 기도요, 다 헛 기도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 해야 되니까 또 새로 할라 하면 또 한 반 시간 걸려야 된다 말이오.
반 시간 걸려 야 되는데 또 반 시간 걸려 가지고 새로 한다는 게 또 헛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를 간단하게 해서 고게 식어지지 안하고 고게 대한 충족한 믿음과 소원과 간절, 하나님이 이루실 그 소망을 단단히 잡고 고게서 견고했을 때에 얼른 그것이 흐려지지 안하고 고게 잡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다른 것이 연상되지 못하게 즉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렇게 결말을 지우라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자가 마음을 자기가 잡아야 되지, 마음이라 하는 거 이것은 우리에게 -이 몸으로 하는 것은 참 둔합니다. 마음은 몸 뭐 몇십 배가 아니라 몇천 배 빠릅니다. 또 마음 중에도 양심이라 하는 것 은 굉장히 빠른 것입니다. 양심은 그게 날아다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은 자기가 기어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양심은 그 흔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에 대한 그 양심관이 어떤 신학자들은 양심은 인적 요소가 아니라, 그 신적 요소도 아니요 인적 요소도 아니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에 신의 사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은 처음에 마음을 잘 붙들어 가지고 제 맘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고, 양심에게 마음을 붙여 가지고 마음이 자유하 지 못하고 양심에게 속박을 받아서 양심에 참 절대라고 할 만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평소에 만들어서 양심이 권위가 있어 가지고 마음을 자유 자재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양심에 권위를 주는 것이 좋고. 마음은 양심에게 굴복을 시키도록 그렇게 연습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구원에 대해서 늘 마음을 붙들어 가지고 있거라. 네 마음을 잘못하면 그만 마음이 주위 환경에 그만 끌려가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조심하라는 것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 말은 마음을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 보고 사모하라' 하는 그 말씀과 꼭 같은 뜻입니다. 조심하라는 것은 네 마음을 주님의 재림,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것, 또 내 모든 행위가 주님 앞에 다 한 번 검사를 맡는 그 검사 거게다가 불곤 붙들어 매놔라 그말입니다. 조심하라 말은 그저 아무리 옆에서 천만금이 울렁거려도 네 마음이 그 천 만금의 돈에 따라서 움직이지 말고 네 마음은 주님의 재림에 볼끈 당글어 매놔서 항상 주님의 재림만 생각하도록 그렇게 해라 하는 그것이 마음을 붙들어 매는 조심하는 것입니다. 조심해라.
붙들어 매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방탕함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방탕함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우리 마음을 주님의 재림에 붙들어 매서 재림 거기에 인연을 해 가지고, 재림에 기인해 가지고 주님의 재림으로 인하여서 말도 하고 준비도 하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해서,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재림에 볼끈 붙들려 가지고. 주님의 재림에게 피동돼 가지고, 재림에 붙들려 매여서 재림에게 피동돼 가지고 언행심사를 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만 주님의 재림에 붙들린 줄이 뚝 떨어져 버리니까 그게 방탕입니다. 이러니까 시대에 붙들려서는 그만, 시대에 따라서 피동되고. 어떤 친구 만나면 친구에 피동되고, 어떤 권세 만나면 권세에게 피동되고, 어떤 예술을 만나니까 예술에 피동되고. 어떤 물질을 만나니까 물질에 피동되고, 어떤 행락을 만나니까 행락에 피동되고, 어떤 감정을 만나니까 감정에 피동되고, 어떻게 그 분함을 만나니까 분함에 피동되고, 어떤 시기할만한 일을 만나니까 시기에 피동되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우리를 삼킬라고 하는 원수는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할 만치 많습니다. 이런 것들에게 네가 따라서 움직이기 쉽다 하는 걸 가리켜서 방탕하게된다 그말입니다.
마음을, 잡을 조(操)자, 마음 심(心)자. 네가 마음을 주님의 재림 그날에다가 붙들어 매는 것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라.'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는 것은 거기에 속해 가지고 늘 항상 움직이도록 하라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방탕한 것은 재림이 나를 주관하지 안하고, 내 마음에는 재림이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마음을 눌러서 그저 밤에도 재림에 대한 거 생각하고, 낮에도 생각하고, 또 누구하고 이야기 할 때도 '아, 이 일은 주님의 재림 때 어찌 되느냐?' 무슨 물건이 닥쳐도 재림, 꼭 다른 사람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미친 사람이라. '이 사람은 재림밖에 모르네. 이게 재림에 미쳤네. 이 사람은 재림에 완전히 신경질이 돼서 정신 이상이 돼 버렸네' 할 만치 재림에 내 마음이 불들려서 뭣이든지 '아, 이 말은?' '재림에 후회된다. 아, 버려야 되겠다.' '이말은 네가 아무리 하기가 어렵고 힘들지만 재림에 가면 네가 이 말을 안 한 데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재림에 그 마음이 붙들려서 움직여야 될 터인데 조심하지 안하면 그만 이런 거 저런 데에서 방탕 되기 쉽다.
방탕은 공연히. 아닌 데 이것에게 끌려 가지고 마음을 그리 지금 흔들고, 저것에게 끌려서 저리 움직이고, 이것에게 끌려서 이리 움직이고, 시대도 수많은 시대가 있는데 시대의 조류에 피동되지, 또 이런 저런 수많은, 뱀의 꼬리는 '뱀의 꼬리로 사람을 죽이더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뱀의 꼬리는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이 이걸 가르쳐 줄라고 해서 그랬던지 어릴 때에 뱀의 꼬리에 대해서 내가 경험이 많습니다. 뱀을 어릴 때에 붙들라고 이라면 뱀이, 나는 처음에 몰랐는데 다르르르르르 뭐 그렇츰 빠를 수가, 다르르르르르 요래 떱니다. 그만 따르르르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뒤로 한번 그래 보이소.
따르르르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뱀의 꼬리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이 모든 주장들은 어북 강대국들이 주장하면 그 주장은 어북 그거는 한번 약속했기 때문에 그것이야 변할 리가 있겠나, 대국끼리, 강대국끼리 약속했기 때문에 그거야 뭐 십 년 이십 년 몇십 년이야 가겠지, 이렇지만 오늘 악속했느냐? 내일 변합니다. 금방 또 이렇게 말했는데 내일 변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변하는 데에서 사람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거기 유혹 받아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그 마음을 조심해서 하나님의 재림에 붙들어 매면 이런 주위 환경, 천태만상으로 이렇게 변하는 환경에 물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그만 이런 데 물들고 저런 데 물들어서, 이러니까 오늘 교회라 하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그저 어떤 것이 뭐이 하나 났다 하면 뭐 콱 모아듭니다. 마치 저 산골에 가서, 산골에서 용변을 하면 어디 똥파리가 어디서 모아드는지 콱 모아 드는 거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뭣만 있다 하면 그만 온 교회들은 그리 뭐 쏵 다 모아듭니다. 하나님이야 뭐, 하나님이야 상관없어. 하나님의 교훈이나 주의 재림이나 우리의 명령이나 그런건 상관없고 그거는 하루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버려 봤자 당장에 손해가 갑니까? 손해 가는 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맘대로 그라고, 말한 마디에도 쭉 돌아가고 한 인간에게도 쭉 돌아가서 이거 뭐 자기를 살펴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며 어디 따라서 내가 피동을 하느냐. 어디 속해 있느냐, 내 환경이 어디냐 내 목적이 어디냐, 내 소망이 어디냐, 내가 지금 어디다 대고 내가 생의 근거를 두고 주력하고 있느냐, 이걸 살펴보면 참 허무하고 더러운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가 인간인 것을 알 것입니다. 뭐 저주 아니라 그거는 그만 똥구덩이 속에, 그만 소산수 구덩이 속에. 불구덩이 속에 바짝 태워야 마땅한 자기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래서, 김현봉 목사님은 그 어른은, 그 시대에는 한국 교회 제일 성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뭐 하나님의 금성, 금성 생활. 금성욕 생활한 그 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고 모든 면에 양심 생활해서 책임지고 했습니다. 그 분이 신사 참배를 안 했습나다. 그랬는데. 그분은 마지막에 세상을 뜰 때에 자기 제자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꼭 화장을 해달라 그렇게 했습니다. '왜 화장을 해 달라 합니까?' '화장을 안 하면 안 된다. 화장하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라.' 약속을 해서 할 수 없어 화장을 했습니다. 화장 해 달라고 하는 그 이유가 자기의 이목구비 수족을 사랑하고 아낄 게 아니라 너무 죄를 많이 짓고 이와같이 더럽기 때문에 이거는 불을 완전히 태워 가지고 완전히 재림에, 불 안 태워도 뭐 뒤에 재림할 때에 변화되면 변화 되지 뭐 불에 태우나 그냥 묻어 놨으나 다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지만 그 육의 행동에 대해서 너무 자신의, 자기의 몸에 대해서 너무 증오심 이 많았기 때문에 그와같이 유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안하면 방탕하게 된다" 요거 기억합시다. 방탕하게된다 말은 이것에게 피동되고 저것에게 피동되고 모든 것에게 피동되고, 모든 것에게 피동되니까 사람은 한 군데 피동되지 두 군데 피동 뒬 수 있습니까? 이것에 피동되니까 하나님께 피동 다 버렸지 저것에 피동되니까 하나님께 피동 다 버렸지. 이러니까 하루 종일 살고 난 다음에 하루 종일 산 것을 계산을 해 보면 하나님께 피동된 거는 하나도 없고 전부 인간들에게, 사건들에게. 물건들에게 피동될 것뿐 입니다. 일 년만 그렇느냐? 일 년도 그렇고, 한 달도 그렇고,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 번 무엇에게 피동된 데 대해서 가슴을 치면서 놀래는데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을 다른 것들에게 피동되고 주님에게 한 번도 피동 못 해도 거기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거는 마음이 둔해 져 그렇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져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안하면 방탕하게 된다.
또 그 다음에는 술 취하게 된다. 술 취하게 된다 말은 이 술은 무엇을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시는고 하니 인간들의 모든 주의와 사상과 교훈, 다시 말하면 세상 뱀의 지식을 가리켜서 여게 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뱀의 지식은 우리가 알기는 알지만 뱀의 지식은 내가 그것을 하나님의 지식에게 복종할 때에 이용하는 이용물로는 삼지만 뱀의 지식이 나를 최종적인 책임을 지고. 인도하는 줄 알고 뱀의 지식을 따라서 제가 모든 사리 판단과 가치 평가와 자기 생의 계획을 하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이래서, 술 취한다는 말은 네가 세상 지식에게 도취가 되고, 또 세상주의에게 도취가 되고, 명예주의, 권세주의, 물질주의, 또 민족주의. 국가주의 가족주의, 뭐 도덕주의, 윤리주의 이런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아닌, 땅 위에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지만 그런 것은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서 도덕도 상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윤리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정치도 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도덕에서도 하고.
윤리에서도 하고. 가정에서도 하고. 사회에서도 하고 국가에서도 하고, 정계에서도 하고. 관공서에서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거게서 할 일이지 그것이 나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거게 따라서 움직이는 그런 것이 다 술 취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 술이 취한 것입니다.
이래서, "술 취함과" 이제는 스스로 조심하지 안하면 방탕으로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면 술 취하게 되고, 술 취하게 되면 뭐이 되느냐? 이 제는 고기덩어리의 생활에 대한 염려가 꽉 들어박힙니다. 생활의 염려로 말했습니다.
생활의 염려로. 성경에는 말하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은 하나님이 다 있어야 될 줄 알고 책임을 진다 했습니다.
아, 그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데 왜 그 사람이 밥을 굶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 하고 하지 말라는 일 안 하고, 일하러 가서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그러면 얼마 안 가서 그 공장에서도 가장 신실한 직공이 될 것이요. 좀 있으면 감독하는 공장장을 만들 것이요. 나중에 그 사람이 그래 하면 지능이 있으니까-아, 보디발이 뭣 때문에 요셉에게 자기 가정을 다 맡겼습니까? 자기가 맡아 하는 것보다도 요셉에게 맡기는 게 더 잘되기 때문에 맡긴 것 아니겠습니까? 요셉이가 감옥에 갔을 때 뭣 때문에 옥사장 이 요셉에게 그 감옥 모든 권리를 다 맡겼겠습니까? 뭣 때문에 바로 왕 이 죄수 요셉에게 애굽 나라의 모든 정사를 다 맡겨서 총리 대신을 맡겼습니까?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서 그래 하면 이 사람은 신실하니까 -정말로 사람을 써 보면 진실한 사람이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도 없고 부지런한 사람도 없고 자기 의무와 책임을 감당할라고 애쓰는 사람도 없고, 이거 감당한 사람은 또 교만해서 아무작도 못 쓰게 됩니다. 감당한 사람은 그게 왕될라고 해 가지고 나중에 가서 그라면 목 베임을 당하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 그거 제거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 같은 보배가 없는데 지금 세상에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말로 쓸모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 만 일 백 명을 자기 수하에다 두고 사람을 관리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만치 인제가 귀하다는 거,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열 사람을 쓰는 사람이라도 사람이 귀하다는 걸 느낄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을 쓰는 사람이라도 사람은 참 귀하다 하는 걸 느낄 것입니다. 뭐 모든 사람들은 정권 잡으면 그 정권자가 뇌물에 거석해 가지고 이리저리 팔린다 하지만 그것도 다 부족해서 이리저리 끌려 그렇지 정권을 잡았으면 그 사람의 소원은 네 소원이 제일 뭐이냐 하면 내가 정권을 가진 동안에 참으로 일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인재들을 내가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이 제일 소원일 것입니다. 안 그런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데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그 사람이 먹을 것이 없겠습니까? 이런데 공연히 조심하지 안하니까 그 사람이 방탕해지니까 뉘가 잠시도 그 사람을 등용할 수가 없습니다. 방탕하니까 팔방 미인으로 여게 가면 이 사람되고 저게 가면 저 사람되고, 이 사건 만나면 또 저 사람되고 저 사건 만나면 이 사람되고 이라니까 그걸 뭘로 믿고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주의 재림에 들어매여 놓으니까 여게 저게 방탕하지 안 하고 주님의 재림, 주님의 심판 때에 내가 심판받지 안하도록 이렇게 모든 일을 해야 되겠다 하니까 그 사람 하는 일이 철두철미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 하는 일이 인간이 볼 때에 흠 잡히는 일이 없지 일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다니엘 6장에 보면 그들이 다니엘을 보고 저 사람은 뭐 국사에 대해서나 무슨 사사일에 대해서나 도무지 책 잡을 것이 없으니까 저 사람을 정죄해서 몰아넣을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나라의 국법에 위반이 되도록 그렇게 꾸며 가지고 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그때 그것을 꾸몄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스스로 조심하니까 방탕함이 없어. 또 그 사람이 이런 교훈 저런 교훈에 물이 들어 가지고 마치 칠팔 월 바람에 이 수수 이파리 갈대 이파리 모양으로 뭐 일 분도 안 지나서 여러 수백 번 이리저리 휘떡거리는데 그런 인물 가지고 뭐 하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우리가 다 배고픈 겁니다. 왜 실직이 됩니까? 왜 거기서 내가 주일 지킨다고 그 사람을 버림을 당합니까? 제가 주일 지켜도 그 사람들이 목을 당글어 매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 일해 달라고 그렇게 붙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넉넉히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신앙의 교훈이 있었는데 그 말씀대로 하자 않았기 때문에 멸시를 받아서 천대받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뭣 때문에 왜 주일 못 지키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직장이든지 자기가 주일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계명을 지켜서 되는 직장이면 자기 직장이고 꼭 범하지 안하면 안 되는 직장은 자기 직장 아닙니다. 남의 직장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그거는 내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믿음을 지키지 안했든지, 믿음을 지켰으면 하나님이 저를 보호해 주시지, 믿음 지키니까 거게 책임자는 반해서 못 견뎌서 '너 아니면 나 죽겠다, 너 아니면 내가 이거 못 하겠다.' 아마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네가 내 밑에 없으면 안 되겠다.
너는 내 눈이요 내 수족이요 내 입이요 내 심장이요 내 소원이니까 너 없으면 안 된다.' 하고 그 사람 아니면 죽을라 할 건데 그 사람이 그 직장에서 주일 지킨다고 쫓겨 나가겠습니까? 말씀을 지킨다고 쫓겨 나가겠습니까? 그럴 리가 절대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다 우리가 경험해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다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이제 '어떻게 하면 생활할 까, 생활 염려 됐으면 벌써 많이 타락한 것입니다. 자, 처음에 조심하지 안한 것 타락. 또 뭐입니까? 방탕 타락, 또 뭐입니까? 술 취함 타락, 또 생활 염려는 뭐입니까? 네째 타락이요. 네 번이나 타락이 돼 가지고 이 꼬라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네 번이나 타락이 돼 가지고.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에 모든 걸 만드셨고. 로마서 8장에 보면 '독생자도 아끼지 안하고 너희들에게 줬는데 하물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그까짓 것을 너희들에게 필요 하는 데는 주지 않겠느냐?' 말씀했습니다. 생활의 염려, 생활 염려하면 어찌 됩니까? 생활 염려되니까 마귀란 놈은 이래야 네가 밥 먹고 산다, 저래야 네가 자녀 공부시킨다 하니까 이게 전부 물질 가지고 꼬우는 거 아닙니까? 마귀란 놈이 물질 가지고 꼬우니까 그 꾀우는 대로 다 따라갔다 보니까 그 마음이 뭣 되겠습니까? 그 마음은 완전히 정신 이상자고 그 마음은 벌써 변질된 것 아닙니까? 변질된 마음이라 그말이오.
"마음이 둔하여지고" 마음이 둔하지는 건 마음이 어두워진다 그말이오. 이제, 재림을 말해도 감각이 없고 강단에서 며칠 설교해도 감각이 없고 눈이 꺼물꺼물하다가 '야. 너 직장 떨어진다. 하면 '어 뻐뜩하고 '너 지금 아무데 돈벌이 된다' 하면 '어?' 그렇고, 이제 순전히 그 양심도 물질에 화인을 맞았고 그 사람도 물질의 종이 됐고, 물질의 것이 되었으니까 물질이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사모하라 합니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까? 그걸 들으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이 둔해졌다' 말은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과 우리의 준비에 대한 것과 현실 현실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자기의 소유가 되는 기능 부활을 다 뺏기고 있지만 거게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라면 어찌 되느냐? "뜻밖에 그날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래 지나다 보니까 생각지 못할 때, 만날 돈만 보고 자기 직장만 보고 거게만 충성하갰다고, 직장 거게만 충성하겠다고, 그 일만 하겠다고 이라다가 보니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준비 하나도 안 했는데 갑자기 닥치니까 제 하던 일이 전부 그물에 다 걸려 버렸지. 저 하던 일이 그물치다 걸렸으니까 이제 하던, 제 맘대로 하던. 재 자유 행위하던 것은 전부 다 걸려서 심판에 가서 다 멸망 받고 마는 거 아닙니까? "뜻밖에 그날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리라" 예수님의 재림은 동양만이 아니고 서양만이 아니고 동서양이 다 같이 임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서양도 소용없고 동양도 소용없어. 어디든지 똑 같이 임합니다. 그러면 강대국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노아 홍수 때에 강대국이 무슨 효력이 있었습니까? 무슨, 네피림을 많이 말했으니까. 네피림이라면 잘난 사람들이라 말이오. 잘난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 없어. 다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한 노아의 배 모은 그것만이 효력이 있었습니다. 노아의 배가 뭐 다른 때는 효력이 없었어. 다만 홍수 심판 때 그때 효력이 있었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의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이 세상에는 효력이 있지만 그까짓 거 효력은 뭐 안 믿는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효력은 뭐이냐? 온 하늘과 땅이 다 불탈 때에 그때에 타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랄 수 있는 외로운 거, 하늘과 땅의 것이 통일 될 때에 그것을 다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그때에 거기에 남아 있는 그 모든 의인들 그 효력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외에 딴 효력은 볼라고 하지 안해야 됩니다. 땅에 있는 효력 봐 봤자 그까짓 거 다 없어질 거, 온 천하를 얻어도 없어질 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그 36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재림에 모든 것이 멸망받는 데 멸망받는 이런 것을 피하고 하는 말인데, 이 멸망받는 것을 피할라고 하면 그 전에 피해야 됩니다. 조심하지 않는 그것을 피해야 됩니다.
방탕을 피해야 됩니다. 술취함을 피해야 됩니다.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눌리는 일을 피해야 됩니다. 이래서 일편 단심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생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그 인자 앞에 서도록 그말은, 인자라 말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인자라 했는데 예수님을 여기 왜 인자라고 말했는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데 왜 이 분을 인자라고 했는가? 인자라 말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부요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어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그 모든 부요가 다 우리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거지같이 돼 가지고 하나님의 부요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부요하게 하는 그것을 오늘에 시기를 놓치지 말고 부요를 상속 받으라 그 말입니다. 인자로 말하는 것은 그말이오.
하나님의 그 부요를 인자 되시기까지 근본 부요하시더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셨다.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부요를 오늘에 받으라 그말입니다. 오늘에 받으라,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그 우리는 이거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주님에게 자꾸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들이 기도해 보면 압니다. 기도하면 자꾸 바짝바짝 들어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자꾸 또 한층한층 자꾸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마음이 자꾸 조금씩 조금씩 강해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자꾸 하늘의 것으로 옮겨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자기가 자꾸 커 나가는 것도 알 수 있고, 얻어지는 것도 알 수 있고, 회개하는 것도 알 수 있고 눈이 밝아지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안 할 때에는 자기가 잘났고 전부 원망 불평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는데 기도하고 보면 전부 흠점이 자기에게 있어 남에게 말할 것이 없는 것이 자꾸 되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그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자들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고 삽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 무궁토록 사망이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병드는 것이나 원망이나 시비나 질투나 시기나 이 모든 불평의 모든 눈물 이런 더러운 죄악이 없는 그 나라를 우리가 바라보고 삽니다. 진리와 의와 거룩과 사랑의 그 나라를 우리가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 그말은 그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살라 그말이오. 자체로 말하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으니 너는 피로 된 사람이요. 너는 성령으로 된 사람이요, 진리로 된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로 사는 것이 네요, 영감으로 사는 것이 네요, 주님의 세 가지 이 대속으로 사는 것이 네니까 이 사람으로 살아라. 참 너로 살아라 그말이오. 참 너로, 새사람 너로 살아라. 참사람 너로 살아라 말이오. 네가 아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더불어 되어져 있는 너 아닌, 너를 죽인 원수, 너 아닌 너, 거짓 너 그 자로 살지 말고, 유혹 받아 살지 말고 참사람 참 너 곧 그리스도인으로 네가 살아라. 영생을 가진 너로 살아라 그말입니다.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노력합시다. 이 일이 그렇게, 어려워도 피곤치 않습니다. 이 일은 피곤치를 않습니다. 왜 피곤치 않는가? 피곤치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 신앙 간증을 들어 보면 그렇습니다. 피곤치 않는 이유는 이 생활에 소망이 크기 때문에 소망으로 인해서 피곤을 모릅니다.
또 소망뿐이라면 낙망하지만 소망이 자기가 힘을 쓰니까 자꾸만 그 소망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그날 물건 팔아 가지고 돈이 돈궤에 재이는 것보다도 더 확고하다 그말이오. 자꾸 이렇게 조심함으로 자기 변화가 되어지지, 자기 정신이 변화가 되어지지, 지혜와 지식이 변화가 되어지지, 자기 성질이 변화가 되어지지, 이러니까 과거에 그놈의 죄악성에게 걸려서 꼼짝 못 하던 것도 미움도 얼마 안 있어서 보니 미움이 간 곳이 없고 미움이 보이지 안하지, 시기도 없어지지, 질투도 없어지지, 그 뭐 이런 또 이런 욕심 저런 욕심에 못 견디는 그런 괴로운 더러운 욕심은 다 간 곳이 없어지지.
자꾸 자기가 이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까 현재 유익이 있는데, 현재 유익이 있는데, 받는 유익이 있는데, 반드시 변화가 있는데 그 사람이 피곤할 턱이 있습니까?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이 들어서 피곤치 않게 하고, 또 힘을 쓰니까 현재 바로 유익을 자기가 보기 때문에, 유익된 걸 자기가 느끼기 때문에 유익 이 있으니 피곤치 않습니다. 또 자기가 변화되는 걸 볼 때에, 심판 하나 하나를 면하고 이렇게 모든 궁지에서 헤어난 걸 볼 때에 피곤치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소망에서 강한 힘이 오는 것이고, 또 자기가 큰 무서운 궁지에서 벗어 나오는 데에 힘이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 그렇지만 6.25때에 그때 후퇴하고 난 다음에 산에 있는 공비들이 ○○교회에 내려 왔는데 그때에 어떤 사람들을 하나 아는 사람, 내가 말 들었는데, 여러 사람 있는데 ○○목사를 붙들고 '이 쌀짐 이거 지고 가자.' 할 수 없어지고 가는데 지고 가니까 저게까지는 지고 가 가지고 그 절골이라 하는 데가 아주 산이 높습니다. 거게까지 지고 가더니만 '좀 쉬어 가지고 가자.
쉬어 가지고 가자.' 이라더니만 그 너머 잿만당에 넘겨 놓더니만 넘겨 놓으니까 뭐 밤새도록 깜깜한 데 지고 갔으니까 발은 전부이 터지고 다 베이고 뭐 다 깨져도 뒤에 막 총부리 대고 하니까 어짤 수 있습니까? 이래지고 갔었는데 그 너머에 가더니만 '이제 너희들 수고했다. 놓고 가거라.' 가거라 하는 데에는 뭐 그렇게 밤새도록 길을 걸었으니까 '아이구 피곤하다. 누워 자고 가자. 해지지 않고 얼마나 뭐 다리가 날든지 뭐 날라오다시피 왔다고. 피곤치도 않다고.
그래. 어려움에서 해방을 당하면 그래 기쁜 것이고 힘이 나는 것이오. 우리는 소망으로 기쁨의 힘이 나오고 현재 유익이, 수입이 있으니까 기쁨 이 되어지고 또 어려움에서 해방을 당하니까 기쁨이 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피곤치 않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지금 준비해야 됩니다. 그렇게, 오전에도 말씀하신 거와같이 물질 문제도 당신이 다 해결을 말씀하셨고. 자기의 모든 활동하는 문제도 다 말씀을 하셨어. 모든 걸 당신이 다 주권하고 계시니까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생사 문제도 당신이 다 말씀 하셨어. 이러니까 안심하고 우리는 그저 거룩과 경건에만 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거룩과 경건에 전력 기울이라 말은 거룩이라 말은 자꾸 정선에, 정선 생활을 계속하라 그말이오. 거룩하라 말은 정선 생할로 제속하라 그말이오. 경건 생활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계속하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계속하라 말은 이 시간에 위했으니까 다음 시간에도 위해야겠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 시간에 위한 것을 또 살펴 보니까 또 위한 것이 아니다. 요거는 주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실상 주님 위하는 것도 있고 나 위하는 것도 있다. 주님 위한다고 하는 거는 있고 속에 내게 이런 것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위했다. 만일 주님 위하는데 순전히 주님만 위하고 내게는 낭파가 당한다고 했으면 내가 위하지 않을 것이다.
자꾸 자기가 이래 가지고 위하는 것을 또 삣고 깎고 정선하고, 자기가 모든 선택하는 것을 또 구별하고 구별해서 그저 주님 만나는 날까지, 구름 타고 오시는 그날까지, 불타는 그날까지 어쩌든지 너의 언행심사와 네 희로애락과 너희의 이목 구비 수족과 너라는 사람 그 모든 것을 자꾸 씻고 삣고 깎고 하라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발을 씻겨 줄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님이 제자 발을 씻길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할 때에 주님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아, 그라면 온 몸을 다 씻겨 주십시오.'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되니라'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주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들은 아무리 대속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이 죄악 세상에서 살아갈라고 하면 자꾸 날마다 허물과 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실수를 주님이 씻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실수 있는 걸 또 주님 앞에 고해서 또 사함 받기를 얼마나?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제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회개하거든 사해 줘라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주님이 지금 오늘에는 사랑의 주님이요, 자비의 주님이요, 용서의 주님이요 관용의 주님이지만 일단 그날이 오면 어떤 주님이신고 하니 요한 계시 6장에 보니까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 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이 별도 달 저거 다 떨어집니다.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바위에, 바위에 치여 죽는 것보다 주님 안면이 더 두려워서, 더 무서워서 치여 죽기를 원한다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시기가 지나가면 진노의 주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시기를 놓치지 말고 그저 지금부터 분발해야 됩니다.
이제까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은 평생 분발했습니다. 뭐 사도 바울같은 그런 이도 평생 분발하면서 결혼이고 뭐이고 아무것도 보지 안하고 주님의 소원하는 그 뜻을 위해서 평생 분발해도 마지막 죽을 때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낳은 그런 자와 같이 무능 한 자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마음이 걱정된다' 이랬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그 준비하는 게 이래 가지고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기에 이 세상에 존귀한 걸 보거던 세상에 존귀한 것도 저떻게 귀한 데 무궁세계에 존귀한 것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세상에 사람들이 천한 거 병신이나 병들은 거 그런 거 보고 마음에 고통스러울 때에 무궁세계에서 병들고 천하고 한 것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좋은 걸 보아서 무궁 세계에 좋은 것을 우리가 연상해야 되고,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걸 봐서 영원 무궁세계에서 불행스러운 것을 우리가 연상하고 오늘에 깨어 준비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말아야 됩니다. 따라합시다.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자! 우리의 마음을! 완패케 하지 말자! 스스로 조심하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