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19:54
소경 바디메오
1987. 2. 22. 주일오후
본문:마가복음 10장 50절∼52절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믿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이 믿음이 우리에게 다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서 이 소경이 눈 뜨기 전에 보던 세계와 눈이 뜨이고 난 다음에 본 모든 세계가 어떠하였을까 그것은 우리가 다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보는 것과 눈을 뜨고 보는 것의 차이를 가지고 꼭 소경처럼은 모르지마는 그와 비슷하게는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눈을 감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많이 봐서 익숙한 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눈 감으면 안 보이고 눈 뜨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의 느낌은 눈을 감아도 눈 떠서 보이던 그 모든 지식과 관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판이하게 놀랠 만치 다르지는 안하지마는 이 소경은 평생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눈을 떠서 다 보게 될 때에 그 변화와 변동이 어떻게 됐을까 그런 것도 우리가 깊이 좀 묵상하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되면 영안이 열리기 이전과 영안이 열린 이후와는 그는 참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게 차이가 있고 변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그의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소망하는 것이나 또 평가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그의 모든 언행심사가 놀랄 만치 달라지는 그런 것을 우리 교회 내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상도 못 할 만치 그 사람이 바꾸어지고 행위가 바꾸어지고 그의 모든 견해나 비판이나 평가가 아주 바꾸어져서, 참 이 소경이 길가에서 구걸하던 그 소경과 이제 눈 떠 가지고 씩씩한 사람이 된 후에 볼 때와의 사람이 아주 바꾸어진 그런 거와 같이 그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우리가 자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은 지 오래 돼도 변화됨이 없지마는 어떤 사람은 어떤 한 집회를 통해서 큰 변화가 되고 또 어떤 한 기회에 어떤 은혜 받는 그 날을 통해서 아주 변화되는 그런 것을 우리가 잘 봅니다.
저 ??교회에 거기 가서 있는데 우리 교회 있다가 간 ???집사님의 남동생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이 서부교회있을 때에 아무짝도 쓰지 못할 사람이고, 그???씨도 조금 그렇지. ???씨, 손 들어 봐요. 어데 있어,???? 어데 있어, 저게? 거기 손 든 사람 있어요? 내가 며칠 전에 길가에서 만나서, 예배 볼 때 보면 예배에 참석 안 합니다. 참석 안 하고 어데 가 끼여 앉았는지 안 보여요. 미쳤어. 내가 어제 그말 했어. 너 광신인데 주의해야 되니까 이제는 예배 볼 때 앞에 앉아 있거라. 언제 보니까 뭐 구찌베니를 바르고 뭐 옷을 얄궂게 입고 이래 꾸며 가지고 나왔는데 그래 내가 ‘왜 요새 예배 볼 때 안 보이노?’ 저 뒤에 어데 끼여 앉았다 하는데, 지금 일층에 있는지 몰라. 일층에 있거든???씨 이층으로 올라와요.
새벽으로도 그전에는 잘 나오는 사람인데 그 짓하고 있어요. 얼마 안 가서 그행세 하면은 두 가지 나타납니다. 집구석이 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집구석에 큰 축복 올 것이 축복이 오지 못 하고 가로막혀 있든지 그거 되고 만다 그거요. 안 망할 사람이 망하는 그거나 큰 축복을 받을 사람이 축복 못 받는 그거나 다 망하는 거라. 그라겠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까 또 안 보이는구만.
그 사람의 남동생인데 그거는???씨보다도 몇 배나 못쓸 인간이라. 아무짝도 못쓸 인간이라. 인종지 말자는 그거라. 그랬는데 그게 은혜를 척 받고 나니까 어떻게 변화됐는지 ??교회가 그 사람을 통해서 그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됐습니다.
또, 그 사람이 집이 좀 먼데 있는데 거기 와 가지고 늘 신앙 생활 하다가 또 자기 있는 본토에다가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해 가지고 또 거게다가 교회를 세워 가지고???전도사님이 가서 시무하고 있는데 거게도 그 교회가 꽤 큰 교회가 되고 아주 견고한 교회가 됐습니다.
뭐 그뿐 아니라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하면은 우리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목사님도 예수 믿기 전에 아주 개구장이입니다. 이랬는데 어째 그만 한번 변화를 받아 가지고 그는 한국이 아는 성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같이 했고.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참 많습니다.
내가 김천 가서 한번 만났는데 김의근씨라 하는 그 사람이 아마 여러분들이 혹 책에서나 잡지에서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도 아주 악독한 사람이오. 보통 사람으로 있으면서 저 만주 가 가지고 거게서 경관 노릇 하면서 사람을 사십육 명인가 칠 명인가 죽였습니다, 제 마음에 안 든다고.
아주 악독 잔인하고 교만하고 안하무인인 참 못쓸 인종지 말자, 아주 못쓸 인간인데 그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화를 받아 가지고 그 다음부터 출발해서, 자기는 거지를 멸시한 그것을 회개하다가 그만 회개해 들어다가 주님 만나 가지고 돌이켰는데 일생 동안 거지로 지내면서 앉은뱅이를 그때까지 칠십 명 전도해서 회개시켰고, 일반 뭐 병신 거지 이런 사람들 전도해서 믿구로 만든 것은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수가 모를 만치 그렇게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불량하고 그저 제게 마음에만 비위가 맞지 안하면 그만 사람을 죽여 버리고, 그때도 뭐 지금과 같은, 왜정법이니까 없는 거는 아니고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는 건데 그만 제 마음에 맞지 안하면 사람을 그만 몽둥이로 때려 죽여 버리고 하는 그런 아주 악독하고 잔인하고 교만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그 뒤에 내가 그 사람 책을 읽어 보니까 이 노방 전도를 할 때에 언제든지 사람들이 안 모이니까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전도를 해요. 각설이 타령을 하는데, 그리 안 하면 아이들이 안 모이니까 자꾸 웃기고 이래 하면은 아이들이 주 모이니까 하도 웃겨 쌓고 그라니까 저까짓 거야 뭐 사람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괜찮다 싶어서 돌로 가지고, 이마가 벗겨졌습니다. 돌로 때려 주니까 그만 여기가 터져 버렸다 말이오.
터져 가지고 인제 피가 나오니까 피가 나오면 아이들 피만 보면 고만 도망갈 거라. 그러니까 벌써 아파 터지기는 터졌는데 그래 얼른 손으로 이래 딱 이래 눌러 보니까 벌써 뻐꿈하이 들어가서 이래 손으로 뻐꿈 눌러 보니까 들어간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이래 눌러 대면서, 이래 눌러 가지고 그래 피는 안 나오는데.
이래 가지고서 또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이제 돌로 때릴라면 여기는 땐땐해서 깨지니까 여기 궁둥이 여기를 때리라고서, 돌로 여게를 때리라 이라면서 각설이 타령을 해 가지고 그래서 아이들 모이면 전도하고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교회를 굉장히 많이 세웠습니다.
여게서 소경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는 그 즉시로 그 사람 눈이 뜨여 가지고 보게 됐습니다. 눈을 떠 보니까, 눈 감았을 때에 이 모든 삼라 만상을 하나도 보지 못하다가 눈이 뚝 떨어지니까 그 별세계가 보일 것 아닙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서 그 제자가 돼 가지고 여생을 예수님에게 바쳤다는 그런 뜻으로 여게 기록돼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이하에도 보면 “천국은 이와 같다. 뭐와 같은고? 보화를 만난 사람이 보화를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 보화의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보화에 욕심을 내서 자기 있는 소유를 다 팔아 가지고 보화가 묻혀 있는 그 밭을 산 거와 같다. 또 진주를 찾아 구하러 다니던 사람이 진주를 만나니까 자기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 그렇게 거기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천국은, 이 천국에 대한 것을 자기가 보게 되면, 이 소경이 눈 뜬 것같이 보게 되면 천국을 보고 난 다음에는 그 천국의 소망과 천국의 욕심으로서 자기 이 세상 생활을 다 팔아서 이 천국 구원이 이루어지는 세상 생활 하게 된다 하는 것을 거게 비유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밭은 세상을 가리켜서 밭이라고 말한 것인데 밭을 제가 팔아 가지고 제 밭을 만들어야 그 보화를 제 보화 만드는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소유도 몸도 생명도 전부, 이 세상을 자기가 발견한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 자기 전부를 투자하지 안하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안하기 때문에 자기 가진 전부를 이 구원을 위해서 다 투자하게 된다, 안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는 말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다 이랬는데, 우리는 이 천국을 소망하고 다 소욕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마는 이 천국의 가치를 어떻게 알며 천국에 대한 그 진상을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천국이 이 온 세상보다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 이것보다 그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을 인해서 천국을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고 천국을 위하여 이 세상 것을 투자하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늘나라를 잘 봤느냐 안 봤느냐? 또 그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봤나, 어느 정도 보고 있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봤느냐? 하나님의 크심을 어느 정도 봤으며 또 하나님의 그 두려우심을 어느 정도 봤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봤으며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바로 보고 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자기를 어느 정도 백분지 일쯤 바로 봤는가, 천분지 일쯤 바로 봤는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사람의 행동을 봐서 자기의 장점, 단점, 희망점, 또 징계점, 멸망점, 자기의 모든 불의한 점 이런 것을 어느 정도 보고 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떻게 봤는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러면 세상에서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목사고 장로라도 이 세상들이 좋아하고 있는 그런 것을 취해 보겠다고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 또 그것을 인하여서 진리를 양보하고 또 신조를 양보하고 신앙 양심을 팔아 가면서 그렇게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이 세상의 가치를 어느 정도 보고 있는지, 하늘나라의 가치를 어느 정도 보고 있는지, 자기라는 그 자기를 어느 정도 정확히 보고 있으며 어느 정도 자기라는 모든 분야에 다각면의 범위를 바로 보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행동을 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요새 모두 인권 옹호 인권 옹호 그래 쌓지마는 그것은 성경에 비해서 다 외식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사람의 가치성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사람과 나와의 그 관계되는 그 모든 인연들이 어느 정도 갈 것으로 보고 있으며 어느 정도 중대한 것으로 보고 있는가, 또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이래서, 참 사람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저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무식하나 유식하나, 저 사람이 세상관이 무식하나 유식하나, 다 일방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나, 정말로 세상을 꿰뚫고 세상의 그 진상과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그 중요성과 필요성 이런 것을 어느 정도 보고 있는지 그런 것은 그 사람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사건에 대해서도 저 사람이 모든 일, 좋은 일 나쁜 일, 뭐 궂은 일 기쁜일, 내 일 남의 일, 사회 일 국가 일 모든 시대 일, 저 사람이 일에 대해서 관찰력의 그 범위가 어느 정도 넓으며 어느 정도 정확하게 보고 있는가? 그것은 보는 대로 그 사람이 느끼고 아는 대로 처세하지 안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행동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물질에 대해서는 저 물질관이 어떠냐?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느냐? 물질에 대해서 일방적 지식만 가지고 있느냐 쌍방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그저 물질은 어짜든지 많이만 가지면 좋은 줄 알고 많이 쓰고 싶은 대로 많이만 쓰면 좋은 줄 아는 그 사람은 일방적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질도 있어 좋을 때도 있고 없어 좋을 때도 있습니다. 또 써야 좋을 때도 있고 쓸 것이 없는 때가 좋은 때도 있습니다. 쓸 것이 있어서 쓰는 때보다 쓸 것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는데, 쓸 것이 없어야 될 때에 그때 쓸 것이 있는 데에는 그것이 큰 고통입니다,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던져 버려도 죄 가지고 있어도 죄, 줘도 죄 안 줘도 죄, 이러니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나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이 나면서 소경된 이 사람이 눈이 감기워서 보지 못한 때와 눈이 열려서 본 때 그때 그 변동이 어떨까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깊이 좀 느껴봐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다 이거 자연계시, 없어질 세상입니다. 없어질 모든 껍데기 삼라만상을 보는 이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형식계시입니다. 이것으로 볼 수 없는 그 심령으로 영안으로 보는 없어지지 안할 그 무궁한 세계는 이걸로 비교할 수 없이 더 복잡하고 화려하고 완전하고 실상인 그 세계가 있는데 이 소경이 이 삼라만상으로 되어 있는 물질 세계를 보지 못하는 거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이 모든 신령한 면을 보신 거와 같이, 선지 사도들이 본 거와 같이 지금도 모든 믿음의 그 위인들이 본 거와같이 그런 세계를 우리가 본다면 우리도 당장 변화가 되고 우리의 견해도, 우리의 소욕도, 우리의 경영도, 우리가 가치로 평가하는 것도 이제 지금과 아주 달라질 거라 그말이오.
눈이 뜨이기 전에는 자기는 예를 들면 뭐 이 땅위에 있는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진 그것이 좋다고 가치로 여겼지마는 눈이 뜨이고 난 다음에는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이제는 내가 배설물로 여긴다” 한 것은 그뿐 아니라 아무라도 이 지혜의 눈이, 미래를 보는 지혜의 눈, 하나님을 보는 지혜의 눈, 또 하나님의 두려움을 보는 지혜의 눈,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그 눈, 하나님의 절대성과 정확 무오성, 엄격성, 공평성, 정의성 하나님의 이 면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그분이 모든 것을 공평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눈 이 눈만 하나 떨어져도 우리의 생활은 확 달라질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는 그가 반드시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이 당신의 법대로 당신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자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전지 전능의 당신의 절대성을 가지고 책임지고 그 일을 그대로 다 상으로 갚아 주시는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변화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변동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관이 창조주관이, 하나님의 심판관이, 보응관이, 영원 무궁세계의 관찰이 이것이 바로 떠져서 바로 본다면, 바로 보인다면 변화가 안 될 수가 없고 그렇게 변화된다면 뭐 당장 주님 따라가지 누구를 따라가겠습니까? 따라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공자를 따라가겠소, 석가모니를 따라가겠소, 어떤 과학자를 따라가겠소, 예술가를 따라가겠소, 피조물 가운데 누구를 따라가겠소? 주님 외에는 따라갈 이가 없고 내 표본으로 삼을 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이 눈이 어두워진 여게 대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이 소경 바디매오를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야 소경인 것을 우리가 성경 보고 환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다 소경인 줄 알았고 자기도 소경인 줄 알고 이렇지마는 우리는 소경이면서 소경인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바디매오란, 이 바디매오를 가지고 가르친 거는 우리가 바로 바디매오라.
바디매오로 되어 있는 우리들이 바디매오인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바디매오를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영원 전 예정하신 대로 그때가 되니까 창조해서 그만치 자라 가지고서 눈이 어두운 그 소경이 돼 가지고 그때 만나구로 한 요것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렇게 하신 것이라 그거요.
소경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이 떠지니까 전부 사람은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눈 하나 뜨고 나니까 완전히 변해졌소. 그 사람의 처신도 변해졌고, 행동도 변해졌고, 소망도 변해졌고, 가치도 변해졌고, 생활도 변해졌고 전부 다 변해졌습니다.
한 말로 말해서 그 사람은 예수 따르는 사람 됐습니다. 예수 좇는 사람 예수 따르는 사람 됐어. 예수 배우고, 예수님 본받고, 예수님께 가르침 받고, 예수님 인도 받고, 예수님 닮아가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이 사람이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데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소망입니다. 바디매오가 눈 뜨고 난 다음에 길에서 예수님 좇은 그것은 막바로 나도 눈 뜰 수 있고 나도 예수님을 길에서 좇을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단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것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가 가진 그 믿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는 요 믿음이 참 우리에게 소원이 됩니다. 요 소경에게는 이것보다 그에게는 더 보배가 없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는 이 믿음보다, 그가 뭐 제가 구걸해서 남에게 신세를 끼쳐 남에게 덕이나 보고 누나 끼치고 싸움해 가지고 속이고 꾀워 가지고 자기가 세상에서 아무리 구걸을 많이 해 놨다 할지라도 구걸보다 눈 뜨는 게 낫지 않습니까? 구걸보다 이 믿음이 더 보배고 그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뭐 생존 경쟁을 해서 누구를 하나 떨어뜨려야 자기가 올라가고 쫓아내야 제가 대신 들어가 차지하고 그 사람을 뺏들어야 얻고 하는 그런 거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가져서 온 세상을 다 차지해 봤자, 바디매오가 그가 구걸해 가지고 구걸한 신세가 많이 얻어 봤자 얼마나 얻겠습니까? 많이 얻어서 그 구걸로 제일 일등 구걸을 했다 할지라도 이 믿음만 못하다 하는 걸 우리가 확실히 여기서 판정지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남에게 혜택 입고 남을 이용하고 남에게 모든 것을 혜택을 남에게 얻고 혜택 입어 가지고 제가 어데까지 올라갔고 어데까지 커지고 어데까지 됐다 할지라도 이 눈 뜨기 전에는 그게 좋은 줄 알고 이랬지마는 눈 뜨는 거와 비교하면은 그런 거와 비교가 안 됩니다.
이 모든 존재관이 바로 되고 모든 행위관이 바로 되고 영원히 행한 대로 보응되는 영원 무궁세계의 보응관이 바로 되는 그것은 이 세상을 차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보배라는 것을 이 바디매오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우리들도 우리의 형편에서 이 사실을 아는 우리들이 돼라고 형식계시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이 믿음이 뭐인가? 오전에는 우리는 모두 다 이 바디매오와 같이 모두 불쌍하고 가련한 비참한 사람이라, 비참한 사람이라는 그것을 말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비참한 사람이라 하는 그것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바디매오와 같이 불쌍하고 가련한 그런 비참한 사람이라 이렇게 말을 하면은 세상 사람들은 다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고 우리 말을 헛된 말이라고 거짓말이라고 우리에게 달라들어서 해를 가할라고 할란지도 모릅니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하는 그 믿음은 여게서부터 다 믿음으로 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히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이 성경 지식으로 가지고 우리 자신들을 비판한다고 하면은 여게서 비참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사람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신앙 생활 했지마는 자기는 마지막에 순교 직전에 있어서 “이제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갔고 내가 싸울 싸움을 다 싸웠기 때문에 내 앞에는 면류관만 남아 있다” 이렇게 말했지마는 그가, 고린도전서 9장에도 보면은 그는 벌써 노경에 쓴 성경이지마는 자기는 참 누구보다도 화가 있어 죽자껏 신앙 생활 해도 벌을 면하지 상은 받을 수 없다 하는 그런 사람으로, 괴수 죄인으로, 또 만삭되지 못한 그런 아이와 같이 그렇게 자기가 그렇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부자가 돼 가지고 있는지 가난해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하나님으로 어느 정도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어느 정도 내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심을, 능력을, 전지의 지혜를 내가 어느 정도, 다 내것 삼을 수 있는데, 내것 삼을 때에 하나님의 전지도 내가 어느 정도 가졌는지, 전능도 어느 정도 가졌는지, 하나님의 모든 온갖 속성을 내가 어느 정도 가졌는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멀어 있는지 가까워 있는지? 이 성경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성경대로의 하나님에게 대해서, 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약속한 이 약속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 또 이 세상살이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뭐 모든 것 다 하면 우리는 거지 중에 거지요 비참한 중에 비참한 자, 이거는 참 말할 수 없는, 당달봉사입니다.
당달봉사는 눈은 환하이 뜨고, 다른 사람이 보면 그 사람 눈 뜨고 있는 줄 압니다.
이래 그냥 있으면 눈 뜨고 앉아 가지고 다 보는 줄 알지마는 실상 하나도 보지는 못합니다. 그게 당달봉사인데 우리가 당달봉사라.
우리 자신을 이 모든 면으로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이나 자신이나 모든 인간이나 만물에 대해서, 천국과 심판에 대해서 이래 본다면 우리가 언제 땅위에 뭘 잡겠습니까? 땅위에 뭐이것 저것 할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모든 것 다 집어던지고 지금 이 일에 대해서 탄식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썬다 싱도 그의 눈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눈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가 살 희망도 없고 아무 데도 가치 없고 자기는 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무가치한 사람인 줄 알고 철도에 가 가지고 그 시간만 기다리고 레일을 베고 누워서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시간에 차가 오면은 자기는 거게서 그만 자살해 버리려고 했는데 그 시간에 주님이 오셔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야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는 이 말씀 한 마디를 그가 듣고 눈이 뜨여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여생을 주님에게 다 바쳐서, 뭐 그분의 전기를 보면 네 시간 동안, 저 불란서에 파리라는 그 거리에 가니까 하도 사치가 많아서 거게 유혹받아 가지고 네 시간 동안 주님 잊어버렸지 그외에는, 네 시간 동안 주님 잊어버린 것이 자기의 일생 동안의 암흑이고 그외에는 주님을 순간도 잊어버리는 시간 없이 주님 한 분으로 자기 전부를 삼아 가지고 살았다는 그것을 전기에 다른 사람이 기록해 놓은 것을 봤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비참한 걸 모르지, 이 사람은 자연인으로 비참하지마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구속받은 사람 우리는 특수인이요 우리는 영생을 가진 사람인데, 우리는 영생 가진 사람인데 영생으로 살지 못하고 날마다 사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영생으로 살지 못하고 날마다 사망 가운데서 있으니까 그만해도 얼마나 비참합니까? 모든 소유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우리는 이 우리 생애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국으로 비춰볼 때에,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에 참 말할 수 없는 거지고 천한 사람이고 비참하고 이거는 신세가 가련한 사람이고 우리는 남에게 구걸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항상 예수 믿어서 장로가 돼도 목사가 돼도 어떻게 하면 남에게 뭘 덕이나 볼까 하는, 만날 그런 구걸하는 위치를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사는 우리의 이 비참하고 가련하지마는 이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소경 바디매오만 못한 사람이오.
여게서 소경 바디매오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소경 바디매오와 같은 이 비참한 우리라 하는 것을 이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줄 모르는 그게 제일 여게, 이 계시 교훈에서는 제일호로 우리가 깨달을 것이 뭐냐 하면 이 소경 바디매오가 비참한 이 비참, 가련하고 불쌍하고 비참한 불행스러운, 불행스러운 자기인 것을 깨달은 것이, 그것을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이, 자기가 그런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이 일호의 그의 지식입니다. 희망 있는 일호의 지식, 희망 있는 일호의 지식.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는 우리가 모든 면이 거지고 모든 면이 비참하고 가련하고 그런 우리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성경에는 이래야 된다는데 그게 하나도 없어.
성경에 가지라 하는 것을 우리가 가진 것이 별로이 없어. 또 성경에서 버리라 하는 것을 우리가 버린 것이 별로이 없어.
성경에 비참하고 가련하니까 그런 것을 다 버리라 하는 것은 다 가지고 있지, 또 성경에 이런 것을 네가 어떻게 어려워도 가지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하고 있지, 이러니까 우리가 참 성경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심판받을 거와같이 오늘이라도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모든 것이 불탈 때에 그때 우리가 될 그 신세를 우리가 지금 모르고 있다 말이오. 그때 당할 때에 우리 신세가 어떤 자리에 있을 것인가 하는 그것을 우리의 눈이 어둡기 때문에 몰라.
그래서, “믿음을 보시고” 하는 그 믿음은 자기가 참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인 것을 인정하는 그 믿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인정에서부터 그 믿음이 시작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해 가지고 그 사람이 아주 갑자기 돌변이 돼서ㅡ요거 모르면 안 돼요ㅡ갑자기 돌변이 됐어. 그 사람이 갑자기 돌변이 돼 가지고 그만 길에서 예수님 좇은 그 사람으로 아주 시야와 견해와 소망과 평가와 비판이 아주 달라져 버렸어. 아주 변해져 버렸어.
아주 변해진 원인이 뭐이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했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했는데 그 믿음 우리가 필요한데 그 믿음의 시발이 어데서 시발하느냐? 그 믿음의 시발이 자기의 비참하고 가련한 그 신세인 것을 알고 있는 그 믿음, 알고 있는 그 믿음. 믿음은 뭐이냐? 믿음은 하나님의 이 도리를 알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인정하지 안하고 성경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비참해도 비참한 것을 비참한 줄 모르고 행복인 줄 알고, 우리는 손해간 걸 손해간 줄 모르고 유익된 줄 알고, 자기 참 자기 영생하는 자기는 죽여서 이거 구렁텅이에 쳐 넣어 놓고 자기를 죽인 악령 악성 악습인 원수인 그놈이 들어서 자기에게 와 가지고, 심신에게 와 가지고 ‘내가 네 주인이라’ 하고 있는데 원수를 주인인 줄 알고 그놈에게 내 마음도 맡겨 놓고 몸도 맡겨 놓고 그놈 하자 하는 대로 하기 때문에, 그놈 하자 하는 대로 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죽은 생활 망한 생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매일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법도를 가지고 볼 때에 자기는 그날 큰 성공을, 세상적으로 볼 때는 막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했는데 그 성공에 ‘나는 오늘 죽었다’ 그렇게, 매일 일과를 쓰는 시간표에다가 죽었다고 죽음의 표시를 했고, 자기는 그날 자기가 돈도 뺏기고 지위도 뺏기고 인권도 유린을 당하나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손해보지 안한 그 생활 할 때는 ‘오늘은 승리했다, 오늘은 큰 수입을 받았다.’ 이래 가지고 시간표에 날마다 매기면서 그래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거요.
제가 여기 와 가지고 처음에는 매일 일과의 시간표를 정해 가지고 그 종이를 박아서 더러 나눠 줬습니다. 나눠 주면서 매일 네가 여게 대해서 나는 오늘 죽은 생활 했다 산 생활 했다, 오늘은 성공을 했다 실패를 했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인제 그런 걸 안 합니다. 왜? 그것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직접 해야 되지 그런 것 가지고는 몇 가지 안 되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더 세밀하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거게 맞추어 살아야 된다 하기 때문에, 몇 가지, 그때 스물 몇 가지인가 해 가지고 그랬는데 그런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큰아들, 맏아들이 서른세 살에, 자기도 주님이 재세, 세상에서 계신 그 이상 나는 있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참 신앙에 독특한 신앙을 가지다가 마지막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서른세 살 먹었을 때에 체포돼 가지고 순교를 했습니다.
했는데, 그분도 늘, 내가 말 들어 보니까 자기 매일 시간표를 정해 놓고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시간표 정해 놓고 사니까 똑 기계 생활 같아서 안 됐다. 이러니까 시간표를 정해 가지고 살다가 또 던져 버리고 시간표 없이 그냥 살아보고 이래도 나중에 결말에 결산을 대 보니까 아무래도 시간표 생활 한 그것이 오히려 수입이 낫더라. 그래 자기 잘못한 것도 알고 자기 연약한 것도 알게 되고 참 얼마나 힘을 써야 그 일과 시간표 정해 놓은 대로 이행이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되더라. 그분은 그게 평가적으로 수입이 낫다고 해 가지고 시간표를 매겨 놓고 생활한다 소리를 제가 같이 있던 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우리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요 믿음이 참 보배인데 요 믿음에 제일 시작하는 첫걸음 말이요, 첫자욱. 첫자욱 요 첫째 시발의 믿음이 뭐인가? 믿음이 뭐인가? 성경을 보아서 성경을 인정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을 인정함으로 성경대로 내 모든 생활을 평가해 보고, 내 자신을 평가해 보고, 내 행위를 평가해 보고, 내 모든 성품을 평가해서 나를 평가해 보고, 성경대로 내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평가해 보고, 관계를 평가해 보고 하니까 이 전부가 엉망이고 연고라. 눈이 어두운 연고라. 보지 못한 연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는 다시 어떤 믿음 가졌더냐? 이것은 천하에 있는 지식이 다 뭉쳐져도 나에게 이 사실들을 바로 보게 해 줄 지식은 없다. 온 천하 지식을 다 통달했다 해도 그 지식 가지고는 나에게 이 모든 시관을 바로 해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서 후회될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 재림 때에 기막힐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무궁세계에 벌거벗은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이것을 금생과 내세를 바로 보여 주실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 하는 것도 성경을 보는 사람이, 성경을 믿는 사람이 알 수 있다 그말이오.
이는 자기의 비참의 원인이 못 보는 것인 것을 알았고 또 못 보는 그것을 해결해 주실 이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르짖었다 말이오. 그가 길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부르짖은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천국 가는 이 시온의 대로, 천국 가는 이 길에 지금 서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마태복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거게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길에 있을 동안에 급히 사화하라.” 하는 길에 있다는 것은 천국 가는 이 도중이라 말이오. 천국 가는 도중에 급히 사화하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길가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길가에 있으면서 예수님 만나 가지고 내 모든 비참의 원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이 보지 못하는 걸 고침 받을라 하는 이런 소망 가지지 안하고 길가에서 지금 여게서도 ‘내가 어떻게 되면 장로 되고 어떻게 되면 목사 될까? 어떻게 되면 무슨 사장 될까? 어떻게 하면 무슨 세상에서 무슨 감투나 쓸까? 이런 거 저런 거 할까? 무슨 내가 재벌을 할까? 무슨 사업에 성공할까?’ 이 전부, 이것도 소경이라서 그런 걸 원해.
소경이라서 병신이라 그걸 원하지 이제 눈이 뜨인 사람이면 그걸 원치 않을 거라.
그러니 이 소경은 그런 걸 원하지 안하고 그도 구걸하는 사람이지마는 예수라는 소식을 일단 듣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 한 분 만나서 눈 띄움 받기를 일편 단심 소원했습니다. 그게 믿음이라. 그 믿음이라. 오늘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금생 내세 영육에 참으로 우리의 모든 불행을 다 벗겨 주시고 우리에게 온갖 구비한 행복을 입혀 주실 이는 주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없다는 요것을 믿는 요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 외에 딴것도 우리에게 무슨 필요 있고 유익된 것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지금 불신인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나에게 이 모든 원인을 해결해 줄 이는 없다는 것을 이 소경은 믿고 있었습니다. 요 믿음이라. 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해결이 우리에게 됩니다.
그 믿음이 지금 몇째 순서입니까? 몇째 순서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지금 몇째 순서요? 요 믿음이 몇째 순서? 제일 처음에 비참한 것을 아는 믿음, 또 그 다음에는? 자기에게 눈이 감겨져서 보지 못하는 것이 그 비참의 원인이라는 것을 아는 믿음, 또 그 다음에는?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믿음.
그라면 믿음이 몇 가지 믿음입니까? 세 가지 믿음, 세 가지 믿음.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그 다음에는 쉽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부르짖으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르면서 고함을 지르니까 모든 사람이 있다가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야단쳤다 말이오, 잠잠하라고. 이러니까 이 소경은 예수님께 소원이 있어서 예수님에게 지금, 그분밖에는 눈 띄워줄 이가 없기 때문에 그분에게 바른 올바른 시관을 가질라고, 올바른 시관을 가질라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옆의 사람은 잠잠하라고 야단칩니다.
우리가 올바른 지금 모든 금생 내세, 창조주 피조물에 대해서 바로 보는 이 지혜의 눈, 이 영의 눈은 예수님만이 띄워 줄 수 있는데 이 눈 띄움을 받을라고 이래 하니까 옆의 사람들이 방해하는 일이 있었다 말이오, 방해하는 일. 방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도 지금 월요일부터 갈라 하는데 무슨 방해하는 일이 있을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천막을 두 번이나 칼로 가지고 푹푹 쑤셔서 두번째는 막 난도질을 해 놨어, 줄도 끊고. 아마 되게 분했던 모양이라. 이랬는데 이제 기도하러 가서 산에 가서 밤에 기도하고 있으면 칼로 쑤실 것이다 하는 그런 것이 내게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 하는 그 방해물인가, 방해물인가? 하나님이 그걸 방해물로 그렇게 한번 나에게 줬는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은 뭘 방해물이 별로이 될 것이 없고 그거 뭐 그런 거 문제가 없는데 무슨 방해가 있을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방해가 있을란지 몰라.
요렇게 주님 만나야 내 눈 띄움을 받고, 참사람의 눈을 띄움을 받을 터인데 참사람의 눈 띄움을 받을라고 할 때에 예수님 만나야 되는데 옆에서 만나지 못하구로 방해하는 그런 것이 뭣이 있을란지 몰라.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란지 몰라요. 무슨 일이 있을란지. 무슨 뭐, 무슨 전보가 올란지 무슨 전화가 올란지 무슨 사건이 일어날란지 뭐이 일란지 모릅니다. 반드시 일어난다 그말이오.
제 경험으로서는 과거에도 그렇게 그런 데가 있어서 이거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 되겠다고 이제, 그냥 그때는 아무것도, 이런 요새같은 때가 아니오. 그래서 양산밖에 없어요, 양산. 삿갓은 가지고 갈라 하니 좀 거석하고 양산 그때 드뭅니다. 귀해요, 양산. 그런데 양산 하나 말아 가지고서 그냥 가요. 혹 비가 오면 이래 쓸라고.
양산 하나 말아 가지고 올라갈라 하면 그때는 반드시 사람이 지금 무슨 사건이 생겨 그렇든지 그리 안 하면, 요새 소 거석한 거 큰 거 좋은 거는 한 백 몇십만 원 하는데 그 소 한 마리, 소가 죽을라고 지금 구불고 야단지긴다고 이래 가지고 와요. ‘이거 뭐이 오지’ 싶어 있으면 옵니다. 그거 와서 ‘이게 죽을라 합니다.
그놈을 어짤랍니까?’ 그라면 나는 그때 그만 요걸 알기 때문에 ‘그래 그거 죽거들랑 그라면 죽기 전에 잡아먹어 버려라. 돈 주지 말고 잡아먹어 버려라.’ 잡아먹어라 하고 그만 그래 그만 가 버려요.
막히지 안했는데, 그런 것에는, 물질에는 막히지 했는데 사람 가지고 막을 때에 무슨 나중에 시비가 나 가지고 이라는 데는 갈라 하면 못 가게 해요. 거머쥐고 시비해 보자고. 이러니까 그런 것도 있고 별별 있지마는 그럴 때에 이제 주님 만나러 가는 데 방해하는 것이 있을 터이니까 이게 문제다.
이러니까, 여게 잠잠하라 하니까 이 소경은 도리어 더욱 큰 소리로 가지고 마구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할 때에 방해를 당하지 안하고 방해를 할수록이 더 강하게 날뛴 그것이 무슨 이유인가? 그것이 믿음이라.
왜? 자기 해결은 예수님밖에 해 줄 수 없는데 자기 영원한 비참이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인데, 보지 못하는 게 원인, 영원한 멸망의 원인을 해결해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는데, 영원한 멸망의 원인을 해결하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이는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만날라고 애를 쓰니까 방해하니까, 방해하니 그 방해 하는데 조금 지체하면 안 될 거라 말이오.
방해하는데 그만 지체해 지나가도 안 되니까 아예 시간도 급하지, 그 방해하는 그때에 방해를 받으면 제가 살아봤자 소용 없다 말이오. 방해를 받으면 살아 있어 봤자 비참뿐이지 소용이 없다 하니까 이제, 자기가 예수님 아니면 눈 뜰 수 없는 그것을 자기가 믿었고 그때에 눈 뜨지 못하면 살아 있어 봤자 죽는 것만도 못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생명보다 눈 뜨는 게 중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인다 해도 상관이 없이 마구 부르짖었다 말이오. 요게 믿음이라.
어떤 방해가 있어도 방해 그것보다, 방해보다 내가 주님 만나서 눈 뜨는 것이 더 중요하고 크기 때문에 방해 그 방해에게 방해를 받지 않는, 방해할수록이 급하다 말이오. 방해를 하니까 지체가, 시간이 가니까 방해할수록이 급하니 고함 소리가 더 나왔다 그거요. 이것이 주님이 보시고 “네 믿음이” 한 그 믿음이라. 그러면 그 믿음이 몇 째요? 믿음이 몇째입니까, 손가락으로? 넷째 믿음이라, 넷째 믿음.
그라니까 이제, 처음에 야단을 치고 했지마는 야단치는 것도 언제든지 야단치는 것 아닙니다. 야단을 쳤는데, 마구 옆에 뭐 별소리 다 했을 거라. 그때 ‘아, 그놈의 새끼 저기 끌어내라. 뭐 시끄럽다.’ 하며 별별 뭐 협박도 오고 욕도 오고 얄궂었을 거라.
이래도 고함을 지릅니다. 고함을 지르는데 예수님께서 척 머물러 서시면서 ‘그를 내게로 오라 하라’ 예수님이 한번 척 돌보시고 말씀 한 마디 딱 떨어지니까 모든 인심은 확 변해져 버립니다. 변해져 가지고 그만 그렇게 천하게 멸시하던 사람들이 있다가 ‘야, 안심하라. 너 오라 한다. 야, 너 오라 한다. 너 오라 한다.
안심하라. 너 오라 한다.’ 그만 모두 다 야단입니다. 이 신앙 생활이 이런 것입니다. 그런 반드시 역경을 넘고 보면은 그 다음부터는 막 환영이요 존대입니다.
이래 가지고 말하기를, ‘너를 오라 한다.’ 주님이 오라 한다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오라 해요?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얼른 나오너라.' `가만 있어요 이것 좀 치우고요.’ ‘또 뭐이냐?’ ‘요것 좀 단속 좀 해 놓고요. 또 뒤에 올라 하면 요거 뭐 입을 옷도 비 맞으면 안 될 터이니 또 요래 좀 챙겨 놓고’ 이거 저거 사람이라는 것은 그 참 뭐 갈라 하면 힘 안 듭니까? 저는 그게 있어서 항상 그거 좀 느낍니다. 어데 갈라 하면 언제든지, 서울 갈 때도 기차 탈라 하면 꼭 막 급하게 달려가 가지고 지금 뜰라 할 때 타고 그렇지 뭐 넉넉히 가서 기다려 보지를 못했어. 어찌 됐던간에 어떻게 느리게 뒤로 끌어대는지.
이런데, 이 소경은 그렇지 안했어, 그만 겉옷이라 하면은 거지는 제 재산의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겉옷을 집어던져 버리고 그만 뛰어 일어섰다 했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요 믿음. 그가 그 들을 때에 이제 자기의 소원의 그 희망이 보여지니까 자기 땅위에 가졌던 거 하나도 보이지 안해.
그 소원이 거게 다 매였기 때문에 자기의 가진 무슨 보배니 그런 거 뒷날 생각지 안해. 그만 있는 것 다 버리고 뛰어 일어섰어. 그러니까 뛰어 일어선 거는 다른 것 생각할 여가 없이 즉시 주님이 명령하시는 데에 복종했다 그말이오.
명령하시는 데에 복종. 모든 거 다 버리고 즉시 복종하는 거.
우리도 요렇게 주님 만나서 눈 띄움 받을 때에 반드시 방해물도 있고, 방해물이 있고 난 다음에, 언제든지 방해 있는 것 아니라. 방해 있다 누끔해져 버립니다.
누끔해지고 난 다음에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옵니다.
음성이 올 때에 주님의 음성 듣고 나면은, 주님이 요렇게 하라 하는 영감을 주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그때는 옆에 있다가 ‘요것 좀 하고 가거라. 요거 어짤래 요거 어짤래?’ 하는 그런 문제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문제들이 요 문제 조 문제 여러 문제가 우리에게 다 다시 폭발이 돼 가지고 그런 문제들이, 자유해.
어짜든지 그만 겉옷을 집어 던지고, 겉옷을 집어 던지고, 또 지체하지 말고 뛰어 일어섰다 하는 요것이 요 믿음의 중요한 것이오.
이래서, 소식 듣고는 “겉옷을 버리고” 믿음이 몇 가지 믿음입니까? 겉옷을 버린 믿음이 몇이요? 다섯. 또 “뛰어 일어서” 그러면 또 몇 가지 믿음이요? 여섯 가지야. 여섯 가지지? 여섯 가지 믿음. “뛰어 일어서”
뛰어 일어서 가지고서 이제 주님 앞에 가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뭘 해 주기를 원하느냐? 원하느냐?” 그러면 그때, 여러분들 마귀 시험은 그놈은 교묘합니다. 이래 가지고 주님 만나서 눈 뜰라 하는 그 찰나, 눈을 떠 가지고 모든 것이 영감 받아 눈 떠서 지금 그라면 사람은 변화되는데 그럴라 하면 그 찰나에 뭐 보여 주는 게 많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다 그래 가지고 실패합니다. 기도하면 그때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이 문제는 이래 하면 되겠고 저 문제는 저래 하면 되겠고’ 그때에 만사가 형통 문제가 일어납니다. 만사 형통 문제가 나오요.
‘내가 이랬으니까 요거는 요래 하면 될 뻔했구만. 요거 요래 하면 될 뻔했구만.
그 사람한테 또 말하면 되는 건데.’ 그 모든 이제까지 수수께끼가 어려웠던 것이 환하게 해결되는 그런 문제가 많이 있으니까 그때, ‘이게 주님의 영감인가보다.
감사합니다. 내가 그 일을 이제까지 어려웠었는데 고거는 이렇게 말하면 되겠고 조거는 조렇게 말하면 되겠고 요렇게 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탈선을 딱 해 버려서 주님 만날라 하는 건 헛일 돼 버리고 말기 쉽다 말이오.
그때에 이 소경은 ‘너 뭐가 필요하냐?’ `녜, 돈도 필요하고 뭣도 필요하고' 뭐 필요한 것이 많이 있을 터인데, 다 아니야. 그때 ‘이거 말해라. 이때 네가 기도해 가지고 이것도 주님께 한 마디 해라. 한 마디 해라.’ 그뭐 기도할 것도 많이 있고 사건도 많이 있는데 다 받아들이지 안했어. 자기 처음에 목적한 그대로 쪽 일관으로 나간 그것만 가지고 끝까지 나갔지 딴걸 가지지 안했어요.
‘뭣을 내가 너에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아무것도 없고 `보기를 원하나이다.' 자기 처음에 비참의 원인이 보지 못하는 원인 그것을 가지고 마디가 또 생기고 마디가 또 생기고,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몇 가지 나왔지? 몇 가지 믿음이지? 일곱 가지 믿음. 일곱 가지 마디가 쪽, 마디가 딱딱 생긴 일곱 가지가 쪽 곧게 계속 됐다 말이오.
그럴 때에 주님이 그걸 보시고 뭐, 딴거 있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즉시 그의 모든 만물관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만물을 볼 때는 손으로 만지면 오돌돌한 이것밖에는, 손으로 만지는 이것밖에 못 봤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먼 것 가까운 것 환하게 다 보인다 그말이오.
우리 심령이 열리고 보면은 인간의 죽음도 별게 아니라.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거, 죽음을 놀래지마는 죽음이 별게 아니라 말이오. 죽음 그거는 내나 이 방에서 있다 이리 옮겨지는 것이고 또 헌옷 때묻었으면 벗어 내 버리고 또 새옷 입는 것이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헌옷 벗고 새옷 입는 거, 썩어지고 낡아질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것 혈육의 옷 벗고 신령한 옷 입는 거, 이러니까 뭐 그게 더 좋은 것이지, 헌옷 벗고 새옷 입는 게 좋지 않소? 이거 눈이 어둡기 때문에 자꾸 마귀의 미혹에 제한받아 가지고 우리의 시야가 좁기 때문에 해석을 해 가지고 자꾸 좁아지고 요라는데 조금 넓게 보니 그게 아니라.
이 일곱 가지 순서를 그대로 가지고 마지막에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할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일곱 가지 이 마디를 가진, 일곱 가지 마디를 가진, 일곱 가지 힘을 가진, 마디를 가졌다 말은 마디가 힘있는 것 아닙니까? 일곱 가지 힘을 가진 믿음이라. 일곱 가지 힘을 가진 믿음.
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이제 “너를 구원하였다” 할 때에 우리 눈이 환하게 보여서 이제 참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세상을 보는 거와같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세상을 뒤로 돌아볼 때와 같이 보여질 수 있는, 우리는 지금 보는 세상을 그때 가면 영 달라. ‘왜 그때 어리석게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고거나 고거나문턱 넘으면 고건데 왜 그랬을까? 왜 뻘뻘 떨까? 전능자가 모든 걸 주권하고 계시는데 뭐 공산주의가 와서 죽일라 한다고, 신사참배 안 하면 죽일라 한다고 뻘뻘 떨고 그랬을까?’ 그때에 보는 그 시야가 지금도 볼 수 있는, 그때에 모든 것을 바로 정견한 거와 같은 그 바로 보는 것을 지금 가질 수 있는 이것이 요 일곱 가지 마디 있는 이 믿음에서 생겨지기 때문에 안 놓으면 됩니다. 변함이 없어. 천지는 변해도 변함 없어. 안 놓으면 돼요. 안 놓으면 다 돼요.
되는데, 사람들이 요것을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아는 사람, 지식으로 알고도 요대로 나가지 안하고 중간에 요런 조런 애로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데 다 걸려 가지고 그만 낭파당하고 만다 그말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