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0:51
자랑
본문 :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반사들이 처음에는 좀 오더니마는 그만 인제 그 전과 꼭 같이 되는구만.
월요일날 새벽에는 좀 많이 오더니. 힘이 없는 모양이라. 반사들 모두가 다 자기네들이 새벽기도 나올 만한 그런 힘이 없어. 이래 놓으니까 주일날 그렇게 '새벽기도 나와야 된다.' 하니까 나올 마음은 있지마는 그만 하루 새벽 나오고 넘어지고, 왜? 그게 힘이 없어 그렇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이 주일학교 반사들이 새벽에 나와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일을 하는 건데, 주일날 그렇게 말하니까 '한번 나와 봐야 되겠다.' 해서 월요일날 새벽에는 어북 숫자가 많이 나왔더니마는 그만 다 떨어져 버리고 그전 숫자밖에는 안 옵니다. 안 오던 주일학교 반사가 나온 사람, 새로 나온 사람 봐야 별로 안 보여요.
이종교와 기독교가 다릅니다. 이종교는 자기가 그 교를 믿는 것이오. 자기가 교를 믿는 것이오. 기독교는 그거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도를 믿는 것 아니오. 자기는 안 믿을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믿도록 만드는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일하는 것도 그렇소.
그러기에 신앙생활 하는 시발에 보면 자기는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데, 처음에는 안 믿으려고 하는데, 속에서 부정하려고 '뭐 하나님이 어디 있어? 지옥이 어디 있으며 천국이 어디 있어?' 부정하려고 하는데 부정하려고 하면 속에서 더 긍정해야 되겠고 부정하려고 하면 또 긍정해야 되겠고 자꾸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걸 좀 눈을 뜨고 보는 사람은 '야, 이거는 왜 나는 안 믿으려고 지금 자꾸 지옥이 뭐 있어? 이렇게 지옥을 없다고 반대를 하는데 반대하고 나면 내 속에서 부인할 수 없이' 반대하면 반대하는 것만치 '지옥이 있다.' '뭐 지옥이 있어? 지옥 까짓 거 거짓말이지 소용없다. 지옥이 어디 있어?' 지옥이 없다고 안 무서워하려고 하는데,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안 무서워지지 않고 무서워진다. 이상하다. 내 속에 내 맘이 하나만 아니고 내 마음 외에 딴 마음이 무엇이 내 속에 들어 있다.' 하는 그것을 명철한 사람들은 다 깨닫게 됩니다.
이러기에 '이것 참 예수 믿는 것은 주관이 믿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나는 안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나를 믿게 만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되고 나면, 중생되고 나면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자기 속에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생되면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져. 그러면 결국은 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하는 것이 되어지도록 그렇게 되어진다 그거요.
무신론자가 예수를 믿으면서 '어디 하나님이 계셔?' 마구 무신론을 주장을 하고 유신론 말하는 것을 대항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대항을 하면서 하는데 자기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내가 이래 말하는 것이 다행이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면 다행이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지 않지. 아무래도 하나님이 계시겠는데' 반대를 하면서도 염려가 나온다 그거요.
저는 그 싸움을 얼마나 싸웠느냐? 열 두살 먹어서, 제가 지금 생각하면 중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랬는데 열 두살부터 스물 다섯 살까지는 계속해서 믿는 사람하고 싸웁니다. 믿는 사람하고 싸웁니다. 어디든지 믿는 사람 어디 있는가 해 가지고 믿는 사람 있으면 믿는 도를 반대합니다.
반대를 하는데, 반대를 하면서도 내 속에 부인은 안 되어지고, 믿는 것을 반대를 하는데도 또 다른 사람 안 찾아가고 또 믿는 사람을 찾아가고 믿는 사람을, 믿는다 하면 그 사람을 유심히 보고 '저 사람이 믿어? 저걸 한번 반대를 해 보자.' 반대를 해서 못 믿도록 이렇게 하면서도 내가 매력은 끌리기를 자꾸 그에게 끌린다 말이오. 끌리고, 또 반대할수록 내 속에는 부정이 되면 하지만 반대하면 반대하는 것만큼 내 속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는 것이 확실히 속에 자꾸 더 자리가 더 생겨지니까 이것 사람이 고통스러워.
그러다가 스물 다섯살 먹을 때 그때에 예수믿는 일을 출발했습니다. 그때 내가 믿을 사람이 아니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환경과 주위가, 원청 믿을 사람이 아니라 놓으니까 다른 사람이 와 가지고 전도를 하지 않는데 내가 도를 먼저 찾았소.
제 형제들 가운데에 나보다 먼저 믿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소. 있는데 그 사람들 내가 예배당에 나가는 그날까지 늘 만나면 내가 울립니다. 내 여동생 백계순 그 사람 잘 믿었는데 그 사람 만나면 울립니다. '뭐 예수가 어디 있다 말이고?' 공연히 그런다고 이래 반대를 해서, 하도 반박을 해 놓으니까 못 견뎌서 울어. 만날 때마다 울려. 쓸데없는 일 한다고. 이래도, 이래도 내 속에는, 그러고 나면 내 속에는 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긍정이 되어지고, 긍정이 되어지고, 그래 한 13년동안 싸워 가지고 예수믿기로 시작한 그때에, 다른 사람이 전도를 안해. 내가 그래도 장 마음에 그랬어. 다른 이종교가들 많이 접촉을 했어. 해 봐야 아니라. 이랬는데 윤봉기목사라고 윤권사인데 그분이 그 앞으로 지나가는데 '저분이 나한테 전도를 한번 해 주는가?' 싶어서 한번 떡 나서 있어 보니까 그분이 전도를 하지 않고 그만 그냥 떡 지나가 버려. 내가 불렀다 말이오. 좀 오라고. 그래 불러 가지고 '어디 가시냐?' 이러니까 오늘 저녁에 여기 집회가 있어 간다고. 집회 하면 우리 여기 술도가에서 할 수 있느냐고. 술도가에서 집회한다니까 그분이 깜짝 놀라 가지고 '아, 뭐 좋지요.' 내가, 여기 집회하면 내가 동네 사람 다 불러 올 수 있으니까 하라고.
그래 그날 밤에 그 동네 사람 이 거기 빡빡하게 왔다 그 말이오. 불러 놓고 그분에게 설교를 듣는데 그날 밤에는 설교를 들어도 그 설교가 감이 없고 시시했다 말이오. 그러나 내 속에는 못 견뎌서, 아무래도 조급해서, 막 재촉을 해 재끼는데 이거 뭐 안 믿고는 견딜 수가 없어. 어떻게 급한지 뭐 마음이 조급해 놔서. 그래 제 아내에게 먼저 이번 주에 가라고. 다음주에는 내가 가겠다고. 가서 한번 형편 좀 알아보라고. 보내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주일에 내가 가니까 황보 기 장로님이라고 그분이 말 타고 다니면서 전도할 때 그때 인제 전도한 분인데, 제일 초대 전도한 분인데, 창세기 1장 설교를 하는데 그만 거기서 해결이 다 돼 버려. 모든 학설이 다 '이 존재가 어떻게 존재했느냐?' 하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그말 들으니까 그만 내 속에 해결이, 만사 해결이 다 돼 버려. 그날 믿기로 작정하고 작정한 지 사흘 만에 술도가 없애 버렸고, 열 이레 만에 누룩도가 없애 버렸고, 그 다음에 있는 돈 전부 다 꺼내 가지고 다 흩어 버렸고, 남에게 돈 받을 것, 아마 그게 얼마가 되는지 몰라, 그만 전부 똘똘 뭉쳐서 불로 그만 부석에 그만 다 털어 넣어 버리고 그만, 그러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어. 해방이라. 그래 믿기 시작했습니다.
중들도 내가 대접 많이 했습니다. 중들, 중이 뭣한 것 있으면 꼭 데리고 와 가지고 앉아서 얘기를 하고 이렇게 해 보고, 또 태극도라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 없어. 수염 게슴츠레 하고 노인들이라. 지나가면, 그 사람들 어디 왔다는 소문만 들으면 붙들어 가지고 술 대접하고 이래 가지고 또 도를 묻고, 속이 비었어.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예수믿는 것은 제 힘으로 믿는 게 아니고 객관의 능력으로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들을 지킨다' 이랬어.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지킨다. 예수님이 지키고 말씀이 지켜 줘야 제가 굳게 서지, 예수님과 말씀이 자기를 든든케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됐습니까? 이러니까 새벽으로 나와 가지고 이 말씀을 깨달을 때에 자기가 못 알아듣는 그것은 그 말씀과 자기와 거리가 멀다 그 말이오. 이제 자꾸 깨달아지면 자기가, 자기라는 그 자기가 이 말씀이 인정이 되어질 때에 자기가 그만큼 변화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을 들을 때에 깨달으려고 애를 써서 이래 들으면 그것은 수입이 많고, 자기가 누워 자며 들어도 들려지는 그것은 벌써 자기에게 거의 돼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성화가 되어 가지고 있는 부분이오.
지난밤에 증거한 말씀은 아마 알아듣지를 못했을 거라. 그러니까 그 종목만 말해. 이 다음에 말하고 지금은 이 공과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12장 5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그러면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자랑하고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치 않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일 처음에 무슨 자랑이지요? 어리석은 자랑, 또 두번째 참 자랑, '내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자랑한다.' 참 자랑, 참 자랑은 거짓 자랑이 아니고 영원히 가도 자랑할 수 있는 그 자랑 말이오. 셋째는 지혜있는 자랑. 참 자랑까지는 했고 지혜있는 자랑은 지금 오늘 아침에 간단하게 다시 한번 증거하려 합니다.
참 자랑은 어떤 것이 참 자랑인데? '14년 전에 3층천에 올라갔던 그 사람을 자랑한다. 그 사람이 고깃덩어리까지 다 한목 갔던지 고깃덩어리는 안 가고 영과 마음과 몸의 성화된 기능 그것만 갔던지 이 고깃덩어리까지 갔던지 그거는 모르겠다.' 그 말은 고깃덩어리와 상관이 벌써 없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이냐?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과 진리로 새로 만들어진 것, 변화된 것, 새사람 그걸 말합니다. 내나 이 사람을 위해서 자랑한다. 자기 위해 자랑하지 않는다. 바울이오, 내나. 다른 사람이 아니고. 14년 전에 3층천에 올라간 그 사람이 바울이라 말이오. 바울 자신이라 그 말이오. 자신인데 그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고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밖에는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도 바울이고, 바울 자신이고, 또 '내가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 하는 그 사람도, 자랑하지 않는, 약한 것 자랑하는 그 사람도 사도 바울, 그런데 바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중생된 새사람 거기 있습니까 아직까지 구속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습니까? 어디 있지요? 어디 있으며 지금 말하고 있지요? 어디 있으면서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가지고? 내나 '이런 사람을 내가 자랑한다' 하는 그 사람 하나 있고, 또 '날 위해서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를 위해서는, 내게 있어서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으니까 사도 바울이 두 사람인데 지금 사도 바울이 서서 말하기는 새사람에게 서 가지고 말합니까 지금 고쳐야 될 옛사람에게 서 가지고 말합니까? 허허 이것도 잘 몰라 왔으니‥‥ '내가' 어디 있는데? '내가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면 어디 서 가지고 있어? 고칠 사람에게 서 가지고 있지 않소, 고칠 사람에게? 이 사람을,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이런 사람을 평생 보면 자기 아닌 남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라니까 자기가 아닌 사람으로 다 블 수 있지 않겠소? 그래 보여? 이게 안 보이면 이걸 깨닫지 못하여 해석이 소용없어.
이러기에 성경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요. 마구 청산유수로 막 활활 들이 해 대 가지고 인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성경이 아니라. 요새는 마귀란 놈이 고성능 지금 시대를 만들어 놓으니까 이거 그만 성경 설교 말씀도 '다다다‥‥ 뭐 어쩌더라' 깨달을 수가 있소, 있기를? 이것도 지금 암만 물어도 모르는데? 바울은 3층천에 올라간 그 사람도 바울이요 지금 '나는 약한 것 뿐이다' 하는 그 사람도 바울이오.
이랬는데, 약한 것은 '나는 내게 대해서 말하려면 약한 것밖에는 없다.' 이랬는데 3층천에 올라간 사람은 '이런, 내가 자랑하려면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자랑하겠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자랑하겠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자랑한다니까 자기 아니고 남같이 보여지지 않소? 그래 보여집니까?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착각이 돼 가지고 내가 정신이 이래 가지고 착각 이 되어 말하는지 여러분들이 착각이 됐는지? 지금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느 사람에게 붙어 서 가지고 어느 사람이 지금 말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가지고 있소? 어느 편에서 가지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는' 자기는 그러면 '나를 위해서는' 자기는 어디 서 가지고 있습니까? 14년 전 3층천에 올라간 그 사람에게 서서 있습니까 지금 고칠 사람에게 서 가지고 있습니까? 고칠 사람에게 서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그렇지 않소? 고칠 사람에게 서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지 않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서 따져 가지고 알아야 되는데 그만 그러기는 싫고,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들어도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싫고 자기 기분에 맞는 말씀 가르치기를 원하지, 자기 기분에 말씀을 원하고 있지, 또 자기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맞는 말씀을 원하고 있지, 마치 도적놈이 도적질하는 소리 들으면 대번 깨달아지는 것, 노름하는 사람이 노름하는 소리 말하니까 자다가도 눈이 퍼뜩 뜨여져서 대번 알아 들려지는 것, 노름하는 자에게 어떤 도덕가의 양심가의 말을 하면 '무슨 소리고 무슨 소리고?' 노름하는 소리는 들으면 퍼뜩 알아 들려지지.
이와 마찬가지로 제 지식에 빨리 들려지는 그걸 원하지, 제 기분에 맞는 것 원하지, 제 욕심에 맞는 것 원하지. 이래 놓으니까 마구 좋아하고 지금 뛰고 굴리고 야단입니다. 암만 해 봤자 자기를 죽여야 되는 그런 환난을 만나면 자기 살리려 하니까 그 도를 믿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집어 던져 버리고 다 자기대로 가 버리지.
'예수믿는 것은 뭐이든지, 자기가 무슨 소원이든지, 힘을 써도 안 되고 애를 써도 안되고 무슨 소원이든지 안 되는 것, 예수믿고 기도하면 다 된다. 소원 다 된다.' 이래 놓으니까, 소원 성취하는 것이 예수믿는 것이니까 얼마나 좋고 모여 들겠소? 만일 부산 어디든지 나서 가지고 광고를 해서 '뭣이든지 자기 무슨 소원이든지 와 봐라. 소원 성취, 무슨 소원이든지 소원해 봐라.' 원수갚는 것도 있고 남의 도적질하는 것도 있고 또 남자 욕심내는 것도 있고 여자 욕심내는 것도 있고 별별 것이 있을 것이라 말이오. 지위 욕심내는 것도 있고 권세 욕심 내는 것도 있고 이런데 소원대로 다 되니까, '이거 와서 해 봐라. 안되는가? 다 된다.' 이러면 '뭐 그런 게 있을까?' 다 된다 하면 벌써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의 다 갈 거라. 나중에 보러 간 사람들이 다 된다 하면 전부 다 가지 안 갈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거 모양으로 쭉 다 모여든다 그거요.
예수믿는 도가 만물보다 거짓된 독사와 시랑이와 같은 인간들의, 그 참 흉측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그런 욕심들을 가진 것이 인간인데 그 욕심 소원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죄 짓는 중에 괴수 되고 제일 형벌은 하나님이 받아야 될 것이오.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이제 그렇게 다 구하고 의심치 아니하고 믿으면 다 된다 이래 놓으니까, 위에 말씀은, 성경 말씀은 그걸 가르치지 아니하고 딴걸 가르치고 있는데 떡 그래 왔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막 박수를 하고 좋아 하지만 그거 전부 도박 신앙이요 사람들을 꾀우는 것이라 말이오.
자, 기도하는 것 자기 소원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소원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까? 우리가 원할 때에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내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뭐이요? 똑똑히 알아야 돼요.
기도는 '나는 내 소원만 이루려 하는 이자인데 내 소원 이루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 그것이 내 소원이 되고 그 소원이 내게 이루어지도록 해주옵소서.'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이루어져야 영생이 되지 내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게 다 영원한 멸망이지 뭐 될게 뭐 있겠소? 이런데 '너거 소원 원하는 대로 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 이것 기가 막히는 소리라 말이오. 사람 죽이는 소리라. 그런 소리를 듣는데 지난 밤에 그걸 바로 해석하는데 그게 들려집니까? 언제 뒤에, 대충 말했는데 못 알아들을 거라 말이오. 뒤에 시간 있으면 말하는데, 지금은 지난 주일날 증거한 말씀인데 이것을 중간반, 또 주일학교에 가르쳐야 될 공과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들에게 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안 나오니까 뭐이 되겠소? 참 안타깜다 그거요.
어리석은 자랑 세 가지를 말했소. 어리석은 것이 왜 어리석으냐? 세 가지 때문에 어리석다 그것을 말했고, 또 참된 자랑이라 하는 것은 어제 아침에 처음으로 이제 한번 새벽기도에서 말했는데, 참된 자랑 그것은 왜 참된 자랑이냐? 그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왜 참된 자랑이냐? 참된 자랑인 이유는 세 가지 때문에 참된 자랑이다 말했어.
말했는데, 첫째 왜 그 자랑이 참된 자랑입니까? 14년 전에 3층천에 올라간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자랑한다. 왜 그 사람 위해서 자랑하는 자랑이 그것은 어리석은 자랑도 아니고 참된 자랑일까? 어리석은 자랑의 반대인 참된 자랑일까? 참된 자랑의 첫째가 뭐입니까? 저 ○선생, 저 ○선생 아니가? 뭐이지? 첫째가 뭐이지? 왜 참된 자랑인고, 그 자랑이? 첫째가 하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충만한 모든 것이 그의 것 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 얼마나 돼 가지고 있든지, 중생된 영은 그러하고,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이 다 중생된 영의 것이 됐는데, 그러나 우리의 심신은, 심신의 기능에게는 하나님의 충만이 자기 것이 안 되었습니다. 심신의 기능이 100분지 1이 성화됐으면 성화된 그것은, 성화된 부분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이 그의 것이 됐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되어진 그것 자랑해. 왜?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연결, 하나님의 전능이 그의 것이 되었어, 하나님의 전능과 연결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전능과 연결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이 그의 전능이라. 이러니까 성화된 그것은 전능의 요소, 전능의 요소 전능의 부분입니다. 전지의 부분입니다.
또 둘째로는 왜 자랑할 만합니까?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영생하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랑할 만합니다. 얼마나 성화가 되었던지 성화된 양만치, 성화된 부분 그것은 완전자요 영생을 가진 자요 참된 자요, 새로, 새로 만들어진 것 말이오. 진리와 성령과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변화된 것, 우리의 마음이 변화된 것, 된 것만치, 우리의 몸의 기능이 변화된 것만치, 이 변화는 언제 되지요? 때는 언제 됩니까? 이 현재라는 이 시간 이 장소, 그러니까 현실에서 된다 그 말이오. 현실에서 될 때에 제 주장대로 됩니까 자기가 꺾어져 하나님과 진리와 피에 복종이 되어지고, 복종이 되어지고 거기에 속함으로 되어집니까? 거기에 속함으로 되어집니까? 하나님과 진리와 피에 속함으로 되어지는 것이고, 자기와 세상은 부인하고 거기에 속한 것, 이래 두 군데 끼었어. 하나님 진리 피, 악령 악성 악습 이 두 사이에 내가 끼어 가지고 있다 말이오. 바울이 말하기를 '이 두 사이에 끼어 가지고 있다.' 끼어 가지고 있는데, 끼어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로 속하려고 하면 언제 속해야 됩니까? 지금 속해야 되지. 현실에 속해야 되지. 현실에 속할 때 그러면 이 둘 다 거머쥐고 있습니까 하나는 놔야 됩니까? 하나 놔야 됩니다. 악령과 악성과 악습, 악성은 무엇인데?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려고 하는 그 인간성 그게 악성이라 말이오. 악습은 뭐인데? 이제까지 자기 중심, 악령 중심,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그 습관 이제까지 살아 놓은 습관, 만들어 놓은 것.
이런데, 이 두 가지 사이에 끼어 있는데 현실에서 지금 이리 갈래 저리 갈래 지금 이러고 있다 말이오. 그럴 때에 하나님과 진리와 주의 피를 버려 버리고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대로 이쪽으로 붙었으면 그것 어찌 되었지요? 그것 어찌 되었습니까? 그때에 이리 속하나 저리 속하나 둘 중에 하나로 했을 때에 이리 속한 자는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까 살아나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을 받아습니까? 영원히 멸망받았다 말이오. 다시 살아날 수 없게 영원히 멸망받았다 말이오. 이것이 현실에 되는 것이라.
그러면 이것을 버리면 영원히 멸망받았고, 인제 하나님과 진리와 그리스도의 피에 소속해서 그것과 한덩어리가 되려고 하면 이 왼쪽 것을 버려야 되지 않소? 왼쪽 것을 버려야 되지 않겠소? 이걸 버려야 이게 된다 말이오. 그러면 언제 되느냐? 현실에 이거 버리느냐 저거 버리느냐 어느 것을 버리느냐? 그러기에 보다 어느 것을 사랑하느냐? 보다 어느 걸 사랑하느냐? 네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전토나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 것이되고 그것보다, 이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예수님에게 속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니까 자랑할 사람은 벌써 이렇게 현실에서 어디 속하느냐 하는 그 시비에서 왼쪽 것을 버려 버리고 오른쪽 하나님과 진리와 주의 피공로의 사죄 칭의 새생명에게 속한, 속해 가지고 벌써 이쪽으로 속해 버렸다 말이오. 속한 자 그것을 말하는 거라. 속한 자, 속한 자 그것을 말하면서 속한 자 이것을 자랑하겠다.
속한 자 이것은 왜 자랑해? 하나님의 충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한덩어리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충만이 그에게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째로는 그는 완전자요 영원 불변자가 되어있기 때문에.
셋째는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자요, 모든 만물을 다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붙들려 도와 가지고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해 줄 수 있는, 만물을 봉사할 수 있는, 만물이 나 아니면 못살겠다고 하는 이런 만물을 봉사해서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을 위할 수 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모든 피조물을 만족하게 복되게 유익되게 하지 할 수 있는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자랑할 만하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자랑할 만한 것은 몇 가지 이유로 자랑할 만해요? 세 가지. 이걸 깨달으라 그 말이오. 이 껍데기만 주르르 훑어 가지고 안됩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또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자랑은 뭐이라 했지요? 자랑은 바라보고 의지하고 내놓는 것 그게 자랑 아닙니까? 약한 것을 바라보고 약한 것을 의지하고 약한 것을 내놓다니? 그래. 바울은 그것 하고 있어. 약한 것을 바라보다니? 그것만 바라봅니까? '내가 약할 때에 강하여진다. 약할 때에 강하여 진다.' 약한 것 그것 소망해 가지고 뭐 하려고? 약한 것 소망이라. 왜? 약한 것 지식이 약하다, 인격이 약 하다, 의지가 약하다, 사랑이 약하다, 모든 것이 모자란다, 이것 병 들었다, 약한 것 죽은 것 욕된 것 혈육의 것 그걸 뭘 소망해? 하, 고쳐 줄 분이 있으니까 소망한다 그 말이오.
그저 언제든지 현실에서 소망이 뭐이냐? 이 병들고 약하고 못쓰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거 이게 소망이라. 그게 무슨 소망? 환자가, 환자가 병원에 가면서 자기 병 그거 소망이라. 병 그거 더하려고? 병원에 가니까 병 그거 고칠 소망이라 그 말이오. 병고칠 소망.
이 약한 것 자랑하는 것이 왜 그러냐? 첫째가 그것을 고쳐 주실 주님이 '무엇이든지 약한 걸 내놔라 내가 다 고쳐 주마. 욕된 것 내놔라. 다 고쳐 주마.
더러운 것 내놔라. 다 고쳐 주마. 모자라는 것 내놔라. 다 고쳐 주마.' 이러기 때문에 바울은 고칠 자에게 상관있지 고쳐 놓은 자는 그것은 고쳐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고친 자는 남같이, 아주 남같이 상관없이 이렇게 말해놓고 고칠 자 그자에게 자기는 가 가지고 '나를 위해서는' 그러면 자기는 뭐이냐? 약한 것, 자기는 지금 뭐 자랑하느냐? 고칠 것. 고칠 것에 소망이 있어. 약한 것에 소망이 있다 그 말이오. 왜? 약한 것을 주님이 고쳐 주시마고 했기 때문에, '병든 이것만 가져가라' '아, 여기는 무슨 병이든지 무료로 다 치료해 준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지금 가 가지고, 그 병원에 갈 때에 '나는 지금 아주 위장은 건강하다. 위장은 건강하다.' 건강 그것 자랑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 뒤이든지 다 고쳐주려 하는데 자기는 무슨 병이 들어 있다 말이오. 자기가 코에 암병이 들었다든지 다리에 암병이 들었다든지 이랬는데 암병 든 그놈 가지고 갑니다. '너 뭐하러 병원에 가노?' '이 암병 여기 소망을 가지고 갑니다.' '암병 그까짓 거 뭐하려고 소망을 둬?' 암병, 뭐이든지 다 고쳐 준다 하기 때문에 암병 가져가서 고칠 소망 가지고 간다 그 말이오.
약한 것 자랑한다 그 말은, 자랑이라 말은 바라본다 말이요, 의지한다 말이요, 내놓는다는 말인데, 이것은 뭣만 내놓느냐? '아, 나는 이게 약합니다.' 약한 것만 내놔 왜? 약한 것에 대해서만 소망을 가지고 있어. 또 약한 것만 의지해.
의지하는 것은 약한 그것 가지고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약한 것 고쳐주려 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약한 것 의지하고, 자랑도 약한 것만 내놓고 바라기도 약한 것에 대한 소망을 바라고, 약한 것에 대해서 소망하고 바라보고, 약한 것이라니? 고쳐 주실 분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버리지 않고.
이러니까 우리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첫째가 어떤 약한 것이든지 더러운 것이든지 이것을 완전케 해 주시려고 주님이 나서서 '나는 건강한 자에게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왔다. 병든 자를 고쳐 주려고 왔다.' 이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장점 자랑하는 것보다도 자기에게 못쓸 것, 못쓸 것 이놈 주님에게 내놓으면 주님이 다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못쓸 것 이것 내놓는 것, 못쓸 것 고칠 이것 바라는 것.
이러니까 이 약한 것 자랑하는 것이 왜 지혜가 있느냐? 지혜가 있는 이유는 고쳐 주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계시기 때문에 내놓는 그것이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또 왜 약한 것 자랑하는 사람이 고칠 수 있느냐? 지금은 이 시기가 약한 것 고칠 시기이지 이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는 못 고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지 아니하고 약한 것을 자랑하니까 지혜있는 사람이라 그 말이오.
기회가, 기회가 뒤에 없는데, 이 기회밖에 없기 때문에 약한 것 자랑하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요 고쳐 주실 분이 있기 때문에 이것 자랑하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오. 또 어떤 약한 것이라도, 어떤 약한 것이라도 상관을 하지 않아. 어떤 약한 것이라도, 지금은 약한 것 내놔 봤자 이 시기는 잠깐 지나가기 때문에, 이 약한 것 이것 내놔봤자 자기에게 수치될 게 아무것도 없어. 이러니까 약한 것 자랑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 시기를 놓치면 안될 터인데 시기를 안 놓치고 자랑하니까 지혜있는 사람 아니오? 얼마든지 고쳐주려 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 내놓지는 않고 '뭐입니까?' '나는 팔이 좀 건강합니다. 나는 위장이 건강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여기 건강한 사람 필요없습니다. 가십시오.' '어찌 왔습니까?' '나는 위장이 병들었습니다.' '아, 예.' 이러고 나니까 '또 다리도 병들었습니다. 눈도 병 들었습니다.' 자꾸 병만 내놓습니다. 그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 아닙니까? 시기를 지금 놓으면 안됩니다. 또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약한 것 이것을 고쳐 주는 시기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방편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주님, 제일 사랑하는 주님, 만나면 만사가 다 해결이 되고 좋아하는 주님, 기쁜 주님 이 주님을 만나려면 뭘 가지고 만나야 됩니까? 바리새교인이 있다가 '나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을 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런 사람같이 음행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깨끗합니다.' 세리는 있다가 '나는 죄인이라 감히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겠습니다.' 이랬는데 나중에 주님하고 둘이 만나 가지고, 짝자꿍이 되어서 둘이 만나 가지고 아주 딱 밀접하게 친밀해지기는 바리새교인하고 친밀해졌습니까 세리하고 친밀했습니까? 세리하고 친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는 것이 약한 것 자랑 할 때에 주님과 딱 붙어지니까 이것참 지혜있는 일이오. 또 이 약한 것은 그 기회에 지나가 버리면 영원히 멸망받는 거라. 영원히 멸망받아 다시는 고칠 수 없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그 기회에 약한 것 자랑하니까 지혜있는 사람이라.
또 무엇이든지 다 고쳐 줄 수 있는 그 전능하신 분이 고쳐 주려고 하시는 그분을 떨구지 아니하고 그분에게 고칠 것 내놓으니까 지혜있는 사람이오.
이러니까 약한 것 자랑하는 것이 뭣 때문에 지혜롭습니까? 몇 가지 때문에? 몇 가지 때문에? 세 가지 때문에, 세 가지 때문에.
자 첫째는 뭐이요? 면접, 첫째는 뭐입니까? 첫째는 뭐입니까? 자, 첫째는 면접, 첫째는 면접. 주님을 만나야 뭐이 되지 못 만나. 바리새교인은 바리새교인은 이 약한 것 가지고 주님 만나려고 하지 아니하고 아주 '나는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가지고 주님 만나러 왔지만 그만 퇴짜 만나 버렸어. 쫓겨 나갔어.
면접 못했어.
세리는 약 한 것 가지고 가니까 주님이 당장 환영해 됐어. 약한 것 자랑하는 사람이라야 주님 만납니다. '주여 나는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상한 심령을 주님이 멸시하지 않는다 했어.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죄가 있습니다.' 할 때에 주님은 위로 해 주시고 환영하셔.
이러기 때문에 왜 약한 것 자랑하는 것이 지혜로우냐? 첫째로 이렇게 만유의 주, 참 우리가 밤낮 사모해야 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 크신 분이 다 희생해 주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분 만나면 다 해결돼. 그분 만나면 기쁘고 즐거워. 이분을 만날 수 있는, 이분을 면접할 수 있기 때문에, 면접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에 지혜 있습니다.
이분을 면접할 때에는, 바리새교인은 면접을 못했어. 세리는 면접을 했어.
여러분들이 어리석게 자기에게 있는 장점 '이것 있으니까 주님이 환영하리라.' 벌써 장점이 있어서 '아마 내가 이렇게 장점이 있으니까, 내가 오늘 이렇게 주의 일을 많이 했으니까, 심방을 많이 했으니까 주님이 날 오늘은 환영을 하고 기뻐 맞아 줄 것이다.' 떡 그래 가지고 '주여, 내가 오늘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벌써 그날 밤에는 기도 틀렸소 회개 안 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있다가 '어, 잘했다. 내가 지금 바빠서, 내가 할 일은 지금 그런 것 할 여가는 없고, 하늘나라에 가서 보자. 너 잘한 것 하늘나라 가서 대접해 주마. 여기서는 조그만치라도, 조그만한 것 하나도 잘한 일에 대해서는 대접해 줄 수가 없다. 지금은 나는 병든 자 고치러 지금 와 있다.
이러기 때문에 너는 건강하면 하늘 나라 가 있거라. 하늘나라 있을 터이니까 가 있거라.' 대면 안해 준다 그 말이오. 이걸 여러분들이 느껴야 될 터인데, 기도할 때에 다 안 느껴 봤어? '나는 이런 장점이 있다.' 그거 소용없어. 그만 주님과 멀어집니다. 암만 주님을 찾으려 해야 자기 혼자 날뛰지 주님이 대면 안 해줘.
자기에게 무엇인가 참 잘못된 것, 약한 것, 모자라는 것 이것 가지고 마음에 상한 마음으로 탄식을 하면서 '주여, 나는 이런 자 입니다.' 할때에 주님이 맞이해 준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기 약한 것 자랑하는 것이 첫째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일입니다.
둘째로 지혜로운 일은 지금은 이것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지금 이 기회를 놓쳐 버리면 다시는 없어. 한 번밖에는 기회가 없는 것이라. 없는 것인데 이 기회를, 한 번만 있는 참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 모든 약한 것이 강해지는 것, 욕된 것이 영광스러워지는 것,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는 것 이런, 될 수 있는 이런 기회는 한 번밖에 없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일이라 그 말이오.
또 하나 지혜있는 일이 뭐입니까? 지혜있는 일이 뭐이요? 그것을 주님 앞에 자랑하는 것마다, 나타나는 것마다, 주님 앞에 내놓는 것마다 완전히 고침을 받기 때문에 지혜롭다 그 말이오.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지혜로움이 뭣 때문에 그것 지혜롭다 했습니까? 몇 가지? 세 가지, 인정됩니까? 이것 큰 것이오. 우리가 주님 만나야 안됩니까? 심방 가면서도 '주여, 나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진리 가지고 심방을 하겠습니다. 나는 충성이 있습니다. 나는 성자입니다.' 이러면 벌써 주님은 주님이 '아, 나는 지금 여기는 볼일이 없구먼, 나 할일은 없으니까 나는 지금 나 할일 찾아 가야 되겠다. 너는 너 혼자 해라.' 같이 안 갑니다.
'주여, 나는 이렇게 허무한 사람이니, 이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이니, 나는 이렇게 실수를 한 사람이니, 주님 앞에 과오를 범한 사람이니, 나는 성령의 연결이, 영감을 소멸하고 영감에 약한 사람이니,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나는 그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없는 사람이니' 모자라는 이것 가지고 이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주여, 고쳐 주옵소서 주여 도와 주옵소서.
주님이 함께 해 주옵소서.' 할 때에 가 보면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꾸 생각하고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하고 이렇게 해져야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은 무슨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내 뚜렷하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아, 참 주님 계시는구나,' 그러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먼저 네가 계신다고 안 그랬나?' '그때는 하기는 했지만 잘 모르겠는데 봐야 알지.' 또 주님이 역사하니까 '아, 주님 계시는구나.' 또 그러고 난 다음에, 그만하면 알 터인데 좀 있다가는 또 '주님 계시나 안계시나?' '봐야 알지' 계신 증거를 멸시를 한다 그 말이오.
이스라엘이 시험하다가 멸망받았다, 이스라엘이 시험하다가 멸망 받았다 하는 그 시험이 뭐입니까? 항상 '봐야 알지, 봐야 알지.' 이것 가지고 멸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대해서 받은 증거 한번 받았으면 그만하면 족하지.
이 증거를 무시한다 그 말이오. 그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한 일을 무시해. 그런 사람은 그 뒤에 화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지혜있는 자랑이 되는 이유 세 가지를 놓으면 안돼. 자기가 가만히 살펴서 '보자. 이럴 때에 주님이 나와 가까와지다나 저럴 때에 주님이 가까와지더나? 이럴 때에 나에게 은혜가 되더나 저럴 때에 은혜가 되더나?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질 때에 주님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영감이 오더냐 저런 생각 가질 때에 영감이 오더냐?' 이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이렇게 세밀히 생각해서, 마음을 기울여 세밀히 생각해서 이래 하는 사람은 거기서 자꾸 깨달아지고 깨달아지고 자꾸 이제 신앙의 경험과 체험이 생겨져 가지고 더 굳혀지지만 이것이, 이것이 춤추는데 가 가지고는 어떻게 세밀한 것도 '아' 우리야 봐야 그러는지 그런데 '춤출 때 그 사람이 손가락을 어쩌더라. 눈매는 어떻게 하더라. 발은 어떻게 하더라,' 거기 대한 것은 어떻게 지극히 작은 것도 어떻게 세밀히 아는지? 그것은 딱딱 기억하고 이래 하면서 예수믿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영감 주던가 안 주던가 그것은 갚짝깜짝 놀랄 만치 된 그것도 그것은 예사로 여기고 집어던져 버리니까 거기 대한 쌓이는 게 없다 그 말이오.
그런 것은 망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보면 그 하나 자기가 그걸 기억하면 그것을 기억하려고 애를 써 가지고 그것이 많이 그래 가지고 남의 말을 배우는 것인데, 주님이 자기에게 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 없더라 그 말이오.
대어학자라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 학자들이 보면 주님이 자기에게 하는 역사에 대해서 기억하기를 자기가 단어 하나 외우려고 애쓰는 만치 기억을 안 하더라 그 말이오. 그 사람은 지식으로 망해야 될 것 아닌가?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첫째가 주님을 면접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말이라. 이 말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자기의 약한 것을 내놓고 '나는 이렇게 약합니다.' 그걸 가지고 주님에게 갈 때에 주님은, 의원되신 주님이 '아, 뭐 하러 왔어?'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그래. 이리 들어와.' '어찌 왔어?' '나는 이런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곧 가. 지금은 내가 만날 여가 없어. 나는 병든 자를 찾아온 의원이지 지금 건강한 사람은 내가 필요가 없어 하늘나라 가서 만나자.' 못 만난다 그거요.
이것도, 주님 만난다는 것이 암만 그 사람이 기도해 봤자 주님 못 만나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자기가 암만 전도하고 심방 간다 해도 주님 못 만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같이 안 가면 무슨 소용 있소? 지난밤에 증거할 때에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으니까 저주 했다.' 잎사귀 무성, 잎사귀 무성이 무화과의 제 때이니까, 그때는 잎사귀 무성할 때거든. 알 열매가 없어 인간들이 이 세상적으로 운동이 크고 문채가 크고 광채있고 막 이렇지만 속에 - 무화과 열매는 뭘 말한다 했지요? 뭘 말한다 했어? 마지막에 '네가 남의 죄를 사해 주니 너의 죄를 사해 주겠다.' 자타의 구원 열매, 자타의 구원 열매 세상은 세상은 아무리 막 운동이 크고 막 '유엔총회가 모인다, 세계 강대국이 어떻게 한다.' 막 떠들어 쌓아도 무화과는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그것은 왜? 무화과로 말하면 저거 때, 저거로 말하면 형편이 그렇다 그 말이오.
인간들의 형편은 그래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딴것이지. 이러니까 암만해도 인간을 자타를 구원하는 그 구원 역사는 거기는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 세 가지 이것 때문에 그 자랑이,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나는 무지합니다. 무능합니다. 나는 의지가 약합니다. 나는 사랑이 약합니다.
나는 악에 대해서 약합니다. 나는 원수에 대해서 약합니다. 나는 시기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질투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탐하는 못쓸 욕심의 약점이 있습니다.' 전부 약점, 약점 이것만 가지고 주님 앞에 자꾸 내놓는 이것이 뭐이냐 하면 주님을 만나는, 첫째 주님을 면접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것이오. 주님 만나려면 뭣 가지고 가야 돼요? 약한 것 가지고 가야 돼요. 병있는 것 가지고 가야 돼요. 약한 것 병든 것은 언제든지 고칠 수 있습니까? 약한 것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그 시기가 몇 번 있지요? 한 번 있습니까 두 번 있습니까? 어제도 고쳤는데 오늘도 되는데 언제든지 있지 않아요? 한 번, 단번에 준 도, 단번 도, 한 번밖에 없어, 그 현실에 고칠 것은 그 현실 지나가면 그것은 영원히 죽어 버렸습니다. 영원히 송장 돼 버렸소.
영원히 지옥 가게 되었다 말이오.
이런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그것만 자꾸 찾으니까, 그것이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일이라. 또 하나 지혜로운 것은? 또 지혜로운 것은? 고쳐 주시는 그분에게 그것을 내과서 고침을 받기 때문에 지혜롭습니다. 고침을 받기 때문에. 첫째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고, 둘째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지혜롭고, 셋째는 고침을 받기 때문에 지혜롭습니다.
이것을 자기가 깨닫고 여기서 기도할 때에 가만히 눈 감고 '아, 아멘. 과연 보자.'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들을 거라. '아, 과연 약한 것 가지고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더라. 내가 언제 한번은 기도 할 때에' 각각 여러분들이 다 은혜 받았을 때가 있을 것이라 말이오. 그럴 때에 '어째서 그때 그 기도가 그래 되었나? 내가 무슨 일이 있어 가지고' 큰 실수를 했다든지, 또 무슨 낭패가 되었다든지, 그때 참 머리를 들 수 없고 나는 죽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이거 살 소망까지도 없을 그때에 자기 심령은 주님에 의해서 변화가 되고 그때가 그리워.
그때의 마음씨가 그립고, 그때의 마음씨가 그립고 그때의 사람이 그립고 그때의 생각이 그립고 그때의 인격이 그립고 그때가 참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왜 그렇던가?' 분명이 그때에 가지고 가기를 약한 것 가지고, 약한 것 가지고 주님 앞에 나나났을 것이라 말이오. 이런 것을 자꾸 경험하고 체험해서 이게 다져져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 맡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맡은 식구들에게, 맡은 중간반 학생들에게 가 가지고 이것을 말하면, 자기를 변화시킨 성령이 그 진리를 말할 때에 진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같이 갑니다. 자기가 변화, 그로 말미암아 변화받지 아니하고 들어서 주문 외우듯이 자기가 알고만 있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는 전하지만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감화를 받지 못하고 변화를 받지 못한 그 사람이 말만 전하면 말만 간다 그 말이오.
자기가, 자기에게 역사한 것만큼 그래 가. 자기에게 성신의 감화가 되어서 참 감동을 받아 가지고 느껴 가지고 전하니까 그 감동시킨 영이 말씀과 함께 가.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전할 때에 말씀과 영감, 말씀과 성신의 감화와 능력이 너희들에게 함께 가기를 원 한다 하는 것이 그것이 바울이라 그 말이오. 제가 깨달아져야 가지지.
이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살릴 그런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꾸 이거 애터지게 말해. 엊저녁에도 내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에게 그런 말해. '네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는 이런 직책을 가졌기 때문에 애터지게 말하지 그것 아닐진대야 네까짓 걸 거머쥐고 한 번도 말할 여가 없다 한 번도 말할 여가 없다. 한 번도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엇 때문에? 다른 데 설교하지. 개인을 붙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깨닫는데서 감화를 받아 변화가 돼야 됩니다.
자랑 세 가지. 어리석은 자랑, 참 자랑, 지혜있는 자랑 이 세 가지를 학생들에게, 뭘 주일날 배웠는데 얼떨떨한데 가 가지고 '봐라. 너 자랑 몇 가지 배웠지? 세 가지 배웠지, 왜 어리석은 자랑이지?' 어리석은 자랑 그것을 해석해 주고, 그러면 제가 못 알아들어. 전연히 속에 깜깜한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지만 이번에 해 놓으면 저는 못 알아듣는데 말씀은 벌써 들어가 버렸어.
들어가 가지고 점령하고 있어.
점령하고 있으면 그 학생이 생활할 때에 오랫동안 가다가 문득 깨달아집니다.
문득 깨달아져. 그러고 난 다음에, 깨달아지고 난 다음에는 그는 잊어버려 버립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말씀을 증거하게 되면 내가 증거하는 것이 그 사람과 맞아 떨어집니다. 내가 증거할 때에 그 속에 그 영감과 그 진리가 있을 때에는 둘이 맞아 떨어지면 아멘이 되어지고, 나는 증거하는데 그 속에 없을때에는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되는데?' 안 돼도 벌써 들어갔다 그 말이오.
이 말씀이 들어갔다 그거요. 이래 가지고 사람을 자꾸 성화를 시키는 것 아닙니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10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어쨌든지 깨달아서 여기서 여러분들이 변화가 돼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자 할 때에 그냥 휘뜩 거릴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 자리에서 깨달아서 '이게 그르나 옳으나?' 첫째는 '이것이 맞나?' 처음에는 자기가 한번 말하는 것을 한번 기억을 해 보고, 맞나 안 맞나 비판을 해 보고, 그러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아 과연 이렇다.' 하는 것이 확정지어지기까지 세 단계를 여기서 기도를 하고 이 자리를 떠나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려져 버려요. 시간상 그런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공장에 가든지 어디든지 그 시간을 만나 가지고 이래 세 가지로, 세 가지 단계로 깨달아져야 될 거라 그 말이오.
그것 없이 덩더꿍이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여기 암만 있어도 그 사람은 이 서부교회 교인 아닙니다. 언제 뭐이 될지 모르요. 또 환난 오면 다 제 갈대로 다 가 버려요. 그 뭐 마지막에 쪽덩이 될 것 뭐 지금 없어지나 그때 없어지나 한가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