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6 12:04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1984. 3. 11. 주일오후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고로 같이 은혜받은 이 은혜를 기억하고 조심있게 해서 이미 깨끗게 해 주심을 받은 깨끗을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잘 보수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말씀하신 대로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던 것을 도로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회개한 죄를 다시 새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가 깨끗게 씻은 이 씻음을 새로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주님이 나 위해서 어떤 어려움과 어떤 손해와 어떤 희생으로 구속해 주신 것을 날마다 좀 생각하고. 더 깊이 깊이 깨달으면 주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고, 주님 위해서 못 당할 것이 없고 못 견딜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어두워서 그렇지 주님의 이 구속하신 이 구원의 지극히 크심과 또 이 구원 이루시기 위해서 큰 힘 들인 이 사실을 깨달으면 아무리 거칠은 세상이라 하지마는서도 세상에서 신앙생활 못할 것 없습니다. 뭐 거리낄 것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쉽게 단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고로 금번 기회에 우리 서부 교회는 많이 깨끗해진 줄 압니다. 하나님과 많이 가까와진 줄 압니다. 이 은혜를 다시 놓치지 말고 굳게 잡고, 날마다 조심해서 이 받은 은혜를 잘 기억하고 지키고 이 은혜 생활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육에 대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달라질 것이고, 또 자신이 알기에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의 이 은혜를 이 세상에게 양보하지 아니하는 한.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착수하시고, 당신이 정하신 그 제도로 우리를 굳게 한 이 일을 절대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려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우리가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을 잊어버려야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지 우리가 잊어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런고로 은혜의 보존을 잘 하도록 노력을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어두운 세상에 속해 가지고 모든 것을 바로 알지를 못하고, 또 바로 안다는 것도 바로 규정을 지우지 못하는 데에서 자꾸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아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안할 때의 그 때의 세상살이의 그 모든 방편이 다 죽는 방편이라는 것을 우리는 많이 배웠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능한 사람이 능하고, 구비하고, 지혜로운 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 생활은 하나도 산 것과 자기에게 유익된 것은 털끝 만큼도 섞여 있지 안하고, 그 전부는 다 죽고 망하는 그것뿐이라는 것도 우리가 성경을 보는 사람은 봤고, 또 들어서 배운 사람은 만이 배운 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하지를 안해야 됩니다.
마치 술이 취하면 사람이 본 정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비판이나 평가나 소원이나 경영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다 삐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말하기를 '술 취하지 말아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뭐 주정이 있는 이 알콜이 섞여 있는 이런 음식에 그 술을 말한 것이 아니고 교훈을 말합니다. 이 세상 사상.
세상 주장. 모든 세상, 무책임해서 그럴 뿐 만 아니라 또 몰라서 저희 자신도 죽고 망하는 것을 몰라서 그게 옳다고 지글거려 놓은 것이 전부 이 세상에 가득 찬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지식은 다 틀린게 아니고, 다 거짓말이 아니고 반 거짓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거짓말이나 그 지식의 왕이 꾀워서 멸망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또 그 목적이 멸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역사의 지식인데 이것이 에덴동산 배암이 들어온 그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오늘까지 계속해서 연장되고, 더 확대해지고, 세밀해지고, 능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이 법칙이 있고, 또 세상이 가르치는 법칙이 있어서 이 두 법칙 사이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어지럽고, 복잡하고, 또 유혹받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어찌 보면 하나님의 법칙이 옳은 것 같고 어찌 보면 세상 법칙이 옳은 것 같고 이래서 하나님의 법칙에 속하면 점점 그 사람은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그러면 세상 법칙에 속하게 되면 점점 어두워지고 더러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말씀하시기를 '더러운 자는 점점 더러워지고 깨끗한자는 점점 깨끗해진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이 말씀도 우리의 그 유혹되는 모든 재세 기간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살이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단정을 지우는 일부분을 말씀한 것을 봉독했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한다' 이 말은 참 마땅히 해야 될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고, 헛된 수고를 한다 하는 그런 뜻을 지금 발표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헛된 수고를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이 말은 '책임을 질래야 지지도 못하는 책임을 진 자들아' 그말입니다. 그 진 것도 헛것, 수고도 헛것, 모든 거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수고가 헛된가 하면 그 수고는 생활 법칙이 다 사망에 속한 그 법칙이기 때문에 짤막한 토막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계산하는 데는 성공이라, 또 이는 참 존영이라. 부강이라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 범위를 조금 넘어서 인간이 사는 것과 죽는 것과 금생과 내새의 그 양면만 포함된 넓은 범위를 두고 맞혀도 계산해도 그 전부는 다 실패입니다. 실패지마는, 사람들은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가 되어서 가깝게 밖에 못 보는 이 근시의 모두 눈이 어두워져서 그 수고하는 것이 마땅히 하는, 해야 될 그런 수고인 줄 알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한 수고가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된 것이 있는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육의 일생 동안의 범위를 두고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사는 것과 그 사람이 죽어 그 심판 앞에는 데까지를 범위로 삼아서 계산을 하면 인간이 땅 위에 수고한 것이 다 헛되고 자기에게는 유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고하고 필요없고 소용없고 자기에게 유익이 없는 그런 수고를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아무리 자기는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지마는서도 건설도 하나님 한 분에게 주권되어 있고 파괴도 하나님 한 분에게 주권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건설한다고 아무리 날뛰어도 하나님의 그 파괴에 속했으면 결과적으로는 파괴되지 건설이 안 됩니다. 아무리 사람 보기에는 파괴 같아도 하나님의 건설에 속했으면 그거는 결과적으로는 건설이 되고 맙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그 파괴와 또 뽑히는 거, 멸망받는 거 이것을 모르고 거기에 속해 가지고서 뭘 건설해 보겠다고, 살아 보겠다고, 존영을 구해 보겠다고 행복을 구해 보겠다고, 자기가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돼 보겠다고 이렇게 날뛰는 그런 일은 주님에게 주권되어 있고, 인간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런 일을 책임집니다. 헛된 짐을 졌다 그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주님께로 오라 그말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들을 참으로 평안히 쉬게 하겠다. 너희들이 헛된 수고, 결과 없는 수고 결과 없는 짐 그런 걸 다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인생을 내실 때에 아주 평안하게 그렇게 살게 한 것이 인생입니다.
에덴동산 타락 전에 사람들이 무슨 계획을 하느라고 머리를 짠 일이 없었고, 또 무엇을 방비하느라고 아무런 노고된 일이 없었고 무엇을 보수한다고 그렇게 견디지 못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단순합니다. 환경. 주위에 피동 되지 말고 하나님 한 분에게만 피동되고 또 자기가 용납지 아니할 것들을 용납지 말고, 용납지 안 할 것을 용납하지 말고, 못 들어오게 용납하지 안할 것을 용납지 말고, 하나님 한 분에게만 피동되고, 다른 데 피동 안 되면 그만 이것이 평강이요 생명입니다. 다른 것에게 피동되지 말고, 하나님 한 분에게 피동되는 것, 한 가지.
자기에게 하나님이 용납지 말라는 것 그것만 용납 안하면 평안한데, 인간들이 고생하는 것이 뭐 잠깐 동안 세상에서라도 다 그렇습니다. 생각지 안할 생각을 해서 그래 그 사람이 고생하는 것, 착수하지 안할 것을 해서 고생하는 것 취하지 안할 것을 취해서 고생하는 것, 사랑치 안할 것을 사랑함으로 고생하는 거, 거기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아니해야 되는데 안 뜰 눈을 뜸으로 고생하는 거, 전부 인생이 제가 들어서 다 고생과 사망을 만들어 낸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줘서 그런 것 아니고, 그걸 만든 그걸로 자지고서 전부 사람들이 일생 동안, 누구든지 이 세상에 사람들이 왔다 간 사람을 한말로 말하면 '다 세상은 그렇기 때문에 고해라, 세상은 참 고통스러운 바다라, 괴로운 바다라, 인생은 다 고생하고 갔다.' 아마 살고 가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다 통계를 낸다면 마지막에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한다면 '참 세상에서 고생했다' 이렇게 말하지 뭐 평안했다 하는 사람은 별로이 없을 것입니다. 뭐 평안했다 하는 사람은 그 사람 더 어리석어서 제가 다른 사람을 고생시키고 그 고생의 원인자가 되었으니까 그의 받을 형벌은 더 큰 것입니다.
이러니까 모든 수고와 고생. 번민. 고통 분주. 복잡 이런 거 뭐 질병이나 곤고나 가난이나 무엇이든지 인간들이 원치 아니하는 그것은 전부 인간 제가 만들어 가지고 만들어 냈지 우연히 온 것 하나도 아닙니다. 그런 걸 가리켜서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를 참 평안히 쉬게 하리라' '어떻게 쉬게 하겠습니까?'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은유하고 겸손하다.' 내가 너희들을 오면 쉬게 해 주마고 하는 것은 나와 같이 온유하고, 나와 같이 겸손하면 된다. 온유한 것은 나는 모든 것의 주권을 절대자이신 그분이 다 주권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분의 법칙대로만 인도대로만 하면, 법칙대로만 하면 인도한 대로만 하면 그분이 전부를 다 책임 맡아서 전지한 지혜로 전능한 능력으로 참 지극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그분이 잘 해 주시니 그분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저 그렇게 나는 살기 때문에 나는 항상 온유하다. 나는 든든하다.
조급한 게 없고, 걱정되는 것 없고, 염려되는 것 없고, 모든 것이 다 마치 이 다래끼 안에 다래끼 안에 담겼던 그 고기가 아주 그 무변의 바다에 속한 것이며, 무변에, 바다에 이래 턱, 풀어놓으니까 그 바다 속에 있으니까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어 가지고 있으니까 그 바다 속에 있는 고기가 얼마나 편할 것이며, 또 다래끼 속에 있던 그 고기가 넓은 못 속에 떡, 해방을 당했으니까 얼마나 평안할거냐? 이것 모양으로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전체가 하나님이 나를 보안하는 하나님의 안보요,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전체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복되게 인도하시는 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함과 그의 무한하신 그 능력을 믿음으로 모든 것을 그분에게 탁 맡기고, 그분 하라 하는 거 하나만 하는 이것으로서 나는 온유하다.
온유하다 말은 그 마음이 따뜻한 것을 가리켜 말한게 아닙니다. 이렇게 마치 어떤 사람이 다같은 여행을 같이 나섰는데 한 사람은 마음이 조급해서 못 견딥니다. 오늘 저녁에 이래 되면 여기서 아마 이래 갈라 하면 여비가 자래나 못 자래나? 또 가다가서 그만 잘못 걸리면 그 헐한 차를 타지 못하고 비싼 차를 타게 되면 어찌되나? 또 가다가서 아주 싼 그런 하숙이나 만나면 다행이지마는 없어서 여관에 가면 어찌 되나? 만일 식사하고 난 다음에 식비가 내가 가진 것보다 이상이 되면 어찌 되나? 마음이 자연히 조급해지고, 걱정이 되고 이라지만, 이라다가 그만 자기의 부모나 만나 가지고서 네가 여비가 모자라지 하면서 그 여비의 넉넉한 돈을 이래 그 아들에게 주니까 그 돈을 척, 받고 나서 호주머니에 넣어 놓으니까 다른 사람은 그 아이가 부모에게 여비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그걸 모르지마는서도 보니까 좀 전에 그 아이의 안색과 지금 안색이 다릅니다. 좀 전에는 그 피부에 걱정 근심이 꽉 끼었더니마는서도 이제는 그만 그 얼굴이 확 펴이는 것이 뭐인가 든든하게, 뭐인가 뭐 태산같은, 무슨 그런 믿고 의지하는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처럼 대단히 마음이 든든하게 온유해집니다. 고걸 가리켜서 여기에 온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게 속에 받은 여비를 많이 받아서 여비가 든든하니까 뭐, 비싼 여관에 가 봤자 그래도 넉넉하고, 또 비싼 차를 타도 넉넉하고, 또 급하면 뭐 택시를 타도 넉넉하고 마음에 온유하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혹, 그 간단한 것이지마는 저도 그런 걸 봤어요. 아 이거 어데 식사하러 갔는데 보니까 식사가 뭘 좀 생각보다 뭘 잘해 가지고 나옵니다. 잘해 가지고 나오니까 아, 내 생각에는 이거 한 몇 천 원 하면 안 될까 이래 생각했는데 벌써 차려 가지고 나오는 거 보니까 아마 돈이 좀 비싸겠는데 이 호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돈을 짹짹 세아려 보니까 이거 천 원짜리 몇 장 밖에 없는데. 이거 가다가 만일 돈이 모자라 놓으면 이거 오늘 큰 우사 하겠다 싶어서 음식 맛이 없고 그만 아마 다른 사람이 내 얼굴 보면 표가 날거라. '아, 저 사람이 무슨 갑자기 걱정이 생겼나' 이럴 건데 이쪽 호주머니에 그랬는데 아, 이거 혹 보니까 싶어서 보니까 이쪽 보니까 아니 만 원짜리가 몇 장 들어 있습니다. 그만 금방 얼굴이 그만 확 펴이면서 그래 든든해지지 않습니까? 그게 온유입니다.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내 마음이 온유하다. '네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는 그런 길을 줄 터이니까 오라' 그거는 뭐이냐? 첫째 이 온유, '네 마음이 온유하면 너는 행복이다. 온유하게 살수가 있는데 왜 네가 온유하게 살지 못하고 조급하게 그렇게 또 마음에 염려 있게 근심 걱정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네가 그저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고통에 눌려 가지고 사느냐? 그건 네가 해 봤자 안 되는 일인데 공연히 되지도 안할 일을 가지고 네가 어찌 그리 하고 있느냐?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뭐이냐? '나는 이 온유를 배웠다 나는 온유하게 산다, 너도 온유하게 살아라, 내게 오면 온유를 가질 수 있다.' 또 '온유하고 겸손하니' 온유다가, 그 온유에다가 '나는 겸손하다, 나는 겸손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망이 온 것이 다 자기가 감당도 못할 것을 가지고서 올라 갈라 하다가 사망이 왔고, 더 존영해 질려 하다가 사망이 왔고 제가 저를 위하려고 제가 저를 위하려고, 높일라고, 제가 저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인생에게는 사망 외에는 온게 하나도 없다. 천사 중에 천사도 하나님께 다 맡겨 놓고 그저 겸손만 가졌더라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이래 앉힐라 하니까 이 자리에 앉을 건데 이 자리에 안을 건데 떡 밑에 가 앉습니다. '얘 너는 거기에 앉을게 아니고 올라 오니라, 거기에 앉을게 아니다.' 여기에 또 올라 오니까 아니 거기에 앉을게 아니라 또 올라 오니라.' 여기에 앉히고, 자꾸 저는 기어 내려가고, 또 이래 올라가니까 더 내려가고 내려가고 그렇게 내려가는 그런 일만 했으면 내려간다고 하나님이 내려가게 두지도 안할 것이고, 미덕만 되고, 하나님께서 또 높이고 높이고 자꾸 높일 터인데 제가 올라갈라 하다가 그렇게 영원히 비참하게 된 마귀 그것이 세상에 와 가지고서 그 사상을 에덴동산에 해와에게 줘서 해와가 망령되게 하나님께 맡겨 놓고 온유하게 사던 자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제가 저를 위해서 올라갈라고 하는 거기에서 그만 절단나 가지고서 그때 저와 자손들이 다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겸손하다' 그 말은 나는 내려가면서 산다 그말입니다. 나는 내려 가면서 산다, 나는 밑에를 보고 산다, 나는 아래가 내 자리인 줄 알고 산다. 그 주님은 항상 당신은 내려오고 하나님은 올리고 하는데 내려오고 내려오고, 그 사생활 삼십년 생활도 보면, 살펴 보면, 당신은 조금씩 하는 그 개별 생활도 당신은 내려오고 하나님이 올렸고, 내려오고 올리고 자꾸 해서 하나님이 올려 줘서 당신이 그렇게 영광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억지로 임금을 삼을라고 했지 예수님께서 올라 갈려고 한 일 없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 가지고 물고기 두 마리로 거석할 때도 당신은 내가 하나님의 동등됨이시요 본체신데 이랬을 터인데 거기에서 아버지여 이렇게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청 하니까 아버지는 높이고 당신은 낮췄소 이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 나니까 예수님이 쑥 올라갔습니다. 올라 와서 핍박하던 사람들이 '아, 왕으로 삼아야 되겠다.' 그렇게 올라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그만치도 인정을 받고 대우받게 된 것운 전부이 아버지가 그렇게 했지. 당신이 그렇게 대우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마련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 '나는 겸손하다' 나는 내려다 보고 살았고 나는 내려가며 살았고, 모든 걸 주께 맡겨 놓고, 이러니까 나는 평안하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도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가지시고 종보담도 하나님이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 중에 하나인 사람의 모양을 가졌으니' 그렇게 낮아졌습니다. 그렇게 낮아졌어 주님은 그렇게 낮아졌어. 자꾸 주님은 일생동안 하시는 일이 '낮아지뇨?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에 지금 낮아질까, 어떻게 하면 내려갈까' 그러니까 올라가기는 힘이 들지마는서도 내려가기는 쉽지 않소? 이러니까 내려 갈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올려 주지, 사람들이 올리지 이래 가지고서 하나님과 동등되고로 취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이나 뭐 지배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지배를 하려고 다스려서 왕되어서 지배하려고 하지 안하고 자꾸 순종하는 종될려고만 애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높여서' 만물이요 사상을 가진 주님을 지옥에 있는 것도 주라 시인하고 기뻐했습니다.
인생의 미는 낮아짐에 있고 인생의 그 평강은 낮아짐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는 것은 낮아짐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낮아짐에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겸손하다, 나는 온유하다, 너는 그렇게 근심 걱정하고 이렇지마는 나는 걱정이 하나도 없다, 나는 든든하다, 나는 든든하다. 또 너는 그렇게 수고해서 올라 갈려고 헤엄치고 하지마는서도 올라 갈려하다가는 툭 떨어져서 또 많이 상하지, 올라 가다가 또 상하지 떨어져 가지고 또 상해서 다리도 부러지지, 뭐 이래 가지고 모두 상하고 상하고 이래 가지고 자꾸 이렇게 상하는데 그런 생애 법칙을 버려라. 나는 내려가며 사니까 내가 내려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있다가서 하나님이 이렇게 자꾸 들어 올려 주니까 나는 내려가는 거야 내려가는 것은 수월한데 나는 내려가니까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이 이렇게 들어 올리니까 들려 올라가니 나는 평안하다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잔치의 상좌에 앉을려고 하지 마라 만일 네가 상좌에 앉았다가 너는 그 자리가 아니니까 저 밑으로 내려가라' 그라면은 그때에 그 수치가 얼마나 크냐? 차라리 그가 저 말단에 낮은 자리에 가 있으면은 '아 어째 거기에 앉아 있습니까 이 위로 올라 오십시오' 만일 그렇게 그때 다른 사람이 너를 올리면은 네가 영광되지 않겠느냐?' 하도 답답해서 그런 말씀을 말씀 하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가 사는 이 세상 살이의 법칙을 네가 네 법칙으로 삼아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 법칙을 네 법칙으로 삼아라. 뭐, 네가 온유할 수 있는 것 다 주님에게 딱 맡겨놓고, 모든 것 다 맡겨 놓고 너는 그저 욕망은 내려 갈려고 하는 욕망, 행동은 네가 왕이 돼 가지고서 주권적으로 원할게 아니라 언제든지 순종하는 종의 생활을 할려는 것 이것이 생애 법칙이니 내 법칙 네가 메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배우라'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요것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라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누릴 것이고. 심령이 평강을 누리면 몸도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제가, 참 저는 그런 생활이 그게 안 돼서 장, 내 얼굴은 찌푸려 가지고 있습니다. 찌푸려 가지고, 찌푸려 가지고 있고 얼굴이 펴 있지를 못합니다. 찌푸려 가지고 있고, 제가 저 그때 산정 여관에 갔다가 오면서 버스간에서 한 여학생을 봤는데 그 여학생 얼굴 보니까 어떻게 얼굴이 확 피어서 아주 요 살 껍질, 그 피부 피부가 어떻게 화평하고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지 나는 깜짝 놀랬어. 저만치 있는데 그 참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이랬는데 앉았다가 어떤 노인이 오니까 일어나더니만 척 '여기에 앉으십시오' 하면서 그리 거기에 앉히요. 앉히는데 그래 어째 어째 하다가 나는 한번 좀 만나 볼랬는데 사람이 많이 있어서 그만 만나 보지를 못했는데 그래 그만 중간에 그만 내려 버려서 내가 못 만나 봤어요.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보지 못했어. 지금도 내가 만일 그 학생을 어데 가서 만날 수 있다 하면 내가 뭐 몇 백리를 차를 타 가지고서도 만나면 싶어. 왜? 그 얼굴, 그렇게 온유하고 화평한 것이 어떻게 그런지. 나만 그런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사진을 이래 갖다 떡 놓고서 이래 보면서 그리 있다가 '이 사진 중에 어느 사진이 제일 좋으냐' 이라는데 사진을 보고서 평을 하는데 그 사람이 말을 하기를 '이 사람은 평생 근심 걱정을 한번도 해보지 안한 사람이라' 보니까 그 모든 피부 전체가 좌악 펴이서 하나의 근심 걱정의 주름 잡힘 하나도 없고.
전부가 다 온유하고 그렇게 화평스럽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과연 사진이 그래요. 인제 그때 나는 거기에 눈이 뜨였어. 눈이 뜨여서 '보자 그래 사람들을 보자 그러면 이렇게 화평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있느냐' 이래 보면 참 드물어요.
이러니까 이게 모두 우리가 모든 주님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요. 저도 항상 이거 온유하지를 못해 그렇습니다. 왜? 주님에게 뭐 맡겨 놔야 되는데 맡겨 놓지 못하고 만날 깡깡 깡깡 그러기 때문에 그 피부에 깡깡깡 하는 그게 배겨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아름답지를 못해요.
어디서든지 이래 가면 예배당 가서 인제 기도를 늘 그래 합니다. '우리 예배당의 악의 세력이 폭파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그런 것도 주께 맡겨 놓으면 될 터인데 또 '나는 폭파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걸 또 기도를 해야 되지, 안하고는 못 견디겠다 그말이오. 또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런 것도 다 주님이 다 숨겨 가리워 줘야 되겠습니다.' 또 해야 되겠다 이거요, 또. 또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에 대해서도 '이거 가다가 차 사고 나 놓으면 어찌 되느냐? 암만 교통 지도원이 있다 할지라도 개별 섭리의 주권이 당신에게 있는데 당신이 안해 주시면 누가 인생으로서 그 개별 섭리의 그걸 다 간섭하고 그걸 감당을 하겠습니까? 당신이 안보해 줘야 되겠습니다. 또 이래 쌓으니까 자꾸 있다 깡깡깡 하니까 이래 쌓으니까 자꾸 이거 용모가 아름답지를 못 해. 그만 깡깡깡 하면 근심까지 깡깡해 그래서 차차 차차 이제 좀 잘 믿으면 좀 좋아질 줄 압니다.
어쩌든지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에게 다 맡기지 못했기 때문에 못한 것만침 내가 근심하게 되고 내가 걱정하게 되요. 주님에게 다 맡기지 못했기 때문에, 못한 고것이 암만 맡겼다 해도 맡기지 안했으니까 자연히 그런거라.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당신의 이 법칙은 아주 쉽고, 당신의 짐은 무슨 짐이냐? 맡기는 거, 주님에게 맡기는 거 맡기는 그게 내 짐이라.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 내 짐이요. 또 내려가는 것이 내 짐이라. 그런고로 우리가 요 생애 법칙을 완전히 바꿉시다. 그라면 오늘 주님이 우리를 깨끗케 해주신 이 깨끗을 보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존해 나갈 수 있는 거. 하나는 내가 하는 거 다 당신에게 다 맡겨 놓고 다 맡겨 놔 해줄 줄 알고. 그러면 다 맡겨 놓고 그만 평안히 있으면 좋겠소. 그런데 그게 지금은 안 돼요.
제가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에는 ○○○장로님이 그때 거기에 전도사로 와서 계셨는데 그 밑에 제가 교인으로 있었습니다. 무엇을, 아이가 아픈데 그 장로님이 '기도하라' 이래. '기도 하이소, 집사님 기도 하이소' 이라는데 기도하라는 그 말 할 때에 내가 대답은 했어요. 예, 하기는 해도 그 말이 우스워졌어. 기도하라는 말이 우스웠어. 왜 기도하라는 말이 우스웠느냐 하면 주님이 내게 필요한 것은 다 나보다 먼저 당신이 아시고 해 주실 것인데, 뭐 주님 앞에 뭐 해달라 말아라 뭐 그랄게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이 다 알아서 다 해 주시는데 그렇게 할게 뭐 있어야지, 그거 별로이 해 보지를 안했어요. 기도해 보지 안했어요 그때는. 지금은 인제 맡기는 것이 아마 완전치 못한 모양이라. 그러니까 뭐 마음이 조급해서 이거 어쩝니까? 이것도 좀 해 주십시오, 저것도 좀 해 주십시오. 하는데 참 당신에게 다 맡겨 놓고 당신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서라면 서고 이렇게 순종하는 거 이것이 그 결과로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이 되어지는 것이니 지금 새삼스럽게 부산 와 가지고서 그 마음이 온유치 못한 것을 지금 인제 온유를 만들라고 인제 애를 씁니다. '인제 부터는 온유를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그럴 때는 그랬어요. 산에 아주 뭐 짐승 있는 그런 산에 가도 처음에는 그렇지만 당신에게 맡기고 나면 기뻐서 '뭐 어째 좀 범이나 안 오는가. 뭐 이젠 맹수가 안 오는가, 오면 좀 같이 좀 놀아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새들 하고는 많이 놀았어요. 새들하고는 놀면서 가면 새가 많이 모아 들고 모아 들면 새들 한테 설교도 하고, 또 말도 또 듣기고, 또 좋아서 지글거리고 이라다가 그래 그만 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만 어두워야 그만 갑니다. 저 따른 교회 가면서 길이 멀어도 그라다가 어두우면 가고 이랬는데 짐승들 하고는 그래 보질 못했어요. 이 길 짐승 뭐 이런 짐승. 뭐 노루나 그런 거 뭐 저 호랑이나 뭐 이런 거 곰이나 이런 거 하고는 그래 해 보지를 못했어. 그 아마 좀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좀 그런 거 같애요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그런고로 오늘 여기에 이 말씀을 본 것은 29절에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는 요 배우라는 요것을 좀 생각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웁시다. 주님이 하나님의 그 부요로서 주님은 우리 아는 대로의 주님은 낮아지셨고 가난해 지셨고 천해 지셨고 자꾸 그것만했지, 그것만했고, 고난 당하셨고 뭐 당신에게 해로운 것만 하셨지 당신에게 좋은 거는 하나도 안 했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해로운 것만 하면서 일난 마음이 보내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은 주님에게 맡겨 주신 모든 우리들에게 좋게하는 것,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는 것,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들에게 유익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들에게 유익되게 하는 일은 당신에게 손해가는 일입니다. 당신의 손해가는 일이요, 우리에게 유익 되게 하는 일 그 일만 평생했습니다.
그 일만 한 것이 과연 주님이 그 일 하신 것이 실패입니까? 실패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 작은 데서 손해 보고 낮아지고 실패한 것이 영원히 지극히 큰 데에 높아졌고, 또 당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높여서 당신과 당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다 높아졌고 다 부유해졌고 다 존영해졌습니다.
이러니까 요것이 주님 앞에 배울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로 인해서 부강해질까'하는 그것도 좋겠지마는 그보다도 '내가 주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좀 가난해져 볼까, 어떻게 하면 낮아져 볼까' 하는 하는 요것을 우리가 착안해 가지고서 요 생활 방편을 획 바꿔 버리면 우리에게는 참 평강이 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회사에 가 가지고 만일 직장 생활 한다 할지라도 고게서 '어떻게 하면 내가 좀 월급 한푼이라도 좀 더 받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내가 요게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서 손해보는 일, 좀 월급을 덜 받는 일을 할까' 공연히는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 자기가 낮아지는 거 고 일을 할까' 그것을 생각해 가지고서 그러면 내가 여기에서 하면서 그저 자, 주일 지키려고 하면 좀 주인이 께름하게 여기니까 께름하게 여기니까 께름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내가 손해 가면 주님이 기뻐할 터이니까 이제 월급을 만 원 받던 것을 주인에게 '내가 지금 구천 원이면 좋으니까 나는 주일을 자유로 지켜야 되겠으니까 좀 월급을 작게 주고 그래 해 보십시오' 이라면 고게, 낮아지는 것을, 주님의 낮아지심을 배우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고걸 배우면 우리가 평안할 것이고, 그렇게 무엇이든지 그런 것도 또 이번에 직원들 가운데서 지금 이 영전이 될 터인데 그 영전 될 때에 '어떻게 하면 내가 영전을 할까' 해서 영전될 그것을 욕망하고 노력을 하면 우리는 불안할 것이고, 이렇게 모두 다 영전하는데 '다른 사람이 다 영전되고 나는 그 영정 안 되고 나는 좀 밑으로 내려갔으면 좋겠다' 하면 그이가 평안할 것이고, 또 아름다운 덕이 될 것이고 그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높일려면 못 높일 거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꼭 세상 살이에 그 생애의 법칙에 정 반대되는 그것이 주님의 생애 법칙이었으니까 고 법칙을 이제 우리가 단행하도록 결정을 하고서 해봅시다. 단행하도록, 예를 들어서 학교에 교편을 쥐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좀 수월 할고 덜 가르치고 수월할까, 또 그라고 좀 수월한 자리를 차지할까. 좀 봉급은 올라갈까 지위는 올라갈까? 그보다도 '어떻게 하면 내가 수고를 좀 더 할까, 어떻게 하면 좀 내가 좀 내가 낮아짐으로써 다른 사람이 높아지도록 그리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보수가 내가 적고 다른 사람들 이 보수가 올라갔으면 좋을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회사에 최종적인 사장은 주님이십니다. 회사에 하늘의 사장이 있습니다. 하늘의 사장이 있고, 또 이 관서에 관서의 실장이 있는데 동회면 동회 실장이 있어 동장이 있을 것이고 구청이면 구청장이 있을 것이고, 시청이면 시청장이 있을 건데 그 장 위에 하늘의 하늘의 시장이 있습니다. 하늘의 제일 대가리가 있습니다. 그 분이 있으니까 그 분을 바라보면서 그 분의 그저 영광이, 그 분의 기사 이 그 분의 법칙에 혹 거리낄까 해서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배암이 하던 그 법칙에덴동산에서 홰와가 취했던 그 법칙, 아담이 취했던 법칙, 그 배암이 우리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그 법칙으로 자꾸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 법칙을 버리고, 둘째 아담 예수님이 오셔서 사신 요 법칙을 우리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 살므로 말미암아, 요 겸손을 내 법칙으로 삼고, 맡김으로써 온유한 이 사람으로 이래 사는. 주의 이 법칙을 내 법칙으로 삼아서 이래 살면 우리 마음이 평안히 쉴 것이고, 우리가 들어서 우리의 행복의 재를 저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우리가 재를 저질지 않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내가 내려간다고 얼마든지 구렁텅이에 빠져서 내려가도록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머리털 하나까지 세어서 다 그러하니까 내가 올라가다 뚝 떨어지는 거,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올라 갈려고 하다가 뚝 떨어지는 것보담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께 맡겨 두고서 그저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도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나는 실실 자꾸 낮은 자리를 청해서 자꾸 잔치의 저 밑에 자리를 취하는데 아, 다른 사람이 아니, 그렇지 않다고 이렇게 올려 세워서 그 걸음으로 가는 그 법칙이 좋지 않느냐?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제부텀 세상 사람들의 사는 그 법칙을 가지고 살지 맙시다. 그 참 수 없는 고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하면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다소라도 내가 말 한 마디라도 유익을 보일까, 내가 요 사람 접촉해서 내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말지 그 사람에게 털끝만치라도 내가 손해는 보이지 않겠다. 마음 하나도 내가 손해 보이지는 않겠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치도 내가 부담은 주지 안하고 내가 지극히 작은 거라도 내가 부담하지 부담은 주지 않겠다 하는 요 예수님이 사는 생애 법칙, 요 법칙으로 바꾸면 우리가 편히 쉴 것이고.
편히 살 것이고, 또 이 받은 바의 은혜를 손해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깨끗게 한 것을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더럽히지 안하면 주님이 우라 편 돼서 다 해 주시니까 얼마든지 되어지는데, 뭐 주님이 해 주셔서 더 올라갔다는 그런 욕심, 내가 요래야 주님이 올려 주시지 하는 그런 흉측한 더러운 마음을 가지지 말고 주님 나 위해서 그렇게 이리 낮아졌으니까 내가 주님 위해서 세상에 있는 동안에 좀 낮아져 봐야 되고 천해져 봐야 되고, 고생도 좀 해 봐야 되고 그래 봐야 안 되겠습니까? 우리 중심에 그것을 원하고, 중심에 원하는 우리가 되고, 그 수단이나 방법으로 삼지 말고 고렇게 이제 생활 법칙을 완전히 바꾸어서 사는 우리가 되어 집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뭐 그것이 다 쉬운 건데 쉽습니다. 하기 쉽습니다. 쉽고도 어렵습니다. 쉽고도 어렵습니다. 차차 그 사람이 된 사람은 그 생활이 아니면 죽는 생활인 줄 알기 때문에 못하는데 그 사람이 되지 안할 때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워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도 되어지고 또 그 생활도 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