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가난-마음, 양심, 영혼, 심령


선지자선교회 1985년 9월 14일 토새 

 

본문 :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틀 아침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또 계속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 여게 대해서  생각이 모두 다 각각 달라서 해석이 많이 분분합니다. 일치되지를 안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이하에 기록된 이 교훈을 가리켜서 산상 보훈이라 산 위에서  주님이 교훈해 주신 보배로운 교훈이라 이렇게도 모두 다 평가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황금률이라 하는 참 정금 정금의 규율이다. 정금 율법이다. 이래서  정금의 법칙이다 이렇게들 또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짧으면서도  귀중한 아주 고귀한 교훈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문서돼 가지고 있는 이 말씀만  가지고 그 뜻을 다소나마 바로 깨닫기도 어렵고, 바로 또 느끼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려운 교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 많이 기도를 하고 많은  본문 읽기와 또 그 연구를 하라고 그렇게 제가 미리부터 당부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말했지만 지난 6.25 때에 위천서 석 달 동안 그들 점령한  가운데에서 참 생명을 내 놓고 한 달 동안을 계속해서 집회하고 집회 한 마지막  아침에 `이제 교훈할 거 다 했고 이제는 이 전투에 대한 교훈은 다 했고 그저  마지막으로 산상 보훈에 대한 것을 약간 좀 증거하겠다' 그렇게 말을 하고 이  마태복음 5장 1절 이하의 몇 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으로 이제 집회는  끝난다고 하고 몇 절을 읽었는데 그날 아침에 인민군들이 와서 포위해 가지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만기 목사님이, 엊저녁에 설교하신 이만기 목사님이  거게 계시고 그때 강단에서 그 사람들이 하도 조우니까 나를 나오라고 데리러  들어오다가 나한테 야단을 만나서 도로 물러가고, 그때 그 인민군들은 주저앉고  이런 일이 그날 아침에 있었습니다.

그말 왜 하는고 하니. 그때에 한 달 동안 모든 교훈을 했지만 교훈한 것은 이  산상 보훈에 입학을 할 수 있도록, 산상 보훈에 입학을 할 수 있고 산상 보훈의  이 교훈을 들을 수 있을 만치 그만치 조금 심령이 밝아져서 그때 이 말씀을  시작하다 말았다 그 말을 내가 지금 하느라고 하고 있습니다. 뭐 그때는 6.25  때니까 벌써 인민군이 와서 옆에서 자꾸 사람을 죽이고 전쟁하고 이거 뭐  언제든지 모두 다 사형을 벌써 사형 선고를 받고 있고 이럴 때니까 사람들이  잡심이 없고 다 마음이 간추려졌고 또 긴장되어 있을 때라서 잘 교훈을 들을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한 달 동안 설교하고 난 다음에 그 말씀을 겨우  시작하다가 말았습니다. 시작하고 끝을 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끝낸 게  아니고 그날 아침에 그 사람들도 오지 안했는데 `오늘 아침으로서 이제 할 말씀  다 했기 때문에 이 마하면 환난 다 이길 수 있으니까 이제는 이 집회는 오늘  아침으로 끝난다' 선언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이 뒤에 왔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막혀서 집회가 끝난 거는 아닙니다.

 이런데 여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데  대해서 일반적으로 심령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데, 무슨 복이 있느냐? 천국이  제것 된다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해석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요 거의 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깨달음이 그와 좀 다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심령 가난한 자가 어떻게 해서 심령이  가난해졌냐? 심령이 가난해진 그 이유를 그 다음에 말하기를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해졌다 그렇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천국이 무엇이기 때문에 천국이 제것이 되고 보니까 심령이  가난해졌는가 하는 거게 대해서, 천국은 첫째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또 그 나라에는 불법이나 불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요. 또 죄와 병과 고생하는 것과 죽는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없는 나라는 그 나라가 무슨 세력을 가지고 그렇게 되는 그  세력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된  하나님의 법으로 모든 것이 비판되고 평가될 때에 아무런 흠과 점과 주름 잡힘이  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속성대로 된 나라요, 하나님의 신격과 신성대로 된 그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는 사망이 없습니다. 또 병드는 일이 없고 고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계급이 굉장히 계급 차이가 있지만 그 계급 차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분쟁이 없습니다. 지금 뭐 우리나라에서도 데모 같은 거 일어나는 것은  그런 거 일어나는 것이 혹은 그 잘못된 것 바로 잡기 위해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도 있기는 있지만 대개는 서로 시기해서 자기가 그거 한번 높은 걸 잡아보면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잡고 있으니까 시기와 질투하는 그런 데에서 생겨진 것이  많지 실은 비판적으로 평가적으로 이는 아무래도 해야 되겠다, 고쳐야 되겠다  하는 그런 걸로써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고귀한 그런 참 존영한 지위도 있고, 또 아주 수치스러워서 불  가운데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위치도 있고 이렇게 하늘나라는 차이가 심히  많습니다. 기본구원은 차이가 없지만 건설구원. 곧 행위구원. 자체가 성화된 이  성화 구원에 있어서는 너무도 그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서로  시비나 분쟁이 없습니다.

왜 없는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행함을 자기가 똑똑히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의 행함을 똑똑히 알고 있고 그때는 다 마음이 깨끗하고 참돼서 모든 것을  정평하고 정가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치를 당연하다고, 하나님의 보응이  공평되다고 이렇게 찬양을 했지 내게는 이렇게 좀 불만스럽다. 불공평하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광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다 바르고  깨끗하고 옳고 진실하고 이렇게 하기를, 깨끗하기를 하나님처럼 깨끗하고  온전하기를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사랑의 봉사하는 것이나 인내하는 것이나  충성하는 것이나 사랑의 그 역사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모형해  가지고 예수님과 다 같이 닮아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나타났는데 그리스도와 또  하나님이 도성인신해 가지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는데 예수님과 이렇게  삼위일체가 어떠하심을 그때는 알게 됩니다. 그때는,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는  거와같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직접 대면하는 거와같이 모든 것이 다 바로 환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는 모든 사람의 행위가 대낮에 벌거벗은 거와 같이  환하게 그 비밀이 다 드러난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어떠하신 분을 차차 알고 보니까 또 자기도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나라에 가니까 알게 됩니다. 알게 돼서 자기가 자기를 똑똑히  알기 때문에. 자기에게 대해서 어떤 그 천한 자리에 있어도 나는 이 천한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불평이나 불만이 없고 원망과 시비가  없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어떤 존귀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분은 존귀한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평 정가가 자기에게 인식되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그분도 참 당연하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응시키신 것은 지극히 공평되다  이렇게 하고 다 찬양을 했지 거기 조그매라도 찝찝한 그런 것이 없을 만치  그때는 다 광명의 나라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보여지지, 하나님이 또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제사장 선지.

왕직을 주려고, 노력하신 것이 어떠하며, 우리에게 이 직책을 주려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모든 부요를 내어 놓고 오신 것, 또 지극히 높은 데서  낮아지신 것, 또 땅 위에서 온갖 것을 참고 견디고 참 상한 갈대도 꺽지 안하고  꺼져 가는 등불도 그지 안하시고 이제 주님이 그렇게 인자하시고 세밀하시고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지시고도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참고 견디신 모든 것이 다  나타나 있고, 이렇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그 사랑의 온전함과 인내의 온전함과  봉사의 온전함과 진실함에 온전함과 원수를 구원하려는 그 모든 희생의 온전함이  그 나라에는 다 본 떠서 이 온전함을 본받아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닮은  것만치 다 그 나라에 가 있습니다. 닮은 것만 가 가지고 있고 본받은 것만 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화 된 거, 그 속성화 봉사화 사랑화 희생화 된 모든 화된 거  그런 것만 가서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요, 또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든지 죄 지은 것이 택한 자들에게는 형벌 받을 것으로서 와 있지는 안하지만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다 대형하신 그 대 형벌 받으신 것이 환하게 나타나 있고,  자기의 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함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것이 다 아픈 데가  나으면 흉터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흔적을 다 알게 된다 말이오.

 흔적을 다 알고 있고 이랬는데, 어떤 사람은 참 그대로 만일 회개치 못 하고  갔다면 이런 죄 짓다가서 회개하지 못하고 왔다 이렇게 돼지지만서도 그런 것을  참 자기가 깨닫고 잘못된 것을 심히 통회해서 세상 있을 동안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어떤 공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 공로를 힘입어서 그 모든 것이 다 고침을  받고 완전히 새로워짐을 받았다 그거요. 새로워짐을 받은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그것이 영광이 되지 그거 수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흥 강사들마다  교역자들마다 설교할 때에 자기가 제일 흥했던 그 점이 있는 것을 자기가 완전히  고쳤으면 말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강단에서 말을 하고 자랑삼아  말합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아주 흉하고 추접하고 악한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렇게 이렇게 사함 받고 이렇게  변해서 새사람됐다 하는 것을 오히려 과거에 잘못됐던 것을 현재 예수님의  대속으로 고침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거리가 되고 다른 사람도 볼 때에 참  기뻐 찬성을 하개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참 예수교는  이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하다, 감탄을 받지 그게 수치될 것이 없는 그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것이 다 그때에는 벌거벗은  거와 같이 환하게 드러나게 되는 그 나라입니다. 예수님에게 대해서도  보여집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도 말했지만, 그러면 하나님과 자기가 하늘 나라 가면 더  가까워지겠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멀어지게 된다 말은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서 아는 것이나 바라보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나 그분을 믿는 것이나 그분에게 대한 것은 점점 견고해지고  강해지고 더 확고해집니다. 그분에게 대 대한 깨달음이나 생각이나 믿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나 바라보는 것이나 모든 것은 더 견고하고 확고해지고  확고해지지만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 살펴볼 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가 그때에  많이 보여지고 보이지 않던 자기가 환하게 보여지기 때문에 자기는 한없이 낮고,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도 자기는 한없이 낮고 주님은 한없이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점점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그것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 멀어지는 거는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잘못하면 오해하기 쉬운데 내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점점 더 알게 되니까 더 믿게 되고 더 의지하게 되고 더  바라보게 되고 더 숭배하게 되고 이렇게 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점점 평가하는  것이 아주 점점 정평하고 정가하니까 그 가치가 허무해서, 또 깨닫고 나서 보니까  또 더 허무하고. 깨닫고 나서 보니까 더 허무하고 자꾸 심령이 밝아져 갈수록  자기의 가치는 점점 허무한 것이 드러나서 진상대로 드러나니까 그 허무하다는  것이 자꾸 발견이 되고, 하나님은 자기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의 그 진상이  차차차차 보여지니까 점점 그분에 대해서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무한하신 분이신  것을 자기가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점점 커지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점점 작아지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와의 그 비교되는 그  간격은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복음 운동하다가. 진리를 말하다가. 선지자의  직책을 하다가 버림을 당해 가지고 그때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버림을  당해 가지고 밧모 섬이라는 그 섬에 귀향을 갔습니다. 거기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안 사는 무인도인데. 무인도로 그만 추방을 당해서 그 곳에 가서 있으면서  참 외로와지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 졌는데, 그 중에서도 주일날을 만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충만히 받기를, 과거에도 사도 요한이라면 사도 중에서도  영감에 뛰어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인데, 그때에 성령의  감화가 와서 자기 심령이 밝아지니까 주님을 보고 그가 발표하기를 `머리털이  희어서 눈과 같다' 그렇게 주님에게 소속한 거, 주님 머리털이라 하니까 주님  본체를 말하는게 아니고 본체뿐이 아니고 주님에게 속한 거. 머리털은 자기 몸에  속한 거 아닙니까? 이거 상징적으로 말한 건데, 주님에게 속한 거. 주님이  운동하신 운동은.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은 주님이 역사하신 역사는 그 역사의  범위가 한없이 넓은 것을 심령이 밝고 보니까 보여졌다 말이오. 한없이 넓고 그  하신 범위라든지 그 세밀도 무한히 세밀하고, 그 범위도 무한히 넓고, 또 높이도  길이도 깊이도 그 무한한데 무한한 저게 소속한 거 털끝만한 것도 전부 다  완전하고 거룩하고 영원하고 불변성이어서 그거 무슨. 깨끗함으로도 완전하고  사랑면으로도 완전하고 진실면으로도 완전하고 희생면으로도 완전하고  봉사면으로도 완전해서 그분에게 속한 것은 털끝만한 것도 그렇게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너무 완전하고 완전하니까 발표하기를 `눈과 같이 희다' 그렇게  발표를 했고 또 `주님의 얼굴을 보니까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거와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얼굴을 보니까 바시서 눈이 바시서 보지 못하는 거 눈이 부셔  보지 못한다 말은 그래도 자기가 땅 위에 있을 때에는 자기 행위가 소만하면  주님에게 대해서 할 만한 일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렇게 뭐 부끄럽고  그렇게 수치스럽고 주님 앞에 그렇츰 못 견딜 만치 그렇게 놀랄 만치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은 느끼지를 못했는데, 성령의 감화가 와서 자기의 심령이 좀 더  밝고 보니까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것은 자기가 너무도 그 무한한데 안다는  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알고 느낀 것이 그것이 뭐 너무 빈약하고 너무  허무하고 너무 정확지 못했기 때문에 낯을 들지 못하겠고 또 자기가 주님에게 한  것은 너무 과대 평가해서 자기에게 대해서는 너무 지나치게 평가를 했고,  주님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적게 평가를 했고 또 그렇게 보니까 주님의 그 하신  일이 자기가 부끄러워서 도무지 볼 수 없고 생각해 볼 수도 없을 만치 그렇게  돼져서 사도 요한 이가 그때 기절해서 죽은 자와 같이 됐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가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은 주님이 무슨 위협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그 평가적의 주님의 그 완전하심의 완전하신 사랑, 완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심 희생하고 봉사하심 예수님이 자기에게 대한 일을 보고 자기가  주님에게 대한 것이 너무도 거리 멀고 너무도 버릇없고 너무도 망령됐고 너무도  참람되고 가증스러운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가 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위로하시기를, `두려워 말아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다.'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네가 나를 만났을 때에 나를 더러  항거하기도 했고. 나를 만만히 여겨서 내 품에 의지하기도 하고 내 무릎에 베고  드러눕기도 했고, 네가 또 나한테 기대기도 했고 그렇게 할 그때에 내나 그 내가  내다. 그때 네가 나를 그렇게 만만히 여긴 그럴 때 내나 지금 내나 꼭 같은 낸데,  그럴 때에 네가 지금 비해서는 말할 수 없을 만치 그렇게 아주 낮았고 천했고  더러웠고 그렇게 불완전했었는데 그래도 내가 그때에 너를 보고 너를 사랑했고  이랬는데, 지금 네가 이만침 고쳐서 회개하고 이렇게 깨끗해질라고 하는데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하는 위로를 하시면서 `네가 눈이 밝아져서 지금 딴 나로  보여지지 그때 내나 지금 내나 꼭 같은 내라' 하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면서  위로를 하셨습니다. 이래서 두려워마라 하면서 손을 얹고 안수를 하시고 기도를  해 주셔서 그 사도 요한이 비로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그 자리에  그렇게 기절해진 것은 뭣 때문에 기절했느냐? 주님을 봤기 때문에 기절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 잡고 난 다음에도 그만 그 무릎 아래 엎어지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는 그것도 주님을 평소에 보던 주님과 달리  주님을 보는 그 심령의 눈이 조금 밝아지니까 그 베드로가 주님 앞에 꺼구러져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나는 감히 주님을 모실 만한 자가 못 됩니다.' 내가 주님  모시고 다니며 주님의 그 영광을 얼마나 가뤘으며 얼마나 망령을 부렸으며  얼마나 버릇없이 날뛴 것을 자기가 탄식을 하면 서 그 앞에 꺼꾸러졌던 것입니다.

그래 주님이 다시 위로하는 말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이제부터는  사람의 수입을 네가 네 수입으로 삼으리라.' 하는 그 말씀을 하고 위로를 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그 위로 받고 즉시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사도 요한이가 주님을 볼 때에 또 바울이 그가 점점 말하기를 `나는  괴수 죄인이라'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난자라'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하는  것은 그의 눈이 밝아서, 차차차차 눈이 밝아 가지고 하늘나라에 이루어져 가지고  있는 모든 현상들과 또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과 그런 것을  그 눈이 밝아서 조금 심령의 눈이 밝아 가지고 보다 보니까 자기가 진정한 말을  한 것이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요, 만삭되지 못해 낳은 자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주님이 자기에게 이렇게 하셔 가지고 이렇게 하라 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증거를 다 전달하라는 것을 전달하지 못했고 보여 주라는  걸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는 전부 하나님의 도를 가로막은 것뿐이지  하나님의 도를 전한 것이 너무도 희박하고 또 그것이 다 정확지 못했고 방해한  것만 많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기가 간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은 것만치, 닮은  것만 같고 하나님을 본받은 것만 같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것만 같고  전부이 하나님의 이 대속을 인해서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성화된 것만 가  가지고 있는 그 나라를 보니까 너무도 이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모형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너무도 허무하고 이래서, 심령이 가난하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것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자꾸, 빈약하니까 마음에  갈급이 생겨지는 거, 돈에 가난한 사람은 그 사람이 뭐 밥먹을 만한 돈이 있어도  자꾸 돈이 지금, 돈에 갈급하니까 돈이 적다 싶으니까 돈을 더 모을라고 모을라고  자꾸 애를 쓰고 돈에 가난한 사람은 돈이 있어도 자꾸 돈이 자기에게 만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필요성이 있는데 모자라니까 자꾸 가난성을 가지는 것이고.

지식에 가난성 가지는 사람은 지식을 남보다 많이 가졌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  되고 지식을 더 필요하니까 자꾸 더 가지고자 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가난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곧 지금 뭐 내가 죽어 가면서 도 조금만  생기만 돌아오면 또 책들고 앉아 가지고 아무래도 내가 알아 야 되겠다. 좀  배워야 되겠다, 자꾸 이렇게 가난한 것처럼 그 심령이 하늘 나라가 자기 것이  됐고 하늘나라가 보이고 하늘나라의 그 사실을 자기가 깨닫고 느끼고 보니까  자기에게 대해서는 모든 것이 다 갈급하고 가난한 것밖에 없는 것을 가리켜서  여게 심령이 가난하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주님을 보고 그 심령이 가난해서 기절했고, 베드로도  예수님이 그물을 깊은 데로 던지라는 그 말씀을 보고 과거에 제가 그렇게  비웃으며 `주님이, 선생님이 말하지 때문에 내가 던지지요. 한 그때를 생각하니까  어떻게 그 기가 막힌지 그 앞에서 기절을 했고 사도 바울도 그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죽도록 충성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으니까 얼마나 뭐 충성했습니까? 그만하면 만족 만족일 터인데, 이제 그  심령이 밝아지니까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전설에 들리기는 나는 십자가에  정식으로 주님 박혔는데 그래 박힐 수 없으니까 나는 꺼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  달라 그래 가지고 베드로는 십 자가에 꺼꾸로 못 박혔다 합니다. 주를 위해서  죽지만. 너무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자기가 너무도 부족해서 부족함에 견디지를  못해 가지고 그 사형장에서 나일랑 꺼꾸로 못박아 달라 이렇게 간청을 해서  꺼꾸로 못을 박았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다 이 천국이 자기 것이  되었고 천국을 바라보니까 이제 그 심령들이 다 그렇게 가난해졌습니다.

 이 가난해진 것은 하늘나라로 가난인 것이요 하나님으로 가난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자기가 만족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갈급하고 갈급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너무 모자라고 모자라고, 하나닢께 대해서 너무도 자기가 가질 것은 많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가질 것은 한없이 앞에 보니까 가득히 보여지고 자기 가진  것은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서 가난한 것이요, 모든 그도들에게  대해서 가난한 것이요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서 가난한 것이요, 하나님이 보니까  말씀하신 것은 털끝만한 것도 거짓이 없고 그대로 모든 존재에게 이루어져  가지고 영원 무궁세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통치를 하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한 현실에서 한 말씀을 지키므로 그때에 관련된 모든 만물들은 다 구원  얻어서 만물들이 다 새릅게 될 때에 구원을 얻어서 그들이 다 기뻐하고 찬양을  하고, 자기가 현실에서 하나 조금 잘못 지켰을 때에 백프로 지켰으면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백 프로 자기로 인해서 구원 얻게 됐고, 구십프로 지켰으면  구십 프로는 자기와 관련된 것들이 구원 얻었지만 십 프로는 멸망한 그것을  자기가 보기 때문에 기가 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법칙에 대한 그런 데 대해서 모두가 다 갈급하고 가난성 가난성은  없다 말이오, 없는 것 사람이 아침밥 먹을 것만 있어도 부자인 줄 알아서 그날  그만 툴톨 털어먹는 사람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이 억 대가 있어도 아이구  이것 가지고는 내가 앞으로 쓸 일이나 모든 것이 부족 한데 해서 억대가 있어도  다른 사람 그저 한 만 원 가진 것만치도 그 사람은 부요감을 가지지 못하고  그렇게 가난의 갈급성을 가지는 것이 그 사람은 돈에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게 심령이 가난하다 말은 심령이 왜 가난하나, 무엇에 가난하나,  하늘나라가 자기 것이라 하늘나라를 보다 보니까 자꾸 가난해지는 사람. 그것을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베드로 후서 3장에도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에 있는 모든 일들이 다 드러날 터이니까 네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네 마음을 옮겨서 예수님이 앞으로  재림하실 그 재림하실 그때에 네가 그 광경과 그 형편을 생각하는 것을 지금  네가 생각하는 자가 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다음에 사람이 죽을 때에 생각하는 것을 지금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죽음을  보면서 심령이 좀 가난한 사람이 이 자기에게 대해서는 과소 평가가 되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과대 평가가 되어지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과대 평가한 것이 느껴지는 그런 것이 후회가  되어지고. 이래서 자기가 죽을 때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때에 당해서 당황하는  사람이 되지 안하고 그때에 보고 느끼는 것을 지금 보고 느끼는 사람이 되라 한  말은, 그때에 보고 느끼는 것과 지금 보고 느끼는 것이 너무도 차이 있어서 그때  보고 느낄 그것이 네것이고 그것이 다 정상이기 때문에 그때 보고 느끼는 그것을  지금 네가 느끼면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그때에 느끼는 그 느낌을 지금 가지고 느끼는 거. 또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자기가 느끼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자기가 모두  다 심판해서 보고 듣고 접촉하는 그때에 느끼는 그 느낌을 지금 가지는 그  사람이 복이 있고, 또 그것보다도 더 초월해서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하늘나라의  조직이나 모든 지위나 보웅이나 보상이나 되어 가지고 있는 그 나라를 보면서 그  나라에 대한 그 때에 자기가 견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갈급을 가지고  자기가 후회가 되고 자기가 빈약성을 가지는 그것을 오늘에 가지는 것을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도 사도 바울이 그는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마음이  탄식하면서 눌려 가지고 있는 것은 뭐이냐? 자기가 주님의 나라에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데. 그 나라에 있는 것은 세상에서 모두 다 권세를 가지고 저 잘난체  하면서 이렇게 세상 술법으로 쓰는 것은 전부 다 수치스러운 것뿐이고 그  나라에는 전부가 다 정확하고 공평된 그 나라인데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자기가  벌거벗은 자르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탄식을 했고 오늘에 지금 영원한 그 나라에  될 그것을 당겨 입어서 그때에 후회 할 것이 없는 자 되기 위해서 그 나라에서  도는 옷을, 그 나라에 오는 처소를 자기 위치를 덧입기 위해서 날마다 탄식하며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고통스러운 그런 감을 느끼는 것을 말을 바울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

 그러면 이런 심령을 가지는 사람이 복 있다는 말이니다. 이런 심령을 이런 심령  가지는 거는 어떻게 해서 그런 심령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늘나라를 보면 내가  이런 심령을 가지겠다. 그래, 하늘나라가 자기 나라가 되어 있는 사람은 다 이런  심령을 가지게 돼 있습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13장 44절에도 보면, 천국 비유에 보화를 만난 사람이 진주를  만난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보화와 진주를 삼과 같다. 참으로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라면 자기의 뭐 자기 지위나 권세나 소유나  자기의 몸도 소유겠고 자기의 생명도 소유겠는데 자기의 것을 하나도 딴데 쓸  것은 없고 이 하늘나라 이 구원에 투자할 것 외에는 투자할 데가 없다. 이 구원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여 기에 있는 것을 다 투자하게 된다. 깨달은 사람은 다  투자하게 된다. 천국을 본 사람은 다 여게 투자하게 된다. 그 비유로 보화를. 자기  소유보다 큰 보화를 만났으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지고라도 그 보화를 사면  적은 거 주고 큰 거 샀으니까 큰 수입이 된 사람이니까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땅 위에 잠깐 가진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취미나 권세나 영광이나 부강이나 이런 것들을  하늘나라를 위해서 투자하지 안할 자가 없고 다 투자하게 된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하는 말을 보화로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를 자기가 자기 것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게 된다. 가난하다 말은 자기가 어디까지 됐든지 자기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작고 너무도 자기에게 대해서는, 바로 보니까 바로 보니까 자기는 과거에  자기가 제일 잘난 사람으로 했는데 그런 것이 참 수치스러워서 견디지를  못하겠고. 이래서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진상을 본  사람이 가보니까 참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거 보니 이 세상에서 모두 다  영광이라고 권세라고 복 있다고 취할라고 하는 것은 이거 순전히 미치광이  놀음이고 비정상의 사람이고 이거는 순전히 마귀에게 끌려 가지고 완전히  비정상의 사람이 되어 있는 사람의 그 모드 비판이고 평가지 정평 정가가  아니라는 것을 또 사도 바울이 말해서 그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 전부  부끄러운 것을 영광이라고 다 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심령 가난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것이 있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는 언제 심령이 가난했던가?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일생 동안 신앙 생활해 나오면서 큰  실수를 한 일이 있었는데, 큰 실수를 해서 자기는 참 큰 실수를 해 가지고 도무지  자기는 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살 수 없는 자로 알아서  자기가 바위 굴 속에 들어 가 가지고 자기는 며칠 동안을 통곡을 하면서 참 너무  자기의 허무하다는 데 대해서 그렇게 통곡하고, 자기의 거짓되다는 것. 자기의  비에 대해서. 자기의 그 더러움에 대해서 자기의 빈약함에 대해서 도무지 자기는  뭐 아무 절망이고 도무지 살 희망이 없고 살 가치가 없고, 이것은 어떻게 참 대번  그만 죽어서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주님이 대속하셨으니 주님의 대속 때문에만  살아 있어야 되겠지 주님의 대속이 아니라면 당장에 그만 없어지는 것이 그게  제일 소원이라 하는 그런 한 토막이 있었는데. 자기의 일생 동안에 과거를 돌아볼  때에 그때가 재일 좋았고, 그때와 같은 그런 심령 가난한 때가 없어서 그때와  같은 그런 심령의 가난한 때는 자기가 어떤 큰 죄를 범하고라도 무슨 하거나  그런 심령 가난한 때를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런 마음이 심령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내가 글 쓴  것을 한 귀절 읽어 봤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진정한 기도는  뭐이냐'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여 내가 뭘 기도할지, 기도해야  될지,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또 내가 뭐 기도할 그런  자격이 없다.

 사실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내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하는 그때가  기도할 수 있는 심령이라 그런 말하는 것을 봤어요. 뭐 아주 깨달은 말했습니다.

자기는 뭘 구할지 모를 때에 그때 참 좀 진실되게 생각하고 보니까 이걸 구해야  될지 저걸 구해야 될지 뭘 구해야 될지 자기는 어떤 것이 요긴한지 자기는  모르니 주여 나를 가르쳐 주셔야 되지 나는 모릅니다. 그렇게 자기는 전 무식이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자기로 확실히 발견되는 그때가 자기가 좀 정상의 때다.

그것도 다 심령이 가난한 때인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 심령이 가난해지기를 우리가 원하고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이  가난한 것은 심령이 심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심령이 가난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디까지 충성하고도  베드로 그런 사람들이 다 순교할 때 꺼꾸로 매달리기를 원하는 그것이 심령이,  심령이 가난해서 그랬고. 바울이 말한 것도 심령이 가난해서 말했고,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봤을 때도 심령이 가난해서 그렇게 기절했었고, 모두 다 성도들이 그저  죽도록 충성하다가 순교를 당할 그 순교 지경에 있으면서도 바로 순교로서  자기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거기에서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 아니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주님 앞에 너무도 불충성했고 어떻게 하면, 순교로 만족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내가 자기가 주님 앞에 충성하지 못한 거,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거,  자기가 주님의 심부름시키는 이 복음에 대해서 감당하지를 못하고 게을한 거  이런 걸 생각해서 나는 빚진 자라 그렇게 말하는 그런 심령들이 다 가난한  심령들입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서 예수님의 구속 외에 딴거 무엇이 자기가 이게 있었으면  좋겠다. 저게 있으면 좋겠다 하는 그 고장은 우리 심령이 가난치를 못하고 우리  심령이 부요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고, 자기가 어디까지 충성해도 `아,  나는 이만하면 됐다. 무익한 종인 것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심령이 가난치를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 가난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크신 분인 거, 심령이  우리가 가난해질 때 하나님을 이렇게 어떤 분이신 것을, 크신 분이신 것을 자기가  자꾸 깨닫게 될 때 그분이 너무 한없이 크신 분인데. 한없이 크신 분을 내가 주를  믿는다고 일생 동안 한 것이 그분을 만홀히 여긴 것 밖에 없었고. 그분이 큼에  대해서 나는 그 큼의 억만분의 일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망령되고  교만하고 이런 자밖에 안 된 것인 것을 자기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크심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됐으며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됐으며 자기가 어떠한 죄인이었던 거, 자기를 보는 것이 정확하게 보고  자기의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볼 때에 자기가 느껴지는 깨달아지는 자기를  저주하고 싶은 그 마음이 있는 그것이 그 심령이 가난해지는 거,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구속받은 그 구속이 얼마나 큰 데 그 구속을 자기가 느끼고  함에 대해서 너무도 허무하고 빈약한 그 감을 느끼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거.

이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두려워할 자 가 없다'  그 모세가 산 거는 보면, 뭐 참 우리가 보면 `아이구, 어떻게 이렇게 지루해  살까?'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는 견디지 못해서 늘 하나님이 인정할 만치 이런  겸손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거석해서 벌벌 떨고, 어떤 것에도 백 번 죽으래도 백  번 죽어도 그분이 두려워서 견디지를 못해 가지고 이래 한 그 생활했기 때문에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야 할 대로 두려워 할 자가 땅 위에서 없다'  두려워하고 보니까 너무 그분에게 대해서 버릇없게 했고 두려워하지를 못했고 또  두려할 대로 두려워하고 그러니까 평생. 마지막에 죽을 때는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치 못했습니다. 섬기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정도로 감사치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모든 그 조직과 거룩하고 광명한 그 나라를 봄으로써 자기 어두운  것을 인해서 자기의 광명이라 하는 것이 참 욥이 말하는 거와같이 때묻은 옷과  같이 인간의 의는 그렇다는 것으로 이렇게 자기가 느껴지는 이런 심령이  되어지는 이것을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하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혹 목회를  해도 처녀성을 가져야 되지 할머니성을 가졌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은 처녀성은  요한 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가 지아비를 위해서 단장한 것처럼 지금이라면  내가 지금이라도 또 보자. 이 면접할 때 소박을 당 할 것이가 또 지금 뭐  결혼되기 전에 어떻게 당할까 해서 일편 단심이 자기가 거기서 흠점 들릴까  싶어서 이렇게 하는 그것이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는 그 상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왜 가난하느냐?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가난하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는 이 복은 이거는 아주 최고 의복.

평가적으로 하는 최고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최고의 복을 말 하는 이 복은  무슨 복을 말하느냐 하면 하늘나라의 복을 말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을 말한다는  것은 그 하늘나라에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하늘나라에 모든  영물들과의 관계, 또 모든 먼저간 성도들과의 관계 모든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모든 만물과의 관 계 그 관계가 이 심령이 가난한 이것이  그것을 이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게 이것을 이루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것을 보고 자기가 자꾸 이라기 때문에, 나중에 가보면 오든  존재들이 다 환영하고 동정하고 자꾸 이렇게 높이지 어느 존재가 하나 불평을 `왜  이렇게 했노? 하고 서 불만이나 불평 비쭉거리는 그런 비웃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는 그런 그 위치를 가리켜서 복 있다 그렇게 여게 말한 것입니다.

여게 복 있는 것은 세상 복은 많은 사람의 것을 끌여 들여서 자기 것을 삼은  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복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세상  복과 다른 것입니다.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존재에게 자기는 필요한  존재가 됐고, 모든 존재를 자기는 위할 수 있는 자가 됐고 자기의 모든 과거의  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이 모든 존재가 다 볼 때에 그들이 다  감사할 수 있는 그 생애였지 부끄럽거나 미안하거나 참 오히려 항거를 항의를  받을 만한 그런 일이 없는, 하나님과 모든 존재의 관계가 바로 되고 옳게 되고  바로 되어서 이제 하나님께도 한 것이 다 바로 돼서 하나님도 기뻐 만족하면서  환영을 하고, 만물들도 기뻐 만족하고. 환영하고, 모든 존재들이 다른 거 다  없어도 너 없어서는 안 됐다 안 되겠다 하면서 이렇게 환영하는 거와같은.

예수님의 지옥에 있는 모든 무리들도 주라 시인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런 평가적인 위치 평가적인 행복, 모든 존재들이 자기를 향하는. 그들이  논평하는, 그들이 평가하는 그들의 평가대로의 내가 복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분들의 비판대로의 복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분들이 내게 관계 가진  대로의 복 있는 것을 가리켜서 복 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은 어째 있느냐? 하늘나라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으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앞으로 모든 존재들을 대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복 있는 위치에 있고 불행스러운 위치나 공격받고 조롱받고  천대받고 멸시받고 대적을 받는 그런 후회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게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 이 복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심령이라는 말은, 이 심령이라는 말은 마음과 좀 다릅니다.

마음은 인적 요소, 육적 요소입니다. 이 심령이라 하는 것은 영의 요소가 아니고  이 육에 속한 요소입니다. 육에 속한 요소인데, 마음이 있고 마음보다 더 깨끗한  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마음 중에 좀 깨끗한 것, 마음이 좀 더  깨끗한 마음이 됐을 때에 양심이라고 말하고 또 양심보다 좀더 하나님과  가까워졌을 때의, 자기 중생된 영과 성령과 가까워졌을 때의 그 마음을 가리켜서  영혼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여게 심령이라고 말한  것은 영혼보다 더 자기 중생된 영과 가까워진 깨끗해진 그 마음의 부분을  가리켜서 심령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 심령이라는 것은 마음에 양심보다  더 깊고 높고 위, 근본, 양심보다 더 근본이 되고, 또 영혼보다 더 근본이 되고  마음으로서는 최고의 깨끗하고 바로 진짜가 되고 그 근원이 되는. 터가 되는  근원이 되는 그 마음을 가리켜서 요게 심령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령이 되면. 우리는 심령이 되면 가난은 전부 무슨 가난을 가지느냐? 천국  가난을 가지게 됩니다. 심령이 되면 천국 가난을 가지게 됩니다.

양심을 가지면, 양심을 가지면 자기 사욕이라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리고 자타를  막론해 가지고 평가하는 그것이 양심이고, 또 영혼이라면 자타를 망라해 가지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이 하늘나라에 하나님까지를 연관을 시켜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영혼이고, 또 심령이라 하는 것은 벌써 이 육적 요소는 요소지만 자기의  중생된 영과 성령과의 그 비취는 빛을 많이 받아 가지고 중생된 영에 가깝고. 또  성령님에 가까운, 최고급이라 할까 최선량이라 할까 하는 그런 깨끗한 마음을  가리켜서 심령이라 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써서 우리 사욕, 우리 마음 가운데는 그 육체의  소욕의 마음 자기 정욕의 마음 이런 마음이 있는데 그런 마음을 이제 우리는  신앙 양심의 마음으로 자꾸 성화를 시켜서 신앙 양심의 마음을 가치고 살아야  되겠고 신앙 양심의 마음을 이제는 점점 성화시켜서 영혼의 마음을 가지도록  이렇게 애를 써야 되겠고 영혼의 마음을 성화시켜서 심령의, 심령 심령의 마음은  마음인데 영과 연결이 된 것을 가리켜서 심령의 마음이라는 것인데, 영혼이란  것도 `혼'은 순전히 마음을 가리키고 `영'은 영의 오는 빛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빛에 우리 마음이 비추어졌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영혼이라 하고, 영혼보다도  더 깨끗한 것을 가리켜서 심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이렇게 해서 자기의 몸도 자꾸 성화를 시키고  자기의 몸도 자꾸 성화를 시켜 가지고 우리 마음은 심령이 돼야 되겠고 우리  마음은 심령이 되어져야 되겠고 심령이 돼서 우리 마음에 모든 갈급은 하나님께  대해서 하늘나라의 모든 조직과 법칙에 대해서 하늘나라 영원 무궁 세계에 모든  존재를 상대하고 모든 존재와 나는 상대가 되어 살 수 있는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면에 갈급을 가지고 가난을 가지는 것이 이 사람이 복 있다.

그때에 가 가지고 자기는 부끄럽지 아니하고 만물들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그렇게  만물에게 대해서 미안스러운 일이 없는 일이 되어 진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에  믿음 지키는 데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새 믿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해서 믿음을 많이 말씀하고 난 다음에 이제 이  팔복을 지금 증거를 하고 할라고 하는데, 믿음을 지키면 차차 차차 이제 심령  가난한 사람이 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밤에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대단히 나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 설교시킬라고, 어제 저는 그만 어제 계획을  잘못하고 한 것이 모두 가 다 틀려 버렸다 말이오. 모두가 다 그만 이리  삐틀어지고 저리 삐틀어져 틀려 가지고 계획이 틀어져서 제가 어제 너무 좀  쉬지를 못해서, 누워야 되는데 눕지 못하고 이제 그만 누울 자리가 없어 눕지  못하고 이래 가지고 나중에 오면서 아무래도 그만 도무지 증거할 수가,  증거할라고 넥타이를 매고 이래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리 올라해도 오지 못해서  증거를 못 했습니다. 못 했는데 어제 ○○○목사님이 증거를 했는데 잘 증거를  하고, 그 깨달은 것이 있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깨달았으면 됩니다. 깨달은 거.

 재독할 때 들었지만 우리는 셋만 있으면 됩니다. 셋만 있으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실행하는 실행과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내가 그대로 실행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새 늘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전능이요 만능인데,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다 천해지고 신앙  성공을, 구원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그들에게 없었습니까?  믿음이 없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까, 그들에게 행함이 없었습니까,  무엇이 없었습니까? 예? 행함이 없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행함이 없었습니다. 오늘,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 그가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들도 자꾸 말하니까 믿는 믿음도 있고 또 말씀도  있는데 행함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행함이 없어서 문제인데, 행함이 없어서 문제인데. 이러니까 믿음 있고 말씀 있고  행함 없어 문제인데, 행하면 됩니까? 행하면. 여러분들이 요거 아십시오. 행하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행하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이러면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없어졌으면 그때에 행하니까 믿음이 없어진 그 믿음을 다시 갖추어 가질라고  애를 쓰면 믿음이 가져집니다. 믿음을 가져지고 보니까 또 행함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걸 가지고 또 행할라 하니까 또 행함이 안 되고 이라다가 나중에  행하니까 또 믿음이 없어질라 합니다. 이래서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은 다  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가 믿는 믿음은 다 가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행하지를 안합니다. 행하지 안 할 때는 이 믿음이 언제든지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행할 때는 믿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11장 요한 복음 11장 20절 이하에 보면 있습니다. 20절 이하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는 일을 하다가 믿다가서 또 닥치니까 또 안 믿고 또  예수님의 말씀 듣고 믿다가 또 닥치니까 또 안 믿고, 또 예수님 말씀 듣고 또  믿기로 작정하고 닥치니까 또 안 믿고, 그렇게 중복하기를 세 번이나  중복했습니다. 세 번이나 중복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썩어 냄새가 납니다' 이럴  때에 주님의 말씀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하는  그 말씀 듣고 새로 믿음이 생겨 져서 돌을 옮겨 놓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가 실행을 하기 전에 가진 믿음을 믿음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좋은 믿음인데, 실행하기 전에 가졌던 그 믿음은 실행을 하면 그 믿음이  없어집니다. 없어질 때에 그때에 낙망하지 말고. 믿음이 없어질 때에 그때에 이제  다시 그 실행하면서 믿음을 갖추어 가집니다. 믿음을 갖추어 가지면 믿음을  갖추어 가지려고 애를 쓰게 되면 실행은 지나가 버리고 실행이 없어졌습니다.

실행할 시기가 지나갔습니다. 지나가고 나면 나는 믿음이 있으니까 `이제는 내가  믿겠다. 이제는 믿겠다.' 이랬는데 그 다음에 또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또  실행을 할라 하니까 믿음이 또 없어집니다. 이렇게 어떻게 중복을 해 가지고  비로소 나중에는 자기가 믿는 일을 실행을 해도 그 믿음이 요동치 안하고 말씀과  실행과 믿음 이 세 가지가 요동치 안하고 이 셋이 합해 가지고 하나가 되어지는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와서 역사하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는 것은 연습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지 연습 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꾸 애를 쓰는 사람은 언제 그때 믿음이 실행에서 없어지는  그런 기회를 몇 번이나 하니까 없어지니까 또 새로 만들고 새로 만들고 새로  만들고 자꾸 이래서 믿음을 자꾸 만들고, 이러니까 믿음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믿음을 쓰고. 이러니까 믿음의 효력이 나와 가지고 우리에게 돼지는데,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말씀 가지고 믿음 가지고 실행 안 해 보는 사람은 쓸 데 없는  믿음, 실지를 닥치면 아무 실력 없는 그 믿음을 가지고 안심을 하고 지금, 앞으로  환난을 기다리고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에, 말씀을 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 연단이 되느냐  하면 자기가 실행을 하면. 실행하면 뭐이 부딪혀 옵니다. 실행을 하면 그  어려움도 부딪혀 오고 실행하면 아름다운 미도 부딪혀 오고, 미의 유혹도 오고  어려움의 그 협박도 오고 이렇게 오게 될 때에 자기가 이 믿음을 그만 가지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믿음을 뺏겼다 말이오. 뺏겼으면 다시 자기가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쓰고 보니까 벌써 기회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래 실행할 일이  없어. 생활할 일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믿지요. 얼마든지 믿지만. 이거는 필요 있는  현실에, 현실에 필요 있을 때는 닥치면 없어지는 믿음. 또 필요 없을 때는 있는  믿음, 이 믿음 가지고 있다가 자꾸 이렇게 반복적으로 이렇게 연습하는 가운데서  마지막에는 그 믿음이 실행하는 그 단계에 어떤 유혹이나 어떤 두려움이 와도  요동치 않는 그 믿음을 자기가 가져서 실력 있는 믿음을 가져 이 세 가지가  성공할 때는 밤중에 성공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가 밤중에도 하나가 돼 가지고  통과할 때에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대로 실행하지는 안하고 그냥 믿는다고만  하는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일 닥치면 다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꼭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으로써  연습을 하면서 실행해서 자기가 생겨진 믿음이라야 그 믿음이 연단 있는  믿음이요, 실력 있는 믿음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합이 되면, 세 가지가 합일되면. 세 가지가 합 해 가지고 합일, 일행이 돼. 합  일행이 돼. 합해 가지고 새 가지가 삼합 일행이 되면 우리는 다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깨닫고, 이렇게 되는 데에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됩니다. 자꾸 이러면,  제일 처음에, 제일 처음에는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우리는 육체의 소욕의  마음입니다. 알겠습니까? 육체의 소욕의 마음이요 주관의 마음입니다. 주관의  마음은 자기을 위주한다 말이오. 주관의 마음보다 우리가 자꾸 그 마음이 이제  성화돼 가면 무슨 마음이 됩니까? 양심의 마음됩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게 사가 없는 거요. 자타에게 사정이 없이 자타를 초윌해 가지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논평하고 평가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아무래도  양심은 마음끼리만 마음 요소뿐이요 양심이 이제 중생된 영의 그 빛을 받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합니까? 영혼. 그 영혼이라고 쓴 데 있습니다.

영혼이라 말이나 말의 그 원어는 다 같지만 실은 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란 말이 뭐이요? 뭐입니까? 프뉴마입니까? 뭐입니까? 저 ○○○목사님, 예?  프시케? 그래 영혼, 영혼과 자기의 또, 그것보다도 더 나은 것은 심령이 더 장성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자꾸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이렇게 영에게 가까워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거는 심령이라는 그 말은 그것은 곧 영이 아니지만 영의 그 빛을  받은 그 마음을 가리켜서 심령이라 그러면 심령은 육에 속한 것은 육에 속한  것이 지만 벌써 중생된 영의 그 영향을 받아 가지고 있다 말이오. 영향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천국을 사모해. 그러니까 모든 비판과 평가를 천국을  표준해 가지고 비판과 평가를 하다 보니까 자기 심령은 자기에게는 전부  가난밖에 없고 부족밖에 없고 갈급 밖에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심령이 가난한 것은 자기에게 대해서 너무 허무하고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자기가 지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것은 너무 풍부하고  무한히 있기 때문에 그 무한한 것을 자기가 갈급한 그 양 사이에 끼어 있는.

자기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가진 것이 빈약하고 자기에게 필요 한 것은 한없는  양이 필요한데 한없는 양을 이제 주님에게 있으니까 한없는 양을 자기가  갈급해서 가지고자 하는 그 경계에 있는 그 마음을 가리켜서 가난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 가난성이 없으면 신앙 생활 못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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