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0:14
여호와 목자
본문 : 시편 23장 1절∼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계약의 하나님은 내 목자가 되셨으니, 계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됐지만 여기에 '나의 목자시니' 나의 목자가 되셨으니, 그러면,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다 배반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소돔 고모라 성에 유황 불비 내리듯이 내린다 할지라도 내가 나의 목자되신 계약의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면 나에게는 목자되신 이 역사를 다 하시고 또 모든 은택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여기에 우리라는 말을 쓰지 안하고 '나의' 하는 내라는 이 단수로 기록해서 개인이라는 이 개인 성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계약을 선포하시고 계약대로의 하나님이 하나님이 곧 나의 목자가 되셨으니, 계약대로의 하나님이 계약대로 나의 목자가 되셨으니 하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서 이 목자를 내가 떠나지 않고 이 목자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성공입니다. 그러면, 이 목자를 내가 떠나지 않는 것. 내가, 이 목자를 내가 떠나지 이 목자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목자를 떠나는 것은 이 계약을 내가 떠나면 목자를 떠나는 것이요 계약을 어기면 목자를 배반하는 것이요 대항하는 것이요, 이 계약을 지키고 있으면 목자를 모시고 있는 것이요 이 계약대로 실행하면 목자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목자는 계약의 목자라 하는 요 계약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하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나의 목자시니' 개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목자다. 수많은 사람이 목자로 다 모셨어도 나 개인이 목자로 모시지 안하면 소용이 없고.
수많은 사람이 다 이 목자를 버려서 하나님의 재앙이 노아 홍수 때와 같이 그렇게 내린다 할지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이 목자를. 계약 목자를 모시고 있으면 목자의 이 은택은 내게 계속되고 있다 하는 요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의 원죄에 조심을 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우리 원죄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은, 원죄는 어떤 것이 원죄인고 하니 자기중심의 죄가 원죄입니다. 자기중심의 죄가 원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비판하고 평가하고 그라기 때문에 잘못하면 '나의 목자시니' 하는 여기에 대해서 이 개인성을 우리가 가지고 이 전체성 이 전체성을 잘못하면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개인성이라는 이 사욕 자기중심 자기 위주인 사욕 요것 때문에 우리가 망하는 것이고 다 시험에 드는 것인데.
여기에는 전체를 안 하고 개인, 요 개인성 개체성을 말씀을 이와 같이 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 원죄가 기뻐해서 원죄 그것으로 자기중심 그것으로 여호와를 모실라는 그런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 되면 어찌 되느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는 요 계명을 마귀란 놈이 범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나만치 생각지 안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됐든지 내 개체가, 내 개인이 구원 얻게 된다 하는 요 말에서 고 개인성, 원죄인 자기중심성 요것이 나타나 가지고 잘못하면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죄이니 그 속에는 영생이 없다.' 미워하는 것은 어떤 게 미워하는 것이냐? 중간은 없습니다. 사랑치 않는 것이 미워하는 것이요 또 미워하지 안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 중간은 없는데 우리는 그 중간을 두고 생각을 가집니다. '내가 뭐 내가 어디 미워하느냐? 내가 미워하지 안했는데.' 이렇지만 사랑치 않는 것이 바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고 중간은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미움, 미움이 아니면 사랑이지.
그러기 때문에 잘못하면 요 '나의 목자시니' 뭐 천인 만인이 다 엎드러져도 내가 여호와를 버리지 안하면 여호와만은 내 구원의 주가 되신다 하는 요 깨달음을 자기가 가질 때에. 모세가 말하기를, '이 민족이 목이 곧고 강퍅하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다 진멸하겠다. 이스라엘을 다 진멸하고 너를 세워서 이제 큰 민족을 만들겠다.' 그랄 때에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만일 그와 같이 한다면 애굽에서 인도하신 그 인도의 선포함이 어찌 됩니까? 또 모든 내 민족이 다 멸해지면 나 혼자 살아야 필요 없습니다. 나도 같이 멸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그 민족의 전부와 자기와의 꼭 같은 소원을 가지고 했을 때에 그때에 자기중심인 원죄가 없고 다 그리스도의 그때는 예수님이 대속의 제물 되지 안했지만 하나님의 선포한 법칙과 모든 예표로. 예표로 베푼 그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하나의, 한 아버지요 한 아버지 밑에 있는 자녀들이요 선생님도 한 분이요 아버지도 한 분이요 주도 한 분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오 또 소망도 하나요 또 한 몸인 한 지체인 여기에 모순되지 않는 고 마음을 가지고 그대로 행동하는 말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긍휼히 여기셨고 모세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그때 만일 모세가 '아, 하나님이 이렇게 한다 하시니, 참 나로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시니까 기쁘다. '체면상으로 하나님이여, 그래서 되겠습니까?' 이렇게 만일 말을 했더라면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심으로 '나와 같이 멸하시고 구원할라면 나와 같이 구원해 주옵소서.' 이라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만족이 돼서 '그러면 내가 네 소리를 듣고 내 뜻을 돌이키겠다' 하시고 멸하시는 일을 중단하시고 거기에 범죄한 몇몇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멸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성경에 개체적으로 말할 때는 성경에 개체적으로 말할 때는 우리는 주의를 어디 하느냐? 전체 면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전체 면에 모순되면 안 됩니다. 전체 면을 주의한다 말은 '나 개인이니까 뭐 나만 구원 얻으면 됐다.' 요렇게, '다른 사람 다 하다가 안 되니까 안 되지만 나만, 뭐 내가 구원 얻게 됐으니까 되지 안했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내 마음으로 전체는 포기하고 자기 구원을 생각할 때에 자기 구원이 포기가 돼집니다. 자기 구원이 포기가 돼집니다. 또, 자기만 구원 얻는다는 이것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자기는 이 전체 구원을 원해서 이 구원에 대해서 자기는 진정 하나님 보실 때에 전체 구원을 원하는 고 마음에서 고 사상에서 자기의 개체 구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가 그때에 여덟 식구만이 구원 얻은 그 이유는 노아는 다른 모든 사람의 구원과 자기 구원을 하나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이 안 되는 그 일에 대해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저 명령하시니까 자기 혼자 배에 들어가고 그래 안 할 수는 없기는 없지만 전체 구원을 자기가 원하는 그것이 자기 개 가족 구원이나 꼭 같이 소원하는 요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노아 홍수 물에 가라앉지 안하고 그 배가 침몰되지 안하고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 하는 요 계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면 개인적으로, 개체적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지 안하시고, 아무리 천인 만인이 다 계약을 어겨서 한국 사람이 다 어겼다 할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도 고 한 사람을 버리지 안하시고 구원하시는 이 구원을 하시나 자기가 천이 만인이 엎드러져도. 다 멸망할지라도 하나님은 공평된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니 내게야 구원이 있겠지' 하는 고 마음 그것이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자기 구원을 하나님이 줄 수 없는 계명 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체 구원을 원하는 거기서 결과적으로 보니까 개인 구원만 되고 말았다. 개인 구원이 되고 난 다음에도 다 어찌됐지만 내 구원 됐으니까 됐다'하면 하나님이 고 개인 구원주신 그 구원은 깨지고 말고 그 구원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항상 자기는 전체 구원이 되지 아니한 그 면에 대해서 늘 고민과 고통스러운 그것이 있는 동안만 고 개인 구원받은 구원이 보존될 것이요 또 거기에 대해서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는 그 애통이 있을 때에 그때 개인 구원은 든든해지는 것이지 그 개체로 나가면 멸망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여호와 목자라' 여호와 목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놓지 말고, 내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는 그 찬송을 말했더니만 엊저녁에 어떤 분이 있다가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는 이 끝 절까지 다 찬송으로 해 가지고 곡을 지어서 그렇게 한 것이 복음 성가에 있다고 그래 저한테 소개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언제 한번 보니까 참 어떤 장로님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독창을 했는데 하도 은혜가 돼서 ○○○집사님에게 이 독창을 한번 해 봐라 해서 그때 독창을 힘들여 해 가지고 저한테 녹음해서 보낸 것을 제가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노래 부르기 그렇게 힘드는 줄 몰랐습니다. 그 노래 독창 그것을 몇 개 하는데 한독 삼사 일 동안 영 뭐 잠을 안 자고 거기에 막 기울여 가지고 그렇게 해서 창을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줄은 나는 몰랐습니다.
자기 부인이 나한테 그런 고백하는 걸 들었습니다.
참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가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배반치만 안하면 됩니다. 배반 안하면, 여호와 목자를 내가 떠나면, 목자를 떠나면, 잃어버린 양이 목자를 떠나서 딴 데로도 망치니까 목자는 찾지만 목자를 떠났으니까 목자가 만나기 전에 이리가 상우면 이리가 상울 수가 있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목자 안 떠나는 것이 이것이 환난에 유일한 방비요 또 우리의 의식주의 유일한 완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목자를 떠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든 활동이 형통케 하는 활동 형통의 유일의 활동 형통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우리가 떠나지 안하면 내 전 활동에 그분이 같이 하기 때문에 형통 할 수밖에 없어. 형통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망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형통한 게 아니라 망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안해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함께 하시지 않는 그런 일을 하지 안해.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지 안할 수가 없어. 이루지 안하면 하나님이 죄 짓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또 여호와만. 우리 목자로 모신 이 여호와를 내가 이 목자를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모든 행사가 다 완전케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다 주의 이름으로 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하는 그 말은 우리의 전 행사는,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 말은 우리의 전 행사는 하나님이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목적하신 이 목적에 도달한다 그 말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내게 대한 그 뜻대로 행하니까 그 뜻대로 행하는 그 종착지는 뭐입니까? 마지막, 마지막 종점 버스 타면 종점 모양으로 종점은 뭐입니까? 종점은 영원 전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 안에 내가 도달해서 목적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게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데에는 이 투쟁의 대상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형상으로 더불어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인간에게 내가 싸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형으로 더불어 싸웠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모욕이 됩니다. 하나님의 모형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모형인 사람으로 더불어 대적했기 때문에 이거는 막바로 하나님을 모욕 주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는 깨달았고, 야고보서에 보면 네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한 입으로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니 어떻게 한 물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 이거는 모순되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가장이요, 가장이요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나님도 그런 거짓부리에게 넘어갈 줄로 알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네 속에는 저주가 가득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의 싸움은 뭐이냐? 우리의 싸움은 참 큰 싸움을, 그 지지한 그런 싸움, 동양하고 서양하고 붙는다. 뭐 이래 붙는다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싸움은 예를 들면 공산주의하고 하는 그런, 공산주의 민주주의같이 정치적 투쟁이 아닙니다. 우리 투쟁은 뭐이냐? 우리는 무신론으로 더불어 투쟁합니다. 무신론으로 더불어 투쟁합니다. 하나님 없다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계신다 하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을 없다 해라 하면서 변판원씨를 칼로 찔러도 '하나님은 계신다' '이놈, 하나님 안 계신다고, 하나님 없다고 말해라. 부인하면 지금도 살려 준다' '하나님은 계신다' '없다 해라'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그들에게 끝까지 증거하다가, 저 먼저 제가 땀내기 재라 했습니까?, 그때? 구덤재라 했던가? 땀내기 재라 했던가? 그랬는데, 그 재가 구덤터재입니다. 구덤터재 그 재에서 그라다가 순교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다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 싸움이지 뭐 공산주의를 민주주의 만들라는 것 아닙니다.
해방 직후에 제가 거창 있을 때에 거창에 있는 그 목사님들 장로님들, 그때 주남선 목사님 나오시지 안했고, 감옥에 갔다가 나오시기는 나오셨지만 평양서 집회하느라고 도착 안 했고 이랬는데, 그때 내려가니까 그 장로님들과 모든 목사님들이 다 모여 가지고 '자. 이제는 해방이 됐으니까 우리가 이 건국에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이 인민공화주의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으니까 우리는 민주주의에 속해서 민주주의 역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때 여기에 ○○○목사님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이 정치에는 가담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를 바라기 때문에 그들과 투쟁되는 것은 무신론과 유신론. 그것이 마찰되지 무신론이 아니라면 그 정부나 이 정부나 꼭 같다. 그들에게 무신론이라는 고것만 우리가 대항하지 딴 거는 대항하지 안하고 그 외에는 유물주의라,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주의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시면 잘 사는 것이지 물질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닌, 우리는 축복주의인데 그들이 유물주의라 하니까 우리는 인민군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 제일이다 이 사상전이고 신앙전이지 우리는 그런 거 아니다.' 이래 가지고 그때 거기서 그 분과도 대립이 됐습니다. 대립이 되고, '자, 모두 대(竹)로 가지고 창을 만들어 가지고, 대창을 만들어 가지고 지금 건국을 하러 이 모두 십자가 군병이 되고자 하는데 우리도 뭣을 이래 해 가지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어디 가서 돈을 구했는지 구해 가지고 추럭을, 그때 추럭은 참 귀한 때입니다. 그때 추럭으로 말하면 요새 비행기보다 좀 귀한 때입니다. 추럭을 한 대 구해 가지고 우리도 이 건국 도상에서 건국에 나서야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여기 부산 어디서는 십자가 군병을, 십자군이라고 만들었고 서울도 십자군을 만들었습니다.
만들었을 때에, 그것이 다 거짓부리라. 우리 싸움을 모르고, 우리 싸움을 모르고 원수에게 이용당해 가지고 내나 마귀 싸움이, 마귀 편이 돼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싸움은 아니다. 하는 것을 대항해서 그때, 또 대립이 돼 가지고 많이 제게 대해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거창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제게 대해서 호응을 해서 나는 집사고 그분들이 목사지만 말한 것이 그것이 다 패전 돼 버리고 기어고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말기는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싸움에, 우리 싸움에 승리케 한다. 우리 싸움에 승리케 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도다.' 이 싸움을 승리케 하시고, '상을 베푸시고' 승리케 하시고, '상을 베푸시고' 승리케 하시고, 또 '기름으로 바르셨다.' 승리하되 원수를 죽여 없애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 그 승리가 바르기 때문에, 평가적이요 비판적이기 때문에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는 그 모든 것들도 다 머리를 숙여서 주라 시인하고 찬양하고 존경하게 된다, 이런 전투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남은 여생, 남은 여생이라면 세상 있는 동안에도 여생이지만 영원무궁, 영원무궁토록 나에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그 생애를 우리에게 요동치 않게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 말은, 선하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그 은혜를 가리켜서 선하심이라고 말하고, 인자하심이라 말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이 사랑을 말합니다. 창조주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이 생애가 계속 되도록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여호와 목자만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면, 떠나지 안하면, 여호와 목자를 배반치 안하는 것이 뭐이냐? 계약의 목자이기 때문에 계약을 버리는 것이 목자를 버리는 것이요 계약을 어기는 것이 목자를 배척하는 것이요, 계약 순종이 목자를 대접하는 것이요 목자에게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목자라는 걸 기억하고, 또 나의 목자이신 내 개체라는 것을 그것을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나 개체를 생각할 때에도 '누가 어짜든지 내 개인이나 믿음을 잘 지키면 되지.' 그러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구원 이루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 하는 그 구원에 대해서 제가 많이 고민을 가졌습니다. 거기에 가면, 참석해 보면 '자기구원 이루지 안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 자기구원을 말하는데, 자기구원을 말하는데 좀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자기구원을 말하는 데 위험성이 있는 것은 뭣 때문에 위험성이 있느냐? 자기구원, 자기구원 하니까 이 개체성이 그만, 개체주의가 그만 농후하고 이래 되니까 사람들이 이 개체적으로 되어지니 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이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구원이 뭣 때문에. 내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무슨 좋은 구원 이루어 가지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누릴라 하는 그게 아니고 내 구원을 이루는 목적이 뭐이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개인 구원에 힘을 쓰는 것이고, 모든 사람의 구원에 나는 이바지해야 되고 나는 사람의 구원에 한 분자와 같이, 한 세포와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병들면 모든 사람이 아픔을 가져. 내 손가락에 조그만 한 가시가 들어 가지고 그 세포 몇 십 개가 절단이 나면 온 전신이 다 아픔을 느낀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 구원 잘못 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내 구원 하나 바로 되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입혀지기 때문에 주님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 구원을 마련하는 이것이라야 되지 주님도 모든 사람도 내비두고 자기 구원을 이룰라는 그것은 사욕 중의 사욕이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으로서 내나 그것이 원죄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가 발동되기 쉽겠다 해서 고 교훈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머믓거리다가 먼저 그때 내가 물질개악설이라는 거기에 대해서 말하다가 한번 퇴방을 먹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고 그 뒤에 많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요것을 말하면 도리어 오해가 되겠다 해서 그때 말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성인이 될라면, 거룩한 사람이 될라고 하면 자기에게 있는 허물 듣기를 기뻐한다. 자기에게 단점이나 잘못된 점이나 그것을 말해 주는 그것을 듣기를 기뻐해야 되지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나는 이거 내게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 말해 줄 때는 누가 말하든지, 원수가 말해도 내게 단점을 말할 때에는 그것은 참 반갑게 들어야 되겠다, 왜 반갑게 듣는가? 그것은 단점이 있으면 어서 고쳐야 되겠고, 단점이 없으면 앞으로 이런 단점이 생겨지지 안하도록 주의를 해야 되겠고, 또 단점이 없는데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이러니까 만고에 우리에게 대해서 단점이나 책망 받을 때는 손해가 없는데 우리가 칭찬 받는 데 대해서는 백해무익입니다. 그거는 뭐 손해뿐이지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는 고거 그 다음에 요긴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아니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요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말은, 그래 말한다면 여호와 목자가 내게 모든 일을 베푸셔서 내 밖에서 날 도와 주셔서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그말이고,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그 말은 무엇을 표시하는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는데 무슨 꿀밤만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계셔도 뭉클 할 것인데 꿀밤만한 덩어리 형체로 계시지 안하고, 또 팥내끼만한, 그런 뭉치를 가지고 내게 계시지 안하고 서숙알만한 조그만한 형체를 가지고 내 안에 계시지 안하고 형체는 전연히 없이 내 안에 전지전능자로 계시기 때문에 이거는 암만 봐야 하나님이 아니고 내라 그말이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되 내 안에서 내 중의 내가 돼 가지고, 내 중의 내가 돼 가지고, 참 내 안의 내가 돼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내 안의 내가 역사하시니 내게 통해서 내가 하는 말이 주님의 말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주님의 말이고 내가 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이라. 이러니까, 전지전능 사랑의 것이 다 나타나셔 가지고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원수 앞에, '원수의 목전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발랐다.' 이 원수로 더불어 싸우는 이 전투에서 승리할 뿐만 아니라 요렇게 내 안에서 계신 요것이 완전무결한 요 주장이요 요 공평된 이 주장으로 승리하기 때문에 패전하고 나한테 진 그들이 원수를 품지 안하고 패전한 그들이 마지막에는 다 감탄하면서 '옳소이다' 하고서 주라 시인하는 거와 같이 그렇게 존대할 수 있는 이런 가치 있는 영광의 승리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죄인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 죄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요 마귀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요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사람이, 무신론주의가 나하고 싸워서 원수가 대적할 지라도 만일 내가 옳게 싸워 가지고 이겼다면 어느 게 이겼느냐? 그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는 게 이기는 것이요 사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마귀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벗어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진정 감탄해서 견디지를 못할 것이라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이 말씀이 주님이 내 안에 계셔요.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계셔. 내 안의 여호와신데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니까, 내 안의 내라. 내 안의 내라. 내 머리에 나로서 주님이 계셔 가지고 역사하시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여호와 목자를 버리지 맙시다. 공사주의가 와 가지고 아무리 독침으로 아무리 위협을 하고 어떻게 고문과 고행을 해도 여호와 목자만 버리지 안하면 돼. 목자만 버리지 안하면 '생명과 재물과 명예와 친척을 원수가 다 취한들 상관이 뭐이뇨 다 내 주께 있으리로다' 그것이 영원히 온전한 것으로 다 부활해 가지고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를 버리지 안한 자에게는 피조물이 다 옹호하고 복종하지 그를 해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독침을 만나고 공산주의를 만날 때 '어떻게 하면 이들을 피할까?' 잘못하면 모순되게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 이것을 죽여서 없애 버릴까?' 그러면 내나 마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에 그러기에, 이기선 목사님이 이북에서 안 넘어오고, 넘어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안 넘어 오고 거기서 지금 순교를 했으리라 생각이 뒵니다. 연령이 원첨 높아서.
그런데, 혹 다니엘처럼 살려 두었는지 모릅니다. 이래서, 참 이 38선이 터져서 이래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그 말 가운데는 내 맘에는 그 신앙 지킨 성도들이 어디 있는가 성도들 구경하고 싶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그게 있는데, 이기선 목사님이라는 분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위대한 분이신데.
그분의 제자의 말을 들으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공산주의가 왔는데 이 환난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두 가지를 잊지 말아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 사랑하는 것을 네가 놓지 말아라. 이걸 놓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평강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런 말을 해 주더라고. 그거 참 위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 공산주의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 둘을 사랑하는 사랑을 네가 놓지 아니하면 네 속에 평강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 하는 그것을 권면해 줍디다 하면서 그때 그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는데, 저와 동창생인데 그분은 벌써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이북에서 되게 놀래 놓으니까 '남침해서 적화되면 안 되겠다. 아예 날아가자' 해 가지고 미국에 날아가서 미국에서 지금 성경 어디 가르치고 어디 신학교 교수 노릇을 하고 있다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로 피난처 삼고, 미국도 피난처 아니오 미국도 피난처 아니오.
미국도 피난처 아니오. 뭐 경제를 가지고 배를 준비한다, 비행기를 준비한다, 그런 것도 피난처 아니오. 여호와, 간단하게 여호와로 피난처 삼으면 우리 안에서부터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이러니까, 하나도 해 될 것 없습니다. 나의 목자, 여호와 목자. 여호와 목자 기억하고, 나의 목자 나의 개체성을 말하고, 내가 부족함이 없어. 내게 부족함이 없으면 그의 혜택이지만 내가 부족함이 없어. 내 안에 와서 역사 하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래 가지고 모시고 있으면 그 다음에 영과 육, 의식주, 모든 생활, 행위. 전투, 영원 전체가 다 형통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요걸 똑 기억하십시오. 무슨 특수한 방편을 쓰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보편 방편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수원지 산에 가서 기도드리는 그 기도를 수원지 산에 가지말고 예배당에서 기도해서 그만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또 예배당에서 기도해서 그만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예배당 여기서 기도하지 안하고 자기 집 안에. 자기 집 안에 어디 옥상이든지 부엌이든지 그런데서 기도해서 그만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고, 또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자기 식구들이 누워 자는 침소 그 침소에서 거기서 기도해서 그만큼 기도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더 좋고, 또 그것보다는 자기가 벅씬벅씬 끓는 시장에, 장판에 이런데서 기도해서 그 만한 속에 들어가고 하는 것이 그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신앙은 보편성을 가지고 일반성을 가지고 자꾸 깊이 깊이 들어가려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치 좋은 어떤 곳에 가 가지고 기도하니까 기도가 되더라 하는 그 기도는 기도가 가라앉아서 꺼졌을 때에 그 기도가 필요하지 이제 그 기도하고 거기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환난을 이길라고 하는 것인데 환난 때에 그렇게 경치 좋은 것이 우리를 따라옵니까? 경치 좋은 것이 따라옵니까? 경치 좋으니까 기도도 되고 힘이 나디만 경치를 싹 빼 버리니까 힘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차차 차차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내 몸밖에 있는 내 모든 것 다 냅두고 내 몸도 냅두고 순전히 주님과 진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 힘 가지고 싸워야, 그 힘은 옥중에도 같이 가고 바다에도 같이 가고 어떤 데에서라도 나와 함께 합니다. 다른 것은 따라오지를 못해요.
따라오지 못할 그런 것을 힘입지 말고 순전히 주님과 진리는 나와 동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로써 우리의 힘을 삼아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