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적 명분의 계대성과 계통성에 대한 小考
선지자선교회
「칼빈과 백영희를 중점으로」
<서론>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믿음이고, 이삭도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믿음이고, 야곱도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래서 또한 이삭은 이삭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나는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믿음이지, 믿음의 선조 되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또 아버지 이삭과의 직통적 연결을 가지는 믿음이 아니므로, 아버지 아브라함 또 아버지 이삭과는 다소 별개의 교리신조적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장자적 명분이라 하는 것은, 각각 시대별로 각자가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을 가지는 그 믿음의 계대을 말하는 것이지, 신앙선조가 가졌던 그 교리신조를 그대로 계대하고 답습하는 것이 장자적 명분을 계대하는 것은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적 명분의 계대와 장자적 명분의 계통과는 그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각자 그 시대를 감당하는 교리신조를 세워서 신앙해 왔지만, 그 내부적으로는 각각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을 가지는 하나님과 동행의 신앙이었습니다.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신앙의 계대가 장자적 명분의 계대인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로 나타낸 교리신조
종교개혁사의 칼빈 시대는 칼빈이 중점 하여 그 시대를 감당하는 교리신조가 세워졌습니다. 현대교회사의 백영희 시대는 백영희를 중점 하여 이 시대를 감당하는 교리신조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칼빈 시대는 그 칼빈이 하나님과 직통의 연결로서 그 교리신조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 앞의 신앙선조와는 그렇게 직통적 교리신조로 연결되어 칼빈 교리신조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백영희 시대는 그 백영희가 하나님과 직통의 연결로서 그 교리신조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백영희는 그 앞의 신앙선조와는 그렇게 직통적 교리신조로 연결되어 백영희 교리신조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교리신조의 그 이전에는 그에 도달하는 교리신조가 성문적으로 정립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정립한 교리신조는 하나님과의 직통적 연결로 깨달은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선조를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리신조는 처음 신앙초기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 이후 장성된 시기에는 다만 도움의 참조로만 삼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백영희도 그들이 세운 교리신조는 각각 그들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리신조로서, 그 이전에는 그와 같은 교리신조가 성문적으로 정립된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신앙선조의 교리신조와는 다소 별개의 교리신조를 정립했다고 여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그들이 각각 정립한 교리신조, 그 이전의 교리신조는 그 깊이로, 그 넓이로, 그 높이로, 그만큼 다다른 교리신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직통적 연결로 영감을 받아 깨달아 나타낸 그 교리신조의 정립이기 때문에 그렇게 여겼으리라 생각됩니다.
2. 교리신조의 외부와 내부
칼빈 시대의 그 칼빈이 세운 교리신조와 백영희 시대의 백영희가 세운 교리신조가 외부적으로는 각각 그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 내부적으로는 각각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그 영감 그 믿음으로 깨달아 정립된 교리신조임으로, 각각 그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붙들고 역사 하신 그 역사는 꼭 같은 성질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리신조나 백영희의 교리신조가 그 나타낸 외부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교리신조가 각각 다르다고 하나, 이는 다만 외형적인 면일 뿐 그 이면적인 그 속성의 성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각각 시대별로 교리신조를 새롭게 세워져 간다고 해도 그 근원은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그 영감으로 깨닫게 해주신 것을 나타낸 것이므로, 그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 장자적 명분을 계대 하는 그 장자적 계통에 서서 감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래서 칼빈이 세운 교리신조와 백영희가 세운 교리신조가 성문적으로는 그 차이가 있으나 영감적 차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칼빈의 하나님 백영희의 하나님으로 그 장자적 명분을 이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시대마다 그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서 세운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하나님의 종들이 세운 교리신조의 속성은 이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교리신조는 참조로 밑천으로
이러므로 우리가 또 하나 깨달는 것은 교리신조만을 계대 하고 답습하는데 머무르면 안되고, 그들이 가졌던 장자적 명분 곧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믿음을 계대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선조들이 세운 명문적 교리신조는 하나님과 직통의 연결을 가지는데 참조로 밑천으로 삼아서, 각자가 그 시대의 받은 달란트대로의 소명에 따라 하나님과의 직통적 연결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자적 명분을 계대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장자적 명분의 계대 있어서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을 가지고, 또한 장자적 계통에 있어서는 신앙선조가 가진 그 신앙을 이어가는, 그래서 신앙선조가 세운 교리신조는 참조로 밑천으로 하여서 하나님과 직통의 연결을 가지고, 또 신앙선조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직통적 절대적 신앙을 그대로 이어 받는 이것이야말로 장자적 명분을 이어 받아 가지는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시각은 각각 그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서 세운 그 시대마다의 대표적 선지자가 누구이며, 또 그 선지자가 세운 교리신조가 어떠한 것인지를 교회사를 통해서 알아졌다면, 그들이 각각 그 시대에 세운 교리신조가 각각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그 속성의 성질은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께서 시대마다 붙들고 쓰신 하나님의 종들이며, 주님이 그 종들을 붙들고 그 시대를 감당하는 최고의 교리신조를 나타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시대마다 최고로 나타낸 그 교리신조가 외부적으로 다르다고 다르다 하면 안되고, 그 시대의 선지자가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동행으로 나타낸 것은 같은 것임으로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4. 교리신조는 참조적, 하나님과 직통은 절대적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으로 나타낸 교리신조가 그 후손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계대한다고 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나타낸 그 말씀을 이단으로 삼았고 또 그 말씀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한 것은 교리신조는 참조로 또 밑천으로 삼고, 하나님과 동행은 절대적으로 삼아야하는데,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행은 참조적으로 하고, 신앙선조의 교리신조는 절대적으로 하는 이 외식하는 곧 신앙 죽은 신앙이라서 이러한 결과가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교리신조의 계대나 답습이 아니라, 그 교리신조를 세웠던 그 선지자가 가졌던 하나님과의 직통 연결, 그 신앙을 계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 시대마다 정립된 교리신조의 연결성
또 하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교리신조를 세우는 하나님의 종들은, 과거 신앙선조들이 세운 교리신조가 현재적으로 세우는 교리신조와 그 차이가 난다할지라도 단절성을 가지면 안되고 꼭 연결성을 가져야 된다는 점입니다. 각자가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로 깨달은 깨달음으로 세운 교리신조의 정립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간과하기 쉬운데 이러한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결론>
칼빈과 벡영희의 교리신조에 있어서 외부적 외형은 각각 다르나 그것은 시대를 감당하기 위한 그 차이일 뿐, 각각 그 시대마다 붙들고 쓰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을 가진 그 장자적 명분은 같고 또 그러한 장자적 명분을 이어 받아 가진 것도 같은 것입니다.
이래서 교리신조에 있어서 그 장자적 명분을 상대할 때에 외면과 내면을 구분해서 상대하면, 그 참조성과 절대성 또한 구분해서 상대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장자적 명분의 계대와 장자적 명분의 계통을 구분하여서,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의 신앙을 가져야 하겠고, 신앙선조가 세운 교리신조는 참조로 밑천으로 삼고, 신앙선조가 하나님과 직통적 연결을 가졌던 그 영감적 신앙은 계대 받아 그 시대를 감당하는 교리신조를 나타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함은 이것이 장자적 명분을 계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1차 원고입니다. 시간이 나면 2차로 보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