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1:48
인간 노력의 필요성
본문 : 요 1:17-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하셨단 말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셨지마는 그 인성 가지심이 순전히 하나님 한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인간이 출생하는 생산시키는 인간의 보통 생육법이 거기에 적용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배고플때에 음식 먹으면 배 부를줄 알고 또 음식이 아무리 옆에 있다 할지라도 그 식물을 먹지 아니하면 자기가 지식하는 그것가지고 또 자기 옆의 식물이 있는거 그것가지고 시장이 면해지지는 않합니다. 효력이 오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먹을때에 비로서 그 효력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식물이 옆에 있는 것, 그 두가지는 좋은 것이요, 참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필요는 먹을때에 필요한 것이지 먹지않으면 아무 필요 없습니다.
먹을때에 이 식물은 먹으면 내가 힘을 얻는다 하는 것을 안 그것이 필요합니다.
먹기 위해서 아는 것이 필요하고 또 옆에 있는 것이 먹기 위해서 필요하지 먹지 않는다면 아는 것 그것도 아무 소용없고 옆에 있는 것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아는 것이 필요하고 또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있는 것은 내가 사용할때에 행할때에 비로서 효력이 나는 것이지 행하지 않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행하기 위해서 아는 것, 있는 것 필요하지 행하지 않한다면 아는것도 아무 소용없고, 자기에게 은혜가 있는것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에 이 먹는 것을 가지고 말씀했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씀했습니다. 추울때에 추울때에 옷을 입고 따뜻하게 하면 될 줄 알지마는 그사람이 입을 옷이 없어서 입지 못하고 따뜻하게 할것이 없어 따뜻하게 못하면 아무리 안다해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음식도 시장할때에 먹으면 될줄 알지마는서도 암만 자기에게 음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또 음식이 있어도 않먹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배우는 진리를 내 실생활에 써야 효력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네가지를 우리가 배웠는데, 오늘 아침에 한가지를 더 말할려고 하는데,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온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왔다 그말은 대체로 구약성경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비판하는 법칙, 평가하는 법칙 이런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죽은 자인 것을 알고 또 죽은 이유를 알고 어떻게 하면 멸망받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 하는 이치를 알게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순전히 은혜로 구원하는데, 은혜로 구원한다는 말은 공짜배기로 구원한다 하는 말입니다. 은혜로 구원한다는 말은 공짜배기로 공으로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값을 않받고 그저 준다는 말이요, 공으로 준다는 말이요. 공으로 준다는 것은 값을 받고 주는 것보다 가치가 없어서 공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 값을 낼만한 값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로 주는 것은 값을 받고 줄라고하며는 하나도 사람에게는 있는 것 전부를 다 기울여도 그 은혜에 지극히 작은것도 받을만한 댓가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순전히 그저 주신다. 그러면 그저 주시는 것은 가치가 너무 커서 사람들에게는 그것의 가치가 될만한 그런 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공짜로 이것을 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에게는 값이 없기 때문에 그 댓가를 낼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공으로 주신다. 은혜로 주신다. 은혜와 진리는 무언가? 진리는 수많은 진리가 있지마는 진리는 각각 자기에 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는 수많은 진리가 있지마는 자기 현실에 자기에게 해당된 어떻게 살아야되는지, 어떻게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이 자기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삐뚤어진 일을 하고 있는 자에게는 어떤게 진리인가? 그 삐뚤어진 것을 고치라 하는 것이 그에게 대해서 진리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것을 고쳐가지고 행하고 있는 자에게는 어떤게 진리인가? 네가 그것을 계속해라 하는 것이 진리이겠습니다. 하면 각각 자기에게 해당된 진리, 자기가 어떻게 걸어야 되며, 어떻게 살아야 되며 한 그것이 자기 진리입니다. 자기진리 그거는 무어냐? 자기진리 그거는 하나님이 공으로 주시는 이 은혜를 받게 하는 그 방편입니다.
그러면 자기진리를 지킨다고 그것이 은혜의 댓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그 모든 생명과 신령에 속한 것을 그저 주시는 것을 자기가 공으로 받는데에는 주시는 분 그분이 이렇게 이렇게 내가 수속을 ?아가지고 받아라 하는 그 받는 순서를 가르칠때에 받는 순서를 행해가지고 받는 것 뿐이지 댓가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받는 순서 그것은 자기 당한 그 현실에 껍데기는 신구약 성경말씀이요, 그 안에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그 영감입니다. 율법은 신구약 성경말씀은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성신의 감화가 겸하면 자기 일을 구원하는 진리가 됩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자기를 구원합니다. 율법은 자기를 정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껍데기의 행하는 그것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암만 지켜봤자 인간이 결국은 지키지못한다는 것만 나타내는 것 뿐이지 율법을 하나님의 요구대로 지킬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에 성신의 감동이 오시가지고 감동시켜줄 때 그 감동을 받으면 이제 그것이 자기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의 감화는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일때에 자기를 기울일때에 영감을 받지 자기를 기울이지 안하는 사람은 육십육권 도리를 아무리 외우고 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옳다 인정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않됩니다. 삼십팔년된 병자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수는걸 보고도 예수님을 왜 정죄하고 죽였느냐? 저들은 율법지킨다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주님을 죽이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주의 전을 위하여 주의 전을 위하여 간절한 것이 나를 삼켜 멸하게 했다. 그말은 주의 전을 위하여 간절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철두철미한 그 율법이 도리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만 철두철미하게 저가 지킬려고 하지, 성신의 감화를 입기를 무시합니다.
그것은 왜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성신의 감화가 자기에게 오지 않을때에는 그런 자기를 아직까지 하나님에게 바치지 아니한 이것 때문에 성령이 옳다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아라. 하나님이 도장 찍는 인침을 받아라. 하는 것은 인침은 무어냐? 성령님이 그에게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행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했지마는 속에 영감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기를 바치지 안하고 껍데기로 다른 모든 사욕을 가지고 얼마든지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져온 구원은 순전히 공짜로 받는 것이지 자기의 공로로 받는 것,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댓가가 되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께서 법칙을 주시고 영감을 주셔서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 다한다는 그말은 자기를 다한다.
자기를 다할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구원만드는 것 아닙니다. 자기를 다할때에 하나님이 순전히 공으로 주시는 그 구원을 자기가 받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이게 성신의 감화가 그에게 오지 않았을 때에는 껍데기만 다 기울였지, 자기는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껍데기요,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이요, 금광과 보석으로 짓는 것은 않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 은혜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순전히 은혜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노력은 공으로 주시는 그 공짜배기를 내가 받는 그 노력의 받는 방편의 받는 과정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지 그것이 은혜되는 것은, 구원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왜? 구원은 전부 완전성의 것이요, 영원성의 것이요, 불변성의 것이요, 영생성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만들수 없습니다. 일생을 거쳐 영원한 것을 만들수 없습니다. 변하는 존재가 불변의 것을 만들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을자, 죽어있는 자가 영생한다는 것은 못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서 공으로 우리게 주시는데 공으로 주시는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수속을 받을 수 있는 방편은 받을 수 있는 노력은 공짜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노력이 인간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지, 다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의 댓가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이것을 하나더 가져서 자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것은 공으로 주시는 그 구원을 받는 그 방편이요 수고지, 그것이 그 댓가가 되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 공짜배기로 받는 것이라. 언제 내가 보니까 아침에 사람들이 모두 이런 조그만 그릇을 가지고 우 가는데, 아주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늘어서서 받을려고 늘어선 사람이 수십명이 늘어섰습디다. 그래 저 사람들이 뭐할려고 저렇게 늘어섰느냐? 하니까 그때 그날 아침에는 죽을 주는데 죽을 쑤어 가지고서 받은 것이 아마 한 한홉반쯤 되겠습디다. 한홉반쯤되는 죽을 주는데 그래 죽을 한홉반썩 받아가지고 갑디다. 그래 그죽 어디서 주느냐? 천주교에서 준다고. 그러면 아침마다 이렇게 죽을 주느냐? 어떨때에는 우유를 저만치 주고, 어떨때에는 죽을 쑤어서 저렇게 주고, 어떨때에는 또 과자를 한봉지씩 주고 그래준다. 그래 그걸 얻을라고서 가는데 아무리 거기에서는 돈받고 주는가요, 공으로 주는거지. 아이고 죽 얻으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 그래 그런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은 모릅니다.
요새 우리 한국나라는 배가 고파야 되는 그것이 앞으로 남은 순선대, 미국나라도 참 청교도들의 그 신앙 행위가 영향이 있고, 지금도 남을 구제하는 그것이 있어서 그거는 세계에 제일 뛰어난 나라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그 자연의 그 요소들을 많이 주는데, 우리나라는 그것도 없고 인제 그걸 닮아서 좀 낫다고 해서 봉사하는 것 구제하는 것 뭐 이거는 원하고 힘을 쓰지마는서도 지금 아무런 생산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벌어놓은 것 지금 먹고있는 이런 판인데 지금은 배가 불러서 뭐 먹고 산다는 것은 도무지 걱정을 하지 안하고 이러니까 마지막에 있는 것 다 파먹고 나면 제가 배고프지 뭐 별수 뭐 있겠습니까? 그때는 벌써 해방직훈데 해방직후로 말하면 아주 죽 한숟가락씩 어려웠습니다.
죽을 한홉반하는 것은 아주 큰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그거 얻으러 준다하면 아무도 얻으러 갈 사람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공짜배기를 주지마는서도 제가 그릇을 가지고 그 나눠주는 거기까지 가야 받을 수 있고, 받아가지고 와야 저거 집에서 먹을수가 있지, 않가면 그사람들이 갔다 줍니까? 받으러 오라고 이러니까 그 시간되면 마구 늦은 사람들은 뛰어오고 이래가지고 죽 늘어서가지고서 이래도 시간이 딱 되니까 그만 시간이 되면 딱 중단 시켜버리고 그 일찍 않온 사람들은 못받아. 그 죽을 받지 못해. 에. 꼭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 구원은 순전히 공으로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와같이 영감대로 하는 것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몇시로부터 몇시까지 아무장소로 그릇을 가지고 오너라 할 때에 우리가 그 법칙대로 그릇을 가지고 가는 것이 그릇을 가져가지마는 장소를 딴데가면 않된다. 장소를 딴데가면 않되. 그 장소가 뭐인가? 그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또 시간을 맞춰가야지 시간 않맞춰가면 않된다. 시간 그거이 무언가? 그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대 그시간에 하면 그시간에 해야지, 그시간 지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시간이 정해있고 장소가 정해있고 또 그 방편이 정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을 배급타러 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인 그 은혜를 은혜를 주시는 것을 우리가 공으로 받으러 가는 그 방편과 노력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지, 그것이 댓가가 된다고 생각하는대에서 또 모처럼 하는 사람들도 헛일입니다. 그래 댓가가 되는줄 아는 사람들은 은혜를 주기 때문에 그 그걸 댓가를 가지고서 그 댓가로 달라고 하니까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 은혜인 것을 몰라서 실패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펠라기우스주의라고하는 그 주의는 자기 구원을 자기 행함으로 이룬다고 하는 주의입니다. 그 주의는 교파는 아는대로 실행합니다.
아는 것 실행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실행에 철두철미한 교파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은 우리의 실행으로 이룬다 이걸 주장했습니다. 이러니까 필라게우스주의는 구원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는데 그 뒤에 후배들이 깨닫고 이거는 틀렸다.
하나님의 은혜지 우리 노력으로 무슨 갔다가 구원을 이루겠느냐?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노력과 둘이 합해서 반반으로서 둘이 만든 것이다. 이래서 반필라게우스주의가 생긴 것이다. 반 반필라게우스주의라는 말은 반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고 반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 이래가 반반이라 하다가 그 반필라게우스주의가 지금은 아마 그것이 완전히 바꾸어 졌던지 그리아니면 지금까지도 그 교파는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루터파는 여러분들이 신학에 나가면 루터파라 하는 교파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혠데 우리가 거부만 않하면 된답니다. 우리가 거부하기 때문에 않된 답니다.
거부만 않하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그것이 틀려서 루터파 교리가 지금 힘을 쓰지 못하고 그 교리가 자기들이 틀렸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알미안주의라는 그 요한 어, 그 에술레주의 그 주의는 그 반반이 합동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둘이 합해야 구원한단다. 그 합한다는 인간 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속에 지나지 못하지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그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도 틀린 것입니다.
그 성결교는 이는 인간이 땅위에서 힘쓰면 완전히 될 수 있다 하는 그것이 성결교의 흠점이라 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이 이것은 틀렸다고 해서 지금 그 교리는 틀린줄 알고 그렇게 믿습니다. 칼빈주의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주시는 것 은혜요,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구원을 만드는 것 아닌데, 구원을 받는 방편이요, 수고인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않된다. 하기 때문에 전적 은혜주의라 그것을 제일 바로 깨달아 있는 교리라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이런데 우리가 네가지를 배웠는데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오셨는가 하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그 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신성으로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이 신성히 그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고 오신일이 뭐 뭐시죠? 뭐요? 말해봐요. 하고 오신일이 뭐 뭐시오? 에? 뭐? 뭐? 에? 뭐? 목적? 아 지난 주일에 배웠는데 그거 다 잊어버렸어? 창조! 창조하고 왔습니다. 창조하고 왔어.
오시기 전에 하고 온 일이 창조. 또 뭐했어? 세상을 만들고 왔지. 또 뭐 뭐라 말했어? 자기 땅에 오고 자기백성. 인간은 그분의 것이요, 모든 존재는 그분의 것입니다. 이것을 하고 왔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데 이걸 믿어야 됩니다. 이걸 행해야 됩니다.
내가 실생활에 이 사실을 인정하는 생활을 하고 행동해야 되지, 이거 않하면 아는 것 소용없어. 오시기 전에 하신 일 창조, 세상을 만든 것 인간과 땅은 당신의 것, 자기 땅, 자기 백성. 또 오기전에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오기전에 천사로 있다가 왔소? 뭘로 있다가 왔소?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영원전에 자존하신 하나님, 하나님인데 그 이름은 말씀입니다. 오실때에 가지고 온 것은 무얼 가지고 왔습니까? 생명, 생명가지고 왔어. 무얼 할려고? 인간을 빛되게 할려고. 그 생명에 접하면 인간이 빛 됩니다. 빛과 어두움 둘을 말했는데 어두운 모든 사망과 삐뚤어진 것에 속한 것을 어둠이라 말했고, 빛은 생명과 옳고 바른 모든 행복에 속한 것을 빛이라 그렇게 여기에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없으면 빛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은 예수님이 가져오셨습니다. 그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행복은 예수님이 가져왔습니다. 인간에게 쾌락은 예수님이 가져오셨어, 인간에게 성공은 예수님이 가져오셨어, 인간에게 영생하는 생명은 예수님이 가져오셨어, 좋은 것은 전부 예수님이 가져오셨지 예수님외에 딴 것이 가져온 것은 없습니다.
이종교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 봤자 그들은 가져온 것이 없어. 그들은 거지라 아무것도 없어. 전부 속이는 것 뿐이라. 이걸 우리가 배워도 믿어야지. 아, 불교가 시가행렬한다고서 줄이 늘어서고 이렇게 되어져도,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생명은 주님이 가져오셨다. 저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저들이 떠들고 이렇게 해도 그거는 빛이 아이다. 그거는 앞으로 심판에 가가지고서 인정받지 못하고 다 정죄받을 것 뿐이다. 이걸 믿어야 될 터인데 불교세력이 강하며는 뭐 세상 세력들이 강하며는 그만 거기에 미혹받는 그런 것은 이걸 믿지않기 때문이라. 오시기 전에 하신 것을 믿지안하고 오시기 전에 어떤분이 계셨다는 것을 믿지않아, 또 그분이 오실때에 뭐 가지고 오신 것을 믿지않아. 넷째로는 그분이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와서 사람을 빛되게 할려고 했는데,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에? 영접하는 자가 어떤것인데? 그 이름을 믿는자. 그 이름을 믿는자가 무어인데? 그의 모든 역사를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잡니다. 뭣을 영원전, 자존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고 목적을 위해서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오늘까지 홀로 운영해 나오시는 이 구속역사를 자기가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그래 이 네가지를 배웠는데, 오늘 아침에는 필라게우스주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실행, 실천을 잘 했지마는 전적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이 헛일 됐습니다. 또 전적 은혜이니까, 행함이 무슨 소용있는가? 행함이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헛일입니다. 행함이 소용없다고 은혜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기 때문에 헛일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행함을 통해서 되어진다. 하니 행함을 가진자는 행함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그 자체인줄 알기 때문에 헛일입니다. 이 조그만치라도 진리를 삐뚤어지면 헛일이란 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죽 얻으러 죽을 배급받으러 가는 그 노력과 같습니다.
않가면 못얻습니다. 행하지 않하면 못얻습니다. 음식이 암만 있어도 않먹으면 소용없습니다. 먹어야 활력을 얻습니다. 행하는 것은 먹는데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