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적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26일 수새

 

본문 : 딤후4:14-18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이 전도할 때에 전도를 심히 반대하는 그런 해를  많이 끼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물질적으로 대적이 되는 일도 많고, 또 사업적으로 활동적으로, 계획적으로  우리에게 대적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령의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나 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뜻대로 하려고 할 때에 그때에 나를 대적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 또 영감을 대적하는 것과, 내가 행하든지 전하든지 할  때에 하나님의 뜻 대적 다시 말하면 영감과 진리를 대적하는 그 대적이 우리  대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적대시하지를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인적 요소  이 모든 피조물의 요소 그런 것으로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대적으로 잘 압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이 물질계에 살면서 다른 무엇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적으로 생각지 안하고 그런 것은 그저 무조건 손해봐도 괜찮습니다.

손해봐도 그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손해본 그것이 내게는 죽을 것을 심어 살 것으로 바꾸는 것이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모든 보이는 물질계의 것을 제한 없는 신령한 것으로  바꾸는 그 계기요 방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우리 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내가 하냐님의 도를 전할 때에 그 내가 전하는 도를 반대해서 그도가  전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내가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의 대적입니다. 이 대적에게는 우리는 어떤 것이  손해가 간다 해도 이 대적에게 우리는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대적으로 알고, 그저 그 방편이 무슨 극성으로 하든지 또  유성으로 하든지 또 그 방편은 혹 후퇴해 가지고 재작전으로 하든지 그저 그  방편은 성경에 위반되지 안한 그런 방편을 여러가지 써서라도 우리는 전하는 그  진리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 내가 진리대로 살려고 할 때에 대적하는 것 그런  대적은 그것이 참 우리의 대적인 줄 알고 거기에는 우리는 양보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혹 정면 충돌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피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도를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대적하는 그런 곳은 방편상 주님이  그곳을 피해 가지고 다시 그곳에 전할 때도 있고 후에 다른 방편으로 전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도를 반대할 때에 그 반대하는 거기에 내가 감염되고  굴복되어서 속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끝까지 변동 없습니다.

 전하고 난 다음에 반대를 심히 할 때에는 어떨 때는 정면 충돌을 하지 아니하고  그때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고 함구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주장을  그대로 하면서 주님에게 눈 감으면 그 사람 오해할 상바르면 눈을 뜨고라도  '주님, 이 사람이 알지 못해서 이런 것이오니 이 사람을 깨닫도록 주께서  영감시켜 주시옵소서.' 그것을 내가 전하다가 또 주님에게 더 의뢰 의탁하고  계속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그것은 굽히지 안하고 계속해야 됩니다.

 그때 내가 그 진리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그 어떤 열변에나 권세에게도 복종을  하면 그것이 구주로 바꾸는 것이며 그것이 주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더불어 음행하는 종교적 범죄가 됩니다.

 또 우리가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물론 많은 마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속과 겉이 그만 거기에 대해서 내가 설복을 당하고 또 타협을  해서 그로 따라가는 그런 일은 하면 그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배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서로 충돌 없고 마찰 없고 사람들을 잃지  아니하도록 그저 그럴 때는 내 마음이 변하지 안하고. 내 사상이 변하지 안하고,  내 정신이, 목적이 변하지 아니하고 그 일에.

잠깐 좀 내가 정지하고 있는 그런 것은 정지하고 있으면서 '여기에는 내 육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육으로 하는 일은 효과적이 아니니 내 마음으로 해야 되겠고  내 마음으로만 해 가지고도 안 되겠고 영감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의탁해서 일을  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계속. 투쟁하는 그 전투를  버리거나 또 거기에 양보하고 피동이 되어서 감염이 되거나 감동이 되거나  이렇게 피동 되고 하면은 안 됩니다.

 그러나 영감과 진리는 곧 주님이신데 주님이 나타나시기를 영감으로 나타나시고  진리로 나타나는데 그 외의 것은 내게 거기에 거리끼지 안하면 물질 손해가는  것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무슨 권세나 이런것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권세를 쓰는대 나는 그 권세를 쓰지 안하고, 그 사람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데 나는 그 위치를 양보할 수 있고. 주님은 곧 영감과 진리와 하나인데  주님과 영감과 진리 이 셋 외에는 내게 대한 손해는 어떤 손해라도 우리는  그것은 양보도 할 수 있고, 또 줄 수 있고, 또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버림으로 지고 영감을 버림으로 져서는 안 됩니다. 외부에  우리가 증거해서 전파하려 하다가 안 되면 내 속에서 나만이 강해져 있습니다.

나만이 강해져 가지고 있으면서 일하는 방편을 돌려서 내 마음으로 강하게  일합니다. '주여, 이 일은 저 사람이 알지 못해서 하는 것이오니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서 이 일을 기어코라도 성취시켜서 저 사람을 구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그런 강한 전투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가 주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 향하고 속옷을 달라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그 어떤 그런  것은 양보해도 그게, 양보하는 그것이 손해 아니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또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모든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살아나고 바꾸어져서 더 성화 되는 것이지 그게 손해가는 것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만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 말합니다. 15절에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때에 그럴 때에 바울과 함께 한 사람이 없었고 모두 다. 그  세력에게, 그 언변에게, 그 간교에게, 그 간교에 다 넘어갔고, 그 언변에 다  넘어갔고. 그 세력에게 다 굴복 했고 바울과 함께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

그에게 정복을 당하고 다. 그의 편이 되고 나 하나뿐이었었다,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연약하고 인간이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옳은 것에 섰다가 옳은 것을 빼앗기고 버리고 삐뚤어진 데에 미혹받아 가지고  서는 그것은 인간의 약점인 것을 깨닫고 거기에 하나도 허물하지 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구출하려고 노력 한 것이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내 대적이며 또 옳은 데 서서 나아갈 때에 이 옳은 편에 서서  견디지를 못해서 약해서 넘어지는 그것을 적대시하지 말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 도와 주시기를 구하는 그것이 우리의 천국이요 우리에게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구원 하려든지 세상에 살려하면 이런 일을 많이  체험할 것입니다.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그러면 그때에 그 현황을  바울이 말합니다. 그렇게 대적할 때에 모든 사람이 다 거기에 설복되고 정복되고  크고 강한 세력 앞에 다 붙어서 그래 나갈 때에 그때에 바울만이 감염되지  안하고, 그로 인해서 자기가 약해지지 안하고, 그로 안해서 낙망하지 안하고,  의심하지 안하고 더 강하게 굳게 세운 것은 뭣 때문이냐? 주님이 그때 자기 곁에  서서 그렇게 한 것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어떤 것을 대하든지 보이는 것을 대할 때에 내 눈으로 보는 눈에  보이는 그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앞서야 합니다. 또 어떤 그 피조물이 내게  가깝게 멀게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대적해서 어떻게 큰 자로 섰을지라도 내 곁에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시는 그 주님과 그와 둘을 보는 눈이 있어야 되고 그것보다  주님이 더 크시고, 더 강하시고, 더 두려우시고, 더 권세 가지고 계시는 것을  보다. 그때가 보다가 필요합니다. 그때, 보다 주님을, 이럴 때에 주님은 거기에  일하실 수가 있고 우리에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보다. 그것을 크게 여긴다든지 주님과 그것을 동등으로 여길  때에는 벌써 그 사람의 사상이나 행위는 심판을 받아야 될 것들이기 때문에 벌써  불 앞에 얼음같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 앞에 얼음 당하면 얼음은  녹아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불의가 되어 있는 거기에 주님이  같이 하시면 그것을 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같이  하실 수가 없고 그때에 우리를 피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자기가 이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혹 패전하는 일이 있을 그때에 패전하고 난 다음에 뒤에  반성해서 회개하고 나서 '주님이여, 그때 왜 나 홀로 뒀습니까? 내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모르셨습니까? 내가 그런 시비 그런 신강을 할  때에 왜 주님이 내 곁에 서서 나를 돕지 안하시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는  그런 반문들을 한 사람들이 많고 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내가 고민하는데, 여러가지 자기 욕심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인간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모든 사건으로 싸울 때에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에서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과 공중에 악한 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그때에 참 주님이  이때 도와 주셨으면 하는 생각인데 그만 그때에 주님이 도우심이 없어서 자기  혼자 실컷 고민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난 다음에 주님에게 반문합니다. '주님이  어디 계셨습니까? 왜 그때 나를 돕지 안했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멀리 떠나 있지 안하고 네 곁에 있었으나 너를  대면할 수 없고 네게 손을 댈수 없어서, 네가 변질됐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소멸하는 불로밖에는 갈 수 없는고로 내가 그때 잠시 피했고 내 눈을 가루었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는 그런 문답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곁에 서셔서 강건하게 하심은' 그러기에 주님이 자기 곁에 서신 것을  언제든지 우리가 기억하고 눈으로 보이는 그것, 혹 인간이 연약해서 눈으로  보이는 그것이 먼저 보이기 쉽습니다. 인간이 그것이 약점입니다.

 먼저 보이나 즉시 내 영안으로. 내 마음의 그 심안으로 주님이 내 곁에 서신  것을. 먼저 보지는 못해도 다음으로 봐도 '주님이 내 곁에 서셨다' 주님이 내  곁에 서셨다 하는 것을 보고, 주님이 내 곁에 섰고 내 앞에는 천금 대호같은  맹수같은 세력이 내 앞에 당했고 내 앞에는 지금 사자굴에 당했고, 다리오 왕이  지금 그 인정을 가지고 조아대고 하는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에 이 다리오 왕의  어려움과 다리오 왕의 어인을 찍은 이 어인의 어려움과 사자구덩이의 어려움과  이런 것이 있는 동시에 주님이 자기 곁에 서서 계시는 것을 다니엘이 보았고  그때가 이제 보다 어느 것이냐입니다.

 '네 생명보다 나를 사랑치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을 내가 영접하느냐 버리느냐?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느냐 내가 다른 것을 믿고 의지 하고 바라보느냐 하는 그것이  그때에 결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모든 것보다 주님이 더 크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때 믿는 것이 참 주님을 믿는 것이요, 그때 대우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 주님을  바라보고 대우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이런 허물이 네게 있다. 이런 죄가 있기 때문에 죄의 주인 마귀가 너에게  달라드는 것 아니냐?' 어떤 것이 있어도 즉시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받을 수  있습니다. 즉시 고해서 사함 받을 수 있어 '주여 내가 이런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는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다 이미 흘리셔서  주님이 값을 내신 죄악입니다. 주님이여. 이것이 지금 왔습니다. 주님이여,  사유해 주옵소서' 하면 즉시 사함받고 그런데에 거리낌 없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것보다 주님을 크게 여겼을 때에 제 일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제  일계명을 지킬 때에 주님은 거기에서 일하실 수 있지마는 주님을 제이로  제삼으로 삼고 주님보다 큰 것이 자기 마음에 있고 상대하고 크게 인정을 하고  큰 것이 자기에게 있는 데는 그것은 멸망받을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멀리 떠나야  되지 가깝게 오면 멸망하는고로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내 곁에 서심을 자기가 발견하고 주님이 모든 것보다  크심을 인정할 때에 나는 강건해지고 주님은 내게 역사 해서 기적이 나타날 수가  있고 또 때가 다 됐으면 죽은 것이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이나, 기적이 나타나거나 하나님의 옮기실 때 까지 끝까지  믿는 자 되자 하는 그 기도의 제목은 내가 그 진리를 지키다가 그만 끝이 나서  완전히 주님의 진리와 영감의 내가 되어 가지고 내 전부가 진리와 영감의 내가  되어 가지고 진리와 영감 때문에 그 시간에 어떤 뭐 죽임을 당하든지 해서  없어져 버리면 그것으로써 그만 내 전부는 주님과 진리의 영감화된 것입니다.

 내가 진리가 됐고, 내가 진리가 됐다 말은 진리화되어서 진리로 감염됐으니까.

이 베조각을 검은 물 들였는데 검은 물을 빼버리고 붉은 물을 들이니까 아주  발가니 붉은 것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진리화되고 영감화되면 진리의  것이 되고 영감의 것이 되고 진리와 영감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진리 노릇을 하고 영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끝장을 보려고, 끝장. 다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려고 끝장을  보려고 가는데 끝장 보기 전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셔 가지고 그 일을  바꿔버린다 말이요. 그 일을 바꿔버려.

 다니엘은 끝장 나려고 사자구덩이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끝장이 나지 못하게 다니엘을 사자구덩이에서 살려내니까 아직까지 미결이 됐다  그말이오. 미결이 된 걸 말합니다. 미결된 그것을 가리켜서 기적이 나타나거나  옮기실 때까지 우리는 믿을 것을 기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 내가 눈에 보이는 그것만 보지 말고 선후의  순서는 혹 육안으로 보이는 것 그것을 먼저 보고 주님을 뒤에 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그게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주님과 동행하는 그 동행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세상 것이 와도 그  주님과 자기와 동행함이 가까와 둘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육안으로  보는 것을 주님을 내가 보는 것보다 다음으로 봐지지 순서가 먼저 안 되지마는  우리 연약한 사람들은 이 깨어 있지를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지를 못할 때가 많이  있는고로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먼저 보일 때 많이 있습니다.

 선후가 틀려서 먼저 보였으나 다음에 주님이 발견했을지라도 주님은 내 곁에  서심을 발견을 하고 주님은 그것보다 크시고, 그것보다 능력 많으시고 그것보다  주권하고 계시는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서 대우할 때에 그때에 주님은 내게 와서  일하실 수 있고 나와 동행하 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심을 자기가 발견하고  믿을 때에 제 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오.

 "내 앞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그 말은 내 앞에 다른 물건이나 사람이나  이제 나보다 큰 것을 네 앞에 두지 말라. 그리 큰 게 없는데 우리가 크다고  오인을 한다 말이오. 잘못 생각해 그런 것이니까, 그게 일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일계명을 지킬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강건해지고  담대해지고 평안해지고 또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반드시 평강과 생명의 성과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전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사자가 나를  삼키려고. 사자가 막바로 나를 삼키려고 물고 있고. 엉크리고 있고, 이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이 사자같이 나를 엉크리고. 물고 이렇게 있지마는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내가 발견하고 주님을 바로 알아서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에 그 사자의 입은 벌어지지 못하고 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요것을 기억합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다 말은 전체가 하나님 대적 제 중심입니다.

세상 권세는 전부 제 중심이요. 어떤 대인의 중심. 왕의 중심, 정권자의 중심,  전주의 중심 모두 다 제 중심으로 되어 있는 이 중심되는.-나는 하나님  중심이라-중심과 중심으로 더불어 싸우는 요 싸움이 우리 싸움입니다. 요 싸움을  양보치 안하고 내 곁에 서신 것과 주님이 보다 크심을 인정할 때에 당신은 와  가지고 마음놓고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나래 안에 품어 주실 수도 있고 우리를 동행해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를 하게 해 주실 수 있고, 그저 승리해 좋으면 승리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그 환경과 형편이 물러가게 하시고 이렇게 하시나  하나도 그것이 없어지지 안하고 흔적은 우리의 행동록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흔적은 행동록에 남아 있어서 그걸 가지고 이제 심판할 때에 그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각각 자기의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심판이 응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요 "있을지어다" 하는 요것은 우리가 있기를  그렇게 뭐 원한다고 무슨 축하하는 것 모양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 "있을지어다  아멘" 하는 것은 '있을지어다" 있으시는데 "아멘" 하는 것은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내가 되게 해 달라는 그말입니다. 믿는 내가 되게 해 달라는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 대적 아닌 것은 대적하지 말고 참 대적을 우리의 대적으로  대적과 대적을 구별해서 대적을 바로 발견하고 대적을 바로 알아서 대적에 대한  이 대적관, 대적 지식. 대적관이 우리에게 발라야 되겠고,  그 모든 대적 이런 저런 종류의 대적이 올 때에 주님이 내 곁에 서신 이 사실을  내가 발견하고 의지할 때에 내가 스스로 강건해지기도 하고, 또 그 모든 악한  자에게 나를 구출해 주시기도 하고, 사자의 이빨에서 나를 구원하시기도 하고,  또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구원에 들어가는 준비도 넉넉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 안에, 중생시켜서 우리 안에 계시는 동시에 모든 사건을  대할 때에는 주님이 내 곁에 서셨다. 그말은, 내 안에 물론 계시지마는 내 곁에  서셨다. 그 말은 내 옆에 이런 것 저런 것 상대하는 그 상대와 주님 상대 둘이  같이 나와의 상대돼. 그거와 나와 이 세상과 나와 상대되는 그 상대만 보지 말고  주님과 나와의 상대가 같이 되어 있는 이것을 보고 주님과 나와의 상대가 세상과  나와의 상대보다 더 중하고 크고 두렵고 강하고 무서움을 자기가 깨닫고 그때에  바른 평가를 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바른 평가가 아닌 제이로나  제삼으로 이떻게 하나님을 삼을 때에 그때는 하나님이 그만 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 등록은 이천사백구십칠 명이 등록을 하고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일학생이 육백. 중간반이 사백칠십일. 참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밤에 기도는  장년반은 삼백사십이 명이 와서 기도했고. 중간반이 팔십사 명이 와서 기도했고,  주일학교가 백사십삼 명 기도 해서 오백육십구 명이 기도했고, 장로님들은 어제  여기 와서 기도하신 분은 다섯 사람이 와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인의 간구함은 운동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리는 의인입니다. 우리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붙여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의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운동하는 힘이 많습니다.

 이러기에 앞으로 이제 가서 보면 지금도 눈을 떠서 보면 이 국방은 분명히  미군이 하는 것 아닙니다. 이 국방은 분명히 한국에 그 국군들이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 보기에는 그들이 하지마는 실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국방을 하고 해결을 짓는 것은 성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서  우리 교인이 다 합해 기도하면 이 기도만 해도 한국은 구출하고 남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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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골로새서 3장 4절/ 88082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3
1961 우리의 소망/ 요한복음 15장 7절-12절/ 880104월새 선지자 2015.12.13
1960 우리의 소망/ 에베소서 1장 15절-23절/ 841210월새 선지자 2015.12.13
1959 우리의 소망/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71209수새 선지자 2015.12.13
1958 우리의 소망-하나님의 아들/ 요한일서 3장 1절-7절/ 820706화새 선지자 2015.12.13
1957 우리의 신앙 목표/ 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871101주후 선지자 2015.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