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


선지자선교회 1980년 10월 10일 금새

 

본문 : 로마서 1장 21-23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어제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더러움에 내어 버려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는 말씀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성도된 자는 생기기만 하나님의 모형으로 지음받아 생긴 것이  아니고 지음받은 것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마는 사는 것도  하나님처럼 살게 한 것이 인간의 본 지위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위치인데 이것이 짐승처럼 살고  물질처럼 살고 가장 천하다고 할 만한 그런 피조물의 종이 되고 피조물을 섬기는  이런 무가치한 자로 사는 그것을 가르쳐서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밑에 음란에 대해서 말을 해놨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 이렇게 귀속을 시켜서  위에 말한 그 본 뜻을 사람들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제 아침에  벌써 이틀 아침째 계속해서 그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같이 사는 것이 성도의 살이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제사장이 누군고 하니. 멜기세댁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그 계대를 이어서  제사장 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계대를 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사는 자입니다.

선지자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왕으로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애인데 품팔이를 하든지 종의 종이 되든지 껍데기의 위치와  계급이야 무엇이 됐든지 그의 지식이, 정신이, 사상이, 소속이, 방편이, 목적이  꼭 하나님과 같은 것, 하나님의 것, 하나님과 한가지 하나 이래가지고 사는 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자는 모릅니다. 그것이 피조물에  피조물처럼 사는 것 타락자는 전부다. 피조물화 되었는데 짐승화 되었는데  피조물처럼 사는 그것이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성을 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 참 불쌍하고 가련한 것, 제가 뭐인데 자기를 자존하는 것,  자기가 밑천이요, 자기가 전체요, 자기 뭉텅이 그 까짓것 존귀하게 여기면 뭐할  것입니까 성도는 그런 자존성은 다 십자가 못박혀 죽인 것이 성도입니다.

자존성은 뭐 자존심인가 하나님 모형,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처럼 되는 요것이  자기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욕을 죽자껏 얻어먹고 매장을 죽자껏 당하고 억울함을  죽자껏 받아도 하나님의 성격,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방편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별별 죄인으로 매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하나님적인 그것이 자기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그것없이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천하게 만들어 그렇습니다.

천하게 버려둬서 이렇게 천해진 것이요, 자기가 돈 때문에 살고 인간 때문에  살고 뭣 때문에 살고 피조물 어떤 것 중심, 어떤 것 위주 그것으로 인하여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살아지는 그것이 한없이 천해진 것입니다. 성도가 한없이 천해진  것이요. 한없이 천해진 것인데. 왜 그리 천해졌느냐 하나님이 버려두어서 그렇게  천해졌습니다.

왜 버려둠을 당했느냐, 버려둠을 당한 것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니까 하나님이 버려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을 받고 하나님이 저를 대우해서 이렇게  간섭하시고 아껴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배반치  아니하는 자. 곧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감사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얼  받는 자이요.

이것을 버리는 것, 이것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 버리는 것이요. 이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제 욕심대로 사용할라 합니다.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게하는 하나님이며, 감사케 하는 하나님인데 이것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 욕심대로 이용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대통령 삼아 주옵소서, 장관을 삼아 주옵소서. 나를 어떤  권위있는 자 삼아 주옵소서 대학자를 삼아 주옵소서 대 정치가를 대 재벌가를 대  인기가를 삼아돌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다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제 욕심대로 이용할려고 해요. 사람도 사람된대로 물질주의자는 자기를  유물주의자로 이용할려고 할 때에 영광이라고 하고 기뻐합니다.

어떤 권세 욕심자는 권세 위주로 사는 그 자를 그 권세를 위해서 그 분을  이용할려 할 때에 그 좋아합니다. 깡패위주자를 저를 깡패위주로 이용할려 할 때  좋아합니다. 절 알아주니까 어떤 음란자를 음란에 이용물로 이용을 할 때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사람으로 어떤 것에  이용을 할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람도 모욕당한 줄 압니다. 욕을 본 줄 압니다.

제 욕심대로 제 성격대로 이용을 하려고 하면 큰 모욕당한 줄 압니다. 모욕당한  줄 알아서 그것은 참질 안합니다. 상대방이 너무 어리면 그저 그대로 웃음으로  버려두고 이러나 이것이 나를 이런 존재로 알고 이렇게 상대하고 여기에  이용물로 여기 쓸모있는 것, 돈벌이 하는데 이 사람은 쓸모 있다. 이 사람은  정권 잡는데 쓸모 있다. 이 사람은 사기 협작하는데 이 사람이 참 아주 쓸모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할 때에 모욕인 줄 아는데. 더욱더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이 면에 무한히 모욕당한 줄 압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자기 부자 되기 위해서, 병 고치기 위해서, 뭐 위해서 이래도  하나님께서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런 표적으로 그  초자연의 역사 그 능력 그것이 대단한 것 아니라 이적은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아직까지 초신자도  안된 그자에게 이적이 있습니다.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에 말하지 아니했소,  믿는 자에게는 이적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이적이 필요하다고 하지 아니했습니까? 그것 모양으로 신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 이런 것이 이렇게 저렇게 제 욕심대로 그것이 되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 그것이 성도의 생애는 아닙니다.

감사한다는 것이 이것이고 욕망한다는 것이 이것이고 이러니까 하나님이  답답해서 이것이 언젠가 될 때가 있을까 해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요.

그런데 베드로가 고기 잡아 가지고 던지고 주를 그렇게 소망했던 죄를 자복을  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는 이런 깨달음은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고 그것으로 뒤로 자뻥해지고 교만하고 하니 참 가련하고  불쌍하기가 짝이 없다 그 말이요.

베드로처럼 그곳에서 그것 하나를 증거로 삼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못한, 부인한 그 죄를 자복하면서 자기는 전적 하나님과의 삐뚤어져 있는 나는  죄인이 옳소이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할 터인데 깨달음은 크니 그것을 주니까  그것 가지고 교만 부리고 그것 가지고 욕심부리고 하니 참 도에서 먼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엘리야의 영감을 구한 것처럼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신에 감화 감동의 능력입니다. 성도에게 새로 받아 필요한 것은 진리와 영감,  권능, 권능은 실상을 만드는 그것이 권능이요. 진리는 알게 하는 것이요. 영감은  진리를 확실히 알게하는 역사를 해주고 또 그 능력을 받아 결실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운동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 말합니다.

이래가지고 점점 더 깨달아 알고 실상을 만들고 하는 이것이 성도의 구할 것인데  더 부요해지고 더 결실한 뭐인가 그것이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그것 이루는  것이요.

그 감사함이 커지는 것, 영화롭게 하는 것 커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커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만 커지고 끝나는가 영원히 커집니다.

이것을 힘쓰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데 성도가 자기를 천하게 하지 않고 자기를  고귀하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상대방을 대우하는 것이 상대방을 고귀히 대우하는  것이고 인간대우를 이것을 얼 가진 자로 이 생애를 할 수 있는 자로 이것이 그의  생활되어 있는 자로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 다시 말하면 사람을 하나님처럼 살  자로 하나님과 비슷한 자로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데 그렇지 아니하고 사람을  피조물의 어떤 것의 소유로 그것의 종으로 그것의 소망자로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 그것이 이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천해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성도의 생활이요.

구속을 받은 성도의 생애는 하나님같이 사는 것이요. 성도의 사업은 하나님사업  같은 사업이요. 성도의 지능은 하나님의 지능 같은 지능이요.

이러기에 성도에게 왔기 때문에 하나님 같은 것이지 그 본질과 본성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이런데 이렇게 살지 않는 것이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욕되게 사느냐 하나님께서 버려 두어서 그 마음이 허망해지고 미련해지고 어두워지니까 이제 제  욕심대로 살게 되었고 욕심 그것을 달성하면 성공이라고 손뼉치고 욕심을 네  욕심은 이런 욕심이냐 내 욕심은 이런 욕심이다. 너는 대 정치가 욕심인데 너는  그 매일 한 푼 두 푼 월급 받는 것 월급욕심이지. 나는 대학자의 욕심인데 그  학자의 욕심이나 대 정치가의 욕심이나 다 그것이 금 덩어리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자나 그 돌덩어리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 섬기는  것이나 같지 무엇이 낫다고 그렇게 크다 야단이냐 다 미친 소리요 다 정신 빠진  소리입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같이 되고 싶은 이 욕심이 성도의 욕심입니다.

이 욕심은 어디서 되어지는 고 하니 그를 영화롭게하는 그에게 감사하는 것,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다니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은 받은 은혜에 근원을 생각해가지고 그  은혜를 감사,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는 감격이 된 것 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생겨진 것 만큼 영화롭게 할 수 있는데 왜 영화롭게 하는 것을 먼저  기록하고 감사를 다음에 기록했는가 그것은 영화롭게 하는 것이 외부의  표현이요. 감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속에 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을 먼저 말하고 속을 뒤에 말한 것입니다.

그면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받은 자로 자기가 인식하고 구속받은 자가 되가지고 구속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이 구속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쌓여지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쌓여진 그것이 그것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구속 받은  구속의 것인 것을 제가 알고 이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구속 이것이 차차 더  되어서 구속의 것이 점점 더 되어지는 것 이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구속의  것을 알고 구속의 것이 되어져 구속의 것으로 나타나는 것, 구속의 것이  움직이니까 구속의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속의 것으로 나타나는 이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속이 그 자신이 알고 구속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구속의 것이 되어서 구속의 것을 나타내니까 나타내니까 그 나타냄을  보는 모든 존재들이 다 크다. 참 지극히 존귀하다. 이 구속의 것을 지극히 큼을  모든 것이 보고 이 구속의 역사를 이룬 그 분을 찬양합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피조물에게 화려하게 비칩니다. 아름답게 비칩니다.

화려하게 비추어 줍니다. 빛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빛으로 나타납니다. 평강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한없는  쾌락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것을 가지고 만물이 소생됩니다. 만물이  기뻐합니다. 만물이 행복을 가집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화려합니다. 이  영화롭다는 이런 말로 중국에서 따온 말로 아주 굉장히 발달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말로서는 요렇게 표현하기가 어렵고 또 이것을 여러 수십 쪼가리로  나누어서 말을 해놨지마는 요것은 여기 한테 뭉쳐서 영화롭다는 말은 굉장히  표현이 잘 돼있고 말에 뜻이 깊고 넓고 큽니다.

영이라고 하는 그 의미는 이렇게 구속받은 구속의 것인 것, 제가 제 것이 아니라  구속으로 값주고 산 구속의 것이 된 것을 인식하고 또 구속의 것이 되어 실상에  구속의 것이 되어져 법적으로는 단번에 구속했지마는 이미 구속이 되었지마는  서도 제가 구속을 인정하는 것은 현실을 통해서 구속의 것이 되어지는 것은  현실을 통해서 구속의 것으로 나타내는 구속을 나타내는 것은 현실로 통해서  되어지는 것인데.

이렇게 될 때에 이것을 접하는 자마다 보는 자마다 소문을 듣는 자마다 관련을  가지는 자마다 이것으롤 인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너희들을 구속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찬미가 되게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구속의 것으로 나타날 때, 행동할 때에, 나타날 때에 그  때에 그것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쳐 영광에 찬미라 이랬습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그 자체가 되어있다 그 말이요.

우리를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할렐루야로 노래하므로  영원히 주를 찬양하세 그 전에 지은 사람은 그래 지었는데 뜻도 모르는 주 자를  자꾸 변경을 시켜놨소 처음에 번역이 잘된 것입니다. 그 나중에는 번역이 되  그런지 또 자기를 나타낼려는 것인지 몰라도.

할렐루야로 노래하므로 그 말은 입으로 하나님을 노래한다는 그 말 아니요.

할렐루야는 자기 승리한 승리했다는 그 승리를 발표할 때에 그것을 할렐루야  이렇게 말하는데 승리로 하나님을 노래한다 말이요. 입으로 노래하는 것 아니고  한가지 승리하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됩니다.

날마다 승리로 승리로 노래를 해 입으로는 하루종일 노래를 해도 자기  행동으로는 패전 패전인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찬송이지.

무슨 찬송이 있어, 노래 한 번도 안 불러도 한 껀 한 껀 승리하는 그 승리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입니다. 할렐루야로 노래하므로 영원히 주를  찬양하자 이 찬양으로 찬양하자 그 말이요.

구속받은 자인 것을 알고 구속의 것이 되어서 구속을 나타내는 구속으로  나타내는 이것이 승리라. 이것이 승리라 이것으로 영원히 주를 찬양하자.

입술로만 찬양하면 안 돼. 행동으로 찬양함도 행동에 완성, 승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할렐루야로 노래하므로 영원히 주를 찬양하자는 이 뜻인데 엉뚱하게 별스러운 소리를 그래서 새찬송에도 그 나는 그것을 내가 언제든지 한  번 인제 누가 젊은 사람들 그것을 알아 봐가지고 나한테 알아 줬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때 찬송위원이 세 사람인가 난 줄 내가 아는데 고신에서  새찬송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고 내가 아는 그 한 사람이 끼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신학교에서 처음에는 가난해서 물짐을 지고 밥을 얻어먹고 그랬고 또  서부교회도 좀 나왔고

그 다음에는 서부교회 올라고 신청하는 것을 신청에 들어 주지 안하니까 내가 그  사람을 들어 주지 않했어. 들어줘야 그렇가 싶어서 들어주지 안했어 뒤에  재주있고 훌륭합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커 올라가서 찬양 위원이 됐는데 그 사람은 어느 찬송 어느  찬송 찬송을 만든 그 번역을 한 그 사람들 한 번 알았으면 내가 좀더 참고 할  것이 있는데 어느 위원은 뭐 무엇을 개역했고 어느 위원은 뭣을 개역했다하는  그것 한 번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것은 보면은 그 찬송을 개역한 것이 그  행위가 참 미워 어떻게 그 은혜로운 신령한 영감을 제 생각으로 확 바꿔놨는지  영화롭다 하는 영화롭게 구속을 받은 자, 구속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 문제를 해결해서 영원히 죄없이 해주었습니다.

죄없는 사죄로 우리를 샀소, 우리는 사죄의 것이 됐습니다. 주님이 값을 내시고  사죄로 우리를 샀소, 우리는 사죄의 것입니다. 이래서 사죄가 점점 우리에게  충만해져 가야 됩니다.

이제 사죄에 뭉텅이, 죄사함 뭉텅이, 죄없는 뭉텅이로 움직이는 그것이 죄없는  것에 되어져 가지고 죄없는 것이 되어 죄없는 것으로 움직여 칭의에 칭의로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칭의에 것이 되어 칭의가 돼 칭의로 나타나는 원수된 우리를  우리대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 중신 하나님 위주에 것이 되어  하나님과 화친으로 하나님과 결합으로 신인 결합으로 신성양성 일위로 신인에  결합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신인 결합으로 값 주고 샀어 신인 결합에 것이 됐어  신인 결합에 것으로 실상은 신인 결합에 식상에 것으로 이루어져 신인 결합에  것이 움직여 이걸 나타내, 이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 빛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비칠 때 피조물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피조물이 깨끗해집니다.

피조물이 생명을 얻습니다. 피조물이 평강을 얻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끊어졌던 그 모든 것이 연결이 되어 통해집니다.

요셉이 애굽에 그 보디발집에 갔을 때에 하나님의 빛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집에 요셉이를 통해서 크게 비쳐졌습니다. 그를 통해서 애굽  전국에 미쳐졌습니다. 그것이 환하게 비칩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뭘로 되느냐 구속으로  됩니다. 사죄, 칭의, 새생명 이 세 가지로 됩니다.

이 세 가지 것인 줄을 인식하고 이 세 가지 것이 되어지고 이 세 가지 것으로  나타내 사는 그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끝이 없어. 사죄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그 종류가 어떠한지, 사죄의 종류를 죽는 날까지 알아도  몰라. 백가지 사죄했는지, 만가지 사죄했는지, 억 만가지 사죄했는지 그 질이  어느 정도의 도수가 높은지 그 도수를 다 아는 자가 없어.

그것이 어디까지 관련이 되어서 낭파가 되었던 것을 해결지웠는지 그것이  어디까지 뿌리깊게 낭파를 지었고 저주와 사망을 시켰는데 그것 어디까지 들어가  사는지 그것을 몰라, 천 층 만 층이라.

백 명이 있으면 백 명이 거기서 아는 것이 달라. 사죄의 넓이와 깊이와 그의  강도를 아는 것이 달라 평생 이것이 우리의 전공이라 이것이 전업이요. 여기서만  인간이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인데, 이것 떠나면 하지도 아니하니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하니까 그 마음은 허망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생명 줄기는 그것이요, 이래서 요한 계시록22장에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성전 문 지방에서 그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고 난 다음에는 성전은 헐어졌고 그 뒤에 짓는  성전은 그것은 아닙니다.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짓겠다 그 말은 그 성전이 예수님의 몸의 모형이라 그  말이요. 이 성전을 지으면 제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이렇게 46년이나 들어서  지은 성전을 제가 사흘만에 지어, 참람된 소리라 그들이 몰라 그렇지 예수님은  말을 바른 말했습니다.

에덴동산, 성막,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모형한 것이요. 구속을 모형한 것이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 그 넓이와 깊이와 끝이  없어이러니까 항상 사죄의 것이 된 것을 연구해도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사죄의 것이 또 더 되어야 되겠고 더 되어야 되겠고 사죄의 것이 더  되고 더되고 더되고 무한히 더 돼 사죄의 것으로 나타나는데 나타남이 커지고  커지고 무한히 영원히 커져 이것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도 아니하면 감사치도 아니한다. 감사하다니, 이 구속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구속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 분이 얼마나 큰 분이신데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데 얼마나 지능이 있는 분이신데 얼마나 부자인데 얼마나 높은데 그 분의  높으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알 자가 없어.

그 자에 그 분의 높음이 무한해. 그 분 크심이 무한해. 부요함이 무한해. 그  분이 어떤 분이신 것을 특별계시 성경으로 알고 내재한 영감을 점점 알아가고  거기에 도달치 못한 어릴 때는 만물을 보아 알아.

 저희 안에 보이는데 제 성질에 인간이 제가 해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빼들라  하면은 분해서 못 견디는 그것이 예를 들면은 하나님 아는 것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아닌데 제가 조금 거들기만 거들었지,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는데도 제가 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빼들면 시비를 하고 저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하나님의 것을 막 빼들어 놓고도 하나님에게 대해서 범죄한 줄을,  불한당 노릇한 줄로 알지 않아, 그것 하나님은 알 것 다 압니다.

이러기에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네가 나를 대접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네가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이냐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이요, 선지자에 선지자니라.

만물을 보아서 자기가 만물을 볼 때에 아주 아름답다. 그것을 지으신 분이  주님이시오. 그것도 주님의 것이요 아! 이는 참 소련은 무섭다. 미국은 크다  무섭다. ○○○이 무섭다. 그것을 지으신 분이 주심이시오.

그것보다 더 무서운 분이시오. 큰 것을 보느냐, 그 보다 더 크신 분이 그것을  만드신 엿새동안에 만드신 분이라 영계는 더 커, 만경창파를 향하면서 산더미  같은 물결 보고서 그 수심이 무한하데 제까짓 것이 빠지면 그 뭣이 알것이요.

고기가 집어 삼켜 버리고 말지. 그것 무섭고 위험스러움을 네가 보느냐 그것을  지으신 분이 주님이시라.

주님은 그것보다 무한히 위험스러워 만물을 보아 저를 알찌니 이런 분이 이런  분이 나를 생각 했다니. 이런 분이 나를 생각했다니 이런 분이 나를 당신의  기업으로 삼다니 이런 분이 나를 사랑하다니 이런 분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다니 이 분의 구속을 아무도 몰라. 암만 알려고 해도 너무 거리 멀어서  일국의 대통령이 왕이 좀 높은 사람이 나를 안다해도 참 이것 감격할 일인데 이  분이그러기에 성신의 감동이 아니고는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감동이  온 것만큼 여기 대해서 압니다.

그 분에 크심도 위대하심도 무한하심도 그 분에 사랑도 그 분이 날 위해서  희생하심도 그 분이 희생해서 이렇게 구속해놓은 사죄롸 칭의와 이 구속을 주신  구속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도 구속받은 나의 이 소망도, 소망에 지극히 크심도  우리에게 소망이 지극히 큼을 알게 한다 말이요.

이 면에 평생해도 모자라, 이 면의 감격이 평생해도 모자라는데 이 감사를  버렸다 그 말이요.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니까 그에 마음이 허망해집니다.

허망해진다는 말은 본 지위에서 타락한 그 천한 짐승과 같이 된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 가지고 그 제가 생각하고 아는 그것을 옳다고 써 먹을라 합니다. 또  그것을 남에게 말을 해 줍니다.

 어리석게도 저도 죽고 남도 죽이는 그것이 허망이요. 그러니까 그것이 미련해.

이제는 둔해진데다가 교만과 욕심이 한테 겸한 것을 가르쳤어 미련이라  말합니다.

미련은 어리석음, 욕심, 교만, 둔함, 고집, 억지, 욕심 그것을 내포한 것을  가르쳐서 미련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이제는 제  욕심대로 합니다.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버려 둡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

인간이 성도의 가치 하나님의 사는 것, 하나님처럼 하나님같이 사는 것이 성도의  생애인데 천하게 사는 것, 가치 없습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돌아가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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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년 1공과 선지자 2016.01.02
55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 12. 8.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6.01.02
554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출애굽기 12장 14절/ 1979. 11. 20.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53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갈라디아서 6장 1절-10절/ 1984년 5월 12일 토새벽 선지자 2016.01.02
55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 시편 91편 14절-16절/ 1988. 3. 10.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551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편/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 1988. 8. 11. 목후집회 선지자 2016.01.02
550 하나님을 사모하고 명령순종/ 창세기 2장 15절-17절/ 1987. 5. 3.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549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시편 91장 14절-16절/ 1980. 11. 5.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48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라/ 골로새서 1장 10절-17절/ 1975. 9. 28. 제 39과 선지자 2016.01.02
547 하나님을 아는 증표/ 시편 91편14절-16절/ 1988. 8. 5.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46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25절/ 1980. 10. 11. 토새벽 선지자 2016.01.02
545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18절-25절/ 1980. 10. 10.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44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27절/ 1980. 10. 9.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543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7절-25절/ 1980. 10. 8.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42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19절/ 1980. 10. 6.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41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25절/ 1980. 10. 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40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25절/ 1980. 10. 5.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21절-23절/ 1980년 10월 10일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38 하나님을 아는 지식/ 로마서 1장 18절-23절/ 1980년 41공과 선지자 2016.01.02
537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장 18절/ 1977년 40공과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