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19:56
우리의 신앙 목표
1987. 11. 1. 주일오후
본문: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신앙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음질한다 말은 학교 아이들 운동장에 누가 앞에 가느냐 하는 그 경주하는 경주를 가리켜서 달음질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달음질하면 이기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잘못하면 ‘이등도 이긴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등은 다 이긴 사람이고 이등은 한 사람에게는 졌기 때문에 이등이 되는 것입니다. 삼등은 두 사람에게 지면 삼등됩니다.
우리가 신앙 걸음을 걸어가다가 한 자에게 지나 두 자에게 지나 지면 진 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에게도 지지 안하고 다 이겨야 우리가 상을 얻지 몇 이겼다고 얻는 것 아니고 이긴 자는 다 이겨야 이긴 자지 다 이기지 못하면 이긴 자가 아닙니다.
우리 달음질은 무슨 달음질인고 하니 하나님 우리 주님에게 도달하기까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 말씀을 하셨고 또 우리의 머리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 앞에 달려가서 주님 품에 안겨야 주님과 함께 있어야 사망이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죄와 마귀가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과 나와 하나되면 그것이 진리와 나와 하나된 것이고, 진리와 나와 하나가 되면 참과, 참이라는 참과 나와 하나되는 것이고, 생명과 나와 하나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사망이요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이 구원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이 중생된 영생하는 생명을 가진 우리들이 이 심신이 멸망에서 구원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심신이 구원 얻는 것은 우리 심신은 현실에서 구원을 얻는데 현실에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가 되고 현실이 지나갔으면 그것은 살았고 현실에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되지 못했으면 자기는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내 심신이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달음질하는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신앙은 달음질 신앙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이 목표를 향하여 밤이나 낮이나 쉴새 없이 달음질하는 우리 신앙 생활이 되어야 승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자기 할 일 다, 볼 일, 자기 소원대로 다하고, 어느 인간들의 소원대로 다 해 주고, 뭐 사회 소원대로 나라 소원대로 다 해 주고 그렇게 찌끄러기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은 다 그것은 멸망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그런 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을 하나도 안 하고 포기해야 되느냐? 포기가 아닙니다. 머리는 머리가 돼야 되고 발은 발이 돼야 되지 발이 머리되고 머리가 발되면 그거는 죽은 사람입니다. 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슨 생활 하든지, 학생이라면은 공부하는 것이 저의 할 일이겠고, 또 사회인이라면 자기의 사업하는 거, 자기가 직장을 가지는 것이 자기 할 일이겠습니다. 가정에 들면은 모든 윤리나 그런 모든 가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생활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되는 것을 언제든지 어느 현실에든지 이것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가정에도 현실 없는 가정 없고, 사회도 현실 없는 사회 없고, 학생들도 현실 없는 학생들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생활은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어떤 현실이든지, 가정 가족 현실이든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현실이든지, 장사하는 현실이든지, 자기가 정치하는 현실이든지, 무엇을 연구하는 현실이든지, 어떤 현실이든지 모든 현실은 다 주님과 나와의 하나되는 이 일을 주력해서 해야 됩니다.
이래서, 자기가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밤이나 낮이나 공부할 때에 공부하는 그 공부를 주님과 나와 하나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공부하면서 언제 주님과 나와 하나될 수 있는가? 공부하면서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주님과 나와 하나되어서 구원 잘 이루기 위해서, 내 공부해서 남한테 떨어지지 않는 것이 주님과 나와 하나되어 주님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서, 내가 또 공부해 가지고서 앞으로 출세하면은 출세하는 것은 출세해 가지고서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나와 하나되는 그 생활 하기 위해서, 그러면 공부하면서도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되는 이 일로 공부할 수 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장사하면서 주님과 하나되는 일로 장사할 수 있고, 정치하는 사람도 주님과 하나되는 일로 정치할 수 있고, 또 아무리 바쁘고 분주한 데에도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뭐 복싱이던가 달음질이던가 거기 제일 세계에 참표를 딴 그 사람이 따고 난 다음에는 앉아서 무릎 꿇고 앉아 울면서 주님이 나를 도와 주셔 이와같이 했다고 자기는 일생 동안 믿는 사람으로서 거게 나서 가지고 어짜든지 주님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항상 기도로 주님에게 간구하고 주님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자기는 한번도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에게 영광 돌리고 주님을 더 가까이 하기 위해서 그 운동 했다는 그런 말을 언제 신문에 난 것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는 이 생활을 달음질 생활로 하라 말은 열심히 하라 말이요, 쉴새 없다 하는 말이요, 있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 하라 말입니다.
달음질할 때에 누가 전심 전력을 기울이지 안하고 힘을 남겨 놓고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어데 있겠습니까? 요 달음질로 비유하는 것은 우리는 힘을 남기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서 이 달음질,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과 나와 하나되는 이 일에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서 하라는 것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못하면 사람이 열심을 내기는 내나 목적이 주님과 하나되는 이 목적을 하지 못하고 다른 목적에서 열심히 부지런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향방 없이 달리는 자입니다, 향방 없이. 목적 없이 달리는 사람. 어디로 가야 될 줄 모르고 그저 달리는 사람.
우리의 목적은 주님과 나와 하나돼서 내가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진리의 행위가 되는 것이요, 온전한 행위가 되는 것이요, 구원의 행위가 되어지는, 내 심신이 영생으로 완전히 성화되어지는 이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목적 없이 신앙 생활 해도 헛일, 아무리 목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 하지 안하면 헛일,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로 목적을 두고서 향해서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목적을 향해서 신앙 달음질을 하는 이 달음질은 다른 것을 하면서는 못 하는 줄로 그렇게 알면 안 됩니다. 이 신앙 달음질을 어데서 하느냐? 신앙 달음질은 현실이 아니고는 하지 못합니다. 신앙 달음질은 현실에서 해야 되고, 현실에 해야 되니까 신앙 달음질은 자기가 현실에서 공부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전쟁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무슨 뭐 직공 생활 하든지, 연구를 하든지 어쨌든지 그것이 자기 현실입니다.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하는 그게 자기 현실이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그것이 자기 현실이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그게 자기 현실입니다. 자기 현실 거게서 뭣 하느냐? 주님과 나와의 하나되는 그 일에 집중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신자의 노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하는 신자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공부하는 것 같지마는서도 공부하는 그거는 껍데기고, 공부하는 그거는 껍데기고, 어떤 그 어학에 단어를 외우면 단어를 외우는 그거는 껍데기라서 껍데기 단어를 외우고 속에 알맹이 목적은 그 단어를 외우는 거게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되는 그 일을 지금 숙달시킵니다. 연습시킵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 없는 우리들의 활동은 없습니다. 우리의 활동은 다 현실에서 하는 것이요 각자의 활동이 다른 것은 각자의 현실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활동에서 달음질해야 됩니다. 자기 활동에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돼야 됩니다. 자기 사업에서 주님과 자기와 하나돼야 됩니다. 자기의 모든 직장에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돼야 됩니다. 자기의 연구에서 주님과 자기와의 하나돼야 됩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향하여서 달음질하는 이 생활이 자기의 모든 이 세상 생활 다 떼내 놓고 하는 것으로 그렇게 오해하는 그것은 아주 오해입니다. 자기의 생활하는 그 생활을 떠나서는 신앙 생활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생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활 그 속에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그 생활의 목표가 주님으로 더불어 하나되는 그것이 목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목표 목적 달성을 위한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이어야 된다 하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여게서 게을하게 수월하게 신앙 생활 할라 하는 그런 사상을 완전히 다 불로 태워 없애버려야 됩니다.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달음질하는 이 신앙 생활 해야 된다 하는 데에 신앙 생활을 수월하게 게을하게 이렇게 해도 된다는 그자는 내 신앙의 원수인 줄 알고 자기 목사가 그렇게 해도 원수라고 말은 안 해도 ‘저 목사는 내 신앙에는 원수다’ 자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데에 권찰이 해도 말은 못 해도 ‘저 권찰은 내 신앙 생활의 원수다’ 내 신앙 생활을 아버지가 그렇게 해도 ‘저 아버지는 내 신앙 생활에는 원수다’ 어머니가 해도 `신앙 생활에 원수다’ 자기가 자기의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해도 ‘내게 있는 요 생각은 내 신앙 생활에 원수다’ 원수인 줄 알고 거기에 막히지 안해야 됩니다. 거게 지지 안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가 무슨 달음질 신앙 생활을 방해할 때는 이겼지마는 자기 친구가 방해할 때는 그만 져 버립니다. 그것도 헛일. 자기 친구도 다 이겼지마는서도 자기 상관이 말할 때는 져 버립니다. 그것도 헛일. 학교 자기 선생이 말하니까 진 것도 헛일. 다른 거는 다 이겼지마는서도 남편이 말하니까 진 것도 헛일. 공산주의가 독침과 독약을 가지고서 고문과 고형하면서 신앙 생활에 달음질을 못 하게 할 때에 거게 막혀서 중단되고 중지하는 것도 그것도 신앙 생활에 진 것, 패전자.
그러면 독침과 독약을 마시우고 고문과 고형하는 데서는 무슨 신앙 생활 하느냐? 그거는 그들이 내 고기덩어리에 했지 내 마음은 얼마든지 달릴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얼마든지 달릴 수 있고 내 정신은 얼마든지 달릴 수 있습니다. 내 소원은 달릴 수 있습니다. 내 소욕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껍데기의 고기덩어리를 찢었으면 찢고 끊었으면 끊고 난도질했으면 했지 내 마음은 난도질을 못 합니다.
내 마음과 소원과 소욕 뜻 정신 이것은 그대로 달음질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에게도 막히지 안한 자가 승리 생활입니다. 만일 아홉 가지는 이겼는데 한 가지에게 져 버리면 그것도 내나 신앙의 패전자요 승리자는 못 됩니다. 모든 걸 다 이겨야 그게 신앙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신앙 목표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주님 앞에 서는 자, “이기는 자는 아버지의 보좌에 내가 앉은 것처럼 너희도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리라” “이기는 자는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책에서 흐리지 안하고 하나님과 그 사자들 앞에서 내가 증거하겠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 얻게 한다” 다 이기는 자, 이기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진 자에게 무슨 힘이 있어? 진 자는 다 마귀와 죄와 사망의 종이 되는데 무슨 승리가 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이라.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 하면은 목사는 자꾸 예수 믿는 것만 말하고 딴거 안 하기 때문에 목사로 말하면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 하지마는서도 우리 사업하는 사람이 어데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 사업 그것이 네 현실이다. 그 사업 전부가 달음질하는 사업이 돼야 된다.
네가 어떤 존귀한 업무를 해도 그 업무 전부가 주님 앞으로 달음질하는 업무가 돼야 된다. 네가 가정도 주님 앞으로 달음질하는 가정이 돼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 아닌 업이 없고, 현실 아닌 자기의 형편이 없고, 현실 아닌 자기 사정이 없습니다. 그 현실 전부 그 현실에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가까와져 하나되는 이거는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 말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에 이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앞으로 이제 불 가운데서 탈 것이오. 누가 타? 영은 안 타지만 제 고기덩어리의 기능은 타야지. 마음의 기능은 타야지. 하나님이 탄다 했는데 제가 안 탈 수 있습니까? 이것을 참말로 믿으면, 자기의 기능이 불탄다면 썩어질 기능도 얻을라고서 대가리를 싸짜매고 일류 대학에 들어갈라고 야단을 지기는데 영원토록 있을 기능, 그까짓 기능은 다 없어져. 영원토록 있을 기능을 우리가 오늘에 얻고 죽이고 하는 일인데 이 일을 일류 대학에다 비할 것이요? 어디다가 비하겠습니까? 참말로 믿으면, 그런 것도 전심 전력 기울이는데 어떻게 여기 대해 전심 전력을 못 기울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있기를? 또 이 생활 하는 것은 세상에 실패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여러 배 해 줘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지 절대로 천해지지 않습니다. 자기의 현실에서 신조와 교리 생활로써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 쳐놓고 천물이 절대 안 됩니다. 왜 천물이 되겠소? 오늘도 세상을 주름잡고 제일 대가리 위치를 거머쥔 것은 다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깨닫고 확신을 가집시다.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싸우기를 허공 친다 말은 싸울 때에 공중하고 싸웁니다, 공중하고.
공중하고 무슨 싸웁니까? 아무것도 없는 공중하고 싸우면은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지 정신 이상자지 그 사람이 무슨 유익을 얻을 것입니까? 공중하고 싸우는 자, 공연히 공중하고 싸워서 공중에다 활을 쏘고 공중에다 총을 쏘고 공중에다 대포 쏘고, 공중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와 같은 내가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대적을 보지 못하고 대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적으로 더불어 싸우지 안하고 대적 없는 공중하고 싸우는 내가 그런 싸움 싸우지 않는다 말은 대적을 똑똑히 발견하고 대적으로 더불어 싸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대적은 뭐이 대적이냐?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이 싸움이라. 자기의 마음과 몸을 악령 악성 악습, 원수, 그놈이 묘하게 가장을 해 가지고 나올 때는 저인 줄 압니다.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자기인 줄 압니다.
자기 중심의 성질, 자기 중심의 욕심, 자기 중심의 뜻, 자기 중심의 소원, 자기 중심의 모든 습성 습관, 그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죽인 원수입니다. 그놈을 죽여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 마음과 몸을 중생된 내가 뺏들어서 나에게 이 마음과 몸이 복종하면, 중생된 영에게 복종하면, 중생된 새사람 나에게 복종하면 마음도 살고 몸도 살고, 중생된 나에게 복종한 것은 진리에게 복종한 것이요, 하나님에게 복종한 것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복종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다 영생입니다.
싸움은 무슨 싸움이냐? 내 마음과 몸을 나 아닌, 나를 죽인 원수 그놈, 내라고 가장을 해 가지고 나타나는 옛사람 그놈, 나 아닌 그놈, 마음 이놈에게 와 가지고서 ‘야 네 중심으로 살아라’ 하니까 마음 이놈이 어리석어서, 제 중심으로 산 마귀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망인데 영원한 멸망인데, 이 마음과 몸뚱이를 마귀와 원죄와 본죄가 차지하고 있는 이것을 빼앗아서 내 마음과 내 몸 만드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현실에서 내 마음과 내 몸을 원수 마귀와 원죄 본죄에게서 빼앗아서 내 마음과 내 몸을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내게 복종하도록, 진리에 복종하도록, 영감에 복종하도록, 주님의 피공로에 복종하도록,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현실에 이것이 우리 싸움입니다.
현실에 자기가 싸운다고 하는 것이, 신앙 싸움을 한다고 하는 것이, 진리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원수인 줄도 모르고, 저거 장사에 방해하니까 그 사람이 원수인 줄 알고, 저를 욕하니까 그 사람을 원수인 줄 알고, 제 하는 일에 가로채기 하니까 원수인 줄 알고, 저를 좋아하지 안하고 돕지 안하니까 원수인 줄 알고, 그런 거는 다 원수 아닙니다.
네 마음과 몸을 차지하는 마귀와 원죄, 자기 중심이 원죄입니다. 본죄, 마귀와 자기 중심의 행동한 그것이 본죄입니다. 자기 중심의 성품이 원죄요 자기 중심의 성품으로 행동한 그것이 본죄입니다.
이 원수가 내 마음을 차지해서 현실에 내 마음을 성령에 복종하고, 진리에 복종하고, 주님의 공로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그것이 곧 중생된 참사람 나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을 내게 복종시키는 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복종하려고 하니까 복종 못 하게 하는 원죄 본죄 그놈이 방해하니까 원죄 본죄 그놈을 죽여버리고, 악령을 죽이고, 악성을 죽이고, 자기 중심이라는 그놈 나쁜 놈을 죽이고, 자기 중심의 생각을 죽이고, 자기 중심의 소원을 죽이고, 자기 중심의 뜻을 죽이고, 자기 중심의 욕심을 죽이고, 자기 중심의 나쁜 습성을 죽이고 이제는 현실에서 자기 마음과 몸을 중생된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거, 곧 진리에 복종시키는 거, 영감에게 복종시키는 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복종시키는 것이 새사람 나에게 복종시키는 것이요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 복종시키는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헛된 투쟁을 합니다. 사람들은 투쟁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사람, 실패로 더불어 투쟁하는 사람, 낭패로 더불어 투쟁하는 사람, 병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사람, 별별 다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지마는 경쟁하고 투쟁하나 네 적이 뭐인 줄 똑똑히 모르고 네가 싸우는 것은 다 그것은 허공을 치는 것 한가지기 때문에 이거나 저거나 다 망하는 것입니다.
네 현실에서 네 마음과 몸을 중생된 너에게 복종시키는 거, 중생된 새사람 네 마음을 만들고 네 몸뚱이를 만드는 것, 중생된 너에게 복종시켜서 네 중생된 영감의 마음대로, 진리의 깨달음의 마음대로, 구속받은 자의 마음대로 이렇게 복종하는 이 마음을 만드는 거,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달음질도 배웠습니다. 우리의 싸움도 배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를 갈아붙이고 막 다물고 요 현실에서 내 마음과 몸은 원수 이놈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원수 이놈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자기 중심, 마귀, 자기 중심의 습성, 도적질도 그놈이 내 심신 차지했고, 음행도 그놈이 내 심신을 차지했고, 모든 거짓도 내 심신을 그놈이 차지했고, 내 심신을 그놈이 차지해 가지고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내 심신을 그놈에게 뺏기지 안하고 내 심신을 빼앗아서 진리대로 영감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사는 이 심신이 되도록 내가 빼앗아서 내 심신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런 것은 밤에만 하는가 낮에만 하는가, 일 년에 한 번 이 싸움 싸우는가, 매일 한 번씩만 싸우는가? 이 싸움을 언제 싸웁니까? 저 ○선생? 언제? 뭐라 하노? ‘현실’ 하는 게 아니라 언제만 싸워야 되느냐 하니, 어데서 싸우느냐 하면 현실이지만 언제 싸우느냐 하면은 ‘밤이나 낮이나 계속 싸워야 됩니다’ 이래야 답이 똑똑하지. 그렇잖아? 일년 삼백육십오 일이면 삼백육십오 일을 다 싸워야 돼. 일 분 일 초도 이 싸움이 쉴 사이는 없어야 되는 것이 이 싸움의 성질입니다. 달음질 하는 것이야 서로 달음질이 끝나기까지는 계속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싸움이 어데 쉴새가 있으며 끝날 때가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이렇게 내 심신을 원수에게 뺏기지 안하고 이것을 빼앗아서 내것 만들어서 영생하도록 하려 하면 이렇게 힘들어야 되는데 일 년 내내 제 하고 싶은 대로 죄만 짓고 돌아다니다가 주일날 오전에 와 가지고 삐꿈 와 가지고서 들으니까 제 욕심에 맞지 안해, 제 비위에 맞지 안해, 마귀의 생각에 맞지 안해, 원죄에 맞지 안해, 본죄에 맞지 안하니까 불만하고 불평하고, 네가 원죄와 본죄의 인간이 되어 있으니까 그 인간이 고쳐져야 이 말씀이 네게 맞지, 그리 안 하면 맞지 안해.
얼마든지 가서 시비를 한번 해 봐요, 뭣이 깨지는고 보구로. 어리석지 마라.
하나님 앞에는 겸손해야 돼요. 백 목사 그까짓 거는 짓밟아 처넣어도 되고 뭐 죽여도 되고 이렇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말씀이야. 어기면 죽어.
그런고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되는 이 목표를 향하여 신앙에 달음질하자. 달음질 신앙 생활 하자. 달음질 생활 하자.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는 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달음질 생활 하자.
내 마음과 몸을, 마음과 몸의 기능 말이오. 마음과 몸의 이 움직임을 원수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안하고 싸우자. 싸워서 현실에서 그놈이 내 마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내 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현실에서 내 마음과 몸은 영감대로 사용하고 진리대로 사용하고 주의 피공로에 합당하게 사용하고 세상 권세 어떤 놈이라도 그놈에게 뺏기지 않도록 싸우자. 이 싸움은 끝날 시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시기를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하는 말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싶은 사람마다 절제를 해야 승리하지 절제 안 하면 승리 못 합니다. 절제 안 하면 제가 암만 해 봤자 그만 모래밭에 물새듯이 뭐 새버리기 때문에 저는 성공을 못 합니다. 힘을 못 씁니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되지.
아무리 폭탄이 힘 있고 큰 폭탄이라 할지라도 구멍 뚫혔으면 그 폭탄은 그저 퍼러럭거리고 말지 소리도 안 나고 폭발의 힘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절제한다 말은 절제라 말은 조절한다 그말이오. 조절. 모든 면을 두루두루 생각하면서 이 면과 저 면 모든 면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을 더 할 때는 더 하고 덜 할 때는 덜 하고 이래 조절하지 안하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달음질을 이기는 데에도 싸움을 이기는 데에도, 이 두 가지, 달음질 싸움 이 두 가지를 말했는데 이 두 가지에 성공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된다. 성공을 하고자 하는 자는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된다.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된다 그말은 간단합니다. 달음질하는 자는 어떤 절제해야 되느냐? 달음질하는 자는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달음질하는데 다리오 왕이 달음질 못 하게 하고 달음질하면 사자구덩이에 던진다 하니까 몸뚱이가 사자구덩이에 던지워져도 달음질하는 것은 그는 중단하지 안했습니다.
달음질을 중단했으면 사자굴에 안 들어갔을 터인데 달음질을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사자구덩이 넣는다 넣는다 해도 달음질을 중지하지 않으니까 사자구덩이 던졌습니다. 사자구덩이 던져 넣어도 달음질을 중단하지는 안했습니다.
달음질을 중지하지 않음으로 사자구덩이 들어간 그는 파사 나라를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하나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달음질하는 데에 절제하는 자는 달음질에 방해하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달음질하는 사람이 좋은 깃도 구두도 이 달음질에 방해되면 벗어 던져야 되지, 자기 달음질하는 데에 좋은 신사 양복도 달음질에 방해하면 벗어 던져야 되지, 만일 양말도 방해되면 양말도 벗어 던져야 되지, 빤스만 입고 달려야되지.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는 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거는 좋지마는 좋으니까 가지고 가야 된다 하고 들고 제가 금덩이라도 들고 가면 저는 달음질은 실패지.
달음질에 절제하는 것은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고 손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리는 것이 이것이 절제입니다.
내가 신앙 달음질하는 데에 아무리 돈벌이 잘되는 업이라도 신앙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면 그 업을 버려야지. 자기가 신앙 달음질하는 데에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방해되면 버려야지. 될 수 있는 대로는 자기가 가지고 달음질할 수 있도록, 가지고 방해되지 않은 것은 가지고 달음질해야지. 방해되지 않은 건 가지고 달음질하지마는 방해되는 것은 버려야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할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서 달음질하는 이 걸음을 걸을 때에 자기에게 방해되는 것은 그 모두 정붙은 지방 정실 혈육 정실 있지마는 다 두고 떠났지. 그러나 이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지 안하고 달음질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소유나 뭐이나 다 가지고 떠났지.
얼마 전에 창세기 12장을 많이 장기간 동안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우리 총공회 산하에 목사들은 알아듣는 사람이 내가 있는가 없는가 모르겠어. 알아들으면 표가 나. 알아들으면 세상을 이긴 표가 나. 알아들은 사람은 세상을 이겨. 벌써 해결짓고 있어.
또 절제가 뭐인가? 자기 달음질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춰야지. 수건으로 머리를 싸짜매면 그 수건은 머리를 싸짜매니까 가져야지. 달음질하는 데에 자기 수건을 입에 물어야 되면 또 그거는 암만 그거 또 가져야지. 달음질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가지고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그것은 다 버리는 그것이 절제입니다, 절제. 간단해.
내가 주님 앞으로 향해서 주와 나와 하나되기 위해서 요 진리와 영감의 인도 따라갈라 하는데 진리와 영감의 인도에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걸 가지고 따라갈라고 애를 써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데는 부득이 눈물로 놓고 가야지.
그거 잡고 그걸 안 놓으려 하면 주님 따라가는 걸음을 가지 못할 터이니까 주님과 하나되는 걸 포기하든지 가진 것을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지 안 하고 어떻게 할 겁니까, 하기를? 이럴 때는 오늘까지 다 주님과 달음질이야 먼 데 있는 것이니까 뭐 상관 없다 해 가지고 다 척척 포기하고 땅의 것은 알뜰히 가졌지만 오늘이라도 주님 오시면 다 후회됩니다. 믿는 사람들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뭐, 주님과의 하나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이면 못 끊을 것이 없어. 못 버릴 것이 없고. 좋지만 버려야 돼. 주님과 하나되는 이 달음질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너는 꼭 주님과 하나되는 데에는 지금은 네 목숨을 내놔야 된다’ 목숨도 내놓지. 몸도 내놓지. ‘네가 주님과 하나되는 이 일을 할라면은 감옥에 가야 되겠고 감옥에 안 갈라 하면 하나된 이걸 내놔야 되고’ 감옥에 덜퍽 뛰어 들어가고서 하나되지! 이게 다 신자들입니다.
그런 것을 갖추지 안하면 안 됩니다. 절제하는 데에는 우리가 자는 것도 절제해야 됩니다. 자는 것도 뭐 시간도 자기가 생각해서 어느 시간이 제일 좋은 시간이냐? 나는 그거 작정하고도 아직까지 실행을 못 했어. 저 지금 먼데서 아마 내 방을 보면, 불을 여덟시에 끄려 했는데 여덟시에 끄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자유가 없어.
이렇게 저렇게 주 오면 그 사람을 박절하게 딱 버리지 못해서 내가 자유가 없어.
그러나 내가 그 자유를 원해서 노력하니까 언젠간가 자유는 될 줄로 믿습니다.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해 보니까 밤 여덟시에 소등을 하고, 자든지 안 자든지 여덟시에 소등을 하고 그러면 소등하면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나 혼자 뭘 하든지 뭐이든지 신앙 생활에 자유할 수 있는 그거 할라 하면 그것도 ‘여덟시에는 내가 불끈다’ 그거 가지고는 안 돼요. 그거 가지고 안 돼.
아침부터 ‘오늘은 나는 밤 여덟시에 불끄겠다’ 아침부터 그걸 생각해 가지고 아침부터 모든 생활을 조절해서 그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모든 생활을 다 절제해 나가면 틀림없이 여덟시에 딱 끌 수 있어. 아침부터 준비 안 하면 안 돼. 아침부터 조절해야 그거 또, 시간 맞추는 그것도 조절이 돼.
자기가 자는 것은, 자는 것도 절제할 것이 많애. 자는 것도. 시간도 절제해야 되지, 또 자는 데는 자기는 자는 장소도 절제해야 되지, 또 모든 친구도 절제해야 되지, 누워자는 데에 절제할 거 많아요. 누워자는 데에 절제할 거.
거게는 경제도 따르지, 가족도 따르지, 신체도 따르지, 병도 따르지, 강약도 따르지,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일편단심 주님하고 나하고 하나되는 요 일 위해서 모든 것을 조절하고 모든 것을 다 가감하고 또 구비하고 다 제거하고 뭐 일이 얼마나 바쁜지 몰라. 자는 것도.
‘나는 오늘은 어데 가 자야?’ 자기가 산에 가 자야 될 때는 산에 가 자야지.
그리 안 하면 또 그 자는 데에 절제 못 하는 거라. 산에 가 잘 때는 산에 가 자야 되고, 들에 잘 때는 들에 자고, 집에 잘 때는 집에서 자고, 몇 시간 잘 때는 몇 시간 자야 되고, 또 일찍 잘 때는 일찍 자야 되고, 또 불 꺼놓고 무엇을 해야 될 때는 하고 이래서 모든, 자는 모든 생활도 이 달음질에서 주님 만나는 이 일을 위해서 전부를 거기다가 기울이고 그 중심으로 마구 조절해야 되겠고, 먹는 것도 그 중심으로 조절해야 되겠고, 그거 잘못하면 먹는 것도 자기 분수만 넘어서 맛있는 거 한 끼만 먹어 놓으면 그만 신앙 생활 안 돼요. 안 먹을 거 한 끼만 먹어 놓으면 그 굴지를 메울 수가 없어. 안 먹을 대접 한번 받아 놓으면은 그 굴지야 더군다나 더 메꿀 수가 없어. 자기 분수에 따라서.
이러니까 물질이라 하는 것이 그 분수에 맞춰서 이것을, 많으면 좋은 줄 알지마는, 많이 먹으면 좋은 줄 알지만 그것도 안 되고, 많이 먹어도 안 되고 적게 먹어도 안 되고, 또 영양 부족해도 안 되고, 영양도 다 채워야 되겠고, 영양 채우는 데에는 뭐 나로서는 영양 채우려 하면 어느 정도라야 되는가? 이상해요. 사람은 영양이라 하는 것은 고급 식물에만 있는 것 아닙니다. 저급 식물에도 있어. 저급 식물에는 양이 많아야 돼요. 양이 많아야 되고 저급 식물은 소화를 잘 시켜야 되지 고급 식물에 소화 잘못된 그거보다도 저급 식물에 소화가 잘 되면 거게 충분한 영양 보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소화가 잘되는 데에는, 소화가 잘되는 데는 제일 소화 잘되는 데는 뭐이냐 하면 기쁨이 소화가 제일 잘돼.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면 아무거나 소화 잘돼. 그 모든 것이 다 이것도 절제해 가지고서 모든 것이 정리돼지면 뭐 평안할 수밖에 없고 기쁠 수밖에 없지 뭐 방해되는 게 하나나 있어야지? 먹는 것도 이거 전부 자기 분수를 맞춰서 이렇게 해야 되지, 입는 것도 분수를 맞춰야 되지, 자기 분수 맞추지 안하면 그게 절제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맞추게 한다 말이오.
자기가 신앙 걸음 걸어가는 데에 ‘내가 이 신앙 걸음을 걸어서 주님 만나는 데에는 이제 나는 옷은 어느 정도 입어야 되겠고 나는 또 거주는 어느 정도 해야 되겠고,’ 다 같이 천만 원을 가지고, 천만 원을 가지고서 보니까 아주 고대광실 높은 집으로서 뜰도 있고 아주 방도 미꿈하고 아주 공기 좋고 훌륭한 데 있고, 거기 있으니까 예배당에 오기가 멉니다. 이래 놓으니까 달음질하는 데 방해가 돼.
이런데 또 달음질하기에 가까운 곳을 할라 하니까 천만 원 가지고는 여게는 조그만한 공기 속에 방 조그맨한 거 한 한 칸이나 두 칸밖에 안 돼. 이래도 방 좋은 것만 취할 게 아니라 또 모든 면에 내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에 어느 게 좋은가 이래서, 거처하는 것도 그뭐 조절할 게 얼마나 많은지.
이래서, 거처하는 거, 입는 거, 먹는 거, 또 내가 사업도 또 절제해야 돼. 사업도 ‘돈만 보면 요게 낫다. 신앙 생활에는 조게 낫다. 요거 신앙 생활에는 고거 인인 관계가 조게 안 됐는 게 하나 있다. 그 신앙 생활에는 뭐 일주일 내 가다가서 한 번 어려움이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이걸 계산대 가지고서 주님 만나는 달음질에 편리하도록 거게 중심으로 거게 집중시켜 가지고서 그걸 중심으로 해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계산해 가지고 해야 되는 것을 가리켜서 절제라 이랬어.
신앙 생활이 하나 둘만 가지고 되는 줄 압니까? 안 됩니다. 전생활을 다 하나님 만나는 요 달음질 중심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또 따져보고 이래 가지고서 그 생활에 나는 ‘그래도 제일 달음질하는 데에 좋은 것은 요점이다’ 그점을 취하는 그것이 절제 생활이요 그것이 자기로서는 온전한 생활입니다.
분수에 맞은 생활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이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생활이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생활이요 이러니까 그 생활에 거게 행복이 들어 있어.
안 볼 구경 한번만 했으면 그만 해도 그만 구멍이 뚝 뚫렸기 때문에 그거 메꾸려 하면 힘이 들어. 안 볼 것 한번만 봐도. 안 누릴 거 한번만 누려도. 안 갈 데 한번만 가도.
이러니까 모든 일에 절제한다 말은 모든 생활을 주님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요 일을 위해서 전반을 다 계획하고 따지고 해 가지고서 물샐틈 없이, 하나도 헛점이 없이 요 모든 것을 조절해 가지고서 자기가 주님 만나는 이 일에 방해하는 것은 차차 제하고서 구원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생활을 거머쥐고 요렇게 조절하지 안하면 신앙 생활은 안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싸움도 이게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런데 그 사람의 생활은 미치괭이 생활이라. 움푹짐푹 움푹짐푹해서 하나도, 하나도 모두 다 조절이 안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뻐꿈뻐꿈해 가지고 하나도 맞는 게 없어. 고거 하나만 보면 좋은 거 같고 맞는 거 같지만 한테 맞춰 보니까 다 헛일이라.
이래서, 이거는 전면으로, 이 면을 찔러봐도 어느 면을 찔러봐도 물샐틈이 없이 제대로는 딱 맞아서 아무것이 와도 요동치 안할 수 있는 요 생활로 조절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신앙 생활, 점령해서 복종시키기 위해서 싸우는 신앙 생활, 이 두 가지 신앙 생활은 소문도 좋고, 이름도 좋고,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고, 좋지마는 이 신앙 생활은 절제에서 나온다, 모든 전생활에 조절에서 나온다, 그거 아니고는 이것이 나올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전과 오후에 증거한 요 말씀을 단단히 기억하고 양보하지 마십시오.
내 구원은 전심 전력을 기울여 달음질하는 생활이라야 된다. 나는 바쁘다, 옆에 돌볼 여가가 없다. 달음질하는 생활 해야 된다. 내 걸음은 달음질 걸음이다.
눈코를 뜰 여가가 없다. 달음질하는 생활이다.
밤이나 낮이고 쉬지 않는 투쟁이다. 내가 짜빡거리면 내 마음은 어만 놈이 도둑해 갔고 내 몸뚱이는 어만 놈이 도둑해 가지고서 하루 종일 마음과 몸뚱이는 마귀에게 다 뺏겨 놓고 원죄 본죄에게 뺏겨 놓고 구원 이룬 게 하나나 있어야지! 이러니까, 내 싸움은 밤낮으로 계속되는 싸움이다. 내 달음질도 계속되는 달음질이다. 내 달음질도 모든 거 다 이겨야 되지 하나에게도 지면 헛일이다. 내 싸움도 하나에게도 지면 헛일이다.
아이들 학교에서 편씨름 할 때에, 처음에 보니까 저쪽 군 다 이겼어. 다 이기고, 오십 명인데 마흔아홉을 다 이겼어. 마흔아홉 이겼으면 다 이겼습니까? 마흔아홉 이겼으면 다 이겼습니까? 하나가 남았어. 하나가 남았는데 하나 그게 전부 오십 명 다 잡아넘기면 어느 편이 이기요? 마흔아홉 명이 처음에 진 그편이 나중에 하나가 들어서 다 이기면 이긴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다 이겨야 되지 다 이기지 안하면 내나 종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건설구원이라 하는 건 이렇게 힘드는 구원이오. 요렇게 하다 보니까 그 사람이 자기 현실 제일 낮은 자리에서 제일 어린 자리에서 요렇게 달음질하기 위해서 전투하기 위해서, 쉬지 않는 달음질 쉬지 않는 전투, 목표 도달, 목적 도달의 달음질, 심신을 완전히 자기의 심신으로 점령해서 자기가 다 사용할 수 있는 자기 점령하는 이 전투, 이 두 가지 전투하는 데에 모든 면에 절제해서 요것도 조절했고 조것도 조절 모든 거 조절해야 되니까 그 조절하는 그 사람의 생활, 그거 연습하다 보니까 살림살이도 조절하는 데 능숙하지, 사업 계획에도 조절하는 데 능숙하지, 나라 국정을 맡았으면 국정도 조절하는 데 능숙하지, 모든 일을 조절해 가지고서 빈틈 없이 하는 사람의 일을 누가 방해할 거야? 이 사람이 필연적으로 상등 인물이 될 수밖에는 없는 거라.
내가 며칠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 된다 하는 걸 나는 확정지웠다 하는 그말은 내가 뭐 잠시 저거 말 듣고, 말을 들어 보니까 빈틈이 많아. 말을 하는 데도 말 그거 말 몇 마디 하는 데도 조절이 없어. 조절이 없으니까 여게 뻐끔 구멍이 뚫렸지 저게 뻐끔 구멍이 뚫혔지 여게 툭 솟았지. 그거 가지고는 지금 아무리 작은 나라지마는서도 맡을 자격이 없어. 그중에는 조금 조절성이 좀 있다 하는 걸 보고서 ‘저게 제일 낫겠다’ 그렇게 생각했지.
여러분들, 예수 믿는 생활은 바로 하면 아무리 등신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같이 돼져.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하나님같이 돼지고 또 연습하는 것이 아주 고차원에서 연습을 하고 있어.
이러기 때문에,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달음질 신앙 생활,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 쉬지 않는 전투 생활, 이 생활을 하기 위해서 모든 면을 절제해서 조절해. 모든 면을 절제해서 조절해. 절제에 완성했으면 달음질도 성공하고 전투도 성공하고 다 완성입니다.
그저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치가 있어야 되지 이치 없이 뭐 고함만 지르면 되는 줄 알고, 뜨거우면 되는 줄 알고, 별별 써 가지고 뭐 지시면 되는 줄 알고, 눈감고 지시해 본다는, 순거짓말쟁이들, 지시파 순거짓말쟁이요. 불파 다 그거 거짓말쟁이요. 그거는 거짓말이라, 다른 면은 좋아도. 무슨 성령이 오면 배가 뜨겁고 손이 뜨겁고 뜨끈뜨끈하다. 그거 성령은 그런 성령 아닙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물론 자기가 테이프를 복사해 가지고서 사 가지고 가서 혼자 듣는 것도 좋지마는서도 교회서 재독할 때에 고요히 와 가지고서 눈감고 잘 들으면서 자기와 말씀과 대조를 해 가지고서 거게서 사람이 변화되는 이 생활이 참 구원에 가속도로 이루는 속성인데 재독할 때 사람들 몇이 안 와. 어떨 때는 열 몇인가 오는 거 보고서 재독하기가 아까와. 그래도 오는 그 사람 위해서 해야 돼. 안 오는 그까짓 거 천 명보다 오는 한 사람이 나아.
눈감고 생각하고 확정을 지워요. 작정을 해요. 죽는 길 아닙니다. 이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 길만이 기쁘고 즐거운 길이요, 참 평안한 길이요, 지혜 있는 길이요, 천하 다 줘도 이만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