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19:48
우리의 생명과 양식
1989. 1. 21. 토새
본문: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비유라는 것은 그 실상만은 정확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과 비슷한 것이 비유인데, 그런고로 무슨 비유를 말씀하셨든지 그 비유로 인용한 그것은 실상에다가 비하면 아주 성근 것이요, 실상은 그 비유 보다 더 강하고 정확한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겨자씨 비유에 어떠한 이치의 내용이 담겨 있으면 그것보다 그 실상인 우리의 구원은 더 정확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겨자씨 한 알 갖다 심은 것 같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시고 또 밭은 이 세상을 가리린 것입니다.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주인은 곧 주님이십니다. 이래서 세상은 그분이 만드셨고 그분의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이 대속하셔 가지고 대속하신 그 사람을 영원한 생명을 줘 가지고 세상에 머물게 합니다.
그러면 여게 겨자씨로 말한 것은 아주, 왜 하필 겨자씨도 생명이 있고 다른 것도 생명이 있는데도 겨자씨를 말했느냐 하면 겨자씨로 말한 것은 그 아주 외모적인 가치가 아무 가치 없는 그런 극히 아주 유약하고 빈약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겨자씨를 하필 인용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무리 인간 중에, 씨 중에 작은 씨와 같이 인간 중에 아주 못나고 무능하고 뭐 실력이나 외형이 다 보잘 것 없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겨자씨는 작으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큰 땅 속에, 밭에, 이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두시나, 세상에 처세하도록 해 두시나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밭이 보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밭에 들어오면 그만 썩혀서 밭화시켜 버립니다. 세상에 날마다 새로 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 많은 것들이, 나는 것마다 결국은 세상화되어서 세상만 더 짙어지고 커지지, 그런 것들이 세상을 이용하거나 세상을 자기 양식으로 삼아서 먹은 자는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없습니다. 다 세상의 것이 되고 말지 세상을 이긴 자는 없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성 구속하신 자를 중생시켜서 산 자를 만들어 가지고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산 자를 만드는 그 산 자 만든 것은 영은 법과 실상으로 다 만드셨고, 산 자를 만드셨고 살리셨고, 이 심신이라는 육은, 주격인 영은 완전히 산 자를 만드셨지마는 이 심신이라는 육 이것은 산 자의 것이 돼 가지고 있고, 법적으로 또 사죄받았기 때문에 산 자의 것만 돼 가지고 있지 이것이 완전히 산 자는 안 돼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영은 완전 생명을 가졌고 심신으로 된 이 육은 산 자의 것이 되었으며 또 대속을 법적으로 입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산 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산 자로 살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완전이 아니기 때문에 산 자로 살 수도 있고 죽은 자로 살 수도 있고 이런 난제를 안고 세상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겨자씨가 이것이 세상에 심기우지 않으면, 밭에 심기우지 않으면 이 겨자씨는 속에 있는 생명이 작용할 수가 없고 이 생명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비로소 밭에 심기워져야 자라는데, 그 밭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오면 썩혀서 흙을 만드는 것이 저희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그 모든 지질입니다. 그런 데다가 갖다 심었는데 생명이 없으면 다 세상화되는데 이 세상화되지 않고 세상을 잡아먹을 만한 그런, 세상을 능가하는 그런 생명이 이 겨자씨 속에는 든 거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는 이 생명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첫째 예수님의 대속이기 때문에, 사죄 칭의 화친 이 대속을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정죄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을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고 또 하나님을 향하는 영생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중생된 것은 우리가 안 후가 아니고 우리 주관으로 느낄 수 없게 하나님께서 순전히 객관 역사로 우리의 영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와 하나님을 향하는 이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려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난 이 생명이 네 가지로 살아났는데 이 네 가지 생명은, 세 가지라고 해도 되고, 성경에 요한복음 3장에는 보면 또 두 가지를 말했어. 다른데 또 말하면 예수님의 피를 말씀했고, 또 영생하는 자로 우리를 살렸다고 또 요한복음 6장에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첫쌔 아담에게 속한 영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내 한 사람은 이것은 다 생명이 끊쳐진 하나의 이 세상에 있는 세상의 요소들과 다름이 없는 그런 존재들로서 되어졌었습니다. 그것이 타락이요 정죄받아 사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육은 다 죽은 것들인데 이 죽은 것들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날 수 있는 모든 근거, 그 자본을 마련하셨고, 자본 마련한 이 예수님의 대속 위에다가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보증으로 이렇게 정하신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 구원을 대속 구원을 보증을 하고 책임을 지고 나섰고, 그러면 이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 가지고 우리를 살려서, 이래서 우리는 네 가지 생명으로 살아난 우리들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다른 성경에서 봐서 아는데, 여게 비유한 것은, 그런 말은 없지마는 이 비유는, 곧 비유에 있는 그 생명은 이 네 가지로 살아난 것을 비유해서 말씀했고, 또 살아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켜서 밭으로 비유했고, 또 씨 중에 작은 겨자씨로 이렇게 표현한 것은 우리라는 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이 택해서 구속해 가지고 살려낸 것을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외형의 가치는 극히 빈약한 것이지마는 그것은 자라 가지고, 아주 채소들도 그 종자가 굵닥굵닥한 채소 있습니다. 시금치 종자는 보면 커서 뭐 녹두보다 큽니다. 그만치 큰 종자도 있는데 이거는 보잘 것 없는 종자라. 그러나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기독자들은 세상의 존재 가운데, 인류 가운데에 미약한 자라도 생명이 있어. 아주 그 껍데기 종자가 굵고 실한 것도 있고 겨자씨 종자는 아주 빈약합니다. 그것은 뭐 꺼풀 그거 내가 자세히, 눈이 어두워 못 봤지마는 그때 내가 좀 돋보기로 세밀히 볼 것인데, 그거 아마 내 생각에는 그 껍데기가 한 세 개나 이래, 삼각으로 이래 붙어 가지고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아주 볼 수 없는 거, 저는 못골씨, 골자리 씨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을 보고 했는데 겨자씨가 작다 하기 때문에 겨자씨를 내가 그래 보지 않았으나 아마 못골씨와 같겠다 그렇게 생각 했는데 과연 그 뒤에 보니까 골씨와 같았었습니다. 이것은 껍데기가 아주 작은 것이로되 그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 그것이 썩지 않고 흙이 되지 않고 발이 되지 않고 그것이 발을 먹고 자랍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사람의 가치는 외모의 무슨 뭐 대정치가가 됐다, 재벌가가 됐다, 대학자가 됐다, 예술가가 문학가가 됐다 하는 이런 외모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자의 가치는 속에 이 네 가지로서 네 가지 생명으로 살아난 데에 가치가 있다 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가치가 있는데 이 살아난 이 네 가지로 살아난 네 가지는 전부 세상을 능가할 만한 그런 실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면 모든 피조물을 다 능가할 수 있는 진리요, 영감도 그러하고, 예수님의 대속은 다 완성을 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죄에, 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성을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감과 진리가 노력해 가지고 완성된 것이 예수님의 피의 공로입니다.
이래서, 이들은 다 세상을 능히 잡아 먹을 수 있고 양식으로 먹고 세상을 이용해서 자랄 수 있는, 세상을 이기고 이용하는 세상을, 기독자는 그러기 때문에 염세주의로 세상을 피해서 은둔 생활 하는 그런 염세주의가 아니고 세상을 이기는 극세자요, 세상을 이기는 극세자요 또 세상을 이용하는 그 실력을 가진 것이 기독자의 가치입니다.
이래서, 항상 우리 기독자들은 세상을 이길 능력인 그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고, 영감으로 살아났고, 완전 완성을 이루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살아났고, 또 하나님을 향하는 이 소망으로 살아난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 지극히 큰 생명으로 살아난 자신이라는 것을 이것을 항상 깨닫고 잃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난 요것을 잊어버리면, 잊어버리면 세상에 대해서 패전도 하고 세상에게 이용도 당하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게 이용당할 자가 아닙니다. 어데까지나 세상을 이용할 자이지 세상에 이용당할 자가 아니오. 또 세상을 아주 멋있는 양식으로 먹을 자이지 세상에게 삼킬 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영원토록 있을 양식을 위해서 일해라' 그러면 영원토록 있을 양식은 뭘 가리키는 건가? 그것은 곧 내 피와 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우리의 양식이 된다 말이오. 양식이 된다 말은 누구 양식이 되는가? 중생된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중생된 생명은 이걸 먹고 자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은 이거 먹고 자라는레 '이 양식은 인자가 줄 양식이라' 그말은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그분이 이 양식 주기 위해서 오셨다 그말입니다.
이 양식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이 포도주와 떡을 먹을 때마다 내 피와 살을 기념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피와 살을 먹는 것은 주님의 이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대속을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이 어떻게 죄에 대해서 하셨으며 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입법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과 이 화친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신 그것을 내가 되풀이 해 가지고 그때 주님이 하신 것을 나는 그 모양과 그 형태와 그 성질을 내가 오늘에 나로서 행할 수 있게 행하는 그것이 곧 기념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인자가 너에게 줄 양식이라' 그랬는데, 그 다음에 또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이럴 때에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뭐 세밀하게 다 그렇게 기록하려면 세상에 될도 다 모자랄 것이기 때문에 절정만, 그저 봉우리만, 일본말로 하면 야마가끼라 하는 것 모양으로 거튼거튼 봉우리만 이렇게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면 봉우리, 높은 봉우리에서 높은 봉우리로 건너뛰는데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영감받아서 양심을 쓰면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이 성경인데 그 성경 육십육 권 속에는 하나님의 은밀 의지인 영감 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족히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거게다가 양식은 주님의 피와 살이 양식이라, 기념하는 것이 양식이라 그래 놓고 믿음이 양식이라 이렇게 그 다음에 덧붙여서 해 놨는대,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 하는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 지킬 믿음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냈기 때문에 아버지가 다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화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거한 것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곧 믿음이 양식이라 하는 그런 것을 종합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랬는데 우리가 여게서 알 것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났는데, 생명으로 살아났으니 우리가 살아난 생명은, 이 생명은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다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이 뭐인지? 생명이라 말은 힘을 종합한 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생명이라 하는 건 다른 말로 말하면 힘입니다.
그래서 힘은 다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사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만 힘 없습니다. 악어는 입에서 불이 나오고 쇠도 먹으면 녹는 그렇게 아주 강한 모든 기관의 힘을 가진 것이 악어지마는 생명 떠나면 그것은 뭐 개미가 와서 뜯어먹어도 가만히 뜯어먹히지 그만 썩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힘의 근원입니다.
이러기에 우리의 생명은 뭐이 생명인가? 진리, 영감, 예수님의 피,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양식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은 뭐이 힘인가? 우리의 힘은 진리가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 목회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뭐 세상의 이런 과학이나 무슨 문학이나 또 이런 무슨 뭐 경제나 권세나 모두 다 그거는 다 썩은 것들이오. 썩은 것들, 그거 힘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썩은 자의 힘이오. 썩은 자의 힘이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 하면 정권이 힘인 줄 알지마는 그 정권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 썩히는 힘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으로 썩고, 어떤 사람은 재벌로 썩고, 어떤 사람은 과학으로 썩고, 어떤 사람은 문학으로 썩는 것이니까 그거는 썩는 힘이지, 썩는 힘이지 산 힘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힘과 힘을 그전에 내가 구별하라고 많이 말을 했었는데, 우리의 힘은 어떤 것이 힘이냐? 우리의 힘은 진리가 우리 힘이오. 영감이 우리 힘이오.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이 우리의 힘이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우리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의 투구를 쓰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이 모든 말씀들이 거튼거튼 마치 말하면, 우리 한국으로 말하면 뭐 지리산 봉우리 하나 말했고 또 태백산 봉우리 하나 말했고 또 저 백두산 봉우리 하나 말했고, 그러면 크게 말하면 한국에는 백두산 만당 그 하나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밑에 수많은 것이 붙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 말씀은 모든 절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구비한 것은 자기가 양심을 쓰고 영감을 받고 또 순종해서 실행하면 한 순종으로 두 순종을 알게 되고 자꾸 알아서, 이래서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만이 힘이라고 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새사람이오.
며칠 전에는 새사람과 옛사람을 우리가 구별해야 되지 그걸 모르면 안 된다는 것으로서 그래 새사람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걸 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암만 말해도 못 알아듣고, 책에 기록한 설교록이 나가지마는 또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어데 와 가지고 일 년 전에는 그 설교록을 보니까 뭐이 이런 책이 있는가 하고 아주 멸시를 했는데 일 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보니까 조금 뭐이 눈이 떨어져서 눈이 떨어지고 보니까 보배로워서 다시 내가 그 책을 사러 왔다고 그렇게 한다 말 들었습니다. 이 설교록이 뭐 나는 문학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맛이 없습니다. 또 수사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그렇게 뭐 정확하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서 오늘에 나타내시는 진리는 거게 담겨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차차 보면 모든 사람이 깨달아질 것이고 차차 차차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이 생명으로 살아났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다른 것을 자기 생명으로 여기지 말고 자기 힘은 진리가 자기 힘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진리로 자기 힘을 삼아 가지고 이렇게 강하게 하려 할 때에는 그 힘이 속에서 자랍니다. 진리가 우리 힘이오. 내가 진리를 만일 버리면 나는 죽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 힘이오. 성신의 감화가 우리 힘이오.
그 힘을 가지고, 내가 어떤 사건을 처리하든지 또 어떤 대중에 대해서 설교를 하든지 할 때에 여게서 진리의 힘으로 하려 하고, 영감의 힘으로 하려 하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능력으로 하려 하고, 하나님의 소망의 힘으로 하려 할 때 이 힘을 내가 힘으로 알고 이 힘을 내가, 내게 있으니까. 이 힘을 힘으로 알아서 이 힘을 등용할 때에는 이 힘이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힘으로 삼지 않고 이거는 멸시해 버리고 딴걸 자꾸 힘으로 삼아 이러니까 되는 것 같으나 안 된다 그 말이오. 되는 것 같으나 나중에 가 수지 계산을 다 맞춰 보면 내나 썩은 것 만들었고 썩은 것 했지.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지식이 둘이 있는데 산 지식과 죽은 지식이 있다 죽은 지식은 죽이는 것뿐이지 살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죽은 지식을 산 지식이 먹으면 산 지식의 양식은 되고 밥은 될 수가 있다. 이렇게 산 지식이 죽은 지식을 이용을 하고 이것을 종으로 잡아 부리게 되면 이거는 아주 산 지식이 잘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네 가지가 우리 생명인데 이 생명은 무엇을 먹고 사는고 하니 죽은 것을 먹고 삽니다. 죽은 걸 먹고 살다니? 죽은 것이 뭐인데? 이 세상을 먹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가 흙에 심기우지 않으면 그대로 말라서 그만 있다가 나중에는 좀먹고 말아 버리지 효력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생명이 작용해 가지고 성장할 수 있지 세상을 떠나서는 아무 작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중생된 우리의 생명이 먹고 자랄 수 있는 고런 양식이기 때문에 마치 건강한 자는 식물을 원하고 식물이 없으면 찾아 돌아다니고, 병든 자는 식물을 억지로 먹여도 먹지 않고 그런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생명이 자꾸 생명을 먹어서 기른 사람들은 이 생명이 이 세상을 자기가 원해서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거 자꾸 닥치는 그런 것을 원하고 세상과 마찰되는 것을 원합니다. 마찰되면 거게서 수입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리라 하는 그것은 세상하고 마찰하는 것입니다. 그런 큰 마찰이지마는 아브라함은 아주 별미 먹는 거와 같이 좋아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좋아서 장작을 패서 이래 가지고 아주 속사람의 그 믿음은, 믿음은 침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지금 그래 가지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잡아 묶어 놓고 칼로 이래 들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중단을 시키고 거게서 큰 양식을 얻었습니다. 그 전의 이삭과 그 후 이삭은 아주 딴 이삭이었고 또 아브라함도 아주 딴 사람이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 닥치면 건강한 사람, 차차 차차 신앙으로 자라서 새생명이 장성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닥칠 때 같은 일을 닥쳤는데 그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아주, 아주 빈약한 것은 그걸 먹으라 하면 안 먹고 자꾸 내 뱉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꼭 병든 아이를, 약한 아이를 먹여서 기를 때와 꼭 같습니다.
6·25때도 저게 개평에 가 가지고 주남선 목사님하고 O장로님하고 O조사님하고 세 분이 가 가지고 거기 가서 목사님은 설교하고 자기네들은 앉아 듣는데도 그만 듣고 나니까 잡아 가지고 내무서로 잡아 가지고 가니까 다른 사람들은 저거는 죽을 지경이라서 뭐 못 견디는데 안에 들어가서 감방에 갇혀 가지고 있는데 갇힌 지 십 분도 안 돼서 주 목사님은 코를 드렁드렁거리면서 자고 있더라고. 그거 벌써 그것이 다 같은 입장을 당했지마는 그분은 벌써 양식으로 먹고 있어, 지금, 양식으로 먹고 있어. 거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으로 만족하고 또 행할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으로써 즐거워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개평교회 있는 노 집사라는 집사님이, 저도 그 집회를 가 가지고 잘 압니다. 또 그들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를 잘 기억하고 있어서 압니다.
이랬는데 아주 인민군 있을 때에, 그때 없는 때인데 인민군들은 배가 고파서 지금 뭐 이런 막 풀잎파리는 다 뜯어먹고 이래 가지고 내려오는 판인데, 갈치를 넙덕한 이런 대갈치를 구워 가지고 그래 점심을 해서 이고 오니까, 그거 또 그분도 믿음이기 때문에 좋다 말이오.
이거 잡혀 갔으니까, 그거 내나 그 교회서 설교하고 잡혀 갔으니까 벌벌 떨어 숨을 터인데, 이제 또 이걸 떡 만들어 가지고 요리를 만들어 갔다 말이오. 가니까 오더니만 '그게 뭐이냐?' '우리 목사님 여기 계셔서 목사님 진지 해 가지고 왔다' 하니까 욕을 하면서 보니까, 턱 열어 보니까 거기 뭐 이런 갈치가 있거든.
이놈들은 이렇게 주고 우리는 안 주고 이런다고 뭐뭐 야단을 치더합니다. 그거는 우리 목사님 대접하니까 목사님 자시지 자기네는 먹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했대요. 그 노 집사가 그때 그후에 여기 며칠 전에 한번 왔어요. 지금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는데. 이래 다 같은 입장이라도 양식을 오면 이거 건강할 때는, 건강할 때는 비리비리한 이걸 고기를 구워 가지고 뭐 비린내가 나고 누른, 쇠고기 누른, 누른내가 나고 이래 오니까 모가지 침이 꿀떡꿀떡 넘어 가지마는 약할 때는 그 내음도 맡기 싫어서 '아이구, 내음새 맡기 싫다. 내보내라고' 자꾸 이래 한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꾸 양식을 먹어서 새사람이 장성하게 되면 다 같은 일도 좋지마는 무슨 변하는 이상스러운 그런 현실이 닥치면 참 새사람은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면서 '이제 이로서 참 재미있겠다' 입맛을 쭉 다신다 말이오.
홍해 바다를 당했을 때에 그때 다른 사람들은 죽겠다고 야단치는데 모세니 여호수아니 갈렙이니 이 사람들은 침을 넘어 삼키면서 춤을 추면서 '이제 좀 있어 봐라. 이제 하나님의 능하신 솜씨를 한번 구경하겠다.' 이래 쌓아며 좋아했다 말이오.
우리는 여게서 우리의 이 중생된 새생명은 이 세상에서만 우리가 자랄 수 있지 세상을 떠나서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월을 허송하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어제 어떤 OO신문을 봤는데 그거는 OOO장로님측에서 나오는 신문인데 그 신문에 보니까, '세월을 아끼라' 하는 데 대해서 아주 그 신문에 나왔는데 사람의 기분이 쭉 당길 만치 그 세월에 대해서도 해석하고 아주 잘해 놨습디다, 그래 놓으니까 교인들 들으면 그만 속이 시원하게 그 모두 문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이래 놓으니까 재미가 있어.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은 잊어버렸어.
거게 보면 뭐 세월에 대해서 별별 묘한 말을 많이 해 놨기는 해 놨는데도 그 가운데는 거게 생명은 뭐이냐? 때가 악하니라 하는 데 거게 생명이 있는 거라.
'때가 악하니라' 뭐 때가 악하니까, 세상은 다 전체가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세상이니까 네가 거게 자기 위주가 되면 그만 세상에 삼켜지고 말기 때문에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인간 중심인데 거게서 창조주 중심 위주로서 살아야 거기 생명이 있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 이거 우리 측에 있는 교역자들, 이 세상에, 세상은 그런 것을 가치로 아는 것은 여게는 하나도 가치로 알지 않고 하나님이 가치로 아는 것만 여게서는 가치로 알아서 이래 하니까, 이걸 자꾸 아니 가치로 알지도 못하고 이러는데, 이러니까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것만 가치로 하다 보니까 이거 배워 가지고 설교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습니다.
OOO목사님이 저게 빌라델비아 가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말을 들으니까 아직까지 교회는 지금, 개척교회는 세우지를 못하고 그런 경영을 하고 있는데 목사로 계시다 왔다 하니까 대외적으로 그래도 가끔 설교를 시켜야 되기 때문에 한번씩 청한답니다. 이 모임에 청하고 저 모임에서 청하고 청할 때마다 가서 설교를 하면 모든 사람이 깜짝깜짝 놀래, 인제. 여게 설교한 것을 설교하니까 그 사람들이 뭐 놀래고 야단이라.
이제 더 못 들은 사람들은 이렇지마는 장 듣는 사람들은 그래요. 여기서 있는 사람들이 '하, 내가 이 진영에서 지금 이만치 위대하니까 다른 진영에 가면 굉장하겠다' 이러지마는 딴 진영에 가면 가치 없어. 왜? 딴 진영에 가면 거게서는 문학적 가치 또 과학적 가치 모든, 사회적인 가치 또 이런 역사적인 가치 모든 그런 또 과학적인 가치 그런 것을 뭐 다 구비하고 있어요. 그런 것이 다 구비해서 다 원만한 사람들이오, 다.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게는 가면 그 무기는 하나도 없다 말이오. 무기라 하는 게 복음 무기 하나뿐이라. 복음 무기 하나뿐인데 그 사람들 가진 것은 무기 하나도 가지지 못했어. 못 가지고 거게서는 통통 무식군이 되고 거게 대해는 말도 못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무식꾼이 돼 버리고 만다 말이오.
무식꾼이 되고 마는데, 이거는 말해 줘야 또 잘 안 듣는다 그거요. 알아야지? 그걸 잘 모르니까. '이거 뭐 별스러운 소리 한다'.
이런데 그것을 지금 가르치고 가르쳐 가지고 우리 진영에서는 요 꼭 하늘의 지식 요것만 말해야 가치 있게 생각하지마는 딴데 가서는 말할 때에 하늘의 지식을 말하면 듣기도 싫어합니다. 이 세상 지식을 말해야 되지. 이러니까 저거가 이 무대 밖에서 나가 봤자 나가면 천물되지 별것 없소. 그거 그렇게 권위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저거들 하는 것을 배운 사람, 우리 O목사님 같은 이는 그 사람들 하는 것도 많이 배웠기 때문에 거기 가면 아마 쓰여질 거라.
그러니까 OO교파에 자꾸 오라 하지. 이래도 억기 있는 사람들 이 진리만 배운 사람들은 촐촐 추리고 가짜 다 치워 버리고 진짜만 이래 놨기 때문에 이것만 했으면 이것만 아는 자리에서 해야 효력이 나고 권위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 딴데 가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가면 '뭐 저거 저런 소리나 하는가?' 문학적으로 뭘 말할 수가 있소, 과학적으로 말할 수가 있소, 그러면 역사를 아요, 무슨 문학을 아요, 또 과학을 아요? 이 세상 지식은, 세상 지식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식하니까 거기 가 놓으면 아주 무식쟁이 아주 바보가 될 것인데 지금 여기서 세월 있으니까 거기 가도 세월 있는 줄 알아, 그래서 이거 진리를 가르치는 건데, 이 겨자씨는, 겨자씨는 흙에 묻히지 않으면 이거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만 자라지 하늘나라에서 자라는 것은 그것은 약간에 보면 표는 있지마는 그걸 확실히 모르겠어. 어쨌든지 세상에서 자라야 돼요. 세상에서.
세상에서 자라야 되는데 언제 OOO목사님이 한번 와 가지고 '하늘나라 가서도 우리가 자랍니까' 이래서 내가 자란다고 말은 했어. 자랍니다. 자라지만 세상같이는 자라지 못합니다.' '하늘나라 가서 자라면 하늘나라 가 자라는 그 성구가 뭐 어데 있습니까?' 그래 내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가리키면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곧 그 성구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소망은 그것을 바라보는 걸 말하고, 믿음은 실상으로 이루는 것을 말해서 그것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서도 거기서 성장이 있는 것으로 증명은 되기는 되지마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라야 됩니다.' 이 겨자씨 비유에는 보면 이거는 뭐이냐? 흙을 먹어야 자라게 돼. 흙을 먹어야 자라요. 흙을 먹어야 자라는데, 그러면 흙을 먹어야 자라는 것은 흙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어제는 네 가지를 말했지마는 네 가지 외에도 요소들이 많다 말이오. 우리가 모르는 요소가 많이 있어. 요소가 많은데, 사람도 편식하면 병든다고 하지 않아요? 여러가지 잡식을 해서, 요새는 모두 보니까 음식을 먹는데 제일 가지수 많이 먹는 것이 제일 좋다 이제 그것이 통계로 나오는 모양이라.
뭐이 좋다 하는 뭐 그것도 좋지만 이것도 좋다. 여러가지를 많이, 수를 많이 먹어야 된다 그런 말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 내가 한번 퍼뜩 만났는데 그 사람만 만나고 다른 사람은 내가 못 만나 봤어요. 그 사람은 또 말하는데 가만히 내가 들어보니까 '자기와 먼 것을 먹어야 된다. 자기와 가까운 것을 먹지 말고 먼 것을 먹어야 된다.' 이러니까, 자기와 가까운것은 자꾸 먹기 때문에 그거 편식이라 그말이오. 고기도 자기 근해에 있는 고기보다 고기도 자기로서는 평생 구경도 못하고 말도 못 들은 저 원해에 있는,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그런 거,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걸 먹는 것이 자기에게 효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편식하지 말라는 그말이야.
그래서 '지혜가 있다' 그래 '네가 그러면 약을 지으면, 약을 지으면, 이 약을 지으면 아주 이거 뭐 굉장히 건강한 것인데 그 약을 어떤 걸 짓노' 이러니까 그걸 대개 말해요. 말하는데 나는 지혜를 얻었어요. 얻어서 '그 약을 그러면 한번 연구해 보고 내가 주문하겠다' 그러고 내가 주문은 안 했어요. 주문 안 했는데, 그 사람은 바다 저 몇 길 밑에 있는 거, 또 여게서 몇천 리 지금 몇만 리 가서 저 태평양 저 깊은 바다 어데 있는 거 자꾸 그런 걸 말해요. 또 산에서도 저 태백산 뭐 백두산 봉우리 상봉에 있는 뭐 이런 거 먼데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그게 다시 한 말로 말하면, 저는 자꾸 소개했는데 나는 '어, 네가 편식하면 안 되고 골고루 먹으면 된다는 그걸 말하고 있구나' 그래 그걸 내가 느껴졌어요.
느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주와 영계를 다 책임을 지워서 하나님 대리의 이거 위인을, 위대자를 만들 터인데 이거 영양 잘 못 먹이면 안 돼요. 그렇지 않아요? 그거 저 로얄제리라 하는 거 왕봉꿀인데, 왕봉 양식인데 그거 효력이 있어요. 그 먹어 보니까 힘이 나와요. 효력이 있어. 나도 이러다가 되게 아플 때는 그놈을 먹습니다. 많이 먹으면 그만 좀 회복이 잘 돼요. 이랬는데 그 종자는 꼭 동봉 종자라, 꼭 같은 동봉 종자를 갖다 놓고 사료를 달리 먹이니까 딴게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제 우리 중생은 꼭 같은 중생이지마는 이 중생한 것을 먹이기를 잘 먹이면 그것이 위대해지고 먹이기를 잘 못 먹이면 위대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런데 우리를,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식시키면 안 되니까, 골고루 먹여야 되니까 우리에게는 '아이구, 이 일은 어쩐 일인가?' 이해 못 할 그 현실을 턱턱 닥치게 자꾸 한다 말이오. 이해 못 할 일을 닥치는 것은 늘 먹던 거는 입에 익어서 좋지마는 안 먹는 거는 엉거쩝쩝하게 안됐다 그말이오.
그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항상 당하는 현실은 좋지마는 못 당하는, 새로 당하는 그런 현실은 싫어한다 말이오. 그거 우리가 이성 비판에서, 이성 비판에서 우리가 그걸 먹어야 되겠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데서 먹어야 돼. 믿음으로 먹어야 돼. '이거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제일 사랑하시는 전지 전능의 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것은 편식을 시키지 않고 골고루 먹이려고 나에게 이런 저런 모든 현실들을 주는 것이니까 이제 이거는 내가 맛이 없어도 먹어야 되겠다.' 하고 그걸 잡아먹어야 된다 말이오.
그거 이런 현실 저런 현실 골고루 주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모든 것이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로 우리를 육성시키기 위해 가지고 그와같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모든 현실을 받아 가지고 먹어야 되겠다 말이오.
그런데, 그러면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우리 양식인데 그 양식을 먹는 방편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양식을 먹는 방편. 이런 현실을 만나고 저런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 현실을 우리가 양식으로 먹어야 되는데 그 현실을 먹는 방편을 무엇이라고 이제 우리에게 가르쳐 줬습니까? 양식을 먹는 방편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OOO목사님? 믿음. 믿음 하면, 예? 그거야. 그거라 그게 먹는 방편이라. 그게 양식이라. 그게 먹는, 그게 먹으면 양식이 돼. 그러면 양식이 돼요. 어떤 현실을 당했든지 그 현실을 당했을 때 그 현실에서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면 그게 내 양식이 돼서 고량진미가 돼 가지고 내가 살고 자라게 돼요.
이래서, 어데서든지 우리에게 이런 저런 모든 그런 현실들을 주는 것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영양소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우리에게 안 먹으면 안 될 식량으로 우리의 중생된 새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양식을 먹어야 돼요.
이러니까 우리 모든 현실이 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요렇고 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러니까 현실마다 하나님의 뜻이 달라. 다 다르니 그 현실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래 딱딱 하면 뒤에 힘이 난다 그알이오. 그러니까 요렇게 한 사람마다 다 행하고 난 다음에는 '기쁘고 즐겁다' 해 가지고 춤추지 않는 사람이 없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도는 전부 다 울면서 먹고 나중에 웃으면서 나오기 때문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십자가의 도,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라, 섭자가의 도는 죽음으로 시작했는데 부활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요, 시작에는 고통스럽고 안 됐고 뒤에 결과적으로는 좋은 걸 가리켜서 십자가의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생활은 처음에는 좋고 뒤에가 망합니다. 처음에는 좋고 뒤에가 안 됐어.
이러니까 웃으면서 시작해 가지고 나중에 울음으로, 이러니까 뭐 시집 장가 가라 하면 얼마나 좋소? 벙긋벙긋 웃지마는 그것은 나중에, 보는 사람은 '너는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만치 나중에 울겠구나' 좋아하는 것만치 나중에 운다 그말이오. 또 이제 그 사람이 막 신이 나 가지고 막 펄펄 이래 쌓아면 '저게 저 펄펄거리는 것만침 나중에 기진해지겠구나' 반드시 기진해져. 그래 공동묘지 쭉 가면 아따 이거는 참 웃음뭉텅이인데 웃음뭉텅이가 변해서 눈물뭉텅이로, 한숨뭉텅이로, 탄식뭉텅이로 다 화해지고 말아. 그런 것이 자연 계시라.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도 참고로 삼아 가지고 하고, 우리는 어쨌든지 하나님의 뜻 이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 뜻인데 하나님의 뜻은 몇 가지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몇 가지요? 두 가지요, 두 가지.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기 때문에 어떨 때는 자연 계시도 행하고, 하나님의 뜻, 자연 계시로 우리에게 준 그 뜻도 행하고 특별 계시로 준 뜻도 행해야 되지 어떤 사람은 배고플 때는 밥먹는 게 이게 자연 계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인데, 자연 명령에 순종하는 일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인데 순종하지 않고 뭐 기도해 가지고 뭐이 되려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자연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우리의 생명은 어떤 게 우리의 생명이라, 우리가 살아난 이 새생명의 생명은 세상을 양식으로 먹고 사는 생명이라. 어떤, 어제도 내가 나가서 어떤 분 만났는데 그거 참 난처한 일을 만났어요. 아주 어려운 일 만났어.
어려운 일 만났는데 뭐 얼떨떨할 만치 참 어려운 일 만났어. 그래도 그게 뭐이냐? 그것도 양식입니다. 그것도 양식이라.
'이렇게 세상에 어려운 일 어데 있느냐?' 어려운 일 그것도 양식이라. 거게서 양식이 뭐이냐? 그 양식이 그 현실을 내가, 그 현실을 나에게 행복되게, 그 현실을 기쁨의 원인이 되게, 행복의 원인이 되게, 그게 모든 좋은 것의 원인이 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에게, 택한 자면 주신 것이니까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데에는 그 만드는 방법은 뭐이냐? 저 말해 봐. OO, 말해 봐. 만드는 그 양식을 먹는 방법은 뭐이지? 뭐라 하노? 크게 말해 봐. 말해봐. 양식을 먹는 방법.
그 뒤에, 의사? 요거라. 먹는 거는 그래야 꼭꼭 씹어 먹어 버려. 그거 양식인데 거게서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는 그것이 먹는 양식이라. 그러면 그 어떤 불행이 크면 클수록 이것은 영양이 많이 들었어.
그런고로 어쨌든지 우리는 요 현실을 보배로 알아서 그 현실을 그것을 우리는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그거 없으면 내가 자라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그것은 더 내 지식을 탁월한 영양 있는 양식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고 실행 실천해서 거게서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을 얻어 가지고 그래 학생들을 가르쳐요.
그런데 자기가 맡은 학생 그거는 곧 믿음의 자녀요 참자녀인데 그 자녀는 어데다가 길러야 됩니까? 그 마음 속에다 품어 가지고 길러야 돼요. 육신의 자녀는 열 달 동안 자기 어머니 뱃속에 기르면 되지만, 뱃속에서만 안 내놓으면 자라지마는 이것은 우리 심령 속에다 품어 가지고 자라야 되지 딴데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라도, 길러도 혼자 기르려 하면 안 되고 아버지하고 둘이 기르면 기르기가 쉬운데 우리가 아버지하고 둘이 기르는 것은 누구하고 둘이 기르는 것이오? 주님하고 둘이, 주님은 아버지라. 나 혼자는 못 낳아요. 나 혼자는 못 낳고 주님하고 둘이 돼야 믿음의 자녀들을 낳아요. 그런고로 어쨌든지 우리가 마음 속에다가 품어 가지고 길러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언제든지 잃지 마십시오. 어느 때라도 자기 미래를 위해서 삼십 분 기도 계속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