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8 11:48
심령가난-심판에서 사는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1절∼3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때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교훈하신 것을 모두 다 말하기를 산상 보훈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산상에서 교훈하신 보배라 그래서 산상 보훈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산에서 교훈하시면서 끝까지 산에서 교훈하신 그 교훈을 종합해서 모두 다 산상 보훈이라. 산에서 훈계하신, 교훈하신 참 보배로운 교훈이라 그렇게 말들하고, 또 황금률이라 그렇게도 말합니다. 황금률이라. 황금률이라 말은 정금률이라, 이는 율례 율례 중에 참 정금같은 율례라. 법칙과 모든 그 조직이 이는 참 최고의 조직이요 깨끗한 율례라 해서 황금률이라 그렇게들도 말을 합니다.
2절에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이 팔복중에 첫째 복으로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게, 복을 말한 여게 여덟 가지를 말했는데 이것을 산상 팔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여게. 복이 있다 하는 그 말은 최고의 복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음 받은 피조물인데 피조물이 피조물로 인연해서 피조물과의 그 모든 관계라든지 또 소유권이라든지 위치라든지 그런 것도 다 복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에 직공들이. 제가 차를 타고 요새 양산동에 갔다 오면서 보면 ○○산업이라는 그 산업이, 보니까 간판이 있는데, 나는 그거 똑똑히는 내가 그거, 그 사람이 알고 말하는지 모르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산업에 직공이 한. 얼마? 이만 명이라든가 이십만 명이라든가? 그렇츰 많은가 몰라. 이십만 명은 안 될 건데? 그렇츰 직공이 많다고. 그러면, 거기서도 제일 복 있는 위치가 있겠습니다. 복 있는 위치가 있는 것은. 그 회사에서 제일 요긴하고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위치를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중요하고 그 회사의 흥망성쇠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그런 아주 요긴한 그 직책이 있겠습니다. 그런 것은 다 인인 관계의 복입니다. 또 무슨, 월급도 많으니까 모든 생활 또 윤택할 것이고, 또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겠고, 또 권위가 있겠고 그 안에서는 그 사람의 그 하나의 기능으로 모든 사 그들이 살다시피 하니까 영광도 있겠고 그런 것도 다 복입니다. 복인데, 그런 복은 땅에 속한 복이요 피조물끼리의 관계된 복입니다.
여게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복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복이라 말은, 이제 그 ○○산업을 하나 들어 가지고 이야기한 거와같이, 이 우주와 영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집이라고 볼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업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기독자들을 하나님의 기업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에베소 1장에도 보면. 이렇게. 이 우주와 영계는 하나님의 업체요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또 어떤 데는 하나님의 농장이라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이랬는데, 그 ○○산업에 이제 말한 대로 제일 요직에 있는 그 사람이 거기서는 복 있는 사람이요, 또 요직에 있어 가지고 아이들 말로 똥차 모양으로 거리끼기만 거리끼고 그 자리 앉아 가지고 그 회사에도 손해를 보이고 모든 사람에게도.
회사가 점점 잘 못되면 모든 사람의 생활이 다 곤고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참 그 지위라 것이 큰 죄악이 되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 있음으로써 그 사람으로 인해서 사장도 유익을 보고 성공을 하고, 모든 직공들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그 생활이 윤택해 가고, 또 그 회사만 좋은 게 아니라 그 회사에서 모든 것을 잘 연구해 가지고 가장 좋은 걸 발명하고 제작해 내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다 그 혜택을 입어서 크게 도움이 되고 잘 살 수 있는 이런 사람이라면 참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겠습니다. 그 회사에서도 정금같이 생각할 것이요. 모든 많은 직공들도 '저 사람 아니면 우리는 망한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요, 또 모든 시장에서도 `그 회사에서는 나온 제품이 어디 있느냐' 찾아다닐 것이요, 또 찾아서 사 가지고는 크게 유익을 보기 때에 이거 참 아주 제작을 잘했다고, 이거 연구한 사람이 수고를 많이 했다고 모두 다 칭찬과 존경을 할 것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게 `복이 있나니'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그 기업체에서, 이제 인용해서 비유로 말한 거와같이, 하나님의 기업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모든 나라, 조직 거기에서 참 없어서는 안 될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 그런 뜻을 가리켜서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여게 복이 있다 말씀을 잘 그만하면 조금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러면, 복이 있다. 영원 무궁 세계에서 그 사람이 아주 요긴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사람이라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될 만치 중요한 사람이라. 또 그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교회와 영계와 우주가 그 사람으로 인해서 모두 다 혜택을 받고 복을 받고 유익을 본다 하는 그런 복을 가리켜서 여게 복 있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복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복이 있는가? 예수님이 천상 천하에 모든 존재 중에 제일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존재가 됐기 때문에 복이 있고, 또 모든 존재들이 다 그 혜택을 입고 있음으로써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에 복이 있고, 또 모든 존재 가운데에 가장 깨끗하고 지능적으로 구비하고 온전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복이 있다 말은 예수님과 같은 복이니 예수님과 같이 이 긴하고 중요하고 모든 존재에게 필요하고 끼치는 혜택이 많으며 또 돕는 그 봉사의 것이 많은. 예수님과 같이 그런 복을 가리켜서 여게 복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은 일반 세상이 말하는 그런 아주 일반적인 그런 저급의 복을 말한 것이 아니고 이는 참으로 평가적인 복. 평가적인 복이라 말은 또 무슨 말인고 하니, 그것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비판하고 가치를 따지고 따지고 따져 보니 제일 그가 귀하다 하는 그런 복을 가리켜서 평가적인 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말도 자꾸 도가 높아져 가면 부득이 말을 아무리 쉽게 할라고 해도 쉬운 말로써는 표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 차차차차 어렵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배워 나가면 단어도 배우도록 그렇게 해서 자꾸 해야 말귀를 알아듣지 그리 안하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어떤, 내가 말 들으니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아주 유식한 사람이요 대학 교수인데, 와서 설교를 듣고 `나는 도무지 그 무슨 말인지 들을 수가 없다. 전연 나는 뭐 죽어도 못 알아듣겠다'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 그라더니만 어느 한 시간에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을 본문을 읽으니까 `아마 오늘 설교는 이런 이런 윤곽으로 짜이고 이런 조직으로 해 가지고 설교를 하실 것이다' 대단히 명철한 유식한 사람이니까, 그랬는데, 그날 설교를 들으니까 아주 그만 자기 생각이 완전히 그만 정반대로 뒤집어 놔 버렸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말귀를 알아듣는 분이라. 말귀를 알아들어. 그러니까, 그런 말은 자기가 알아듣지만 처음에는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쓰는 말이 다 일반 쓰는 그런 것보다도 신학 술어도 있고 또 제가 만든 술어가 많기 때문에 더군다나 더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그 말을 잘 알아 들을라고 하는 데에는 무슨 말인가 그 말귀를 알아 들어야 되지 그리 안하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같이' 이래 버리면 아브라함같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아브라함을 알아야.
아브라함과 같다 하니까 `아, 이렇다는가 보다' 이렇지, 아브라함을 전혀 모르는 사람, 아브라함에 대해서 그 전기를, 아브라함은 어떻게 어떻게 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아브라함같은' 하면 그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오르기 때문에. 아브라함 같다는 게 아브라함이 똥인지 아브라함이 개인지 아브라함이 보통 죄인인지 의인인지 뭐인지 모르니까 아브라함 같다 말을 어떻게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자꾸만 들어서 성경을 근거 해 가지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읽고 해야 알아듣지 그리 안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이제 복이 있다는 이 복도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는 그만하면 알 것입니다.
○○산업의 직공 중에, ○○산업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츰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해석을 했습니다. 그 해석도 좀 세상이 보는 데에는 조금 다른 것은 거기서 평안하고, 놀고 평안하고 월급 많이 받아먹고 수월하고 이런 사람이 복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해석한 것은 거기서 제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제일 노력을 많이 하고 모든 사람에게 끼치는 혜택이 많고 심지어 그 회사 밖에 제품을 접하는 사람들까지도 다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요긴한 그런 기사 자리에 있고. 요긴한 기사 자리에 있고 요긴한 행정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회사는 거게 기사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 회사가 망하고 흥하고 하는 것이. 기사가 그 회사의 생명입니다. 그 제품 하나를 보면 이 회사가 앞으로 되겠다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그 회사의 모든 행정 하나를 보면 이 회사가 망하겠다 흥하겠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의자 나무를 살 때에 ○○목재에 가 가지고 의자 나무를 사 왔는데, 갔다 온 사람들이. 내가 이리 저리 이야기를 해 보니까 그 조직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이 회사는' 이 조직으로 이 회사가 잘 됐다. 조직으로 잘 됐다' 그런 말 제가 했습니다. 지금은 깨졌지만. 조직으로는 잘 됐는데 그 조직에 대한 중요한 어떤 인물이 하나 있다가 그 인물이 없어지면 그 회사는 망하고 맙니다. 조직이 하나 잘못돼도 망하고, 그거 행정이라는 것입니다. 행정이 잘못돼도 망하는 것이고.
기사가 좋은 것은 발명해 내가지고 참 요긴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요긴해야 그거, 요긴한 걸 발명해야 회사가 되지 그 회사에 돈벌이만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조금 있다가는 없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공명이라 하는 것이 권리를 잡고 있고 평가적으로 모든 일이 돼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복이 있다 그 말은 땅에 없어질 것 가운데에서 그런 것이. 없어질 거 가운데에서 없어걸 것으로 그런 게 아니고 없어지지 안할 영원 무궁한 것으로,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 그때에 가장 요직에 있을 사람이요, 가장 필요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도 제일 필요있는 사람이요 모든 피조물에게도 제일 필요한 그런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여게 복 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에게 제일 필요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제일 필요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복 있는 분이십니다. 가치있는 분이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여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심령 가난한 사람은 이런 복이 있다.
이 복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가치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환영하고 아끼고 높여 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복에게 시기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 시기가 붙어 있습니다. 시기가 붙어 있는 것은 그가, 그가 복된 그것이 그에게만 복되지 그가 복된 것이 내게는 복되지 안하기 때문에 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복된 것이 내게도 복이 되고, 그의 복이 계속 돼야 내게도 복이 계속 되겠고 그로 인해서 내게 유익이 된다면 그는 절대로 시기가 있을 수가 없고 그를 자꾸 협조해서 이루어지고 돋아지고 강해지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질 것인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서부 교회의 교인들은 다는 그런지는 모르지만 대개는 이 백 목사가 이거 일찍 죽으면 안 되겠다 하는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일찍 죽으면 이거 배우지 못해서 안 되겠다 좀 오래 살아야 이거 좀 배울 수가 있겠다 이렇게 필요성을 느끼지만 다른 교회서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백 목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 교회가 힘을 못쓰겠고 큰 교회 되지 안하겠고 교인들 다 뺏기고 이러니까 만일 죽었다 하면 아깝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제는' 감독 시어머니가 죽으니까 고추장 그릇이, 고추 장단지가 내 단지가 됐다고 아이들 말에 하는 것처럼. 이제 백 목사가 죽었으니까 이제는 이 골짝에서, 이 부산에서 이제 내가 한번 판을 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깝다고 하면서도 은연중. 죽었다 하면 기쁜 소식같이 그래 속에서는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그 이유는 내가 혜택을 입히는 것이 서부 교회 범위 내에만 있고 그들에게 입히는 혜택이었기 때문에 그분들이 시기하고 그분들이 멸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권위와 덕과 혜택이 거게까지 미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그것이 곧 하늘나라에 가서 자기가 갖춰지는 그 범위입니다. 갖춰지는 범위. 예수님께서는 모든 존재에게 다 혜택이 입혀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마 어느 교회라도 시기하지 안 할 것이오. 예수님은 자꾸 거기서도 찬성하고 저기서도 찬성하는데 왜 사람들에게는 그러냐? 그것은 자기의 그 역사하는 그 은혜의 덕택이 미쳐가는 그 범위가 좁기 때문에 미쳐 가지 못한 자리에서는 다 그와같이 하는 것이니 그것이 자체의 그 모든 권위나 가치가 그만침 좀 낮다는 것입니다. 쑥 높아서 아주 높으면. 그 질이 높으면 그들도 자꾸 다 받아서 받을 건데 질이 높지 못해 가지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진리를 깨닫는 것이 도무지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한 탁월한 진리를 깨달아서 `그분인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 그분이 깨닫지 안하면 깨달을 수 없고 그분에게 가르침 받지 안하면 알지 못하다' 하는 그런, 만일 예수님 같은 지금도 높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모든 사람은 다 거게 배우기를 원할 거고 혜택 받기를 원할 것이고 그의 선지 위치가 `그 선지자가 없다고 하면 우리 민족은.
우리 세계 교회는 다 어두워지니까 그 선지자가 아무래도 존재해야 된다' 이렇게들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덕택이 그렇게 높지를 못하기 때문에 나와 동등인 데 그게 있음으로써 내가 세월 나지 안하니까 그게 없으면 내가 세월 나겠 다 하는 그런 정도에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아무 동등이 될 수가 없고 '그 이가 없으면 이거는 안 되기 때문에 그 혜택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그 혜택이 있어야 우리가 혜택을 보겠다' 이렇게 아주 고차원으로 이렇게 올라가게 된다고 하면 시기심이라 하는 것은 없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누가 뭐 의자에 박지 안했어? 졸다가 이마 의자에 박은 거 아닙니까? 좀 잠을 깨 가지고 말을 자세히 들어요.) 이렇게, 자꾸 그 질이 높아지고 참 거기서 나오는. 나오는 젖과 꿀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영감. 거기서 나오는 주님을 보여 주고 소개해 주는 그 빛이 밝아서 그가 아니면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하는, 높으게 본질과 본성이 아주 고차원으로 이렇게 높아지게 되면 그 그늘 밑에 있는 사람은 다 시기하지 안하고 원하고 보존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서는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됐다 이 여인이 없으면 안 된다' 이래 가지고 모두 다 그 식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 어머니나 아버지일 것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그 밑에 아이들이 뭐 한 칠 팔 형제가 있다 할지라도 다 `이 어머니는 요긴하다. 아버지는 요긴하다. 없으면 안된다' 이렇게 말하지만 말하는 것은 그 어머니 아버지의 혜택이 그 자녀들에게 가고 있고 그 혜택 아래에 있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다 죽으면 눈물 흘리고 살기를 원하지만 그 혜택이 거게 가지를 안하고 갈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런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가정에서는 그렇게 요긴 하지만 그 동리에서는 그 사람이 죽거나 살거나 별 관계없는 것은 뭐이냐? 그에게 혜택이. 그 동리적으로는, 전 동리에는 미치는 혜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리에, 그 동리에는 그 혜택이 미치니까 온 동리들이 다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이래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 사람 있거나 말거나, 죽었거나 살았거나 아무 관계없이 생각하는 것은 그 혜택이 거게 미쳐 가지 못하고 그 영향이 그 혜택이 돌아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는 이 복은 이제 말 한 해석한 거와 같은 그런 복인데, 이 세상에. 없어질 세상에서 그러한 위치 그러한 존재, 그러한 사람, 그러한 행위가 된다는 그것만으로 말한 게 아니고, 그것만으로 말한 게 아니고? 그것보다도 아주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그때에 그렇게 요긴한 인물, 요긴한 인물. 중요한 인물. 하늘과 땅에 있는 통일된 모든 것이 다 없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필요성으로 느끼고 동경하고 사모하는 그 복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 복은 예수님이 그 복을 가지셨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한 사람을 점령하고 열 사람을 점령하고 열 사람의 진액을 거두고 백 사람의 진액을 거두고 모든 사람의 것을 착취하고 거둬 가지고 나를 존귀히 하려는, 나를 복되게 하려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안 믿을 때는 다 그랬었습니다. 지금은 좀 사람들이 참 컴퓨터 시대가 돼 나서, 모두 다 많이 발달이 돼서 저 사람이 망하면 나도 망한다 저 사람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하는 그런 그 연관성의, 그걸 가리켜서 사회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이 모든 국가성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되어지니까 서로 서로 위하고 도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만 과거 미개의 때는 한 동리에 한 부자가 없어져야 그 동리에 새 부자가 납니다. 묵은 부자가 없어지면 새 부자가 납니다. 또 새 부자 그게 세력을 부리니까 `저놈 언제 망할까' 이라다가 또 새 부자가 묵은 부자가 되면, 묵은 부자가 망하고 나면 또 새 부자가 납니다. 그거는 그때는 아주 미개한 시대이기 때문에 뭐이든지 착취해서, 과거에는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을 양반이라 하느냐 하면 권력 가지고 열 사람을 착취하면 그만침 큰 양반이요 천 명을 착취하면 그만침 큰 양반이요 만 명을 착취하면 그만침 큰 양반이라. 이래서, 그만 벼슬이나 하나 살고 이렇게, 과거에나, 하나 해 가지고 벼슬을 하나 살아 놓으면 그 사람이 그 동리에 있으면 첩첩 산중이라도 그 모든 다른 고을에서 전부 농사지어 가지고 그걸 다 그 골짝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왜? 그 사람이 권력 가지고.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권력 가지고 다 그래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리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지주들이 전부 착취했는데 그 지주의 자손들이 다 비참하게 망한 사람들 많고, 또 지주의 자손들로도 그것을 생각하면서 조심있게 산 사람들은 토지 개혁이라 하는 일이 있어도 그렇게 비참해지지를 안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로 자꾸 하는 것은 우리들이 평가적으로 살아야 되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은 전부 자살 행위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가서. 금방은 좋은 것 같지만도 그다음에는 반드시 자살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으로 많이 산 사람을 잘난 사람이라, 자기 위주로 많이 산 사람을 잘난 사람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잘난 사람의 자손은 없어집니다. 잘난 사람의 자손은 없어집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런 말합니다. `선조가, 부모가 잘나면 자식에게 대해서 해독이 되어지고 부모가 못 나서 남한테 천대받고 이라면 자식의 거름 이 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말하기를. `영웅' 영웅은 잘난 사람 아닙니까? 권세자 영웅. 영웅의, `약은 참 좋은 약 있는데 영웅의 자손의, 자손의 똥이 참 좋은데 영웅의 자손의 똥이나 또 작대기 쓸개나 그말이오, 작대기 쓸개 작대기. 작지에 무슨 쓸개가 있습니까? `작대기 쓸개가 참 약은 좋은데 작대기 쓸개를 구할 수가 있어야지?' 그와 마찬가지로 `부강한 영웅의. 부강한 권세가들의 자손의 똥이 요긴하기는 요긴하지만 그 똥을 구할 수가 있어야지'하는 그 말은 아주 그렇게 망해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게 다 어디서 생겼느냐? 이기주의에서 생겼고 또 자기 중심 자기 위주에서 생겨진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죽기전에, 그어지기 전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것은 전부 다 자살 행위라 하는 것을 이것을 확실히 깨닫고 절실히 느끼고 속에서 맺혀져야 이거 씻지 그리. 안하면 이것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복 있다는 것은 이제 참 세상에서는 망할 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권세를 가지고 아주 권세를 부리고 있는 그 사람과 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참 권세를 넉넉히 부릴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를 희생해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을 속여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켜 가지고 모든 사람이 `아, 그는 귀한 사람이요 참 선한 사람이 이 참 그 사람은 그 우리가 존경할 사람이라' 이렇게 꾀워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동리에 가니까 그 사람을 마구 존대하고 저 사람 아니면 우리 못 산다고 이렇게 존대하는데 실은 그 사람이 그 백성들을 막 착취해서 마구 잡아먹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김일성이니 김정일이니 그런 사람들이 다 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그 지방에서는 아이들은, 학생들은 진정코. 교훈을 그래 해 놓으니까 `우리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 아니면 우리는 죽는다' 자기 어머니보다도 제일 요긴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그거는 꼬아 가지고, 그 사람들을 골려 가지고 꼬아서 속여서 어리석게 만들어 가지고 자기를 오판해서, 자기를 잘못 평가해 가지고 이렇게 존대하구로 한 그것이 뒤에 뒤집어질 때에는 굉장한 것으로 뒤집어지고 마는 것이라 그거요.
그와 같은 것도 있는데. 그런 것 중에 어떤 것이 그런 것이냐 하면 석가모니니 이런 종교 창설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심령이 좀 넓어질 수가 있을 터인데. 종교 창설자는 예를 들어 불교로 말하면 불교에 석가모니가 그와같이 했으니까 사람들이 참 석가모니는 우리 사람 인간들을 구원한 분이라고 이러면서 존경을 하고 막 이렇게 해서 다 석가모니라면 참 하나님처럼 이래 존대를 합니다. 존대를 하나 이것이 정말로 사람을 구원했느냐 하면 사람을 우상을 섬기게 했고 하나님의 제일 진노케 하는 우상과 미신의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큰 벌을 받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렇게 다 자기들에게 유익을 끼쳤다고 이렇게 말했는데, 자존자. 영원 자존자 주권자 창조주 이 분과의 연결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연결을 가지지 못하고 그 연결을 끊고 그분이 아닌 딴걸 이것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이게 제일이라. 여게 다 모아 들어라. 이리 머리를 숙여라. 이리, 여게다가 복을 빌어라. 그라면 복 준다' 이렇게 말해 놨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을 만판 속여서 멸망시킨 것이기 때문에, 종교 창설자들이 제일 거짓 부리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창조주 조물주의 원수가 되고 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창설자가 지옥의 제일 밑층에 가서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 것이 기독교냐? 여게 복 있는 사람은 어떤 복이냐 하면, 이것은 하늘과 땅의 것이 통일되고 참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는 그 나라에서 복있는 사람이라 그말이오. 복있는 사람이라. 그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도 다 복되게 하는 것이요, 믿지 일는 사람들도 아 그분의 말이 옳다. 그분이 나에게 와 가지고 이와같이 위해서 기도했고 전했고 그분의 말한 대로 했으면 우리가 멸망하지 안할 터인데, 이 종교 무슨 불교면 불교, 유교면 유교, 무슨 마호메트교이면 마호메트교, 또 호랑객교 만 호랑객교 이런 종교 이것 때문에 내가 거기 속아 가지고 이랬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그것을 다 송사하기 때문에 이종교 창설자가 제일 송사를 많이 받고 제일 벌을 많이 받고 제일 어두움 깊은 속에서 비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이제 복이 있다, `복이 있나니'하는 이 복을 그런 오판의, 잘못 판단해서 오판의 복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꾀우는 궤휼의 복이 아니고 궤휼로 만든 복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을 착취로 만든 복이 아니고, 이는 참으로 하나님과 진리가 비판하고 비판해 볼 때에 `너는 복이 있다 너는 가치 있다, 너는 요긴한 인물이다 하고, 모든 피조물들이 이 어두움이 확 벗겨지면 전부를 다 진상으로 알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 확 벗겨지니까. 죽고 난 다음에 무궁세계는 악령이 없어지면 꼬임 받은 걸 다 압니다. 알게 되니까 그때에 진정으로, 정당한, 정확한 평가가 나오게 됩니다.
정확한 평가가 나오는 그 정확한 평가 지옥의 사람들도 정확한 평가가 나오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사리 판단이 나오고. 이러니까, 속인 것은 속인 건 줄 알고, 꾀운 것은 꾀운 건 줄 알고 아닌 것은 그거라고 해 가지고 사람을 넘어지게 한 것도 넘어지게 한 것도 알고. 진정 사람과 모든 피조물에게 참 옳고 바르고 참되고 유익된 것을 말한 것도 알고 이래 되는 그때에.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서 광명하게 되는 세계, 광명하게 되는 세계, 모든 피조물도, 여게 풀 한 포기도 풀 한 포기도 자유성이 있어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세계.
로마서 8장에 보면 지금도 모든 만물들이 탄식을 하면서 원하는 것도 있고 탄식하며 고대하는 것도 있고 또 원치 않는 것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참 자기 뜻은 아니지만 조물주로 말미암아 복종하면서 지금, 입에 먹히면서 밥이 욕을 하고, 무슨 물건을, 내가 사용을 하면 사용을 당하면서도 그 물건이 `이 더러운 것한테 사용당하는 것이 이기 참 아주 마음에 대단히 원통하지만 조물주가 여기다가 사용을, 이용을 당하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안 당할 수 없다'하는 이런 비밀로 당하고 있는. 이 인간이 모르는 이 비밀 세계가 있는 것을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광명해지고, 어두운 것이다. 햇빛 앞에 벌거벗은 거와같이 모든 것이 진상대로 다 드러나는 이런 세계가 있으니 이 세계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모두 다 진상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층어리는 굉장히 많지만 거게는 시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 상당한 보응대로 그대로 공평되게 됐기 때문에 거기서 시기하면 그거는 자기가 도로 이렇게 망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광명한 세계,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나는 세계, 모든 것을 다 환하이 뚫고 알아서 아는 세계 그 세계에서 복 었다 그말이오. 그 세계에서 복이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창설자도 그렇지요. 또 호주도 그렇지요. 호주도, 지금은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니까 참 필요하다' 이랬지만 이것이 다 뒤에 가서 환하게 다 드러나게 되니까 오히려 `밥을 먹여 줬기 때문에 내가 거게 끌려 가 가지고 내가 그 잘못 지도하는 데에 이제 내가 절단을 당했고, 또 옷을 입혀 줬기 때문에 절단당했고, 또 나를 공부를 시켜 줬기 때문에 내가 꺼꾸로 기어 들어가 가지고 내가 이랗게 망하게 됐다'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다음에 모든 것이 드러날 때에는 의인이라고 하는, 가장 의인이라고 하는 그것이 `네가 날 속여서 망쳤다'하는 그런 복수가 일어나는 것이 유황불 붙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이 유황불 불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면. 벌써 우리가 봐도, 아, 저 부모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이렇게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이렇게 하면서 공부만 하라고 하니까 그것이 부모는 사랑으로 하지만 그 부모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믿음 지키는 것이 그보다 더 복이요 믿음을 팔아서 공부한다는 것이 망치는 길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기 때문에 그 사랑한다는 것이 나중에 가서 휘뜩 열리고 보니까 일생 동안 자녀를 죽이고 말았다 그말이오.
죽이고 말았어. 이러니까,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그게 드러나니까 뒤에 가서는 모두. 오늘에 혜택이라 또 감사하다 하는 것이 전부 원수의 복수로서 바꾸어지는 것이 그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진다 하는 것을 말한 그런 것도 여러분들이 자세히 듣고 자꾸 공구를 해야 됩니다. 새김질을 해 가지고 이제 교훈 한 것이 어디까지 교훈했는지 교훈한 데까지 자꾸 넓어 퍼져 나가야 된다 그말이오. 이래서, 사랑은 전지자가 아니면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전능자가 아니면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완전자가 아니면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영원자가 아니면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영원 불변 자가 아니면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러면 그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이렇게 말을 해도 모르면 거리가 너무 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깨달은 자는 암수가 좋아하는 그 정욕의 사랑, 정욕의 사랑에서, 막 사랑해서 업고 구불고 보듬고 볼고 막 야단을 지기지만, 이제 그것이 뭐이냐 하면 자기 정욕이라는 성욕이라는 그 욕심이 들어서 그래 하는 것이지, 그것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참으로 영원히 그를 유익되게 하는 거게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정욕의 사랑도 그렇고 혈육의 사랑도 그렇고 동류의 사랑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평가적인 사랑은 뭐이냐 하면 영원 자존자이신 하나님의 본체와 그 본체의 역사인 영감과 영감이 우리에게 부딪쳤을 때에 진리이고 진리가 우리에게 부딪쳤을 때에 성경 말씀입니다. 이와 연결을 해서, 근본과 연결을 해 가지고 영원 문제를 해결시켜 주시는 이 연결 시킨 게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된다 그말이오. 이래야 마음이 커지고 사람이 넓어지고 이제 정상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지. 암만 들어 봤자 행하지 안하고 거게 대해서 느71 지 안하면 정상의 사람이 안 되고 말아요. 정상의 사람이, 전부 미친 사람이라 말이오. 미친 사람은, `좋은 건 나쁘다 나쁜 건 좋다' 이거 뭐이냐 하면 마귀 그 놈에게 다 꼬임 받아 가지고 그렇다 그말이오. 마귀 그놈에 꼬임 받았는데 마귀가 와 꼬우느냐? 꼬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꼬우구로 내 보냈다 그말이오. 왜? 하나님 말씀을, 자꾸 말씀으로서 자꾸 바로 가르치고 마귀는 꼬우고, 꼬우고 가르치고 이런 가운데서 마귀가 암만 꼬와도 하나님 말씀을 옳다 인정하는 사람은 마귀의 꼬임을 안 받고 꼬울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해서 나아간다 말이오. 이 사람을 영원한 나라에서 대우합니다.
그러기에, 복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했는데, 복에 대해서 오늘 아침에 말씀했어. 복은 평가적인 복이라야 됩니다. 평가적인 복이라 말은, 이제 사람들이 비판하고 비판하고 해 보는데, 비판을 뭘로 합니까? 지식으로 비판하는 거 아닙니까? 비판은 지식으로 비판하는 것인데 세상 지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세상 지식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제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판한 비판이라야 영원하고, 그 비판은 참 비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평가적인 복이란 말은 하나님의 지식이 비돤해도 `과연 그게 복이다. 과연 그것이 네게 참 가치있다 존귀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판해도 `그는 참 가치있고 복이 있고' 모든 존재들이, 이제 인간의 지식은 속인 지식이기 때문에 다 없어져 버리고 하나님의 지식만이 모두가 다 이제 만물에 대해서 주장을 할 터인데 그 지식이 나와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해도 `그는 참 가치 있다' 존대함을 받을 수 있는 그 복을 여게 가리켜서 복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범위를 넓혀서 이거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 이 속는 미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역 식구도 `그렇다 그말이오. 그 사람에 자꾸 권면해서 자기 구역으로 끌어 붙일라 하는 그것도 좋기는 좋지만 실은 평가적으로, `내가 지도하는 것보다도 저이가 지도 하면 어찌 되느냐? 아, 그이는 지도는 나보다 낫지만 나보다 자주 접촉해서 지도를 못 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그만 못 하지만 내 지도가 그에게 대해서는 적극 효력이 있다. 그러면, 지도는 저이 지도가 내 지도보다 나은데 그분은 뜨문뜨문 가기 때문에 새가 빠져 가지고 새 빠지는 동안에 탈이 나는 것이고 내 지도는 좀 못 하지만 물샐 틈 없이 자꾸 이래 가서 지도하기 때문에 이게 낫지 않겠느냐? 그러면, 나는 충성으로 지도해야 되겠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칙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그 심판에 가 가지고 모든 것이 정확하게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판단될 그 심판 앞에 설 터이니까 그때에 판단하는 그 판단에서 가치있는 가치가 있고 그 판단에서 평안한 게 평안하고 담대한 게 담대한 것이지 지금 암만 담대해 봤자 그 판단이 정죄해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평가에서 살아야 되겠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갈 것이기 때문에 심판 앞에 설 때에 내가 든든하고 염려할 것이 없고 이제 그때에 참 흠과 점과 주름 잡힘이 없게 해서 `평강 가운데에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해라' 베드로후서 3장 끝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지금 모든 것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아. 오늘 주님이 오셨다.' 오늘 심판이 어떠해도 그 심판 앞에 가도 안심될 수 있는 그 안심을 가지고, 그 심판 앞에 가도 가치 있는 그 가치를 가지고, 그 심판 앞에 가도 이제 권세 있고 우쭐하고 그 권세가지고 이제 아무 염려없이 담대할 수 있는 그 담대를 가져야 되지, 그 심판이 오늘이라도 오면 쥐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자기가 암만 옳다고 떠들고 언변으로 구변으로 이렇게 해 놨지만 심판이 오면 막 정죄해 버릴 그런 것을 가지고 이렇게 담대하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언제든지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말은, 하나님의 날은 재림의 날이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것인데 그 심판이 돼도 그때에 걱정되는 것을 오늘에 걱정해서 해결되고 그때에 담대할 것을 오늘에 마련해 가지고 담해 가지고 그날에 가치있는 것을 오늘에 마련해서, 내가 가치 그날의 가치를 오늘에 마련하고 그날에 후회될 것을 오늘에 깨달아서 그것을 정리해서 후회될 것을 정리하는 그 사람이 되라 그말이오. 우리는 멀리 보고 슬기롭게 살아야 됩니다. 오늘 이렇게 웃다 가서 웃다 담대하다가 내일 탁 오면 그만 꺼꾸러지는 그런 생활을, 우리가,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자. 근시자라 말은 가깝게만 보지 먼데 보지 못 하는 자를 말해서 근시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는 이 복은 이제 오늘 아침에 말 한 대로 이런 복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 그 하나님의 모든 법칙에 환하이 나타나 가지고 평가 할 때에 그 법칙으로 복되고, 그 나라에서 복되고,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이 후히 대접하고 이는 높이 대접하는 사람, 이렇게. 그런 사람이, 그런 복을 가리켜서 복이라고 한 것이지, 그 복을 가지는 데에는 심령이 가난 한 사람이 돼야 되지 심령 가난한 사람이 안 되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그래 심령 가난이 뭐인지 이제 계속해서 증거를 할 터인데, 혹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산상 보훈에 대해서 이걸 계속해서 증거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실란지.
다음에 내일 아침에는 또 심령이 가난에 대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 이 첫째 복을 증거할 터인데, 오늘 아침에는 복이라는 것만 말했습니다. 복이라는 거, 복이 어떤 복이냐? 이 복을 받을라면 심령이 가난해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