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19:52
소경 바디메오
1987. 2. 22. 주일오전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입니다. 또 신구약 성경은 이 계약 된 것을 모르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도록 계시해 주신 모든 계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그 이치를 가르쳐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계약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지식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 도리라고 할 수도 있읍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1장에 지금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하는데 그전에는 “태초에 도가 있었으니” 이렇게 도라고 그렇게 말씀을 했읍니다.
그러면 여게서는 중점되는 게 뭐냐 하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하는 요 믿음, ‘믿음을 보시고’ 이랬읍니다.
또 지난 주일에 증거한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있는 그 소경에 대해서도 그 믿음에 대해서 “믿음을 보시고” 이랬읍니다.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래 했읍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그 중풍병자가,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그의 소원을 완전히 이루어 주셨읍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니 일어나 집으로 제 매여 가지고 왔던 침상을 제가 이제는 들고 집으로 돌아갔읍니다. 그러니까 왔던 소원이 이루어졌읍니다. 그러면 그 소원을 이루게 된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그것을 우리가 여게서 찾아봐야만 합니다.
이 믿음은 그 결과 있는, 결과가 있는 믿음을 말씀을 합니다.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것을 사람들이 데리고 오는데, 데리고 온 그 사람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어야 되느냐? 그 사람에게는 ‘데리고 가는 그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이래 가면 예수님께서 네 모든 이 불행을 다 치료해서 고쳐 주실 것이라’ 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되지, 데리고 가는 사람에게 그 믿음이 있도록 해서 데리고 가야 되지, 데리고 간 사람 그저 사람만 데려다 놓으면은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데리고 가는 그 사람들의 믿음은 그 사람들이 데리고 가는데 믿음 없이 데리고 가면 아무 소용 없읍니다. 전부 예수교는 믿음 가지고 일을 하는데 믿음 없이 데리고 갔으면 아무 소용 없소.
믿음을 가지고 데려가야 되는데 어떤 믿음인가? 자기는 ‘내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가면은, 예수님 앞에 가면은 예수님께 은혜받아 가지고 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 하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갔읍니다.
그러면 데리고 간 그 결과는, 데리고 간 사람의 결과는 어떤 결과를 맺는 믿음이 돼야 되느냐? 데리고 가는 사람의 그 믿음은 자기가 데리고 간 그 중풍병자가 주님에게 가면은 이제 은혜받아서 자기의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될 것이라 하는 그 소망의 믿음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데리고 간 사람의 믿음입니다.
데리고 가는 사람 자기가, 물론 이 사람을 데리고 가면 주님 앞에 가서 은혜를 받으면 이제 이 중풍병자가 나을 것이라 이런 생각 없이 데리고 가면 소용이 없고 자기가 그 생각을 가지고 가게 되면 데리고 가는 그 사람이 주님 앞에 갈 때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은혜받아서 병이 고쳐질 것이라 하는 그 마음, ‘내가 주님 앞에 가는 것은 지금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간다’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도록 그렇게 인도하는 그것이 데리고 가는 사람의 결과 있는 믿음입니다, 결과 있는 믿음.
자기가 아무리 데리고 가 봤자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런 것도 혹 애를 쓰지 안하고 오다 가다 보니까 진주를 만난 그런 것도 있기는 있지마는, 그래도 보화를 찾는 사람이 보화를 만나는 일이 많고, 또 자기는 오다 가다 보니까 우연히 만나 가지고 되는 그런 것도 있기는 있읍니다마는 인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쨌든지 속으로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내가 모든 치료를 받고 복을 받는다 한다’ 하는 그것을 그 사람에게 인식을 시키는 그 인식을, 데려감을 받은 그 병자가 그런 인식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는 그런 결과가, 결과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 사람이 속에 믿든지 안 믿든지 해도 그 사람에게는 ‘참 내가 이거 예수 앞에 가면은 큰 문제 해결이 되고 은혜를 받아서 지금 모든 것이 치료될 것이라’ 하는 그런 걸 믿지 안한다 할지라도 이제 그 데리고 가는 사람은 ‘이 사람을 주님 앞에 인도하면 이 사람이 은혜 받아 가지고 뭣이 형통해지고 변화가 될 것이라’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인도해야 되고, 그 인도하면은 자기 인도하는 그 결과는 무슨 결과냐?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이것이 나를 그저 예수 믿어라 하며 예배당에 데리고 가는데, 그 백지 소용 없는 데 데리고 간다, 나한테 이래 하도 그래 쌓으니까 내가 뭐인고 구경하러 가지. 구경하러 가지.’ 이렇게 속에는 하나도 믿어지지 안한다고 해도 ‘이 사람이 나를 지금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금 그 때문에 인도한다’ 하며 비웃어도 어째 그 사람은 지금 인도하는 목적이 뭐이냐 하는 그런 걸 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인도하는 목적은 그거다’ 하는 것을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그 결과를 가진 인도라야 됩니다. 그 이해가 됩니까? 인도하는 사람의 결과 있는 믿음. 인도하는 사람의 결과 있는 믿음은 그 결과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인도 받을 때 ‘야, 예수님 앞에 가면 모든 것에 복을 받고 뭐 네게 뭣 되고 뭣 되고 어떻다’고 이렇게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비웃읍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지만 비웃는 사람도 있어.
비웃어도 “이게 나를 인도하는 건 지금 나한테 무슨 무슨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인도를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는 것은 ‘봐라 공연히 소용 없는 거 하지 않느냐?’ 내가 지금 한번 반발을 하기 위해서 지금 끌려가는 것이지, 끌려가나 이 등신 같은 거는 나를 지금 그란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인도하고 간다.
이러니까 이 사람의 속는 걸 내가 요번에 지금 인도해서 한번 따라가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 속고 있는 것을 한번 깨우쳐서 이 사람을 도로 예수 믿는 사람, 이 속는 일을 예수 믿지 못하도록 말리기 위해서 간다.” 하는 그런 속에 가졌다 할지라도 어쨌든지 인도하는 사람은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인도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가면은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는 이런 지금 그 마음을 가지고 나를 인도한다.’ 마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은 그리 인도해도 이 사람은 ‘내가 너거 인도하는 예수교를 바짝 부수기 위해서 내가 한번 가 볼라고, 책잡기 위해서 가지 내가 뭐 참으로 거기 뭐 있다고 해서 가는 건 아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인도하는 사람은 인도 받는 사람에게 뭣 때문에 인도를 한다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인식을 시킬 수 있는 그런 결과 있는 믿음이 돼야 됩니다. 그 인도하는 사람의 믿음 고거 이해가 됩니까? 인도하는 사람은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 ‘나는 지금 예수교를 박멸할라고 이 사람에게 한번 따라가 시험해 볼라고 간다’ 이리 해도, 그렇게 속 마음은 가지고 지금 가지고 가지마는 그래도 ‘인도하는 이자는 속아서 내가 예수님 앞에 오늘 나가면 뭣을 받으리라 그런 지금 참말로 이거는 어리석게 그래 믿고 지금 나를 데리고 간다 하지마는 내 속에 마음은 다르다.’ 이래도 인도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믿는 믿음이 인도 받는 사람에게 그런 결과가 맺어지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인도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여게서 우리가 배워서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결과가 있는 믿음이라야 되지 결과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 인도하는 사람이 결과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속으로 비웃어도 ‘이것은 지금 나를 인도하는 것은 예수 앞에 나가면 뭐 된다고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나를 인도하기는 인도한다.’ 비웃으면서도 인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이 사람은 그렇게 지금 알고 나를 인도하고 있다.’ 비웃으면서 그렇게 알아도 인도 받는 사람이 인도하는 사람은 그런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지금 권면하고 말한다 하는 요걸 똑똑히 보여줘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 할일 다 했어. 자기 할일 다 하고, 그 다음에 할 거는 중풍병자 그자 할일이지요.
그거 또 인제 중풍 병자가 인도를 받아서 갔읍니다. 인도 받아 갔는데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그라면 또 인제 인도 받은 중풍병자는 어떤 믿음을 가졌던가?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 가지고 해결을 해 줬는데. 그 중풍병자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던가? 중풍병자의 믿음은 ‘예수님 앞에 지금 내가 요 병을 고칠라고 인도함을 받아 가지고 가는데, 병 고칠라고 지금 이렇게, 사람이 병들었으니까 병든 이 병을 고칠라고 지금 내가 인도함을 받아 가지고 가는데, 병고침을 받을라고 인도함을 받아 가는데.’ 하는 그 병 고침을 받는 그 병 고침을 받는 그 믿음, 병 고침은 ‘주님 앞에 가서 이제 내가 병을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 아무래도 요번에 가 가지고 내가 병이 나아야 되겠다, 요번에는 뭣이 해결이 돼야 되겠다.’ 그렇게 병고침을 받는 그 믿음을 가진 그 믿음은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지 결과 없는 믿음이면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그 결과 있는 믿음, 그러면 자기가 중풍병 이 병을 고침을 받을라고 주님 앞에 갔는데 주님 앞에 가면은 ‘이 병을 주님이 고쳐 주실 것이다’ 하는 그것이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인데, 그 믿음의 결과는 어떤 결과가 있어야 되느냐? ‘병을 고침을 받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가면은 주님이 나를 고쳐 줄 것이다.’ 그 마음을 가지고 그 소망을 가지고 믿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결과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결과 있는 믿음.
그 사람은 무슨 결과 있는 믿음을 가졌느냐? 그 사람이 두려워 떨었읍니다.
떠니까 여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이렇게 주님이 “안심하라” 이렇게 하는, 이 안심하라 하는 것은 뭣 때문에 안심하라 했느냐? 그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위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에게 대해서 소망을 가지는 그 소망은, 주님에게 소망 가지는 그 소망은 두려움의 결과가 맺어지는 그 소망의 믿음이라야 되지 두려움의 결과가 맺어지지 않는 그런 소망의 믿음은 다 그것은, 물론 다른 데는 또 그런 면도 있지마는, 우리가 믿음도 이런 면 저런 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런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게는 결과 있는 믿음을 가르친 것이라고 제가 처음에 말했읍니다.
자기가 주님에게 지금 은혜를 참 받을라고 소망하면, 주님에게 참 은혜를 받을라고 지금 자기가 믿고 은혜 받을 믿음을 가지고 은혜 받을 소망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결과에 두려움이라는 그것이 생겨집니다. 두려움이라 하는 게 생겨져.
무슨 두려움이 생겨지느냐? ‘이 어른은똑똑히 모른다 할지라도이 선지자고 또 거룩한 선생님이고 이것은 이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내가 이분 앞에 은혜 받으러 가는데 내가 지금 이런 이런 이런 잘못이 있고, 이런 숨어 있는 죄가 있고, 이런 일이 있고, 내가 이런 행동이 있으니,’ 해서, 자기가, 선지자요 자기를 모든 데서 은혜 베풀어 주실 그분을,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에게 소망을 가지게 되면은 자연히 자기의 그 언행심사의 행동에 대해서 과거를 자기가 알고 현재를 자기가 알고 또 미래에 대해서 욕망하는 그런 모든 계획을 하고 하는 것도 자기가 아니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알지 못하는 게 없으신 분이시니 내가 그분에 뭘 얻으러 갈라고 이래 보니까 이런 것이 생각난다. 이거 내가 잘못했다. 저런 거 잘못했다.’ 자꾸 자기 과거 현재 미래에 있었던, 미래에 대해서 닥치지 안한 일이 무슨 있겠느냐?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계획하고 소원한 것이 있다 말이오. 내가 이런 소원 가진 거, 내가 이런 계획 가진 거, 또 이런 과거에 말한 거, 행동한 거, 이런 거 뭐 한 거,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그것이 자기가 생각해 가지고 그 두려워지는 그 결과 있는 소망의 믿음이라야 되지 그거 없는 거는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그거 이해가 됩니까? 양산동에 가 가지고도 모두 기도하고 지금도 그 산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읍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하고 있으면 내가 가 가지고 주님 앞에 무슨 은혜를 지금 받을 그 각각 모두 은혜 받을 그런 소망을 가지고 가서 있을 것입니다, 뭐이든지 말이오. 물론 감사하는 것도 있겠지마는 은혜 받을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그게 주님 앞에 은혜 받을 그 소망 가진 그게 다 믿음이라 말이오. 믿음인데 그 믿음에는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되지 결과 없는 그런 믿음은 안 된다 말이오.
주님에게 소망을, 주님에게 은혜 받을 소망을 믿는, 이 소망을 가진 이 소망을 자기가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받을 그 소망을 가지고 보니까, 소망을 가지고 보니까 뭐이 생겨지느냐? 소망을 가지고 보니까 내가 그 소망하는 그분은 선지자요, 완전자이시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하고 거룩한 선생님이라 이렇게 하니 이분에게 내가 가면 이분은 내 속에 모든 거 마음 생각 뜻,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그분에게 갈라 하니까 먼저 지금 자기에게 대해서 그 잘못된 그것이 발견되어지는 그 결과가 있는 믿음이라야 되지 그거 없으면 소용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소자야 안심하라” 이랬읍니다. “안심하라” 뭐 안심했소? 뭐 안심해? 주님이 몽둥이로 뚜드릴까 싶어서 겁을 냈읍니까, 주님이 무슨 거게서 어떻게 무엇을 요구를 많이 할까 싶어서 그래 지금 근심 걱정이 났읍니까? 뭣 때문에 무슨 근심, 뭣 때문에 근심 걱정이 생겼읍니까? 그 근심 걱정이 생긴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랬다 말이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라니까, 중풍병자가 주님에게 은혜 받을 그 믿음, 은혜를 주님이 주실 것이고 내가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 소망과 믿음을 가졌을 때에 ‘주님이 은혜 주실 것이다’ 하는 이것만 가지는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말이오. 진짜가 아니라.
진짜는 그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진짜라.
그러면 중풍병자가 병고침을 받을 것을 자기가 믿고 소망하고 보니까 ‘이거 병 고치면 얼마나 잘 고쳐 줄 것이가, 어떻게 고치는가, 뭐 고치는가?’ 그게 아니고 그것보다 그 믿음을, 주님에게 은혜 받을 그 믿음을 가지고 보니까 그 믿음에 결과가 무슨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은 ‘아이고, 내가 주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 주님 앞에 거리낌이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노?’ 이라니까 그때 갑자기 해결하지도 못하고 과거에 그래 되는 거 이제까지 숨겨 가루고 모두 다 덮어 놓고 왔지마는 이제 이분은 모르시는 게 없으니 이분이 다 아시니까 이분 앞에 나갈 때에 이게 문제다 해 가지고 이제는 중풍병 고치는 그 문제보다도 주님 앞에 지금 이 죄 문제가 더 커져서 근심하는 그 사람이 됐다 말이오.
그 중풍병, 병고침을 받을라고 주님 앞에 나왔는데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앞에 턱 대하고 보니까 병 고치는 것보다도 그 믿음의 결과, 죄에 대해서 근심하는 그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주님이 기뻐하셨다 그말이오.
그러면 인도하는 자의 믿음, 무슨 믿음? 또 인도함을 받은 자가 주님 앞에 나타날 때에 믿는 믿음의 그 믿음을 무슨 결과를 가진 믿음을 주님이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나중에 해결해 줬다 그말이오.
그러면, 자기는 주님 앞에 그 죄에 대해서 떤 믿음을 가졌다 말이오. 죄에 대해서 ‘내가 이런 죄가 있다’ 하는 그것을 모두 생각하면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떤 믿음이 있었어. 떨린 그것도 믿음이라 말이오. 주님 앞에 ‘내가 이런 이런 잘못이 있는데’ 하는 그런 것을 발견해 가지고 주님이 “소자야 안심하라” 하기까지, 안심을 주님이 주시기까지 그가 두려워 떤 그런 믿음을 가졌다 말이오.
그 믿음을 가졌으면 자기가 참 바로 떨었으면 말이요, 바로 두려워하고 바로 떨었으면 그 결과는 무슨 결과가 나옵니까? 그 결과는 또 무슨 결과가 나오지요? 이러면 자기에게 이제는 주님이 “소자야 안심하라” 하는 안심의 결과가 나옵니다. 안심의 결과가 나와요.
여러분들이 신앙 경험에서 다 이거 알고, 이 진리를 경험, 자기에게 그렇게 행하게 하는 그 영감이 들어서 자기에게 알려 주는 것이지 그리 안 하면 이거 껍데기로 하는 사람들은 이 설교 암만 해 봤자 속에 실지로 성신이 감동시켜서 감동 받는 그 자기 심령 속에서 작용하는 것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거요.
이런데, 요 중풍병자가 자기가 병 나을라고 주님 앞에 나오고 보니까 그 믿음의 결과는 근심 걱정이 생겨버렸다 말이오. 죄로 말미암아 근심 걱정 두려움이 생겨버렸고, 그 두려움을 참 바로 두려움을 가진 생명 있는 믿음, 바른 그 믿음, 진실된 믿음을 떡 가지고 보니까 그 다음에 근심 걱정을 했는데 “소자야 안심하라” 주님의 위로가 왔읍니다.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 앞에 바로 떨고 바로 두려워하고 바로 울고 바로 했으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넘치는 위로가 오는 것이 그게 신앙의 순서라 말이오. 그 위로의 결과가 왔어.
지난 밤에 설교하는○○○조사님의 하는 것은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고 ‘그 태도가 너무 교만하고 암만 좀 은혜는 있지마는 너무 교만하더라. 너무 뻔뻔하고 너무 자신만만하더라.’ 그거 자신만만한 그게 필연적이라. 필연적인 것은 이제 주님 앞에, 자신만만한 것은 주님 앞에 떨고 나왔기 때문에 위로 받은 그 위로라 말이오. 알겠소? 그 경험한 게 맞아? 주님 앞에 떨고 나니까 많이 주님이 위로해 준 위로를 받았다 말이오.
위로받을 때 그때 사람들이 넘어가기 쉬운 것이 뭐입니까? 위로받을 때 넘어가기 쉬운 것이 그럴 때 교만으로, 너무 자신만만이거든. 자신만만인데, 울고 나면은 웃을 일 있고, 떨고 나면은 담대한 일 오고, 주님 앞에는 이렇게 돼지는 것이 이것이 주님 앞에 바로 정상적인 교제를 가지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주님 앞에 소망을 가진, ‘주님이 주신다’ 하는 소망의 믿음을 가지고 보니까 그 결과에는 자기에게 죄의 문제가 나타나 가지고 떪이 나왔고 ‘내가 이런 죄가 있다’ 이 걱정을, 자기 혼자 그 자리에서 뭐 말도 못 하고 지금 도근도근 그래 도근거려. 주님 앞에 ‘내가 이 죄 있읍니다 이 죄 있읍니다’ 그래 고하지 안했어. 고하지 안하나 속으로 지금 ‘이런 내가 죄가 있는데 이런 죄가 있는데’ 여러가지 죄를 생각하면서 중풍병자는 지금 근심 걱정했다 말이오.
근심 걱정을 한 그 근심 걱정이 바른 믿음이라면 반드시 그 근심 걱정에는 열매가 맺는 것이니까 무슨 열매가 맺었읍니까? 그 열매를 맺는 것은 위로의 열매가 맺었다 말이오. “안심하라. 안심하라.” 위로의 열매. 이제 평안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앞에 운 자는 반드시 위로로써 웃음이 나오게 되고, 참 큰 두려움이 있는, 두려움이 있는 그 사람은 뒤에 가서 평안을 얻기 마련인 것이 그것이 신앙의 순서입니다. 죄에 대해서 두려워한 그 결과에는 위로를 받았다.
“안심하라. 안심하라.” 위로를 받았고, 그 다음에, 위로받은 뒤에 위로받은 그 결과 “안심하라” 위로를 받았읍니다.
“안심하라” 위로를 받았는데, 위로받은 믿음의 그 결과는 어떤 결과를 맺어야 됩니까? 위로받은, 소자야 안심하라는 그 위로를 받았읍니다. 마음에 위로가 왔어.
바로 근심했으면은 위로가 왔어. 또 위로가 왔을 때에 그 위로에 대해서 자기가 바른 믿음을 가졌으면, 위로할 때에 위로를 바로 받았으면은 그 다음에 오는 결과는 뭐입니까? 오는 결과는, 실지로 죄가 사함 받는 그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가 믿음의 결과의 순서인데 그라고 난 다음에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주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았는데 죄사함 받고 나니까 지금까지는 생명의 믿음으로 쭉 계속해서 왔읍니다.
왔는데, 그라고 나니까 무엇이 생겨졌읍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시련이 생겨졌읍니다. 그 생명 있는 믿음이 쭉 계속되고 나면은 반드시 시련이 옵니다.
시련이 무슨 시련이 왔읍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근수근거리기를, 수군거려 ‘참람하도다 제가 뭐인데 사람의 죄를 사해? 네 죄를 사해 줬다 해?’ 지금 주님이 ‘네 죄를 사하셨다' 하면은 ‘아이구, 그렇습니까?’ 모두 감사해야 될 터인데, 옆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죄사함 받았다 하는 거는 그거는 공연히 엉터리 말이고 참람된 말이고 가증한 말이고 죄는 하나님만이 사해 주시는데 무슨 죄사함을 줬다고 그와같이 말하느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부인하는 일이 수군거린다 말이오.
이것이 우리 신앙 순서의 하나의 시련입니다. 반드시 시련이 있읍니다. 어떤 일이든지 보십시오. 주님과 관계되는 일에는 그 밑에 기초 작업이 있어서 순서가 나오고 순서가 다해서 그것이 건축이 돼 가, 건축이 완전 건축이 아니고 엔간히 중간 건축이 돼서 나왔을 때에는 반드시 건축된 것을 시험합니다. 건축된 것이 이것이 견고하게 됐나 안 됐나 검사가 나온다 말이오. 건축된 것의 검사가 나와.
검사가 나오는데 그 검사가 무슨 검사냐? ‘공연히, 참람하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무슨 제가 죄 사할 권이 있다고 저와같이 말하고 있는가?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인데 제가 무슨 죄 사할 권세가 있어?’ 이라면서 이 사람이 죄사함 받았다 하는 그 말을 그만 흐리게 만들어 가지고 그 마음에 믿음이 흐려 가지고 죄사함 받았다 하는 확신이 없도록 그렇게 만드는 그런 시련이 왔다 그말이오. 그 시련에서 떨어지면 헛일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런 시련이 옵니다.
베드로도 물위로 걸어가는데 물위로 걸어가면 다가 아니라. 물위로 걸어가고 난 다음에 물위로 걸어가고 나서는 반드시 시험이 옵니다. 시험이 오는 게 뭐이냐? 시험이 오는 것은 풍랑을 보게 됐었는데 그때 안 떨어져야 되는데 그때 그만 떨어졌기 때문에 물에 빠졌다 말이오.
그러니까 뭣이든지 반드시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돼 가지고 이제 반쯤 그것이 됐으면 한번 시험을 해 가지고 그것이 검사를 해서 ‘요게 바로 됐다’ 바로 됐다 할 때에 그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런 시험이 왔어.
그런 시험이 왔는데도 주님이 그 말씀하시기를 “네가 죄사했다 한 것과 중풍병자로 일어서 걸어가라 하는 그 말과 어느 말이 어렵겠느냐?”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주님이 말씀을 하시니 이 사람들과 서로 대립이 돼 가지고 말하고 있다 말이오.
말하고 있는데 그 뒤에 요 환자가 이제까지 믿어 나온, 소망하고 나서 죄가 두려워졌고, 두려워지고 난 다음에 주님의 위로가 왔고, 위로가 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그 결과로 죄사함을, “네 죄사함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았다 하는 거게까지는 잘 왔는데 거기까지 잘 오고 나니까 옆에서 ‘참람하도다’ 이래 가지고 죄사함 받았다는 거기 대해서 그 확신을 다 뭉케버려서 없애 버리도록 그렇게 작용을 했다 말이오.
작용을 했는데 그때에 작용에 없어졌느냐 안 없어졌으냐? 그 믿음이 ‘그래, 죄사함 받았다 하는 거는 참 그거는, 죄사함 받았다 하는 거야 눈에 보이나 안 보이나?’ 우리가 주님 앞에 고해 가지고 죄사함을 받았다 하는 그거는 눈에 보입니까, 손에 쥐입니까? 뭐 이런 거 주는 것같이 주는 게 아니라. 죄사함 받았다 하는 건 자기 마음이지. ‘내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여게 대해 참말로 죄사함을 받은 건가 안 받은 건가?’ 하는 그 확신은, 그 믿는다는 믿음, 죄사함을 받았다는 데 대해서 반드시 시험이 왔었는데, 그 믿음을 깨뜨릴라고 시험이 왔었는데 그 시험에서 그 믿음이 깨졌느냐, 깨지지 안하고 그 믿음이 그대로 유지가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믿음의 결과는 뭘로 나타났읍니까? 그때에 그 믿음이 깨졌으면 헛일이라. 믿음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뭘 보고 알아요? 믿음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뭘 보고 압니까? 그 결과는 뭘로 나타났읍니까? 믿음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그때 옆에 사람들이 ‘공연히 참람된 소리하고 있다. 무슨 죄사할 권세가 사람에게 있느냐?’ 이라니까 그만 그 사람이 그 죄사함 받았다는 게 무슨 뭐 뭉텅이를 떡 줬으면 손으로 받았으면 ‘이거 내가 죄사함 받았다’ 이거 이래 알지마는 그게 아니고 자기 마음의 작용이라. 마음의 작용이라.
마음의 작용이니까 그뭐 참 죄사함 받았나 안 받았나 하는 것을 ‘내가 공연히 혼자 생각하는 것이고 그 사람도, 이 선생님도 공연히 그말 하는 것이지 이 정말로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됐느냐?’ 하는 그것이 흐미하다 말이오. 흐미하나 또 그게 더 견고하고 확실하지마는 육적으로 돌아가면 흐미해. 흐미하다 그거요.
그랬는데, 그렇게 그 믿음을 까뭉케려고 세상이 와 가지고 한번 흔들어 봤다 말이오. 흔드는 건 주님이 흔들게 해요, 이 속에 믿음이 있나 없나? 참람하다 하는 그것이 그 사람들이 ‘참람하도다. 무슨 죄사할 권세가 있느냐?’ 그말을 그 사람들이 했는데, 그 사람들이 했는데 그 사람들이 말한 그것은 그 말을 누가 하라고 시켰읍니까? 누가 하라고 시켰어? 그 말을 누가 하라고 시켰어? ○○○목사님? 주님이 시켰어. 알겠어? 시험하는 거라, 시험하는 거. 주님이 시켰다 말이오.
주님이 시켰는데 그때 그 말할 때에 이제 주님이 ‘어느 게 어렵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어느 게 어렵겠느냐?’ 하는 게 지금 시험 문제라. ‘사함 받았다는 그게 어렵겠나 중풍병자를 걸어가라 하는 그게 어렵겠느냐 둘 중에 어느 게 어렵겠느냐?’ 이럴 때에 이제 벌써 그 시험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사람은 ‘참 그렇다. 죄사함이 됐는지 안 됐는지 그게 내 마음으로 그런 것인지?’ 이 죄사함 받았다는 데 대해서 확신을 까뭉케는 이런 큰 시험이 왔다 말이오.
시험이 온 그것은 네 믿음이 과연 이 성공을 할 만한 그런 견고한 믿음을 네가 가졌느냐 네 믿음이 그렇게 견고치 못한 믿음이냐? 흔들어 보니까, 흔들어 보니까 깨져 버렸으면 그거 실력 없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맺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랬는데 그 믿음이 그렇게 옆에서 그 믿음을 헤칠라고 그 믿음을 없앨라고 옆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이렇게 말했는데 그 미혹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어때요? 그 믿음이 깨졌읍니까 안 깨졌읍니까? ○조사님? ○○○조사님, 믿음이 깨졌나요 안 깨졌나뇨? 뭐 안 깨져? 안 깨진 건 뭘 보고 알아? 시키는 대로 뭐 순종했는데? 걸어가라 한 그게 중풍병자가 걸어가고 싶기는 걸어가고 싶지마는, 걸어가는 걸 보면 그래, 순종한 걸, 순종이라고 그래 말해도 되기는 되지마는, 순종은 순종이지마는 병나은 걸 봐서 그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걸 봐서 그 사람에게 믿음이 흔들리지 안했다 말이오. 그렇지 안해? 내가 말은 답은, 믿음이 흔들리지 안 했어. 그 순종이라 하면 좀 핀트가 잘 안 맞아.
믿음이, 그 믿음이 삭아졌느냐 그 믿음이 계속해서 보존됐느냐 하는, 보존이 됐느냐? ‘보존이 됐읍니다.’ 뭘 보고 보존 된 걸 아느냐? ‘주님의 기적과 표적이 왔으니까 온 걸 보니까, 병 고친 걸 보니까 믿음이 요동되지 안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래 답을 해야 될 거라 말이오.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병 고침을 받았읍니다. 병 고침을 받았는데 병 고침 받은 그것이, 그 병고침 받은 그것이 참 바로 고침을 받은 것이요, 복된 고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하는 건 또 뭘 보고 압니까? 복된 고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것의 결과는 뭐입니까? 병 고침을 받았는데 병 고침 받은 것이 그 사람에게 참 복이 됐는지 안 됐는지 하는 것은 결과가 뭘 보고 압니까? 그것도 결과가 있는데요. 병 고침 받은 그 믿음도 결과 있는데 그것의 결과는 뭐입니까? 그것의 결과는 그것입니다.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반대하던 사람들이, 반대하던 사람들이 보고 이제, 반대를 했지마는 반대한 사람이 정반대로 ‘과연 이 사람과는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 이 권능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하면서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 하는 그런 증거가 됐더라 그거요.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요 알기만 알고, 여게는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 결과 없는 믿음은 안 된다. 그 사람이 중풍병자가 나았다 할지라도, 중풍병자가 나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나은 것은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나았는데, 중풍병자가 나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나음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 권능을 주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는 그 증거가 없으면은 저는 병 나아야 또 병으로 돌아가고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알겠읍니까? 우리 교회는 천여 명, 뭐 근 천여 명이 병이 나았는데, 병 나은 결과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병이 다 돌아갑니다. 알겠읍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이나 표적이나 주시는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 가지고 구원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저 병 고침만, 병고쳐 주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라 말이오.
병은 고쳤는 데 딱 거석해 놓고 딱 ‘예수 믿어서 병 고쳤답니다’ 부끄러워한다 말이오. ‘에이, 그뭐.’ 실실 해 가지고 부끄러워해.
그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증거가 돼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결과가 맺어져야 되지 그 맺어지지 않은 그 결과 없는 믿음은 소용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병 나은 데 대해서, 축복 받은 데 대해서 자기가 예수 믿어 가지고 재산 축복이라든지 건강 축복이라든지 사람이 인품 축복이라든지 별별 축북이 많이 있지 않소? 사건이 해결된 사건 해결의 축복이라든지 했는데 축복받은 그 축복은 결과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오늘 아침에는 결과 있는 믿음을 지금 말해.
녜, 이래 이 퍼뜩 하니까 여러분들이 돌아가서 자꾸 생각하면 그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 그말이오.
결과 있는 믿음이 돼야 되는데,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받은 데에는 결과가 있는 기적과 축복이 돼야 되는데 그 결과가 뭐입니까? 기적과 축복의 결과가 뭐이요? 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아, 이 능력은 참 하나님께로서 왔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권능을 주셔 가지고 이와같이, 하나님의 권능은 크다.’ 이래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수군거리며 ‘죄사함 받았다, 뭐 받았다, 뭐 참람하다.’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인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그런 증거의 결과가 맺어져야 된다 그거요. 그게 없으면 그 지금 병 낫고 축복 받은 그것은 결과가 없기 때문에 그건 잡탱이고 마지막에 다시 병으로 돌아갈 것이라 그말이오. 알겠읍니까? 여게서 결과 있는 요거는 믿음을 가져.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믿음이지 결과 없는 믿음은 소용 없다, 그러기 때문에 결과 있는 믿음이라야 그게 믿음이다 하는 것을 여게서 가르치고 있읍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인생은 멸망할 것을 보지 못하고 구원 얻을 길을 보지 못하고 멸망과 구원을 보지 못한다. 죽고 사는 걸 보지 못한다. 어짜면 죽고 어짜면 사는 그걸 보지 못한다. 이 보지 못함으로 죽는다는 요것을 학생들에게 오늘 주일 요거 하나만 가르치는 게 좋을 거야. 보지 못하는 것을 인간으로 멸망한다. 요거 하나를 단단히 가르쳐서 그 사람들이 그만 그 아이라도 아, 보는 육안으로 보는 것입니까 생각으로 보는 것이요 지혜로 보는 것이요 비판으로 보는 것이요 평가로 보는 것이요 모든 거 그걸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은 꽉 찼는데 마음의 눈이라 말이오.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망하는 거라.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여러분 속에 느껴지는 것만치 그들에게 들어갑니다. 강하게 들어갑니다. 느껴져야.
여러분들이 믿어야되지 안 믿으면 소용 없어. 모두 거짓말쟁이는 성령이 같이 하지 안해.
1987. 2. 22. 주일새벽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소경 바디매오에 대해서 요새 아침으로 계속 했는데, 그런 것은 반사 선생님들이 알고 있어야 될 일이고, 또 앞으로도 좀 더 계속할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은 너무 범위를 넓게 잡고 또 그 안에 있는 도리를 세밀히 가르칠라고 하다 보면은 그 아이들에게는 강령을 잡지 못하고 도리어 이렇게 한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그런 지식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이 공과를 가르치는 데에는 그 셋째 대지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래 말씀했는데, 그 믿음 다섯 가지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는 그 소경이 자기가 모든 뭐 불행이나, 천대나, 멸시나, 가난이나, 고난이나, 모든 불행의 그 원인이 보지 못하는 거게 되어 있다는, 보지 못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있다는 이것을 그 소경이 아는 거와 같이, 이거는 우리에게 계시로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에. 안 거와 같이 이 공과에서는 모든 사람이 금생이나 내세나, 영이나 육이나 자기의 전불행은 보지 못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있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걸 꼭 가르쳐 줘야 됩니다.
사람은 모두 마귀란 놈이 미혹을 시켜서 불행의 원인이 엉뚱한 데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비하게 그렇게 가지고 있소. ‘아무래도 자녀들에게 살림을 못 물려 줘도ㅡ그런 말 합니다ㅡ눈은 띄워 줘야 되겠다’ 이렇게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눈은 띄워 줘야 되겠다' 또 ‘우리는 배우지 못해서 눈이 까막눈이니’ 그말합니다. 까막눈이라, 새까만 눈이라 그말은 못 본다 그말이지. 그것은 세상 지식 그것이 사람의 신령한 심령의 눈, 지혜의 눈, 현재 미래 과거를 보는 눈, 자기 영육의, 영육이 그만 간단하게 말해서 영육이 망하는 것을 보는 눈, ‘이거는 망한다’ 영육의 망할 것을 보는 눈, 영육의 행복될 것을 보는 눈, 이 눈이 지혜 있는 눈인데 그런 눈은 이 세상 지식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지식에는 하나도 없어.
뭐 천하 지식을 다 배워도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데에서 모든 행복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자기가 자기 하나님을 삼지 못한 여기에 인간의 금생 내세 뭐 죽고 영생하는 거 그런 전부 원인이 여게 매였지마는 세상 지식에는 그런 걸 다 뭉쳐도 거기는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지식은 전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간에 대해서는 어짜든지 으뜸이 돼서 올라가야 된다. 인간에 대해서는 제일 대가리가 돼야 된다. 그거 세상 학문이 가르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마호멧트도 내가 대가리 되는 데는 이 일을 해야 되겠다, 예수님이 머리 돼서 예수교가 많이 퍼졌는데, 나는 회회교를 퍼뜨려야 되겠다, 나는 불교를 퍼뜨려야 되겠다, 나는 유교를 퍼뜨려야 되겠다. 이라는 것은 그것이 제일 머리되는 건 줄 알고 머리되는 데에 좋은 방편인 줄 알고 세상 학문에는 애를 쓰고 세상 이종교에는 애를 쓰지마는, 사람이 창조주요 또 주재, 주재라 말은 주인이라 말이오. 전부가 주님의 것이라.
또 주권 개별 섭리자요 또 모든 생사화복을 홀로 가지고 계시는 이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과 사람이 끊어지면 그것이 영육이 영원한 멸망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자기와 연결되면 전능과 연결, 전지와 연결, 완전과 연결, 또 대주재와 연결, 그분하고 이래 친교를, 친교를 맺는 이것, 하나님을 차지하는 것이 모든 것의 행복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마는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는 건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눈 떠야 된다는 것이 인간이 내놓은 그 지식이나 알려 주면 눈 뜨는 줄 알고, 인간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수만 종류로 망한 것을 기록해 놓은 게 인간 지식입니다. 요것도 알아요. 망한 것은 저거가 떠들지마는 아무리 논리해도 결국 성경을 인정한다면은 그 말이 맞게 됩니다.
세상 지식이라 하는 것은 요렇게 하면, 요라면 사람이 잘 산다 조라면 잘 산다.
너는 이 나무 이것에 대한 이치를 해서 식목에 대한 이치를 알아서 식물, 식물 박사가 되면 너는 잘산다. 너는 그 구더기를 연구해서 구더기 박사가 되면 잘 산다. 이래 자, 그만이거 잘 산다 저거 잘 살다, 전부 이라면 밥 잘 먹고, 옷 잘 입고, 잘 살 수 있다 하는 그런 잘 사는 방편을 여러 수천 가지 수만 가지를 말해 놓은 것이 그것이 세상 지식입니다.
이러니까, 나는 요걸 배워야 되겠다, 요 기술을 배워야 되고 다른 사람은 저 기술 배워야 되겠다 하는 그것인데, 전부 그거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리 들어 가지고 그거 하면 될 줄 알고 그거 했는데 그거 하는 사람은, 과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하는 그 과학자는 과학으로 망했습니다.
또 자기는 무슨 ‘나는 세균 박사가 돼야 나는 잘 살겠다.’ 세균 박사가 된다는, 일생을 세균 박사에게 기울이는데 세균 박사 때문에 망했습니다.
나는 이 정치가가 돼야, 정치가가 돼야 행복되겠다 해 가지고 일생을 노력해 가지고 어느 지역에 어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면 그 사람은 정권 잡기 위해서 노력하고 정권 잡고, 또 잡고 노력했고, 또 정권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이양하고 난 다음에는, 그래도 정권 그 대우를 받느라고 만날 그거 하다가 다 정권에 대한 것을, 뭐 대통령 하고 말면 그만 대통령 하고 난 다음에도 나중에 대통령 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일생 동안을 노력합니다. 일생을 그거로 망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지식은 이거든지 저거든지 자기는 이것이 인간을 행복되게 한다고 생각하는 그 면이 어떤 면이든지 ‘나는 다른 거 안 되고 한글 박사가 돼야 되겠다. 그래야 나를 행복되게 해야 되겠다.’ 한글 박사가 될라는데 그 사람은 한글 박사가 될라고 일생 동안 연구했는데 한글 박사라 그거 가지고 일생을 망쳤습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이해가 돼야 돼.
그러면 세상 모든 지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망치는 여러 수천 수만 길을 뚫어 내놓은 게 그게 세상 지식입니다. 자기대로는 그게 자기를 행복되게 하리라고 생각하고 거게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이래 했지마는 그게 사람을 살리는 거는 아니라 말이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뭣이 사람 살렸는가?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연결되는 그게 사람 살린다는 것인 걸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떨어지면, 그러면 세상 지식에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있느냐?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은 예수님밖에는 없어.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딴거는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 선생님이, 반사 선생님들이 자기 속에 ‘아, 이 소경 바디매오가 자기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됐다.’ 하는 요것을 여기 성경에 가르치는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과연 사람들이 전부 보지 못하는, 이거는 하면은 영생도 없고, 영육에 행복도 없고, 금생도 내세에도 행복이 없다.
이거는 행복을 줄 수 없다. 행복을 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가득 찼습니다.
생명과 평강과 영육의 금생 내세에 행복을 줄 수 없는 그 모든 지식들이 세상에 가득 차고 방편이 가득 찼습니다. 이랬는데 그걸 모른다 그말이오. 그걸 몰라.
세상 지식을 다 뚤뚤 뭉쳐야 그 속에는 생명이 없고 영생이 없다 말이오. 영생이 없고 그 속에는 영원 무궁세계에 행복된 길이 거게는 없어요. 없는 걸 여러분들이 기억합니까? 생각이 납니까? 그러면, 금생과 내세 영과 육의 행복되게 해 주실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이 소경이 보지 못하는 그것이 자기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을 안 것처럼 우리들도 보지 못하는 거, 몇 가지를 보지 못합니까? 두 가지 보지 못합니다.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두 가지 보지 못해요.
한 가지는 뭐인데? 영과 육, 금생과 내세 멸망시킬 것을 보지 못합니다. 멸망시킬 것을 보지 못해. 고거 한 가지. 또 하나는 뭘 보지 못합니까? 영과 육 금생과 내세에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고 행복되게 할 그것을 보지 못한다 말이오. 망할 걸 보지 못하고 생명과 평강, 영생과 평강을 보지 못하고, 요 둘을 보지 못한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라 말이오.
그러면 자, 예수님을 안 믿고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내가 예수 믿는 것보다도 나는 공부를 잘해야 된다’ 하고서 예수 믿는 학생들이 주일날도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또 새벽기도 못 나와도 공부는 해야 된다 하는 그 사람이 그러면 ‘예수 믿는 것보다 지식 가져야 되겠다, 예수님과 지식과 바꿔야 되겠다.
또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과 바꿔야 되겠다.’ 이렇게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 쳐 놓고 세상에 뭐 돈벌이, 사업, 또 자기의 직장, 또 뭐 공부 이 모든 거 지금 그것을 예수님과 비교할 때에 그 모든 것을 예수님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해서 믿음 준비 하는 것보다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 그 면으로 주력하는 사람 그 사람들, 그것도 좋지마는 예수 믿는 것보다 그걸 낫게 여겨서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내놓고 양보하고 이라니까 그 사람들 멸망할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까 못 보는 사람들입니까? 대답해 봐요. 멸망할 것을 볼 줄 압니까 못 봅니까? 못 보는 사람들이라 그말이오. 요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돼.
그러면 물론 세상에 일도 해야 되고 사업도 해야 되고 모든 거 하지마는 그것은 예수 믿는 것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건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예수 믿는 것이라 말이오. 예수님이 시키는 데 ‘너는 오늘은 일해라’ 하면 시키시니까 일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니까 공부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니까 사업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니까 정치도 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니까 이런 것 저런 것 하지 예수님이 시키지 안한 것이면 아무것도 안 한다 그말이오. 예수님 시키는 대로만 한다 그말이오.
모든 세상 일도 하는 거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그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믿는 거거든.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거든.
예수님을 어기고, 예수님의 교훈을 어기고는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예수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너는 지금 감옥에 들어가야 된다’ 하면 감옥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시키기를 ‘너는 지금 이 세대에서 이 나라들이 지금 이거 하고 있으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예수 믿지 말아라 이렇게 하니까 너는 예수 믿지 말라 할 때에 너는 죽어도 예수 믿는다 해야 된다.’ 그러면 그것을 예수 믿는다고 사형 선고를 내리고 이렇게 떠들고 해도 예수 믿는 일을 버리지 안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죽으라 하면 죽는 사람이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죽는 것도 예수님이 죽어라 하면 죽고 살면 예수님이 살라 해야 살지 그뭐 사는 것도 예수님보다 더 나은 게 없고 예수님이 자기의 금생 내세 영육의 행불행을 해결해 줄 이는 그분이라. 눈을 띄워 주는 건 그분뿐이라.
이래서, 이 사람들이 두 가지 지식을,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간추려서 말하지 못해 이거 좀 넓은 범위로 이래 말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여러분들이 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요. 지식을 가지고 가르칠 때는 그것들은 간단하게 가르치요.
학생들이 뭐 압니까? 그저 단지 여러분들이 알고 말해야 된다 말이오. 이 소경이 보지 못한 것이 그의 모든 영육의 금생 내세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꼭 가르치도록 해.
이걸 여러분들이 알면, 똑똑히 알면 이 학생에게 오늘 ‘인간이 보지 못하는 그것이 영육의 금생 내세의 멸망의 원인이 돼 있다. 이것을 소경이 발견했다.’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계시를 주셨다 말이오.
그러니까 모두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학생들이 ‘사람이 멸망하고 구원 얻고, 행복되고 불행스럽고, 금생과 내세에 실패하고 성공하고 하는 그 원인이 어데 있느냐? 어데 있느냐? 돈벌이 못하는데 있느냐, 세상 공부 못하는 데 있느냐, 사업 못하는 데 있느냐, 부모의 재산의 상속 받지 못한 데 있느냐, 사람이 못난 데 있느냐, 또 그 사람이 무슨 건강한 데 병든 데 있느냐?’ 건강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병든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도 행복스러울 수 있고 병들어도 행복스러울 수 있고, 또 건강해도 망할 수 있고 병들어도 망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러면 금생과 내세 영과 육 모든 것의 흥망성쇠가 어데 달렸느냐 하는 요것을 학생들에게 나는 하나 가르치고 요거라도 하나 딱 잡고 가르쳐 주라 말이오.
그러면 그 원인이, 이 세상에 사람들은 만일 만 사람을 데려다 놓고 가만히 보면 만 사람을 보면은 자기의 흥망성쇠의 원인은 이것이라 하고 그만 거게 지금 열심히 집중합니다.
우리 저○집사,○집사? 우리 ○집사는 그전에는 새벽기도 자전차 타고 열심히 왔는데 얼마 동안 눈이 멀어서 말이지 ‘내가 흥망성쇠는 이거 부지런히 돈 버는 데 있다’ 돈 버는 데 있다 해 가지고 돈 버는 일을 예수 믿는 거 떡 내놓고 엉뚱한 짓 했었습니다.
그라고 저○집사 대집회 안 가요. 대집회 안 가니까 생전 믿어도 요 중간 요 치수가 있어. 한 치 들어간 거, 두 치 들어간 거, 백 치 들어간 거, 또 올라간 것도 한 치 올라간 것 두 치 올라갔는 것 있는데 자기 보통으로 믿는 그 구멍을 뚫고 나가지 안해. 이제 좀 나가서 대구집회나 거창집회나 좀 오랫 동안 계속 안 해.
거게 가 참석하면은 이제까지 못 본 세계를 보고 꾹 뚫고 올라갈 터인데 생전 그 범위 내에서 하지 그 범위 밖에를 못 나간다 그말이오. 알겠어? 이제 요새는 깨 가지고 죽자 하니까 그 얼굴이 좀 살아났네. 얼굴이 좋은데 그전에는 집에서 일만 하고 뭐 예수 믿는 거, 주일 지켰던가? 주일 지켰어? 주일은 지켰지? 주일만 지켰어. 새벽기도 한번도 못 나왔어.
그게 뭐이냐? 모두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그것을 다 몰라 그렇다 말이오. 예수 믿는 사람들 꽉 찼지마는 모든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것이 멸망의 원인이다. 바로 보지 못하는 거.
바로 보는 게 몇 가지를 보면 바로 봅니까, 손가락으로? 두 가지. 두 가지를 보면 바로 보는 거라. 이거는 암만 해 봤자 이거는 내 영육과 금생과 내세에 생사화복의 원인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거 암만 있어도 이게 금생 내세 영육을 행복되게는 못 한다. 이거는 사람들이 이거 가지고는 행복되게 못 하는 것인데 이것이 할 줄 알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행복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또 불행되게 하는 거, 불행하게 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두 가지라.
하나는 자기를 행복되게 할 거 같지마는 자기를 멸망시키고 행복되게 하지 못하는 고거 하나 봐야 되는데 고거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모두 ‘그것만 하면 망한다. 예수 믿으면 망한다.’ 이라지마는, 사람들이 망한다 하지마는 실상 사람을 금생 내세 영원히 행복되게 할 그것을 보지 못하면 망한다 말이오.
영원히 행복되게 할 것도 보지 못하지 영원히 멸망하게 할 것도 보지 못하지 요거 보지 못하는 요 둘 때문에 인생은 누구든지 망하고 만다 말이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이 예수 믿지만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예수 믿는 덕택을 봐 가지고 이렇게 존귀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덕택을 암만 믿어도 보지 못하고 불쌍하게 되고 그렇다 그말이오. 그거는 예수 믿는 게 행복이란 그걸 보지 못 어젠가 내가 언제 그랬는데, 누님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래요. ‘○○목사는 어데 학교 한번 삽짝에나 가 봤나?’○○목사 나는 일학년 한 줄 알았더니마는 학교 한번도 안 가 봤대요. 본인이 또 그래. 요번에 교학실에서 그때 모두 목사님들 모두 이래 모여 가지고 이래 할 때에 내가 그 얘기를 하니까 ‘저는 학교, 학교 입학도 안 해 봤습니다’ 이래. 그랬는데 단지 그게 뭐이야? ‘예수 믿는 게 뭐 이것밖에 잡을 게 없다.’ 잡고 이랬으니까 지금 그 부자라요.
○○목사도 일학년밖에 안 했어. 안 했는데, 다른 거 없어. ‘예수 믿는 거, 예수 믿는 거 이거 바로 믿어야 된다.’ 인제 그걸 봤거든. 행복된 길을, 행복되는 그 길을 알았다 말이오. 행복된 길을 봤어.
또 멸망의 길도, ‘이걸 암만 천하 박사 다 가지고 해 봤자 거게는 인간의 영원한 행복이 없다’ 하는 걸 봤고 ‘예수 믿는 여기에만 행복이 있다’ 그걸 봤다.
바로 봤다 말이오. 바로 본 고거 가지고 애쓰니까 그랬으니 그보다 더 애쓴 사람은 굉장히 올라갔을 거라 말이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게 멸망이요 원인입니다. 멸망의 원인이라. 보지 못하는 거 몇 가지나 보지 못했노? 이제 두 가지 보지 못했다. 고거 이해가 됩니까, 두 가지 보지 못한 거?○○선생? 두 가지 보지 못한 거 알겠어, 두 가지 보지 못한 거? 멸망할 것을 멸망할 것인 줄 보지 못해. 멸망할 그걸 멸망할 게 행복된 줄로 봤거든. 또 이거는 금생 내세를 행복되게 해 주는 요거 하나뿐인데, 이것이 금생 내생 자기의 영육을 행복되게 할 것인 줄을 몰랐다 말이오. 보지를 못했다 말이오. 알겠어? 보지 못한 것으로서 인생이 완전히 영원히 멸망하고 바로 보는 데서 행복이 나온다 하는 그것이 깨달아집니까? 그것만 가르치면 돼. 그것 제일 중요해요.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놔요.
그러면 그 두 가지, 두 가지를 보지 못하는 거 고거 가르쳐 놓고,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의, 생명되고 행복되고 하는 그 생명과 평강되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은 봅니까 못 봅니까? 봅니까 못 봅니까? 안 믿는 사람 가운데에 보는 사람이 하나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없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는 그 보는 사람이 다 봅니까 다 못 봅니까? 다 본다고 생각하는 분들? 나는 보나 여러분들은 봅니까? 잘못하면 눈 멀기 쉽습니다. 눈 멀기 쉬워. 못 봐. 눈 멀기 쉬워.
○○○권사님 또 다음 주일에 또 양산동 가요? 양산동 가? 다음 주간에도 양산동 가? 내일 갈라고? 이 양산동 갔다 오더니만 거기 뭐 꿀이 나오는가? 자꾸 또 내일 간대. 구역은 어째 놓고? 인제 거게 가 보니까 눈이 쪼그매 떨어지거든.
눈이 쪼그매 떨어져. 눈이 떨어지니까 지금 죽자 살자 달라붙지.
○○○집사님도 눈이 떨어져 죽자 살자 하고 달라붙는다 그말이오. 인제 뭐이야? ‘하, 요거다. 이거 외에 딴거 없다. 요거다.’ 요거 눈에 아삼하게 보이니까 자꾸 보이니까 ‘아이, 그게 이제까지 생각이 헛일이로구나. 이거로구나.’ 자꾸 이래 기어 들어간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기의 그 모든 행복된 것은 바로 보는 데서 있고 또 불행도 불행인 줄 모르는, 불행을 불행으로 보지 못하는 데 있다 그말이오. 이거 원인인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의 둘째로서는, 그 원인의 해결해 줄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말이오. 예수님밖에 없다.
못 보는 것을 해결해서 보는 자 만들어 주는 데는 예수님밖에 없다. 이거 뭐 우리가 얼마나, 자꾸 뭐 평생 익혀도 이 가운데에 우리에게는 깨달을 것이 있고, 힘이 나오고, 사는 길이 생긴다 말이오.
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인제 자기가 그러니까 예수님 외에는 없는 줄 알고 예수님에게 자꾸 부르짖으니까, 예수님께 나아갈라고 부르짖으니까 환경에서 방해를 막 한다 말이오. 안 된다 방해하고 ‘잠잠하라 이놈아’ 꾸짖는다 말이오.
이래도 방해받지 안하고 자꾸 예수님께 달라붙어 더 고함을 더 크게 질렀거든.
크게 지른 그게 거석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게 뭐이냐? 그 고함지른 것은 자, 바디매오가 간이 커서 고함을 질렀겠소, 불량해서 고함을 질렀겠소, 환경 사람을 무시해서 고함을 질렀겠소? 잠잠하라고 안 된다고 잠잠하라고 자꾸 잠잠하라고 이라니까 더 고함 지르는, 고함 지르게 된 그 원인인 그 힘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안 된다’ 고함을 지르고 말리니까 막 죽자 살자 하고 날뜁니다. 그 고집이 세어 그렇습니까, 억세 그렇습니까, 불량해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을 무시해 그렇습니까? 그렇게 옆에서 막고 그래도 제재받지 안하고 자꾸 더 고함을 지르고 날뛰는 그게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게 어디서 나왔어? ○○○선생? 거게 나왔다 말이오.
예수님한테 가는데 이제는 내가 일생동안 불쌍하고 가련한데 예수님 만났는데 예수님이 해결해 줄 터인데 옆의 사람이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니까 이제 그러면 자기는 그것으로서 그만 망하느냐 흥하는 게 거기 있다 말이오.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게 거게 있어.
망하느냐 흥하는 게 거게 있어. 눈을, 내가 눈을 뜨겠느냐 네가 세상 어떤 걸 가지겠느냐? 자기가 눈 못 뜨면 자기는 망하는 줄 알기 때문에 자기 생명보다도 몸보다도 뭐 구걸보다도 뭣보다도 눈 뜨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결사적이라 말이오.
생명도 내놓고 우사도 내놓고 뺨이나 뭐 때려, 만일, 바디매오는 그랬을 거라.
옆의 사람이 있다가 이놈의 새끼가 뭐라 하느냐고 뺨때기를 때리면 말이요, 뺨때기 때리면 ‘아이고, 이거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랬겠습니까? 뺨때기를 때리면 죽어도 아이구 이 기회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막 그래도 더 고함을 지를 것입니다. 더 고함 지르는 게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만이 자기의 영원한 해결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함을 질렀다 그말이오.
이것 때문에 ○○○씨는 사흘 동안 저 양산동 가요. 양산동 가 자고 사흘은, 사흘은 어데? 집에 자고, 여기 이제 또 볼 일 하기 때문에. 또 하루는 꽃마을에 가 자고 그는 그래 해, 인제 자꾸 보니까. 오늘 보니까 얼굴이 뚱뚱해졌네. 어제 보니까 이 무슨 천막에 있나, 천막이 어째 생겼노 좀 흔들어 보니까 얄궂은 거 쳐 놓고 그래 있어, 보니까.
그걸 그 학생들에게 약간 가르쳐 줘서 알 수 있으면, 고함을 지르고 제재를 해도 왜 제재를 안 받았느냐? 안 받게 된 그 이유가 뭐이냐 하면은 거게 생사화복이 달린 줄 알기 때문에 뺨을 맞고 뭐 발길로 채이고 그라고, 발길로 차고 못 보구로 하니까 슬슬 지나가고 예수님이 그만 슬그머니 지나가게 돼서 인제 못 보게 되면 그때 가서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디매오가 어떻게 하겠소? ‘아이구, 인제 가 버려서 그만 헛일이다.’ 이라겠소 마구 그때 있는 힘을 다 들여 가지고 고함 치겠습니까? 불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안 나오면 타 죽을 줄 알기 때문에 불에서 있는 힘 다 기울여서 야단치고 나올라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그거 모양으로 이 예수님 떨구면 헛일인데 지금 옆에서 방해하니까 있는 힘 다해서 고함질렀으니 고거 그 믿음이 그 속에 있다 말이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주님이 그 믿음.
모든 원인이 보지 못하는 데 있다. 보지 못하는 걸 해결해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다. 이러니까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를 지기고 이라니까 방해를 지길수록이 더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지겼다, 그게 다 믿음이라 그말이오.
그라니까 이제 예수님이 오라 한다 하니까 그만 공기는 달라져. 오라 하니까 뭐 야단지기는 사람이 ‘아, 오라 한다, 야, 안심하라. 안심하라. 오라 한다. 너 오늘 무슨 수 생겼다?’ 그만 대번 뭐 대우가 달라요. 주님이 척 돌보면 대번에 대우가 달려져 버려.
오라 한다 하니까, 오라 한다 하니까 ‘오라 한다 해요?’ `얼른 오이라.' ‘가만히 있어. 이거 겉옷도 챙겨놔야 되겠고 이것도 챙기고 뭐 어짜고,’ 이라지 안하고 뭐 옷이고 뭐이고 전부 다 집어던져 버리고 막 달아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자기에게 일생동안 보배인데, 그게.
자기 재산으로는 제일 중요한 것인데 이것도 저것도 다 집어던져 버리고 예수님에게 달려간 요 믿음이 그게 주님이 기뻐하시고 성공한 믿음이라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이제 믿음 너이 말해 줬어. 마지막에 예수님 척 만나 가지고, 돈도 주고 뭣도 주고 다 줄 수 있다 말이오. 뭣도 다 줄 수 있는데 ‘뭐 원하느냐?’ 이라니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래.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만나서도 자기 소원은 하나뿐이라. 왜? 그는 보면 다 되는 걸 알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모든 영육의 금생 내세의 행불행이 거게 달려 있는 걸 모르고 이 세상의 지식에 달린 줄 알기 때문에,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제딴에는 뭐 공부, 물론 그렇지. ‘공부 열심히 해 가지고 학교서 일등 하고 뭐 이래 놓고 내가 예수 잘 믿지.’ 예수 믿는 거는 뒤에 잘 믿고 세상 거는 기회 놓지 안하고 잘 해야 된다는 그런 것도 다 보지 못해 그래.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에 제가 ‘이다음에 내가 참 잘 믿지’ 한다고 해 가지고 잘 믿는 거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할 때 믿지 그 뒤에 되는 것 아니야.
요 다섯 가지를 가르치도록 해서 여러분들이 자기 맡은 학생을 이거 참 오늘 주일에, 오늘 주일이 두번째입니까? 첫번째요? 이거 자기 맡은 학생이 ‘인생은 멸망할 것을 보지 못하고 구원 얻을 길을 보지 못한다. 멸망과 구원을 보지 못한다. 죽고 사는 걸 보지 못한다. 어짜면 죽고 어짜면 사는 그걸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복잡한 일도 있고 단순한 일도 있고, 큰 일도 있고 작은 일도 있고, 또 일 같지 않은 일도 기록되어 있고 어려운 것도 기록돼 있어서 여러가지가 다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다 계시입니다.
계시라 말은 열 계(啓)자, 보일 시(視)자 열어 보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실 때에 열어 보이시는 그 도구로 쓰신 것을 가리켜서 계시 기관이라, 계시 도구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는 도구로 쓰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문서로 우리에게 문서를 도구로 쓰셔 가지고 보여 알리신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의 그 형식을 계시 도구로 삼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있습니다.
오늘은 바디매오의 이 소경이 눈뜬 이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내가 깨달아 알 것이 무엇이며 또 내가 받을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각자들이 바로 잡으면 이 계시가 자기에게 복음이 되겠고 그렇게 잡지 못하고 그저 입으로만 알고 외우기나 하고 하면 천 번 외워도 소용 없습니다. 바로 알아서 깨달음이 있어야 거게서부터 구원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나나 여러분들이나 깨달을 것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자신이 이 소경 바디매오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첫째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이 일을 다른 사람의 일로 자기는 듣고 구경하는 것으로 보고 바로 자신이 이 바디매오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요 이 말씀이 저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이 자기를 언젠가 정죄해서 자기는 멸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그 지방에서 아주 불쌍하고 가련한 것으로써 유명한 사람입니다.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람이 우리가 되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세상은 멸망시키는 세상이기 때문에 어쨌든지 자기 잘난 재미로 삽니다. 또 자기를 힘껏 잘났다고 자랑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주 복되고 잘나고 유력한 사람으로 과장해서 소개하기를 힘쓰고 있는 정신 없는 세상입니다. 완전히 미치괭이가 되어 가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 성경을 주신 것은 소경 바디매오가 그 지방에서 불쌍하기로 소문난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가 어떤 큰 재벌가가 되어 있어도 나는 큰 재벌을 가졌기 때문에 바디매오가 아니라, 나는 정권을 가졌기 때문에 바디매오가 아니라, 나는 큰 종교 창설자요 도덕가요 과학자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자신이 벌써 멸망 가운데 빠져 가지고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여게서 이 교훈을 받을 것은 스스로 자기가 복된 사람이라, 영광된 사람이라, 참 그는 성공하고 위대한 사람이라 그렇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공의가 정의가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를 그렇게 복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조만간에 심판 앞에 서야 할 터이니까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모든 복되다 인정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의 비참하고 불행점을 깨닫고 그 점을 평생 부끄러워하고 그 점을 벗어나 볼라고 애쓰는 그런 사람들이 다 심판에 무사히 통과하고 심판 너머 영원한 세계에 그 영광 있는 구원을 얻었지 자기 잘난 재미로 사는 사람, 자기 장점 보고 사는 사람, 죽을 때까지 자기 장점 자랑하고 소개하고 만족하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심판 너머 비참하고 가련치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자기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가에 앉아서 예수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길가와 같은 이 세상 생활을 우리는 해 나가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이 세상은 곧 길거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바디매오는 예수님 지나가시기만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는 참 비참하고 가련한 점이 많다.
나는 비참하고 가련한 점이 많다.’ 이 비참하고 가련한 이것을 아는 자가 복이 있고 여게서 자기 비참과 가련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곧 멸망할 짐승과 같은 사람이며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비참하고 가련한 그 실상을 알고, 알고 난 다음에는 인생을 비참과 가련에서 구출하실 이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출하실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그는 길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참한 걸 깨닫고 주님밖에는 나를 여게서 구원할 이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 구원의 기회를, 구원을,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그것을 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그 기회를 찾고 자기의 전부는 이 세상 걸음에서 뭣 보고 가지 안하고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비참을 구원해 주실 이 주님을 만날 이것만을 자기는 전 소망으로 전력을 기울여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참 이런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은 저 사람은 세상에 제일 모든 복이 구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가운데서 자기의 비참과 가련을 발견해 가지고 그 점을 자기는 해결해야 된다는 그 면에 눈을 뜬 사람은 참 산 사람이요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예수님 한 분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해결해 주실 이가 없다고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으니 예수님의 구원을 항상 기다리고 그 기회를 기다리고 거게다가 소망을 두고 있는 이 사람이 되는 것이 이 복음을 바로 받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그는 이렇게 비참하게 된 그것이 자기가 보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보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을 이 소경은 알았습니다.
왜 소경으로 우리에게 계시 기관을 삼아서 가르치느냐? 소경은 자기의 모든 불행이 보지 못하는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소경이 안 것처럼 이 소경을 만들어 가지고소경은 우리 때문에 소경된 것이오. 소경을 영원 전 예정 가운데서 그 소경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이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소경을 만들어서 때가 되니까 나 가지고 그 소경이 길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예정에서 다 해 가지고 창조해서 섭리로 그렇게 이루신 것입니다.
이 소경은 자기의 모든 불행은 보지 못하는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지 못함으로 불행된 자기의 눈을 띄워 주실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깨닫고 예수님 만날라고 길가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행복되고 만족하고 불행 없는 사람에게 불행을 해결해 주실 이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가장 행복인 줄 알고 행복된 줄 알고 그렇게 살다가 자기의 비참한 그대로 끝마치고 말 사람이지.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의 불행을 발견 못 한 사람은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단점을 발견 못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불행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참 이 계시에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불행을 아는 사람이 이 도리를 받았고, 이 시간 우리는 바디매오가 돼야 됩니다. 바디매오가 꼭 돼야 됩니다. 우리는 바로 바디매오입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바디매오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불행은 보지 못하는 것이 그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러니까 이 바디매오는 보지 못하는 이것이 철천지 소원입니다. 보는 자 되려는 것이 이것이 평생 소원입니다. 보지 못한 것이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보는 자 되는 것이 평생 소원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함으로 불행하게 되는, 그 불행의 원인이 되어 있는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행의 원인돼 있는 것이 많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증거하다가 내가 너무 소경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 보지 못하면서 본 줄로 알고 있고 이래서 내가 보지 못하는 이것을 보도록 해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으니 내가 주님을 좀 만나야 되겠다 이 생각을 가지고 오늘 아침에 작정을 했습니다.
작정을 한 것은 내가 내일 권찰회 마치고 가면은 토요일날 돌아올 것입니다.
그동안은 새벽기도는 여게 사회하는 사람이 ○○○목사님과 ○○○장로님 이 두 분이 사회를 하고 설교는 그 동안 재독을 제가 정해 줄 터이니까 재독을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미리 광고하는 것은 오전에 내가 광고할라고 그것을 작정을 하고 일과 중에 기록을 해 놨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여러분들, 내일 아침에는 제가 여게 강단에 설 것이고 그 다음 아침 삼일 오일 예배는 제가 강단에 서지 안할 것이고 사회만 두 분이 할 것이고 설교는 재독을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런 줄 알고 나오기 싫은 사람은 나오지 말고 나오고 싶은 사람은 나오고, 나도 지금 눈 좀 뜰라고 갈라 합니다, 눈 뜰라고. 나는 눈이 밝은 줄 알고 이랬는데 내가 눈이 어두워서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제가 오늘 아침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도 머리가 동하면 몸이 따라 동하는 것처럼 주님이 동할 때에 내가 따라 동해야 되겠고, 목사가 따라 동할 때에 온 교인들은 목사를 따라서 동해야 구원이 될 것입니다.
제가 엿새 동안 있는 동안에는 양산동 그 산에 가서 천막에서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게 집에 있어도, 그리 안 하면 철야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새벽기도만큼은 빠지지 말고 꼭 계속해 나와 가지고 그 재독 설교를 들으면서 거게서 자기 눈을 띄우고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주일날은 성찬식이 있습니다. 성찬식이 있으니까 다 성찬에 참여할 준비를 그 동안에 잘 하도록 하고, 또 내일부터는 학습 세례 문답이 있을 터이니까 학습 세례 문답에 다 잘 준비한 대로 응해 가지고 합격이 되도록 그렇게 합시다.
그러고 이제 차차 차차 자꾸 장성해 가니까 학습 문답이든지 세례 문답을 좀 정확하게 해서 그렇게 실상으로 따져서 채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진영에서도 차차 차차 모든 학과는 더 어려워지고 또 모든 시취는 점점 더 정확을 향해서 조금씩 향상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로 시취에 총공회서 허락한 사람이 열네 사람인데, 여러 사람은 허락지 안하고 다 장로 아직 되기 어렵다 해서 제한 사람들이 여러 사람 있고 이 사람은 장로 될 만한 사람이다 해서 허락한 사람이 열네 사람인데 열네 사람이 시험을 쳐 가지고 일곱 사람은 합격이 되고 일곱 사람은 낙제됐습니다. 그런데 그 칠등까지는 합격이 되고 팔등부터 십사등까지 낙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서는 두 분은 합격되고 한 분은 낙제했습니다. 시험 친 가운데에 제일 일등은, 총공회 장로 시취 가운데 일등은 ○○○집사님이 일등이 됐습니다.
우리 ○○○집사님은 아깝게도 팔등으로 낙제됐습니다, 팔등으로. 팔등으로 낙제됐으니까 아마 하나님이 좀 더 준비를 하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다른 거는 다 잘했는데 이 교회 정치에 대해서교회 생활을 했어야지? 그래 놓으니까 교회 정치에 대해서 몰라서 정치에 점이 좀 낮아 가지고 그만 팔등이 돼서 칠등까지는 다 점수가 합격이 됐는데 팔등부터는 합격이 안 됐었습니다.
학습 세례 문답도 좀 정확하게 해서 그렇게 이제는 좀 정확한 그런 실력을 갖췄을 때에 합격을 시키고 또 그렇지 않는 사람은 좀 준비를 더 시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준비를 더 시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로 시취에 칠등이, 꼼뱅이로 합격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작은 사위입니다. 그 사람은 뭐 대박사요. 이 국가에서 지금 자꾸 청할라고 그렇츰 쌓아도 안 오는 아주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거기 대해서 공부를 오래 했지마는 마지막 칠등으로 겨우 걸렸습니다. 거게 모두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모두 시험 쳤는데 일곱 사람이 떨어졌습니다.
다음 주간은 학습 세례 문답이 있고 또 다음 주일날은 성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에 가책 없이 잘 준비해 참석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고 성찬 잘못 참석함으로써 좋지 못한 그런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서 징계받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한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을 이 바디매오가 깨닫고 보는 사람 될라고 애를 썼는데 보게 해 주실 이는, 보는 사람 되게 해 주실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기다려서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금생과 내세 영육의 불행은 첫째로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데에서 불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보는 데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보는 이 면에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그 두려우심을 두려운 대로 알 자가 누구며 두려워할 자가 누구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해서 자기의 보지 못하는 그 점을 발견해 가지고 보는 자 될라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좀 더 보고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는 가운데서 그는 사람 쳐놓고 모세와 같은 겸손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됐고 실수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지마는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 것을 우리가 자꾸 보는 눈이 밝아져 가야 되겠고, 또 하나님은 지금 나와는 나와 상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이것을 또 우리가 자꾸 찾아서 바로 봐야 되겠습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내가 이러니까 사랑치 않는다’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잘못 볼 때도 있고, 또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렇게 잘못 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그 관계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미워하고 있는지, 자기를 축복하고 있는지 자기를 징계하고 있는지 요것을 보지 못하는 통에 우리가 실패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은 의지하라 하는데, 내가 의지하면 의지하는 대로 하나님은 책임지시고 도와 주시는 내가 의지할 하나님인데 의지할 하나님일 때에는 의지 안 하고, 대개는 그럽니다. 왜? 마귀란 놈은 이걸 잘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될 때에는 꼭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네가 하나님 의지하는 건 헛일이다’ 이랍니다.
의지해야 될 때에는 의지를 안 하고 지금은 하나님을 의지해서는 안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다.’ 돕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너를 지금 징계하고 분노하고 계시니까 이제 돕는 자로 의지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금 징계하실라고 진노하고 계시니 내가 하나님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 의지 안 하면 어짤 것입니까? 진노를 풀어야지. 진노를 풀어야 하나님의 의지가 바로 돼지지.
이래서, 또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신다’ 자꾸 축복한다고 이래 믿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징계하는데 축복으로 봐도 탈, 축복하시는데 징계하고 계신다고 해도 탈, 하나님은 또 자기에게 대해서 길을 막는데 하나님은 자기를 형통케 해 준다고 봐도 틀리는 거, 하나님은 길을 형통케 해 주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길을 막는갑다’ 하는 그것도 탈.
하나님의 크심을 우리가 바로 봐야 하겠고, 또 하나님이 나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어떻게 내게 대해서 지금 상대하고 계시는가 이것도 우리가 바로 봐야 되겠고, 또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 요구하고 계시는 이것도 바로 봐야 될 터인데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는데, 전도는 다 좋아합니까? 하나님이 전도 요구치 안할 때도 있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전도보다 너는 지금 요거 고쳐서 그 냄새 피우는 그것을 고쳐야지 네가 냄새 피워 다른 사람에게는 냄새 나 못 견디는데 예수 믿으라고만 전도하는 그거 밉상이라 말이오.
우리는 그저 말씀을 들으면 뭐이든지 다 그대로라고 이래 믿으면 안 됩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도 있고, 저주하는 사람도 있고, 진노하는 사람도 있고, 징계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같이 동행하는 사람도 있고, 배척해 던져 버리는 사람도 있고, 하는 일을 하나님의 방해하심을 받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도 있으니 하나님의 그 전지 전능의 완전의 그분의 크심을 우리가 아는 것은 그거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분의 크심을 아는 거는 좋은데 그 크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우리가 바로 보는 그 심령이 있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또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뭐를 명령하고 계시는지 그것을 모르면 우리가 살지마는 이 현실은 분명히 주님이 나에게 주신 현실인데 이 현실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 무엇이며 요구하는 것이 뭐이며 또 나에게 지금 명령한 경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도 우리가 바로 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로 볼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난 모든 세월을 생각해 보면은 우리가 자기에게 대해서 바로 보지 못해서 ‘이거는 내가 할 일인지 안 할 일인지, 또 이것은 내가 계속해야 될란지 끊어야 될란지, 이 사람은 사귀어야 될란지 이 사람은 삼가 조심해서 멀리 해야 될 사람인지, 내가 이 일은 해야 될 일인지 안 해야 될 일인지, 내가 소원하고 있는 이것이 망할 소원인지 이 소원하고 있는 것이 흥할 소원인지, 내가 지금 잔뜩 취미를 누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 취미는 나를 망치는 취미인지 나를 복되게 하는 취미인지?’ 뭐 우리는 참 레위기에 쪽발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가는 것은 둘입니다.
나에게 멸망을 주는 그것과 나에게 행복을 주는 그 둘이 있습니다. 멸망과 행복이 있으니 멸망은 멸망으로 보고 행복은 행복으로 봐서 멸망은 내가 피해야 되겠고 행복은 내가 취해야 되겠고 이래야 될 터인데 우리는 멸망인지 내게 행복인지 이것을 모르고 뭐이든지 닥치면 닥치는 대로 거머닥치고 뭐이든지 닥치면 또 다 뱉아 버리고 자기에게 조금 비위에 맞지 안하면 다 뱉아 버리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자꾸 취하니까 대개는 멸망을 자꾸 취하고 복있는 것은 피하는 일이 이 꺼꾸로 사는 생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한 사람이 어떻게 돼 있는지? 다 자기 잘난 재미로 살고 자기는 의인인 줄 알고 사는데 자기에게 참 주님이 노하시는 요소가 자기에게 뭐이 있는지 이걸 발견해 가지고서 그것을 회개한다면 복있는 사람이 되겠고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되면은 그만 행복될 터인데 내게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무지한지 모릅니다.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데에서 인생이 망하고,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데에서 인생이 망하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지금 현재 관계되어 있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데에서 인생이 망하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데에서 망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앞길도 두 길이 있습니다. 이는 걸어가서는 안 된다는 길 있고 걸어가야 된다는 길 있는데 내가 어느 길로 걸어가야 될란지 이것도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니 참 기가 찹니다.
이 바디매오가 보지 못하는 데 철천지 포원이 된 이와 마찬가지로 이 바디매오를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내가 내 앞으로 나아갈 그 길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여게 대해서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도 기가 막히게 지금 내가 뭐이든지 바로 보지 못하는 요게서 나는 멸망한다 요것을 뼈저리 마음아피 느끼고 깨닫고 이 포원이 져서 바로 보는 거.
내가 앞길에 대해서도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기 때문에 ‘이 길 가야 되나 이 길 가야 되나 어느 길 가야 되느냐, 이것을 해야 되나 안해야 되느냐?’ 이거 두 길이 있으니 이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여게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탄식을 하고 얼마나 고민하고 소원해야 될 터인데 이 바디매오에게서 이것을 우리가 배울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또 천국에 대해서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천국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바로 보셨기 때문에 그는 후회할 일을 하지 안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바로 봤고 하늘나라 어떠냐? 내가 하늘나라 가면 어찌 되느냐? 하늘나라는 어떤 조직이 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법규로 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모두 다 시설이 돼 가지고 있으며, 하늘나라는 그 법도는 무엇이며, 거게 있는 모든 조직은 어찌 됐으며, 거게 있는 영광과 존귀는 어떤가? 하늘나라를 바로 봤으면 땅에 것을 배설물로 삼지 안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보는 데 얼마나 소경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도 그저 나쁜 게 아니라 이 세상도 우리가 바로 보면 세상은 참 한없는 복된 길도 있고 망하는 길도 있는데 우리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는 그 자녀를 공부시키는 것을 그만 중단해라’ 꼭 중단해야 내가 보기에는 그 가정이 흥하고 안 그러면 완전히 망쳐서 공부시킨다는 것이 자식을 아주 악인을 만들어 가지고 가정을 다 망치고 팔아먹겠는데 그걸 말해도 그분은 사람을 멸시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그걸 안 듣습디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로 보지 못함으로 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을 그것을 우리가 찾아서 깨달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해서 내가 멸망했다. 뭣 때문에 부도 나 가지고 뭐 감옥에 들어가고 부도가 나 자살도 하고 부도가 나 가지고서 도망도 치고 이리도 숨기도 하느냐! 사람을 보지 못해 그런 거 아니냐! 우리가 사람을 바로 보는 데에는 얼마나 이게 축복이 거기 달렸는데 사업하는 데는 사람을 바로 보는 데에서 사업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인데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는 거, 그놈은 나를 해칠 놈을 내가 바로 보지 못했고 유익되게 할 사람도 바로 보지 못했고 원수도 바로 보지 못했고 전부 자기 육체의 욕심 이 모든 어리석음에 다 빠져 가지고 깜깜한 소경이 돼 가지고 자꾸 어제보다 오늘 못하고 오늘보다 내일 못하고 자꾸 이와같이 지금 비참하게 돼지는 그것이 바로 보지 못한 여게 원인됐다 하는 이것을 이 소경은 소경이기 때문에 그럴 것 아닙니까? 우리는 소경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망한다 이랬거든. 우리가 소경이라 말이오.
우리가 바로 소경이라. 우리가 바로 바디매오라. 내가 바로 바디매오다. 내가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됐다.
비참한 것도 모르지, 비참한 원인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이것도 모르지,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 할지라도 바로 보지 못하는 게 원인이니까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된다. 이년 삼년 재수를 해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된다! 서울대학에 들어가야 된다! 미국에 제일 좋은 학교 뭐라 하더라? 하바드 대학인가 제일 좋다 하는데 우리 외손자가 하바드 대학에 들어갔다고서 막 전화가 와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리 쌓아. 내가 그래도 감사하다 소리 한 마디 안 했어. 하바드 대학에 들어간 게 복이 될란지 뭐이 될라지 좀 자세히 살펴보고 봐라.
또, 아레는 무슨 운동에 미국에 참피온이 됐다고. 참피온 미국 국내에서 참피온이 됐다고 또 그래 가지고 또 뭐 사진이던가 뭐 와 가지고 또 이래 가지고 또 써 가지고 왔어. 그런 것은 나는 그걸 귀중히 보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보다 조금 눈이 밝은 셈이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해.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해. 모든 사건들을 바로 보지 못해.
욕심만 도야지 모양으로 꽉 차 가지고 제 욕심만 만족시킬라고 애를 쓰지 욕심 그대로 달성이 되면 자기 자멸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자꾸 이와같이 자멸하는 행위고 마귀 이놈이 우리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이놈이 수입을 보고 지금 장난을 치고 있지 눈 밝은 자에게 마귀 그놈이 용납을 어찌 하겠습니까? 나도 소경이지마는 하도 기가 차서 이번에 내가 너무 우리 교인들이 너무 이래서 답답해서 내가 노래를 하나 지었어. 노래를 하나 지었는데 아직까지 곡은 잘 맞추지 못했는데 하나 지었어. 그거 내가 그 노래 지으면서 너무 내 자신과 우리 교인들이 너무 비참해서, 참 비참해서 많이 우는 울음 끝에 내가 그저 하나 그때 느낀 걸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 눈에 ‘나는 일을 바로 보지 못한다, 나는 사건 처리를 바로 하지 못한다.’ 여게 대해서 마음 아픈 그 느낀 사람, 그래 날뛰다가서 바로 보게 해 주는 이가 이 세상 모든 과학이니 학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선생에게 가 가지고 하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선생은 하나뿐이다”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뿐으로 아는 이 사람이 얼마나 복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말로만 하지 실상 비참한 점을 우리가 모르지, 비참한 점을 찾지 못하지, 비참하게 된 그것이 원인이 뭐라는 것을 찾지 못하지, 원인을 찾았다 할지라도 예수님 외에는 해결해 줄 이가 없다는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자꾸 하고 있지.
다음으로는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보는 눈이 어둡습니다. 바로 보지 못합니다.
어찌 됐든가 돈은 들어오면 좋아합니다. 사람은 내 사람이 되면 좋아합니다.
아니오. 일생 동안 안 만나야 될 사람도 있습니다, 자꾸 내 사람만 되면 좋은 게 아니라.
일은 성사만 되면 좋아합니다. 아니오. 성사만 되면 좋아하는 것은 일방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망하고 맙니다. 성사가 되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실패가 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는 것을 양면을 보지 못하면은 그는 원만한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물건을 물질을 바로 보지 못해서 우리가 소경이라.
이런데, 자기의 불행을 깨닫고 그것이 바로 보지 못한 이것이 원인이라는 거, 우리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바로 보지 못하는 이것이 원인이 된다는 것, 자기는 바로 보지 못해서 한 걸음 조금 잘못 걸었습니다. 결혼 하나 잘못했습니다. 사람 하나 잘못 사귀었습니다. 망칠 사람은 내게 대할 때에 입에 꿀과 같이 달콤하게 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넘어가지.
인생이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대하고 있는 것이나, 내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보는 데에나, 하늘나라에 대해서 바로 보는 것이나, 세상에 대해서 바로 보는 것이나, 인생에 대해서 인간들을 바로 보는 것이나, 사건들을 바로 보는 것이나, 물건을 바로 보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바로 보게 해 주실 수 있지 딴거는 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래도 내가 눈이 어두워서 지금 좀 주님 만나야 되겠는데 내가 오늘 아침에 회개를 하나 했습니다. 무슨 회개를 했느냐? 내가 벌써부터 그 자리 가고 싶고 가 가지고 얼마 동안 기도해야 되겠다 했는데, 내가 아플 때 그때 작정하기를 ‘나는 내게 힘 주시면 내가 세 가지만 하겠습니다.’ 세 가지 하는 거 하나는 성경 읽고 연구하고, 하나는 기도하고, 하나는 말씀 증거하고 셋만 하겠는데 이거 내가 그라면서 말씀 증거하는 데는 내가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대예배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안하고 내가 힘있는 데까지는 내가 맡을란다 이래 가지고 새벽 예배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안하고. 왜? 맡기면 교인들이 푹 줄어진다 그말이오. 또 대예배 내가 꼭 설교할라고 요렇게 했었는데 오늘 아침에 그걸 완전히 회개해 버렸습니다.
그것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진리인데 내가 여기서, 안 나오고 싶으면 말고 여게서 사회하고 재독하면 재독하는 그 설교가 내나 그 설교기 때문에 얼마든지 될 수 있는데 내가 좀 몇이 덜 나온다 하는 거기 붙들려 가지고서 내가 산에 가서 기도하지 못하고 한 것 그거 다 못났다. 내가 딱 오늘 아침에 작정했어.
작정하고 이제 내가 토요일날까지는 여기 오지 않는다. 오지 안하고 월요일날 가면은 이제 토요일날 그날 와 가지고 주일날 성찬 예배 보고 고다음에는 또 갈란지 그거는 내가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하겠고 그래 고거 하나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했는데, 이번에 제 천막을 먼저 천막을 칼로 가지고 이렇게 째서 앞뒤를 째서 이랬는데, 째 가지고 이래서 그걸 다른 사람들이 가서 집어서 모두 이래 가지고서 이래 해 놨는데 이번에 두번째는 째기를 뭘로 했는지 천막을 양쪽에 이래 해 놨는데 아마 몇십 번인지 모르게 막 쪼아 놨어. 마구마구 쪼아 가지고 이만치 구멍이 나게 막 쪼아 가지고 이런데 마음에 분이 났던 게 표 나요. 마구 쪼아 가지고 양쪽을 막 쪼아서 이래 뚫고 천막줄도 뭐 끊어 버리고 옆에 나무도 쪼고 이래 놨어. 그래 놔서 이거 분명히 주님이 하시기는 하신 것인데, 주님이 하시기는 하신 것인데 뭣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주님이 하신 것은 내가 의심하지 안하고 확실히 이거는 변동 없고, 나의 구원에 유익을 위해서 하신 것도 변동 없고, 또 내가 여게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대한 구원이나 사랑에 대해서 의심 없이 확신하는 그것도 변동 없고 요 세 가지는 내가 변동 없이 아는데 내가 그러면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건 내가 몰랐어. 그거 몰랐고. 왜 이래 참 쨌는가 그걸 몰랐어. 오늘 아침에 내가 알았어.
쨌는데 옆에 사람이 와서 그라기를, 그 꼭 째기를그 사람 말은 그말이라째기를 앉아서 기도하면, 한가운데서 기도하면 거게서 그래 칼로 찌르면은 내 모가지 찔리는 거라, 모가지 찔리는 거. ‘그거 참 그래 똑 기도할 때 거석하면 그 옆에서 그라면 기도하다가’ 또 말은 그 사람은 그말 차마 나한테 그말을 못해도 그런 뜻이라. 모가지 찌르고 요게, 요게 와 콱 찔려요. 다른 거 아니고 말이지요.
이랬는데, 그래도 뭐 그거는 내가 뭐 관계는 안 가졌는데 오늘 아침에 깨달았는데, 그거 때문에 자꾸 그러니까, 칼로 막 쑤셔놨어. 막 이래 쑤셔놨는데 그걸 깨달아.
‘이거 칼로 쑤시니까 내가 지금 바디매오와 같이 내가 눈 뜨러 갈 건데, 예수님 만나러 내가 눈 뜨러 갈 건데 이 모든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야단치는 거 모양으로 이 칼로 가지고 이 천막 짼 것이 그뭐 어데 뉘든지 거게 감정을 품어 가지고 쨌지 그냥은 한 거 아니라. 이라니까 와 가지고 기도할 때 칼로 쑤셔 버린다는 아마 그런 거 가지고 위협을 주기 위해서 이란 것이니까’ 하는 그걸 깨달으니까 좋다 말이오. 그걸 깨달으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까짓 거 뭐 그런 거 대해서는 내가 제재 안 돼. 그거 내가 극복했어.
그것인 줄 내가 알고 이제는 내일부터 가 가지고 그래 거기서, 그 위에 또 만당이 좀 더 높은 만당이 있어요. 더 높은 만당 거기는 아무 천막도 없어요. 그 높은 만당 있는데 거기 가서 인제 그래 엿새 동안 거기 있다가 그래 올 것입니다.
이래서, 반드시 우리가 주님만이 나의 모든 시관을 바로 해 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바로 보게, 또 내 자신에게 대해서도 바로 보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천국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또 세상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사람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모든 일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물건에 대해서도 바로 보게, 내 정체가 어떤 자인지도 바로 보게, 나는 하늘나라 가면은 벗고 있을 건가 입고 있을 건가 영원한 나라의 내 정체도 바로 보게 해 주실 이는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외에 가르쳐 주실 만한 그런 실력가가 아무도 없어.
온 세상 지식은 그건 다 해도 그 근방에 오지도 안하고 그런 것은 다 그 밑에 그 수평선 이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는 상관이 없어. 그 세계에는 아무 닿지도 안하고 손도 닿지 안하고 근방에는 비취지도 안하는 그 위에 세계라.
이래서 주님 앞에 이 소원을 가지고서 주님 앞에 눈을 띄워 주셔서 모든 것을 바로 보게 해 주시는 이 은혜를 받을라고 하면은 반드시 바디매오에게 모든 사람들이 잠잠하라 이렇게 야단치는 그 마찰의 방해가 있을 것이라. 그 방해가 있을 때에, 그것도 약하면 방해돼. 방해 있을 터인데 그만 방해받으면 안 돼요.
와 가지고 ‘그거 원한으로 그러니까 목사님 거하다가 산에 가서 혼자 저 기도하다가 거기서 원수가 지금 밑에 그란 거는 환하게 표 나는데, 먼저 끊어 간 거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했지만 요번에는 보니까 원수가 그란 것이 분명한데 그라다가 칼로 가지고 옆에 있다가 콱 찌르면 어짤 겁니까? 그러니까 낮으로나 기도하고 밤으로는 내려와서 집에서 하십시오.’ 인제 이렇게 위험성을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말해.
그렇게는 말 안 해도 ‘그거 꼭 있는데 거기 똑 그 위치가 그렇게 앉아 기도하면’ 그 말이 나오는데 그만 더 나오지는 못해. 더 나오면 그 말은 뭐이냐 하면은 꼭 앉아 기도하면 꼭 찌르면 목을 찔리든지 그리 안 하면 옆에 있는 데 가슴이든지 찔리든지 고거 알아요 해. 그말이라.
그래서, 그러니까 이거 아마 가도 이거 조심해 가야 되겠다 하면 막힌 건데, 절대 안 막혀! 그들이 와 가지고 옆에 와 가지고 위협을 암만 협박을 암만 해도 막히지 안해. 제일 상상 만당에 광고하고, 그래 내가 호각을 가져갈라 했어. 호각을 가지고 불면서, 호각을 불면서 여게 있다고 호각을 불고 그래 낮으로 불면서 그래 거기서 이제 주님 만나서 이거 뭐 눈을 띄워야 되지 눈 안 뜨면 이거 안 되겠다 해서 그렇게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바디매오와 같이 반드시 주님이 눈 띄워 주셔야 되는데 주님이 띄워 주시는 눈 띄워 주심을 받을라고 하면은 방해물이 있다. 방해물이 있는데 잠잠하라 하니까 도리어 더 큰 소리로 막 부르짖었어. 그거는 뭐이냐? 옆에서 방해하는 그 세력보다도 자기가 보지 못하는 그 원한이 더 크기 때문에 그까짓 거 잠잠하라 하는 건 보이지 안하고 지금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지금 기회 놓치면 안 되니까 막 달라들었다 그말이오. 요 믿음이 있어야 돼. 이거 참 좋은 믿음들이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너를 오라 하신다 이라니까 그만 그 겉옷을 집어던져 버리고, ‘내어버리고’ 제 재산으로서는 거지니까 재산으로서는 자기 재산 전부인데 다 집어던져 버리고 그만 주님 만날라고 막 뛰어갔어. 우리도 오늘 요 바디매오가 꼭 돼야 되겠어.
뭐, ‘내가 주님 앞에 눈 띄움을 받아야 되겠는데’ 그라고 나면 ‘이 회사에 무슨 사건이 있다, 내 지금 직장에 무슨 사건이 있다, 무슨 여수 거래에 큰 문제가 있다.’ 다 던져라! 던져! 겉옷을 던지고 주를 만나야지 기회 놓치면 안 된다! 그래 가니까 주님 만나서 주님이 있다가 ‘네가 나한테 뮐 구하느냐?’ 그러면 그때 주님이 뭐이든지 줄라면 다 줘. 이런데 하나만 구했거든. 그렇게 우리가 노력해서, 노력해서 벌써 주님 만나는 그 단계에 모든 걸 포기하고 나아간 단계가 되면은 그때에 주님이 뭐 주마 하는 거와같이 그거 아니라도 자기 마음에 자꾸 길이 열립니다.
어떤 사람이 있다가 ‘나하고 사업합시다’ `야, 내가 전매 특허를 주마, 부산에 전매 특허를 주마, 무슨 우리 회사에 어떤 전매를 주마, 너를 뭐 어떤 거 취직을 시키마.’ 이래 가지고 그런 게 막 우글우글 들어올 거라. 막 우글우글 들어와.
그때가 시험이라. 두번째 마지막 시험이라. 들어와서 ‘지금 자본을 대 줄라는 기별이 들어왔습니다. 자본 대 줄 터이니까, 자본 대 주겠다.’ 오만 게 다 왔어.
와도, ‘다 내게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눈 떠 보는 게 문제라. 선생님이여, 나를 보게 해 주십시오!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게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시로 나았습니다. 그시로 낫고 나니까 다른 거 소원 없어. 그러니까 “길에서 예수님을 좇으니라” 꼭 우리가 오늘 내가 이 소경 바디매오가 되어야 된다는 요것을 기억하고 꼭 바디매오가 됩시다. 돼야지, 돼야 살지 그리 안 하면 안 되면 못 삽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우리가 바디매오와 같은 실상이지마는 어두워 있는 우리들을 알려 주기 위하사 바디매오의 이 형식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실 이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바디매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주의 피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가 다 이 시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바디매오의 이 소경과 꼭 같은 자인 것을 깨닫고 이 바디매오와 같이 되어서 바디매오가 주님 앞에서 눈 띄워 주심을 받은 거와 같은 이 은총을 다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사람도 여게서 이탈되지 안하고 요대로의 순서의 사람 되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대로의 이 믿음을 갖추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어두움에 있는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장중에 잡으시고 순간도 놓지 마시고 험한 세상, 악마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이때에 주님의 장중에 잡으시고 주님의 나래 아래 품으셔서 원수가 엿보지도 못하고 가까이 오지 도 못하도록 지켜 보호해 주시고 저들의 모든 사정을 주님에게 고할 때에 낱낱이 의논해서 들어서 이루어 주셔서 험한 세상을 평탄하게 걸어가며 모든 근심하는 세상에 평안하게 걸어가며 모두 다 원수 많은 세상에서 시온의 대로를 떠벅떠벅 걸어갈 수 있는 복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항상 주님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맡겨놓고 복종으로 따라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남녀 종들에게 주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저희 속에 더우기 충만케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