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1981. 1. 25. 주일오후

 

본문:요한복음 10장 6절∼18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하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절로 5절까지의 말씀을 강도(講道)하셨으나 그 무리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7절 이하에 거기에 관련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먼저 온 자는 예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 예수님의 대속  외에 다른 공로, 영감 도리 외에 다른 모든 주장들 지식들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인데 먼저 왔다 그말은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기 전에 자기에게 벌써  절도가 와 있고 강도가 와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그 원죄와 본죄를 이것을  가리켜서 먼저 온 자라, 절도라 강도라.

예수님의 이 구원 외에 땅위에 온갖 구원을 말하는 길들이 있지마는 이것은 다  원죄가 말하는 것이요 본죄가 말하는 것이요 곧 원죄와 본죄의 역사입니다.

원죄의 역사라 말은 피조물 중심의 역사라는 말이요, 본죄의 역사라 말은 피조물  중심으로 된 그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활동해서 지어놓은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 믿기 전에 벌써 절도와 강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자기의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선입적 주관, 선입적 경험  체험, 인간들의 모든 역사 지식 이런 것이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교보다 뒤에 이 세상에서 생겨진 요새 난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 믿기 전 예수님이 도성인신해서 오시기 전 타락할 때에 그때 있었던 먼저  있던 인재, 인간의 원죄와 본죄가 들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먼저 온 자라 말합니다.

“내가 문이니” 내가 예수님이 문이시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다 구원을 얻습니다. 오전에  양의 우리에 문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이 구원을  이루려고 할 때에 거기에서 진리도 깨닫게 되고, 영감도 깨닫게 되고, 또  진리대로의 영감대로의 성화도 행위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 꼴을 얻는다. 구원도 되고 꼴도 얻는다. 이 꼴은  양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양식과 자기의 구원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 길에서만 얻지 다른 데서는 얻지를 못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도적이 온 것은  인간에게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주관, 타락한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자율,  본능, 주관, 그 본질과 본성 이 전부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죽이고 멸망시키고 이것을 전부 다 지옥의 것이 되도록 하는 것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 안에 절도와 강도가 있으니 그 절도와 강도는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아닌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 아닌 자기 이놈이 발동해서 자기를  유혹시키는데 이것은 순전히 죽이고 멸망시키고 영원히 하늘나라의 자기 것을 다  지옥에 빠뜨려서 도적맞게 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 아닌 자기는 절도요 강도요 자기를 멸망시키고 사망케 하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합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도록 하고, ‘더 얻게 하고' 하나님과 연결을 더 강하게 충만히 견고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이 양에 대해서 참 공로를 베푸는 선한 목자인데,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있는데 삯꾼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 선한 목자도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기를 아버지가 예수님을  아신 것과 같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전적 책임지고 예수님은 전적 아버지만을  책임졌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전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전부인 것같이 선한  목자 된 자는 자기는 양의 전부요 양은 자기의 전부라. 이렇게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된 것처럼 예수님과 자기가 하나되는 것과 자기와 자기 양이  하나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왜 아버지가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 다시, 버린 후에 목숨을  얻으려는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이 목숨을 이것 버리고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이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고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한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한다 이랬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가지고 있는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고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는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 요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목숨은 이때에 버리지 안하고 백 년 살아도, 이백 년  살아도, 천 년 살아도 그 목숨은 앞으로 죽음에게 침노를 받을 수 있는  목숨입니다. 죽으면 죽을 수 있는 목숨입니다. 또 그 목숨은 아버지의 명령을  아직까지 다 순종치 못한 순종 완료를 보지 못한 목숨입니다. 또 그 목숨은  아버지의 만족과 당신의 양과 당신이 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지 못한 목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은 목숨은 그는 영원히 사망이  침노할 수 없는 목숨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만족과 아버지의 지공과 지성법을  만족케 한 목숨입니다. 택한 자와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만족히 영원히 주었고 줄 수 있는 목숨입니다. 이 목숨으로 다시 예수님은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내가 절도와 강도가 안 돼야 되겠습니다. 절도와 강도가 되면  내 구원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다 삼켜버리고 멸망을 시키고 또 사망케 합니다.

우리가 오후에 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절도와 강도가 안 돼야 되겠고 또 절도와  강도에게 해를 받지 안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절도와 강도가 되면 내  구원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멸망을 시키는 이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 절도와 강도가 안 돼야 되겠고, 둘째는 절도와 강도의 이 해를 받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절도와 강도의 해를 받지 아니하려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또 절도와 강도가, 강도의 해를 받지 아니하려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  자를 자기의 목자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우리도 선한 목자가 돼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은 뭣 때문에  사랑하셨느냐?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 다시  목숨을 얻으려 하는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점입니다. 우리가 있는  목숨을 양을 위하여 버려 다시 얻으려는 것, 그러면 이제 가지고 있는 목숨은  양을 위해서 버리고 다시 주님에게서 목숨을 얻으려 하는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사랑의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점은 어떤 점  때문에 사랑하셨느냐? 목숨을 얻기 위해서 버리는 것,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버리는 것 요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도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는 요것이 주님에게 사랑을 받는 유일의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기 전 그 생명은 어떠한 생명인 것을 좀 전에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목숨을 버려 일으켜 놓은 그 공로는, 그 목숨을 버려 설정해 놓은  그 공로는 다시 목숨을 얻었는데 그 목숨은 어떠한 목숨이라는 것을 좀 전에  설명을 했습니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모든  것들에게 빚진 것이 모든 것들에게 영원히 만족히 주는 자 된 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들이 예수님 앞에 사랑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이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님에게 사랑을 받는 그 원인은 가지고  있는 것을 양을 위해서 버리고 다시 주님에게 얻으려 하는 이것이 주님 앞에  사랑을 받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 해도 이미 버려지는 목숨, 이미 두고  갈 것, 다 내어주고 갈 것, 다 버리고 갈 것, 목숨도 소유도 몸도 일단.....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내가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림이라. 이 버리는 것은 어떤 강제에 끌려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라. 자원해서 버리는 것이라.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이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고  다시 목숨을 얻으려는 이것으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요 양을 위해서  가진 목숨을 버리되 어떤 세력에게 강제로 빼앗겨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는 것, 안 버릴 수 있는데 버리는 것.

예수님이 버리실 때에 안 버릴래야 안 버릴 수 없어 버린 것 아닙니다. 안  버리려면 안 버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 시대의 양떼를 위해서 그 생명을  사자에게 버린 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안 버리려면 안 버릴 수 있습니다. ‘기도  안 하겠습니다’ 하면 안 버릴 수 있습니다. 안 버릴 수도 있는데 스스로  버렸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가진 소유나 몸이나 자기의 목숨이나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예수님에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양을 위해서 버리는 것, 버리되 안  버릴 수도 있는데 스스로 버리는 것, 요것이 주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버려질 목숨이요, 이미 다 버릴 소유들이요, 버릴 몸들이요, 이러나 주님의  피흘리신 주의 구속의 이 역사를 위해서 이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다시 영원한  것으로, 무궁한 것으로, 완전한 것으로, 영원 불변의 것으로 얻기 위해서 이것을  투자하는 요것이 주님의 계약을 믿는 자요 주님에게 사랑을 받을 유일의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성공은 내가 절도와 강도가 되지 아니하는 것, 내가 절도와  강도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양을  위해서 버리는 것, 다른 사람의 자타의 구원과 이 복음 역사를 위해서 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석하기를 삯꾼은 이리가 올 때에 양을 두고 달아남으로 양이 다  절단난다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삯꾼이 아니요 양도 제 양이요 또 저도 양의  목자라. 양이 목자를 알고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 한가지라. 아버지가 예수님을 책임지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책임지고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는 영원히 틈이 없는 하나인 이것과 같이 양과  예수님과 틈 없는 하나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계대자로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심같이 예수님도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 다시 목숨을 얻음으로 양과 예수님과 하나된 것이 성부와 성자가  일체로 하나된 것같이 되어진 이대로 우리도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양을 위해서  버리는 요것을 통과하면 다시 얻고 난 다음에는 성부와 성자가 하나된 것처럼,  예수님과 택한 자들이 하나된 것처럼,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양과 하나되는  이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원하지마는 삯꾼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삯꾼은 저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는 장담했지마는 이리가 오면은 양을 두고  도망친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양과 자기와는 완전히 이별입니다. 주님과  자기와도 하늘나라에 가지마는 이별입니다. 사랑의 연결줄은 끊겨졌습니다.

그러면 삯꾼이 뭣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삯꾼이 뭣이냐?  양을 보고서 양을 기르지 안하고, 양을 제 양으로 기르지 안하고, 인간의 구원을  제것으로 삼아서, 이 구원을 제것으로 삼아서, 무궁세계의 이 하늘나라의 백성을  제것으로 삼아서 하지 안하고 양 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지 안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지 안하고, 인간의 영생을 위해서 하지 안하고, 인간의  무궁세계를 위해서 하지 안하고, 주님의 피의 역사로 하지 아니하고  “삯꾼이라” 땅위에 어떤 것을 욕망해서 이 복음 운동하는 자는, 어떤 것을  욕망해서 이 복음 운동하는 자는 그는 삯꾼이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리 제 날뛰고 장담해도 인간의 구원 요것만을 소망하지  안하고 땅위에 어떤 것을 소망해도 소망하면 반드시 소망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저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최종적으로 주님 앞에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은 데에 심을 수 없습니다. 약한 것을 강한 데 심을 수 없습니다.

욕된 것을 영광스러운 데 심을 수 없습니다. 멸망의 것을 영생의 것으로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삯꾼이라는 이 말씀에 크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지마는 이 구원만을 소망하지 안하고 무엇을  바라서 믿는가? 이 구원 외에 다른 무엇을 바라면 바라는 그것으로 인해서  반드시 자기의 소유와 몸은 구원을 위해서 기울이지 못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울어지고야 맙니다. 구원은 버리고 양은 버려두고 도망칩니다. 구원은  버려두고 도망치기 때문에 양을 헤치고 다 늑탈하고 멸합니다. 구원은 절단  날대로 절단납니다.

이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구원 외에 다른 소망을 가지고 주를 바라보는  자는 열심이 있어도 아무리 큰 일을 해도 아무리 유력해도 그는 마지막에 자기의  구원을 절단을 내려고 하는 최종적인 그 구원 절단이 올 때에 구원 집어던지고  자기는 도망하게 됩니다.

이 구원에만 소망을 가지기를 평소에 갖추어 가진 자는 이 구원 두고 아무데도  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주고 무엇을 줄지라도 이 구원을 놓지 않습니다.

놓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기 때문에  주님이 그자를 사랑하고 그자만을 상대합니다.

6절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알지 못하니라”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노라” 한 이 말씀을 결론으로 지운 것은 이 비유를 들으나 이  비유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과 아는 것 같으나 알지 못하기가 쉽다는 것을  여기에 주의를 마지막에 결론으로 지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는, 이 세상에는 양의  목자의 껍데기를 입고 절도 강도가 있어 자타의 구원을 완전히 절단내는 이 절도  강도의 이 무서운 인생의 구원을 전멸시키는 이 절도와 강도를 말하지마는  여기에 대해서 참된 지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지 않더라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뭣 보고 삽니까? 세상 부귀 영화나 무슨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보고  삽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보고 삽니다. 구원을 보고 사는데 이 구원을 완전히 삼키고 헤치고 멸망시키고  죽이는, 이 구원을 절단 내는 절도와 강도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했지마는 이  절도와 강도를 크게 두려워 여기에 대한 방비를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신 것은 절도와 강도를 알지 못한다. 절도와  강도를 알지 못한다.

또 둘째로 큰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은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문지기가 문을 열어줘서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 큰 말씀이지마는 이 말씀을 그들이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어느 정도  아는지? 예수님으로 살려고 하면 내 마음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  예수님의 소욕으로 내 소욕, 예수님의 지능으로 내 지능 삼아 내가 사나 내가  나로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으로 살아, 내가 나로 살지 안하고 예수님으로 살아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이 사는 일, 이제는 내 모든 이 영육을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내 중에 내가 돼 가지고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그로 더불어 살고 그는 나로 더불어 당신이 이  세상에 사는 역사를 나타나는 이 지극히 영화로운 일, 지극히 존귀한 일, 이  일을 하려고만 하면 문지기가 문을 열어서, 문을 열어줘서 들어가게 한다.

예수님으로 살려고 하면 성령님이 예수님으로 살게 해 주시고, 사죄 받은 자로,  칭의 받은 자로, 하나님과 결합된 자로 살려고 하면 성신님께서 이 구속을 받은  자로 살게 하시고, 진리와 영감대로 하나 빠짐 없이 그대로 살려고 하면  성령님께서 살게 해 주신다는 이 지극히 큰 말씀을, 큰 권능의 말씀을 했지마는  그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하더라. 오늘 우리는 어느 정도 아는지?

또 하나는, 이렇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네가 들어가면 “네 양을 다  불러내리라” 다라 말씀이 있습니다. 4절에 “자기의 양을 다 내어놓은 후”  “다 내어놓은 후”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 자기 동시대에 자기 양도  있겠고, 자기 동지역에 자기 양도 있겠고, 자기와 한 지역이 아닌 자기는 동양에  있는데 서양에도 자기 양이 있겠고, 자기는 십오 세기인데 이십 세기에도 자기  양이 있겠고, 이십일세기에도 자기 양이 있겠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기를  통해서 구원할 자는 자기가 다 구원시킨다, 자기 양을 다 불러낸다. 이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네가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면 네  양은 다 불러낸다. 얼마나 큰 소망의 말입니까? 또 네가 앞서 가면 양들이 너를  따라서 간다. 너 하나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네게 속한 모든  양은 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서 다 너를 따른다.

너 하나 온전해지면 네게 속한 양떼들이 다 온전해진다. 너 하나 온전해지면  너에게 속한 양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불러 구원한다. 네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문지기가 열어 준다. 인간의 구원을 전멸시킬 수 있는 절도와 강도가 가득  찼다.

절도와 강도에 대해서 말씀했지마는 그들이 몰랐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 지극히 참 위대한 일, 이 위대한 일을 원하고 힘쓰면 문지기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것, 이것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네게 속한 양을 다  불러내리라” 얼마나 큽니까? 이렇게 하여 네가 앞서 가면 그들이 너 따라서 너  완성과 동시에 완성되리라.

이것을 말씀했지마는 그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도 이  말씀을 어느 정도 긍정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어느 정도 소망을  가지는지? 이것을 확신하고 여기에 소망을 가졌다면 완성입니다. 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알지 못한 것처럼 오늘도 이 말씀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  되면 가련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양을 전멸시키는 절도와 강도가 있다. 문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면 문지기가 문  열어준다. 문을 통과한 목자는 선한 목자니 자기 양을 다 불러 구원할 수 있다.

앞서 가면 양떼가 자기를 다 따라와서 자기 완성과 동시에 된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  하나 삯꾼은 안 된다. 삯꾼은, 양을 구원하는 구원만 보지 안하고 땅위에 어떤  것을 봐도 보면은 그것 때문에 구원 위하여 있는 것은 투자하지 못한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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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7 선의 승리/ 로마서 12장 21절/ 1975. 4. 27 제17 공과 선지자 2015.11.04
3306 선조와 선배에 대한 3사람의 정신/ 창세기 9장 18절-27절/ 870531주전 선지자 2015.11.04
3305 선지자의 사명/ 신명기 28장 1절-19절/ 860331월새 선지자 2015.11.04
3304 선지직의 애로와 존영/ 요한계시록 11장 15절-18절/ 820328주새 선지자 2015.11.04
3303 선택,후택-예정,창조/ 고린도후서 13장 5절-7절/ 1960. 4. 26. 화새집회 선지자 2015.11.04
3302 선택설과 후택설/ 출애굽기 20장 6절/ 850630주새 선지자 2015.11.04
»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 6절-18절/ 810125주후 선지자 2015.11.04
3300 선한목자/ 요한복음 10장 11절-12절/ 840701주새 선지자 2015.11.04
3299 선한목자-삯군목자/ 요한복음 10장 7절-15절/ 87102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4
3298 선한목자-양의 우리의 문/ 요한복음 10장 1절-10절/ 840104수새 선지자 2015.11.04
3297 선후배의 위치에 있는 나의 중요성/ 창세기 3장 1절-24절/ 810206금야 선지자 201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