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 14:15
신앙의 순서,구비요소
1983. 4. 26. 화새
본문 : 시편 1장 1절∼3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에 대한 분해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다 잘 알고 있는 줄 압니다. 시편 l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이 말씀도 단절 해석을 여러분들이 다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줄 알고 그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또 '여호와의 울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는 것도 여러번 해석을 들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줄 압니다.
여게는 단절에 대한 해석보다도 우리가 신앙 생활 하는 데에 순위와, 순서.
순서와 조직에 대해서 더욱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미 믿는 사람에게 대해서 말씀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 그 신앙 생활이 쇠잔하지 아니하고 점점 새로와지고 성장되느냐 하는, 신앙 생활 하는 데에 순위와 또 거게 모든 구비한 요소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 체험에서 잘 알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해도 처음에는 기도할 때에 힘이 나지마는 그만 얼마 가다가는 그 힘이 쇠잔해져 버리고, 또 성경을 볼 때도 처음에는 성경 볼 때에 힘이 나지마는 얼마가 지나고 나면 그만 그 신앙의 힘이 쇠잔해지고, 자기가 또 행동을 무엇을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이렇게 애를 쓸때에 그것이 혹 하루 이틀 이렇게 힘이 있다가 차차 그 힘이 그만 쇠잔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다 무엇과 같은고 하니 그게 잘 비유는 안 되지마는 마치 사람이 나무를 세우려고 할 때에 이 막대기 하나만 세워 가지고 잘 되지 않고 둘을 세워도 되지 않고 세 개를 이렇게 삼파적으로 세우면 그게 잘 서는 것과 같이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요게는 꼭 신앙 생활에 순위를 여게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까 그 순서가 뒤바꿔지면 안 됩니다. 그 순서를 뒤바꾸지 말고 또 그 신앙 생활에 어느면 어느 면에 구비해야 될 그 요선를 여게 가르쳐 놓은 것이니까 구비할 그 요소를 구비해야 되지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여게 신앙 생활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말을 하고 신앙 생활이 자기가 바로 되고 있나 안 되고 있나 하는 그것을 시험해 볼 것은 그 다음에 한 가지를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 하는 데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되고 또 세 가지 요소만 있어도 안 됩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노 하고 그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요소의 세 가지는 첫째는 자기가 이미 듣고 아는 그 말씀대로 행해 보려고 노력하는 이 투쟁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 행위에 투쟁이 있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자기 신앙 생활에 첫째가 투쟁입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 생활 하는 데에는 첫째가 투쟁이오.
그러면 자기가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거게는 대적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 대적 있는 것을 모릅니다. 원수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또 신앙 생활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도 모릅니다.
자기가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이렇게 애를 쓰면 거게는 반드시 저 혼자만 애쓴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처음에는 자기 혼자 신앙 생활 하려고 하면 자기 안에 그 원수가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들어서 방해하고, 딱 살펴보면 꼭 자기 안에 있는 그것이 방해하는 그런 주기가 있습니다. 방해하는 시기가 있고 또 방해하는 그런 도수가 있습니다.
'요거는 꼭 일을 시작할 때는 방해 안 하다가 시작하여 일이 얼마 돼 가려고 하니까 방해한다. 요것은 또 일을 시작할 때에 잘못되도록 그렇게 방해한다.' 그러면 그 대적이 얼마나 되며 그 대적의 전법이 어떠하다, 내 속에 욕심이라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내 속에 방탕이라 하는 부패성은, 또 좀 평안하기를 원하는 안일의 그 욕심은, 이런 저런 것들이 자기 안에서 방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하고 싸우고 나면 이제 그 밖에 자기 몸 밖에서 또 자기가 신앙 생활 하려고 하는 데에 방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방해하는 데는 '원수가 다 네 집안 식구리라' 하는 대로 가장 가까운 자가 방해하게 됩니다. 뭐 그걸 못 하게 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신앙 생활을 못 하도록 직접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 생활에 그 힘이 어만 데로 기울어지도록 자구 탈선되도록 이리 삐끄러지게 저리 뻐끄러지게 이렇게 유혹하는 것도 있고 또 그러다가 안 되면 마지막에 딱 마찰이 돼 가지고 대항하는 것도 있고 자기 몸 밖에 수많은 적들이 있어 자지고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알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신앙 생활 하려고 할 때에 대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대적으로 더불어 이렇게 서로 투쟁하는, 투쟁하는 그 투쟁이 있어야 되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고 그 투쟁이 있을 때에 그 투쟁을 그것을 그만 양보해 버리면 그만 헛일입니다.
사람들이 별별 다 의지가들, 또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또 이성 비판이 강한 사람들이 다 신앙 생활 시작하다가 어데서 실패를 하느냐 하면 자기가 요 말씀대로 실행해 보려고 애쓰는 그것이 없는 데서 실패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려고 애를 써도 거게서 대적이 있다는 것과 또 대적으로 더불어 이것을 투쟁하지 않으면 결국은 신앙을 팔아야 되겠 고 양보해야 되겠다, 필연적인 전투를 해야 되겠고 또 전투 없이는 그 신앙 생활이라는 그 승리가 없다는 그것을 자기가 알게 되고, 그것을 양보 하는 데에서 사람들의 신앙이 떨어집니다.
첫째는 실행하려고 행해 보려고 애룰 쓰지 애으면 안 되는데 행해 보려고 애를 쓰는 데에 거게 무엇이 있느냐 안팎에 대적이 있는 것, 그 대적으로 더불어 양보 없이 타협 없이 투쟁해야 된다는 것, 요것이 자기가 실행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요 세 가지가 거게 있습니다. 롯은 그만 여게서 실패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말씀을 가지고 배운 그대로 실행을 하려고 애를 쓰면서 실행하려 할 때에 자기 안에서 어떤 대적이 와도 그것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고 자기 몸 밖에 또 대적이 있는 그것도 싸워서 이기고 이러면 그 사람은 얼마든지 신앙 생활해 나갈 줄 알아도 안 됩니다. 그것만 해도 또 실패합니다.
그러면 그러고 난 다음에 둘째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꾸 이렇게 앉아서 뭐 이래 생각하는 게 아니고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어야 돼. 성경 읽는 일이 거게 있으면 또 성경 읽는 데에도 거게 또 투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데에도 자기 안에서 성경 읽는 것을 방해하는 그 적이 있고 자기 몸 밖에 또 성경 읽는 것을 방해하는, 적이 있고 하는 적이 있는 것을 그것을 자기가 발견하게 될 겁니다.
발견하고 그 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꼭 시작할 때에 와서 역사하는 그 적이 있고, 겨우 성경을 이제 읽으려고 아주 좀 착실히 읽으려고 성경 읽는 것이 참 본격화될 때 그때 와서 방해하는 것 있고 또 성경을 읽는데 곧 읽으면 하나님의 힘과 빛이 오겠는데 마지막에 추수기가 될 때에 그때 와서 방해하는 적도 있고, 그러면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성경 읽는 데에 방해하는 적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고 하는 그 적을 발견해 보면 언제든지 그것입니다.
그래서 거게도 보면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하는 말씀과 같이 가까운데서 이러고, 그러면 사건이 와 가지고 방해하고 사람이 와서 방해하고 또 자기가 무슨 경영하고 있으면 경영하고 있는 그런 무엇이 물질이 와서 방해하고 이렇게 방해하는, 반드시 그것도 전투입니다. 성경 읽는 것도 그 전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전투의 적을 발 견해서 그 적으로 더불어 싸우면서 성경을 읽어야 돼지지 적이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적이 나옵니다.
적 없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때는 대적들이 볼 때에 뭐 그래 읽는 성경이야 읽거나 말거나 외우거나 뭐 평생 주 지꺼려 봤자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마귀와 대적할 것도, 벌써 마귀에게 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대적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자기가 요 행동하려고 애를 쓸 때에 기진한 그것이 피곤이 풀립니다. 행하려고 할 때에 기진해진 기진해졌던 것이 이제 성경을 읽으면 피곤이 풀려서 다시 힘이 소생됩니다. 실행한 그것이 후회가 되지 않고 실행한 그것이 '조금 요렇게 했더라면' 하는, 그 좀 더 잘했더라면 싶은 그것이 나오게 되고, '거게 또 요런 것을 구비했 더라면 좋겠다' 하는, 더 행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나오는데 그 힘이 어데서 오는고 하니 그것이 진리가 돕는 힘입니다.
진리가 자기를 돕는 그 힘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둘만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면 되어지느냐? 그 둘로 가지고도 힘이 나지마는 그 둘로 가지고 나오는 힘은 얼마 동안이라는 그 시기가 지나가면 그만 기진해져서 힘이 없어져 버립니다.
거게다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하는 그 말은 그게 기도도 묵상이고 또 성경 말씀을 자기가 읽고는 거게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성경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모든 사람 선지 사도들의 신앙가들의 신앙 모든 것도 이 사람도 이 말씀 가지고 비추어 보고 저 사람도 비추어 보고 자기의 행위도 과거도 비추어 보고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해서 기도도 하고 그 말씀이 모든 자기 현실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접선이 될 때에 어찌 됐느냐? 접선이 된 그 면을 자기가 이렇게 살펴보면 다 접선이 요래 삐뚤어져서 실패했다 조래 삐뚤어져 실패했다 하는 그런 것을 자기가 알게 됩니다.
이래서 그 말씀을 자기가 기도로든지 또 그리 안 하면 이성 비판으로든지 또 모든 과거와 현실을 가지고 비판을 해 보든지 이렇게 하는 그 묵상하는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또 적이 있는 것을 자기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할 때에 이상하게도 다른 일을 끌어다 줍니다. 다른 일을, 자기가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하는 사람은 그걸 발명하려고 밤낮으로 애를 써도 발명이 안 됐는데, 장사하는 사람이 요럴까 조럴까 해도 거게 대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안 나왔는데 이래 가지고 있었는데, 묵상을 해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와 상대해서 '요 면이 요리 됐고' 잘못된 것 그것을 수정을 하고,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이렇게 상대하지 못했던 것이 자기에게 또 수정이 되어지고 또 모든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을 이 말씀 가지고 해 보면 '누구는 여게서 실패했고 어떤 사건은 여게서 실패하고' 하는 그런 것을 살펴서 하는 그것이 인제 묵상인데 그러려고 하면 마귀란 놈이 이제까지 발명하지 못허던 발명을 딱 갖다 줍니다.
그 가치를 봐서, 어쨌든지 마귀는 옆에 있으면서 묵상하는 그 묵상의 가치가 만 원짜리면 만 원짜리 그걸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만 원짜리 제것을 줍니다.
이만 원짜리 제것을 떡 갖다 주니까 기도하다가 '이것 참 요러면 되겠다.' 해서 그만 그 사람은 이만 원 그것 보고 그리 따라가 가지고 그것 생각하고 그것 생각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과 자기와를 성경 말씀 가지고 서로 이렇게 대화 하면서 비판하면서 이걸 바로 고쳐 나가려고 애를 쓰고 또 사물을 아해서 보면서 애를 쓰고 이래 하다가 그만 마귀가 '그 장사는 네가 요래야 된다. 그 사람에게는 요래야 된다. 그 일은 요래야 된다.' 하는 그런 것을 자기가 알지 못하던 자기가 모르던 그런 이상스러운 그 이치를 딱 하나 보여 줄 때에 그걸 보니까 '그러면 됐다.' 싶습니다. 그러면 그만 그리 가 가지고 그것을 보고서 그리 따라 나가 가지고 그것만 이래 생각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묵상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기 사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고, 묵상한 사람이 또 자기의 연구하던 연구의 제목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고, 또 묵상하던 사람이 자기에게 지금 연구 과제가 돼 있는 그 연구 과제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딴에는 그것은 좋은 것이고 기도에서 얻은 성공인 것같이 이렇게 보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막바로 하나님과 그것과 바꾸는 그런 지금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주고 그것을 차지하는 것이요 또 진리를 내 주고 그것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묵상할 때는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셋이 하나가 되는 귀중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인데 그때에 자기에게 엉뚱한 것을 보여 주고 또 알려 주고 하는 그런 것이 자기 안에도 있고 자기 밖에도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전투를 통과한, 전투 통과한 그 묵상이 묵상입니다. 전투를 통과한 묵상을 하는 것이 이것 묵상인데 이 셋이 이것이 합해서 하나인데 이 셋이 구비할 때에 그 사람의 힘은 오랫 동안 유지됩니다. 유지되지마는, 유지마는 그렇게만 해 나가면 또 얼마 안가 가지고 그만 그 신앙의 힘이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거게서 뭘 하나 보느냐? 열매를 봐야 됩니다. '이렇게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되나?' 하는 그 결과를 자기가 살펴봅니다. 그거 신앙 생활 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어. 소용이 없지마는 이 신앙 생활이 바로 됐나 잘못됐나 하는 그것을 이제 발표가 나니까, 자기자 신앙 생활한 발표가 나니까 '발표야 뭐 어쨌든지 내가 신앙 생활만 잘하면 됐지' 네, 그렇기는 그렇습니다. 그렇지마는 신앙 생활 잘했나 잘못했나 하는 결과의 발표를 자기가 보지 않으면 또 거게서 힘이 한번 새로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그 힘이 한번 새로와지고 한번 깨끗해지고 하는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뭐이냐? 그 결과는 자기가 이렇게 세 가지로 이렇게 신앙 생활 하니까 자기 신앙 생활이 '보자, 내가 신앙 생활이 어찌 되노? 그러면 과거에 요런 현실 조런 현실에서 그때 그것이 과연 성과를 거뒀느냐? 성과를 거뒀느냐 성과가 없었느냐?' 하는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리 되면은 성과가 있었나 없었나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또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내 신앙 생활이 좀 소생되어서 좀 자라지느냐 좀 강해지느냐 어때지느냐?' 그것을 또 자기가 봅니다. 그러면 이미 되어져 있는 결과를 본다 말입니다. 결과를 보고,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 신앙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게 과거보다는 좀 자유롭고 말씀대로 영감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좀 형통해지느냐 안 해 지느냐?' 그것을 자기가 또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감생활이 형통하면 세상이 죽는 것이고 세상 생활이 형통하면 영감 생활이 죽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세상 생활이 영감 생활이요 영감 생활이 세상 생활이요 요 둘이 하나가 되는 그것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감 생활은 내부고 이 세상 생활은 껍데기 비유해서 내부가 껍데기를 갖춰 가지고 껍데기로 내부가 되어지는 요 둘이 둘이 아니라 요것이 하나가 되어지는 그것이 바로 되는 것인데, 자기가 신앙 생활 하면서 '내가 보자. 이런 이런 이런 신앙 생활에 거게서 그 사건에는 성과를 얻었느냐? 그 사람과 나와의 만나는 그 것에는 성과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러면 내가 차차 신앙이 좀 새로와지고 성장돼 가느냐 또 내가 신앙 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루를 계속한다' 한 시간을 계속한다, 이 계속하는 그 계속이, 계속 그것이 형통입니다.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다' 하는 그말은 영감 생활이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가리켜서 형통이라고 많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신앙 생활에 세 가지, 이 세 가지가 그 결과를 봐 가면서 이렇게 해서 이 네 가지로 이렇게 나가면 그 신앙 생활이 갈수록이 청청해지고 자꾸 새로와지지마는, 이 요소 세 가지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요소에 세 가지, 어떤 사람은 하나만 하다가 그 사람은 실패해 버리고, 또 둘만 하다가 실패해 버리고, 서이를 다 하는 사람은 실패를 안 하는데 서이 다 하는 사람이 그 결과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지 않으면 어찌 되느냐? 결과를 보지 않으면 마지막에 그 사람이 차차차 속화되기 쉽습니다.
그 결과를 보지 않으면, 그 결과를 봐야 또 가치 있는 걸 아는데 그 결과를 보지 않으면 그만 그 사람이 속화돼 버리고 만다 그거요. 새로와지지 않고 자꾸 때가 묻어. 그 결과룰 보면 자꾸 씻어요. 그 결과를 보면 씻으니까 더러운 게 다 씻겨 나가고 아주 깨끗한 본질 본성만 드러나지마는 그만 신앙 생활해서 그 결과를 자기가 살펴보지 않으면 마귀란 놈은 자꾸 그 결과를 보지 못하도록 때를 묻히고 때를 묻히고 자꾸 요러다 보니까 신앙 생활해 가지고 나타나는 결과를 다 보지 않으니까 그게 다 보이지 않으니까 마지막에는 '신앙 생활 해 봐야 뭣 하느뇨? 무슨 필요 있느냐?' 이 사람 돼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신앙 요소의 이 세 가지, 세 가지인데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첫째가 행함, 둘째가 성경, 셋째가 묵상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러면서는 늘 결과를 봐요.
이스라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오고 난 다음에 요단강을 건너올 때 돌 열두 개를 한 지파에 하나씩 져다가서 열두 개를 포개 놓은 그것 말이지, 그것을 여리고 성 한 바퀴 빙 돌고 난 다옴에는 또 "열두 개 포개 놓은 그 돌을 보라" 그게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삥 돌고 와서, 삥 돌고 와서 사람들이 뭐 아무 재미도 없고, 그리 안 하면 저거가 어데라고? 그 성을 돌면 막 성 안에서 원수가 당장에 지금 대적을 하고 야단이 날 건데 무난히 돌아오면 그것도 기이한 일이지마는 사람들은 한 번 두 번해서 자꾸 순응성이 있기 때문에 놀라는 일도 한 번 놀라고 두 번 놀라면 차차 놀라는 게 없어집니다. 죽을 만한 그런 일도 그만 나중에 한 번 두 번 놀라면 그만 마비가 되고 면역성이 생겨서 그게 없다 그거요.
삥 돌고 난 다옴에 열두 돌을 보라 해 열두 돌을 보니까 '우리가 요단강물을 건널 때 육지같이 건너왔고 저 돌을 짊어지고 왔지. 참, 하나님의 능력은.' 또 한 바퀴 돌고 또 보고. 그 보는 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그 결과를 보이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그 신앙 생활을 자꾸 씻는, 씻어서 때가 묻지 못하게 먼지가 끼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자꾸 씻어 없애버리는 그런 일이 됐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청청하고 또 그 행사가 형통하다'하는 그것은 신앙 생활에 결과입니다. 그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의 요소가 세 가지, 세 가지 신앙 생활 하면서 그 결과는 저절로 돼요. 그 결과를 보면서, 결과를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결과를 이루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 이 세 가지만 하면 결과는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은 하지 않고 결과 그것만 좋아서 그것만 하려고 애를 쓰니까 헛일이라 말이오. 제가 안 먹어서 기진해 있는 사람이 일 욕심 만나면 죽습니다. 기진한 사람이 일 욕심 만나면 죽소. 그저 참,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또 잘 놀고, 쉴 때 쉰다 말이오. 그러면 일은 저절로 되는 거라.
우리가 요 세 가지 요것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 세 가지 중에 어느 것 할래 하면 지금 일호가 자기가 행함이라. 행함에서 여게서 싸우는 데 거게서 힘이 나옵니다. 싸우는 데서 힘이 나오요.
행하는 데도 안팎에 적이 있고, 또 성경 읽는 데도 안팎에 적이 있고, 그 자기가 묵상하는 데도 안팎에 적이 있는데 묵상하는 데는, 묵상하는 데에서는 성신의 능력을 받습니다. 자기가 이 실행하려고 애를 쓸 때는 자기에게 이미 와서 있는 힘이 소생됩니다. 자기가 실행하려고 애를 쓸 때에는 자기에게 이미 와 가지고 제 힘 되어 있는 그 힘이 지금 뻐드러지지 않고 그것이 쇠해지지 안하고 힘이 소생된다 그거요.
김현봉 목사님이 그 교회에 칠십여 세 되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그 할머니가 그만 방 안에 드러눕고 나오지 못하고 이래서 모두 청년들이 가서 물을 모두 이래 장 들어다 주고 이러는데 그 소문을 들었다 말이오. '안 됐다. 너거가 왜 그 사람을 병신을 만드노 !' 떡 김현봉 목사님이 가 가지고 '내가 여게서 식사를 내가 여게서 지금 할 터이니까 내 식사를 해 내라.' 이러니까 그 할머니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말이오. 하면서, 물을 들어다 주지 말라 하더래.
'물을 들어다 주지 마라.' 이러니까 처음에는 앉아서, 물 한 바가지 들고 또 이래 앉아서 이래 와 가지고 이래 하고 이래 하고, 어쩌든지 목사님이 식사를 해 달라 하니까 기쁘고 즐거워서 앉은뱅이로 이와 같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요래 가지고 조금 일어나 가다가 또 쉬어 하다가 마지막에는 또 이래 서서 들고 오다가 마지막에는 한 바께스 물을 들고 이래 와 가지고 식사하고 나니까, 그래 인제 온 교인들 앞에 이러며 할머니 불러 가지고 '이 물 한번 들어 봐라.' 한 바께스 들고 풀풀 가거든. '왜 사람을 이런 사람을 너거가 병신을 만드노?' 그랬다고 그런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게 자기에게 있는 힘이라 말이오. 자기에게 있는 힘을 요걸 발휘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신앙의 요소의 그 첫째는 자기에게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의의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을 요것을 썩히지 않고 그 힘을 잘 보존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진리의 돕는, 진리가 돕는, 진리가 주는 힘을 얻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성령이 주시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귀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 제일 귀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진리가 주는 것이 귀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에게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그 힘이 귀하다 말이오.
요 셋이 신앙 요소가 되면 신앙 생활이 되는데 이러면서도 그 결과를 안 보면 그만 신앙 생활이 파묻히고 만다 말이오. 그 결과를 보는 이것은 씻는 것이라, 씻는 것.
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