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3:37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980. 7. 26. 토새
본문 : 야고보서 1장 22절 - 25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육체의 얼굴을 아는 데는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거울이 없으면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 하니까, 자기를 알고 싶어도, 자기 얼굴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 할 것입니다. 또 거울이 있다 해도 거울을 보지 안 하면 자기 얼굴을 모르겠습니다. 영모의 얼굴은 거울을 봄으로 알 수 있고, 자기라는 사람이 어떠한 것은 이 율법을 봄으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어도 율법을 보지 않는 자는 모를 것이오. 율법을 보고 알고 싶어도 율법이 없는 사람은 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바로 아는 데에는 자기를 바로 알 수 있는 자기를 알게 하는 거울, 곧 이 율법이 있어야겠고, 또 이 율법만 있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을 들여다 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을 들여다 보는 것은 율법을 상고하고 듣고 한 그것으로 율법을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율법을 들어서 읽어서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을 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이 율법으로서 자기라는 사람을 바로 보고 아는 데는 율법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울이 없으면 자기를, 자기 얼굴을 보고 싶어도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거울이 있어도 안 보면 모릅니다. 또 거울이 있어 자기 얼굴을 본 사람도 그러면 거울을 보는 것을 끝쳐서 그 거울을 자기가 떠나면 자기는 자기 얼굴을 잊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자기라는 사람을 바로 보고 아는 데는 하나님의 율법을 실행하는 것으로만 알 수 있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울이 있어도 안 보면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읽고 배우고 설교를 듣고 이렇게 해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거울을 안 보면 모르는 것처럼 이 율법을 실행하지 아니하면 모릅니다.
또 자기가 거울을 보려고 해도 거울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실행으로 자기를 알려고 애를 써도 이 율법이 없으면 안 됩니다. 또 이 율법이 있어서 율법을 실행하므로 자기를 아는 사람도 율법 실행이 중단되면 또 자기 아는 것이 그만 중단돼 버립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안 사람도 거울 보는 일을 그만 두면 자기 얼굴을 어떻게 생긴 줄을 모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얼굴의 거울은 얼굴을 아는 데는 명경, 거울이 필요하고 자기라는 사람을 아는 데는 하나님의 율법이 필요합니다. 거울이 있어도 사용하지 안 하면 자기 얼굴을 모르는 것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어도 이 율법을 실행하지 안 하면 모릅니다. 아무리 실행으로 알고 싶어도 율법이 없으면 안 됩니다. 율법을 보고 실행하므로 자기를 알았는데 율법 실행이 중단되면 자기 아는 것이 중단됩니다. 거울을 보고 안 것이 거울 치우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무엇인데? 율법은 영감의 진리입니다. 율법은 영감의 진리인데, 그러면 율법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율법없는 사람은 중생,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율법이 없습니다. 중생됨으로 이 율법이 자기의 것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중생되면 영감도리를 하나님에게 자기 것으로 받았고,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은 영감도리를 받지를 못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자기라는 사람을 바로 보고 아는 이 거울 같은 율법이 없습니다.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이 율법이 없습니다. 율법이 없으니까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자기를 바로 보고 아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것을 우리가 확정을 지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흐리멍텅하고 항상 무엇이 기준이 없습니다. 길이 없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그러기 때문에 불교와 한 가지, 예수교도 불교와 한 가지. 예수를 믿는 사람도 무엇인가 자기가 그저 구별하지 안 하고 있으니까 나는 천국 간다 뭐 있다 이리 생각하지 똑똑 구별하는 사람은 뒤에 가서는 전부 모르겠다 의심으로 다 끝마쳐 버리고 말지 그게 있어서 확신을 가지지 못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조와 교리가 확고히 서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불택자에게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택자라도 중생되기 전에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중생됨으로 실행하면 자기를 알 수 있는 영감도리가 자기의 것이 비로소 중생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되지 아니한 자에게는 성경이야 그거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지마는 영감도리를 받지는 못 합니다. 영감도리는 성경을 불택자가 백 번, 천 번, 천 독을 (읽다) 읽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성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을 하나도 모릅니다. 다 외워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말씀과 같은 그런 말이 아니고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이런 무한의 능력의 말씀입니다. 무한의 능력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한의 능력을 가진 인간을, 심히 탁월한 인간을, 심히 탁월한 인간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런 탁월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보다 하나님은 또 위에 계십니다. 인간은 이 진리 밑에 아주 쏵 내려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이 진리는 무한한 진리인데, 인간은 극히 유한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장성한 자를 이해 못 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학자를 이해를 못 합니다. 그것처럼 성신의 감화의 역사가 없는 이 진리를 성경책은 짊어지고 다니고 외우기는 외울지라도 이 율법을 알지는 못 합니다. 아는 것은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서만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가르치는 한마디 예수님이 구주라는 이것도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자기 구주로 삼는다는 것을 천 번 만 번 설교를 하고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인정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문서계시를 성신의 감동이 자기에게 역사해야 비로소 이 율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얼굴을 보고 알고 싶어도 낯에 그거 껌정이 있는지 자기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 자기 코가 반듯이 생겼는지 삐뚤어졌는지 눈에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 암만 보고 싶어도 거울이 없으면 못 봅니다.
거울이 있어도 거울 안 보면 또 몰라. 거울 봄으로 알다가도 거울 치워 버리면 또 몰라. 이거 모양으로 온전, 그 온전한 율법을 참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이 율법이 없는 사람은 이 율법으로만 자기를 알게 되는데 이 율법이 없는 사람은 거울 없는 것처럼 자기를 알고 싶어도 알지를 못 합니다.
율법이 없기 때문에 모릅니다. 율법은, 온전한 율법은 뭐이 온전한 율법인가? 영감과 이 진리. 진리를 영감이 성신이 알려주는 그것이 온전한 율법인데, 진리는 신구약 성경이니까 이 신구약 성경을 자꾸 암만 외워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이것이 그 사람에게 온전한 율법이 안 됩니다.자기를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 되지를 안 합니다.
남의 복음으로 자기가 짊어지고 이 설교를 여러 수백 번 수천 번 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남의 복음을 전해주고, 마치 편지 모양으로 전해주고, 도구 모양으로 스피커 모양으로 전해주고, 스피커 말한다고 스피커가 생명이 있습니까? 스피커를 통해서 들은 사람은 듣고 살지마는 스피커 저거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 모양으로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은 영감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진리를 아무리 말해도 남의 복음이 되지 자기 복음은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스피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은 해 주지마는 자기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온전케 하는 율법은 중생된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에게만 영감도리가 있다 그말입니다. 중생된 사람에게만 영감도리가 있지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에게 영감도리가 없습니다.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이 이 성경을 자기가 읽고 연구하고 외우고 성경을 증거하면 그 사람에게 영감도리가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영감도리가 없습니다.
영감도리는 중생하므로 자기에게 영감이 왔습니다. 중생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영감은 없습니다. 성령이 내주하기는 합니다. 불신자 속에도 성령이라는 하나님이 내주하시지마는 그는 정죄해서 멸망시킬 그가 어떤 죄를 짓는가 하는 그것을 챙기기 위해서 심판적인 영감이 내주하지 구원적인 영감은 내주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구원적인 영감이 그 안에 내주하는 데에는 그 사람이 중생하는 그 시간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생되는 그 시간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내주하기 시작했고, 중생하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내주하시되 심판의 하나님, 창조주의 하나님으로 그에게 내주하시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내주하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온전한 율법 이것으로만 인간이 자기를 알 수가 있는데 온전한 율법 이것을 가진 자가 어떤 자인가? 중생한 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온전한 율법을 가지고 있지마는 이 율법을 들여다 봐야 되는데 이 율법을 들여다 봐야 비로소 이 율법으로 인해서 자기를 알게 되는데 율법이 있어도 들여다 보지 아니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면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인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듣고 잊어버리는 자, 듣고 잊어버렸다 그말은 기억이 없다 그말 아니오. 어떤데 잊어버리느냐? 잊어버리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오. 실행하는 자니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어떤 자니 실행하는 자가 들여다 보고 있는 자라. 실행할 고때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라. 실행이 없을 때에는 자기에게 자기를 알 수 있는 율법으로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얼굴은 거울로 알 수 있고, 거울만 있으면, 그러면 저희 집에 거울만 몇 개 주 재어 놨으면 자기는 자기를 잘 볼 수 있습니까? 거울이 여러 수십 개가 재어 있어도 소용없소. 거울 들여다봐야 자기 얼굴 알 수 있소.
그러면 들여다보고 알고 난 다음에 그러면 들여다보다가 거울 치워 버리면 자기 얼굴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요? 조금 생각해 보십시오. 자 자기 얼굴 어째 생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납니까? 자기 얼굴 어찌 생겼다는 것 생각납니까? 생각 안 나게 돼 가지고 있소.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 없어도 안 되고 암만 온전한 율법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안 들여다 보면 안 되고 들여다 보다가도 그만 안 들여다 보면 또 잊어버리고 계속 들여다 보고 있으면 알고, 자기를 알게 되고, 그러면 거울은 눈으로 들여다 보지마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뭘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무엇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어떤 걸로 들여다 볼 수 있지요? 실행으로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실행으로만 들여다 볼 수 있소.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길은 하나 뿐입니다.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길은 하나 뿐입니다.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길은 하나 뿐인데 어떤 것이냐? 온전한 율법을 실행하는 것으로만 알게 됩니다. 온전한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행하지 아니하면 거울을 가지고 있으나 보지 아니하면 소용없는 것처럼 온전한 율법을 가지고 있으나 실행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모릅니다.
실행함으로만 자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행 없으면 이 율법을 실행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요것은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에게 자기를 아는 거울이 되는 거울과 같은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거울과 같은 온전한 율법이 중생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고 아는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여반에 다 드십시오. 일부러 드십시오. 손 다 드십시오. 이게 필요해요. 녜 없습니다.
요것은 여러분들이 주입적으로 받아야 되지 그러면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기억하니까 기억이 어떤 게 기억입니까? 제까짓 게 따질 아무 지식도 기본 지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그는 실력이 없어. 그러니까 기억하면 기억 따라서 그대로 외워야 돼. 그대로 알고 그대로 자기가 받아들여 버려야 돼. 딴 게 없어요.
이거 모양으로 온전한 율법을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온전한 율법은 중생하는 그 시간에 자기의 것이 됐습니다. 자기는 성경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는 영감이 자기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은 자기의 성경이 됐습니다.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은 성경을 만 권을 자기 집에 재어 놓고 있어도 그 성경은 자기 성경이 아니라. 또 아무리 외워도 몰라. 이는 인간이 자꾸 읽는다고 인간에게 읽어지고, 인간이 알고 싶다고 자꾸 알아지는 게 아니오. 인간보다 크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는 이 진리라 그말이오.
세상 지식은 그 지식을 욕을 하면서라도 내가 정복을 할 수 있습니다. 읽으면 내가 알 수, 제가 알려줘야 돼요. 내가 또 그거 이용하려면 이용되어져야 됩니다. 진리는 그렇지 안 해. 진리는 중생되지 아니한 천하 인간들이 다 달라들어서 이 진리를 알려고 해도 이 진리가 알려지지를 안 해. 이 진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이용되지를 안 해.
이 진리를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히도록 하기 위해서 택한 자를 책임진 책임자가 누구냐? 책임자가 성령님이요 또 책임진 이치가 뭐냐? 책임진 이치가 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자를 지금 알리고 이자에게 역사하고 성령도 역사합니다.
그런고로 온전한 율법을 실행하는 데서만 자기를 알 수 있는데 온전한 율법을 가지지 못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도 중생되기 전에는 이 온전한 율법은 자기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이 없다 그말은 성령님이 상관이 없습니다. 중생됨으로 비로소 그 사람의 심신을 이 성령님이 착수를 했습니다.
중생은 영이 중생되는 것인데 중생됨으로 그 사람이 성령님과 연결이 되었고, 또 신구약 성경에 이 진리, 또 은밀한 진리, 이 진리가 그 사람과 연결이 시작됐습니다. 진리가 그 사람과 시작되는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며 영감이 그 사람과 연결되는 시작 시간이 어느 시간인가? 그것이 중생된 그 시간입니다.
중생된 그 시간으로서 진리와 성령이 그 사람과 연결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없어요.
그러면 시작됐으면 그 영감과 진리가 그 사람과 연결이 중생할 그때에 이제 자기와 연결이 시작된 것인데 이 연결된 이 영감의 도리 이게 뭐인가? 이것이 인간이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알 수 있는 거울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졌으면 다 알 수 있느냐? 거울을 가졌어도 거울을 봐야 아는 것처럼 아무리 거울이 여러 개가 있어도 안 보면 자기 얼굴을 모르는 것처럼 이 영감 도리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행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모릅니다.
실행하므로 자기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현실 현실을 주시는 것은 뭣 때문에 주시는 것인가? 주시는 것은 그 현실은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도록 하기 위해서 줬습니다. 현실은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는 그런 기회입니다. 현실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지 아니하면 자기를 모릅니다. 현실을 통해서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볼 수 있으니 온전한 율법을 실행할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자기를 알게 됩니다.
자기를 알게 되며, 그게 뭐냐? 자기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자기를 알게 되면, 이제 자기를 알게 되면, 요거 너무 범위가 넓어서 자기를 알게 되면 속박에서 갖힌 데에서 해방이 됩니다. 자기를 알게 되면 해방이 됩니다.
자기를 알기 전에는 심신이 원수인 자기에게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원수인 자기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원수인 자기를 미워할 자가 없습니다. 원수인 자기를 부인할 자가 없습니다. 비로소 원수인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알면 그자와 합작될 자가 없고, 그자를 환영할 자가 없고, 그자를 대적지 안 할 자가 없고, 그자를 배척치 안 할 자가 없고, 그자를 벗어나려고 하지 안 할 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원수인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비유컨데 공산주의가 자기 남편이 참 애국자고 아주 훌륭한 정치가인데 자기 남편을 공산주의자가 와 가지고 지금은 그렇게는 된 게 없지만 조금 있으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가 와서 '아무래도 요놈을 죽여야 민주주의를 절단내고 공산주의를 이제 세울 수 있는데 요놈을 죽여야 되겠는데 하고 누가 죽일 것이냐?' '이북에서 내가 죽이겠습니다.' 하고 파견을 받았다 그말이오. 파견을 받아 가지고 '요놈을 대리할 자가 누가 있느냐?' '내가 대리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죽였다 말이오.
죽이고 어쩌든지 그 사람의 머리와 꼭 같은 가발을 쓰고 얼굴도 그 사람과 꼭같이 정형을 했다 말이오. 전에 그 사람과 꼭 같애. 그 사람과 꼭 같은 얼굴, 꼭 같은 머리, 뭐 키도 꼭같은 사람을 딱 그래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내역을 다 알고 사무보는 것도 싹 다 알았다 말이오.
다 알았는데 요 사람이 와 가지고 어느 한 모퉁이에서 그만 그 사람을 죽였다 말이오. 그만 그 사람을 죽여서 없애버렸습니다. 없었는데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을 죽여서 없앴으니까 찾지마는 그 사람 죽여서 시체를 싹 없애 버리고 자기가 그 사람 입었던 옷을 딱 입고 그 사람들 집에 갔다 말이오. 가니까 아이들이 '아이구 아버지 이제 오십니까?' 남편도 '아 당신 오늘은 일찍 들어오시네요' 짝 하면서 인사하고 목성도 복장도 꼭 같이 하고 이러니까 이제 그 남편인 줄 안다 그말이오. 그 사람이 직장에 가 가지고도 그 사람 보던 사무를 미리 다 알아놨습니다. 가서 착착 보니까 도무지 모르는 거라.
이거는 실은 자기 남편을,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민주주의로 뒤비트리기 위해서 온 자인데, 이런 원수이면서 몰랐다 이거요. 몰랐는데 나중에 발견이 났습니다.
남편의 시체를 어따 채워 놨는데 그것이 화재가 나고 난 다음에 발견이 났다 말이오. 보니까 그 시체가 발견이 났는데 그 남편이 분명히 자기 남편인데, 그게 이게 비밀이 남편이 있는데 남편은 죽은 남편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지금 잡아서 수사를 한다 말이오. 속을 조사해 보니까, 속을 조사해 보니까 몸도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자기 남편이 아니라. 다른 점이 있고 또 이 사상을 전사 수산가 뭐인지 모르지마는 이 사상에 빼서 또 조사해 보니 완전 공산주의라 말이오. 이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 남편을 죽인 원수가 자기 남편으로 자기 집 호주로 자기 아버지 로 자기 나라에 충성된 정치가로 이렇게 과장을 해 가지고 이랬다 말이오.
자 그걸 보면 그 남편을 그 아내가 정이 들겠소 당장 지금 원수가 되겠소? 자 원수가 안 되겠다고 생각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그리되면 아들도 아내도 '이게 내 남편이 아니로구나 내 아버지가 아니구나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원수 안 될 사람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제는 그것을 아버지로, 남편으로, 자기 나라의 위대한 정치가로 모실 것이 아니라 이것을 원수로 삼아서 이것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어쩌든지 이놈을 죽여 없애는 데만 전심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인정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녜. 이겁니다. 바로 이거요. 왜? 자기를, 자기 남편을 죽인 원수를 발견하기 전에는, 알기 전에는 자기 남편인 줄 알고 자기 남편을 누가 해하면 막 역설을 들고 자기 아버지를 해하면 막 역설을 들고 이와 같이 참 알뜰한 남편으로 알뜰한 아버지로 좋은 애국자요, 정치가를 이렇게 인정을 하고 대우를 했지마는 이 원수인 사실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두 자기가 있는데, 한 자기는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요, 한 자기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 같은 자기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꼭 형상이요. 이러니까 하나님은 아니면서 하나님과 꼭 같다 이거요.
이런 자기가 있고, 또 이 자기는 만물의 영장이요 하늘과 땅에 통치될 때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역사하실 수 있는 영생을 가진 완전무결한 영 자기인데 이것이 이 마음의 주인공이요 또 몸의 주인공이라. 마음이 이것이 자기라.
이것이 자기가 자기라. 이것이 내라. 몸이 생각할때 온전한 이것이 내라.
이렇게 참 자기를 바로 발견하고, 참 자기 아닌 원수를 발견하고,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보게 되면 옛사람 자기를 원수로 삼지 아니할 자가 없고 새사람 자기로 사지 아니할 자가 없는 건데 왜 이렇게 못 사느냐? 옛사람을 사랑하고 새사람을 알지도 못 하고 부인해 버리고 이런 것이 새사람을 보지도 못 하고 알지도 못 했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이고, 옛사람이 어떤 자인 것을 보지도 못 하고 알지도 못 했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로 알아서 이렇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바로 보고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아주 자기의 전부입니다.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 이것이 중요하다는 이것을 느끼기를 자기 몸보다 중요하고, 돈보다 중요하고, 지위보다 중요하고,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아니할 때에는 이 목숨을 버려야 실행을 하고 이 실행을 해야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 목숨보다 중하지 아니하고, 목숨이 자기를 바로 보고 자기를 아는 것보다 목숨이 중하면 그 사람은 뭘 취하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를 취하라 하면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자기를 바로 아는 것과 목숨과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취하게 될 때에 바로 아는 것이 중하면 목숨 버리고 바로 아는 사람 될 것이고, 또 바로 아는 것보다 생명이 중하면 그때 그 사람은 바로 아는 것을 취하겠소 생명을 취하겠소? 어떤 걸 취하겠습니까? 생명 취하겠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생명을 버림으로 실행하므로 바로 볼 수 있는 자기, 바로 알 수 있는 자기는 생명 버리기 전에는 모릅니다. 생명 내놓기 전에는 모릅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좀 견고히 잡아야 됩니다.
실행을 받은 도를 실행하는 데에는 어떨 때는 자기 기분을 버려야 실행이 될 때도 있고, 자기 재물을 버려야 실행을 할 때도 있고, 또 자기의 몸둥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둥이를 참 포기해야 실행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참 생명을 내놔야 실행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실행하는 그것이, (실행하는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 실행하는 그것이 자기를 바로 아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알면 뭐할라고? 자기를 바로 알면, 자기를 바로 알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게 되고, 자기를 바로 알면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를 바로 알면 몸과 생명이 완전히 자기에게 소속이 되어서 소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알고 보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몸이라.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나님 같은 제사장, 하나님 같은 왕, 하나님 같은 선지자라. 하나님의 몸이라.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영계의 것과 물질계의 것을 다 자기 것을 삼고 있는 주인공이라. 이렇게 자기가 잘난 것을 몰랐어. 이렇게 자기가 잘난 줄을 몰랐어.
자기는 죽일 자가 없어.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지 칼로 찌른다고 찔러지지 아니하는 자기인데 이 자기를 보지 못 했기 때문에 이렇게 보배로운 자기 참 심히 원수인 자기 옛사람 자기를 보는 것이 천칭만칭이고 새사람 자기를 보고 아는 것이 천칭만칭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가치의 전부입니다.
옛사람 자기는 어떻게 보면 다 봤는가? 옛사람 자기는 완전히 부인해서 그거는 진공 같이 영짜가 돼. 돌벵이 공이 돼 버립니다. 전적 부인해 버려야 됩니다.
왜? 그자는 어떤 자인데? 전적 부패한 자요. 옳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 것이 하나도 없고 옳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 것이 하나도 없고 옳은 것이 하나도 없어. 자기를 유익케 하는 것이 먼지만큼도 끼어있지 아니하고 전적 악이요. 전적 악이요. 전적 죄입니다.
그것을 분석해 보니까 세 가지만 들어 있습니다. 악령만 들어있소. 악성만 들어있소. 악령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중심으로 타락한 천사장 그것이 악령입니다. 그 군대가 악령이요. 악성은 뭐이냐 하면 자기 인간성이 하나님 버리고 자기중심으로 살려는 그 인간성 원죄 뿐입니다. 원죄 그거 뿐이오. 원죄.
또 악습은 뭐이냐? 이제 하나님 배반하고 피조물 중심으로 행동한 그거 모아 놓은 것 행동해서 모아 놓은 그것, 그거 습성. 구습 그것입니다.
이러니까 악력, 악성, 악습으로만 되어 있고, 하나도 산 요소가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이것이 이제 자기인데 이것을 말로 아는 사람, 또 말로 하되 그 도수가 약한 사람, 강한 사람 이것을 온전히 다 아는 것은 어떤 것이냐? 전적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전적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악령, 악성, 악습 이것을 다 털어내 버렸는데 조그매 남았습니다.
조그매 남았으면 이놈이 암세포와 같습니다. 이놈이 들어와서 새끼를 쳐서 큰일 냅니다. 요것을 싹 다 버려 버리면 완전히 이것을 쏟아버리면 자기는 진공 같이 됩니다. 이거 아무것도 없는 영 같이 돼요. 영 같이 됩니다. 영 같이 되면 영에게, 예를 들면, 이거 비유인데 영에게 영, 영 더하기 하나 그러면 답이 뭐이지요? 하나. 영 더하기 천. 답이 뭐이지요? 천. 영 더하기 만. 답이 뭐이지요? 만. 만이지요. 자 이게 영이 안 되고 요게 억만을 가지고 있다가 다 내버리고 영이 안 되고 요게 하나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만 남았습니다. 하나만 남았는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뭐입니까? 둘. 처음에는 더하기 하나 하니까 뭐이 되었지요? 영일 때는 하나 더하기 하나 하니까 뭐이 되었지요? 하나.
이번에는 자기라는 것이 영이 되셨는데, 영이면 영인데 영인 자기에게 하나님도 보태니까 하나님 그대로요. 자기에게 만물도 보태니까 그대로요. 자기에게 악인도 보태니까 악인 그대로요. 이것이 만물을 다 안 것입니다. 다 알려버려.
그런데 자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요 하나에게 하나님 보태니까 답안이 뭐요? 하나님 그대로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그대로가 아니고 자기가 하나가 남아있는 그것하고 보태니까 하나님이 그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이요 변한 하나님입니까? 참 하나님이요 거짓 하나님이요? 거짓 하나님 됩니다. 거짓 하나님 돼요. 또 하나님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도 그러합니다.
이러기에 자기가 완전히 부인될 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으신 것, 무엇이든 변질되지 아니하고 바로 되어있는 것을 자기가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관계를 가집니다. 다만 변질된 것과 틀립니다. 악령과 타락한 인간 요 둘만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 맞지를 아니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는,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는,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 모든 것은 자기와 다 맞는데,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 맞지 아니한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두 가지 밖에 없어. 타락한 천사와 타락한 인간과 이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부인했을 때에 모든 것은 자기와 하나입니다.
자기를 부인했을 때에 악령과 타락한 인간은 자기와에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옛사람 자기를 알면 그것은 다 버려야 될 것이기 때문에 다 알면 다 버려서 진공됩니다. 그러면 진공되면 자기는 뭣 되고, 진공되면 자기는 자기에게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그대로 닮습니다. 그대로의 자기에게 닮아야 될 자기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첫째 하나님으로 자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자기가 돼요.
하나님의 성질로, 자기 성질로,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뜻,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 지식,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기 권능, 이제 하나님으로서 자기와, 하나님으로 자기,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은,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았어. 또 자기의 소유는 뭐입니까? 자기 소유는 하나님의 소유로 자기의 소유를 다 삼았소. 이것으로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오. 앞으로 계속하겠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돈보다도 귀중하고, 몸보다도 귀중하고, 목숨보다도 귀중하다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잡아야 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뭣 때문에 귀중한가? 자기를 영원무궁토록 멸망을 시킬 둘째 사망의 해를 나에게 전적 주는 그 원수 그것이 자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면 배반치 아니할 자가 없는데 인생들이 이것을 부인치 못 해 가지고 다 무지무능자가 돼 가지고 영원한 수치와 멸망을 받는 것이니 이 옛사람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영원한 멸망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새사람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영원한 영광의 구원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자기를 아는 것은 온전한 율법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알 수가 있다. 그 외 다른 것은 자기를 알지를 못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실 현실을 만난 것은 좀 여러분 듣기 어렵지마는 현실 현실을 만난 것은 그 현실에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 자기를 알아 자기를 부인케 하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케 하는 것이요 자기를 버리게 하는 것이요. 새사람 자기를 알아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자기로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심신이 자기 부인하고 심신이 자기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는 그것이 자기의 심신보다 중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 자기 심신보다 중합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바로 알고 바로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이 중요성을 느끼지 안 하면 안 돼. 아직도 이 시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자기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그 모두 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고 있소. 번연히 복있는 자리를 떠나서 저 딴 대로 기어 나갑니다. 복있는 길을 버리고 망한 일만 자꾸 취합니다. 그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현실에는 한없는 복이 있고 한없는 멸망이 있는데 왜 복은 취하지 아니하고 멸망은 자꾸 사람들이 취해가고 있습니까? 왜 그렇지요? 그거 왜 그렇습니까? 씨, 자기 착각해서, 따라합시다.
자기착각! 자기착각! 자기착각! 녜. 자기착가에서 그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착각하지 아니하도록 바로 아는 것이, 이것이 몸보다 중하고, 육체 생명보다 중하고, 지위 권세보다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데에는 어째야 압니까? 어디서만 알 수 있습니까? 온 천하 율법을 자기 현실에서 실행하는 요게서만 알고 딴 데서는 전혀 모릅니다. 요게서만 압니다. 요게서 하나 하나 토막 토막 알아냅니다. 요게서 하나 실행을 할 때에 거기서 비로소 옛사람 자기를 알았고 새사람 자기를 알았습니다. 그래 옛사람 자기는 그 시간에 배반했고 새사람 자기는 영접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제 봉지를 떼 놨으니까 교역자 되는 분들은 자기가 가 가지고 그것을 명상으로 연구하고, 성경 상고로 연구하고, 명상으로 연구하고, 또 도리를 명상하면서 현실에서 실행하면 자기 명상하는 것이 하나씩 둘씩 알려집니다. 책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알아지는 것 아니오. 요것을 명상하면서 자기가 알려고 하면 변소간에 가다가 알아지고, 세수하다가 알아지고, 또 누구하고 얘기할때 알아지고, 하나님 언제 가르쳐 줄지 몰라. 그거는 당신이 가르쳐 주고 싶을 때 줘. 그러니 그때가 어느 때인고 하니 내가 생각한 것을 잊어버릴 때라. 그때에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딱 가르쳐 준다 말이오.
자기를 발견치 못 해서 자기 그놈에게 끌려 가 가지고 개혁가도 되고 이단자도 되고 하는 그것이 다 자기를 몰라서 자기 망할 옛사람으로 살면 모든 것이 실패요 멸망입니다. 멸망을 벗는 시발이 원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오. 또 자기 건설의 성공의 일보다 시발의 움싹이 새사람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되는 것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