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3:27
자랑
본문 :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또 사망 아래에 있는 세상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도이요 또 산 것들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이 산 것을 알 수 없고 산 것은 죽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도 모르고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이 생명의 도리를 모릅니다. 왜? 세상은 그들이 아는 지식이 있고 또 그들이 가진 세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견해를, 모든 견해를 그들의 지식대로 견해하고 그들의 세계를 표준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이해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을 주관하는 악령의 반대인 성령의 감화를 입지 않고는 기독교는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사람은 생각 가지고 사는 건데 생각이 뜻을 놓고 뜻이 행동을 놓아서 모든 인간의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모든 생활의 기원은 생각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가진 것 중에 지킬 것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 중에 제일 지켜야 될 가치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생각이 잘못되면 모든 게 잘못되고 생각이 바로 되면 행동과 그 결과가 다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 중에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각과 영의 생각, 영이라 말은 성령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이 두 가지 생각이 세상에 있다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마는 천국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옥과 연관된 것도 세상에 있고 천국과 연관된 것도 세상에 있는 성령과 악령이 함께 있는 세상 속에 끼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사망의 길이 우리 앞에 있고 생명의 길이 우리 앞에 있는 이 두 길을 항상 맞이하는 이 기로에서 우리의 갈 길을 선정해 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생각은 항상 성령의 생각을 거스리고 성령의 생각은 항상 육신의 생각을 거스립니다. 왜? 하나는 죽는 것이요 하나는 사는 것이기 때문에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에 끼어있는 우리들로서 어느 생각을 우리가 취택하느냐 하는 것이 항상 우리 현실에는 놓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이 현실에서 취하느냐 성령의 생각을 취하느냐? 이 생각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그저 만물보다 거짓된 육신의 생각대로, 육신의 욕심대로 모든 것을 소원하고 경영하고 노력하는 참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빛의 아들이라 하지만 깜깜한 어두움의 사람으로 살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현실 현실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는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이 두 생각이 반드시 우리 앞에 놓여 있어 우리는 두 생각 중에 어느 생각이든지 하나를 취하기 마련이고 취하면 그대로의 우리의 모든 정력은 다 기울여 노력하게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으로서는 성령의 역사를 모릅니다. 성신의 감화를 받은 자만이 성령의 생각이요 성령의 인도하시는 이 생명길인 성경이 말씀하신 것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말세가 되어갈수록,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와 갈수록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으로 기울어 진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교훈을 들어도 곧 육신의 생각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자기 좋은, 자기 좋아하는, 자기 성미에 맞은, 자기 좋아하는, 자기에게 좋고 유익된 그것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들어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위하는 이런 교훈은 사람들이 듣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들으면 졸음 오고, 들으면 구역질 나고, 들으면 속에서 용굴대가 올라옵니다.
여기서도 설교를 들을 때에 육신에 속한 것 육신의 생각을 말하면 취미가 있어서 예배시간 한 시간 반이 아니라 열다섯 시간이라도 지겹지 않고 듣고 있을 것입니다. 테레비 보는 사람들이 거기는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끌리는 그것이, 거기는 성령의 생각은 없습니다. 전부 육신의 생각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불과 한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초롱 초롱한 사람이 그만 졸고 그 시간이 지루해서 예배시간, 예배 드리는 시간이 이제는, 그래도 천주교에서 개혁할 때에는 세 시간 이하를 설교하는 사람은 일꾼이 아니라고 했는데, 짧아져서 두 시간, 한 시간, 40분, 지금 육신의 발달이 돼 가지고 있는 그런 나라에서는 설교 15분, 15분도 길어서 설교 10분 노래 20분 30분이면 족하다, 또 거기도 오락을 끼워 가지고 오락을 10분이나 찬송 한 5분이나 하고 설교는 10분, 15분이면 족하다 하는 것으로 점점 이렇게 발달돼 나가는 것이 그것이 사망으로 점점 발달돼 나가는 것이지 생명으로 발달돼 나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거 왜?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사람을 성령의 사람으로 바꾸어, 육신의 사람을 죽여서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사람 그놈 저 죽이는 일이니까 듣기 좋을 리가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서 듣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다가 안 되면 졸음을 주고 졸음 주다 안 되면 속에서 반발이 뛰어 나옵니다. 짜증이 나옵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만날 듣기 싫은 소리 하는 소리만 한다고 짜증이 나서 강단에 설교하는 자를 끌어내려 버리면 싶고 미워서 욕찌기가 나옵니다. 그렇게까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으로 저 망할 죄악이 되는 것, 썩어지고 없어질 것, 사망에 속한 것 그런 것은 말하면 기분이 나고 듣기가 좋은 우쭐거리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가 영의 사람의 한없이 유약하고 이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를 멸망한 그 자기 아닌 자기, 육신이, 영이 주격이 아니고 육신이 주격이 돼 가지고 날뛰는 이 원수에게 종이 되어서, 마치 술 취한 자가 술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병신들고, 병신됐고, 병들었고, 비참하고, 가련한 자기인 줄을 모르고 그래도 떠들고 날뛰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날까지 자랑하고 떠들다가 멸망한 거와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렇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도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주일날 대예배만 가지고 예수믿는 도리를 진정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왜? 거기는 많은 신앙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거기서 참 믿는 도리를 말하면 듣기 싫다고 다 헤어져 갈 모양이니까 우선 붙들어 놓고 젖이라도 먹여서 붙들어야 되지, 거기서 참 영양있는 식품만 먹이면 다 달아날 터이니까 붙들어야 뭐이 되어지지, 이것 때문에 주일날은 실은 진정한 도의 그 핵심은 증거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쳐 놓고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이 바른 신앙을 걸어갈 리가 절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대로는 잘 살고 의인이고 성자고 성녀라도 성령의 생각으로는 판이한 것입니다. 그 평가하는 것이 다 육신의 생각으로, 육신의 지식으로 평가하고 성령의 생각과 성령의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가 새벽기도를 나와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자기에게 무겁게, 크게, 강하게, 두렵게, 보배롭게, 한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가치있게 들려지지 않는 것은 자기가 옛사람에게 사로잡혀 새사람이 파묻혀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 비참한 가운데에 있는 자기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도 여기 이 본문에서 좀 알기에 어려운 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자랑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랑이라는 것은 내적으로 자기가 그것을 제일 귀하게 평가하고 있는 그것이오. 자기 속으로 그것은 '이건 참 보배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요, 또 자기가 그것을 바라고 의지하고 생활하는 것이요, 그것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그게 제일 보배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내 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자랑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내적으로 자기가 귀중히 평가하고 자기가 그것을 바라고 의지하고 살고 이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는 데에는 그것을 나타냄으로 자기가 커질 줄로 알고 나타내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자랑한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랑에 대해서 여기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말씀을 했으니 하나는 어리석은 자랑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어리석지만 말하겠다. 나의 어리석은 것을 너희들이 용납하라,' 다른 데는 '내가 미친 말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랑이든지 미친 말을, 미친 자랑이요 어리석은 자랑이요 그런 자랑을 여기 말씀했으니 그 자랑은 다 어떤 자랑인가? 세상과 세상에 속한 지식, 자기 문벌, 자기 문중, 자기 족속, 자기 지식, 자기 지위, 자기 권세, 또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많은 옥고와 고문과 고형, 모든 기근 적신, 위험, 이 모든 수난당한 그것 이것을 자랑하는 자랑을 어리석은 자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랑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선천적으로 잘 타고 났다, 명철하게 타고 났다, 후천적으로 많은 수양을 가졌다, 구비한 지식을 가졌다, 재벌을 가졌다, 세상에서 명예있는 그런 유력한 공적이 있다, 지혜가 있다, 누구보다도 슬기롭고 활동성이 강하다, 의지가 굳다.' 어쨌든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요소, 인간의 요소 그것을 자기가 보배로 알고 가치로 알고 그것이 자기의 생애 도움이 될 줄로 알고 다른 사람에게 상대할 때에 그것을 들어냄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알아주게 만들고 자기를 높이고 이렇게 하는 이것이 자랑인데, 육신의 생각으로 세상법으로 볼 때에는 당연히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만한 일인데 이것을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랑이라, 미친 자랑이라, 부득이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미친 자랑을 해야 되겠다, 어리석은 자랑을 해야 되겠다' 그 미친 자랑 어리석은 자랑이라고 말씀을 하고, 또 자기가 이렇게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받은, 주를 위해서 수난을 많이 한 그 수난, 그 고난 받은 그것을 자랑하는 그 자랑을 한꺼번에 어리석은 자랑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 나는 주를 위해서 옥에 많이 갇혀서 옥고를 많이 했고, 기근과 적신의 고통을 많이 당했고, 고문과 고형을 많이 당했고 복음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다.' 하는 그것은 참 자랑을 할 만한 가치있는 자랑인데 그 자랑을 어리석은 자랑이라 이렇게 말해 놨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세상 지식으로 서는 이해 못할 자랑입니다.
요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이런 이런 이력을 가졌고, 이런 학력을 가졌고, 이런 자원을 가졌고, 이런 유전을 가졌고, 이런 문벌을 가졌고, 이런 족속을 가졌고, 이런 포부를 가졌다'고 이래 가지고 마구 온 구석구석마다 광고를 써붙이고 신문에다 자꾸 내고 하는 이런데, 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당한 그 어려움이야 당연히 자랑할 만한 자랑인데 이 자랑까지도 어리석은 자랑이라 미친 자랑이라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세상과 정반대됩니다. 세상은 광고를 거짓 광고라도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많이 인식을 시키면 그 사람이 잘난 사람이요 승리한 사람이요 실력이 있는 사람이요 참 성공한 사람이라 이렇게 보는 것이 세상인데 성경은 자기가 있는 것을, 있는 것을 그것을 있다고, 있는 그것을 보배로 평가하고 의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나타내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도록, 아예 삼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이래 하는 이것이, 또 다른 사람이 칭송하도록 이렇게 하는 이것이 당연히 할 일인데 이것을 어리석은 자랑이라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어리석은 자랑이라. 내가 미친 말을 한다.' 이랬어.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랑이요 미친 자랑이라. 그거 왜 그럴는지?
또 하나 참 자랑을 말했습니다. 참 자랑은 여기 말하기를 '14년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자랑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자랑한다.' 세상이 보든 사람들이 자기의 가진 것, 자기의 복음 위해서 수난당한 것 그것을 자랑하는데 그런 것을 위해서 나는 자랑하지 않는다. 너거들이 자랑하기 때문에, 자랑하라 하기 때문에 부득이 내가 미친 자랑을 했다.
어리석은 자랑을 했다. 그건 자랑할 가치가 없다.
참 내가 자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14년 전에 주님에게 끌려서 입신 중에 들어갔는데 육신을 벗었는지 입고 있었는지 그거는 모르지마는 육신과 상관없는 순전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이 육의 것은 다 제거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된 새것, 하나님으로 인하여 된 새것 새사람 그것을 자랑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진리로 더불어 결합이 완전히 되어서, 육신의 것인, 육신의 것은 관련이 없고 육신의 것은 완전히 벗어나서, 있었는지 벗어났는지 그거 모른다는 말은 육신에는 상관이 없다 말입니다. 육신에는 상관이 없이 순전히 성령과 진리와 하나된 이 사람을 자랑한다, 그렇게 자랑한다 했습니다.
그것도 또 세상이 모를 말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말하기를 '나는 완전히 자라. 흠이 없는 자라 하나님이여, 나에게 흠이 있나 찾아 보십시오. 정죄할 게 있는가 찾아 보십시오. 나는 완전한 자입니다. 언행심사에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완전합니다.' 이렇게 말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을 자랑하고 그 사람을 높이고 그 사람은 완전한 자라 말한 것은 육신의 사람을 떠나 하나님의 대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자기가 완전히 부인되어 끝나고, 자기가 부인되고 순전히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진리와 하나님의 공로로 인해서 완전히 새것이 되어진 것, 새 것 되어진 것 그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거는 완전자입니다. 그는 전지자입니다. 전능자입니다. 그는 완전자입니다.
그 완전은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니 자기 자랑이 아니요,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그 새사람을 자랑하는 그 자랑인 것입니다. 그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12장 5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 위에는 자랑치 아니하리라'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랑 하겠으나 나를 위해서는 자랑치 않겠다 내나 이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런 사람이 바울 자기입니다. 또 '나를 위해서 자랑치 않겠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나 바울 자기입니다.
자기를 두 사람으로 분리해서 하나님으로 진리로 말미암아 된, 성화된, 구속된, 새것으로 된 이는 완전자라. 그자만이 완전자라 그 자만이 완전자이기 때문에 그자로 자라가려고 그자를 목표하고, 나를 인하여는 자랑하지 않는다 그 말은 아직까지 미결로 되어 있는 자기로 인해서 자기는 자랑할 것이 없다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고 사는 생활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법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에서도 이것이 혼돈되고 혼란되고 혼잡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시시비비가 많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거와 같은 그런 말을 하면 기독자들이 귀가 쫑긋해서 다 듣기 좋아합니다.
오늘도 제가 기도실에 오면서 그 기사가 방송을 틀어서 그 방송을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도 다 듣기 좋아할 말은 다 좋아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늘에 속한 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듣기는 싫어합니다. 말세가 되어 갈수록 그러합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지혜있는 자랑을 말했습니다. 지혜있는 자랑. 어리석은 자랑, 참된 자랑, 지혜있는 자랑. 마지막에 지혜있는 자랑을 말씀했는데 이 지혜있는 자랑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울은 살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왜 지혜있는 자랑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살려고 했는가? 그것은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에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약한 것을 자랑하는 자랑은 하나님의 온갖 지능이, 하나님의 온갖 충만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온갖 충만이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자기에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온갖 그 능력의 것이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방편은 지혜있는 자랑이니 자기의 약한 것을, 약한 것을 자랑하는 그 자랑을 놓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능하신 능함은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약한 것을 자랑하는 자랑을 그치고,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자기의 잘난 것을 자랑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약한 것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이 자기에게서 떠나가고 악령의 사망의 세력들이 자기에게 와서 팽창하게 되는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혈육을 자랑하고 자기의 신앙 생애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혈육을 자랑하고, 자기가 이런 신앙의 위대한 생애를 했다고 신앙 생애를 자랑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하는 그 재촉이오. 자기의 온갖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면의 그 무한하신 능력을 자기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랑, 참된 자랑, 지혜있는 자랑 이 세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자랑입니다.
어리석은 자랑은 두 가지. 하나는 자체의 위대함을, 자체의 위대함, 자체나 자기의 소유나 그것의 실력 있음을, 가치 있음을,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 자기는 힘있는 사람이요, 실력있는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이요, 행복된 사람이라 이렇게 인정하여 다른 사람에게 척 나가면 이걸 척 나타내는 간판으로 턱 내 세우면서 이래 하는 것. 자기에게 있는 자기 것.
자기가 신앙 생애에서라도, 위대한 신앙생활 하는 그 신앙 생애, 바울이 내가 갇히기도 많이 갇혔고, 매도 많이 맞았고, 수없는 고난을 당했고, 주를 위해서 여러번 죽을 뻔한 그 생애 이거는 참 자랑할 만한데 이것까지도 자기에게 있는 자기의 것, 자기의 가치, 자기의 능력, 자기의 소유, 자기의 생애 이것을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랑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랑이라 말씀했습니다.
이것만 기억합시다. 어리석은 자랑. 이것이 어리석은 자랑이라.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할지라도 어리석은 자랑으로만 알고 있으십시오. 어리석은 자랑이라.
'아, 나는 대대학의 지식을 가졌는데, 나는 박사 학위를 가졌는데, 나는 이런 권세를 가진, 이런 지위를 가졌는데, 이런 과거의 그 이력을 가졌는데, 신앙 안에서는 나는 이 신앙의 위대한 생애를 했는데' 하는 그것을 성령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랑이라, 미친 자랑이라, 자기에게 손해가는 자랑이요 유익이 하나도 없는 자랑이라.' 그러나 바울이 미친 자랑한 것은 '너거를 위해서 내가 미쳤다.' 했어. 남에게는 유익할지라도 자기에게는 손해입니다. 자기에게 대해서는 어리석은 자랑이요 미친 자랑이 입니다.
참 자랑은 자기 중에 자랑할 것 없는 사람 떼 내버리고 자랑할 것 있는 사람, 하나 예를 들면 14년 전에 입신 중에 3층천에 올라 가서, 육신까지 올라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지만, 완전히 이 악 안에 있는, 악 안에 있는 세상과 완전히 관련없는 영원의, 완전의, 무궁의, 볼변의 영생에 속한 그 사람 그것만 자랑하는 것이 참 자랑이라 했습니다.
또 지혜있는 자랑, 지혜있는 자랑, 지혜있는 자랑은 왜 지혜있는 자랑인가?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고 떠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게 되는 자랑이기 때문에 이 자랑은 지혜있는 자랑입니다.
그 자랑은 무슨 자랑인데? 그 자랑은 자기의 모든 면에 약한 것을 자랑 하는데, 왜? '내가 약할 때에 강하여지느니라'
어리석은 자랑, 참 자랑, 지혜있는 자랑 이 세 가지 종류를 성경이 말했는데 나는 어떤 것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인가? 어떤 자랑을 하는 자를 나는 부러워서 따라가고 있는 자인가 그것 좀 생각하고 오후에 그 자랑에 대한 것을 해석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세상에는 사람들은 자랑으로 삽니다. 자랑으로 살지 않는 사람 없소. 아무리 못나도 그것이 자랑합니다.
저 봉놋방이라는 요새는 지금 아주 하숙이라고 아무나 하룻밤에 거기 자려 하면 그저 한 100원 주면 잘 것입니다. 아주 하숙방이라고 제일 거지 천한 것들만 하는 것이 옛날 봉놋방입니다. 봉놋방에 거기서 수염이 가제 같고 허여이 이래 가지고 돈 없어, 가족 없어, 건강 없어, 모든 형편이 없는 비참한 거지들이 모여 앉아 가지고도 앉으면 그날 밤에 앉아서 밤새껏 이야기하는 것은 자랑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래도 언제 시절에는 돈이 있었고 무슨 장사를 했고 어쩌고 그 밤새껏 하는 이야기가 자랑 이야기 하요. 그래 가지고도 밤새껏 하는 것이 자랑 이야기.
그 사람만, 정신있는 사람이 들을 때에 '저렇게 망해 가지고 자랑할 게 뭐 있나?' 싶은데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인간은 둘이 모이고 셋이 모이고 만나면 제 자랑이오.
그러기에 자랑에 대해서 올바른 자랑관을 가지고 여기에 바로 서지 못하면 그 사람 비참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랑, 참된 가치있는 자랑, 지혜있는 자랑 세 가지 자랑을 여기 성경에 말했으니 왜 어리석은 자랑이며 왜 참 자랑이며 왜 지혜로운 자랑인가?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교회는 세상에서 배우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