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4 13:28
원한적 기도
1983. 11. 13. 주후.
본문 : 눅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어린이를 데려오신 분들은 평소에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은혜 받는 데에 많은 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교인은 참 하나님이 심히 안타까워 하시면서 온갖 방편으로 노력을 해 가지고 근근히 한 달에 한 주일 나오는 그런 신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달 만에 한 주일 나오는 그런 신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심히 애쓰셨는데 만일 그 주일에 와 가지고 은혜 받을 시간에 아이들이 떠들어 가지고 은혜 받지 못한다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그 아프시고 섭섭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합시다.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이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에 크게 도움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요새는 산아제한이라고 말하는 이거는 이십세기에 마귀들이 하는 말이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에너지 이 문제를 가지고 그렇다 하지마는 하나님이 의인이면 농사 안 지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면 여러 수억 평 되는 데에서 혼자도 먹고 살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낳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낳으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아이 뱄다고 하나님을 노엽게, 젖먹인다고 하나님을 노엽게, 아이 데렸다고 하나님을 노엽게 그렇게 하면 자신도 아이도 복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 일을 자기가 책임지고 그럴 때마다 울 때마댜 '죄값은 무섭다' 여러가지로 임신되어서 고단할 때마다 '죄 값은 무섭다' 그것을 노래를 부를 것이오. ' '뭐 아이 안 배면 되지' 그것은 망령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입니다. 한번 먼저 지은 죄값으로 그렇게 값이 크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법칙을 어기고 저거 좋도록, 저거 생각대로, 저거 계산대로 하는 그런 망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뒤에 갚는 복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세상의 다대수가 말한다고 옳은 것 아닙니다. 절대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따라가야 되지 세상 따라서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네들도 기도하고 또 우리들도 아이들이 그럴 때에 위해서 기도하고 이러면 모든 것이 합력해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뭐 그렇게 우니까 다른 데로 그만 쫓아보내서 저 아이들 두는 데는 다른 데 소리도 안 나도록 그렇게 해 두자 해서 삼층 그것을 모든 교회가 그러기 때문에 그리 해 놨습니다.
그러나 거기 교인들이 아무도 안 갑니다. 또 안 가는데 대해서 저는 충분한 이해가 되고 일변적으로는 기쁩니다.
왜? 아이들만 주 모여 놓으면 은혜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어른들 속에다가 끼워 놓으면 분위기 은혜 속에서 은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나는 좋다고 찬성을 합니다. 저렇게 삼층 해 놨지마는 이제 겨울에는 난방을 해서 따시면 아이들이 자연히 그리 가지마는 그렇지 않을 때는 한 사람도 거기 안 가고 다 앉아서 여기 와서 예배보고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을 진정 원합니다.
저는 다산도 소원이 아니고 제한도 소원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면 낳고 안 주시면 안 낳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와같이 하는 그것이 우리로서 정당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을 가집니다. 어떤 사람 보면 '저 사람은 아무래도 아이를 하나 낳아야 저걸 고칠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아이가 몇 됩니다. '아직까지 아이 둘은 더 낳아야 저 사람이 저 못된 버릇을 고칠 수 있겠다' 그렇게 보여지는 사람,과연 둘 낳으면 고칩니다. 아이 낳으면 고쳐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구원은 고난 없이는 안 되기 때문에 해산하면 먼저 지은 그 죄값을 다 자기가 깨달아서 그 죄를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서 거기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18장에는 비유이면서 또 우리에게 마지막에 결론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한 법관이 있는데 그 법관은 매우 뚝뚝한 사람이고 또 거기에 불쌍한과부 하나 있어서 참 다른 사람에게 해를 많이 당한 그런 원통한 일이 있어서 그 원한을 갚아 달라고 법관에게 자주 와서 말했지마는 안 갚아 주다가 하도 열심히 끈질기게 계속해서 와서 호소하니까 열심히 와서 호소하는 그 호소에 못 견뎌서 그 원한을 갚아 주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고 "이렇게 뚝뚝한 법관이라도 사람을 멸시하는 법관이라도 그 원한을 열심히 구하니까 싫지마는 원한을 갚아 주셨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밤낮 원한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으면 오래 동안 멈추시겠느냐? 속히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내가 올 때에 참 이렇게 믿는 사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1장에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가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배암을 줄 자가 누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밤낮 구하는 자에게 너희들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보통 넉넉할 때에 평안할 때에 더 평안하기를 위해서 구하는 것보다는 참 극단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 어려움을 면키 위해서 구하는 그 간구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급하고 어려울 때는 그 구하는 것이 간절의 힘이 있고 또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더 강해지면 구하는 것도 강해지고 필요성이 별로이 없다고 생각하면 암만 구해도 구하는 것이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에게 혹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에게 '새로 또 투 자를 하지 말아라. 자본을 넣지 말아라. 남의 돈을 이렇게 저렇게 빌려 가지고 자꾸 넣어서 자본을 넣어서 장사하지 말아라. 네가 수금하러 갈 때에 당장 지금 내일 장사할 밑천이 없어서 수금하러 가는 것과 장사할 밑천이야 있지마는 빚을 갚기 위해서 수금하러 가는 것과는 다르다. 빚을 갚으려고 수금하는 것보다 당장에 장사 밑천이 없어서 장사를 하지 못하고 쉴 정도면 그 사람이 수금하러 가는 것은 강한 소리를 안 해도 그 수금하는 그 수금의 힘이 강해진다. 그것보다도 당장에 지금 오늘 먹고 살 게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돈 받으러 간 사람은 순하게 말해도 그 돈을 받는 재촉이 강해진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외상 장부를, 외상을 기록한 장부를 하거든 외상 기록한 장부를 자꾸 묵은 장부 묵은 장부 두지 말고 새 장부가 나오거든 묵은 외상을 전부 새 장부 초두에 다 올려 놓고, 세밀히 주를 달아서 올려 놓고 묵은 장부는 창고 갖다 재어라.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현재 사용하는 장부에 기록한 외상값과 수십 권 전에 벌써 기록되어 있는 외상값이 값이 다르다. 받는 힘과 독촉하는 힘이 달라지니까 그렇게 해라.' 그래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쳤습니다. 그 교훈이 바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8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있으면 좋겠다. 없어봤자 별 뭐 어려움이 없다.' 이런 정도의 것을 구하는 것보다 '이는 없어서는 안 된다. 참 내가 이거는 이게 이루어지든지 안 이루어지면 내가 죽든지' 생명을 걸어 놓을 만치 그렇게 그게 해결되지 안하면 견딜 수 없는 그런 뜨거운 그 원수의 원한과 같은 그런 일이 되는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그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성도들이 자기가 하나님이 갚아 주시지 아니 하시면 해결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원한이 있는 사람이 돼라. 그런 원한을 가진 사람이 돼라. 네가 참으로 '이 원수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안 되겠다' 하는 네가 네 원수적인 원한적인 그런 포부와 소원이 너에게 있느냐? 그런 정도로서의 하나님에게 계속 간구해 봐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는 것이 없고 빨리 들어 주신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산 구원은 하나님이야 나를 어떻게 부요해 주시든지, 부요하게 해 주시든지 우리는 부하려 하는 그런 마음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우 리들입니다. 어디까지 부요하게 해 주셔도 항상 가난해질 그것을 찾고, 가난해지기를 구하고, 가난해지기를 노력하는 이것이어야 우리 자신의 구원도 이루고 다른 사람에게 구원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멸망 받은 것은 어떻게 하든지 부한 것을 찾고, 부한 것을 구하고, 부하기 위해서 노력한 이것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님이야 자기에게 어떠한 부를 좋도 자기는 거기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사 구속해 주신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이 자리에게 찾을 가난은 무엇인가? 이 자리에서 내가 가난하기를 노력할, 노력할 이 가난은 무엇인가? 이 자리에서 내가' 나 혼자 안 되면 하나님에게 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처지에서 가난해지기를 원하고, 가난해지기를 노력하고, 이 가난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이루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밤낮 힘쓰고, 이래도 자기도 모르게 그만 부를 찾고, 부를 구하고, 부를 노력해서 그 결과에는 모두가 다 죄밖에 열리지 아니하는 이런 범죄의 행위를 자기의 원수로 삼아 가지고 또 하나님 앞에 눈물 흘려 기도하면서도 그만 부한 것을 찾고, 부한 것을 구하고, 부한 것을 노리고 노력하고, 높은 것을 찾고, 높은 것을 구하고, 높아지기를 노력하고, 왕되어서 지배하는 자 되는 것을 찾고, 지배자 되기를 구하고, 지배자 되기를 노력하고, 종되기를, 종될 그 길을, 종되기를 구하고 노력하는 그것은 하지 못하는 자기의 대원수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밤낮 이 원수의 원한을 갚아 달라고 이렇게 평생 기도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피하려 하는 것은 죽음이고 찾는 것은 사는 것이고, 구하는 것은 사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은 사는 이 십자가의 원수의 이 걸음을 자기도 모르게 걷고 있는 이것이 크게 너무 원통해서 기가 막혀서 하나님에게 밤낮 부르짖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했습니다. 날마다 낮아지고, 날마다 가난 해지고, 날마다 종노릇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이렇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주님을 영접해서, 낮아지시면서 나를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나도 낮아져 가면서 이 구원 이루고, 낮아짐의 반대인 높아지려는 것으로 죄지어 망한 내가 다시 높아짐을 내가 꿈꿀 수 없고, 가난해지시면서 주신 구원 나는 가난을 피하면서 이 구원을 저버리고, '나도 가난과 함께 이 구원을 찾겠다. 주님이 나에게 억만장자의 부요를 줘도 내가 찾는 것은 가난이요 나는 날마다 가난할 길을 찾고, 가난하기를 힘힙쓰고, 가난만 노력하고, 가난으로 주를 대접하고 주님 주시는 구원을 이루는 이 사람이 되련.' 하는 그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든지 살기 위해서 범죄한 것을 주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구원 이니까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주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구원 어디서든지 내가 죽어 내 구원이 되고 내가 죽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고, 내가 낮아져 내 구원이 되고 내가 낮아져 다른 사람 구원이 되고, 내가 종이 되어 내 구원이 되고 내가 종이 됨으로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고, 내가 가난함으로 가난을 취함으로 내 구원이 되고 내가 가난을 취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고 덕이 되어서 구원이 되는, 평생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소원하고 십자가의 원수의 이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평생의 이 기도를 하는 그런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참 철이 없습니다. 너무도 철이 없고 지내간 그 모든 경험이나 그 사실을 그것을 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려서 참 철없이 벌로 날뛰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될 그 원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안팎을 마구 상하되, 나와 내 가족을 상하고, 내 금생을 상하게 하고, 내 내세를 상하게 하고, 내게 있는 모든 좋은 점을 다 상하게 하고, 내게 있는 모든 쓸모 있는 점은 다 죽여 상해버리고 영원히 영원히 후회해도 소용 없을 이런 것들만 자꾸 이렇게 나를 꾀워서 마련해 주는 이 원수가 우리 안팎에 가득히 찼지마는 우리는 눈이 어두워서 이 원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는 것인 줄 알고 그것은 좋은 것인 줄 알고, 죽음을 이루는 범죄하는 것이 지혜 있는 일인 줄 알고 우리는 날마다 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복음 11장에는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결론을 지웠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성령이 안 오면 알지도 못합니다. 성신의 감화가 와야 우리의 참 원수를 우리가 알게 됩니다.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 원수는 사랑으로 사랑은 원수로 이렇게 꺼꾸로 되어서, 산다는 것이 죽음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내려감으로, 얻는다는 것이 영원이 다 도적맞고 마는 이 뭐 기막히는 원통한 일이 있지마는 우리가 이런 일을 일시 지식하고 지내보내 버리고, 일시 한번 감각하고 지내보내 버리고, 일시 하나님에게 한번 기도하고 그다음에 다 잊어 버리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그 원수보다 더 큰 원수가 어데 있겠습니까? 죄짓게 하는 것이 우리 원수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원수요, 하나님을 멀게 하게 하는 것이 원수요, 썩어질 세상만 보고 하늘나라는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원수요, 날마다 심판거리를 마련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하는 그게 모두 원 수입니다.
한 말로 말하면서 원수가 마귀요. 우리 원수가 마귀입니다. 우리 원수는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 원죄 본죄 부패성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게 하는 이 세상 지식입니다.
저는 그 지식으로 망하고, 그 지위로 망하고, 그 권세로 망하고, 그 부요로 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부요를 주시든지 어디까지 부요를 주셨든지 나는 그 부요자에서 내가 찾을 것은 가난입니디. 주님이 나를 부요 줘도 나는 그 부요에서 나는 가난해지기를 찾고, 가난을 찾으면서 구원을 이루고, 가난을 찾으면서 주를 대접하고, 가난을 찾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이 구원을 전해 줄 수 있는 옳은 방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처럼 다윗 왕처럼 어디까지 우리를 높혀 줄지라도 나는 그것이 내 소원이 아니고 높여 주는 그 자리에서 내려가다 내 려가다 못 내려가도 죽는 날까지 나는 아래로 기어 내려갈라 함으로써 주님 주신 구원을 보장하고 이루고, 나는 내려가기만 힘씀으로써 형제에게 이 구원이 거침없이 전달되고, 멈춤 없이 그들에게 납득되고 달게 받을 것이고, 낮아짐으로써 낮아짐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을 대할 때에 내가 낮아지지 않고, 낮아질 것을 찾지 않고, 낮아지지 않고는 주님을 대면할 때에 부끄러워서 대면이 잘 안 됩니다.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나 위해서 낮아지신 그 주님을 내가 낮아짐으로 주님을 대할 때에 아무것도 그까짓거 아니지마는 그래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적고 주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내가 일국을 다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지배자와 주권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세우셨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인간이 옳은 것을 말해서 내가 인간에게 순종해서 될 길이 있으면은 인간에게 순종하고, 내 부하 부하의 맨밑의 부하 맨밑의 부하라도 그가, 그가 말하는 대로 내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지 안하면 내가 '이리 해라' 하는 명령하는 것보다 그 말단 소자에게 내가 순종하는 것으로써 거기에서 내 구원이루고 남의 구원 이루고 하나님을 대접하고,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어 내가 깨우치고 만들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깨달아서 옳은 것을 말하면 '그렇습니까? 예, 그래 하도록 합시다.' 복종해서 평생 사람에게 순종, 인간이 알지 못하고 그래도 안 되면은 하나님에게 순종, 가까운 사람에게 순종 하나님에게 순종, 이 순종, 남을 지배하고 남을 통치하려는 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순종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평생 소원이 순종이어서 어디서든지 어느 대중에서 라도 '여기에서 내가 할 순종은 없는가?'그러나 우리는 죄는 짓는 일 할 수 없지마는 죄가 안 되는 한은 어데서든지 순종을 찾고,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은연중 찾아 느끼게 해서라도, 내가 느끼게 해서라도 그 사람이 명령할 때에 옳은 명령에 나는 복종해서 평생 사람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 내 철천지 원수인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려는 이 원수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평생 순종으로, 평생 낮아짐으로, 평생 가난해짐으로, 평생 날마다 죽기를 여기에서도, 여기에서도 죽어 내 구원을 이루고, 죽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 죽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가 주의 구원을 받는데 마땅한 길인 줄 압니다.
우리는 참 과거에는 내 돈을 빼앗아 간 사람이 원수였고, 내 주장에 호응하지 안하는 사람이 원수였고, 내 모든 명예나 신분이나 위신이나 그런 것을 췌손한 사람이 원수였지마는 이제는 우리가 그것 다 옛사람은 벗어버렸고 지내왔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의 원수요, 주님이 주신 이 구 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원수요, 잠깐 지나가는 이 나그네 세상에 한 자국 잘못 디디면 영원히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이 준비의 이 세상 살이를 꾀워서 나를 영원히 망치고 멸망하게, 영광의 나라에 가 가지고 얼마든지 자유할 수 있는 기능을, 물질계 우주에서 얼마든지 타고 돌아다니면서 일 초 동안에도 우주를 몇 천 바퀴라도 돌 수 있는 이건 우주의 내 귀한 쉽구로 내 의의 병기로 삼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기능을 다 살해시켜서 멸망시키는 그 원수보다 더 큰 원수가 어데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가 내 원수요, 영감의 원수가 내 원수요, 진리의 원수가 내 원수요, 주님의 구속의 원수가 내 원수요 이것 외의 것은 세상이 내게 대해서 어떤 손해를 보인다 해도 이 원수가 없는 데는 손해보일 원수는 없습니다. 그 원수는 나를 돕는 것이요 손해보 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원한이 없는 우리들이 되니까 원한이 없으니까 구할 게 없습니다.
원한이 없으니까 애터질 게 없습니다. '주여, 이것 안 주면 안 됩니다. 이것 안 주면 안 됩니다. 꼭 주시옵소서.' 안 주면 안 된다는 이 우리의 소원이 주님 앞에 없습니다.
이거는 뭣 때문입니까?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원수도 없고, 실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모두 다 이 세상에서 세상 것으로써 만족하고 죽고 망하는 일을 생명의 길인 줄 알고 그저 철없이 술취한 자와 같이 정신없이, - 그 자국을 떼 놓으면 그 한 마디를 하면, 그 한 행동을 하면, 그 한 생각을 가졌으면 그 한 말을 했으면 내게 어떤 큰 화가 올 것도 아무 생각없이 벌로 술취한 사람같이 이 세상에 날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원한이 있어야 풀어 주지요.
우리 원한이 정말로 있습니까? 우리에게 원한이 있습니까? 원한이 없지 않습니다. 원한이 너무 많습니다. 원한이 너무 많지마는 우리는 술이 취했고 자는 자와 같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원한이 없습니다.
주여 아무래도 이거는 안 주시면 안 됩니다. 이거는 해 주셔야 됩니다.' 하는 그런 원한적인 소원이 우리에게 없고 그러기 때문에 원한적인 그런 애소가 호소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고 그 기도를 방해하고 있는 지저분한 모든 불결한 것, 모든 불결한 것이 그것이 그런 원한이 있으면 이것 때문에 안 된다면 그것도 정리할 수 있고, '네 원한을 내가 풀어 주되 이것 때문에 안 된다 하면은 그것도 정리할 수 있지마는 우리 앞에는 수많은 방해물과 장애물들이 많이 있지마는 내 원한이 없으니까 그런 걸 정리할 필요도 없고 정리해 가면서 간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원한이 뭐인지? 이 사람은 가난해지지 못하게 가난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날마다 미혹시켜서 약화시키는 이것을 저의 원수로 삼고, 낮아지고자 하는 이것을 미혹시켜서 약화시키고, 종이 되려는 이 깨달음을 약화시키고, 날마다 나는 죽고 주님 살고, 내 욕심은 죽고 주의 소원은 이루어지고 날마다 죽는 이 날마다 죽기를 소원하는 이것을 약화시켜서 살기를 원하는, 정반대 살기 원하고, 높아지기 원하고, 부요하기를 지금도 원하고 지배자 되기를 자금도 원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원수의 걸음을 이대로 걷고 있는 이 원수를 원수인 것을 깨닫고 이 원한을 밤낮 풀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시면 이 원수의 원한은 다 해결됩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발자취 그대로 우리는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가난해치면서 가난으로 걸어가는 것이 천국입니다. 주님이야 나에게 억만금을 줘도 나는 그 처지에서 가난을 취하는 이것이 우리의 천국 가는 걸음입니다. 천국은 가난으로 걸어가고, 천국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걸어가고, 천국은 종노릇 하면서 걸어가고, 천국은 날마다 죽으면서 걸어가는 이 비밀을 깨닫고 여기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 이 걸음을 걷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원수 중에 원수이니 그 원수의 원한을 갚는 것은 성령이 오시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이 생선 달라 하면 배암 주고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줄 자가 있겠느냐?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정말로 십 자가의 원수인, 지금도 부하려고, 부하기를, 높아지기를, 지금도 왕이 되 기를, 지금도 살기만을 원하는 이 미혹의 원수를 원수로 알아서 이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속히 성령을 주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살아서 새사람으로 참 삽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육신의 부모 사랑보다도 더 크신 것을 우리가 믿는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떨어뜨리지 안하고 다 들어 주실 것을 믿는지? 우리의 모든 원한적인 소원은 구하면 빨리 다 갚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를 내가 보겠느냐?' 우리가 안 믿으면 주님은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됩니다. 확실히 인정해야 됩니다. 인정하고 그대로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