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2 15:32
하나님을 아는 지식
본문 : 로마서 1장 18절-19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면 그것으로 다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아무것도 방해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자들과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택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고.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시고 버린 자들입니다. 택함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택한 자를 위해서 이용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겉은 보기에 꼭 같은 사람같지만 이는 하나는 산 자요. 하나는 죽은 자요.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데에 이용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면 그는 어짜든지 천국입니다. 그의 행위가 어짜든지 그의 사람이 어짜든지 그는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자가 가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안한 자는 어떻게 해서도 천국갈 그런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기뻐하시는 것인데 기뻐하신다는 그런 무슨 이유가 그런 무슨 요소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를 하나 만들어 보려하는 하나님의 작정해서 기뻐하시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없을 때에 하나님이 당신이 기뻐하셔서 기뻐하시는 그런 자를 목적을 정하신 목적안에서 우리가 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택한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요 불택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자들인데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 독단이 하신 것이지.
우리에게 요소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 순전히 은혜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중에 하나님 께서 기뻐하시는 자 있고 기뻐하시는 행위가 있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행위가 있습니다. 불택자들은 불택으로 인해서 이 기뻐하심이 들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다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 행위는 전체가 다 불의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어떻게 한다 해도 불의 아닌 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의라. 진리를 막는다. 경건치 아니하다 하는 이것은 불택자를 두고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앞에 택함을 입은 자 가운데서 이렇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경건치 않는 자 있고 또 불의한 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말은 곧 멸하신다 그 말입니다. 진노하신다 말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가 좀 못마땅하면 이렇게 성내고 하니까 그런 것 같이 이래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노를 푼다 그 말은 그 멸망을 자기가 회개해서 사유함을 받는다 그 말입니다. 우리 택한 자들이 이 진노받은 것은 그는 벌써 멸망했습니다. 그 진노 받은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과 앞으로도 막혀가지고 있는 그것을 키우는 것이지. 진노가 되면 그것은 다시는 살리내지는 못합니다.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멸망받았습니다. 멸망받았는데 그 멸망받은 그 멸망으로 인해서 앞으로 하나님과 막혀있고 가리워 있는 이미 진노케한 그것은 멸망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앞으로도 가리워져 있는 이것을 치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올 수 없는고로 가리워져 가지고 있는 것을 치우는 것이 하나님의 노를 푸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은 그 죄를 범한 그것은 멸망받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구원 못합니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멸망을 받았는데 멸망받을 뿐만 아니라 멸망받은 멸망받게 된 그 원인이 하나님과 나와의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이미 멸망은 받았지만 가리워져 가지고 있는 그것을 용서받아서 튀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를 주께 고하면 사함받는다 그 말은 멸망받은 것. 멸망받지 않는다 그 말 아닙니다.
멸망은 이미 받았습니다. 죄범한 그것은 멸망받았습니다. 범할 그 때에 당장 그 시에 멸망받은 것입니다. 영생할 것이 멸망을 받았는데 멸망을 받았지만 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 사이가 가리워져 있는 이것을 멸망을 받았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은 하나님에게 고해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안하겠다고 하나님에게 고해서 예수님의 대형으로 사죄를 받을 때에 하나님과 가리워진 것이 치워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범죄의 것을 죄값은 멸망의 것이기 때문에 죄값으로 멸망을 시켰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노여워 하심을 풀지 안하고 있는데 우리가 멸망받은 그것을 당연할 줄 알고 하나님에게 자복을 해서 멸망받을 그런 죄를 범한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으면 멸망받은 것이 살아난다는 말이 아니요. 멸망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서 앞으로 계속 멸망받을 것이 하나님과 가리워진 것이 튀어져서 하나님의 노를 푼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하면 그것은 이미 진노받게 된 그 사건, 그것이 관련된 것은 멸망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가리워져 버립니다.
은혜가 가리워지니까 이미 죄지은 그것은 멸망받았기 때문에 그것이야 더 좋을리야 더 좋을 것도 없고 그만입니다. 이미 죄 지은 그것은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뭐 하나님에게 고하나 안 고하나 그것은 멸망은 변동없는 것입니다. 멸망은 받았습니다. 멸망은 받았지만 그것은 멸망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멸망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멸망을 인해서 하나님이 은혜의 얼굴을 돌리시고 하나님께서 그 진노한 진노하신 그런 행위를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안면을 돌리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멸망받았지만 그것을 하나님앞에 잘못된 것을 고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시킨다는 것은 멸망시킨 것 살린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외면하셨던 그 외면을 하나님이 다시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멸망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 아니고 멸망을 받은 그 하나님의 노여워 하심을 인해서 계속 은혜가 끊어져 버립니다. 축복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멸망을 받은 것은 지당해서 멸망을 받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멸망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가 가로막힌 이것을 인해서 하나님앞에 멸망케 된 그 행위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노엽게 분하게 한 그것을 우리가 잘못된 줄 알고 돌이켜 회개를 해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잘못을 사유해 주시고 은혜를 다시 베푸십니다. 사유해준다 그 말은 그것에 대한 보응을 안 준다는 말이 아니고 보응은 이미 받았는데 앞으로 계속 그로 인해서 멸망받을 그것이 하나님앞에 용서가 되서 돌이켜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안채든지 교회든지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으면 그는 멸망과 계속 은혜가 끊어지는 이 두 가지 문제가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짓지 안하면 제가 아무리 골빠지게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몰라서 농사짓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제 힘으로 농사를 짓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실은 농사짓는 그것에 사람이 하는 그 인권으로 하는 그것은 극히 소양입니다. 적은 양입니다. 그것이 뭐 백분지 일이 될련지 넓게 말하면 천분에 일도 안됩니다.
사람이 심고 가꾸고 거두는 그것이 다인줄 알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요.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자 땅이 당신의 땅인데 땅을 당신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억억만명이 심고 가꾸고 거두는 노력을 한다고 해서 하나나 있어질 수 있겠습니까 햇빛을 안 주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값이 없어. 또 하나님께서 수분을 안 주면 공기를 안 주면 그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그 모든 역사를 당신이 하지 않으시면 무엇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사람이 하는 부분은 극히 소부분입니다. 또 사람들이 마치 그와 같소. 저 원양어업에 가가지고 어부들이 고기를 잡을 때에 많이 잡고 적게 잡으면 많이 잡은 자는 제가 수단 있고 제가 기술있고 능해서 많이 잡은 줄로 알고 있고 다 제고기로 알고 있습니다.잡은 것은 누가 뭐래도 제 고기로 알고 있소. 그러나 요새는 보면은 바다에 주인이 있어가지고서 그 바다에서 주인이 못잡게 하면 쫒겨나야 된다 말이요. 또 바다 주인이라는 해역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그 나라에 경계안에 있으면 저것인 줄 알지만 뭐 그것이 제 것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셨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배양을 시켜가지고 몇 해나 길러 놓은 것을 인간들은 공짜로 먹는 것 뿐이요 그러면 시장에 고기 값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길러놓은 것을 자기에게 까지 갖다주는 그런 모든 운반에 수고비를 주는 것이지. 고기 값을 내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요.
이와 같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부분이 많고 인간이 하는 부분이 적은데 하나님이 노여워하신 이 노를 풀지 않고 하나님 노여워하신 이 노를 풀지 않고 자기가 사는 사람은 골만 빠집니다. 그겆 이렇건 저렇건 근근히 먹고 살기는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축복은 없습니다. 또 자기가 성공을 다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노를 풀지 않으면 매우 하나님이 노여워 해놓으면 그가 일생동안 한 번 아쿠 이것 하나님이 노여워 하신다. 이 하나님이 섭섭하시니 이것 낭파다 이런 생각도 한 번 가지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형통, 형통으로 죽는 날까지 형통해서 자기 행위를 반성할 기회를 한 번도 가지지를 못하고 회개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그대로 멸망을 받고 맙니다. 이러니까 제일 불행스러운 택자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제일 불행스러운 택자는 그가 하나님이 진노하실 그런 일을 하되 눈에 보이는 것에 멸망이 오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가지 때문에 축복받고 형통할 줄 알았는데 가 보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전생애가 멸망 뿐입니다. 그것이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이요.
그 다음으로 그 보다 조금 나은 불행스러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나님의 진노할 일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지 않으니까 저 혼자 골 빠지게만 했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죽자껏 해 봤자 항상 제 마음에는 둘을 거두리라 했는데 하나밖에는 못 거두고 열을 거두리라 했는데 하나밖에는 못 거두고 자기 목적과 개혁이 그대로가 아니고 항상 미달입니다. 안됩니다.
그것이 두번째 불행한 자요. 그 보다 더 나은 자는 진노를 끼쳤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에게 내서 은혜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므로 징계가 있습니다. 징계가 있어서 이러니까 은혜가 막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칩니다. 어떤 때는 제일 처음은 자기의 사업을 자기의 활동하는 활동을 치고 그 다음에는 그래도 안 들으면 이미 활동해가지고 모아놓은 것을 치고 모아놓은 것을 치고 그래도 안들으면 이 사람은 몸을 칩니다. 몸을 치요. 몸을 쳐도 안 되면 그 사람은 이제 자기의 소속한 것들을 한꺼번에 칩니다. 이것이 그 다음으로 행복된 사람입니다. 이제 까지 한 그것 중에는 불행중에 제일 적게 불행한 사람. 제일 작게 불행한 사람. 제일 작게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자기가 돌이켜 회개해서 진노한 그것은 멸망을 받았지만 멸망받은 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그 멸망을 시킬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노여워하고 섭섭한지 멸망한 것으로 하나님이 다 푸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으로 다 푸는 것 아니고 우리도 보면은 자식이 나쁜 일 했을 때에 채찍을 깔렸으면 채찍 깔린 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채찍 깔린 그것은 분해서 채찍을 깔렸으면 이것은 매맞을 만한 일릉 했어 매맞았으면 매맞은 이것으로 다입니까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요. 매 때린 그것이 하나님이 분해서 때렸기 때문에 매 때린 그것이 다가 아니고 매를 맞고 난 다음에 그 아이가 참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잘못된 것을 용서를 구할 때에 그 부모는 노가 풀리고 또 그가 잘못된 것을 고쳐 행위를 할 때에 노가 풀릴 뿐만 아니라 매 때린 것이 마음에 아프고 원통하고 배나 그에게 대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소.
사람의 마음을 누가 지었느냐?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자기안에 있는 것 가지고서 알 수 있다 그 말이요. 저희안에 하나님이 알려 줬고. 또 알만한 것이 자기안에 있다 했소. 어제 말씀에 자기안에 있다는 그것은 하나님 모양으로 하나님 모형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이렇게 하는데 자기로서 벌써 알도록 되어 있다 그 말이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일을 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그 노를 푸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노를 풀고 고치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노여운 일을 해가지고서 멸망을 받은 그것까지도 원통해서 멸망시킨 그것은 어쩔 수 없지만 멸망시킨 그것을 보충을 해서 배나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가지고서 과거에 손해 본 그것을 다시 이 회복을 하도록 손해 본 그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보충할 수 있도록 뒤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노여워 하실 일을 제가 해놓고는 참 암만 골빠져야 헛일 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잘되도 헛 일. 못되어도 헛 일. 헛 일입니다. 보면 우리 교회도 이 세상사람이 볼 때에는 참 그 사람을 묘한 사람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하는 이런 사람들이면서도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은 그 사람이 중단하지않고 계속해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해서 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해서 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 대해서 하는 그 일도 좋지만 인간 대해서 하는 그 일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된다든지 인간 대해서 그것이 잘못한 그것이 하나님에게 노여움이 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잘못하면 하나님이 근심꺼리는 됩니다. 하나님이 근심이 되어서 그것을 깨우치기는 하지만 노여워 해서 착 멸망시키지는 아니하십니다. 또 인간에게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축복하시거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노여워 하시는 이 일을 꼭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지 그것을 바로 알지 안하면 안 됩니다. 보면 그 한 사람이 들어서 대개 하나님을 노여워 하는 노여워 하는 자. 하나님이 노여워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하는자는 그 사람이 저 단독이 하는 것이 아니고 악령이 그 사람을 붙들고 그 일을 하기 때문에 악령적인 수단과 방편이 능합니다. 그렇지 않던 사람들도 악령이 붙들면 악령적인 그런 요소가 풍부하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그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을 잘 사귈 수 있고 좋게 할 수 있고 믿는 사람도 신앙면이 아닌 신앙면이 아닌 하나님에게 관련된 면이 아닌 인간면인 인본에 면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만나면 꿀 같이 사귀는 것이 사람입니다. 꿀 같이 사귀는 것이 달고 재미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동무가 많이 따릅니다. 친구가 많이 따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에게 친구 좋고 재미있고 정이 들고 이래서 사귀는 것이지 자기 망할려고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도 모르게 슬슬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사람으로 변화되 나갑니다. 그 이럴때에 그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나니까 재미는 있고 참 좋기는 좋은데 어쩐지 그 뒤가 재미가 없다. 만나고 나면은 하나님과 무엇인가 기도하려하면 멀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진리는 멀어지고 무엇이 가리워지고 참 재미는 있기는 있는데 서순옥씨 오늘 아침 말씀이 서순옥씨에게 해당된 말이야. 그런데 좋을지. 마귀가 자게 하거든 그까짓것 묘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 보면 막 욕을 얻어 먹고 지끌거리는데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있습니다. 인간에게 욕을 얻어 먹는 자인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있소.
인간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고 참 그 사람은 칭찬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진노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것 알아야 되요. 지혜있는 사람은 이 사람을 만나니까 재미는 있기는 있는데 어쩐지 그만 그 사람 만나가지고 한 시간 두 시간 있다가는 하나님께 기도할라하니까 무엇이 깜깜해지고 그 사람하고 갔다가 하루 동안이나 이래 있다가 보니까 그만 하나님의 인도가 감감하고 무엇이 그만 무엇인지 몰라지고 어쩐지 어두워진다. 이 사람하고 접하고 나니까 어두워진다 하는 이것을 깨닫습니다. 이러니까 이상하다 이러니까 그 이 사람을 접하고 보니 세상 일에는 환하게 밝아지고 뭐 이래 되지는데 하나님과 이상하게도 어두워진다. 이 뭐인고 보자 자기가 이것을 살핍니다. 살펴가지고 처음에 그 마음을 딱 가지고 하나님 한테 단단히 달라 붙어서 광명을 가지고 그 사람을 가서 접합니다. 접해 보니까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태도가 전부 그것이 하나님과 밀접해 있는 그것을 서서히 인정과 바꿉니다. 인정과 바꾸요.
인정과 바꾸고 진리를 인정과 바꾸고 진리는 나타나지 않고 인정이 나타납니다.
또 하늘나라의 심판은 나타나지는 않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점점 나타납니다. 보니까 만나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인간끼리 재미있는 그 일이 자꾸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 이것이구나 막바로 이것이구나 이것이 인본주의 이것이 참 악령의 그 놈의 술책이구나 이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면 이 사람을 내가 살려야 되겠다 해서 이제 만나가지고 속으로 힘을 딱 가지고 그 사람을 기뻐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내가 같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는 그것에다가 하나님의 관련된 것을 말을 해야 합니다. 말하면 그만 그렇게 재미있던 사람이 퍅 삼켜져 버립니다. 그만 재미가 없어서 쑥 떨어지고 이 사람이 가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사람을 피합니다. 피하면 따라 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이래서 이 사람이 이 사람에게 가니까 이것 그 명예 손해가 가는데 이것 내 안 가야지 안 가야지 해도 밥만 먹고 나면 이 밥이 그리 끌러 가는 것을 어짭니까 안 간다 하는데 속에서 재미를 누린 그 놈이 재미를 누린 그 놈이 자꾸 가고 싶습니다. 자꾸 만나고 싶고 가고 싶고 또 만나면 한 판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도 돌아서기가 참 힘이 드는데 이것을 얼 모르고 그가 거기서 돌아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니 재미가 없어도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사람있고 또 재미가 있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사람 그 사람은 능한 사람입니다. 수술을 잘하는 능한 의사요. 또 그 사람을 만나니까 세상에 속한 것도 재미가 있어서 슬슬 그것을 살리는 것 같으면서 그것을 죽여버리고 없애버리고 하늘의 것으로 바꾸는 이 사람이 성자요. 그 사람이 성자요. 이런 참 같이 세상 재미가 있는데 슬슬 세상 것은 자기도 모르게 순서적으로 차차차차 죽어들어오고 말라들어 오고 하나님에게로 이렇게 변화되고 성화되서 살 여러분이 좀 깊이 생각하고 들어야지 그것을 말을 해도 모릅니다. 봐도 몰라. 그 사람은 대개 새벽기도에 맛있게 못 나옵니다. 안 나오고는 견딜 수 없어 인간이 실수할 수 있지만 안 나오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것이 없어. 또 나올 때 힘이 있어 나오고 어떤 때는 억지로 나오고 어떤 사람은 죽었다. 살았다. 그래 그 사람은 나쁜 사람 하나 만나면 죽어버리고 이것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주님을 노엽게 하는 자인데 얼마동안 지나가면 하나님이 버려두사 버려두사 버려둬 버리요. 버려두면 그 다음에는 이제는 뭐 가림없이 제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다하고 싶습니다. 평상소원이 제 욕심이요. 하나 뿐이 아니라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이 놈이 좋을 터인데 그것은 욕심을 뽑아버릴 때 자기에게 자유가 온다는 것. 평강이 온다는 것. 욕심을 뽑아 버렸을 때 자기에게 자유가 오고 평강이 오고 생활이 간추러지고 한군도로 주력을 할 때 주력이 되어지고 하는 그것은 하나씩 둘씩 정리해 본 사람이라야 되지지. 욕심이 인간. 인간에 힘을 다 성도의 힘을 없게 하는 그것은 욕심 그 놈입니다. 그 놈이 들어서 성도의 힘을 다 없애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거운 짐입니다. 그것만 벗어버리면 나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가서 연구를 하십시오. 불의로 진리를 막는 그 경건치 않는 것. 그러면 경건치 않는 것이 무엇이며 불의가 무엇인지 경건치 아니한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경건에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경건을 없애는 것, 경건치 않는 불의에는 머물면 죽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돌아갑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 해결이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잘 되어야 모든 것이 잘되니 그것이 잘되면 헛 일입니다. 헛 일 안합니다. 그것이 잘되면 헛 일을 안해요. 자기는 모르는데 주님은 알고 있어요.
이러니까 그 사람 본인도 그 사람 계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뭘하는지 강제로 시키니까 해서 복이된다 이것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바른관계있는 사람은 제 지식이 도달치 못한 것은 당신의 지식으로 이끌어 당신을 참되다는 그것을 전적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할려는 자에게는 그러니까 생각이 바로 되어지지. 욕심이 바로 되어지지. 또 견해가 바로 되어지지. 희로애락이 바로 되어지지.
이러니까 하는 일이야 절로 바로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 청년들 가운데도 불쌍한 청년들 많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가운데에 불쌍한 청년들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지금 재미가 꿀 같고 지금 덜석거리지만 참 불쌍하고 그것 가지고 반감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강단에서만 말하지 개인적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네가 지금 멸망 가운데에 들어있다 그 말 못한 말이요. 골만 빠져야 헛 일입니다. 암만 해봐야 헛 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 자유로이 돌아갑시다. 청년들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재미가 있어야 되지. 여러분들로 동무들로 재미있는 그것 다 죽어. 멸망이라. 좋은 것 하나도 없어 그래 서부교회를 다른 사람 말하기를 서부교회는 사랑이 없다. 없다는 그 말은 인간끼리 재미있는 그 인정이 없다 그 말입니다. 없는 것이 좋소. 그것이 진리입니다. 전부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는데 있기는 뭐가 있겠소. 여러분들이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그것이 항상 사망만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 구역장이 잘 믿을 것이요. 장로보다 구역장들이 잘 믿습니다. 다가 아니고 원구역장 그 분들은 장로보다 그 사람들의 신앙이 위에 있습니다. 있는데 그 원구역장. 여 원구역장들 그 분들을 내가 가르칠 때에 너희끼리 만나지 말아라.
이러니까 만나지 말아라. 너희끼리는 너희가 내게 속한 양 떼를 만나면 양 떼에게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양떼를 그만 너희도 은혜를 받지만 너희끼리 만나면 너희가 너희가 살릴 힘은 없다. 너희끼리 만나면 죽이는 것 뿐이지.
소용없다. 만나지 말아라. 이럴때에 내가 말하는 것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항거했소. 이 사람들 다 항거했소. 이말출, 김현찬, 김효순, 박정자 다 항거했습니다. 다 그것이 항거한 사람들이요.
이러니까 나 모르게 저희끼리 슬금슬금 만납니다. 나 모르게 네 이러다가 이제는 차차차차 그것 알고 보니 이제는 그것에 만나서는 수입도 없고 그것이 만날 시간 없이 하나님이 만나라 하는데 그것이 만나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마구 그것에만 기울이는 이 사람에게 지고 난 다음에 지금은 과연 우리끼리 만나는 그것이 유익이 없었다 하는 것은 알고 또 자고 깨있지 않으면 또 그것이 만나면 지금은 만나라 이랍니다. 만나도 관계없다. 이제 되었기 때문에 만나라 하지만 만나면 만나가지고 재미있는 그것에 만나가지고 있는 재미 이 재미에서 예수 잊어버릴려 하는 그 깸이 없으니까 재미가 막 무한정이라. 재미가 막 끝이 없이 이래 되 버립니다. 그것을 가지는 사람은 재미가 있다가 딱 끊어져 버리다가 재미가 있다가 딱 끊어져 버리고 그 재미가 마음놓고 꽉 나가지를 못합니다.
이러니까 얼마든지 좋아하고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기쁘게 좋게 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은 만나야 재미가 없소. 만나야 재미가 없어. 만나야 재미가 없어. 재미 없으니 나쁜 것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보면 인간끼리 재미있는 그 일이 이제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말이요. 그 저희끼리 재미있다가 그 사람이 하나 들어오면 그만 그 재미가 무떡해지고 채소에 서리가 오는 것처럼 그 재미가 쑥 없어져 버립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산 사람이요. 이러기 때문에 정과 욕심을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야 되집니다. 인간 저희끼리 만나 재미있는 그것은 전부 죽음 밖에 안 나와. 우리는 인간 재미를 보지 못하게 했소. 하나님과 자기만 재미있고 하나님과 재미있는 사람이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이 마주보고 또 하나님과 마주 본 사람이 둘 있으면 옆구리로 만나요. 알겠소. 인간과 인간끼리는 옆구리하고 만나서 사귀고 하나님과는 대면해도 안면하고 안면하고 둘이 마주 보고서 사귑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귐이요. 이러니까 안 통한다 말은 그 사람하고 사귀는 것 아니고 하나님하고 사귀니까 내가 하나님하고 한 자가 먼 자리에 있으면 한자 먼자리에 있는 그 사람은 내 옆구리에 대이요 한자 먼 자리에 먼 나에게는 다섯치 먼 그 사람은 내기에 대이지 않습니다.
내게 대이지 안해. 나보다 초월해 있어. 탁월해 있어. 이러니까 내가 그에게 대해서는 모든 것, 배울 것, 들을 것, 본 받을 것 밖에 없어. 유가 안 돼.
한 자 반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은 내 뒤에 떨어져있어 또 나하고 만나지 안해. 이러니까 어느 정도 이 사람과 나와는 가깝다. 이 사람과 나와는 멀다. 이 사람은 아주 가깝다. 나와 꼭 같다. 여러분들이 그것으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그 사귐에 거리로 인해서 그와 나와에 이제 가까워지는 그것이 성도에 사귐이지. 하나님하고 사귈게 아니라 하나님 떼놓을 때 하나님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떼놓고 아주 단둘이 이래서 사귀지는 이것은 성도의 사귐이 아닙니다. 성도는 성도와 성도끼리는 옆으로 사귀십시오. 옆구리로 사귀십시오.
옆구리로 옆으로 사귀고 성도는 하나님과만 마주보고 사귀지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영원한 상관입니다. 뭐 온전한 것 아니라 그것은 뭐 권태날 사람은 권태날란지 몰라도 그것이 영원히 그 생활이요. 권태나지 안해. 그러기에 사람을 삼가라 합니다. 사람을 삼가라. 사람은 그 친구를 따라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