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20:04
소금과 빛
1980. 2. 24. 주일 오후
본문: 마태복음 5: 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에 "밖에 버리운다" '밖에 버림을 당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 책임 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그리스도인이 이 소금으로 빛으로 살 때에 보호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안에 있는 것이지 이 구원에 범위를 벗어났을 때에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값 주고 사셔서 구세주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소금으로 빛으로 쓰시기 위해서 세상에 살게 해 두신 것입니다.
소금으로 모든 것을 간 치는 거와 같이 우리가 받은 바의 구원으로 모든 것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 빛이 모든 것에게 비칠 때에 그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것이 환하게 바로 드러나는 것처럼 여섯 가지로 어두워진 세상에 예수님의 구원 여섯 가지로 환하게 세상에 비추어서 세상으로 하여금 이 여섯 가지 종류의 인간 너희 정로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으로 살려고 하는 데에도 녹아지지 안 하면 그 소금간으로 다른 것에게 간 칠 수 없는 것이고 또 빛으로 살려고 하는 데에도 빛을 나타내는 그 재료가 소모되지 아니하면 빛은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저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모든 우리의 천직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의 재세의 직책은 자신이 희생되는 데에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체든지 자기의 소유든지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어질려고 많아질려고 커질려고 하는 이런 관념과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혹이요 적입니다. 우리는 있는 것이 쓰여져야 할 사람들이요 또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요 다 이용당하고 깨어지고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이 우리의 종착인 목표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이나 기능이나 자기의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소유나 사업이나 그 뭐 어떤 것이든지 이것을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은 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써서 하나도 없이 다 없애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쓰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할려고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이런 방법으로 노력한 사람으로서는 하나도 자기 노력대로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런 방법을 썼지마는 그들은 종적도 흔적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까지 다 사라지고 없어진 것입니다. 이런데 인간이 어두워서 사망 아래에 있는 이런 죽는 방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돌아서서 나에게 있는 것은 쓰기 위해서 있고 다 써 없어지기 위해서 있고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있게 된 목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지식이요 또 위대한 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없어지지 아니할려고 해도 필연적으로 다 없어지고야 끝나는 것입니다. 없어지는데 우리는 하나는 사망하는 것이요 하나는 생명화 되는 것인 것을 또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쨌든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없어지지 않기 위하여 사는 이런 헛된 노력을 일차적으로 버리고 다음으로 없어지면 다 된 것인가? 없어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어. 소금으로 빛의 기름으로 없어지는 길도 있고 이것이 원죄의 그 죄의 법칙으로 없어지는 것도 있으니 없어진다고만 좋은 게 아니라 없어지는 데에는 없어지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좋게 되는 심으는 방편으로 없어지는 것이 있고 없어지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불행스럽게 사망으로 없어지는 것도 있으니 없어진다고만 해도 또 안 되겠습니다.
없어지기를 싫어하는 이런 어리석음에서 우리가 돌아서서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이 사실을 필연적으로 없어진다는 이 사실을 푹 넓이보고 깨달아야 하겠고 없어지기를 깨닫고 없어진다고만 해서 이것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데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편으로 없어지는 것도 있고 없어지는 그것이 있는 것보다 더 불행스럽게 무가치하게 멸망으로 없어지는 것도 있으니 또 없어지는 데에 우리는 잘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타락한 이 자연법으로 늙어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요 죽어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요 써서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요 깨어져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없어지는 것이 어떤 것에게 빼앗겨 없어지는지 어떤 것에게 이용을 당해서 없어지는지 어떤 것에게 파괴를 당해 깨어짐으로 없어지는 것인지 요것을 잘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게 스스로든지 힘이 모자래 강제든지 이것들에게 빼앗겨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지 안한 것만 못합니다. 그것들에게 이용을 당해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지 아니한 것만 못합니다.
또 그것들의 세력으로 인해서 깨어져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없어졌으나 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전체가 이제 말한 대로 이 세 가지 종류로 없어진 것이니 그 사람은 세상에 있을 때가 없어진 그 후 영원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여섯 가지 구속 이 여섯 가지 구속에게 이용을 당해서 없어졌든지 이 여섯 가지 구속 때문에 빼앗겨서 없어졌든지 이 여섯 가지 구속으로 인하여 깨어져 없어졌든지 이 여섯 가지 구속 때문에 이 구속을 위하여 여섯 가지 구속으로 녹아지고 없어졌다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완전히 옮겨졌습니다.
저주 아래 것이 축복으로 옮겨졌고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옮겨졌고 모든 존재들에게 배척과 저주받던 것이 모든 존재들에게 환영과 존대의 것으로 완전히 성화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없어지지 않고 있어지려고만 하는 이런 어리석음에서 돌아서야 되겠고 없어지기를 배우고 없어지는 것이 자기의 필연적 생애인 줄 알고 없어지기를 두려워하지 안하고 주저하지 않는 이 사람은 없어지는 데는 있는 것보다 없어진 것이 더 불행스러운 방편도 있고 없어지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존귀해지는 방편도 있으니 없어지려 하는 없어지기를 배워서 없어지기를 힘쓰는 자는 없어지는 데는 먼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서 바르고 굽은 것 올바른 비판과 평가와 판정이 똑똑히 되고 난 다음에 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기독자가 악의 세력에게 못 이겨 없어졌다면 사망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게 미혹을 받았든지 욕심에 끌렸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이용당했으면 사망입니다. 어떤 강한 세력에게 강제 당해 깨어졌으면 이용당해졌으면 없어졌으면 사망입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나를 이용할려고 없이할려고 박살을 낼려고 하든지 간에 나는 주님의 여섯 가지 구속의 덩어리가 되어 이 구속의 뭉치로 이 구속 덩어리로 이 여섯 가지로 되어졌다면 이 여섯 가지로 되어졌다면 이 여섯 가지가 되어져 이 여섯 가지 때문에 여섯 가지를 위하여 여섯 가지로 없어져 이 여섯 가지를 세상에 보여 주고 세상에게 알려주고 세상에게 심어서 세상 속에 심어 그 속에서 움트게 되었으면 이는 기독자의 승리입니다.
그런고로 기독자는 희생하지 않으려는 것도 어리석음이요 무조건 어디서든지 대가리 숙이고 어디든지 이용당하고 어디든지 양보하고 어디든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이런 썩은 생활은 안 해야 됩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똑똑히 알아 내가 무엇에게 이용을 당하느냐 무엇 때문에 내가 없어지느냐 내가 무엇이 되어져 가지고 없어지느냐? 만일 주님이 구속해 주신 죄 없는 것으로 의로운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된 것으로 신성을 닮은 참된 인격성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내 생에 법칙으로 삼은 이 진리의 생애 법칙으로 하늘 나라 백성으로 진리 세계의 사람으로 사랑 세계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이 생명의 사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오는 박해라면 이것을 위하여 이것 때문에 이것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면 이것으로 녹아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체하지 말아야 하고 주저하지 말아야 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최고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사람이요 생애입니다.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의 이력이요 공로입니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토막을 받은 이 토막에 자기 할 일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기독자가 되어 있으면서 옛날 어두움에서 인생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 넘어가 무엇 무엇으로 그 다음이 무엇인지 모르던 때 자연으로 생겼다는 망령 진화로 생겼다는 망령 수천 년 만 년 전에 사람의 이빨 빠진 것이 남아 있다는 망령된 과학자 고고학자들 이런 깜깜 어두운 세상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영감도리의 빛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런고로 이 빛을 받은 후에도 어리석게 안 죽을려고만 안 녹아질려고만 안 쓸라고만 이용당하지 아니할려고만 하는 이런 어리석음의 꺼풀을 완전히 벗고 백 년 전에 이백 년의 사람이야 하나도 없소. 필연적으로 가는 길인데 없어지는 데에는 잘 없어지고 쓰여지는 바에는 잘 쓰여지고 늙어지는 바에는 잘 늙어지고 죽어지는 바에는 잘 죽어지고 세상을 떠나는 바에는 잘 살다가 떠나는 잘 살다가 도적질해서 호의호식해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기독자로서 여섯 가지 구원으로 사는 이 온전한 생애를 함으로 이로 인해서 녹아져 심으는 생애로 살고 가는 것이 잘 살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미 녹아지는 바에 심으는 것으로 녹아지는 길이 있고 빼앗겨지는 것으로 녹아지는 길이 있으니 구속으로 녹아지면 심으는 것이 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하나의 부분적인 것이 전체적으로 이렇게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야 하겠고 세상 어떤 것에게 자기에게나 자기 밖의 어떠한 것에게나 세력에게도 미혹에게도 어떤 강제에게도 우리는 촌음도 빼앗기지 안하고 진액 하나도 빼앗기지 안하고 두뇌의 한 기능도 그것에게 이용당하지 안하고 순전히 기독자의 구원으로 녹아지고 구원에게 쓰여지고 구원 때문에 녹아져 구원으로 세상을 간 치고 구원으로 세상을 비추어 모든 것에게 이 빛이 비추어 가도록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은 누구든지 중생 된 사람이라면 다 소금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빛으로 살기를 원하는 줄 압니다. 어짜든지 여섯 가지 구원으로 살기를 원하고 구원으로 희생하기를 원하고 구원으로 나 하나가 희생함으로 인해서 이 구원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가고 어두운 세상에 내가 구원으로 하나 완전히 기름 닳듯 다 녹아짐으로 어두운 세상에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인생의 가치가 무엇이냐 인생의 소망이 어데 있느냐? 인생은 만물의 영장인 하나님 다음의 위치의 가치가 있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주고 가고 싶은 마음은 다 있는 줄 압니다.
이런데 왜 기독자들이 무엇 때문에 이 빛의 생활을 못하며 소금의 직책을 하지 못하는가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마는 몰라서 못하는 것은 알고 원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 티끌에 다 막혀서 모르기도 하고 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알고 원하면 행할 수 있고 행하기만 하면 되는데 알기도 하고 원하기도 하면서 빛으로 살기를 원하기도 하고 알기도 하고 세상을 이 구원으로 간쳐서 이 구원으로 세상을 구원코자 하는 이것이 당연히 옳다는 것을 평가적으로 알기도 하고 소원적으로 소원하기도 하면서 이 걸음을 걷지 못하는 그 이유가 우리에게 몇 가지 있습니다. 이 걸음을 걷지 못하는 이 어두움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어두움을 우리가 뽑아 버려야 합니다.
첫째로 마가복음 10: 29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여섯 가지 구원을 위하여 녹아질 때에 손해를 봤을 때에 해를 당했을 때에 '여러 배 백 배를 주님이 보장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거기 있습니다. '나와 내 도를 인하여서 손해 본 자'는 어떤 데는 '여러 배' 여기는 '백 배' 그에게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에 없어질 때가 됐으면 이미 없어질 것이 이렇게 살므로 없어졌으니까 없어져 죽을 것이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의 성공이요 아직 없어지지 아니할 때라면 나는 이렇게 써서 없앴는데 없어지지 안하고 다시 있어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는 성공이요 작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 없어지니 가진 것 가지고 빛으로 없어지고 소금으로 없어지니 주님이 더 귀히 여겨서 주먹만한 것이 없어졌는데 태산 같이 큰 것으로 나에게 더 주어서 크게 없어짐으로 많은 구원에 효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더 많은 의에 열매가 맺어지게 하시니 이것도 우리에게 손해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전토나 내 지위나 명예나 무엇이든지 이 복음을 인하여 이 여섯 가지 구원을 인하여 죄 안 질라 하다가 의롭게 살라 하다가 하나님 떼 놓지 안 할라 하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참된 인격으로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참된 인격으로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려고 하다가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진리 안에서 살려고 하다가 이렇게 깨어지는 것, 물질 면이나 가족 면이나 친척 면이나 이런 면이 손해 가도 보장해 주실 이가 대 주재 만유 주 이 하나님이 보장을 했으니까 이미 없어질 것이라면 이를 써서 없어졌으면 없어질 것이 살아났으니까 다행이고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내가 이렇게 써서 없어졌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없어지지 않게 본야 있는 것 만치 주시고 더 여러 배 백 배나 주시니까 더 큰 의를 이룰 수 있으니 우리는 이 성도의 희생의 소금의 걸음을 걸을 때에 자기에게 관련된 사람의 인연이나 소유나 이런 것이 손해 갈까 염려돼서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단정코 주님이 계약을 선포해 놓았습니다. 그 분은 대 주재십니다.
다음으로 마태 16:25절 이하에 보면은 말씀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도를 인하여 목숨을 빼앗긴 자는 목숨을 바친 자는 그 사람이 죽을 고 시간이 닥치지 안 했으면 그 목숨을 주님이 보장해 주시겠다 했습니다. 기독자들이 목숨을 간직키 위해서 여섯 가지 구원을 버렸을 때에는 하나님의 전능의 보호의 책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악령에게 유린당해서 기한 전에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대로 나아갈 때에 그 사람의 생명을 주님이 보장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잘 봅니다. 성경에 그런 구비 구비가 많지마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은 이 도로 인하여서 생명을 바쳐 빼앗겼으므로 다니엘의 생명은 튼튼하게 됐습니다.
만일 그때 다니엘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 구원을 버렸더라면 하나님은 다니엘을 버릴 것이요 그 기회에는 살았지마는 그 다음 기회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아니하니까 많은 그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고야 마는 것이 필연한 과학입니다. 우리는 생명 문제에 염려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 때문에 기독자의 희생을 기독자의 담대한 이 구원의 길을 걷지 못할 이유 없습니다.
마태복음10: 끝절에 보면 기독자가 기독자의 구원을 위하여 사는 것은 털끝 만한 것이라도 무궁 세계에 상이 없지 않다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이 구원대로 살면 그에게 지극히 작은 희생이라 도 지극히 작은 수고라도 지극히 작은 이용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소유 문제로 주저할 필요 없고 생명 문제로 주저할 필요 없고 이렇게 기독자가 기독자의 구원으로 사는 것이 이권 문제에 손해 간다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만유의 대주재가 상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러기에 나는 서부 교회 주일학교 반사들이 분투 노력하지마는 이만치도 그에게 칭찬해 주지 안 합니다. 할 맘이 없습니다. 왜? 너는 내 구속을 인해서 지당하고 네 수고가 모든 세상에 정력 기울이는 것보다도 더 나은 길에 기울이니까 그에게 손해가 없는데 무엇을 말해 주겠소. 복음대로 이 길을 걸어가면서 이 길이 손해 갔다고 생각하는 그 자는 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서 녹아지고 쓰여지고 이용을 당하는 걸음을 걸으면서 이거는 무익하고 수입이 없는 걸음이라고 하는 그 자는 해 봤자 헛일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안한 것은 하나님이 쓰지 않습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공기만 파동 시키지 생명의 열매는 맺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반사들에게 빵 한 개를 주지 않습니다. 안 주고도 하라는 권리가 있습니다. 안 주고도 하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안 주고도 생명까지 바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도는 이러한 도입니다.
다음으로 이사야 49장에 보면은 담대히 죄짓지 안 하면 망할 줄로 위협받지 말아라 죄짓지 안 하면은 굶어 죽을까 위협받지 말아라 어떤 자에게 붙들려서 그를 배반하면은 망하고 죽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불의에게 매여있는 자들아 담대히 탈퇴해라 모든 죄악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아 담대히 어두움을 벗고 광명에 나서라 내가 너희의 모든 의식주를 보장할 것이고 너희의 진로를 보장할 것이고 너의 사회를 보장하고 너에게 모든 맺혀있는 대적들에게 대해서 보장하여 용사의 손에서도 해방시킬 것이요 네가 이 걸음을 걸으면 모든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너에게 관련되고 소속한 것이 다 해방 받아 자유로 돌아오게 되리라 너를 대적하는 자를 스스로 자기 피를 먹고 자기 고기에 배부르게 될 것이라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하고 너를 대적하는 자는 내가 대적하고 너를 저주하면 내가 저주하여 높은 데 있는 것을 끌어내려 진토에 묻히게 하고 인간 이하에 가장 천하고 약자에게도 밟히게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런고로 이 어두움의 세력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겠다 이것들에게 이 불의한 것들에게 매여있는 이 결박을 내가 벗어나면 비참하게 되겠다 하지 맙시다 담대 합시다 담대 합시다.
'매인 자들아 나오라 흑암에 있는 자들아 들으라 네가 길에서 먹을 것이요 자산에도 너희의 초장이 있고 높은 것을 깎고 낮은 것을 돋아서 너의 앞길이 대로가 되어 아무 피조물도 해할 수 없는 시온의 대로로 인도하겠다 네게 속한 많은 무리들이 다 너에게로 몰려 올 것이고 세상 권세는 너의 양부가 되고 세상 권세는 너의 유모가 되어 그들이 너를 어깨에 맬 것이요 너의 발에 티끌을 핥게 하리라' '어떤 강한 원수라도 너만 이것을 요동치 아니하면 내가 너 대신 싸워서 모든 것을 복수하고 모든 승리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나는 너희의 방패요 너희의 지극한 상급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로마인서 12: 에 말씀했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것이 너희에 당연한 예배니라' 합리적 예배니라 주님이 너 위해서 몸과 생명 다 바쳤으니까 너 주님 위해 몸과 생명 바쳐 사는 것이 당연한 법리 아니냐? 이거 예수 믿는 생활이라.
이러기 때문에 주를 위하여 이 구원을 세상에 비추기 위하여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이 나 위하여 모든 것 다 바쳤고 다 투자해서 나를 살렸기 때문에 일생동안 주로 인하여서 이 구원 인하여서 가난해져도 한번도 원망할 수 없고 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고 주를 위해서 고문과 고행을 당하고 어떤 사형을 당하면서도 주의 구속을 생각하고 오히려 '무익한 종이라 어떻게 하면 내 생명을 어째 바치면 주님의 사랑을 만 분의 일이라도 알게 될까?' 하는 것이 깨달은 성도들의 생애인 것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몸과 생명과 재산을 드려서 이 구원을 나타내고 이 구원대로 살고 이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 앞에서 시비할 이런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빌립보 3장 10절 이하에 깨달은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심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권능과 부활하신 그 권능을 마련하기 위한 세상의 그 죽음의 십자가 고난 이것을 깨달아 나도 어떻게 하든지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주의 구원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상에 대속하신 이 대속이 자기를 위해서 대속하신 것과 이 대속으로 인해서 모든 존재가 구원 얻게 된 것과 이 대속으로 인해서 주님은 모든 것에게 필요 있는 주님이 된 이 사실을 깨닫고 그 구속에 감격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인생으로서의 가장 가치 있는 올바른 걸음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여섯 가지 구원으로 인한 이 희생 이 녹아지는 것 쓰여지는 것 이것만을 저희의 생애에 전업인 줄 알고 살았어. 우리도 다 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의 구원으로 값 주고 사서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 구원주신 이 구원을 세상에 자랑하고 세상에 보여주고 세상에 알려줘 이 구원을 몰라 어두운 세상이 이 구원을 알므로 밝아지고 이 구원을 몰라 썩어져 가는 인생이 이 구원으로 인해서 새로워지고 이 구원으로 인해서 만물보다 크신 조물주 하나님을 그들이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간의 멸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이것 위해서 쓰여지고 이것 위해서 늙어지고 이것 위해서 녹아지고 이것 위해서 죽어진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생애가 어데 있으며 이보다 더 잘 산 것이 어데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어리석게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의 군병으로 삽시다. 십자가의 도인으로 삽시다.
우리는 이미 영광의 구원받아 놨기 때문에 앞으로 더 바랠 것 없습니다. 이미 받은 것만 해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고 주를 위해서 굶기도 해야 되고 고생도 해야 되고 매도 맞아야 되고 갇히기도 해야 되고 주를 위해서 죽기도 해야 되고 주를 위해서 천대도 받아야 됩니다.
큰 구원받았으니 우리의 지금의 할 일은 주와 주의 도로 인해서 우리의 할 일은 녹아질 것 고난 당할 것 내 전부 다해서 당신 위해서 당신 위해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살 것 이것만이 우리 할 일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백 배를 준다 목숨을 버리면 목숨을 다시 살게 해 주신다 영광스러워진다'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주의 구원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이 구원을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더 바랠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받은 구원으로 다 바쳐 족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으니 우리도 그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주님이 날 위해 죽었으니 나 주 위해 죽고 주님 나 위해서 부활로 살아났으니 나 주 위해서 사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살아도 주로 인해서 살고 죽어도 주로 인해서 죽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살 것이요. 또 알고 보면 주님이 허락하시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합니다. 안 해 봤자 이 테두리를 못 벗어납니다. 안 해 봤자 이 결박을 못 벗어납니다. 이 제도와 조직을 못 벗어납니다. 깨어 삽시다. 어리석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리석게 사망의 법 아래에서 주저하고 속는 일 그만하고 담대히 언덕을 떠나서 언덕을 떠나서 생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기독자가 세상에서 제일 평강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의 제단 위에 바쳐 놓았을 때에 그에게는 생명과 평강뿐입니다. 기쁨뿐입니다. 성공과 존귀뿐입니다. 아무런 어려움이나 손해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