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6 12:01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방편
본문 : 요 15:9-1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에 사랑, 주님의 사랑을 말했는데, 사랑은 간단하게 말해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모든 것을 책임지되 자기의 있는 것을 지혜나 능력이나 성품이나 소유나 활동이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책임지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역사할 수 있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적으면 그 양이 적고 많으면 그 양이 많고 그렇지 성질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간의 사랑이나 성질은 같은데 그 사랑의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달라서 참 사랑은 하나님 사랑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좋아해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책임지는 것이 사랑이라. 그러면 사랑이 조금있는 것은 상대방을 조금 좋아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 중에 조그만한 것을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 사랑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무한인데 무한한 사랑이라고 하면 상대방을 무한히 좋아하시고 상대방을 무한히 책임지고 당신의 무한한 것을 다 가지고 상대방을 위하는 그것이 무한한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들이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 말은 아버지가 주님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가지시고 주님을 좋아하셔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책임지시고 역사하신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 유익을 위하는 것, 책임을 지는 것,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희생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양이 크든지 작든지 그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시기는 사랑하시는데 "사랑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셨지만 주님은 그 사랑을 감당치 못했다면 사랑밖에 있는 것인데, 사랑 안에 있는 것이라 말은 그 사랑을 감당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그 책임을 다 입었고, 유익되게 하려는 그 유익을 다 얻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그 좋아하심을 다 갖추어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예수님이 다 받게 된 것을 가리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게 됐다, 아버지가 날 사랑하시는데 내가 사랑 안에 있게 됐다, 내가 너희들을 또 사랑하는데,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데 내 사랑 안에 있으라. 그러면 암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내가 그 사랑을 배반하고 사랑 안에 없으면 불행스러운 것이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그 기쁨은 세상에 속한 기쁨이 아닌데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무궁의 것인데, 그 사랑의 영광은 어떠한가? 그 기쁨의 영광이 어떠한가?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그 기쁨입니다. 자기만 기쁜 게 아니라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기쁨, 또 모든 피조물들이 다 기뻐하는 기쁨, 또 자기도 기뻐하는 기쁨, 어디서나 제한 받지 않는 기쁨을 가리켜서 '주의 기쁨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쁨은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들은 기뻐한다 할지라도 도리어 기뻐하지 않고 싫어하는 그런 면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쁨은 평가적인 기쁨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평가적인 기쁨이요 그 논리적인 기쁨이라. 아무리 논리를 해 봐도 기쁘고 또 모든 것이 그 가치를 따져 봐도 참 모든 것이 환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기쁨. 이것은 산 기쁨이요 온전한 기쁨인데, 사람들이 가진 기쁨은 이것은 저는 기쁘지만은 기쁜 것만치 다른 사람은 싫어합니다. 또 기쁘지만, 어느 장소에서는 기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그 기쁨이 없어집니다. 또 시간도 이 시간은 기뻤지마는 시간이 지나가면 또 기쁨이 없어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평가적인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들 안에 있어 충만하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그 바울이 참 고난받은 걸 말하면 그 유가 없는 그런 고난을 받았지마는 그는 항상 기뻐했습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뻐하라는 것도 그가 옥중에서 옥고를 치르고 고문과 고형을 받는 가운데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모든 구약 선지자들은 보면 기뻐해도 그 기쁨이 변동이 됐습니다. 그 기쁨이 어떨 때에는, 어떤 역경에서라도 기뻐하다가 또 기쁨이 변동됐다가 이랬지마는, 신약교회의 이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 기쁨을 가진 그 기쁨들은 보면 속에서 기쁨이 나왔고 자기 주변에 있는 그 환경에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기쁨이 조금도 요동되지 아니한 그런 영원적인 그런 기쁨을 가졌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선지 성도들의 기쁨과 신약시대의 그 사도 성도들의 기쁨이 좀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은 외부적이고 그 변동적이고 신약에는 내부적이고 아주 변동이 없는 그런 기쁨을 가졌습니다.
'또 아버지께 들은 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다 알리겠다' 그러면 주님이 들으신 것을, 주님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신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알려 주는데 우리 자체 변화에 따라서 그 아는 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안 주셔서 모르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데도 그 자체가 주님이 알려 주시는 것을 어떤 사람은 백분지 일, 어떤 사람은 천분지 일, 어떤 사람은 만분지 일, 어떤 사람은 참 한 100의 99나 100에 80이나 이렇게 많이 아는 사람, 안다는 그것을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고 하니 아버지가 주님에게 무엇을 주실 때에 그 주님이 그것을 받는 것은 뭘로 주셨고 뭘로 받았느냐? 주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을 줬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줬어 영광을 줄 때도 딴 거 주지 않았고 뜻을 줬고, 또 무슨 승리하는 일도 승리를 주신 게 아니라 뜻을 줬고, 또 권능을 주실 때에도 '아나, 이거 권능이다.' 이래 주지 않으시고 권능을 주실 때에도 뜻을 줬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실 때도 그러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도 그러합니다. 돈이면 돈, 권세면 권세, 영광이면 영광, 존귀면 존귀, 그것을 그 자체를 그 실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모두 거기에 대한 뜻을 줬습니다. 요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시면 '아나 돈!' 하면서 돈으로 직접 주시는 게 아니라 그 돈에 대한 뜻을 주십니다. 돈에 대해서 뜻을 주시는데 그 뜻을 자기가 버려 버렸으면 돈을 버린 게 되고 그 뜻을 받아 가지고 행하고 보니까 돈이 돼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주님에게 주실 때에도 모든 것을 뜻으로- 뜻 그게 하나님의 뜻 진리라 말이오- 주셨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뜻으로 주셨고, 그러면 주님이 안 주신는 게 아니라 주시는데 그것을 받아 감당치 아니하고 돈 달라고 해서 돈 주니까 돈 줄 때에 돈으로 척 주니까 이것이 뭐 두말할 것 없이 잘 받겠지만 돈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돈에 대한 뜻을 척 주시니까 '돈 돌라 하니까 뜻 주 던지고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 눈에는 그것이 하나님 거슬리는 하나님의 뜻으로만 보이지만은 그것이 실상은 돈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다 알려 준다' 그말은 아버지에게 받은 그 뜻을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뜻이 주님의 뜻이요 주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행동만 돼 버리면 다 되는데, 이렇게 다 주시지만, 택한 자 곧 중생된 사람이면 다 주시지만 그 사람의 됨에 따라서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은 그 뜻을 받아서 만분의 일은 실상을 얻어 가졌고 나머지기는 전부 버려서 하나도 가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건데, 주님이 주시는 것들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이 주시는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 되는 것, 주님의 그 사랑을 다 받아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다 받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무엇으로 되느냐? 똑똑히 말해 놨습니다.
계명 지키는 것으로 된다 계명 지키는 것으로 된다고. 그러면 계명 지키는 것이면 우리는 또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겠습니다. 계명 지키는 것, 그러면 이 계명 저 계명 계명 지키는 것이라 이러니까 수없는 계명이 있으니, 신구약 성경에 1절로부터 죽 모든 걸 지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모든 선물 이것을 받는 방편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암만 계명을 지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기서 간추려서 요령을 말했습니다. "내 계명은"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라 했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은 뭐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냐?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모든 부요을 내 구원 위해서 다 내어 놓으신 것이 주님이 그 사랑하신 사랑이요, 그렇게 영광스럽고 존귀한 데에서 낮아지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낮아지고 천해지고 희생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신 것이 나를 사랑한 거라.
그래서 "친구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이 사랑의 제일 최고봉이 뭐이냐 하면 자타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는 그것이 생명 바친 것이 사랑의 절정이라, 최고의 사랑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했으니까,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말은 이에 더 큰 계명 지킴이 없다 그 말이오.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말은 이에 더 큰 계명 지킴이 없다 하는 말씀인데 그 계명은 뭐인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다 바친 그것이 계명 지키는 절정이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도, 주의 기쁨을 우리 마음 가운데 가지게 된 것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것을 받아 실상으로 가지게 되는 것도 이것이 참 최고의 우리 목표요 구원인데, 이것을 이루는 방편은 하나뿐이니 계명 지키는 것인데, 계명 지키는 것은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라.
그러면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면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것인가? 생명까지 다 하는 그것이 이제 이 계명 지키는 것의 절정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형제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구원을 위해선 염려하고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고 구원을 위해서 온갖 참 손해도 억울함도 조롱도 오만 걸 다, 별별 것 다 해 가면서라도 기어코라도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그것이,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 노력한 것만침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자기 안에 기쁨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 함으로 주님의 모든 것을 자기가 받아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정반대로 자타의 구원을 손해 보이는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미워서 복수합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그 구원에 방해하는 것, 상대방의 구원을 절단내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복수합니다.
그 복수를 기억했다가 치를 때에 얼마나 하나님이 무섭게 치르느냐?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구원을 방해했다고 마지막에 사울을 시켜 가지고 짐승 한 마리도 생명있는 것은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 했는데 그 왕을 하나 죽이지 않고 짐승 몇 마리 죽이지 않았다고 사울을 그 죄값으로 죽여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복수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고 제 욕심대로, 제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제 소원대로 하기 위해서, 제 명예 제 위신이나 생각해서, 남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명예가 깨져도 위신이 깨져도 오해를 받아도 어떻게 되어도 기어코라도 그걸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다음에 주님을 만날 때에 기뻐하고 환영하고 칭찬하고 상 받는 것은 다 이 구원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노력하는 것은 냉수 한 그릇의 수고라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 대해서 방해한 것은 자기 행동이 방해가 됐다, 자기 욕심대로 한 것이 방해가 됐다, 자기 뜻이 방해가 됐다, 자기의 무엇이 방해가 된 이것은 주님이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다 복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늘 말하기를 중간반 반사들이 저거가 반사가 안 됐으면 저거가 무슨 별쭉나게 특별한 그런 인품이나 인질을 가진 것 아니요 내나 죽는 날까지 헛일하는 그 속에 들었으면 죽는 날까지 돈이나 위해서 살든지 제 욕심이나 위해 살든지 제 주관을 위해 살든지? 어떻게 하면, 장사로 옆의 사람 잘되면 '저 사람 잘되는 것까지 제가 다 취해서 잘 될까?' 모든 사람으로 인해 저 잘되기를 원하는 이거, 사망케 하는 이것만 죽는 날까지 하다가 죽을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자리 세워 놓으니까, 세워 놓으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염려를 해야 되지 구원을 위해서 생각을 해야 되지 구원을 위해서 걸음을 걸어야 되지 구원을 위해서 말을 해야 되지. 이것 참 억지로 복있는 자리에 서게 됐다 그 말이오. 또 반사들도 그러하고, 이러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다 '목회자가 영광이 있으니까 그리 되겠다. 대우를 받으니까 그리 해야 되겠다. 뭐 무엇이 좋으니까 그게 되야 되겠다.' 그것은 내나 목회자지만 절도요 강도요 이리요 삯군이오.
목회자가 참 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쨌든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도 이렇게 '주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원하시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일 하려면 뭘 해야 되느냐?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 주님을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요런 일이겠구나!' 해서 주님을 위하려고 주님을 위하되 월급받고 하는 그것은 월급을 받으니까 월급쟁이와 월급받고 하는 것이 되어지니 월급받지 않고 이제 자비로 하고 하겠다 이래 가지고 사도 바울도 자비랑 가지고 하고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다가 그대로 마쳤지만은 자비로 하는 것보다 오히려 사례, 월급을 받고,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왜? 그것을 받는 것은 거기서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생활을 위해서 무엇 좀 한다는 것, '안 받으니까 내가 생활을 위해서 무엇 좀 해야 되지 않는가?'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 참 재미가 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압니까? 자기가 자기 위해서 하는 일을 버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 아니오.
그러나 유급이 되면 자기 위해서 할 일은 안 해도 되니까 다 버릴 수 있는데 하는 것은 안 해도 되는데 하니까 그건 자기 양심의 거리낌이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주의 일을 하되 자비량 하고 할련다'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에 그것보다 오히려 매이기를 유급에 그 복음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 더 매이고 다른 것이 허비가 없겠다 싶어서 유급의 전도사로 나서서 모두 다 유급의 목회자를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다 깨닫기 때문에 자기 소유를 바치는 것보다도 시간을 바치는 것보다도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 이것이 제일 주님 앞에 갈 때에 그래도 부끄럼이 적겠다 싶어서 자기의 헌신을 하고, 헌신하고 난 다음에라도 그 목숨을 바치기 전에는 다 바치지 못했기 때문에 목숨 바치기를 원해서 순교를 원하는 것이 다 이런 면을 깨닫고 하는 것입니다. 공연히 무슨 영광이나 존귀를 위해서 있는 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니까 주의 계명 지키는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것이요 주의 기쁨이 자기 안에 점점 형성되는 것이요 주님의 주시는 모든 것을 하나씩 둘씩 받아서 실상을 만드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주의 일, 주의 일이 뭐인가? "주의 일을 더욱 힘 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주의 일이 뭐인데? 주의 일은 주님의 피로 구속하신 구속하는 일 하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자기 구원 이루는 일도 주의 일이요 남의 구원을 이루는 일도 주의 일입니다. 구원 이루는 이 일 외에는 할 게 없어. 가치있는 일이 없어.
어제 나는 또 하나 놀란 것은 말이오. 어제 목사님 한 분이 장로님들 하고 같이 이렇게 왔는데, 인천서 그 목사님이 운전을 해 가지고 왔어 보니까 그 운전을 거기서 해 가지고 인천에서 왔으면 상당히, 나는 타고 와도 지금 늘어질 것인데 그렇게 피곤한데도 와 가지고 뭐 교회를 위해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묻고 애터지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어제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하니까 또 저 어디 교인이 부산 하나 와 있는데 그 교인들 집에 온 걸음에 방문을 하고 거기서 식사를 준비해 놔서 가야 된다고. '이분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참 힘을 쓰고 애를 쓰는구나!' 그래 말 들으니까 그 교회도 벌써 2천여명이 된다 하니까, 아마 상당히 그 지방에서는 제일 큰 교회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다 이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직장에서라도 자타의 구원 이루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고, 남의 집에 가정부로 있어도 가정부 사는 생활 그 전체가 다 자타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아! 내가 이것을 이렇게 하다가는 이 주님에게 이 복음을 전해주는 감화를 주지 못하겠다.' 이러니까 하기 싫은 것도, 참기 어려운 것도, 자기가 자기 인기를 위해서 정직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털끝만한 것이라도 부정하게 보이면 '예수 믿는 게 그렇다' 이래서 복음을 가리워질 터이니까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정직도, 부지런한 것도, 참는 것도, 견디는 것도, 자기 할일 감당해서, 또 그들의 마음에 썩 들게 마음에 참 기뻐서 놓지 않을 만큼 하도록 하려 하는 것이 이 복음으로 감동시켜 다문 하나라도 그 복음과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어디서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그 말이오. 이렇게 사는 그 사람이 그것이 주를 위함이오.
주를 위함은 뭐인가? 주님이 죽기까지 하신 그 일을 돕는 것이 주를 위함인 것입니다. 부부간도 남편이 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남편을 좋아하는 것이오. 남편은 좋아하면서 남편의 하는 일은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 해 봐야 됩니다. 또 남편의 좋은 것은 남편의 좋은 것을 그 남편이 남편에게 유익될 것 좋은 것 그거는 생각지 않고 남편만 좋아한다 하는 그거는 창기 같은 것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도 서로 이걸 좀 분석을 해 보면 안다 그거요.
좋아하는 건 뭐인가? 첫째는 남편의 유익을 위해서,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 남편의 권위를 위해서 그러는데 남편 하는 일이 잘 되어야지. 이러니까 남편을 사랑함으로 위해서 남편이 지금 근심하면 같이 근심하게 되고 남편이 원하시면 이렇게 남편이 원하시면 나도 있는 힘을 다해 이 일을 이루어 가야 되겠다는 그것이 남편을 위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거는 뭐이냐? 주님이 제일 평생 소원, 영원 소원이 뭐이냐? 인간 구원이 이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땅에까지 오셔 가지고 죽기까지 하셨다 그 말이오. 이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신 이 일이면 물 불을 가리지 않아. 돈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가리지 않고, 지위나 영광이나 그런 것 가리지 않고 가정도 가리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이 일을 위해서 다 기울이는 그 사람이 이제 얼마 후에는 주님이 다 그것을 갚으셔서 '주를 위해 주를 어떻게 사랑했으며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역사에 어떻게 희생하고 투자했는가?' 하는 그것을 주님이 낱낱이 갚을 때에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잃지 않고 다 갚는다 그 말이오.
그런데 우리 서부교회는 참 복이 없습니다. 복이 없는 게 뭐이냐? 반사들이 지금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지금 육체의 고기덩어리로 망쳤소 지금. 제까짓 게 돈을 가지고 돈을 보고 공부를 가지고 나가면 얼마나 나갈 건데? 공부를 하면 뭘 할 건데? 자기가 천하 지식을 제일 가져서 제일 높은 박사가 돼 가지고 그만 그 지식 가지고 할 것 세상 일 하고 인간 구원에 주력이 되어지지 않은 그것보다는 일자무식이 돼 가지고라도 자기 있는 대로 인간 구원에 일생 주력하다가 가 버렸으면 그 사람 높아집니다.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영광되고 존귀해집니다.
뭐 지식 그까짓 거야 지식을 주님 만드신 것인데 머리만 빽 틀어 버리면 세계에 제일 가는 지식도 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뭐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보면 알지 않습니까? 나면서 명철하게, 선천적으로 명철을 타고 난 사람 있고 날 때에 아주 못 타고 난 사람 있습니다. 못 타고 난 사람이 공부를 많이 했소. 아무리 대대학을 몇개를 했소. 몇개를 해도 타고 날 때에 못난 그거는, 타고 날 때에 명철한 그 놈은 글자 하나도 모르는데 그 공부한 그 사람 말 들어 가면서 결국은 그 지배해 가지고 점령하고 지배합니다. 그 밑에 종노릇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본래 사람 잘난 사람은 모셔 옵니다. 잘난 사람은 멸시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잘난 그것이 후천적으로 많은 수양한 것보다 낫더라 그 말이오. 여러분들 그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공부를 하나도 안해도 천하에 명철하게 타고 난 그것은 말해 보면, 이 공부 암만 해도 바보요 등신입니다.
대학을 해도 등신입니다. 이거는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가만 보니 속에 굉장한 것이 맺혀 있습니다. 들으면 다 기억하지, 들으면 다 이용할 줄 알지.
이러니까 인간이 나고 난 다음에 수양한 것보다 하나님이 혼자 만드신 그것이 높더라 그 말이오. 이것을 봐서 인간이 인간학을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이 직접 많이 주시면 얼마든지 된다 말이오. 공부가 뭐 제일입니까? 어리석게, 공부가 제일 아니오.
저도 공부 조금 뭐 했다 하지만 뭐 그 국민학교 5학년 밖에 안 했어. 그리고 좀 한다고 해도 몇개월 일본 가서 공부한다 해도 얼마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것도 쓰지만 그것은 별로 쓰여지지 않아. 내가 이 살면서 서로 평소에 듣고 보고 접한 그게 전부 완전한 지식이오.
이러니까 논두렁에 지식이 꽉 찼고 들판에 꽉 찼고 시장에 꽉 찼고 길가에 꽉 찼어.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하시면 그만 지혜롭습니다.
우리 믿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연결이 되니까, 하나님은 전지 아니오? 전지에 연결되니까 이게 불학무식이라도 전지에 연결돼 놓으니까, 그 사람이 전지에 연결됐으니까 하나님 전지 지혜가 다 그의 지혜가 되니까 전지자가 된다 그거요.
이것이 신앙 방편 아닙니까? 공부 그거 하면 될 줄 알고, 공부한다고 행복된 것 아니오. 나이가 50된 사람을 간추려 봅니다. 오십 된 사람을 간추려 볼 때에 지식대로 그의 행복이 돼 가지고 있는가 계산 한번 해 보면 압니다. 50된 행복 된 사람으로서 그 지식 다소의 다소 그것이 근거가 되는가? 그게 아니고 지식 다수에는 그 별로이 차이가 없고 그 사람의 차이가 근거돼 있습니다. 그 사람. 암만 지식이 많아도 인간이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암만 지식이 많다고 그 사람이 도덕을 가지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됨에 따라서 사람됨에 따라서 세상 행복이라도 행복의 차이라 하는 그거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됨이라 하는 것은 지식이 사람됨이 되는 것 아니오. 지식 있다고 사람되는 것 아니오. 일자무식이라도 사람 된 사람 있고 지식이 많을수록, 많을수록 많은 것 가지고 사기 협잡, 몹쓸 사람 돼 있는 것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하면 혹 이 공무원이나 관리나 그거나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 공무원 관리 다 행복스럽습니까? 공부원 관리 중에서도 그 좀 착취나 그런 것 하는 사람 외에는 비참합니다. 착취나 하는 사람 그 사람 또 그다음 대를 봐 봐요. 그다음 대를 가 보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그래서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썩어질 것과 바꾼다는 그것이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는다" 주님이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세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망해 들어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믿음이 더 귀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는 그 자체가 전체가 복이요, 생명이요, 평강이요, 든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