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회의 목회


선지자선교회 1988년 7월 6일 수새

 

본문 : 고전2:1-8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사람이 그 지역을 말하면 공연한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부산에  있고 경남에 있기 때문에 경남과 부산에 대해서는 내가 내일이기 때문에 만만히  단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지역이 아닌 이북에 대해서나 또 다른 강원도나  충청도나 전라도 그런 데 대해서 내가 말을 별로 안 합니다.

 나와 가까운 데는 내가 거게 대해서 흠점을 내가 말할 때에 만만히 하고 나와  멀수록 그 흠점을 잘 말하지 안할라고 애를 씁니다. 왜? 거게는 악령이 오해를  하는 그런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제가 처세술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런데, 어제 교역자회에서도 '이 교역자회서 한 걸 이거 대중 지금 설교할 때  말할까?' 그라는 사람 있지만 나는 그것이 대중에게 다 필요하기 때문에 욕  얻어먹을 줄 알고 비난을 받을 줄 알고도 합니다. 서울에 있는 이 모든 교회들이  자꾸 부패하고 속화돼 나간다 이렇게 말을 하니 서울에 와서 좀 집회를 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말을 하는데 중심에 그것을 원해서 하는 말도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또 와서 보면 별수 없다 하는 그런 뜻도 속에 깊은  속에는 그놈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 대해서, 샘 안에 개구리 모양으로 그저 한 구석진 데에 있으니까 그러하지  좀 지성인들이 사는 좀 유식한, 개화가 되고 좀 문화가 이렇게 앞서 있는 서울에  올라가니까 모든 보는 그 시야가 넓어지고 또 견해가 넓어지고 이러니까 이제  시골에서 듣고 주장하던 그 케케묵은 것이 거게 오면 다 힘을 쓰지 못하고  변화가 된다.

 변화되는 그것은 나쁘게 변질 변화가 아니고 그것이 좀 더 밖에, 성화라 할까 좀  지식화돼서 지화라 할까 그래서 변해지기 때문에 이것이 확실히 앞섰고 유익이  있다 그런 자신 만만들을 가지고 나아가기도 쉽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든지 이 평신도든지 접촉을 할 때에 또 일을 자기 혼자라도 무슨  일을 경영을 할 때에 행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사람을 생각하느냐,  자기를 생각하느냐, 물질을 생각하느냐? 이래, 무엇인가 다 생각하기야 다  생각하지요. 거게 대한 것을 다 구비해야 될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보다를 찾습니다. 네가 보다 어느 것이냐? 어디다가 가치를  두며 어디다가 중점을 두며 네가 어디다가 주를 두느냐 하는 그것이 이제  문제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라고 그들이 전혀 하나님 부인하는 것 아닙니다.

 이래서, 그럴 때에 잘못하면 하나님은 멀고 자꾸 이 피조물은 가깝기 때문에  제일 어리석은 자가 그 중에 물질을 제일 앞서 보고 물질 위주중심으로 모든  일을 행동하는 자 되기 쉽습니다. 또 그보다 조금 나은자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움직입니다. 좀 지혜가 좀 있다고 제딴에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  조금 지혜 있는 자는 '인류에게 어찌되느냐? 모든 인류에게 어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불신자로서 이방인으로서는 제일 폭 넓은  사람이요 깊고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게까지는 다 멸망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거기서부터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물질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낫고 자기  중심보다는 인류 중심이 낫고 인류 중심보다는 하나님 중심이 나은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생명입니다. 그 이하는 다 사망입니다. 또, 자기가 복음을 전하든지  모든 걸 할 때에 내가 나 좋게 하랴 하나님 좋게 하랴,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유익된 것은 하나도 숨기지 안하고 다 말했기 때문에 너희들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다 이랬어. 그 말은 번연히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알고  듣기 싫어하는 것도 알고 거스리는 것도 알고 또 이 말 하면 뒤에 공격이 나올  것도 알고 또 껍데기 아무리 수수껍데기를 붙여도 중심에는 지금 뭣을 대항해서  저와 같이 하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다 압니다.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을 몰라도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들의 것을 다 압니다.

왜? 그거 다 경험해 나왔기 때문에 다 압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다 너도 과거에 그런 자리에 있었던 자들이나 지금은  너희들이 회개하고 새사람 됐다 하는 것을 말씀함과 같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에도 하나님이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좋게 하느냐 또 자기 좋게 하느냐? 이라면 내좋기를 위함이냐 하나님  좋게 하기 위함이냐 그것을 구별할 줄 모르면, 올라가기는 힘을 써야 올라가고  떨어지는 거는 가만 있으면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힘을 써야 되고  그저 자기 생각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저절로 자기 생각하는 것이 돼지는  것입니다.

 또, 이 전할 때에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나 사람 좋게 하나 그것도, 물론  하나님도 좋게 하고 사람도 좋게 하면 좋기는 좋지만 우리는 너무도 유한한  무능자이기 때문에 둘을 못 합니다. 그러기에 그만 모든 성경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절로 사람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이걸 가르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 사랑함이 된다. 하나님 사랑이 뭐인데? 하나님  사랑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명을 지키면 결과적으로는 사람 사랑이 된다 이렇게 성경에 말해 놨고 또  하나님을 바라보고 상대해서 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게 성경들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그 신앙 통계가 마지막에 결론은, 마지막에 죽을 때에 결론은,  인간 경험을 제대로는 다 하고 마지막 결론짓기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방해만 해사 나는 억지로  방해했는데 하나님이 하셨지 내가 뭐 앞서 나가 가지고 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 일을 방해한 것뿐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 하는 그것이 결론입니다.

 그러기에, 죽기 전에 '옳은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나쁜 것은 마귀가  하는데 나는 마귀하고 대대로 살아 나왔기 때문에 그놈은 내 본능처럼 나처럼  그렇게 돼져서 자기 중심 자기 그 중심의 행위 그것은 다 자기 아닌,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것이 가장해 가지고 나온 그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지만 그것을 자기  아닌 원수로 아는 사람이 논리로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실지로 자기가  본능이 그런 사람이 돼 가지고 그는 원수로 자기는 참 새사람을 자기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이런데, 말세가 되어갈수록 사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런 전도자가 되기  쉽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듣기 좋도록 이렇게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된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듣기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자기 듣기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꾸 말세가 되어갈수록 자기 듣기 좋게 하는  말을 자꾸 좋아하는 것이 더 홍왕되고 더 충만해집니다. 그거는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OOO목사님 알 것 같은데? 그래, 자기 중심의 인간이 자꾸 되니까  옛사람으로 자꾸, 새사람은 죽고 옛사람화, 자기 아닌 자기, 그 변질된 자기가  되기 때문에 자꾸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다 전도자라면 그래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있으면 사람들에게 거리끼지 않는 단어나 술어나 그런  방편을 쓸라고 애를 씁니다. 그거 아주 지혜 있는 일입니다. 이러니까 '좌우간  내가 요거 진리를 증거하는 데에도 모든 이 사람들의 다 주관과 본능이 자기  듣기 좋아하는 걸 좋아하고 다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좋아하고 이러니까 내가  지혜롭게 참 해야 되겠다.' 그거 좋습니다.

 '지혜롭게 해야 되겠다' 좋은데 고라다가 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마귀란 놈의  홀갱이에 착 홀켜서 그만 사람 좋게 사람 기쁘게 하는 이 일이 하나님보다도  앞서서, 자기는 번연히 아닌 줄 알고 '내가 이래 내가 증거하고 이래 말하면  하나님의 도리와 하나님은 멀어지고 자꾸이 사람들이 가깝게 된다' 이걸 알면서  그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거머쥐고 잡아 돌릴라고 하는 것처럼 잡아 돌릴라고  애를 써도 자기는 돌리지 못하고 나중에 증거하고 마지막에 강단에 엎드려  결론을 지을때 보면 이거 나는 이 사간은 하나님 좋게 하는 것은 다음이고 사람  좋게, 하나님 듣기 즐거워하는 것은 둘째 되고 사람을 즐겁게 기쁘게 하는 것이  앞섰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판단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전도할  때에도 물론 사람 좋게 하고 사람 기쁘게 하고 사람을 얻어야 뭐 전도가  돼지지요. 이 귀하지만 우리는 미련한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됩니다.

 그저, 우리 역량이 없기 때문에 사람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만 생각하고 사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되어지고, 하나님  생각하면 악은 행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 생각하면 악은 범할 수 없으니 하나님  생각하는 데에 강조하고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거게 따라서, 하나님 생각하니까  자동적으로 거기에 일어나는 운동으로 이렇게 순위와 가치를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서울에 가면 사람들이 지금 자꾸 부패해지느냐? 거기 가면 아주 말들이 여게  이 부산서 말을 들으면 저 말하는 것이 밤송이 모양으로 저런 말은 지금 요렇게  하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안하고 신사적으로 좀 잘 전달이 되겠고 또 그는  참 말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찔리지 안하고 그와 같이 할 수 있는데 진리는  좋은데 표현 방법이 좀 서투롭다. 인제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 서울에 가면  그거좀 그걸 알게 돼요.

 알게 되니까, '이 진리에 이 표현 방법도 이 서울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아주 이  신사적인 양반으로 이 참 부드럽고 유하게 이렇게 표현하는 이런 방법을 써야  되겠다' 이제 그만 그것이 자기 눈에 보여집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이 설교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밑에 있는  강단 아래에 있는 모든 청중이 다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기 따라서  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자기가 서투른 자기가 모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또  거스리지 안하는 그런 것을 할라고 힘을 쓰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 그만 진리는  흐려지게 돼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여러분들 서울 가는 사람들이 다 속화는  됩니다.

 왜 됐느냐? 우리는 지금 찬송가 이 고친 것 이백 일곡을 이걸 참 하나님 앞에  뼈 아프게 느껴지고 이것을 할라고 수십 인이 잠을 못자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 날 바쁜 목회를 두고 이렇게 하고 이래 가지고, 하는 것은 그래도  이 첫째는 성경대로 돼야 되겠고,  또 다음에는 과거. 우리가 잘 익혀 놨던 그것이 틀리지 안했으면, 고친 게 더  좋으면 하지만 고친 게 더 좋지 안하고 고친 것과 과거에 익혀 두었던 것이  같다고 하면 익혀 둔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아 옳다 이래 가지고 막 고쳐 놓은  것을 과거에 익혀 뒀던 것을 우리가 할라고 한 것이고, 또 하냐는, 이제 같은 말이면 그 지을 때는 생각도 못 한 그 사람이 영감 받아  가지고 창작한 그 사람이 있으니까 창작한 사람의 그 말과 그 뒤에 보고  마구잡이로 고쳐 재낀 그 사람의 말과 고쳐진 것이 좋으면 월등하게 좋으면  그렇지만 꼭 동등이라면 그 마구잡이로 고쳐 놓은 그자의 것은 하기 싫고 처음에  창작한 그 사람의 말을 따라서 하고 싶다 그래 가지고 그래 한 것 있고,  또 하나는, 이세 이런 데에 그저 사람 즐겁게 하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송이 돼야 된다. 찬송은 하나님에 하는 찬송이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한번 찬송을 한번 내가 청한 일이 있습니다. 어른이 아니고  학생입니다. 내가 찬송을 청하니까 다른 말은 명령하면 하는데 찬송을 안 합니다,  '그래 왜 찬송을 안 하느냐? 한번 찬송 한번 해 봐라. 내가 한번 들어 볼란다.

한번 해 봐라.' 이라니까 기어코 안합니다.

 그래 내가, 안 하는데 나도 그걸 압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 가지고 안 했지만 척 꺼릴 때에 나도 비로소 -그 사람 후배라-깨달았다  그거요.

 그래 나중에 자꾸 거석하니까 '제가 이제까지 사람을 대해서 사람을 듣기 좋구로  하기 위해서 찬송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이래. 그렇게 구별하고 살아. 구별하고  사는 것이 주일학교에 있어.

 이렇게 서울에 가면 자꾸 이와 같이 되기 쉬워. 그래 서울에 가서 부패하지 안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부패하지 안한 사람이냐? 서울에 가서 '야, 서울에 가 자꾸  사람이 보이니까 사람 보다가는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다. 여기서는 부산보다 더  하나님을 봐야 되겠다.' 사람보지 안하고 하나님을 볼라고 애를 쓰고 또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할라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되겠고,  '뭐 표현 방법이 서투르든지 무식하든지 말든지 꼭 하나님의 뜻인 진리 요것만을  지금 증거해야 되겠다' 하나님과 진리에다가 눈을 기울이는 그것을, 딴데로 옮기지  안한 사람은 서울 아니라 아무 데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 언제 한번 미국을 한번 가면 그런 생각도 좀 있습니다. 미국이 좋아서  가면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고 '미국이라? 미국 가면 사람들이 자꾸 변해지고  변질이 돼지는데 거기가 그렇츰 그 변질되니 나도 거기 가면 좀 변질돼지는가  한번 좀 가 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 좀 있습니다.

 그래 뭐 회로 초청하는 데도 많고 이렇게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그 평가가 안  가는 것과 가는 것이 둘을 비교할 때에 안 가는 것이 더 가치가 낫다 이라기  때문에 지금 안 가는데 거기 가는 것이 더 가치가 더 유익이 있다 하면 내가  언제든지 한번 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이 인간의 아름다운 말로 꾸민 인간 지식을 앞세우느냐  하나님의 진리를 앞세우느냐? 하나님의 진리를 앞세운다고 제가 말은 하지만  그걸 잘 자기가 구별해서 다'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요거' 여러 군데 가지  말고,  이단하고 우리가 싸울 때에는 이단하고 그랄 때 이단이 틀렸으면 또 딴거 딴거  자꾸 이래 가지고 딴걸 밟아나갔는데 '자, 이거는 그러면, 또 이걸 자,' '이거는  그러면' 이 질상 부르면 마귀란 놈은 눈치가 있기 때문에 제가 안 될상부르면  얼른 옮깁니다. '자, 이거는 내비 두고 자, 한번 이거 좀 말해 보자' 이랍니다.

그러면 그때만 안 옮기면 마귀 그놈은 그만 대가리가 깨져 버립니다.

 '아니다. 우리가 뭐 아직까지 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기야 모르지만  세월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또 우리가 성경을 당장 몰라도 나는 그 성경을  지금 대번에 성구를 대지 못하겠다. '못 하지만 성경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만드는  성경 아니고 뭐 세월 두고서 성경을 찾아가면서 옳고 그른 것을 시비곡직을  가리도록 하자. 현재 성구 모르는 것은 성경이 있으니까 뭐 한 달 만에 찾든지 두  달 만에 찾아도 옳은 거 찾는 게 문제지 틀린 것보다 옳은 게 낫지 않느냐?  그러니까 성경을 찾아가면서 우리가 하자.'  또 요건, 그거는 안 될상 부르면 '딴데로 옮기자' '아니다. 요것부터 판정을 해  놓고 요거는 네가 주장하는 것이 옳으면 네가 주장하는게 옳다, '또 내가 주장하는  게 옳으면 내가 주장하는 게 옳다 요것을 판정을 짓자. 이래 가지고 요거는  그라면 네가 딴데로 옮기자 하는 요거 지금 네가 옳으나 지금 이 성경을 이리  모든 성경이 들이대도 네가 옳으나 네가 틀렸나?'  틀렸다 소리 안 합니다. 마귀란 놈들 틀렸다 소리 안 해요.내가 틀렸다 소리 안  해요. '그 이것부터 가려라. 틀렸는가 옳은가 이것부터 하나 말하고 또 그 다음에  가자.' 대가리가 깨져 버렸습니다. 막 그만 도망을 칩니다. '에이 그거 자꾸 그런  것만 고집을 가지고 자꾸 투덜거리며 성경을 상고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옮고  그른 걸 찾아야 되지' '찾으니까 하나 찾은 것부터 이거 판정을 지워야 될 것  아니가?' 도망쳐 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이단자가 암만 와도 그까짓 거 소용이  없습니다. 자꾸 이단자에게 따라나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자기가 냉정스럽게 자기를 시험해서 확정을  지워라. 자기를 시험해서 확정을 지워라. 내가 여러 사건 말고 한 사건에서, 한  사건에 '이 사건이 이것이 어느 것이 진리냐?' 문제. 천하 인간 중론, 천하 인간의  공론, 천하 인간의 공론뿐만 아니라, 천하 인간의 공론이 큽니까 천하 인간이  큽니까? 뭐이 큽니까? 공론이 크요 인간이 크요? 이것도 몰라? 인간이 커. 공론  그거야 사람들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람이 크지 안해요? 공론보다는 사람이 큽니다.

 천하 인간 다 하고 하나님의 진리 조그만한 뿌스러기 하나하고 어느 게 크요?  진리가 커요. 얼마나 큽니까? 조금 커요? 무한히 커요. 이것을 가리켜서 평가라  말한 것입니다. 평가라 말은 하나만을 두고 가치를 말한 게 아니라 모든 것과  전부 대조해 가지고사 가치를 말할 때에 평가라고 말하는 것이오. 비판이라 하는  것도 하나만 말할 게 아니라 모든 것 비교해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평가하면 '이 모든 것보다 사람들보다 뽀스래기 진리로 그 진리가  무한히 가치 크다' 요 가치관이 이렇게 돼 가자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인간의  아름다운 말을 그것을 가치로 높이 둬서 서울에 신사적인 요새 그 문화된 말,  나는 요새 뭐뭐 누가 또 어제 가다보니까 뭐 세미나인지 뭐인지 세미나 나는  뭐인지 나는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세미날이 무슨 말이요? 여기 영어 아는 사람  누가 없나? 강의를 세미나라 하는가? 또 뭐이라 하더라 버스 그거 모인걸 그거  뭐라 하더라? 그건 또 터미날이구만. 나는 그까짓 놈의 말을 내가 배울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이미 아는 걸로 하지 이거 좀 진리 배우기도 대가리가  모자라서 지금 그런데 언제 그까짓 놈의 단어는 쓰니, '그래 문화 속에 사니까  그들이 다 아는 대로 몰라도 진리를 말하면 진리 속에는 인간 전체 뚜드려 뭉친  것보다 몇 억억만 배도 큰 성령이 그 안에 계십니다. 또 진리 그 자체가 능력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나는 역부러 할 때에는 더 좀 충격 줄라고 사투리 말을  씁니다. 사투리 말을 써요. 또 다른 사람이 좀 욕할 수 있는 그런 자극 충격 말  이래 씁니다. 이러니까 역부러 그걸 쓰요.

 왜? 저놈을 대항하는 데는 그거라야 되겠다 하기 때문에 그걸 쓰는 것입니다.

나도 뭐 그런, 나도 머리가 그렇츰 나쁘지는 안하는데 그런걸 만일 배울라고  했으면 그래도 뭐 '에이 비 시'는 알거라. 그때 나는 '에이' 자 하나밖에는 몰라요.

그거는 안 할라 해도 알아져 버렸어.

 제가 스물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먹을 때, 여덟 살 먹을 때인가 진주 성경학교  갔는데 그때 모두 영어를 가르치고 뭐 찬송 가르치는데 그때부터 힘썼으면 나도  어북 영어로 서로 이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말재주가 있어요.

이렇지만 '에이' 밖에는 몰라요. 그거 왜? 그거 그저 예수 그리스도 믿는 거 진리  이 신구약 성경이 외에는 딴 거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 거 이  들어오면 이 머리 그게 차지하기 때문에 내 두뇌가 그렇다 이래서 그랬는데 그거  내가 오해를 해서 손해 봤기는 받았어요.

 사람이 뭐 컴퓨터가 천억이라 했지? OOO 목사님 어디 있소? 천억이라  했습니까? 한 사람 머리 속에 컴퓨터가 천억이 있대요. 천억이 있으니까 천억은  기억할 수가 있다 말이오. 천억은 기억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도 뭐 해도  괜찮았는데 그만 나는 무능하니까 그라다가는 딴 거 못 하겠다.

 그 지금 후회가 있느냐? '내가 영어를 안 배워서. 찬송을 안 배워서.' 후회 한  내끼도 없습니다. 한 내끼도 없고 후회는 더 하나님 도리 이 십자가의 구속의  도리를 연구하고 배우는 데에 더 힘을 못 쓴 그것이, 전력 더 못한 그게 후회지  딴 거는 후회가 하나도 안 됩니다. 이런데 여러분들이 요것도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면, 우리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요, 둘째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잡은 구원의 도리요 이것을 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우리들이  속화 안 되고 구원 얻지 잘못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거  아름다움은, 지혜가 어디로 나오요? 말로 나오지. 말의 아름다움 또 방편의  아름다움 그 둘을 가리켜서 지혜와 말의 아름다움이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이라면 엉뚱한 탈선되기 쉽기 때문에 이랬어.

 이러니까, 자기가 '내 신앙을 떨어뜨린 자가 누구다. 내가 하나님 한 분만 아는  자에게 어만 걸 선악과를 보이는 자는 누구다. 하나님 한 분만 보는데 엉뚱한 걸  브게 하는 자가 누구다.' 하는 이걸 알아야지. '나는 요게 대해서 요렇게 내가 지금  감동을 받고' 나쁜 말로 말하면 자극 받았다 할 거고 좋은 말로 말하면 감동  받았다 할 거고 옳은 것에 자극 받았으면 그게 성신의 감화입니다. 딴게 아니오.

 성신의 감화 뭐 부드럽게만 하는 줄 압니까? 성신의 감화는 칼로 찔러서  죽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부드럽게 둥글둥글하게 보들보들한 명주 옷고름  모양으로 그런 줄만 압니까? 아니오. 성신의 감화는 칼이오. 그러기 때문에  좌우에 날선 칼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이러니까 자기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의 인성을 발하고 이런데 암만 그래도 우리를 구원하신  실질적인 방편은 십자가라 그말이오.

 하나님과 우리 구원하는 십자가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그거  그러니까 뭐 이런 말 저런 말 있지만 거게 어찌 됐든간에 그게 더 강하게 전하고  옳게 증거하고 이리 되기를 원하지 딴거를 안 원했다.

 '이런 거 이건 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라도 좀 다른 사람이 충격이 안 되고 잘  받아들이도록 할 수가 있고 또 그거 아름답게 그래 하면 좋지 않는가?'  사람들이라는 것은 어리석어서 이래 보다 보면 언제든지 자기 주관이라는 놈이  원수이기 때문에 자기 주관 그놈에게 좋은 데로 따라가는 거는 그거는 뭐  본능이오.

 위에 무거운 중량이 있는 것이 공중에 놓으면 아래로 땅으로 떨어지는 거는  그거 본능이라, 인간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거는 그거 본능이라. 이러기 때문에  거 거다가 본능에다가 못을 쳐 가지고 못 돌아 가구로 하는 그것이 권능입니다,  그거. 좋은 방편이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앞으로 설교를 하든지 할지라도 역부러 남을  그럴 거는 없지만 하나님의 도에다 중심을 두고 하나님에게다 중심을 두고,  인간은 우리는 하나님 생각하고 사람 생각하고 좋지만 하나님만 생각하면 사람은  절로 생각이 돼집니다. 하나님 좋게 하면 하나님 그분이 강도나 또 불량자 같으면  그분 좋게 하다 보면 나중에 선에 적이 되고 또 좋은 것에 적이 되지만 그분이  선이시요! 그분이 사랑이시요! 그분이 진리시요! 그분이 참이시요! 그분이 바르기  때문에! 그분만 좋게 하다 보면 참 바른 거 좋은 거 오만 거 그것은 자구 그  분보다 더 좋은 자 누가 있어?, 이라면 다 좋아진다 말이오. 그거 좋으면 사람  사랑하는 거 되는 것이지 뭐 딴 거 뭐 있어, 있기를?  이러기 때문에, 인본주의 신본주의라 하는 거,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지만 인본주의라 말은 내나 하나님이 거게 있다 그말이오. 인본주의인데 네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고 있다 하는 그 신본주의를 전재로 두고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고  중점으로 두고 거게다가 신경을 많이 기울이는 그게 인본주의라.

 설교할 때에 하나님과 진리, 사람이 뭐라 하든지 하나님과 진리를 바로 증거해야  되겠다 요게다가서 중심을 두지 안하고 이 사람이 어찌 되나 하다 보면 나중에  가서 그만 사람이 근본이 돼서 인본주의 되기 쉽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나는  서울에 있는 다른 교회는 말하지 안해요. 내 밑에 이와같이 우리와 같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말할 권리가 있어. 저거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거 욕하는  건 아니라. 여게서 이라다 보니까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본주의가 자꾸 돼  간다 그말이오. 자, 찬송가도 이백 곡에서 구백구십이 통일과 틀립니다.

구백구십곳이 통일과 틀리는데 이렇게 틀리니까, 이렇게 틀리니 우리가 한 그  찬송을 아주 막 저주 뭐 막 살해를 해야 될 그게 든지 그러면 통일이 그리  됐든지 둘 중에, 구백구십이 틀렸으니까 여게 대해서 어떻게 되느냐?, 구백 구십이  틀렸으니까 옳은 것은 아이들 말로 왕창 옳고 틀린 것은 왕창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거 구백구십이 틀리니까.

 이래도, 서울에서는 반대 운동이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지금도 뭐 자기네들  택해서 하기는 하지만, 반대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이랬는데, 그때 내가 누가  '그거 대답하시오' 하는 그걸 그때 내가 갑자기 말해서 대답할 수가 없었던데 그  뒤에 내가 생각하니까 '요게 진리다? 그때 내가 요래 대답했을 건데.' 하는 것을  내가 그만 모르고 그 뒤에 그 사람 물은 그것도 내가 잘 기억이 안 나요.

이래서, 그저 서울에 간 사람들은 인본이 쉽다 그말이오. 우리 그 OO목사 말이오.

OO목사를 내가 서울에 보내서 '네가 서울에 가서 속화되기 쉬우니까 속화되지  않고 그 서울에 물들지 않고 감염되지 않도록 이렇게 하라' 이랬는데 내가  OO목사님을 접할 때에 그분이 살라고도 애를 쓰고, 그분이 여게 부산 있을  때에는 양산동 기도산이 OO목사 가고 난 다음에 그 산이 웁니다. 그 산이 울어.

우는데 그 우는 눈물을 씻겨 준 이가 누구냐 하면 OOO목사가 우는 눈물을 씻겨  줍니다.

 그전에는, 서 목사님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산이 울어요. 또 저 꽃마을 기도원도  울었어요. 울었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큰 말이 나가면 새끼 말이 큰 말 노릇  한다고 이제 OO목사가 그 위로를 해 가지고 그 산이 위로를 받았었는데 그 후에  또 OO목사 가고 난 다음에는 OOO목사가 지금 그 산을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 아무 소용없어. 다 저거대로 가 가지고 그뭐 어떻고 어떻고. 또  O조사님, OO교회 O조사님이 거기서 그 산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기도산을  기쁘게 했습니다. 기도산을 기쁘게 했다 말은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했다  말이오, 산이 뭐. 산도 기뻐해요. 사람의 행동에서 산도 기뻐하고 곤충도 기뻐하고  새도 기뻐하고 초목도 기뻐합니다. 그것도 또 웁니다. 그 소리 안 하는 게 아니라.

들어보면, 우리가 둔해 그렇지 그들은 알아요.

 그랬는데, 그렇게 열심 있는데 서울 가서 어째서 부패해졌느냐 하는 그걸 내가  일찍부터 봤어. '저 사람이 보니까 벌써 아름다운 말에, 아름다운 말에 아름다운  표현, 표현을 아름답게 해야 된다. 서울에 그 아름다운 신사적인 그런 모든 표현  방법에 벌써 눈이 떴다. 눈이 뜨여서 자꾸 그 면을 지금 한다.' 그걸 내가 한 몇  달? 한 삼 개월 전에 내가 접할 때에 그걸 봤습니다.

 '이 사람이 말을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꾸며서 다른 사랑 상대방 듣기 좋게  이렇게, 요새 말로 문화요 또 아주 지성인들의 말로 그렇게 좀 개화된 말인데 그  말을 써야 된다고 거게 다가서 기울어졌다.' 그걸 내가 봤어.

 보고, 그 기울이다 보니까 여게서 배워서 뭐, 여게서 진리를 배운 여기 가 가지고  가보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거 쓰고 있으니까 그런 거 쓰고 진리는 가치로  두지 안하니까 속에 막 불이 나 가지고 칼이 나올 건데 '이게' 뭐꼬! 나는  정반대로 이 돌이 제일 욕하는 미련한 말을 쓰고 미련한 언어를 써 가지고 이  진리를 증거 하겠다!' 이래야 될 터인데 그게 속에 없어져 버렸어. 이래서 '이거  탈이다' 그래 내가 그런 말을 안 해도 지금 오늘 아침에 말해. 말하니까 듣고,  그래 그 뒤에 그분이 이거 그만 좀 대구나 이런데로 어디로, 부산은 일할 데가,  대구나 어디로 이동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 말하는 것이 동기가 어디서 나온  것은 모르지만 혹 그런 데서 나온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생명이 있으면 물이 빙빙 돌면 생명력이 강하면 물에 따라 돕니까 더 빨리  역류를 합니까? 역류해. 그러니까 서울 그 세력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자는  서울에 가면 모두 다 서울이 그러기 때문에 하든지 뭐이든지 진리로 막 찔러댈  것입니다.

 생명은 살기는 살았지만 고기도 다 죽어가는 놈은 물이 빙빙 돌면 역류를 못  해요. 역류를 못 해 끌려 내려가면서 그저 지느러미를 이렇게 흔들기는 흔들면서  끌려 내려가. 힘있는 놈은 뭐 돌아가나 뭐 저대로 역류로 싹 역행해 올라가.

이러니까 오늘 이게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그 사는 생명의 방법입니다. 이걸  무시하면 안 돼.

 어제 OO목사님도 '독재라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까' 이렇게 말해서 내가 거게  대해서 말 안 했는데 성경 전채가 독재인데 어떻게 말하겠소? 하나님이 주권  의지로 모든 것을 예정했고 주권 능력으로 창조했으니까 그 전체가 독재지  누구하고 타협을 했소? 이렇는데도 이 큰 것이지만 어두워서 이 독재니  민주주의니 하는 데는 생명을 내 놓을 만한 이런 것인데 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에 독재 말하는 것이 신사적인 아름다운 말만큼 가치가 적다고 보면 그것은 참  측량할 수 없는 어마어마의 과오입니다. 이해가 돼요? 되는 사람 손들어 봐요.

 그래, 세상은 어떤 세상인 줄 압니까? 지금 세상이 무슨 세상이요? 무슨  세상입니까? 과학 세상 아니요? 과학 세상이기 때문에 오늘 기독자는 과학의  반대자가 돼야 됩니다. 과학 시대니까 과학적으로 증거해야 된다는데 과학에  반대되는 그 사람이 승리합니다.

 과학 그것이 인본주의를 내놨소. 신신학을 내놨소. '이치에 이렇고 이렇고 이래  이렇게 이리 이래 해야 합리적이고 이치가 아니냐?' 이치보다 하나님 계신다.

'우리가 미군이 와 있고 이러니까 뭣이 어찌되고 우리가 단합을 해서 자꾸 국민  정신 통일로 이래 가지고 이렇게 해야 되고 또 이 정부가 하나 해야 될 터이니까  거기다 복종을 해야 되고 막 이렇게 뭐 이래 이래야 단합이 돼야 되지 않느냐? '  그 과학적이다. 너희들이 하나님 배반하고 똘뚤 뭉치면 하나님께서 바짝 깨  버린다. 하나님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 한 분 그분을 '이분에게 주권이 있으니까  전부 이분에게 달라붙어서 기도하자. 이분이 해 주시기를 부르짖자. 이분이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믿자. 소망하자.' 그런 몇몇 사람 가지고 이 나라가  국방이 되는 것입니다. 미군 가지고 국방 절대 안 됩니다.

 지금은 과학 시대고 또 무슨 지금 정치적으로 말하면 무슨 시대입니까?  정치적으로 무슨 시대요? 민주주의 시대라.

 또 무슨 화합 시대요? 인화 시대라. 인화 시대라서 지금 '이북이 이남이며 뭐  그래 쌓으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뭐 있으며. 그럴 게 뭐 있느냐? 서로  인화되지.' 인화가 최고의 가치가 있고 또 이 민주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우리는 민주주의에 적이 되는 말도 해야 되고 행동도 해야 되고 정신도 가져야  되고 노력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인화주의를 '그것도 쓸모 있다가 아니라'  인화주의를 반대, 그거 반대하면 안 되고 인화주의를 반대해서 신화주의를 주장을  해야 됩니다.'인화주의 그것도 내버릴 거는 아니지 않느냐?' 신화주의 되면.

인화주의 되지. 인화주의냐 '신화주의냐? 모든 사람들이 인화주의를 말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신화주의를 말해야 그거 그래도 신화주위가 뭐 아주 없어지지는  안하든지 하지.

 그래서, 저는 그걸 할라고 안 했는데 하나님이 그래 나에게 알려주셨어. 자꾸  우리 그 OOO목사님이 내게 대해서 선생님이야. 내 선생님이라. 선생님인 것은  그분이 자꾸 총공회는 독재주의라 하는, 독재주의라 하는 그 말에, 독재주의라  욕을 하는 바람에 이게 내가 그걸 깨달았어.

 '독재주의를 자꾸 욕을 하는데 이거 참말로 이거 독재주의가 이거 욕을 얻어먹을  것이가 이거 나쁜 거 아니가 고쳐야 되지 않느냐?' 독재주의를 인해 내가 기도를  했어. 기를 하니까 하나님이 쫙 열어 보여. '이 바보야. 신구약 성경은 전부  독재주의가 아니냐?' 마구 척척척 다 내놓는데 내게 화신이 있었어.

 지금은 저는 자꾸 이 민주주의화 민주주의 화를 말하고 있는데 나는 독재주의를  자꾸 말할 것입니다. 독재주의를 자꾸 말해서, 그래 이렇게 지금 민주주의가 온  세계를 휩쓸고 지금, 공산주의 저 하지만 공산주의 저거 해도 나중에 민주주의  됩니다. 민주주의 돼요. 그 공산주의도 거의 민주주의가 다 됐어요. 민주주의  되는데, 민주주의로 세계가 휩쓸려서 하나 됩니다. 중공이 지금 저 하는 것도 지금  민주주의에 물이 들어서 그렇소.

 OOO. 이해가 돼? 그냥 이해가 돼 속에 막 불이 날 만치 이해가 돼? 불이 날  만치 이해가 안 되면 생명이 없어  민주주의가 되는데, 이 전부 인화주의가 되는데 우리는 사람을 역부러 원수 될  건 아니지만, 인화주의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

우리는 독재주의를 자꾸 이래 해 나가야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밥이 되지 그리 안  하면 밥이 안 돼.

 이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뭐 사람이  두려워서? 하나님에게 조그매라도 걸릴까, '이거 뭐 사람 두려운 게 아니오.

바울이 사람 두려워했으면 인본주의요. 이 두려워하고 떤 것은 하나님에게  거리낄까? 하나님에게 마찰이 될라? 혹 하나님을 저버릴 일이 될까? 심히 떤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두려움을 인해서 회개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절절절 매니까 그래  회개한 줄 압니까? 암만 매 보십시오, 소용 있는가? 그 아내가 남편이 아내를  뚜드리다 보니까 뚜드리는 가운데 매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 매보다도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라도 혹 하나님에 조금이라도 거리낄까 싶어  두려워한다.' 그 하나님 두려운 걸 보이기 때문에 그 남편을 회개를 하나님이 시켜  주시는 것이지, 남편 두려워 벌벌 떨고 남편이 주일날이라도 오늘 놀러 가자하면  놀러가고 하는 그까짓 거야 생명이 없는 인간인데 뭐 그거 보고 하나님이 그  남편 회개시켜 줄 줄 아요? 아니야.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상대해서 사람을 앞세우고  그렇게 내가 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앞세워서 사람이 듣기 좋아하나 싫어하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 이해를 하나 안 하나?' 거게다가서 가치와 중점을 두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러니까, 이 내가 이래 설교하면서 설교하고 전도하는데 여게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나 안 하나 뭐 거게 차리다 보니까 사람은 생각할 것 없어. 하나님의  성령이 같이 하나? 같이 하면 사람에게도 그 이상 더 잘할 수 없는 것이지 뭐,  어디 하나님이 나쁜 거 같으면 그분 생각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 틀리지만  하나님이 사람보다 좋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어찌 되나? 또 하나님의 이  실지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와서 어찌 되나 여게다 강조를 해야 될 터인데.

 내가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 '나를 설교를 못했다 하는데 내가 '어' 아'도 다  요대로 녹음기와 같이 하는데 왜 설교가 틀렸다 하니 그거 무슨 말입니까?' '네가  그러기 때문에 그게 틀렸다. 너는 설교할 때 말에, 단어 그 사람 말에다가 가치를  둬 가지고 그걸 수사학을 공부해 가지고 미꿈하게 할라고 애를 쓰지만 보이지  안한 성령과 능력을 네가 보지 않기 때문에 그래 틀렸다. 그러기 때문에 네  설교에는 틀려서 암만 네가 그래 가지고 해도 그거 회개 않으면 목회 안 된다. 네  설교에 이 하나님이 와서 같이 해 주시나 안 오시나 능력이 역사하나 안 하나  거게다가 다 중점을 두고 하면 목회가 성공하지 그렇지 않으면 목회 성공이 안  된다.' 그것을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 지혜를 말하노니' 이거 중생된  자들이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인 것들이라'  이러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뭐이냐 하면 우리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쳐 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라.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라. 바른  길, 바른 행위, 바른 판단 그게 지혜, 옳고 바른 것이 그것이 지혜지 인간들의  듣기 좋은 한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나는, 서울에 사람들에게 나는 큰 선물을 지금 준다고  믿고 내가 말합니다. 요걸 거석해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도를 옳은 것이면,  나는 자꾸 이 인간의 이거 표현하는 단어, 또 그 술어, 또 그 모든 사람들의 귀,  사람들의 기분 여게다가서 내가 마음을 기울였고 하나님 그분 한 분에게만  기울이지 안했다. 요것이 나의 흠점이다.' 하는 것을 깨달으면 살 것이고,  '요 점을 나를 약화시키기를 내 친구가 약화시키더라. 어떤 신앙의 동역자들이  약화시키더라. 가정에서 약화시키더라. 아내가 약화시키더라.' 시키면 바로'그것이  뱀이라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말은 안 해도 뱀이라 소리는 안 해도 속으로  강하게 이래 가지고 있어야 돼지지 안 하면 헛일입니다.

 아합왕이 이세벨을 어떤 자인 줄 몰랐기 때문에 그가 민족도 망했고 자기도  망했고 비참한 자가 되고 자손도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할 이시요. 그분을 바라는 자는 결단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합니다.

 어짜든지 우리는 꼭 발라야 됩니다. 아무리 부자간이라도 내 믿음을 손해 보이면  요게 마귀라는 것을 말은 안 해도 '이 속에 사탄이 들어서 뱀이 들어서 뱀이  말한다' 뱀이라는 걸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뱀이다. 보자. 또 만날 때 보자. 여기  뱀 나오는가 보자. 또 만나니까 뱀이 나왔다. 두번째 나왔다.' 또 만나보니까 뱀  나와. '세번째 나왔다' 이래서 '이는 뱀이니까 삼가 조심해야 되겠다' 이것을 안  가리면 안 됩니다.

 되나 안 되나 다 목회도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것 있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하는 것 있는데,  이거 둘 다 돼요. 세상에 하나님 반대하는 공산주의도 저렇게 무리가 큰데 큰  무리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래도 금요일날 이 와 가지고, 안 들으면 별수 없어. 왜?  사람은 그래 아니고 하나님이 그 시대 시대마다 들고 쓰는 사람이 있어. 이런데  오면 그래도 좀 속화가 덜 되고 이런데 여게 금요일날 오는 것을 그것을 깨뜨린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그걸 내가 알고 있어. 몇몇 사람들이 깨뜨린 것. 그 깨뜨린  데 대해서 그게 하나님 앞에 상급이 되든지 벌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될  겁니다.

 내가 자꾸 여기 와서 배우기를 원하는 거나, 나한테 배우는 사람 원하는 그거  아니야. 그거 사람들 살리는 것이지, 너무 자꾸 내한테 배울라고 쌓아서 내가 지금  기운이 없기 때문에 내가 거기 대해서 거석하지 안하는 사람이라. 오해를 하면 안  돼. 마귀 그놈을 자꾸 거꾸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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