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0:36
여호와로 피난처
1981. 10. 9. 금요일 저녁
본문: 시편 91 : 7 - 11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우리는 무식하면 안됩니다. 모르면 안됩니다. 또 잘못알면 더 큰 화가 됩니다.
지금은 주님에 재림하실때도 가까왔고 또 역사에 마지막에 어려운 때가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복음운동이 매우 힘이 있게 전가 전개돼 나가는 것같이 보여지지만은 오늘 기독자들이 방편에만 힘을 쓰고 관심을 가지지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실 수 있는 그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완전히 사람들에게는 잊어버리게 됐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빛이 가리워져서 아주 밤중같이 된 것입니다. 화목을 모두다 귀하게 여기고 또 봉사도 귀하게 여기고 희생도 귀하게 모두들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이라면 더듬어 볼 것도 없이 이는 참 가치있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고귀한 생활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신자만이도 아니고 불신자가 다 하나되어서 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온 세계가 봉사생활이 고귀한줄 신불신자가 다 알고 또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다 존귀한 일인줄 알고 서로 화평하는 이것이 다 귀한 일인줄을 신불신자가 꼭 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무신론 국가나 유물론주의의 그 사회나 다 이일은 가치있는 일이라 해서 공통이 되어 있고 이 공통적으로 이 사업을 이 생애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세상과 교회는 구별없이 합작되어서 열심히 일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어떤 잘난자의 자기의 중심인 방편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아닌 모든 인간들이 존귀히 여기는 그 생애는 하나님과 제일 큰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그 일에 중심이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인지 그 동기가 어데 있는지 이것은 사람들이 계산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것의 마지막 종착되는 그 종착이 어데냐 이래 가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그 도착하는 그 종착이 어디냐 결과가 무엇이 되느냐? 또 이것이 시발될 때에 그 동기가 어데 있었느냐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다만 방편만 보고 갑니다. 동기나 목적이나 중심이야 어찌됐든지 방편만 좋으면 우줄거리고 따라가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보기를 그 방편만이 보는 것이 인생들인데, 동기도 안보이고 결과도 안보이고 중심도 안보이고 방편만 보이는 이 어두운 눈을 가진 인생들에게 좋은 방편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을 동기를 말하고 목적을 말하고 중심을 말해서 이것이 틀렸기 때문에 안됐다. 이것의 결과는 이러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 것이다. 하면 분명히 그거는 예언자요. 분명히 모든것을 예고한 정 그 정관하고 정평 정가한 말이지만은 이런 사람은 온갖 죄명을 붙이게 됩니다.
독선주의라 까다로운 사람이라 언제든지 반동적이며 배타적이다.
이렇게 정죄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십세기의 원자 시대가 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예민한지 어떻게 미첩한지 이렇게 자기에게 화살 오는 이런 화살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다 화살을 피해서 아는 사람도 벙어리 되고 모르는 사람도 몰라서 벙어리되고 이래서 방편만 성경대로의 선한 방편을 쓰고 동기와 목적과 그 중심은 살피지 안하는 여기에서 이제는 순전히 악령의 총 수입이 되고 있는 세대로 점점 화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어데서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 운동의 동기가 뭘로 생겼느냐 하면 까다로운 사람됩니다. 이 운동의 목적이 무엇이냐 최고로 거기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 주권자 중심자가 누구냐 말하면 등신이라도 다 알 수 있을만 하지만은 너무 이제 말세의 지혜로운 인간의 망할 지혜를 가지고 민첩해서 이런 치명적인 말이나 주장이나 행위를 사람들이 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주 약은 세상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말로 말하면 그것이 다 환경의 부합하게 타협적 처세술이요.
그것이 민주주의라 말하지만은 사대주의 사상이요. 인본주의의 사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할만치 하나님은 교회에 참죽은 거와같이 이렇게 완전히 제거됐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도 하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 비위를 생각한다는 것을 쾌쾌묵은 신비주의로 알고 인간의 의견 인간의 안면 인간의 여론 이것을 맞추는데만 주력해 나가는 이 세대로 점점 저략해가니 참 별수 없는 사람인데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격으로 전 사회와 교계가 다 이렇게 나가니 어떤 자기는 별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렇게 점점 화해서 속화되 가기 마련입니다. 십년전과 십년후가 다르고 이차대전 전과 이차대전 후에 서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때 서적은 하나의 미신 같고 참 호랑이 담배피울 그 미개한 시대의 저서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점점 세상이 되어가지 잘났으나 못났으나 자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어떻게 민활하게 이중 삼중 뭐 몇 십중으로 이렇게 방어선을 싸서 달리는지 속에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자기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며 사치있게 하였든지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줘라.
말세에 하나님의 진노는 자기 위주로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것으로서 멸망 받으니 네가 멸망 받기 싫거든 거기에서 나오너라 말씀하신 이 말씀이 더듬어 찾을것이 아니라. 이렇지 안한 사람을 백명 만나도 보이지 않고 천명을 만나도 보이지 안할만침 신앙의 사람은 없어지게 됐습니다.
또 사치와 음란은 소돔 고모라성보다 훨씬 더 관영해졌습니다. 이것을 볼때에 아무리 주일학생을 인도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중간반을 인도하고 장년반을 인도한다해도 마음에 온 세상이 이렇게 먹물로 깜깜해져 가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검정물이 들지 안하고 흰빛을 보존해 가지고 나가겠느냐 하는 그것을 생각할때에 참 한심하고 낙심이 됩니다. 정신이 흐릴때는 이것 저것 이 사람 붙들고저 사람 붙들고 뭐 권면하고 위로하고 타이르고 하면서 분주하지만은 정신이 고요히 바로 들때에는 참 한숨을 안 쉴 수가 없고 탄식 안할 수가 없고 두려워하지 안할 수 없습니다.
왜 불원간에 주님을 만날 터인데 세상에서 어떻게 했든지 그대로 주님앞에 들어날 것이고 주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데 그걸 생각지 안하면 얼사 좋다하고 주위 환경에 마찰 될 필요가 없지 같이 이렇게 움직여서 나가면 수월하고 타락이야 수월하지 수월하고 좋지만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나라를 심판을 생각하니 이러게 같이 움직여 출렁거리면서 타락해 내려가는 것도 편치 안한 고통 또 주님 만날 것을 생각하고 정신 차려서 살라고 하니 전체가 대적이요 마찰이니까 이것도 고통.
유학을 보낸 그 아내가 삼년을 견디지 못해서 겉은 유학간 남편 기다린다 하지만은 잠깐 동안 실수로 남편이 오니까 반가워서 아내 고생했다고 눈물가지고 마지하고 피차에 이렇게 반가워서 눈물로 마지하고 기뻐했는데 좀 있다보니까 아내가 없어졌어 어데갔는지 암만 찾아야 없어. 나중에 찾으니까 우물 속에서 나와 보니까 임신이 되버렸어.
이러니까 남편 성공해가지고 오니까 좋지만은 만날 앞면이 있어야지 그만 자살했어. 그 모양으로 우리가 지금은 일시 재미 취미 세상 잠깐 필요한 것 돈 권세 지위 이런 것을 위해서 날뛰지만은 과연 주님께서 갑자기 구름타고 와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때에 주님이 심판 앞에 설때에 참 우리 신세가 어찌되며 우리의 그때의 그 비참이 어찌 될런지 이런 것을 생각할 때도 실은 잠이 안오고 마음을 둘데가 없어서 겉잡을 수가 없어. 흔들려서 공연히 이 구속에도 가도 위로가 안되고 저 구석에도 위로가 안되고 이걸 잡아도 그렇고 저걸 잡아도 그렇고 마음을 겉잡을 수가 없이 둥뜨고 불안에 있지 또 육으로 생각해도 벌써 해방후 삼십여년을 적화통일을 하려고 칼을 갈고 이북에서 있는 그분들이 하나님이 막아서 이래가지고 있지 그들에게 준비나 악독이나 욕심이나 그런것이 없어서 변해져서 그래 있는것 아니니 이면도 이미 죽을 마음이 둘데 없지.
또 자기하나 같으면 별것이 없이, 그기야 은혜가 오면은 기쁘고 즐거운 것 뿐이지만은 평상 수고해논 수많은 무리들이 다 그 앞에서 신앙을 팔고 주님 앞에서 참 영원히 부끄러워 나타낼 수 없는 그런 혀를 놀리고 그런 행동을 하고 할것을 생각할 때에 또 고민이 안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면될까? 아무리 백방으로 생각을 해도 돈 가지고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돈만가지고 날뛰는 사람 그 사람은 이런 문제를 모르지요. 이런 문제를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돈만 가지면 되리라 하지 돈가지고 거기에 폭이 작습니까? 또 서로 자기 다툼하고 이러지만 권세가지고 그것이 되겠습니까? 또 열심히 착실히 알뜰히 정직하게 진실되게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생활을 한다고 해도 이것가지고 무엇이 되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도덕 행위를 해서 사람들이 칭찬하고 한다 할지라도 기독자의 아름다운 도덕 행위를 사회 행위를 공산주의자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너 그랬으니까 너는 후대접 그거 없습니다.
이런 것을 봐도 너무 허무하고 비참하고 가련하고 거다가 이런 것 있다고 우쭐거리면서 뒤로 저뻥하면서 흔드는 것보면은 더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우리는 시대를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입장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강대국으로 피해가면 될기가. 거기에도 꼭같이 이릅니다. 해가 돋으면 같이 돋소. 번개가 번쩍거리면 같이 번쩍거린다고 하는 말과 같이 세계가 같이 다 끊지 한군데는 그렇고 한군데는 안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다.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나 마음이 요새는 다른데 가지 않고 늘 마음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어려움 당할 그러는 생각지 아니하고 반낮 평안한 것만 생각하고 평안할 것만 생각하고 잘살고 좋을것만 생각하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다 부스러지고 절단나는 그 어려움이 있으리라 하는 그런 것은 생각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편하지만은 그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해 가지고 그것이 안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잊어버렸다고 해 가지고 그일이 안 닥쳐옵니까? 이러니까 잊어버리고 안심해도 그것도 공연한 것 또 헛된이 있는 줄 알고 있는 줄 알고 공연히 위안제를 마시면서 헛장담 헛장담 하는 그것도 어리석은 것 어쩌든지 오기는 오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하는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이런 일이인 아주 막중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첫째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제가 오늘도 성경을 몇군데만 다 말할 수는 없고 빼봤습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해 볼 때에 이사야 1장 18절 이하에 보니까 그래도 소망이 생깁니다. "네 죄가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나로 더불어 해결을 짓자 그러면 땅에서 아름다운 소산을 먹으리라" 아무리 죄악이 관영해가지고 어떤 지경에 이렀을지라도 회개하면 좋은 날이 있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여기에 소망이 생기집니다.
또 네가 배반하고 팔면 칼에 삼키워지라라. 배반하고 팔면 네가 전쟁으로 절단나리라. 제가 6. 25때에 그들이 점령한 그곳에서 두달남아 살았는데, 그 인민군이라고 마구 내려오면서 고등학교 이상 고졸 이상에 고졸이상 학생은 모조리 다 착출해가지고 여고생 여대생 뭐 귀골들이지만은 마구 군인으로 착출해가지고 오는데, 그 뭐 죽을때는 몇 십명씩 몇 백명씩 한구디 갖다가 죽고 그 먹을기 있습니까? 이러니까 지나가면 밭에는 그저 먹는다는 것은 것은 먹는다는 것은 풀이든지 뭐이든지 하나도 업이 발갈이 뜯어먹고 싹 끌어나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기 황충이 떼다 이기 황충이떼 가지나 가면 풀뿌리도 안남는 것처럼 황충이떼다 그럴때가 제가 보고 참 비참하다.인간이 하나님이 귀골스럽게 할때에 귀골스럽지 그때보니까 어떻게 그 참 인간이 비참한지 그래도 회개하면 된다 하는 이 성구를 보고 좀 소망이 생겨졌습니다.
또 신명기 28장 7절에 보니까 "천인이 내 곁에서 엎드러지고 만인이 내 앞에서 꺼꾸러져도 이 재앙이 네게 오지 아니하리라" 이 재앙들이 이 모든 환난들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왜 네가 여호와로 피난처 삼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까이 오지 못할 피난처를 네가 마련했다. 네가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천사를 가지고 보호하기 때문에 그런것이 해하지 못한다. 이 성구를 찾아보고 그래도 살길이 있다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요새 늘 보는데 이사야 49장 22절 이하에 보니까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 대적이 어떻게 강해도 대적 저거끼리 다 싸워서 전멸이 되고 너희들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계약을 우리에게 선포하신 이 계약이 있기 때문에 소망은 있기는 있습니다.
또 학개서에 보니까 "성전만 지으라" 성전 지으라 말이 회개하라 말인데 회개만 해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진동시킬 것이고 모든 열국을 다 네 대적하는 열국을 엎을 것이요. 다 깨트리고 저거 칼에 다 상해서 멸해지도록 하겠다 하는 이런말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계약으로 주신 이 계약을 볼 때에도 소망이 생기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길은 있지만은 문제는 우리가 회개입니다. 회개이기 해야 된다고 안다고 해서 회개 되는 것 아닙니다. 자기가 회개를 하고 싶다고 회개되는 것 아닙니다. 회개하려고 결심을 한다고 회개되는 게 아닙니다. 그 죄악의 세력은 우리보다 힘이셉니다. 죄악의 세력은 우리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우리가 뭐 원하고 알고 원하고 결심한다고 죄악 그놈은 참 비웃고 아이들 말로 코똥끼고 있습니다. 회개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은혜로 회개가 되도록 해 주시야 참 세상 온갖 불의의 재앙이 와도 해할 수없을 만침 축복의 깊숙히 파고 들어가지 하나님이 은혜 안주시면 우리는 안됩니다.
이러니까 회개하면 모든 것이 변하여서 생명과 구원과 축복이 되는줄 알지만은 회개가 이거 문제입니다. 회개가 된다는 것이 우리 결심이나 각오나 열심 가지고 되면 다행이지만은 그거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이 회개케 해줘야 회개가 되지 우리힘으로 회개 안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시켜 주시면 우리가 살고 회개시켜 주지 안하면 우리는 망합니다. 저 지난 언제도 요새는 자꾸 이런 이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기도하면 회개되고 회개되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식주 영광 안보문제를 책임져 주신다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도 찾아본 이 성구가 다 그깁니다. 말씀대로 순종해라. 네 대적이 칠배나 패망을 해 가지고 절단날 것이다. 칠배나 패망을 할기다. 성전지으라. 네 대적들이 저의 칼에 꺼꾸러질 것이고 모든 우주와 국제 자연 전부를 너 위해서 동원하겠다.
이것도 회개입니다.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업드러지고 꺼구러져도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하는 이것도 회개입니다. 지존자로 거처삼는 이것이 나는 회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어도 해개하라 그러면 땅에서 아름다운 소산먹고 편히 살리라. 네가 이것을 무시하면 칼에 삼키워 망하리라. 이것도 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밤에 봉독한 말씀 이 말씀을 간단하게 해석을 합니다. 여호와로 피난처 삼는다 그말은 하나님의 계약말씀 가지고 피난처 삼는다 그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때에 방주되리라 생각도 안했습니다. 이거해라 시키는대로 끊어라. 나무를 붙이라. 구해라 칠을 해라. 칸을 질러라. 하나님이 하나 하나 시키시는대로 한 그것이 마지막에 홍수를 이길 수 있는 홍수를 이길 수 있는 배 만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 시키실 때에 시키시는 그대로 하나둘 만들어논 그것이 사람보기에는 조롱을 받을만한 그런 무가치 한 것 같고 헛일한 것 같았지만은 홍수가 내릴 때에는 그것이 저들의 피난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피난처가 된 것이요.
이 모양으로 여호와로 피난처 삼으라 말은 여호와께서 시키시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대로 한 것이 노아에게는 배가 됐고 우리도 순종해야 되겠고 저런 현실 주시니까 저걸 순종해야 되는 이것이 우리는 그것을 종합도 모르고 그래 순종하면 뭐이 될줄 모르지만은 그것이 합해서 피난처 된다. 이것으로 피난처 삼는 자에게는 이 천인 만인의 엎드려져 당하는 이런 재앙이 그를 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여호와로 피난처 삼는 것 뭐이 될 줄 모르나. 자기가 닥친 현실 현실에서 계명지켜 말씀 지켜서 나가는 요것 가지고 만든 요것가지고 만든 피난처라야 피난되지 그 외에는 천하의 명예를 다 가져도 권위를 다 가지고 영광을 다 가지고 천하 인간들에게 아무리 존대를 받아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부흥사가 되어도 부산에 제일 큰 교회를 일으킨 목회자가 되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자기 현실 현실에서 고때에 한말씀 한말씀 지킨 고것이 똘똘 뭉쳐 종합해가지고 말세를 치는 이 모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지 그외에는 피난처가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외에 피난처를 생각지 맙시다.
내가 요 한 요 현실에서 당한 현실에서 자기가 한말씀 한말씀 지켜나가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권태나기도 하고 참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언제 어떤 반사한테 내가 들으니까 심방을 가니까 아이가 보르르 나오디만은 보기 싫은데 또 왔다고서 다시 오지 말라고 나는 그 교회 안간다고 예수가 어데 있느냐고 예수라 여 있으면 잡아 죽이고 싶다고, 이렇게 반박을 하고 욕을 하고 들어가면서 문을 탁 닫고 들어가면서 다시 너를 찾아 왔는데, 그말하고 왔다고 또 고다음 학생한테 가니까 쫓아 나오디만은 뭐하러 왔느냐고서 지금 테레비 한창 재미 있는게 나오는게 불러내 가지고 그래서 나야 비를 맞고 이런데 찾아왔는데 테레비가 중하나 이러면서 빰은 뭐 읍에서 맞고 눈물은 모리 돌아서 흘린다 하디만은 그 엉엉 울면서 하는 내가 그런 사람 하나 봤습니다. 고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나갈라고 하면 답답한 일도 있고 섭섭한 일도 있고 외로운일도 있고 무서운 일도 있고 징그러운 일도 있고 아픈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별별 있지만은 고것을 한 현실 한 현실에서 어기지 안하고 한마디 한마디 지켜나가는 요거 외에는 피난처가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놨습니다.
요것으로 피난처를 되도록 했기 때문에 아무리 잘나봤자 소용없어. 못나고 요것만 하면 요 피난처로만 피난 얻도록 요렇게 피난처를 만든 요 피난처로만 피난얻지 그 외에는 딴피난처로만 피난 얻지 못하도록 하나님 딱 만들어놨어. 나는 돈있다.
권세있다. 나는 지식있다. 나는 잘났다. 지혜가 있다. 명철하다. 사업을 많이했다.
소용없어. 현실 현실에서 주님의 명령을 지켜 나오는 요것으로 만든 방주라야 요것으로 만든 피난처라야 되지 딴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서 여호와로 네가 피난처 삼았기 때문에 이런 재앙이 네게는 가까이 오지 못한다 말씀했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다 말은 제일 높으신 우리 주님을 자기가 사모해서 항상 사모가 거기에 있고 마음이 거기에있고 이럴때에 내 마음이 주님에게 있고 내 생각이 주님에게 있고 내 정성이 주에있고 뜻이 주에게 있고 욕심도 주님에게 있고 내 마음이 주님에게만 기울어지는 요것이 빛과 연결이되기 때문에 빛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이의 가는 길에는 넘어지거나 실족하는 그런일이 없게 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럴수 없는 사람 같으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자기가 존경하는 그 주공이라는 사람을 하루만 꿈에 보지 못해도 나는 꿈에 주공을 보지 못했다고서 탄식을 하고 울고 그렇게 존경하는 사람을 사모했는데 우리는 그런 요소를 가졌기 때문에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면 이렇게 사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애하는 사람이 꿈에 사랑하는 자에게 오고 가고 한 그 꿈으로 된 것이 만일 발로 걸어 다니는 것같이 흔적이 나면 자기가 그 사랑하는 자의 사이에 반석길이 다 보사지고 모래가 됐을 것이라고 그 말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사모할 수 있고 밥맛이 없을 만침 사모할 수 있고 꿈에도 늘 그 꿈이 꾸일만침 그렇게 사모할 수가 있고 있는 그런 요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있는데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지존자로 거처를 지존자에게 마음이 가 있고 생각이 가 있고 뜻이 가 있고 소원이 가 있고 사모가 가 있고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 앞에 실속이 없이 빛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는 이것이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조 일석에 됩니까? 일조 일석에 안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에게는 이런 모든 재앙들이나 화가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뭐 대항해 그런게 아니라. 가까이 오지 못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제일 어려운 위대한 일은 우리 택한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담당하셨고 의무와 책임을 다 담당하셨고 원수된 것을 다 담당했으니까 그 고난의 어려움은 측량못할 그 무한의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고난의 어려움이 이 육을 어렵게 했지만은 주님의 중심은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이 아픈데 오지를 못했습니다. 오지를 못했고 아픈데 온 마음이 없었어. 아픈데 온 마음이 없이, 그 전부는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사람들이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우리가 생각할때에는 십자가에 이렇게 저주의 사망을 받으니까 기가차서 아무리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은 주님이시지만은 너무 고통이 심하니까 이랬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은 주님은 그 가운데서도 그 고통보다 주님을 사모해서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나를 대우해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이런 사랑을 베풉니까 해서 그 주님이 자기에게 당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신임하고 맡겨주신 고게 대해서 흥감해서 견디지 못해서 아픈것이 가까이 오지 못한 찬송을 했습니다.
베드로도 십자가에 못밖이게 될 때에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그 어려움은 그에게 가까이 오지도 모했고 주님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그 어려움은 그에게 가까이 오지도 못했고 주님 나 위해서 십자가 못박히셨는데 네가 어떻게 주를 위해서 이렇게 못박힐수가 같이 못박힐 수가 있느냐? 나는 꺼꾸로 못박아 도라 했으니까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그이에게 하나도 고통이 되지 안했고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한 불이 붙어 놓으니까. 못박히는데서도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해서 더 고난을 당하고 더 충성하고 더 주님을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까, 더 당하고 싶어서 원함으로서 그것이 그에게 불이 붙었지 그 고통이 그이에게 고통되지를 못했으니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이 사람이라면 그런것이 오지못할 뿐만 아니라, 와봤던들 그의 마음을 뺏들지 못할 것이고 고통이 있으면 고통은 그이에게 유일로 사랑하는 자를 대접할 수 있는 것이 있을때에 기뻐지고 사랑하는 자를 대접하는 기회와 사건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자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생겼으니 기쁘고 즐거워 피곤한기 아니라.
기쁘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그런 기쁨이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에게는 필연 있을 것입니다.
과거 손양원 목사님도 그 일부를 들으면 그분이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려했는데, 그분은 주를 위해서 더심한 고통을 원하고 원해서 그날 밤에는 전부다 음식을 거둬서 당신이 자셨답니다.
이럴 수 있는 이 고귀한 인격자 만유의 대 주재에게 자기의 인격과 정신과 모든 전부가 그분에게 다있고 완전에 가 있고 그분이 주는 현실 현실에 한 현실 한 현실에서 주의 말씀을 지켜 나온 이것이 성처럼 이것이 방주처럼 이렇게 싸여가지고 이안에 든것만이 해할 수 없는 재앙으로 죄악으로 말세를 관영케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렇게 영적으로 교회들이 점점 속화되고 타락해서 우리가 좋은 교리와 신조는 다 영국에서 가져온긴데 영국에도 교회들이 다 형편이 없고 거기에도 좀 있으면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대통령이 머리가 될런지 모릅니다.
수상이 될런지 모릅니다.
이렇지 우리의 큰집이라 생각하는 호주니 카나다니 미국이니 이런데도 다 신앙들이 그만 이리되지지 또 육적으로는 이 무신론자의 여러가지 박해가 오지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 이것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없이 생각할때에는 참 떨리고 잠이 안오고 기가 막히고 주의 말슴을 볼때에 소망이 생기고 여호와로 피난처 지존자로 거처를 삼는 이것이 가능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이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이것을 볼때에는 참 기쁘고 즐겁습니다.
울음끝에 기쁘고 즐거워 그것이 그렇게 뜨겁게 강하게 무섭게 사자같이 곰같이 폭음같이 웅크리는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그런 힘이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는데 하고 무엇이 어떻고 어짜지만은 인자는 이것조차도 마비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됐든지 땅굴라는 놔두고 거서 전생이 일어나서 좀전에도 몇이나 죽고 이랬도 예사고 이 내려와도 죽는 그 시간까지 우리 마음을 강팍해 가지고 죽는고 시간 닥치면 그때사 떨터이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나 속화가 됐고 얼마나 강팍해진지 모릅니다. 얼마나 완폐해졌는지 모릅니다.
이 마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어. 우리가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마음을 가지고 참 탄식을 해야 되겠고 자기의 이 강팍함을 알아서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기절할만침 무슨 병동이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회개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낙관하고 있을때 아닙니다. 공연히 안심하고 있을때 아닙니다. 암만 그까짓거 이것 저것 구비하게 뭐 아기 자기 싸 놔봤자 그것가지고 해결 안됩니다.
그만 위에 뻥걸면 그만 소용없소. 그거 다 홍수 내리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홍수내리기 전에 이것도 저것도 필요도 하고 무엇이 요긴도 하지 홍수가 다 싹 쓸어 버리고 헛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의 재림이 불심판 보다도 가까이 있는 일들도 그만 닥치면 우리는 끝장 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자꾸 깨우쳐서 부드럽고 겸손하게 예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는데는 우리가 기도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좀 분주한 것을 피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복잡한 것을 피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뭐 분주한 마귀란 놈이 우리에게 주는 것 분주한 것이 들어서 우리 마음을 다 뺏들어가고 복잡한 것이다. 빼들어 가는데 언제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아무래도 좀 한적한 자리를 찾아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뭐 돈 그런것도 다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내 앞에 닥친 아기자기 그런 것보다도 큰걸 해놔야 됩니다.
이러니까 고요히 가서 혼자 외롭게 자기와 세상과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이 좀 뜨거워져야 되고 우리 마음이 좀 놀래져야 되고 변동이 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저 신관에도 불을 꺼주십시오. 구관에는 그만침 끄시면 됐습니다. 고만하면 됐습니다. 저 이층거는 꺼버리소. 삼층꺼는 삼층 그 끄십시오. 그만해도 됐습니다.
가방 간수하고 기도하면 좀 어두어도 되요. 보고서 안낸분들 보고서 내고 가도록 하십시오. 삼십분이든지 이십분이든지 자기 사정에 따라서 기도하고 가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기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앞으로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그 어려울때에 피난하는 유일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