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6 10:40
주님의 마음을 다 빼앗아라
1981. 1. 22. 새벽 (목)
본문:마태복음 9장 1절∼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리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지난 밤에 서목사님이 이 말씀을 증거했는데, 제가 어제 예배 시간이 다되어가서 김호경 선생에게 증거하라고 찾으니까, 시간이 다되어서 또 박윤철 목사님을 연락을 했더니만 오늘 서울에 공회기 때문에 출장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그래서 마침 서목사님이 있다기에 부탁을 했는데 아마 좋은 체험을 하였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너무 급박해서 지금 제가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하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증거하라 전주일 말씀을 증거하라 이러니까 전전 주일 말씀을 증거하겠다고 하는데 그때 자기는 아마 그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그런, (안들립니까?) 자기는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증거하려고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경험으로서는 오늘 저녁에 설교는 실패한다 내가 그것을 느꼈습니다. 왜? 우리는 자신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 있으면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적어집니다. 적어지면 하나님은 적어지는 것 만치 같이 함이 성글어집니다. 또 부족하면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느끼는 그 도수가 강한 것 만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강합니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말을 잘 들어도 또 영감을 받아도 또 실행을 해도 또 그다음에 또 있습니다. 알아 듣도록 말씀을 잘 증거하는 것 있고 그것이면 다냐? 아니요, 그 위에다 그 속에 더 귀한 것 있습니다.
그사람들이 영감을 받아야 됩니다. 영감 받으면 다냐? 아니요 그 속에 더 귀한 것 있습니다. 영감받고 실행을 해야 됩니다. 실행하면 다입니까? 아니요, 그보다 더한 것있어.
그사람이 성화를 받아야 됩니다. 성화 받으면 다입니까? 성화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는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약할 때에 강하여 지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내가 내게 찌르는 가시를 하나님 앞에 없애 달라고 세번 간구했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주는 내가 족하도다 말씀하시고 자기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로 하여금 낮아지지 못하고 무능한 것을 자기가 자기를 아는 무지무능의 자기인 것을 아는 지식이 이것이 가리워지고 희박하게 되기 쉽기 때문에 주님이 이것을 희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찌르는 가시를 주신 것인 것을 깨닫고 자기 생활에서 내가 약할 때에 강하여지는 것을 내가 알았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자기 신앙 경험에서 말했습니다.
자신이 있었던 거기에 막상 전 시간에는 은혜를 받고 은혜를 끼치고 했는데 엊저녁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 줘서 엊저녁에는 설교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자기의 무능 여기에 소자라고 말한 이대로 자기의 능력없는 그것과 자기가 하나님과의 가리워져 있는 그면의 사람이 되어서 그 면으로 인하여 머리를 들 수없는 그 때에 하나님과는 가까와집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마는 밧모섬에 사도 요한이가 일생동안 하나님과 제일 가까와 진 때는 밧모섬에 있는 때입니다, 밧모섬에 있는 때는 주님과 자기 사이가 가리워진 것이 치워지니까 주님을 보니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과 같고' 말한 것은 주님의 얼굴이 부셔서 보지를 못하겠다 부끄러워서 보지를 못하겠다 주님의 얼굴을 대하니까 부끄러워서 볼 수 없는 그 보다 더 강해서 두려워서 볼 수없는 너무 주님 앞에 한 것이 자기가 불칙하게 한 자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이 주님과 가리워진 것이 치워진 연고요 그 때에 사도 요한이는 신구약성경의 마지막 결론을 맺는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높은 영감을 받아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이러니까 사람에게 참 있는 것이 보배지만 있는 것이 보배인데 그 쓰는 데 보배인데 있는 것이 그것이 잘못하면 그것이 있으니까 있는 것만치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고 교만해서 그것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이 약대, 낙타 약대 큰 말같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겠다. 그것 됩니까?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자는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말해놓은 것입니다.
그 부자는 돈부자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로서 실력에 그것을 해낼만한 그런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뽑아나기기 전에는 자기는 하늘나라 들어갈 수 없는 그것을 말합니다.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 반대 부자 반대 가난한 자 여기 소자야 안심하라고 함을 받은 그와 같은 요 사람 소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질 그 때에 하늘나라는 그를 영접합니다.
주님은 그를 영접하고 주의 모든 것을 그를 통해서 나타냅니다. 왜? 나타내어도 제가 자기가 어떤 작은 자인것을 가난한 자 인것을 지금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통해서 나타내어도 나타낸 그것이 스스로 자기가 나타냈다고 인정하는 그런 교만으로 멸망받는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나타냅니다.나타내고 나면 그만 사람이 나타내기 전에는 소자인데 가난한 자인데 나타내고 나면 즉시 자기가 그만 대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것을 후회를 하시고 탄식을 하시고 그 다음에는 그만 같이 하지 않고 또 아무도 오는 것 싫다. 이래서 어린 부흥사가 한시간 은혜있는 설교하고 나면 우쭐해지면 그 다음에 그 다음 시간에 설교가 안됩니다.죽을 설교됩니다.이러니까 또 죽자고 이제 자기 아닌 것을 자기의 가난한 자인것을 깨달아 가난한 자가 되어졌을 때 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또 은혜를 끼칩니다.
끼치면 아, 끼치고 난 다음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우쭐하게 또 큰 것이 나오려고 할때에 내가 지난 시간에도 그러다가 하나님과 나와 끊어져서 내가 설교에 죽을 쒔다.은혜를 끼치지 못했다. 이제는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 되겠다. 하고 단속을 하면 그다음 시간이 계속해서 은혜가 있게 되는 데 두시간 은혜가 있으면 그만 자기도 모르게 또 우쭐해져서 있는 자로 부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또 끊어지고 이래서 한 시간은 은혜 끼치고 한 시간은 또 암흑을 당하고 이제 차차 자라면 한 집회에 반쯤 은혜를 끼치고 나면 또 우쭐해져 가지고 하나님과 끊어져서 한시간 그 암흑을 만나고 그다음에 또 낮아지니까 은혜를 끼치고 이래서 이래 나가다가 자라면 한 집회는 실수없이 은혜를 끼치고 자나고 나면 그다음에 또 실수를 하고 이제는 두 집회에 은혜를 끼치고 난 다음에 실수를 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집회에 은혜를 끼치고 계속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졌다고 하면 그사람은 계속 작은 자된 그것이 계속 됐을 때에 은혜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서목사님이 좋은 체험을 받았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가정이 좋다고 대대로 믿는 가정이요 양반의 가정이요 또그 인품들이 좋다, 그 문벌 자기 가문은 좋다는 문벌의 그 놓음 자기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학벌의 높음 자기는 선천적으로 참 모든 면이 구비했다는 그 선천의 아름다움 후천의 수양이 많은 그 아름다움 이것이 있는데 그것 가지고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주셨으니 그것 가지고 주님을 더 섬겨야 될 터인데 그것이 들어서 도리어 주님을 섬기지 못한 그것이 들어서 주님을 노엽게 했다는 그것이 거쳐지고 그것이 자기의 화근이 되어진 요것으로 깨달아 그것이 화근되어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 앞에 우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 앞에 더 낮아지고 주님 앞에 이것이 가리고 근심되게 한 죄인이 되어졌으면 그것이 없는 사람보다 굉장히 보배입니다 보배이고 그것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가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면 그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 그게 없는 때보다 그게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적어도 되리라 요렇게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라 말이요 그까짓 게 하나님을 대용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그런 자들은 그것 가지고 일생을 실패를 합니다.
이러니까 고린도후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 안에서는 문벌 학벌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 쳐놓고 그리스도 안에 큰 사람이 없지는 안하지만 많지를 못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또 그리고 우리가 자신 없을 때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고 자기를 인정할 때에 하나님은 멀어집니다. 그러기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 이랬습니다. 죄 가운데 깊이 빠졌던 그 사람이 도리어 은혜의 큰 역사를 하게 됩니다. 죄 가운데 깊이 빠졌던 사람은 같은 죄라도 어떤 사람은 그 죄를 적게 여기는 사람은 적은 죄에 빠진 사람이라 적은 죄라도 그 사람이 죄에 대해서 똑똑히 눈이 밝아 봄으로써 그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일이 얼마나 크다고 죄인된 강도가 높아지고 자기의 무지무능의 강도가 높아지는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면이 부강한 자보다 빈약한 자가 좋고 빈약한 자보다 없는 것을 깨달아 느끼는 자가 좋고 없는 것보다 자기는 죽어 송장된 자기인 것을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아 자기는 죽어 참 하나도 할 수 없는 자인 죽은 자 같이 되어지는 그것이 제일 하나님의 권능이 많이 나타나는 때요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이것은 최고의 절정인 살아있으면서 자기는 죽어 하나님 아니면 살 수도 기동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인정하는 그것이 기독자로서는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느낀 바울은 '내가 부할 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내가 처할 줄 안다. 내가 사람의 요소로서 부해지고 가난해지는 그것이 부해져도 그것이 무엇이며 가난해져도 그것이 무엇이냐? 거기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상관없다, 부해진다고 우쭐해지고 가난해진다고 자기는 약해지고 그렇지 않다. 왜? 그것은 부해지고 가난해지고 내가 세상에서 주의 일을 할 때나 처세할 때에 별 해도 효력도 없었다, 다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내가 알았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크지 인간적으로 부하고 가난하고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사소한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다' 말씀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에 약해질 때에 이 때에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되니까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기도를 많이 해서 자기를 부인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많이 부르짖을 때에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있지마는서도 고장은 우리 옛사람이 나오는 그것이 고장입니다. 그자가 들어서 제가 잘난 척, 저는 의로운 척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성경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 이랬는데 이것이 안된다 그거요, 옛사람으로 될 때에 능력이 안 나옵니다. 좋은 경험을 얻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많이 들었는데, 이 환자가 예수님이, 아무것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 난치병 이것을 예수님이 치료해 주시리라 믿고 와서 이 병이 나으니까 그 사람이 모든 사람 가운데에 참 병이 나았으니 기뻤겠고, 또 평안했겠고, 모든 사람보다 소망이 넘쳤겠고, 모든 사람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 멸시했던 반대로 모두 우러러보면서 많은 그 주목의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우리도 참 자기의 행복이 병들어 있는 것을 깨닫고, 행복이 병들고, 인격이 병들고, 그 모든 지능이, 지능의 실력이 병들고, 이 믿음 생활한다 하지마는 믿음 생활이 병든 이것을 자기가 고통스럽게 불행스럽게 느끼고 이것을 예수님에게서 치료받을 수 있는 줄 알고 달라붙는 사람은 참 복있는 사람입니다.
고깃덩어리의 병이나 뭐 이런 것보다도 자기의 모든 행복이 다른 사람 보기에 모두 부러워하지마는, 부러워하지만 그 행복이 변해서 큰 화가 되어질 수 있는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에 병든 점, 자기의 인격에 병든 점, 자기의 기능에 병든 점, 자기의 신앙에 병든 이것 때문에 자기가 참 주님 안에 있는 이 행복을 자기가 누리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이 기쁨을 가지지 못한 이것을 탄식할 줄 알고 예수님만이 이것을 치료해 주실 수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복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치료가 됐다면 된 것만치 그 사람은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과 희망이 넘칠 것이오. 또 그리 되면 그 사람이 돈 없어도 세상 지위 권세 없어도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모든 관심이 기울어지는 그런,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그런 상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이 행복보다도, 지난밤에도 그것을 자기는 느꼈기 때문에 말을 하는데. 참 이것보다도 주님과 자기 사이가 가리워져 있는 것, 이것이 확 틔워지지 안하고 가리워져 있는 것, 가리워져 있으니까 들리지지를 안하고, 가리워져 있으니까 보여지지를 안하고, 가리워져 있으니까 그의 충만이 자기에게 충만해지지 안하고, 가리워져 있으니까 제 삼자에게 전달돼 가는 것이 빈약해집니다.
마치 펌프에 가로막아 있던 것을 틔우면 물줄기기 힘있게 멀리 퍼쳐 나가는 것처럼 주님과 참 우리 사이가 가리워진 게 없으면 이것이 얼마든지 힘있게 퍼쳐 나가는 것인데 이게 들어서 가리워져 있는 것, 그러면 자기가 이렇게 세상이 모르는 병든 것을 아는 것보다 이 병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치료받은 것이 크고, 치료받은 것 그것보다 자기가 남이 갖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이 행복을 가지고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이것이 크고, 이것보다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가리워져 있는 이것 틔워지는 것이 크고, 주님의 마음을 솔박 빼앗는 것 이것보다 큰 것은 술람미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목의 구슬꿰미로 네 마음을 다 뺏들었다” “네 목의 구슬꿰미로 네 마음을 다 뺏들었다”(아4:9 ) 이 목에 구슬을 다는 것 이것이 아가서에 나와서 장식들 여기 모두 목거리에 구슬을 답니다. 네 목의 구슬로 장식한 그 구슬 장식을 인해서 내 마음을 다 빼앗았다.
내 마음이 다 네게 다갔다. 그 구슬, 목의 구슬꿰미라는 것은 그 속에서 나오는 생각, 모가지를 통해서 나오는 생각, 마음, 소원, 말, 비판 평가 이것을 말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 생각을 그렇게 가지니, 이 목으로 이리 입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이 머리에 있는 것 이 몸에 있는 게 다 이 목으로 입으로 나와서 그것이 나옵니다. 그것이 입이 아니면 발표를 못 합니다. 그것이 곧 그의 인격, 그의 사상, 그의 소원, 그의 겸손, 그의 무지 무능 그것이 그 속에서 나올 때에 주님은 그 미에, 그 덕에, 그 신덕에, 그 아름다움에 주님의 마음은 다 뺏겨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렇게 표시했지마는 여기에는 그렇게 표시하지를 안하고 “소자야 안심하라”우리가 자기의 모든 자기나 자기 행위에 참 그 병이 고쳐지는 그것보다도 자기에게 하나님 은혜가 와 가지고서 넘치는 기쁨과 평강과 소망 이것이 더 행복되고, 그것보다도 주님과 가리워진 것이 틔워지는 그것이 행복되고, 사도 요한이가 가리워진 것이 트인 것처럼, 베드로가 가리워진 것이 트인 것처럼.
틔워지니까 가리워져 있을 때는 주님 배반하고 고기 잡으로 갔지마는 가리워진 것이 고기 잡는 데서 틔워지고 보니까 고기는 하나도 생각이 없고 주님과 막힌 그 점에서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니까 위로하면서 ‘그게 네가 틔워진 것이니까 이제 후로는 이런 데 욕망 두지 안하고 인간 수입에 욕망을 두리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나 사이가 가리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눈이 가리워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나쁜 것도 보지 못하고 좋은 것도 보지 못하고, 흉한 것은 좋다고 좋은 것은 흉하다고, 듣지도 못하고, 또 주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 역사하지도 못하는 이 가리워지는 것이 틔워지는 것도 좋지마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주님의 마음을 끌어 주님의 그 마음이 “네 목의 구슬꿰미로 내 마음을 다 뺏들었다” 내가 내 마음이 네게 솔빡 다 뺏겼다. 네가 내 마음을 다 뺏들었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뺏들었으면 그 신랑은 어떻게 하든지 그 아내를 기쁘게 하려는 좋게 하려는 거기에 다 기울어지고 자기 전부는 그가 뭘 좋아하는가 해서 그것 맞춰서 다 할 것입니다. 마음이 기울어지면. 어떤 사람이 돈이 그 사람 마음을 뺏들었으면 두말 할 것 없이 그 사람의 전생애는 돈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가리워진 게 틔워지는 것도 좋지마는 주님의 온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참 완전하신 그분의 마음이 내게 다 기울어져서 ‘네가 내 마음을 다 뺏들었다. 내 마음과 나는 전부 다 네게 가 있다.’ 할 수 있는 주님이 감화 감동을 받아 주님이 있는 걸 다 기울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요 아름다운 매력 요것이 주의 신부된 성도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게 뭣이냐? 이것이 소자요 죄인입니다.
소자요 죄인이오.
“소자야 안심하라” 주의 마음이 이렇게 기울어질 수 있는 이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제일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매력으로 볼 게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작은 것을 매력으로 보고 죄를 매력으로 봅니다. 이래서 “내가 온 것은 죄인에게 찾아왔다” 했어. 죄 외에는 당신의 마음을 끌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 외에는 당신의 마음을 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참 그 작은 면을 자기가 찾아 작은, 큰 게 백도 만도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크고 그런 것은 보이지 안하고 자기에게 작은 면 그 면만을 자기가 알아 그 면의 사람, 그 사람만 되어 있는, 그 사람만 되어 주님 앞에 발버둥치는, 주님과 나와의 가리워져 있는 삐뚤어진 그것만 가지고 그 사람만 되어 있는 그것이 주님을 끄는 힘 중에는 제일입니다. 그것만이 끌 수 있습니다.
그게 뭣이냐? 내가 병든 자, 그게 병든 것이라. 병든 자를 치료하려고 주님이 오셨어. 그것 외에는 주님을 끄는 길이 없습니다. 소자, 약자.
그런고로 우리가 요것이 되어지는 것이 요것이 문제입니다. 병든 자, 죄인, 요것이 주님을 끄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하여 달린다”(빌3:14 ) 그말이 무슨 말이요? 자기가 모든 사도 가운데 위대함이 많지마는 그것은 눈에 하나도 안 보여. 그것은 하나도 안 보이고 주님과 나 사이에 지금 거리를 두고 거리가 되어 있는 것, 주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되어 있는 그것만을 자기는, 바울은 그것밖에 자기 눈에 보이지 안해. 그 사람만 돼.
그 사람만 돼 있었어. 이러니까 주님은 바울에게 그 전부가 다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반대로 바리새교인이 이와 반대기 때문에 세리는 세리지마는 요게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했고 바리새교인은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