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회 신앙노선의 진정한 위치, 그 사실적 고찰
선지자선교회

<서문>

백영희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를 이기시고, 또 6.25 사변의 공산군 무신론 점령 치하 속에서 하루에 세 번씩 종을 치면서 두 달 동안 사경회를 가지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당시 그곳은 경남 거창 지역이었는데 그 지역 거창교회에 시무 하시면서 역시 신사참배와 6.25 환란을 이기신 주남선 목사님과 그 순생 순교의 신앙 정점이 동일하므로 상호간 서로 깊은 교통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백영희 목사님은 고려파 설립 시에 고신 교파에 속하셨고 또 담임목회를 하시면서 고신의 대표적 부흥강사로 활동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고신은 초기 고신 설립 시의 교회 개혁운동 정신이 변질되고 또 몇몇 지도자들이 교권주의로 나아 갈 때 그에 대한 항목을 지적하면서 항의함으로 인하여 당시 백영희 조사님은 고신 지도자들로부터 제명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백영희 조사님이 고신에서 제명을 당한 것은 초기 시발의 고신, 즉 진정한 개혁주의의 신앙을 바로 세우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미움받아 제명을 당하게 된 것이니, 그런고로 고신 스스로 개혁주의 고신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므로, 백영희 당시 조사님이 제명 당한 시점은 초기 고신의 그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맥을 위임받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해석관을 가지는 것은 백영희 목사님이 세우신 그 공회에 속한 한 교역자의 일방적 해석관이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사가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객관적 해설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국 장로교회사를 근거하여 공회 신앙노선을 걷는 공회 진영에 대해서 먼저 우리 공회에 속한 교역자와 교인들이 공회라는 신앙노선에 대해서 그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기를 원하며, 또 외부 교파에서도 공회 신앙노선에 대해서 정평 정가적 시각의 자세를 가져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에 한국 장로교회사를 개혁주의 정신으로 최대한 진실 되게 필설한 「박응규 저, 한부선 선교사 평전」과 공회의 「총공회회의록」과 「교역자회의록」에서 신앙노선의 그 역사적 사실 부분을 발췌하여 공회의 신앙노선에 대해 그 노선성을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註: >안에 숫자는 '한부선선교사 평론' 책의 페이지 숫자입니다.

● 조선장로회에서 고려신학교 설립 - 1946년

340>신사참배의 강요에 결사 반대하다가 투옥된 70여 명의 교직자 중 주기철 목사 이하 50여명은 순교하였고, 남은 2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들은 출옥 후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약 2개월간 체류하며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법들을 논의하였는데, 신사참배에 굴복했던 교회를 바르게 회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제시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든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에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 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341-342>그러나 신사참배를 가결한 1938년의 제 27회 총회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들의 제안을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옥중에서 반대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屈)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금후 한국교회의 지도의 용이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344-345>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한국 사회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총회는 장로교의 원리와는 상관없이 조직되었다. 전쟁 바로 직후에도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실상은, 그 당시 총회는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지도자들에 의해서 장로교회의 헌법과 행정질서와는 무관하게 재조직되었다.

또한 38 군사분계선으로 인해 남부총회는 북한의 많은 교회들을 관리하며 치리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기구적으로는 재건을 했지만 영적인 쇄신은 추진하지 못하였다.

한편 신사참배에 조금도 타협 없이 5년 넘게 투옥되었던 주남선과 한상동을 비롯한 몇몇 목사들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소개해 주었던 선교사들의 성경적 가르침과,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기초 위에 신학교를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1936년에 졸업한 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경남지역은 해방 후 고려파가 교회재건 및 개혁운동을 일으키는 본거지가 되었다./

346>부산으로 내려오면서 한상동은 거창에 들러 주남선을 만나 신학교 건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래서 1946년 5월 20일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은 신학교 설립위원회를 구성하고, 6월23일부터 8월23일까지 박윤선을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설립위원회는 이 신학교가 명실공히 구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전(全)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었던 박형룡을 교장으로 청빙 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형용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을 교장 서리로 하여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하고 회개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기 위해 1946년 9월 20일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구 일신여학교)의 교실을 하나 빌려 개교하게 되었다.


● 조선장로회 경남노회에서 분리된 법통노회(고신파) - 1949년

356>1946년 12월 3일에 열린 제 48회 경남노회는 예전의 결정들을 철회하고 고려신학교를 신학교로서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그곳에 추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이 결정에 반박하여 노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함께 할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노회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사참배의 죄를 청산하지 않으려는 교회를 향한 강한 경고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1947년 1월 3일에 초량교회 외 5개 교회가 연합으로 제48회 경남노회를 부인하고 새로운 노회를 재건하는 일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동년 2월 14일에는 초량교회를 비롯한 경남지역의 24교회가 동참하여 이 지역의 각 교회 앞으로 보내는 2차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우리는 제48회 경남노회를 부인하되 전통적 역사 있는 경남노회 정체를 극력 보수하려 한다.

2)우리는 정통적 교리와 신앙을 사수하려는 동시에 제1, 제2계명에 범칙(犯則)되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죄감(罪感)이 없는 자를 신자로 또는 목사로 인정하지 않노라.

3)우리는 제47회 노회에서 교리 문제로 중대 결의한 것을 무시하고 불복한 교직자들을 정통적 경남노회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4)우리는 비교리적인 분리나 분파를 원치 아니하고 장로교의 세계적 전통교리를 엄수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하려 한다.

401>더 나아가 경남노회 내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재기를 위하여 재건을 외치는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21일 김길창이 시무하고 있었던 항서교회에서 열린 제49회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취소를 44대 21로 가결하고 말았다.

고려신학교와 교회 재건운동을 허물려는 교권주의자들 공세에 소위 중도를 걷는 보수주의자들도 가세하여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경남의 교권주의자들의 기세가 당당해졌다. 이들은 경남노회가 자신들의 교권 하에 들어 온 것으로 확신하고 자만하였다.

402>이제 회개, 정화, 교회재건 등의 구호들은 지난날의 유물이 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인 제5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원 중의 한 목사가 일어나 송도 앞 바다에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바라이"를 받게 된 것을 회중 앞에 자복하고 통회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하여 노회의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미소가바라이에 동원책임을 맡은 연성국장을 지냈고 신사참배할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친일파였던 김길창을 제명하자는 동의와 재청이 뒤따르게 되자 노회는 이 문제를 다음 노회 시까지 유보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부터 경남노회는 분열의 조짐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 파수꾼들과, 고려신학교를 적극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과 중도보수주의자들의 세 집단으로 분리되어진 것이다.

김길창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은 다음 노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신앙신조가 다르고 신앙양심에 구애된다는 이유"로 별도의 노회조직을 위한 소집 통지서를 발송하고 권남선 등 10여명이 1949년 3월 8일 부산 항서교회에 모여 다른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남한의 장로교회에서 일어난 첫 번째 교회분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남노회는 예정대로 같은 달 3월 8일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제51회 정기노회로 모였다. 이 후 경남노회는 '불법노회'와 스스로 구별지어 '법통노회'라고 불렀다.


● 조선 장로회에서 고려신학교 거세 - 1949년

402하반-403>1949년 4월 23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관계없다는 제34회 총회의 입장을 재확인하였고, 경남노회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5인 전권위원을 선정하였다. 전권위원들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거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회개와 재건운동이 강해질수록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추한 죄가 드러남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949년 5월 27일 자로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교회에 시달하였다.「한부선 선교사 일파 및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는 이미 총회로서 결정한 것이니 노회는 순종하여 이를 실행할 것이며, 그들이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교회의 분규와 소란을 일으킴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계자들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제35회 총회 이후로도 그 학교와 관계를 계속하며 지지하는 자는 총회를 거역하는 행위이니 노회가 적절히 처리할 일이라」


● 고려파 총노회 설립-1952년

404>이윽고 제35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함께 장로회 신학교를 총히 직영으로 결정하였고,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남노회는 삼분오열되는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전통적인 경남노회를 계승하려는 경남법통노회 초대들은 6.25 동안으로 정회되었다가 1951년 5월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로 모인 제36회 총회에 입장마저 거절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37회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여 총회의 불법을 지적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총대의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재천명 하였으며, 이로써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는 장로회 총회 밖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총회에서 축출된 후,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한상동은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시도했던 모든 개혁 운동이 허사로 돌아간 것을 발견하고는, 교려파 총노회를 결성하는 예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405>「해방 이후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칼빈주의 신학, 즉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해 왔다. 적지 않은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호소에 반응해 왔지만, 우리는 이 훌륭한 운동을 방해하는 너무도 많은 장애물을 직면해 온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총회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증거 하고자 했다. 총회는 지난 3년 동안 우리의 총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인해 타락하기 이전에 있었던 총회를 전승하기 위하여 장로교회의 헌법에 따른 참 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오늘 총회를 설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끝까지 영적 전쟁을 올곧게 끝까지 지속할 것을 천명한다. 우리는 결단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할 뿐이다. 할렐루야」

결국 1952년 "고려파"가 총노회를 설립함으로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첫 교단 분열이 일어났다. "고려파"라는 명칭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계승자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부선은 "고려파"라는 명칭보다는 "한국개혁교회"라는 이름이 좀 더 선명하게 신학적 정체성과 교단의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 조선장로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분리-1953년

이미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의 고려파 분열에 이어 1953년에 기장파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한 신학의 자유를 구가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일제 치하 말기에 탄생을 보게 된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 그야말로 유일한 신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을 얻기는 했지만 반대하는 보수주의 목사들의 숫자가 점증하고 있었다. 해방 후 한국에 복귀한 외국의 선교사들 가운데 캐나다 선교부를 제외하곤 조선신학교에 대해 냉담하였다.

이런 와중에 1947년 4월 18일, 51명의 소위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이 대구에서 열린 총회에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수들의 가르침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422>교수들이 빈번하게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미명 하에 유포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30년대에 이미 보수신학에 대한 자유 진보파의 신학적 반발이 있었으며, 그 논쟁은 주로 성경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보다 더 적극적인 신학입장 표현이 있었고, 자연히 논쟁의 정도는 더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형룡 박사가 만주에서 귀국하자, 서울에 있는 보수적인 목사들 사이에 수도에 보수적인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고,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에 오자 그들의 소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8년 6월 20일, 서울의 창동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35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함께 장로회신학교도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함과 동시에 두 신학교를 병합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런 가운데 신학교간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1951년 5월 25일에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양 신학교를 다 폐쇄하고 새로운 하나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설립하는 결정을 내렸다. 조선신학교 측에서 볼 때, 이 결의는 결과적으로 조선신학교가 총회직영 신학교임을 취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23>그 이듬해 대구 서문밖 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는 성경에는 비록 오류가 있지만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김재준을 성경무오설을 부인한다고 하여 제명처분하기로 가결하였으며, 조선신학교 졸업생은 교회의 교역자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1952년 9월17일, 조선신학교를 옹호하는 3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가 모여 호헌대회를 열고 총회의 처사에 대해 불법이라고 항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3년에 모인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의 목사 파면을 결의하자, 조선신학교 인사들은 새로운 총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54년에 분파 된 이 총회를 "한국기독교장로회"라고 칭하였다.


● 고신의 개혁신앙 변질-1950년대 말기

416>한국교회의 개혁과 재건에 동참한지 10여년이 흐르면서 한부선은 고려파 내의 많은 문제점들을 목격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소위 "스푸너 사건"이었다.

1960년 7월의 어느 주일 날, 1956년부터 봉직해온 미 정통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스푸너(Arthur Boyce Spponer)와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났다. 원래 스푸너 가족은 금요일에 출항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출항이 주일로 연기되어 박윤선은 그들을 배웅한 뒤 주일 예배를 인근의 교회에서 드리려고 작정하였다. 그와 함께 갔던 일행이 선상에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시간이 지체되어 그만 공적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417>이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노회에 보고가 되었고 박윤선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그 해 총회에까지 상정되었고, "주일성수에 관하여 본인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도 건덕상 문제가 될 때는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가결"하였다. 이사회는 그가 총회의 결정에 따라 도의적 책임을 표명하기 전까지 신학교 교장직과 교수직에서 해임한다는 통고를 하였다.

418>고려신학교 이사회는 박윤선과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하여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박윤선을 급작스럽게 해임한 것은 단지 스푸너 사건에 연루 된 주일성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회의 문제를 계속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를 가지고 박윤선과 반대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 송상석 사이에는 이미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있었다.

419>송상석은 박윤선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리인을 통하여 이 문제를 총회가 끝난 후 이사회로 가져오고 가장 강력한 징벌을 주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부선도 이러한 음모가 게재되어 있음을 들은바가 있었다.

또한 박윤선과 한상동 사이에 신학교 경영 문제로 말미암은 갈등과 마찰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사장이었던 한상동이 곤경에 처한 박윤선의 입장을 위하여 한 마디의 지지발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그리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향을 보아 한상동이 이 사건을 수습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지 2년 후에 고려신학교 학생회가 부흥회 강사로 박윤선을 초청하려 하자 한상동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부선의 마음은 그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잘못됨이 없음을 해명하고 주장했을 때 그 양심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였다. "진실주의"로 평생을 살아 온 한부선도 박윤선의 주장을 옳게 여겼다. 그런데도 이사회는 박윤선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어 교장직 해임과 교수 중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 이후 고려파는 인물을 아낄 줄 모르는 편협한 교단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어쩌면 서영일이 비판하고 있듯이 "고려파는 변질되었다. 개혁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지 10년 만에 이들은 더 이상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헌신한 동지들의 집단이 아니라, 소수 의견에 관용을 베풀 수 없는 형식적인 기성교회가 된 것이다.

소수 의견이 전체 교회의 형식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고 평화를 깨뜨린다"는 생각이 한부선의 마음에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420>박윤선과 유사한 조처를 당한 한부선도 고려신학교를 떠났다. 그 이후로 한부선과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려 헌신했던 고려신학교와의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었고 예전과 같은 관계 회복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할 때면 언제고 고신 교회와 신학교를 지원하고 협력하는 넓은 사랑과 아량을 보였다.

◎ 註:그 즈음에 백영희 조사님도 고신 지도자들로부터 상회 불복종이라는 명목으로 제명을 받게 된다.


● 고신에서 백영희 조사님 제명 - 1959년

◎ '공회' 발족 - 1966년 (제1회 공의회 회의록)

주후 1966년 5월 26일 오후 5시 반에, 서부교회에서 전 회원(목사 10명 장로 1명)이 회집 되어 백영희목사 사회와 기도로 공의회가 개회되다.

1. 임시의장은 배수윤 목사의 동의와 이진헌 목사의 재청으로 백영희 목사로 가결되다.

2. 기록서기는 이진헌 목사로 가결되다.

3. 의장께서 개교회 발족취지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다.

① 단체 조직 하에서 의사의 진행을 하려면 종다수 가결로 처리하게 되는 바니, 진리는 다수에만 있는 것이 아닌즉 진리를 수호하기 어렵게 된다.

② 수다한 종별의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전 성경 진리에만 근거를 두지 않고 소박한 헌법으로만 처리하려 하니 바른 처리를 보지 못하고 옳은 것이 수다히 묻히게 된다.

③ 상존 기관을 가진 단체에서는 탐권과 탐영으로, 인본주의 세력이 강하여 신앙양심을 어둡게 하고 진리의 세력이 묻히게 된다. 년조가 오랠수록 인본화 되고 속화됨으로 이를 방지하고 진리를 보수하기 위하여 개교회로 발족한다.

4. 개교회 유고처리, 개교회에서 처리할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건에 따라 지방적으로 소공회(註:지방공회)를, 혹은 전체적으로 공의회(註:총공회)를 누구든지 자유로이 동등한 자격으로 소집해서 사건을 성경대로 처리하고 해체할 것이며, 공의회 경비는 소집한 주동 교회에서 부담함을 원칙으로 한다. 공의회는 성경대로 상존기관으로 두지 않는다.

5. 개교회의 정치

① 개교회의 법전은 신구약 성경으로만 한다.

② 각 주석과 각 교파의 헌법은 참고로만 한다.

③ 사건에 적응시키는 성경 깨달음은 각자의 양심대로 할 것이나 차이가 있을 때에는 상호 이해시키는 것으로 노력한다.

④ 권징은 먼저 개인적으로 교회 적으로, 다음은 공회적으로 권한다. 듣지 아니 할 때는 다만 상관없음을 교계 기관지에 공개하고 불간섭하는 것으로 끝나고, 다만 엄밀한 기도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⑤ 교역자 이동, 개 교회의 교역자 이동은 본인의 의사와 교회의 형편과 동역자의 의사와 사회의 여론을 따르되 불복 시는 하나님께 맡긴다.

안건처리가 끝남에 의장의 기도로 폐회 하니 하오 10시55분이더라.
주후 1966년 5월 26일 임시의장  백영희 목사, 서기  이 진 헌 목사


◎ 공회 발족취지 재천명 - 1989년 (교역자회 회의록)

1.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는 8.15 해방 후 장로교 고신 교단 소속이었으나 반소문제, 유엔군 철수문제, 파수꾼 폐간으로 진리 제거, ICCC 가담, 교권문제, 고려신학교 정치적 강사문제, 교회 이동문제, 등등으로 그 이의를 제기하다 (백영희 조사님) 제명되어 외톨이 교회로 있다가 교회 수가 불어가게 됨에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가 발족되었다.

(註: 파수꾼은 고신에서 발행되었던 계간지로서 고신이 폐간하자 백영희 목사님이 계속 편집발간, 그 이후 고신이 파수꾼 재발간 의사를 전달하므로 고신에게 환원)

2. 총공회는 성문헌법 없이 총공회는 신구약 성경만으로 개교회와 개개인의 구원의 신앙행위의 유일한 근거로 한다.

3. 학습, 세례, 성찬, 기타 교회의 의식, 제도, 행사, 권징들은 종전 관례대로 하고, 언제든지 성경적으로 수정 가능하다.

4.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기타 정통교회들의 교리와 신조들은 성경 깨달음의 참고로 한다.

5. 공회 행정은 정통교단들의 헌법과 위원들의 심의 의사와 평신도들의 의사까지 종합 심사하여 성경 명분대로 결정하고, 시행은 이해와 권고로 그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및 개인 양심 자유에 맡겨둔다.

6. 교회의 운영자금은 성경적 운영자금과 자유성금으로 운영한다.

7. 교회의 부동산은 공회 공유재산이다. 만일 공회에서 교회가 탈퇴할 경우 전원 탈퇴해야 전 소유를 가지고 가고, 공회소속 잔유 소수가 있을지라도 잔유수의 잔유 여부를 막론하고 잔유 소유가 된다.

8. 장로, 집사, 권찰, 주교반사 선정은 곳에 따라 투표 또는 임명으로 한다.


◎ 공회의 '공회성'

1. 공회는 교회 내에 문제가 있을 때 성경대로 의논하기 위해 개교회(個敎會)들의 모임을 공회라고 합니다. 공회는 심의(深意, 審議)기관이 아니라 심의(尋義) 기관으로서 찾을 ‘尋’ 하나님의 뜻 ‘義’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관이라는 말입니다.

2. 공회의 모든 기관은 ‘의논’ ‘결의’ ‘집행’에 있어서 심의적(尋義的) 기관으로 운영하여야 하며, 모인 교회들이 회의를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의결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의결해야 합니다. 또 찾은 뜻을 집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공회의 의결은 진리라야 의결이 되며, 만일 교회들의 전원일치로 결의된 것이라도, 이후에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면 공회의 의결은 없었던 것으로 보게 됩니다. 최종적 공회의 의결은 '진리로 전원 일치'하여 결의할 때만 성립됩니다.

3. 공회의 역사는 사도행전 15장에 초대교회였던 사도교회에서 구약 율법에 대하여 시비가 생겼을 때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의결한 것은 구약 제도는 폐지하였고, 다만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 하도록 결의한 것이 첫 공회이니 곧 '예루살렘공회'입니다.

4. 공회의 성격은 예루살렘공회와 같이 개교회가 모였다는 뜻으로 오늘도 교회의 의논이나 시비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개교회들이 모이는 회의로서 단체중심의 교단적 모임의 성격이 아닌 공회주의 개교회들의 모임입니다.



● 조선장로회에서 통합 분열,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리-1959년

한국 동란 와중의 분열된 한국 장로교회는 여전히 분열의 조짐이 제거되지 않은 채 혼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대한 의견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분열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1956년 9월 20일에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활동에 착수하였다. 국제기독교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CCC) 회장인 칼 맥킨타이어(Carl Mclntire)가 1959년에 한국을 방문하기 4년 전에 이미 경북노회의 헌의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정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연구위원들 가운데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세계교회협의회가 용공이라는 것과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외에는 WCC는 단일교회 운동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424>WCC를 공격하는 보수주의적인 목사들은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이란은 기치 아래 W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425>1953년 6월 조선신학교 측과의 분열 이후, 장로교회 내부의 WCC의 회원 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에큐메니칼 인사들과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미국의 복음주의협의회(National Associaton of Evangelicals, NAE)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갔다. 전자의 중심 인물은 한경직이고, 후자의 정신적 지주는 박형룡이었다.

그런데 3천만원 사건으로 박형용은 1958년 3월에 신학교 교장직을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복음주의 진영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신학교 이사와 총회 총대의 다수를 확보하고자 모든 정치적 역량을 동원하는 가운데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소집될 예정이었다. 두 진영간의 갈등과 대립은 총회로 모여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취급하는 과정에서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가운데 격화되었다.

경기노회에서부터 총대 선출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중에, 한경직, 강신명, 유호준 목사 등 훗날 통합 총회를 구성한 인사들이 총대 선출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자신들을 중심으로 노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총대를 선출한 양측이 모두 총대를 보내자, 경기노회 총대문제가 개회 벽두에 대두되고 말았다.

426>복음주의자들은 정회하고 흩어졌으나, 에큐메니칼 측은 선교사들과 함께 상경하여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연동교회에서 속회함으로 "연동측 장로교회 총회"를 결성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정한 날짜대로 11월 24일에 서울 새문안 교회가 아닌 승동교회에 모여 소위 "승동측 장로교회 총회"를 열었다. 총회를 사회하던 노진현 목사가 속회를 선언하고 한국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승해 왔던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고수함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승동측이 신학적 전통성과 법적인 정당성을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27>당시 승동측과 연동측의 "그 분열된 교회의 규모로 보나 서로 비방하던 혼란과 비행으로 보나 이 분열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추악한 분열이었다. 그 이후 교회의 분리나 분립을 예사롭게 보는 교회관이 형성되었다.


● 승동측과 고신이 합동하여 '합동' 교파 설립-1961년

430>분열의 진통을 격은 승동측은 1960년 8월 고려파와의 합동을 제안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파 역시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은 고려파가 당면한 문제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다.

고려파의 정기 노회에서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에 걸린 인사들에 대한 좀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 요구가 총회에서 관철되지 않자 19명의 목사들이 새로운 노회를 구성하고 "보류노회"라 부르면서 고려파로부터 분리하였다.

또한 이미 전술한바 있는 박윤선의 주일성수 문제로 인하여 고려파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어쨌던 경기노회 문제와 박윤선의 주일성수 문제로 인하여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고려파는 합동 제의에 쉽게 응하게 되었다.

431>1960년 8월 서울에서 양측 지도자들의 모임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과속으로 치달은 합동(合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측은 1960년 9월 총회에서 합동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고려측은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부산 남교회에서 모인 제10회 총회에서 진주노회가 제출한 승동측과의 합동 헌의안을 받아 승동측과의 합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합동 추진위원 9명을 선정했다.

434>여러 가지 진통 속에서 합동총회가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으며, 박형용은 에배소서 4:1-14에 근거하여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이 새 교단의 이름을 "합동"이라고 정하였다.


● 고신이 합동에서 다시 고신으로 환원 - 1963년

435>그러나 밀월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결국 이 연합은 "이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무계획한 시험 결혼과 같은 것이었다. 연합이 이루어진지 10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분열의 조짐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학교 문제, 불공평한 임원선출, 타락과 교권 다툼 등으로 인하여 연합의 들뜬 분위기는 이내 가라앉고 분리의 아픔이 너무도 빨리 시작되었다.

통합측과 합동측이 WCC 문제로 분열되었을 때, 합동측과 고신측은 신학적 동질성을 확인하며 교단 합동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학교 문제를 포함한 갈등 요인들이 부각되면서 합동의 의미가 약화되고 있었다. 고신측과 교단연합을 한 후, 신학교 단일화 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박형룡이 정통장로교 한국선교부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신학교 교수로 봉사해 달라고 하는 초청에 대해 다소 주저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교단 직영이 아니었던 고려신학교가 교단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양교의 이사회를 단일화한 후 통합된 신학교는 총회의 감독을 받기로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결정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양 이사회의 합동은 빠른 기간 내에 양 신학교의 합동을 의미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총회의 간섭이나 권고는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436>또한 "제46회 총회에서 진정한 합동을 위하여 신학교육의 단일화가 매우 시급하다는 인식 하에 다수결로 결정되었음을" 환기시키면서 "과거와 현재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학교가 단일화되지 않고서는 교단의 화합이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문제를 둘러싼 이견은 좁혀지지 않은 채, 분열을 막아보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한상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신학교를 분리하였고 실제적인 이탈은 1962년 10월에 완료되었다.

그 이듬해인 1963년 9월에 부산에서 따로 총회가 소집되었다. 고려파는 자신들을 "환원"이라고 호칭하면서 "고려파"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승동측과 합한 고려파 소속 교회들은 약 590개였으며, 그 중 445개의 교회가 분리에 가담하였다. 경남지역에서는 90%가 넘는 교회(175개 중 163개)가 환원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 비율은 40-60%에 불과 하였다.

환원 된 후 교려파의 총회가 회집 되었을 때, 합동을 추진했던 한상동 목사는 이 일에 책임을 지고 모든 직무로부터 은퇴를 선언하였다.

437>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헌신적인 입장에서 후퇴한 고려파의 "편의성에 기초한 사고"가 승동파와의 성급한 연합을 통해 드러났다.

438>1961년 합동측과 고려파가 교단 합동을 시도한지 2년이 지난 1963년에 고신의 환원을 통하여, 우리는 교단의 분열보다 합동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런 분열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서도 정통장로교 선교부는 양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을 결정하였고, 여러 지역과 다양한 교계 인사를 알고 있었던 한부선은 "분리된 교단을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자임하였다. 정통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한부선은 고신교단 총회에, 간하배는 합동교단 총회에 참석함으로 양 교단 사이의 앙금을 풀고 화합 지향적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결문>

1. 한국 장로교회사에서 신앙노선의 분파를 요약해 보면 먼저, 조선장로회에서 고신이 분리될 때에 그 이유는, 신사참배를 한 교회와 그 목회자에 대한 회개와 교회개혁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교역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하여 조선장로회에서 성경적 깨끗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부득불 고신 진영이 분리 설립되었습니다.

2. 다음은, 조선장로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분리 된 이유는, 본래의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에 반하여 자유주의 신신학을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파급의 영향을 미치게 되로, 이에 이를 배척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김재준 목사가 주동이 되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설립되었습니다.

3. 그 다음은, 개혁주의 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섰던 고신이 얼마 후에는 변질이 생겨나서 예배당 소송문제, 유엔철수 반대성명, 진리의 종 제거, 교권주의 등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3-1) 이러한 시점들이 바로 스푸너 사건이 잘 반영해 주고 있는데, 주일성수라는 명목을 걸어 박윤선 목사님을 고려신학교 교장과 교수의 직위를 해제시키는 때입니다.

3-2) 또 그 즈음에 백영희 당시 조사님도 이러한 상황 배경에서 고신에서 제명되게됩니다.

4. 또 그 다음에는, 교리신조와는 상관없이 교회는 통합되어야 한다는 에큐메니칼, 즉 통합 교파가 한국장로회 안에서 또 분리되게 됩니다. 이래서 에큐메니칼 즉 통합을 연동측이라 부르기도 하고, 주류 즉 복음주의를 승동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5. 그럴 즈음에, 승동측에서 고신에게 합동을 청하자 두 교파가 연합하여 합동하게 됨으로써 합동 교파가 생겨나게 됩니다.

6. 그런 다음에, 그 합동에서 신학교 단일문제 등의 문제가 제기되자 고신측은 다시 환원을 하여 이전 이름 그대로 고신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런 한국 장로교회사를 간략하지만 신앙노선의 분파를 요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각 교파들은 각각 저들의 입장에서 이 장로교 교회사에 대해 그 사실적 면을 긍정도 하고 또 변명도 하겠습니다.  

합동, 고신, 그리고 기장과 통합, 그리고 공회를 한국 장로교 교회사에 있어서 그 대표적으로 대두시켜 살펴보았습니다. 그 외 장로교 안에 군소 교파가 많으나 그 신앙노선은 크게 이 네 부류로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장자적 계대

칼빈의 개혁주의> 개혁주의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청교도> 미 북장로교의 프린스톤신학교> 메이첸의 웨스터민스터신학교> 조선장로회 총회의 평양신학교> 고려파의 고려신학교> 공회의 교리신조와 행정

공회가 가진 개혁주의 신앙노선은 '성경대로' 라는 칼빈의 개혁주의와 그리고 그 개혁주의자들이 정립 발표한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 그리고 이를 보수하는 신앙이 되는 청교도, 또 청교도의 후손들이 세운 미 북장로교의 프린스톤신학교, 이를 수호 계승한 웨스터민스터신학교, 그리고 그곳에서 공부한 선교사들이 중심 되어 세운 조선한국의의 평양신학교, 그리고 신사참배 이전의 평양신학교의 신앙을 계대 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신학교, 그리고 고려신학교의 그 개혁신앙을 바로 보수하기 위해서 세워진 공회의 교리신조와 행정. 이 이름들은 시대마다 개혁주의 신앙의 그 장자적 신앙노선의 계대표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1) 공회의 교리신조

교리와 신조면에 있어서, 개혁주의 장로교 신앙노선을 제일 일선 선두에 서서 수호하고 있음을 보는 분은 정안(正眼)의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더하여 한국 장로교회사적 바탕 위에서 공회의 개혁주의 신앙노선이 가지는 그 개혁성은 한국 장로교와 그리고 세계교회에서 그 장자적 명분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분은 명안(明眼)의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2)공회의 교회행정

개혁주의 교리신조의 개혁성에 더하여, 장로회 교회정치에서 미약 된 부분을 성경적 교회정치로 보완하기 위하여, 초대교회의 교회정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 교회정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신앙노선을 하나 더 추가한 진영이 공회입니다. 이래서 공회 신앙노선이 장로교 개혁주의 교리신조와 또 초대교회 공회의 교회정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성경적 개혁주의 진영이라는 것이 보인다면 그분은 혜안(慧眼)의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공회 교회정치의 행정에 있어서 그 일면을 간략하게 몇 가지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개교회가 지방적으로 모이면 그 지방공회가 되고, 또 지방공회가 전국적으로 모이면 총공회가 됩니다.

2) 진영의 교회가 전국적으로 회집 하여 총공회가 개최되면 총공회장은 그 총공회에서 선출되고 또 총공회가 폐하면 총공회장은 비상존이 됩니다.

3) 교훈위원회, 행정위원회, 등을 두고, 그 위원회에 소원(少員)과 노원(老員)을 세워서 제반 문제와 부흥을 위해, 그 안건을 심의하여 총공회 시에 그 안건을 제출하여 진리전원일치제로 처리하게 됩니다.

4) 공회 진영은 교역자 시무에 있어서, 매 2년마다 교역자시무투표를 실시하여, 교인 전체 2/3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교회를 사임하고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역자 청빙은 개교회에서 그 청빙권을 가집니다.

이렇기에 공회 진영이 가지는 교회행정은 공회행정 그대로만 시행하면, 장로교회사에서 불미스럽게 일어난 문제들을 사전에 불식시키며, 또 그러한 사안들의 원인조차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개혁적 행정입니다.


● 공회의 교리신조와 행정은 최고

1) 공회의 교리

인간론에 있어서, 창조면의 인성 영육 이분설 안에, 구원면의 인성구조 영, 마음, 몸의 삼분설을 정립하였고, 그로 인하여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가 자연스럽게 정립하였습니다.

또 구원론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의 터가 되는 그 '기본구원' 면과 그 터 위에서 우리들이 힘써 성화를 이루어 가야하는 그 '건설구원' 면의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즉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거저 받아 가지는데 그 받아 가지는 그 부분만큼은 우리의 힘씀이 있어야 한다는 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교리 정립은 이 시대를 감당하는 구원론에 있어서 현재적 세계 최고의 교리정립입니다. 이를 동의하는 분이라면 용안(勇眼)을 가진 용사(勇士)라 하겠습니다.  


◎ 공회의 신조

공회의 신조에 있어서, 백영희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와 6,25 환란, 그리고 고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와 일평생 교회의 개혁을 보수를 위해서 그 순생 순교적 선지자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순교하셨습니다. 이에 공회 진영의 목회자와 교인들이라면 늘 순생 순교의 신앙을 향하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의 신조를 가지는 공회는 한국과 세계 그 어느 진영의 신앙신조에 맞대보더라도 앞서면 앞섰지 뒤떨어지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그 일면으로서 공회 진영은 주일성수를 기초적 기본신앙으로 알고 있습니다.


◎ 공회의 행정

공회의 행정에 있어서, 장로회 교회정치를 더욱 성경적 정치로 보완해 나가기 위해서, 사도시대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회가 취했던 그 공회정치를 상고하면서 부족하고 미약하나마 이를 이행해 나가려고 최선의 중심을 가지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결론>

공회 신앙노선이 되는 교리신조와 행정, 그 위치를 한국 장로교회사에서 그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 그 역사적 사실에서 그 위치를 찾아 그 자리를 매겨보았고, 또 그에 더하여 장로회가 가지는 교회정치에서 한 발 더 성경적 교회정치로 나아가고 있는 공회의 교회정치도 간략하게 피력해 보았습니다.

이러므로 각 교파의 교리신조와 행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본 분들이라면 공회가 가진 교리신조와 행정이 얼마나 개혁성을 띠고 있는지 실감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좁게는 한국교계와 넓게는 세계교회에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 그 감이 또 잡힐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실감을 가지는 분이 공회 교역자라면 공회 신앙노선이 감당해야 할 그 사명이 지대 하는 것을 또한 실감하게 되므로 그 어깨가 아주 버거울 만큼 무겁게 인식 될 줄 압니다.  

이렇게 공회 신앙노선의 진정한 위치와 그 사명이 어떠한지를 한국 장로교회사를 통하여 그 사실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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