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20:07
소금과 빛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에 대한 이 비유의 해석은 너무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요새 늘 이 말씀을 계속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듣는 분은 이 소금과 빛의 비유가 뭣을 가르켰는가 하는 그 뜻을 들어 깨닫고, 이미 그 비유의 뜻을 아는 사람은 실상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이렇게 거듭 여러 날 하는 것은 실상으로 옮기기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지 뜻을 알리기 위해서 한다면 한 번 들으면 대개는 다 아는데 두 번 더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상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실상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가지고, 실상과 비슷한 그런 것을 인용해 가지고 실상을 알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비유입니다. 그러기에, 비유와 실상은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백 프로 완전을 나타내고 있고, 비유라는 것은 잘 나타내 봤자 한 그저 오십 프로나 나타낼까 하는 그런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비유보다 실상은 더 정확하고 또, 두려운 것이라면 더 두렵고, 정확한 것이라면 더 정확하고 어려운 것이라면 더 어렵고, 귀한 것이라면 더 귀하고, 천한 것이라면 더 천하다고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비유보다 실상은 한 몇 배 더 정확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가 무서우면 실상은 그 몇 배 무서운 것이요, 비유에 비참한 것을 비유했으면 실상은 그 비유보다 몇 배 비참한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보다 실상은 더 정확하고 더 강한 실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그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비유에야 이렇게 했지만 실상이야 이렇츰 이렇겠느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주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비유에 이러니 실상은 어떻게 되겠느냐, 비유에 이렇게 무서우니 실상은 어떻게 되겠느냐, 비유에 이렇츰 세밀하니 실상이야 얼마나 세밀하겠느냐, 비유에 이렇게 비참하니 실상이야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그렇게 비유보다 실상은 더 강도가, 정확성이, 세밀성이 더 심하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을 가지고 비유를 상대해야 되겠습니다.
13절에 소금 비유는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 대해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또 14절로부터 16절까지의 빛으로 비유하신 것은 다른 사람을 내가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하고 저렇게도 해석한다 이렇게 생각지 말고, 이건가 저건가 그 해석은 하나뿐이지 둘은 못 씁니다. 둘은 아닙니다. 물론 그 해석을 나타내는 방편은 뭐 열도 가질 수가 있겠습니다. 그 사람의 지식 범위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런 것을 이용해 가지고 나타낼 수도 있고 저런 것을 이용해 가지고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 이치는 둘이 없습니다.
하나뿐이지 그 이치는 두 가지가 아닌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 해석은 이치가 이런 이치도 되고 저런 이치도 된다면 그 해석은 둘 다 틀렸든지 그리 아니면 그 중에 어느 것이 하나 틀렸든지 틀렸지 둘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진리를 농부에게는 농사 짓는 이치로 나타내고, 어부에게는 고기 잡는 이치로 나타내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장사하는 이치로 나타 내고, 또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정치하는 이치로 나타내고, 뭐 예술가에게는 예술로 나타낼 수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 소금 비유를 요 해석을 정확하게 알아야, 이 소금 비유는 자기 구원을 이루는 방편이라, 또 빛으로 비유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방편이라, 우리가 이 진리를 알 때에는 어느 정도 정확히 알아야 되느냐? 자기가 힘 들어도 행할 만치 정확히 아는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자기가 힘이 들 뿐 아니라 큰 손해를 봐도 행하지 아니할 수 없을 만치 우리는 강하게 알아야 되고, 또 손해갈 뿐만 아니라 자기는 목숨을 내놔도 안 행할 수 없다, 목숨을 내놔도 행해야 된다 하는, 목숨이라도 내 놓을 만치, 목숨보다 이 깨달은 것이 더 정확하고 가치있고 귀중한 것으로 자기는 여길 만치 깨달아져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자기는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또 어려울 때는 또 피하고 쉬울 때는 하고, 그보다도 생명에 문제가 될 때에는 그때는 피하고 안 해도 되고 그런 일이 없을 때는 해도 되고 하는 이런 정도의 중량 가볍게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람이 아직까지 이 진리로 자유할 수 있는 그런 데에 실력 가진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소금은 믿는 사람의 그 맛을 말합니다. 맛이라 말은 믿는 사람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요, 믿는 사람의 실력을 말하는 것이요, 또 믿는 사람이 어떤 필요성이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가치는 무엇이며, 믿는 사람의 실력은 무엇이, 믿는 사람이 필요한, 믿는 사람의 필요성은 뭐인가 하는 그것을 말하는데, 여기 소금으로 비유한 것은 우리를 중생시킨 이 세 가지를 말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와 대속의 피공로로 인한 성신의 감화 감동과 또 대속의 피공로로 인한 진리 이 셋을 가리켜서 소금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소금은, 우리가 세상 소금이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우리는 딴 사람입니다. 다른 것들이 가지지 못한, 소금이 짠 간을 가진 거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 가치를 가졌고, 또 실력을 가졌고, 또 중요한 그 필요성을 가진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 소금이라' 이러니까, 세상의 일반인과 우리와는 다릅니다.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우리가 가졌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소금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우리만 소금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우리 기독자들만 가진 것입니다. 기독자들만 가진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비유해서 소금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별된, 우리를 소금으로 비유했고, 우리를 소금으로 비유했고 우리가 가진 대속과 영감과 진리를 소금의 맛이라. 소금의 맛은 짠 거 있습니다. 짠 것입니다. 짠 것이라, 간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요 비유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의 해석이 절대성 있게 확고해야 또 앞으로 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도리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도리가 확고하고 힘있게 걸어 나가지 이 비유에 대한 것이 '그럴듯도 하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가 있겠다. 이래 할 수도 있겠다' 이리 돼지면 그 사람은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길 만한 그런 실력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 말은 우리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를 잊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이 말은 아무걸로도 짜게 할 수가 없다 그말입니다. 짜게 할 수가 없다. 진리를 한 번 잊어버리면 영원히 다시 진리는 찾지 못한다, 영감도 잊어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예수님의 대속도 잊어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소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있고 말도 하고 있을지라도 진리와 영감과 이 대속의 공로는 언제 자기 것을 삼을 수가 있느냐? 언제 자기 것을 삼을 수가 있느냐? 이 세 가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우리 사람보다 무한히 높고 큰 것입니다. 무한히 높고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진리를 내것 삼는다, 영감을 내것 삼는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것 삼는다' 하는 것이지, 작은 자가 큰 자를 자기 것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자기 것 삼는 일은 작은 것이 큰 것의 것이 되면 큰 것은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큰 것에 속했으면 큰 것은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는 평소에 그 사람이 이 진리를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 뭐 평소에 아무리 자기가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을 하고 계속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말하는 것이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고, 자기가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지 자기 것은 되는 것 아닙니다. 진리는 꼭 자기 것이 되는 것은 현실에서만 진리는 자기 것 되지 현실 외에서는 자기 것 되지 못합니다. 영감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속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이 현실에서 자기 진리, 자기 영감, 자기 대속이 될라고 하면 현실에서 반드시 '네가 이 진리냐 그렇지 안하면 이 진리 아닌 이 세상의 무엇이냐 이 둘 중에 하나 취해라' 이랄 때에 자기가 세상 것을 버리고 현실에 요 진리대로 자기가 복종을 해서, 진리대로 복종하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대로 복종하면 나는 진리의 것이 되고 진리는 내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내가 가질라고 하는 데에는 현실에서만 진리를 가질 수 있지 현실 외에서는 백 번 읽고 외우고 노래 부르고, 뭐 외우고 다른 사람에게 이 진리에 대해서 강의를 세계 일등 강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진리는 자기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꼭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진리냐 그렇지 안하면 딴것이냐 둘 중에 하나 취하라 하는 그런 현실을 주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만들어 주셔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나는 이 진리를 영접하고 나는 진리에게 속하고 나는 진리와 하나 되겠다' 이렇게 해서 온 세상을 버려, 세상보다 진리를 더 귀중히 대우할 때에 그 진리는 자기 진리가 되고 자기는 진리에게 속하고 진리는 자기를 책임지고 보호하는 것이지, 그런 '보다'가 없는 데는 진리는 자기에게는, 자기 것 되는 그런 기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일생 동안 신학자로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가르쳤으나 자기에게 그 현실을 만났을 때에 진리에 반대되는 다른 것이 거게 왔을 때에 진리를 버리고 다른 것을 취했다고 하면 일생 동안 그 사람은 진리를 강의하고 교수하고 설교했지만 그 사람은 진리는 하나도 자기 것 삼지 못한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다시 말하면 진리라는 것은 사람보다 무한히 큽니다. 진리는 없는 가운데서 모든 만물을 참조한 능력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창조했습니다.
진리는 만물을 창조했고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진리에게 창조하라고 명령했고, 그러면, 진리는 모든 만물을 창조한 시공의 실력이요 또 하나님은 시공하라고 명령하신, 명령하신 분입니다. 그만침 진리는 우리와 동등이 아니고, 우리는 다 진리로 말미암아 생겨졌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보다 무한히 큰 존재입니다. 하나님 다음의 존재인데 실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논리 순서로 말하면 자존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서 영감이 나왔고, 영감에게서 진리가 나왔고, 진리에게서 성경이 우리에게 나온 순서로, 논리로는 그렇지만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는 그 사람이 진리를 소유할라고 하면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용할라고 하면 이용을 못 합니다. 이 진리는 지극히 크고 높으기 때문에 피조물이, 우리 사람이 이 진리에게 내가 복종함으로, 이 진리에게 복종함으로 이 진리를 모든 것보다, 천하에 있는 모든 것보다 이 진리를 크게 높이 여겨서, 모든 것보다, 이 진리를 크게 높이 여겨서 이 진리를 모실 때에 이 진리는 비로소 그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시지, 이 진리를, 만일 이 진리보다 세상에 동등된 것을 뭣이든지, 사람이든지 황금이든지. 과학이든지 인간 지식이든지 뭐이든지 이 진리와 동등된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진리는 거게 참여하지 안하고 진리는 그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잡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이 진리보다 동등으로 여기는 것이 없고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보다 이 진리를 높이 모셔 섬기고 이렇게 높이 대우할 때에 이 진리는 그 대우를 받고 이 진리는 그 사람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를 대우한다는 것이 평소에야 얼마든지 입술로 대우할 수 있지만 보다 진리냐, 진리보다 무엇이냐, 이 비중을 다는 이것은 꼭 현실에서만 달 수가 있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고는 이 진리는 자기가 영접할 수가 없다 하는 말입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은 막 진리인데 신구약 성경을 그 사람이 여러 수천 번 읽고 마구 횡하니 다 외운다 할지라도 결단코 그것으로써 진리가 제 진리 된 것이 아니고 제가 진리의 사람 된 것 아닌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는 거는, 진리의 소유가 되는 것이나, 진리의 소유가 되는 것이 나 자기가 그 진리를 모시고 있는, 자기가 모시고 있는, 자기가 모시고 있는 자기 진리가 되는 것이나 하는 것은 꼭 현실에서만 되어지는. 것이지 현실 외에서는 다른 데서는 안 된다는 걸 요걸 굳게 잡아야 됩니다.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현실에서, 현실에서 진리를 잃어 버렸으면, 현실에서 영감을 잃어 버렸으면,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잃어 버렸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이 말은 영원히 다시 찾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영원히 다시 찾지 못한다, 영원히 다시 찾지 못한다 그러면, 다시 찾지 못한다 하면 우리는 어제 진리를 잃어 버려 놓고 오늘 또 진리 말하는데, 오늘도 진리를 말하는데, 또 진리를 행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라면, 한번 잃어버린 이 맛은, 잃어버린 맛은 짠 간 아닙니까? 잃어버린 맛은, 맛이라는 것은 이건 곧 진리 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인데, 잃어버린 어 셋, 성도의 가진 이 특수한 것은 다시는 찾지 못한다 하는 것을,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하는 것은 짜게 하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이런 것도 견고히 잡으면 다른 성경 해석이 다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에 바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현실에 우리가 구원을 할리고 애를 쓰는 것은 심신의 기능을 구원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심신의 기능, 심신의 기능이 구원 얻을라고 하는데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 있습니다. 현실에 해당 된 심신의 기능이 있으니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렸으면 그 기능은 영원히 다시 진리와 영감과 대속은 찾지 못한다, 그러면, 찾지 못하니까 어찌 됩니까? 찾지 못하니까 이는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내 마음의 기능이, 그러면, 내 마음의 기능이 뭐이냐 하면 내 마음의 뜻이라든지, 생각이라든지, 의지라든지, 감각이라든지, 정서라든지, 욕심이라든지 그런 것이 다 우리 심신의 기능 아닙니까? 기능인데, 현실에 해당된 기능이 현실에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한번 잃은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한다, 잃은 영감은 다시 찾지 못한다, 잃은 대속은 다시 찾지 못한다 못 하는 그거는 왜 못 하느냐 하면 그 현실은 한 번뿐이지 현실은 한 번 지나갔으면 다시 두 번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여게 밝혀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심신 기능을 그 현실 현실마다 거게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그 심신의 기능은,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 현실에 전투하는 데에 이 전투에 참전한 기능 그 기능은 한번 이 맛을 잃으면, 한번 진리와 영감과 대속을 잃어 버렸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시 짜게 하지 못한다 그 말은 이차 투쟁이 없다 말입니다. 재투쟁이 없다 말입니다.
재투쟁이 없다 말이오. 재 투쟁이 없다. 그러기에, 단번으로서 끝난다. 그러기에, 이 단번이란 말을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이런데, 혹 어떤, 앞으로, 앞으로 나가면 그런 것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심신의 기능은, 마음의 기능이라 하면 마음은 하나인데, 마음은 하나인데 왜 마음을 자꾸 쪼개 가지고, 쪼개 가지고 '이 현실에 해당된 마음의 기능이 있고 뫄의 기능이 있고 또 요다음 시간에 또 해 당된 또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이 있으니까 현실에 해당된 기능은 죽고 그 다음 또 현실에 해당된 기능은 살아날 수 있고' 요렇게 쪼개서 말하느냐? 심신의 기능이 하나인데, 하나인데 요 하나를 자꾸 분리시켜 말하느냐? 분리시켜 말하는 것을 자꾸 사람들은 앞으로 반대해서, '뭣 때문에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구원을 그렇게 쪼개서 말을 하느냐?' 또 '중생이면 이제 하필 영은 중생했고 마음은 중생 안 했고 몸은 중생 안 했다 그렇게 자꾸 쪼개서 말하느냐? 그 쪼개는 게 변통이다.' 그러나, 쪼개져 있는 걸 쪼개지 안하면 그것을 구별할 수가 없고, 나타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몸에, 우리 이 한 몸에는, 나는 의학을 공부하지 안해서 모르지만 대략 말을 들어 보면 우리 이 한 팔뚝, 팔에는 수많은 세포가 있다고 말합니다. 거게 물론 여러가지 근육도 있고 신경도 있고 세포가 있는데 제일 숫자가 많은 세포, 이 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 하나가 상했다 그 해서 이 팔이 상한 것 아닙니다.
세포 하나가 상했으면 상한 것만치 그만치 그 팔은 약화됐습니다. 또 그것이 오래 되면 그 상한 세포는, 세포는 상해서 없어져도 다시 세포가 생겨지고 마련된다고 말합니다. 마련됩니다. 마련되나, 상한 세포로 인해서 그 세포를 다시 마련해 가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질라고 하면 상한 그것 때문에, 그것을 보충할라 하니까 다른 세포가 그만한 영향을 받아 가지고 손실을 보고 그것 하나 조성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세포는 오래 동안 수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거 얼마 동안 있으면 그 세포는 또, 묵은 세포는 지나가고 또 새 세포는 생겨지고 이래 가지고 자꾸 그러나, 이 팔뚝은 장 그래 있지만 이 팔뚝의 세포는 이것은 벌써 십년 전 세포는 다 없어져 버리고 지금 세포는 딴 세포이고 이 세포가 자꾸 갈아지고 바꿔지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이 한 팔뚝만한 힘을 말하지만 이 힘을 똑똑히 분석하면, 한 세포가 상하면 그만침 그것은 상한 것만침 그 팔은 무능하게 됐고 만일 천 세포가 상했으면 그만치 그 팔은 무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팔 하나 하지만 내부에 들어가서, 분석을 하면 세포적으로서 그와같이 분류할 수 있는 것이라 그 말이오 우리 마음도, 우리 마음도 분명히 이것은 종합 존재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로 돼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과 같이 단일 존재, 단일성의 단일 존재가 아니고 종합 존재라 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리 몸뚱이도 단일체가 아니고 종합체입니다. 이게 수많은 종합체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 죽었으면 그거는 둘째 사망의 해로 영원히 죽었고, 또 남은 심신의 기능은 죽은 기능 그게 아니고 딴, 딴 심신의 기능이다 요렇게 분리시키는 것을 한테 타 가지고, 분리한다는 것을 요걸 트집을 잡아 가지고 반대를 해 가지고 속에 역사하는, 생명 역사를 깨트릴라 하는 그런 유혹들 이 많을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유혹을 받지 말라고 지금 이것을 또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우리는, 소금이라고 비유한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이 어디 필요합니까? 우리 심신의 이 기능 구원을 하는 데에 이 세 가지가 필요하지 영에 대해서는 이 세 가지는 벌써 결합이 됐기 때문에 뗄 수도 없고 가감할 수도 없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 영감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필요한 것은 우리 이 심신 구원하는 데, 심신을 구원하는 요 심신 구원이기 때문에 영 구원이 아니고 심신 구원은, 곧 심신의 기능 구원 이거, 활동하는, 활동하는 활동의 그 실력 구원 이것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한데, 이 세 가지를 가리켜서 소금의 맛이라고 말했는데, 비유했는데, 만일 맛을 잃으면 언제 잃는가?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성도의 맛이 요 맛이라는 것은 소금으로 비유했는데, 그 맛이라는 것은 소금의 제일 실력을 말하고 가치를 말하고 권위를 말하고 또 모든 것에 필요한 필요성을 가리켜 말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만일 성도들이 현실에 자기의 기능이, 현실에 자기가, 현실에 자기가, 현실에 자기는 뭐인가? 현실의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현실의 자기입니다. 현실에 해당된 이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를 잃어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왜? 왜 찾지 못 하느냐? 못 하는 그거는 이 현실에 출전한, 현실에 전쟁할라고 출전한 현실을 맡은 이 기능은 다시는 두 번 현실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 제가 이 세 가지를 뺏겼으면 잃어 버렸으면 다시는 찾지 못한다 하는 그것을 여게다가서 강조해서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자꾸 새겨서, 아, 내가 그 기능이 곧 내인데, 내 기능이, 나는 영과, 영과 또 심신의 기능과 이 고기덩어리의 형체 고기덩어리의 형체, 또 고기덩어리의 형체 속에 이 심신의 기능, 또 그 속에 영의 기능 이것이 우리 사람인데, 영의 기능은, 이 영의 기능은 이 영의 기능이 이것이 완전은 되기는 됐지만 양적으로서는 아직까지 얼마든지, 그거 변동 없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영의 기능은 앞으로 얼마든지 영의 기능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권위가 자라갈 수 있습니다. 영의 기능이 자라갈 수 있다 말은 영 자체가 변동돼 간다는 말이 아니고, 영은, 영의 권위는 어디 있는가? 영이 자기의 심신을 통치할 수 있는 권위가 영의 권위인데, 어떤 영은 심신의 기능을 하나도 통치 못 하는 그런 영이 있으니까 그 영은 거지 영이요 가난한 영이요 그 영은 권위가 없는 영입니다. 이제 어떤 영은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낱낱이 통치해서, 심신의 기능을 통치해서 심신의 기능 이 영에게 통치를 받다 보니까, 영에게 통치를 받으니, 다른 것에게 유혹 받지 안하고 영에게 통치 받으니, 중생된 영에게 통치받는 것이 어떤 것 인고 하니, 중생된 영이 심신의 기능을 뭘로 통치하는가? 중생된 영이 심신의 기능을 통치하는 것은 진리로 통치하고 영감으로 통치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통치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에게 통치를 받으면 모든 다른 피조물에게 통치를 받지 안하기 때문에 영에게 통치받는 심신의 기능은 맛을 잃지 안하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뺏기지 안하고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 가지고 있는 것을 누가 가지게 했는가? 가지게 한 것은,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준다' 자꾸 '너 거는 하나님의 자녀라, 자녀라' 증거해 준다. 이러면, 성령님과 우리의 영과, 피는 말하지 안했지만 성령 말하면 진리도 말한 것이요 곧 예수님의 대속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물과 피니라 이 셋은 하나라' 이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말하면 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에게 이 심신의 기능이 복종했으니까 진리에게 복종한 것이요 영감에게 복종한 것이요 예수님의 대속에 복종을 한 것이요 그것이 곧 이 중생된 영에게 복종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심신의 기능은 맛을 잃지 안하고 맛을 가졌습니다. 맛을 가졌으면 영원히 가집니다. 잃으면 영원히 찾지 못하고 가지면 영원히 가집니다. 가지면 영원히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은 오늘은 승리를 했는데 내일은 패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승리를 했는데 내일은 패전할 수 있습니다.
이랬는데, 그러면, 오늘은 승리했는데 내일 패전할 수 있으니까 승리한, 우리의 이거 승리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 이것이 다시, 우리의 승리하는 이것이 단번에 전부가 다 승리하는 거 같지만 한 번 승리했으면 다 승리하는 게 됩니다. 그러나 승리했는데 그 다음에 또 패전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또 승리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다 분산적이고, 분산적이고 이 모든 것이 모든 종합체의 개별 개별의 성화구원 이라 하는 것을 파고 들어가면 다 알 수가 있다 말이오. 파고 들어가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어떤 신학자가 뭐라고 말하고 세계 뭐 조직 신학이 뭐라고 말한다 해도 파고 들어가 보면 나중에 가서는 자기네 입이 막히고 말 못 하게 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심신의 기능구원이라 하는 것은 개별체로서 구원이 되고 전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체 구원이기 때문에 개별체로 이 시간에는 구원이 돼도 다음 시간에는 또 구원 못 얻을 수도 있다, 다음 시간에 구원을 못 얻어도 그 다음에는 또 구원 얻을 수가 있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확고히 쥐어야 됩니다. 확고히. 놓지 안해야 돼요. 요것이 자기 속에 확실히 믿어져야 돼요.
확실히 믿어져야 이제 이 진리대로 나가고 진리대로 나가야, 생명도 박차고 나가야 승리가 나오고 이 진리가 일할 수 있다 말이오. 진리가 일할 수 있어.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진리가 일할 수 없어요.
그러기에,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반복해서 여러 수천 번 명상하고 명상해 가지고, 아, 이제 내게 있는 기능은, 내게 있는 마음의 기능이나,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 이거 보배 아닙니까? 마음의 기능, 총명도 마음의 기능이요, 또 욕심도 마음의 기능이요, 감정도 마음의 기능이요, 이성도 마음의 기능이요, 명철도 마음의 기능이요, 총명도 마음의 기능이요 이것 다, 마음의 기능이 많은데, 마음의 기능이 많은데 그때 그 현실에 해당된 마음의 기능, 현실에 전투할라고 나온 참전한 마음의 기능 그것은 그 현실에서 만일 맛을 잃으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잃어 버렸으면 다시는 예수님의 대속도 입지 못하고 진리도 입지 못하고 영감도 입지 못하고 영감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은 저와 완전히 끊어져서 다시는 만나볼 수 없도록 끊어진다 끊어지면, 그게 한 번 끊어져 두 번 끊어져 자꾸 지고 지고 이라니까, 이 손이 말이오, 이 손에 세포 이거 뭐 다 한목, 한목 썩는 건 아니지만 세포가 또 조금 또 상했어, 또 신경이 또 상해서 좀 둔해졌어, 나중에 그라면 이거 뚱뚱하게 팔은 있지만 그만치 무능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궁세계에 영생하는 우리들이 이 영과 심신의 기능이 어떤 사람은 그것이 상하지 안하고 그때 그때 다 살아서 이제 아주 건강하고 건전한 심신의 기능을 가진 영도 있고, 심신의 기능을 다 죽여 버리고 하나도 살리지 못하고 영하고 껍데기 고기덩어리 형체하고만 부활해 가지고 있으니까 그 아무 짝도 못 쓸 인간이 되고만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심신의 기능이 한번 이 맛을 잃으면,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하는 요게 내가 지금, 그전에 구역 성경에는 그 다시란 말이 있었던가 내가 모르겠습니다. 없어도 그런 뜻입니다.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내 심신의 기능이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잃어 버리면, 한번 잃어 버렸으면 다시 찾지 못한다, 다시 복구 못 한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을 잃어버린 기능은, 진리와 영감을 잃어버린 기능은 다시는 진리를 만나지도 못하고 영감을 만나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다시는 만나지도 못한다, 다시는 찾지 못한다, 한번 잃어 버리면 찾지 못한다 이것을 자꾸 새겨서 우리에게 영감으로 충만해야 되겠습니다.
내 심신의 기능은, 한번 진리와 영감을 잃어버린 내 심신의 기능은 다시는 심신의 기능을 찾지 못한다. 한번 잃어버린 거는 다시 찾지 못한다. 한번 잊어버린 거는 다시 찾지 못한다는 거, 사람들은 그만 자꾸 마귀란 놈이 미혹해서, 한번 잃어버린 건 다시 찾지 못한다, '아 내일 또 있는데? 내일 또 진리와 영감 있는데?' 있으나 네게 있는 그 잃어버린,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잃어버린 기능은 그는 영원히 다시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구원 얻을 길이 없고 진리와 영감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사망뿐이지 생명의 능력이 없어. 능력 없어서, 이제 내 기능 그것은 영원히 죽어 썩어서 지옥으로 이렇게 떠내려가고 있다는 그것을 자꾸 생각해서, 우리는, 그게 영감입니다. 자꾸 생각해서, 그러기에, 내 기능이, 내 이 팔 하나가 끊어져 가지고 이리 됐을 때에 그 팔 하나 끊어졌으면 내 몸이 아픈 것이고 내가 얼마나 병신이 된 것이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가 중생된 사람이 중생된 영이 강건하고, 중생 된 영이 강건해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구원해 가지고 심신의 기능이 다소라도 좀 장성해졌다고, 좀 이것이 다소라도 산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하면 여게 대해서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서 죽으면 죽은 감을 느끼는 느낌이 있지만, 느낌이 있지만 이거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느끼는 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 돼 가지고 있느냐 하면 우리 팔이, 이 우리 팔이 죽은 팔과 같이 돼 가지고 있고, 여게 생기가 돌아오지 안했기 때문에, 여게 뭐 끊어내도 감각이 없고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는 것이 이것이 죽어 있기 때문에, 팔은 이래 뚱뚱하이 있기는 있지만 신경이나 뭐 다 뭐 인가 죽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각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서 죽어 가는 거게 대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거게 대해서 참 기막히는 그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이 본체 이 전체가 벌써 그것이 아주 병들어서 산 부분이 적고, 산 부분이 적어서 죽어서 모두 다 새파랗게 죽어 가지고 있고 그저 가슴만 빨딱빨딱하고 있지 다 이거 다 죽어 가지고 있고 산 신경이 돌아오지 안했기 때문에 이 감각이 없는 거와 같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성화가 어느 정도 됐느냐 하는 그것은, 자기 현실서 이 심신의 기능이 한 번 이 맛을 잃어 버리면 다시 짜게 되지 못한다 하는 이것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 어떤 사람은 깨닫고 깨달으니까 마음에 기가 막히기를 손톱만치 기막히는 사람 있고 주먹덩이만치 기막히는 사람 있고 이렇게 기막히는 사람 있고, 사람이 견디지 못할 만치 참 기가 막혀서 통회가 나올 만치 기막힌 사람 있고 그게 뭐이냐 하면 네가 살아난 부분이 많다는 증거요 살아난 부분이 없다는 그런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짜게,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진리와 영감을 한번 잃어버린 심신의 기능은 다시 찾지 못한다, 다시 찾지 못한다. 이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 이 가치를, 이 심신의 기능이 그게 아니면 죽은 것이요 가치도 없는 것이요 실력도 없는 것이요 필요도 없는 것이요 아무짝도, 무용 지물인데, 이 심신의 기능에는 이 세 가지가 가치요 이 세 가지가 실력이요 이 세 가지가 보배 요 이 세 가지가 그이에게 필요성 있는 쓸모 있는 것인데,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 심신의 기능은 완전히 가치 없는 멸망 받은 것인데 한번 그렇게 잃어 버려 놓으면 그것은 다시는 찾지 못한다, '무엇으로 다사 짜게 하리요' 심신의 이 기능이 다시는, 진리를 한번 잃어 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영감을 한번 잃어 버렸으면 찾지 못한다.
그러면, 내 팔뚝이 한 번 딱 끊겨 가지고 이제 생명이 끊어져서 이 팔뚝이 끊어졌으니까 이 팔뚝은 다시 이을 수가 없다, 이 팔뚝은 다시 살려낼 수가 없다, 이 팔뚝은 완전히 죽어 버렸고 다시 살려낼 수가 없다 이 팔뚝을, 팔뚝을 그만 기계에서 끊어 가지고, 탈팍 끊어 가지고 이제 끊겨 버렸으니까 이것은 뭐 이을래야 잇지 못하고, 다시는 잇지 못하고 끊겨 버렸으면 그 팔뚝이 병신 아닙니까? 병신, 이 병신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병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외팔이가 부활해 가지고 쌍팔로 가지고 완전한 사람으로 부활할 수 있지만 이제 지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맛 잃은 그 심신의 기능은 이거는 영원히 다시 잇길 수가 없고 살아날 수 없는 이 사실을 우리는 자꾸 새김질해서 생각해서 우리 마음에 강퍅한 것을 자꾸 부드럽게 만들고 예민하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어서, 이것이 영감입니다. 성신이 자꾸 그렇게 만드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리고 난 다음에 마음에 통곡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사람은 뭐 일생 동안 잃어 버려야 아무 감각 없는 사람 있습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영감이 없어 그렇다 말이오. 실은 그게 얼마나 기막히는 일이냐, 기막히는 일이지만 벌써 감각이 없이 생명만 쌀딱쌀딱거리고 있지 아무, 신경이나 뭐이나 벌써, 다른 감각은, 벌써 신경은 다 죽어 있기 때문에 감각이 없는 거 와같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심신의 기능이 한번 진리를 잃어버린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한다, 심신의 기능이 진리를 잃어버린 기능은 다시 찾지 못한다. 이 진리를 잃어버린 이 기능은 다시 진리를 찾지 못한다, 영감을 잃어버린 이 기능은 그 기능은 영원히 죽지 다시는 영감을 찾지 못한다, 주님의 대속을 잃어버린 이 기능은 다시 대속을 다시는 찾지 못한다, 이거 말할 수 없는 참 이 죽음의 큰 비극이요 탄식이요 고통인데 여게 대해서 우리가 아무 감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지고 좀 밥을 굶고라도 좀 며칠이든지 명상해 가지고 거기서 느낄 도수대로 느끼는 그런 것이 있어야 우리 이 성화구원이 이루어지지 그리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구원 이루는 데에 제일 바른 방편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구원은 어떻게 이루느냐? 자기 구원은 현실에서, 현실, 그 현실에서 현실에 해당된 이 심신의 기능, 이 현실 전투를 책임 맡은 심신의 기능 요 기능이 현실 전투에서, 전투에서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뺏기지 안할라고 어떻게 해도, 죽어도 이것을 뺏기지 안하고 했으면 그 심신의 기능은 이 세 가지를 자기 것 삼았지만, 자기는 이 세 가지의 것이 됐지만 만일 이 전투를 이 세상 어떤 미혹에 끌려 가지고, 미혹에 끌려서 이 전투를 졌든지 또 어떤 강제와 무력에 탄압 해 가지고 졌든지 한 번 져서 이 세 가지를 뺏긴 그 기능은 영원히 그는 다시 이 세 가지를 다시 찾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그는 영원히 진리 없는 기능이요 영감 없는 기능이요 예수님의 대속 없는 기능이기 때문에 그 기능은 영원히 멸망을 받고야 만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이것을 분류를 해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정확한데 분류하는 것을 마귀란 놈은 분류하지 못하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십분지 오는 죽었고 십분지 오가 지금 남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남아 있는 그 죽게 된 것을, 남아 가지고 지금 자꾸 죽어가는 것을 네가 일깨워 죽지 안하도록 살리라 그렇게 사데 교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지금 죽어가는 이것을 네가 다시 살려라 그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면, 이 죽게 된 그것은 어쨌든지, 뭐이 팔뚝이 전체가 죽었든지 어쨌든지 죽은 양만침은 죽었고 살아 있는 양만치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분류를 하는 것이 확실하고 분류했어야 우리가 이제 정확히 알아 가지고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안하고, '아, 나는 십분지 일은 죽었다. 십분지 구만 남았다.' '나는 이제 죽었지만 다시 살면 다 살아난다' 안 됩니다. 안 돼요.
그래서, 요것을 단단히 가지고, 그러면,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은 현실마다 요 맛을 잃어 버리지 안해야 된다. 현실마다 맛을 입어 버리지 않아야, 현실마다 성도의 가치를 잃어 버리지 안해야 된다, 성도의 실력을 잃어 버리지 안해야 된다, 성도의 권위를 잃어 버리지 안해야 된다, 성도들의 이용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용 가치는 이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이용 가치 있지 이 세 가지 빼놓으면 그 가치는 이용 가치 하나도 없다, 권위도 하나도 없다, 실려도 하나도 없다, 필요성도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한번 잃어 버리면 다시 찾지 못한다 했기 때문에 한버 잃여 버리지 안하도록 애를 써야 되지 오늘 잃어 버리고 또 내일 찾을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사람들을 마구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시는 짜게 하지 못한 다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견고히 잡아야 되지 요거 잡지 안하면 자기 구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렸으면 잃어버린 그 기능은. 이 세 가지를 잃어버린 기능은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없습니다. 진리를 다시 찾는 길이 없습니다. 한번 잃어 버리면 그만이오. 영감도 다시는 찾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도 다시 찾는 길이 없습니다. 잃어 버렸으면 그거는 그만 영원히 잃어 버렸습니다. 영원히 잃어 버려서 대속이 없어, 영감이 없어, 진리 없는 그 심신의 기능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탈 수밖에 더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내 손가락이 하나 끊어지고 내 팔뚝이 하나 끊어지고 내 다리가 하나 끊어지고 이렇게 이 끊어지는 이거는, 이거 끊어지는 것보다도 더 실상으로 끊어지는 것이요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히 끊어지는 것인데, 실상으로 끊어지는데 끊어지는 이 감을 가지지 안했기 때문에 전체에 생명이 심히 빈약하니까 중생된 영이 빈약하다 말이오. 중생된 영의 실력은 그게 실력이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느끼는 거와 어떤 사람의 느끼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여기 대해서 느낌이 없는 사람은 벌써 그 사람의 그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러면, 짜게 못 한다 말이오. 다시 복구를 못. 해, 다시 찾지를 못해요, 찾지 못하니까 어찌 되느냐?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아무 쓸데 없다 말이오. 후에는 아무 쓸데 없다. 잊어버렸으니까 잊어버린 것은, 잊어버린 기능은 쓸데 없다 잊어버린 기능은, 이 세 가지 잊어버린 기능은 쓸데 없다. 쓸 데 없다 그러면, 현재 잊어버렸지만 나머지기 쪼그매 남은 바 죽 게 된 것,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살릴 수가 있다 말이오, 남은 바 죽게 된 거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아무 쓸데 없어' 하니까 이것은 그 사람 전체가 쓸데없다 말이오, 이제 현재에서,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린 부분의 그 기능의 부분이 쓸데없다 말이오 전체가 쓸데 없다 말이오? 부분의 기능이 쓸데없다 하는 그것을 똑똑히 잡아야 됩니다. 마귀란 놈이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꾀울 때에 하나님 말씀을 더 보태 가지고 꾀웠습니다. 보태 가지고 꾀운 거, 또, 감하는 것도 보태는 것도 다 심판받습니다.
'쓸데 없어' 그러면,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세 가지 잊어버리면 쓸데없다, 세 가지 잊어버리면 쓸데 없다, 이 우리의 심신의 기능 은 이 세 가지가 자기의 생명이요 자기의 가치요 자기의 능력이요 자기의 실력이요 자기의 이용 가치있는 것인데 이 세 가지 없으면 아무 쓸데 없다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밖에 버린다는 것은, 밖에 버린다는 것은 점점, 예수님이 중앙이요 예수님이 중심인데, 예수님이 중심이요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계시는데 밖에 버린다 말은 예수님에게서 버림받았다 말이오. 예수 밖에 나갔다 그말이요, 생명 밖에 나갔다는 말이요. 이거는 구원 밖에 나갔다 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유황불 구렁텅이 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갔다 그 말이오.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에게 짓밟히는, 말하자면 사람에게 천대받을 것뿐이니라 이랬는데, 성경에 요렇게 해서 '맛을 잃으면' 한 걸 말했으니까, '맛을 잃으면' 그것을 맛을 잃는 것을 말 했으니까 맛을 가진 것은 그 반대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맛을 가진 거 맛을 가진 것은 문제가 없는데 맛을 잃어 버리는 게 문제이기 때문에, 여게 개인 구원에 대해서는 맛을 잃어 버리는 게 문제이기 때문에 맛잃어 버리는 걸 말했습니다. 잃어 버리는 걸 말해 가지고 맛 가진 것을 저절로 거기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고, 다른 사람 구원하는 데에는 또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맛을 가지면 어찌 되느냐? 현실에서 이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 심신의 기능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뺏기지 안하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이 세 가지를 가지면 어찌 되느냐? 이 세 가지를 가지면, 가지면 쓸데 없는 거 반대로 쓸데 있게 된다, 쓸데 있는 게 된다.
쓸데 없는 게 됐다 하니까 반대로 쓸데 있는 게 된다. 그러면, 쓸데 있는 게 되면 어디 쓸데 있는 게 되는가? 하나님에게 쓸데 있고, 하나님에게 쓸모 있고, 피조물들에게 쓸모 있고, 자기에게 쓸모있고, 쓸모 있는 거 된다, 쓸모 있는 거 된다. 여게서 우리가 똑똑히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 사람이 말이오, 어떻게 하면 내가 좀 가치 있는 일 할까, 내 어떤 데 한번 라디오를 들으니까, 라디오를 들으니까 자기 명예 박사가, 명예 박사가 뭐 스물 몇이고, 또 논문 박사가 열 몇이고 박사가 서른 둘인가 됩디다, 서른 둘인가. 그래 그때 서로 담화를 하면서 발표를 하는데 말하기를, 보니까, 좌담을 하는데 들으니까 박사 학위가, 박사가 서른 둘이라 한국에서 제일 많답니다. 아마 그라면 그 사람을 다 알 거라. 그런데, 그 사람하고 서로 대화를 하면서 그렇게 말합디다.
하나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박사가 서른 둘이나 되는 이 길을 택했습니까?' 이래 물으니까 그 사람이 답을 하기를 '예' 그 사람 뭐 불교인이던가 그런데 '가만히 세상에 나 가지고 보니까 모든 사람이 다 이거 저거 다 했는데, 이거 저거 다 했으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제일 좀 유명해지그느냐?' 모든 거 다, 이 사람이 다, 먼저 다른 사람이 다 택해 가지고 이거 다 하고 있으니까 뭘 해야 유명하개 되겠느냐, 그래서, '나는 박사가 제일 세계에서 제일 박사 제일 많은 사람이 돼 보겠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택했다 그렇게 본인이 말합디다. 박사가 제일 많아 가지고 유명한 사람 될라고,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소. 그래 가지고 유명한 사람 될라고 어찌 됐든가 자살도 하고, 유명한 사랑 뚜라고 어쨌든 간에 별 일 다 하지 않습니까? 쪼각배를 타고 이 세계를 일주하는 사람도 유명할라고, 또 아무데.
알프스 같은 산만당에 깃대 꽂는 것도 유명해질라고, 자기가 유명해질라고 하 이것은 타락한 사람에게는 제일 중심되는 욕심인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에게는 이 자기 중심이니 말이오 이런데, 우리도 그 자손으로 나왔고 원죄가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부절히, 어떻게 하면 좀 내가 유명해질꼬,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다른 사람에게 유명한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좀 내 공로를 크게 좀 나타낼까 이래 가지고 공명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내 공명에 성공을 할까 하는 그 마음을 가지지 안한 사람이 불택자로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도 그 공명욕을 떠난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백의 일이나 될란지 모를 만치 그만치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대로 '나는 목회로 한번 출세를 해 가지고 유명해져 보겠다. 나는 설교로 유명해져 보겠다, 또 나는 봉사로 유명해 보겠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유명해지며,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제일 가치 있고 큰 일을 할까' 이렇게 생각해서 방황하는 그 방황하는 사람이, 다 그런 것이 있지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거 다 없는 사람 없어 그거 없는 사람은 그거 다 죽은 사람이오. 있는데, 있기 때문에, 다 모두 이 일을 해야 유명한 일이 되냐, 이 일을 해야 중하냐, 내가 어떻게 하면 제일 귀중하고, 가치 있는 일 하고, 제일 큰 일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 하고, 모든 사람에게 가치 있는 일, 유익을 끼치는 일, 제일 큰 일, 보배로운 일, 유명한 일 이렇게 이런 일을 할까 해 가지고 그래 해서 어떤 사람은 노벨상도 타고 이렇게 하는데, 여게 요 말씀에서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됩니다.
맛을 잃으면 쓸데 없다, 아무 데도 쓸데 없다 천하에 노벨상을 열 백을 탔다 할지라도 요 세 가지 잊어버렸으먼 그는 아무 무용지 인간이라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무용 지물이요, 그는 다 유활불 구렁텅이에 던 짐받고 조물주에게 큰 심판받아서 저주받을 것이고, 이 세 가지 잊은 자는 무용 지물이요. 또 제일 큰 일은 뭐인가? 제일 조물주가 원하고 있는 쓸모있는 일, 모든 피조물들이 원하고 있는 쓸모있는 일, 내게 쓸모있는 일, 우리 가족에게 쓸모있는 일, 모든 인류에게 쓸모있는 일, 만물에게 쓸모있는 일, 뭐 마귀에게 쓸모있는 일 모든 데 쓸모있는 일, 모든 것에게 쓸모있는 일이 뭐인가? 요 세 가지를 지니는 것이, 요 세 가지를 소유하고 뺏기지 안하는 것이 제일 쓸모있는 일이다 가치 있는 일이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서 우리 허영과 허욕을 다 버려야 되겠습니다.
우리 허영과 허욕을 버리고, 내게는 요 내 현실에서, 내 현실에서 진리 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뺏기지 안하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요 세 가지를 내가지니는 것이, 내가 요 세 가지를 뺏기지 안하고 가지는 것이 이것이 모든 존재, 창조주와 피조물 모든 존재가 원하는 그 일을 내가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일을 내가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쓸모있는 일이 없다, 내게 대해서는 이보다 더 가치있는 일과 쓸모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걸 우리가 확고하게 잡으면 허영심과 허욕 심이 다 떠나 버리고 맙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데, 그러기에, 우리가 허영과 허욕에서 공명욕에서 생명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명욕에 생명을 내거는 사람이 많은데 요것이 내 공명으로서는 제일 큰 공명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알면 요것만 해도 생명을 내놓을 수가 있다 그 말이오.
이렇게 모든 진리면에서 지꾸만, 생명을 내놓고도 할 만한 가치있는 일을 하나 둘 셋 넷 여러 가지를 가지면 그 생명을 내놓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으며, 내눙을 기회만 있으면 내놓을라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 생명 내놓기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될 리가 없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이 이것이 큰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제일 쓸모있는 일이 이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서, 내가 쓸모있는 사람되는 데는 뭐이냐 요거다 요것을 확고하게 잡아야 자기 구원을 바로 이루게 된다. 그러면, 우리 구원은 뭐이냐? 우리 구원은 뭐이 구원되느냐? 창조주와 피조물들에게 쓸모있는 것은 그거 다 영접하십시오. '아, 그거 안 됩니다. 우리 쓸모있습니다.' 조물주에게 쓸모있는 거는 피조물에게 쓸모있고, 조물주와 모든 피조물들에게 쓸모있는 것은 다 간추려서 하늘나라 가고 쓸모 없는 것은 다 유황불 구렁텅이로 다 헐어내 버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다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갈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 제사장 심판 선지자 심판 왕의 심판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피조물에게도 쓸모있는 것이 내게 하나 있으면 그것만 이제 하늘나라 가지 나머지기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갑니다. 쓸모있는 것이 만 가지가 있으면 만 가지가 하늘나라 갑니다. 모든 존재에게 쓸모있는 것이 이제 하늘나라 간다 하는 것을 그것을 깨달아야 내 구원을 개인 구원을 바로 이룰 수가 있다 그거요.
쓸데 없는 거 뱐대 쓸모 있다, '밖에 버린다' 밖에 버리니까 점점 가운 테로 끌어 들이지 않습니까? 모든 존재 가운데 한 가운데가 뭐입니까? 한가운데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중심 주님 중심, 주님 중심이나 하나님 중심이나 뭐 성령 중심이나 다 한가지입니다. 삼위 일체,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떤 교파에서는, 삼위인데 물론 성부의 본체도 있고 성자의 본체도 있고 성령의 본체도 있습니다.
다 본체 있으나, 본체가 셋이라 하는 그 교파도 있고, 그 정통도 있고, 본체는 하나인데 격위만 셋이라 그렇게 보는 또, 본체가 셋이라 이렇게 하면 그 위에 한 단위 올라가서 본체 위에 유일하신 한 분인 하나님, 그라면 그분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보고 말하는 그렇고, 그러면, 떨어져 내려와 가지고 본체가 셋이라고 하면 되지만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이래서, 하나님 한 분이 중심이라 말이오. 밖에 버리는 반대니까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 아닙니까? 끌어들이는 거. 이것이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중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점점 중심인 주님으로 가니까, 중심인 주님에게로 네가 들어가니까 네 밖에는, 주님이 중심되어 있으니까 주님을 향하여서 나는 자꾸 중심인 주님으로 향하여 들어가고 이러니까 내 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나를 중심 삼습니다. 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중심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중심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이제 성도의, 우리의 위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세 가지를 잊어버리지, 현실에서 잊어버리지 안하는 것이 중심된 주님에게로 나아가서 주님에게 귀속되어서 주님이, 중심인 주님에게로 가서 점점 가까워져서 결합해 가지고 중심인 주님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내가 중심이 되어진다. 피조물들에게 중심 인물이 되어지고 이제 나는 내 중심은 하나님이 중심되고 이렇게 점점 완전으로 온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이냐? 네가 현실에서 소금이 맛 잃지 안하는 이것이 점점 온전한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혔는데 사람에게 밟히는 대신에 너는 어찌 되냐? 모든, 사람은 모든 만물의 대표를 말한 것이니까 사람과 모든 만물에게 밟히는 반대로 모든 만물에게 이렇게 존대함을 받게 된다, 다 우리를 받쳐서 섬기게 된다. 왜?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거기서 먹을 것이 나오지, 거기서 살 것이 나오지, 거기서 좋은 것이 나오지, 거게 필요한 것이 다 나오니까 그를 내가 우리를 바라보고 존대 안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므로, 요것이 우리 인 자체 구원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금 비유는 자체 구원을 비유해서 말씀한 것이고, 빛으로 비유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 구원하는 그 방편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인제 시간 다 됐으니까, 오늘 저녁에만 나오고 또 내일 아침에 안 나올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안 나오는 사람은 뭐 죽든지 말든지 그래 던져 봐야 되지만 그래도 또 안 됐다 그 말이오.
다른 사람 구원은 뭐이냐? 거기 보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면 온 집안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온 집안 사람에게 비취니까, 등불은 하나인데 그 등불이 꺼져 버리면 온 집안 사람이 쌔카매지고 그 등불이 밝으면 온 집안 사람이 환하게 밝아지고 그 등불이 어둠침침하면 온 방안에 있는 사람이 다 어중충충해져 버리고, 이래서, 너 하나가 빛이 되는 그것으로써 네게 속한 모든 자는 빛으로 화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라고 그 사람 위해서 기도하고, 물론 기도하지요. 기도하고 그 사람 위해서 뭐 전 도도 하고 심방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권면도 하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방편은 네 자체가 빛이 돼라, 내나 빛이라는 그 빛도 뭐이냐? 빛 그것도 내나 이 세 가지입니다.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이것을 가리켜서, 빛이라 네가 이 세 가지로 점점 도수가 강해지면 네가 이 현실에서, 이 현실에서 또 진리를 또 차지하고 또 저 현실에서 차지하고 자꾸 한번 차지했으니까, 한번 차지했으니까 진리 영감 대속이 하나 있고 두 번 차지하니까 또 둘이 있고 또 이 세가지가 말이오 둘 있고 열 번 차지했으니까 열 있고 백 번 차지 하니까 백 번 있고 자꾸 이게 많아져, 네가 이게 많아지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네게 속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하는 것을 가 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진리를 굳게 잡고 놓지를 맙시다. 요 진리를 깨달으면서 자꾸 새기고 새기고 새겨 가지고, 이제 저 산에 가서 새기든지 어디든 새기고, 새기고 새기고 새겨 가지고 이 진리를 새김으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 불이 나고 힘이 나고 '주여! 주여! 내가 요대로 하겠습니다!' 원통하다는 것도 눈 물도 요 진리 새길 때에 눈물이 쏟아져 나와야 되고 이 힘도 요 진리를 새길 때에 속에서 힘이 나와야 되는 것이지 여게 뭐 설교 들을 때 감동된 거는 소용없어 요 진리만 가져가 가지고 진리를 새길 때에 자기 속에, 진리를 새김질하고 진리를 생각할 때에 나오는 그 힘이라야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환난 때 이기는 사람은 눈 감고 뱃 속에서 나오는 힘 가지고 환난을 이기지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뭐 소리 듣고 말 듣고 하는 거 그런 거 가지고, 설교에 감동받은 그런 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거는 환난 오면 다 없어져 버리고, 이 진리만 가지고 자기가 혼자 새길 때에 자기 마음 속 진리에서 나오는 그 힘이 내 마음을 강하게 만들 그 능력있게 만들어 가지고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환난이긴 모든 실력은 자기 속에서 나온 실력이지 자기 밖에서 뭐 피동된 그런 실력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