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6 11:58
주님의 사랑
1984. 4. 18. 밤
본문: 요한복음 13장 1절∼1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 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입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러면, 자기 사람들은 곧 택함을 입은 우리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시작을 어데서부터 하셨는가? 또 다는 말 못하지마는서도 어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셨는가? 또 어데까지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시작하신 것은 우리가 생기기 전,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목적을 정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사랑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택을 하시고. 또 사랑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사랑 안에서 우리 각자들에게 이런 일생의 순서 또 저런 일생의 순서를 하나님이 다 섭리로 이루시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를 타락에서 구출하셔서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에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이 다 형벌 받을 것은 주님이 형벌을 받아서 해결하시고, 또 행하여야 할 것은 대신 행하셔서 해결을 하시고, 배척을 당해야 할 것은 배척을 당하셔서 해결하여 하나님 앞에 저주와 버림당한 그 모든 것을 대신 저주와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우리를 대속하시고, 또 이 대속하신 공로로 성령과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때가 되면 중생시키시고 오늘까지 늘 섭리하시고 관리하시고 우리를 양육해 나오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우리의 지식 그 범위 내에서가 아니고 우리 지식이 측량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랑이고, 또 우리의 지식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 영원의 사랑이고, 또 우리가 그 깊이를 측량 못할 영원무궁한. 저주와 사망 아래까지 가득 찬 사랑이시고, 또 지극히 크신 하나님에게까지 모든 면이 온전하고 구비한 사랑을 베푸신 사랑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서에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를 측량 못할, 우리 지식을 초월해 지식이 생각지도 느끼지도 갖지도 못할 그 영원 무한에까지 가득 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뭐 간단합니다. 어떻게 유창한 그런 웅변을 하려고도 하는게 아니고, 또 오묘한 그런 무슨 말을 할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로 지키기로 그렇게 우리가 작정을 하고 연보 봉투도 나누어 받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번 주간, 오늘이 삼일이고 내일이 사일 목요일이고 모레가 오일 금요일입니다. 오일날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는 아무리 우리가 말한다고 해도 말로 다 표시할 수가 없고 또 우리 감각으로 아무리 느낀다고 해도 우리는 다 느낄 수 없는 아주 미비하고 너무도 유한되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대충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어떤 경우에서 사랑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여기 간단하게 몇 가지만 들어서 말을 하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어떤 때에 사랑하며, 또 우리 사랑이 어번 경우에 주님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변동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것을 하나 또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닫고, 우리도 주님을 그와같이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고, 또 셋째는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 '나를 사랑하느냐?' 또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표본이며 대표가 된 베드로에게 주님이 물으실 때에 세 번 물으시면서 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치라 말은 양을 다스리라 말입니다. 목자가 양을 친다, 양을 다스리고 먹인다 그말입니다. '양을 쳐라' 또 세번째도 '내 양을 먹이라' 그렇게 부탁을 하셨고, 또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주일마다 만나시고 남은 교훈을 하시고 승천하시는 그 자리에서 또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다른 생각 가지지 말고 내가 승천하고 난 다음에 너희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보내실 그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도록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영접해라. 성령님을 영접하면 너희들이 권능 얻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 곧 내가 죄인을 구원하는 이 구원을 전하는 이 구원 역사를 하라 그렇게 부탁을 하시고 그날 승천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첫째는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다는 말을 못 하지마는서도 몇 가지 말을 하고, 또 둘째로는 그러면 나는 어떤 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내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섬기는 이 섬김이 변할 건가? 어떤 때에는 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데까지 주님을, 어느 지경 이르기까지, 어느 지경 이르기까지 주님을 사랑하여야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둘째로 좀 생각하고. 또 셋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베푸시고 마지막에도 부탁하시고 또 처음에 만날 때도 부탁하시고, 중간에도 부탁하시고, 그 사도들과 문도들에게 늘 부탁하시고. 또 '세상 끝날까지 이 일에는 내가 너희들과 같이 하겠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이 말을, 분부한 말을 가르쳐서 지키게 해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도록 해라.' 그러면, 형제 구원을 주님께서 이렇게 간곡히 우리에게 부탁하셨으니 우리가 형제를 구원하는 이 사랑에 있어서 어데까지 우리가 사랑하고 어데까지 구원의 노력을 해야 될 건가 하는 이 세 가지를 간단하게 그저 생각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우리를 당신이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했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있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내가 사랑하는 자를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 하시고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사랑할 수 있는 자를 만드신 것이 곧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택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가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벌써 있기 전부터 주님을 사랑할 수 없으나 주님은 우리가 있기 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계획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전지한 지혜를 다 써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랑을 참 생각할 때에 주님과 우리는 피조물이요 비교할 수 없지마는서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므로 크고 작은 모든 계획을 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계획이 아니라면 계획을 할수 없는 우리인 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계획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계획을 부끄러워서 할 수 없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생각하는 상대자가 되겠습니다.
또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만드셨고 우리을 위해서 만드시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 되어야 참 양심을 가진 자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래도 사랑의 주님의 안면을 상대하는 우리의 맑은 양심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우리들이 철이 없어서 몰라서 실수한 것도 많고, 또 알아도 모자라서 연약해서 실수한 일도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가 있기 전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정하신 그 사랑은 우리가 본도 받을 수 없고 형용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계획한시고 예정하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전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뭐 넓게 길게 그렇게 장구한 계획이나 예정은 하지 못하지마는 그래도 우리에게도 모든 계획이 있고 설계가 있고 모든 다 예산이 있고 예정이 있으니 예산이나 예정이나 계획이나 이런 것을 주님이, 당신이 모든 계획을 나를 사랑하므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계획만 했지 다른 걸 하지를 아니 하셨으니 이 사랑의 상대자로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사람하는 것이 되어지고, 직접이 아니면 간간접이라도, 간간접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기 위해서 계획하는 것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정당한 마음일 압니다.
그런고로, 만일 우리가 잘못된게 있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이것을 참 주님의 섭섭함을 풀어야만 지당한 우리들입니다. '주님이여, 나는 이 계획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날 사랑하고 뭘 사랑하고 했지 주님을 사랑하므로 하지 안한 계획,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지 안한 계획, 주님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계획하지 안한 이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주님 앞에 그 섭섭함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못 사는 것 아닙니다. 그럴수록이 잘 삽니다. 만일 완전을 위해서, 완전이 좋아하도록 한다면 그것이 완전이 되니까 완전에는 행복이요 성공이지 뭐 실패가 있을 것이 뭐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내나 제가 저 위했지 주님 위한 것이 아닌 것을 우리가, 그것은 뭐 백에 백이면 결과적으로서는 판단해서 다 그렇게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낀 것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또 주님이 없는 가운데 모든 걸 만드실 때에 이것 저것 뭐 만든 것도 우리는 몇 가지나 만드셨는지, 크고 작고 그 수의 많은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번연히 우리에게 닥쳐서 우리 구원위해 역사해도 '이거는 뭣 때문에 이랬는가?' 거기에 대해서 세밀히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만한 우리의 지능이 없습니다. 그런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당신이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서 창조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만드셨지마는서도 만드신 그것의 종류도 모르고 뭣 때문에 만든 것도 모르고 또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유익되게 한 것인가, 그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는 못 해도 그래도 우리대로는 무엇을 만드는 것이 있으니 크고 작은 이런 것을 만들 때에, 사업을 만들든지, 무엇을 우리가 이래 가정을 하나 꾸리든지, 무슨 이런 저런 무슨 조성품을 하나 하든지, 이런 저런 무슨 단체를 만들든지, 이런 무슨 운동을 만들든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가 무엇을 만들든지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만드는 것이 지당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야 될 이것이 우리의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참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만든 데 대해서 주님이 모든 것을 날 사랑하므로 만드신 그것을 우리가 느끼고, 그러면,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만드는 것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그런 것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송구하고 죄송해서 주님을 섭섭하게 했다는 그것을 느끼고 우리가 그것을 다시 노를 풀고 그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해서 나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모자라지마는. 내가 비록 지능이 모자라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도리어 주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래도 우리 주관대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만들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든 거라야 되겠고, 만들지 안한 것이 있으면 이것은 주님 앞에 참 죄를 범한 것이고 섭섭하게 노엽게 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만들든지, 둘이 약속을 만들든지, 뭐 단체를 만들든지, 운동을 만들든지, 물건을 만들든지, 무슨 기관을 만들든지, 사업을 만들든지 뭘 만들든지 우리는 만들 때에 주님을 나도 사랑함으로써, 주님이 모든 거 날 사랑하므로 다 만드셨으니까 나는 주님이 만드신 거 가지고 이용해 가지고서 거기서 요렇게 조렇게 조금 가공한다 할지라도 이것도 나는 비록 적은 것이지마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내가 만들고 주님을 사랑하지 딿는 걸 내가 만들 수 없다, 주님을 사랑치 안하고 다른 것을 무엇을 사랑하므로 만든 것은 주님이 섭섭해 하실 것을 알고 우리가 그것을 주님 앞에서 참 미안과 사과를 하면서 주님을 섭섭함을 푸는 이것이 있어야 주님과 우리와의 인격 상대, 인격 교제, 인격이라 하는 것은 뭐이냐? 인격의 주고 받는 그것이 뭐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 상대방의 감정이 서로 통하고 이해가 통하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물건하고 물건하고 한테 붙여 놓은거와 달리 인격 존재의 교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제작하는 일, 우리가 조성하는 일, 이런 거에 대해서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면서, 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큰 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실려고 하면 하늘에 있는 그 영광과 존귀.
영광과 존귀, 그 자리에 그 영광과 존귀와 부요를 가지고는 우리를 사랑하실 수가 없으시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영광을 다 내놨습니다. 아주 영광 없는 분이 됐습니다. 영광도 다 내놨고, 취미도 다 내놨고 존귀도 내놨고, 권세도 내놨고, 영광의 지위도 내놨고, 모든 소유도 다 내 놨고 이래서 이 모든 것을 한 말로 '근본 부요하신 분이' 영광도 무한했고, 존귀도 무한했고, 권세도 무한했고 참 쾌락도 무한했고, 이렇게 소유도 무한하신 분이 모든 이런 무한의 부요를 우리를 사랑하므로 다 내놨다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닫고 우리들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가진 것을 무엇이든지 내놓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주님을 사랑할라면 내놔야 될 때는, 뭐 내놓지 안할 거 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놓지 안해도 될 걸 내놓을 필요는 없지마는 주님을 사랑할라 하면 권세를 내놔야 될 때는 권세도 지체 안하고 우리는 내놔야 되겠습니다. 영광도 내가 이 영광을 가지고 누리면은 주님을 사랑함이 되지 못하겠고 주님을 기쁘시게 함이 되지 못할 때에는 우리의 영광을, 주님이 날 사랑하므로 내놓으신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 영광을 내어 놓지 안 하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돼야 주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요, 또 그 영광이나 권세나, 지위나 어떤 것이든지 내놓기가 아까와서 좀 주저가 될 때에는 '주님을 사랑할라면 이것을 내가 쓰지 안하고 이걸 내놔야 되고서 없는 거같이 돼야 되겠는데' 하는데 너무 그것들이 아깝고 사정이 딱해서 우리가 쉽게 우리의 모든 영광이나 권세나 지위나 쾌락이나 뭐 소유나 모든 조성이나 단체나 우리의 기업이나 가정이나 이것을 내놔야 될 때에 쉽게 내 놓아지지 안하고 꺼려질 때에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어떤 것을 내놓으신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가 그때에 내놓지 못했던 것이 마음 가운데에 미안하고 죄송하고 주저할 것이 뭐이가? 큰 것을 가지고 날 사랑 하셨는데 그 찌꺼기 눈꼽째기 같은 추접하고 더러운 거 그까짓 거 내놓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해서 '주님이여 죄송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죄송함을, 죄송한 감을 우리가 참 금할 수가 없을 만치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맑은 마음이요 정상적인 우리의 그 사랑의 대상의 심리인 줄 압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 위해서 부요를 내놓으셨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님은 그 하늘에서 저 세상까지 세상에서 음부, 지옥까지, 음부까지, 다 주님은 우리 대신 저주의 사망의 해를 다 받는 데까지 당신은 낮아졌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낮아지는 것을 꺼리지 안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되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데에는 당신이 그 높으심에서 낮아지지 않고는 구원할 수 없을 때에는 아무리 높음이 귀하고 아깝지마는서도 우리를 사랑 함으로써는 그 높으심이 아깝지 안하고 낮아지는 그 참 말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손해 견딜 수 없는 천대지마는서도 그 천대에 대해서 뭐 주저하지 안했습니다. 원하고 원함 가지고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낮아졌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낮아져야 되는 그런 경우를 우리가 만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면 내가 낮아져야 되는 그런 경우를 우리가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안 낮아질라고 하면 주님의 영광이 떨어지겠고, 주님을 위함이 안 되겠고, 주님의 존귀가 나타나지 않겠고, 주님이 섭섭하겠고,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면 내가 이제 이 높음을 내놔야, 자기 지위가 요만한 거라도 내놔야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복음이 뭐 영광스러워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의 감화를 주고 덕을 주고 이렇게 할 건데 그런 것을 참 우리는, 정상적으로 말 한다면은 주님이 날 사랑하심으로써 낮아지셨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낮아질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없을까? 주님을 위해서 낮아질 수 있기를. 주님이 소원하는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낮아질 수 있는 그런 기회 그런 기회를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참 낮아져 봤자 주님이 날 사랑하므로 낮아지신데 비해서야 그까짓 것 무엇입니까? 이거나마 기다리고 거다리다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의 낮아질 수 있는 기회가 되면은 그저 얼른 낮아지는. 기다리고 있다가 낮아지는 이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사랑의 대상의 마음인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참 못됐습니다.
낮아지면, 번연이 내가 낮아지면, 그만 거기에서 내가 축 낮아지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겠고, 모든 사람이 주님에게 감사를 하겠고, 복음이 영광스러워 지겠고, 주님이 기뻐하실 터인데 내가 고거 낮아지기 싫어서 낮아지게 될 때에는 고걸 기어코 회복을 시켜서 낮아지지 안하고 발동을 친 그런 것이 우리에게 뭐 얼마나 종종 있는지 모릅니다.
또 주님이 이렇게 사랑으로 부탁을 하셨는데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기에서는 참 낮아지면 형제에게 복음이 전해지겠고 내가 낮아지지 안 할라 하면 그 형제에게, 형제는 형제요 나는 내요 뭐 아무 관련될 것이 없고 내가 낮아지면 뭐이 되겠고 이럴 때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형제를 위해서나 주님을 위해서 낮아지는 그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낮아지는 그런 일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면 '닥쳤다' 해서 단 마음으로, 원하고 원하는 마음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낮아지고 주님이 소원하는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낮아지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뭐 주님의 사랑을 갚는 일은 되지는 못하는 거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 몸에서 나타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또 주님은 세상에 오셔 가지고서 참 한없이 외로왔습니다. 외로와서, 모든 사람에게 다 환하게 보시고 계시는데 그 사람이 지저분하게 뭐이중 삼중, 십중으로, 참 사람의 마음보다 더러운게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된게 사람이라.
보면 이중 삼중입니다. 똥이면 똥으로 나오면 좋을 터인데 똥이 요렇게 꾸미고 조렇게 꾸미고 이렇게 저렇게 뭐 간교하게 꾸미고 이중 삼중 십중으로 이렇게 뭘 회쳐 가지고서 종합을 해 가지고 나오는 거, 그 속에 것이 올라오고 용욕해서, 우리는 그 한두 가지만 봐도 마음에 께끄름한데 주님은 다, 전지자시니까 그런 걸 다 보시고도 우리에게 참으시고. 그러면서 주님에게 간교하게 이렇게 뭐 밀었다가 당겼다가 멸시 천대하고 이렇게 해도, 주님은 우리 때문에 당신이 어떻게 천대나 멸시나 손해나 억울함을 당해도 여기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이 없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안했습니다. 의례히 우리에게 유익한 것 있으면 그만 원하고 원하는 마음 가지고서 어떤 천대라도 달게 받았습니다. 어떤 멸시라도 달게 받았습니다. 뺨을 맞아서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면 뺨도, 죽어도 우리 구원이 된다면 지체하지 안하고, 뭐 꺼리지 안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이 잔이 내게서 떠나갈 수 없는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세포 하나도 지공법에 걸리지 안하도록 하는 데에는 당신 단독으로는, 인간으로서, 인성 가지고는 할 수가 절대 불가능이기 때문에 이거는 불가능이니 이렇게 큰일을 한번 실패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나보다 실패하지 안할 자가 누가 있으면은 그이를 시켜서 이 일을 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다가, 이 나에게 부담된 것이라면은, 내가 마시지 않고는 통과하지 안할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라는 데에는 아버지께서 이것을 맡아 가지고서 이루어 주셔야 된다 하시면서 간절한 소원을 심한 통곡과 간구로, 눈물로서 간절히 애원을 해 가지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난 다음에사 안심하고 '이제는 안심하라 이제는 아버지가 허락하셨다 가자'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당한 그 일을 우리가 구비 구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주를 위해서 당하는 일, 예수 믿기 위해서 당하는 일.
무리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하는 일 어떤 일을 당한대도 주님이 날 사랑함으로써 당한 일에 생각해 볼 때에는 뭐 그저 그런 모양과 그런 종자와 그런 흉내 내는 것 같은 그런 일이 있는 정도지 그와 우리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주님이 날 사랑함으로써의 그 당하신 그 일을 우리가 그런 무슨 모양이라도, 그런 한 흉내라도 그렇게 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왔다면 원하고 기쁘고 즐겁고 감사해서 마구 뛰고 굴리면서 자원해서 우리는 달라들어서 해야 될 터인데 우리는 이 천한 거 가지고서 꺼리고 주저하고 하는 그런 참 주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한 일 한 일이 많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천할 때도, 또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가나 삼 년 동안이나 가르치셨지마는서도 마지막에 어려움 당하니까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제자들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가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당신이 해 놓은 일이 일시적으로 볼 때에 아무 성과가 없고 다 헛일이오. 가르쳐 놓은 것이 뭐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수제자도 이렇게 말했으니까 다 헛일같이 안연에 그렇게 허무하고 참 외로와지고 쓸쓸하고 다 모든 것에게 배척을 당했지마는서도 그럴 때는 아버지 한 분으로 위로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대해서는 절망하지 안했습니다. 우리에게 대해서는 낙망하지 안했습니다.
이런데 우리는 이렇게 어려울 때에, 우리의 무슨 주관대로 일이 안될 때 우리 주관대로 일이 안 돼서 뭣이 섭섭하게 될 때에, 우리 기분에 맞지 안할 때에 그럴 때는 우리 기분을 주님을 생각지 안하고 우리 기분대로 좋으니 하찮으니 이렇게 툴툴거리면서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날뛰었던 참 철없는 목멘 송아지 모양으로 죽을둥 살둥 모르고 벌로 뛰었던 우리들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기분에 맞지 않는 환경과 우리의 모든 경영사가, 그런 것이 다 무너질 때에 그때에 우리는 주님이 날 사랑함으로써의 당신의 해놓은 일 이 전부 다 무너져서, '머리 둘 곳도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사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지마는서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요만한 것도 없다 말이오.
눈꼽재기 만한 것도 없다 그말입니다. 이래도, 이렇게 우리는 주님에게 대해서 배신하고 배반하고 허무하게 절단 돼 나가지마는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한번도 낙망한 일 없습니다. 한번도 낙망하신 일이 없고 한번도 실망하신 일이 없고 한번도 우리를 '이제는 안 됐다' 놓지 안하시고 꼭 잡았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소망을 가지고 소망을 놓지 안 했습니다. 끝까지 잡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잡혔습니다. 만일 놨으면 우리는 절단났습니다. 놨으면 주님의 일은 다 헛일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 형편과 사정이 답답하고 어려워질 때에 그럴 때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사랑하실 때에 그런 형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면 내가 외로와지는 거, 주님을 사랑하므로 내가 쓸쓸해지는 것, 주님을 사랑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거, 주님을 사랑함으로서의 이것 저것 모든 사건들이 낭파가 되어지는 것. 또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만 '뭐, 내비 둬' 내비 둬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걸 끝까지 구원할라 하니까, 구원할라 하니, 그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외로와지는 것, 낭파 되는 것, 버림당하는 거, 천대받는 것, 모든 일들이 다 아까운 일들이 다 절단이 나는 것. 이렇게, 어떻게 절단나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요동치 안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럴 때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러니 사랑할려면 그런 일을 닥칠 때도 그게 어떻게 절단나도 주님을 사랑하는게 변동 안 돼야 되겠고,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여 구원 할라 할 때에 그런 일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는, 그 일이 어렵고 낭파되고 모든 손해가고 깨어진다고 해서 형제 사랑하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요동돼서는 안될 터인데 우리는 너무 허무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지마는서도 나는 너무 허무합니다.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뭐 한다는 것이 참 이거 그저 종이장같이 발려 가지고 있는 것이지 뭐 생각하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모릅니다.
주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시는 일, 거기에서 정죄 받아 가지고서 그 빌라도 앞에 가서 심문받았을 때에도 당신은 그때 그말 한 마디. 한 마디 한 마디 하신 거, 그 말 한 마디 하신 거 우리는 그때 '무슨 말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십자가상에서도 말씀하신 거 '뭐하려고 이래 말씀하셨는가?' 또 여기에서도 제자들에게 모두 발을 씻기신 것도, '뭐하려고 씻기셨는가?' 당신이 곧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일을 며칠 앞두고서 그저 우리에게 유익된다면, 당장 유익이 없어도 그 다음에 유익될 말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면서도 다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고 말씀도 고 말씀을 이루지 안하면, 말하지 안하면 우리 구원이 완성 아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거기에서 요한에게 대해서 '나의 어머니 너의 어머니 곧,' 마리아에게 대한 것도 이것도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윤리라 하는 것을 그 사경에서 윤리 생각할 것 없는데 마지막에 그를 말하지 안하면 우리에게 윤리가 핍절돼 가지고 우리 구원이 안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윤리를 위해서, 그 어른이 우리 위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 이렇게 하신 거 모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측량 못할, 참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한 고난도 한 천대도 한 멸시도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당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당하되 원하고 원하는 마음 가지고서 당하지 안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도 그렇게 운명하실 때에도 그 세포 하나도 우리를 사랑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법이 다 보고서 혹 세포 하나라도 원치 아니하는 죽음을 한다면 그것이 지성 지공법에 걸리기 때문에, '이거는 강제 죽음이다' 하기 때문에 그 세포 하나도 우리를 대속하시는 그 소원 아닌 세포가 하나도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의 그 죽으심을 두고서 죽기까지 고민하신 것이 그 고민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할 때에 헤퍼서라도 마음이 딴데로 기울지 앉고 지성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그 지성이 기울여서 향하지 안한다면은 우리의 대속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일이 어려워서 죽기까지 고민하셨습니다.
이래서, 인간에게는 그래도 무슨 어려움 무슨 어려움 해도 죽음이 제일 어렵습니다. 죽음이 최고의 시험이요 제일 어려움입니다. 어려움. 어쨌든지 죽음보다 더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제일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대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데 그 뭐 세포 하나라도 간 일이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고자 하는 고 마음 전부로 솔박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봐도 이는 거부할 수가 없을 만치 그 전체가 우리를 대속하시는 소원과 또 그렇게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아버지여 이 무리들을 구원해 달라는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시는, 그 기도를 이사야 53장에 보면 '죽으시나 실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이랬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우리 위해서 기도하신 일이, 지성하신 하나님에게 대한 그 부르짖음이 끊어지지 안했습니다.
우리는 참 우리가 그저 순교한다고, 순교한다고 해서 그저 목숨만 끊어지면 우리가 순교로 이래 알자마는서도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에 그 어려움에 마음이 가지 안하고 주를 위하는 마음이 요동치 않는 것, 요동치 않는거. 주님을 향한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거. 이래야 우리가 주님 앞에 당연하고 정상적인 주님의 구속을 받은 정상인데 우리는 너무 허무하고 너무도 주님 앞에 참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생각하면서 잠깐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밤에도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내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주님이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여 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주님이 부탁하신 이 양을 사랑할 때에, 내가 구원할 때에 어데까지 구원할까? 어데까지 구원하고 어데까지 내가 바치고 어데까지 희생할까? 주님을 내가 사랑 할 때에 어데까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내가 사모하고 주님의 이 사랑을 기념할까 하는 것을 고요히 생각하면서 우리도 참 변화를 받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