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2 15:25
하나님을 아는 지식
1980. 10. 10. 금야
본문 : 로마서 1장18-25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는 성경중에도 인간에 대해서는 뛰어나게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 자기 안에 어떨 때는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으로 세 사람이 들어 있는 것으로 네 사람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이렇게 일인 속에 이인 삼인 사인 이렇게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구별을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의 하나의 특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18절로 25절까지의 본 말씀 가운데도 저희라고만 말을 했습니다. 네 번이나 저희라는 말씀을 했고 그 다음에 2장에 와 가지고는 너희라고 이렇게 말씀을 해서 이 1장은 불택자에게 한 말씀이라 안 믿는 사람에게 대해서 한 말씀이라.
그렇게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미혹이 여러분들에게 주석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그렇게 되기 쉽기 때문에 그리되면 지금 교훈하는 것이 다 그 사람에게는 헛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불택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택자로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구약에도 내 백성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네 백성이라 이렇게 말씀을 해서 아주 상관없는 것으로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옛사람, 새사람, 속사람, 겉사람 또 자기를 죽이라 이런 말씀은 잘못 깨닫기가 쉽습니다.
18절로부터 25절까지에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의 생활과 안 믿는 사람의 생활, 멸망받을 자의 생활을 하는 이것을 둘로 구별해 가지고 여기에 기록해 놨습니다.
이래서 특히 저희라고 이렇게 한 것은 우리믿는 사람 아닌 저 불택자 이방인에게 대해서 한 말로 그렇게 오인하기 쉽습니다. 택자가 택자의 생활이 아닌 이 생활을 할 때에는 하나님과 원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그것을 나타내서 저희라. 이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딴 식구라 말이요 저희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
믿는 사람이 요한 1서에도 보면 의를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죄를 범하면 즉시 마귀의 자식이 됩니다. 마귀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불택자를 말함이 아니고 택함을 입고 중생된 그 자도 죄를 범할 때에는 그 영 외에 것은 마귀의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 노릇을 합니다. 그러다가 돌이키면 즉시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여게 저희의 생활이 있고, 성도의 생활이 있는데 성도의 생활을 하지 아니하는 순전히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하나님의 앞에 진노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이 아닌, 세상에 속한 자, 불신자, 이방인, 이방인 같은 이런 하나님과 관계도 가지고 또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 행위도 그런 것은 여게 나타내서 저희라 저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잡아서 이 로마서 1장이 이방인에게 말한 것이라.
불택자들에게 한 말씀이라. 타락한 그 자리에서 구속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한 것을 들어서 말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그 해석을 들으면 지금 성경을 배우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다 무효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주해해논 주석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지는 안했습니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증거에 진노하니까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는 진노가 임하지 않아졌는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불택자들에게 관한 타락한 그 자리에 구속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라 그런 것을 변증할지 모르나 2장이하에 보면 택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을 몇 번이든지 거듭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편이 되지 않은 하나님편이 아닌 하나님의 대립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저희, 저희, 너희라고 하지 아니하고 저희라고 이렇게 표백해서 한 것은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대립의 사람이요 원수의 사람이요, 마귀의 자식이요, 멸망받을 자인 것을 여기에 나타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택자로서 멸망받을 자의 행동이 무엇이며, 또 택함을 입고 중생입은 그리스도인의 할 행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게 두 가지로 갈라 놨습니다.
이것을 전체를 체계적으로 하려고 하면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신자의 생활, 불신자의 생활, 하나님의 원수의 생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의 생활 그 두 가지를 갈라 놨기 때문에 그것을 단절적으로 밝혀내려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멸망받을 자의 그 행동을 하면 멸망받을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옵니다. 진노가 오면은 멸망을 받습니다.
택자들도 날마다 멸망이 아니면 구원, 구원이 아니면 멸망입니다. 매일 죽는 것과 사는 것이 이것이 다 이루어 가면서 하루 하루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자에게 오느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은 경건치 아니한 이 행동생활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의 생활은 아닙니다. 경건치 아니한 생활은 행동은 하나님의 원수되는 생활이요 진노받는 생활입니다.
아무리 택자라도 경건치 아니한 이 생활은 행동은 하나님의 원수의 행동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받을 행동이요 생활입니다. 그러면 택자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행동이 경건한 생활이 택자의 생활이요, 경건치 아니한 그 행동과 생활은 택자라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진노받을 행동과 생활입니다.
경건한 그 생활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임하고 경건치 아니한 행동과 생활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이 임합니다.
그러면 경건치 아니한 것이 무엇이며, 경건한 것이 무엇인가 그 위에다가 해석을 해놨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것은 어떤 것이 경건치 아니한 것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그것이 경건치 아니한 것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그 행동이 경건치 아니한 것입니다.
경건한 것은 어떤 것이 경건한 것인가 경건한 것은 진리의 행동이 경건한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불의에 나타난다. 불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불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원수되는 행위요, 멸망받을 행위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행위요 멸망받을 행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불의의 반대로 의롭게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 불의는 어떤 것이 불의인가 불의는 옳지 않은 것이 불의라. 하나님의 진리대로 되지 안한 것이 불의라.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불의는 어떤 것이 불의냐 불의는 예수님의 세 가지 이 구속에 그 재료와 구속된 것 이것이 아닌 것이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예수님의 삼 대 구속과 관련없는 것은 다 불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의가 어떤 것이 불의인가 성도가 자기는 말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자기가 깨달아 자기는 죄인인 것과 또 죄인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대형으로 사죄를 받은 것 이것이 기독자의 의요 진리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우리가 무한한 죄인 되었던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진리입니다.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은 이것이 우리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구속받은 자의 진리요 죄인이 예수님의 대형으로 예수님이 그 죄대로 형벌을 받아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사죄해주신 이것이 우리 진리입니다. 그 외에 수많은 진리가 있지마는서도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진리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거슬렸던 불의의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립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만 해왔던 하나님의 뜻의 반대가 불의인데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던 우리인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했던 자기인 것을 아는 그것이 자기 진리입니다.
이랬는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반대한 그 값을 형으로 받고 반대한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순종으로 의를 입은 이것을 아는 이것이 우리 진리입니다. 불의가 불의에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자기가 된 이것이 우리진리입니다.
이제 4가지 진리 나왔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과 영원히 원수되었던 이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이 우리 진리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원수의 복수를 다 하되 예수님은 우리의 원수된 값을 받으시면서 끝까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법에 만족을 이루어 율법의 온전을 이루어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이 진리요 원수되었던 것이 하나님과 화평에 이 진리를 가지게 된 자기인 이것이 자기에게 대한 진리입니다.
이것일 진리요 이것을 택자들이 떠나면 그것이 불의입니다. 택자들이 이것을 떠나서 이 여섯 가지 진리로 인하여 이 여섯 가지 진리대로 살면 그것이 진리대로 사는 의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불의입니다.
또 이 여섯 가지를 떠나서 제가 소유와 몸과 생명을 하나님께 다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경건입니다. 경건이 아닙니다. 불경건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며, 경건이 무엇인가 불의가 무엇이며 불경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시간 해석을 했습니다. 불경건으로 살면 불의로 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저희입니다. 하나님 진노받을 저희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밝혀서 말합니다. 로마서는 이것이 특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임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경건치 아니함에 임하고 불의에 임합니다. 불의가 무엇이며, 경건치 아니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시간에 해석을 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생활입니다. 우리 택자들이 의의 생활 진리의 생활은 무엇인가 그것을 해석했습니다.
우리의 진리는 여섯 가지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떠나면 제가 어떤 희생을 하고 어떤 충성을 하고 어떤 절제나 봉사를 해도 그것은 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떠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 경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을 입기전 세 가지로 되어있던 세 가지를 가졌던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이 자기에게 대한 진리요 예수님의 구속으로 이 세 가지였던 자기가 무한하신 그 구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 결합이 생명인데 새생명받은 이것을 아는 것이 자기에게 대한 진리를 하는 것이요 이대로 사는 것이 자기진리대로 사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노가 어디서 오는 것을 간단하게 말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떻게 오는 것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느냐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되느냐 하는 그것을 그 다음에 말씀했습니다.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라.
이것을 특별계시를 받은 진리와 영감의 특별계시를 받은 우리들 자기가 특별계시를 계시만 가지고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연계시를 주신 이 자연계시로 가지고 특별계시를 알도록 해줍니다. 여게 말한 것은 자연계시를 말합니다.
자연계시를 말하는 것은 기독자들은 다 특별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받은 자가 자연계시를 참고로 하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 이것이 모든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는 그 자기주관을 말한 것은 자연계시를 말합니다. 자연계시 그것이나 특별계시나 별로이 다를 것이 없는 것을 일치되어 있는 것을 자연계시를 주셔가지고 그것으로 충족한데 충족히 모르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특별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우리가 예수님믿는 유일한 법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법칙으로 신앙의 법칙으로 알고있는 이 신앙법칙을 말하지 않고 자연법칙을 이 자연계시를 들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계시와 자연계시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분명히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며 영영하신 능력이라 말은 영원한 능력이라 그 말은 종으로만 말했는데 횡으로는 옆으로는 무한한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무한한 능력이라 말은 영영한 능력이라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광대하신 그 능력을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셨기 때문에 핑계 못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의 신성이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질, 그 성질이 어떤지, 하나님의 능력과 성질이 어떤지 그 하나님의 성품을 특별계시로 신구약 성경과 영감으로 알 수 있고 또 이 모든 만드신 만물에서 다 알 수 있고 자기 속에 알 수 있다 그 말은 자기 구조에서 알 수 있다. 그 말이요. 제 맘 짚어 남 말하라고 자기성품이 곧 하나님 성품이라 말이요. 너는 요만한 것이라도 미워하면서 네 하나님은 미워할 줄 모르느냐 너는 네가 요렇게 인색하면서 하나님은 인색할 줄 모르느냐 너는 네가 요만한 수고한 것도 네 속에 비판 평가 공평, 공로, 주인, 객, 소유권 이런 것을 네가 그렇게 네 속에 어떻게 된 것을 알지 않느냐 너희 속에 보여 알게 하였느니라. 자기 구조로 알 수 있다 그 말이요, 자기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인간의 성품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핑계 못한다 말이요. 또 만물을 볼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철두철미하신 분이시며 얼마나 공평되시며 얼마나 정확하시면 얼마나 세밀하시며 얼마나 복수심이 강하며 얼마나 보수심이 강하시며 얼마나 마음이 강하시며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강하시며 얼마나 분노가 강하며 얼마나 좋아하는 자를 좋아할 것이며 미워한 자를 미워할 것인가 네가 너를 보아서 알 수 있지 않느냐 만물을 보아 알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이를 보여 주고 있고 인간들의 마음이 이것이 생기고 저렇게 생기고 얼마나 인간이 (마귀요)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찾지는 못하고 한 말이지만 인심이 즉 천심이라 사람의 마음이 곧 하나님 마음이라 그 성경에도 그와 같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면 섭섭하며 어떻게 해 주면 좋으냐 그대로 네가 너 아닌 것에게 하라. 그대로 하나님께 하고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라 그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율법이요 선지자요 모든 것이 이 이치라. 인간에게는( ) 미워할 줄 모르느냐 다른 사람이 네게 하는 것은 네가 딱딱스럽게 똑똑하게 구별해서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싫어 할 것을 싫어하고 불공평할 것을 불공평하고 공평을 공평으로 네게 대해서는 그렇게 정확하게 딱딱하게 알면서 왜 네가 하나님에게는 그와 같이 생각지 않느냐 이것이 자연계시오.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하시고 저렇게 섭리해서 풍년을 주시고 흉년을 주시고 전쟁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까묻혔던 자가 하늘같이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자가 당장에 꺽어져 떨어져 내려오고 이 모든 곳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이 이 자연과 대조하면 딱딱 들어맞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얼마든지 충족히 있어서 깨닫는 데 하나님을 아는 알되 이것은 택자의 옛사람도 알고 새사람도 알고 다 안다 그 말이요.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이것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면 감사하는 이것이 우리 기독자의 본생활입니다. 어떻게 영화롭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았으니까 안 대로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그 분을 환하게 드러내어서 그 분을 환하게 드러내어서 보고 듣고 접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것을 가르쳐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는 그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영화롭게 한다 네가 네 진리를 나타내어서 네가 경건을 나타내어서 그러면 네 진리 생활 네가 하는 경건생활, 다른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경건은 따로 있을지라도 네가 하나님에게 대한 경건은 세 가지라 다시 말하면 여섯 가지라.
그것이 경건이라 그것이 진리라, 이렇게 하면 네 생활, 곧 진리생활, 곧 네 생활 경건생활, 네가 진리 생활하는 그것이 환하게 모든 것에게 빛으로 나타난다.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생활 함이라.
여섯 가지. 자기는 영원히 멸망 받았던 죄인. 영원히 멸망을 받았던 하나님의 대적, 원수, 영원히 멸망 받았던 하나님의 뜻에 대립. 이것을 자기가 구속을, 구속의 이 세 가지 구속을 받기 전 어떠한 자기가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어떤 한 자 된 이것을 행동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제 삼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빛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나님과 결합된 결합의 움직임은 세상의 빛이라.
사람들의 빛이라.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
왜 그 생활하는가 감사해서. 감사하다니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서 보니 자기는 자기의 지식으로 다 할 수 없는 무한한 죄인인데 무한한 불의 잔데 무한한 하나님의 원수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주신 이것이 지극히 크신 어떤 분이 나룰 대형했는지.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나를 대형한 것이 알아지지.
내 집에 먹인 개야 내가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고 내 집에 키우는 닭이야 고아 먹고 싶으면 고아먹고 하지만 소 한 마리 잡아주면 닭 한 마리 잡아주는 것 보다도 낫고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으면 그는 더 크고 그가 어떤 분인지 그 분이 어떤 분이신데 어떤 분이 그 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니 그 분이 어떤 분인데. 만물을 보아 알찌라.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얼마나 위대한 분이며, 그 분이 어디에 일곱 가지의 유한한 분인지. 그의 크심이 무한함을 성경이 말하고, 영감이 알려주고 자연만물들이 알려서 그 분이 얼마나 크며 그 분이 얼마나 높으며, 그 분이 얼마나 능력이 크시며, 그 분이 얼마나 부잔지, 그 분이 만드신 우주 가운데에 조그마한 못대기 한 지역을 맡은 정권자라도 그 정권자가 자기를 기억하고 자기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를 동정하고 자기 위해서 노력한다면은 감사 할 수 있는데, 우리를 구속하신 그 분은 어떤 분인데.
그 분이 지구를 만들고 우주를 만들고 그 안에 만물을 만드셨소, 만물을 보아 그 분을 알 수 있고 성경에서 모르면 만물을 만물에서 모르면 성경을 영감에서 아니 그 분이 무한히 크셔 나로서는 감히 그 분을 바라볼 수가 없소. 그 분과 나와 거리가 억억만만리도 넘어, 이 분이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다니 나를 위해서 그 부요와 모든 소유를 내어놓으시다니 천해지시다니, 이것을 죽는 날까지 연구하고 깨달아 여기에 감격해서 사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이요. 이 사랑 이 크시고 놀래 감격해서 자기의 죄인된 것, 자기가 불의한 것, 하나님과 원수되 것, 어떤 것과 원수되었는데, 왕과 원수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인물과 원수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분과 원수가 됬는데. 어떤 분의 뜻을 거슬렸는데, 어떤 비뚤어진 일을 행했는데 여기에서 주님이 구속해주신 자기 진리 여섯 가지 진리를 평생 연구 해야되고, 그 분의 사람을 평생연구 해야 되고 그 분이 날 위해서 어떤 희생을 하셨으며 나에게 주신 구속이 그 양이 얼만지, 넓이가 얼마인지 가치가 얼마인지, 권세가 얼만지. 효력이 얼마동안 인지 이로 인해서 이 구속을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무엇인지 소망이 어떤 것이지, 이것을 알아 여기에 합당한 생활을 이 자의 생활을, 부족하지만 있는 대로 하려고 하니 그 세상의 빛이 되고 좋은 복음의 소식이 되고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되고 생명과 평강과 구원을 주는 것이 되어지니 화려하고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이 우리 생활인데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이것이 진노 받을 행위입니다. 영화롭게도 하지 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보니 그 다음에는 불의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진리를 막습니다. 경건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생활이 뭐인가 믿는 자의 생활이 뭐인가 우리 생활은 주님께서 특별계시와 자연계시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의 성품은 어떤 분이시며 자기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싫은데 그럼 그 분은 왜 싫지 않을까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하나님의 구속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의 희생을 알고 자기에게 소망의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이 소망을 알고 이로 인해서 감사하고 이로 인해서 이 진리 생활 하니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으니.
영화를 위에 붙인 것은 껍데기에서부터 속에 해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가 없으면 영화를 영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감사가 없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자기가 어떤 자이며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가 됐으며 이 관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결과와 희망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감사치 못하고 감사치 못하면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이 분을 특별계시 성경과 자연계시 이 모든 만물과 네 맘 짚어 남 알아라. 네게 싫거든 너 싫은 것은 남도 싫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우리 구조입니다.
네가 싫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싫어하십니다. 내는 싫으면서 주님은 싫어할 것이 뭐라 주님은 목석이냐
우리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기도 모르고 놀래서 녹아지고 녹아지고 주를 위해서 죽고 죽고 또 죽어도 맘에 원통치 아니하고 그 은혜에 대해서 감히 머리들 수 없는 이것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깨닫지 못할 때에 이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깨달음을 자기가 소멸시킬 수 있는 깨달음을 소멸시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뭐입니까. 그 마음이 이제는 바른 생명줄에 놓쳐 생명줄에 삐뚤어진 삐뚤어져 달아납니다. 그 마음이 허망해집니다.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그 마음이 그 다음에는 미련해지고 어두워집니다.
그리되면 이제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바꿉니다. 이 큰 은혜와 이 큰 은혜와 주님은 그 마귀가 주는 그것이 크고 하나님의 큰 은혜는 보이지 않고 많은 피조물로 더불어 관계 맺어가지고 자기에게 수입이 온다는 것이 유익있다는 것이 그것이 곧 사망인데 그리 돌아갑니다.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토록 있을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베풀어 주셔서 깨달음을 영원토록 감사를 해도 우리는 모자라는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려야될 이 영광스러운 이것을 썩어질 인인관계, 물질관계, 버러지 관계. 요사이는 버러지가 신이 되갑니다.
이러니까 인간들을 벌레가 다 먹어 삼켜 버리고 맙니다.
이는 조물주를 조물주가 지은 피조물 그것만큼 못 여기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크게 여기는 이것으로 종전에 멸망을 받고 있는 이것이 오늘의 현실에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받은 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구속받은 자이지만 하나님과 원수인 대립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며 어떻게 하면 우리 생활을 우리가 바로 하는 것인가. 신자생활이 무엇인가 신자가 어떤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이것에서 간단하게 말씀했는데 그 다음에 내리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미 구속을 받았는데 구속이 흐려지면 자기 진리가 흐려지면 망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흐려지면 망합니다. 이 죄인을 주님이 사죄해 주신 그것을 연구하고 연구해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함을 연구하라 말입니다.
이 구속을 성경에서 깨닫고 만물에서 깨달아 깨닫는 것이 우리 생활이요, 깨닫고 난 다음에는 이 깨달음에서 감격한 것이 우리가 살 위치요 감격하므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섯 가지 진리, 여섯 가지 진리가 우리 사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 곳은 여섯 가지 진리. 이것이 우리 살 곳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방주요, 우리의 구원성입니다. 이 여섯 가지 위치에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생활은 감사와 영화롭게 하는 이것이 우리의 움직임이 이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더러운 정욕대로 내어 버려둔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버리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