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0:23
메어다 놓은 일과 구원해준 일
1986. 9. 22. 새벽(월)
본문:사도행전 3장 6절∼13절 상반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의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어제 오전 오후에 이 말씀을 우리가 증거받았습니다. 사람은 통틀어서 어떤 사람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이 두 가지 일을 해 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가 구걸하는 곳에 메어다가 놓는, 앉은뱅이를 메어다 놓는 그 일을 평생 하든지 또 이 베드로와 요한이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이 일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는 일을 평생 하든지 나면서 앉은뱅이를 구걸하는 곳에 메어다 놓는 그 일을 평생 하든지 사람의 하는 일은 두 종류뿐이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명상하고 생각하여 과연 인생의 하는 일은 이 두 일뿐이다 하는 것이 확실히 깨달아지고 확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애기를 품고 젖을 먹이는 그 젖먹이는 일도, 또 학교에 보내서 학비를 대서 공부를 시키는 일도, 또 이렇게 저렇게 출세하고 입신 양명하게 하는 모든 일도, 또 전도해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 믿는 사람 되게 하는 일도 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나면서 병신으로 난 이 앉은뱅이를 구걸하는 곳에 메어다 놓는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목사노릇을 하고, 권사노릇을 하고, 권찰노릇 장로노릇을 하고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교회에 뭐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을 채워 놨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시켜 주지 못했다고 하면은 다 나면서 앉은뱅이된, 그 앉은뱅이로 난 그 병신을 그대로 구걸하는 곳에 메어다 놓은 다 그 일들인 것입니다.
뭐 안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믿어서, 자기가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 가지고 학습 세례를 세우고 또 집사 장로 목사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기독교의 구원은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케 한 거게서부터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시켜 주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다 구걸하는 일 해 가지고 같이 나눠 먹는 일, 교회에 교회 운용에 출몰꾼이나 만들어서 그저 연보나 하고 이렇게 출몰이나 하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이 인생에게 불신자의 그 모든 시은의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한다든지 봉사의 일을 한다든지 또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베풀고 봉사의 일을 한다든지 어쨌든지 그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시켜 주지 못했다면 다 구걸하라고 메어다 놓는 사람인 것을 여기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것을 깨닫고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과연 그러한가. 얼마든지 따져보고 다른 성경을 상고해 가지고 자꾸 깊이 깊이 따져보십시오. 그러한가. 이것은 천지가 변해도 변치 않는 정평입니다.
그렇게 메어다 놓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행한 일은 뭐인가? 그 사람이 찍해야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항상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서 자기를 유익되게 하려는 사람 또 암만 몇십 년이 지나 가도 날 때 병신으로 난 그 병을, 인간병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인간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은 제가 뭐 어떤 종교 창설자가 되고, 도덕가가 되고, 철학가가 되고, 어떻게 자비가가 되고, 자선가가 됐다 할지라도 따져들어가 보면은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을 속였고 또 저도 속았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유익되게 하려는 그 도모 외에는 아무것도 섞인 것이 없습니다. 요것을 좀 심령이 밝아서 명상해 가지고 확고히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날 때 병신된 원죄와 본죄로 죽은 자로 난 그것이 세상에 사는 끝날까지 있는 그거는 다 죽는 일이 끝난 것입니다. 다시는 생명이 없고 부활하는 것은 또 심판받아서 영원 멸망받기 위해서 부활하는 것이지 그에게는 다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죄와 본죄로 사망 아래에서, 정죄와 저주 아래에서 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공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 이거 외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없습니다. 왜?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그 원수가 서로 화친될 수 없습니다. 또 자기의 과거 현재에 범한 그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합니다. 또 그 사람은 성신의 감동을 받지를 못합니다. 또 그 사람은 진리를 모릅니다. 아무리 신구약 성경을 외운다 할지라도 진리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남에게 대해서는 이렇게 뭐 죽은 사람을 이용해 먹었지, 죽은 사람을 이용해 먹었지 저도 마귀의 사람이 돼 가지고 마귀의 심부름꾼 돼 가지고 그 사람을 평생 이용해서 마귀의 수입이나 시켰고 사망의 수입이나 시켰고 멸망의 수입이나 시켰지 아무 그 사람에게는 유익을 끼친 것이 없습니다.
또 자신은 어찌 됐느냐? 이 수고를 많이 했지마는 그 동기와 목적과 결과가 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기는 죽는 날까지 수고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배신을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래 놓으니까 죽고 난 다음에도 무엇을 할 줄 알아도 뒤에 다 원망 불평합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자기가 지옥에 가서 있어 보니 자기 형제에게, 거기서도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윤리는 대단히 있는 사람인데 자기 형제에게 기껏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해 준 것이 그 사람 동생 형제들을 멸망케 한 거뿐이기 때문에 그걸 후회했습니다.
자기가 동생에게 평생 한 그 일이 동생들을 멸망 가운데 빠져서 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지 구원한 것이 안 됐다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간청해 가지고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우리 형제 다섯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이 유황불 구렁텅이에 오지 안하도록 좀 미리 좀 소식 좀 전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자기 한 일이 그 일 안 하고 유황불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그 일만 했기 때문에 후회하면서 그렇게 소식 전해 달라 했습니다. 이거는 비유가 아닙니다.
이거는 비유가 아니고 실상의 한 사건을, 한 사건을 끌어다가 우리에게 주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뭐 자기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자녀를 그렇게 누구보다도 유별히 사랑해 가지고 또, 자기는 많은 후배들을 유별히 사랑해 가지고 어떻게 교양했다고, 어떻게 양육했다고 제딴에는 기대를 가졌지마는 마지막에는 다 원수가 되고 맙니다.
왜? 다 끝까지 인도한 것이 다 멸망받는 데로 인도했고, 또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다 놓치고 멸망만을 일생 동안 하도록 공부 가르친 거는 멸망을 더 톡톡히 잘하도록 또 가속도로 하도록 멸망을 더 범위 넓게 양이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거는 다 자기를 망치게 하는 거뿐이지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다 배반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베드로는 “나는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름을 준다 이름으로 걸으라.” 할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줬을 때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일어서서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줬을 때에 그 사람은 금생에서도 감사하면서 따랐고 또 영원 무궁토록 그에게 그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 됩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도리와 그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과 이 모든 세상적인 혈육의 것과 둘이 아롱아롱하고 그 중량이 세상이 높은 사람은 어떤 때가 되면은 진리 버리고 다 혈육으로 따라갑니다. 혈육으로 따라갑니다.
내가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혈육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결국은 그대로 멸망하고 마니까 그것을 하라.’ 하니까 목사들 가운데서도 ‘그뭐 정치가 이해가 안 돼서’ 정치가 반대된다 말은 그말 하는 것을 반대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결국 따라가고야 말았어. 따라가고야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예수 믿는다고 해도 자기 혈육 정실에 관계가 되면 나중에 그리 따라가 버립니다. 그거는 아직까지 앉은뱅이가, 앉은뱅이가 지금 날 때에 병으로 난, 그 원죄 본죄로 병난 그것이 중생만 됐지 그 심신은 완전히 성화되지를 못해 그런 것입니다. 성화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화된 사람은 혈육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니 그 사람에게 몇 가지를 줬느냐? 다섯 가지를 줬습니다.
다섯 가지 준 거 그거, 그거 이해가 됩니까? 하나는 날 때 병신으로 난 그 사람을 완전히 성한 사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사람은 사죄 칭의 화친을 받아 가지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사람 됩니다. 새사람 됩니다.
또 둘째로는 뭣 됐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구걸로 평생하는 사람이 구제하는 사람 됐습니다. 이 성령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위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이 성령의 사람이 된 거만치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 진리와 성령에 피동되어서 하는 것은 남을 책망을 해도 그것이 위함이요, 다른 사람을 듣기 좋은 말해도 위함이요, 다른 사람을 그 아주 징계를 줘서 매를, 종아리를 때려도 위하는 것이요, 있는 것을 빼앗아도 위하는 것이요, 없는 것을 줘도 위하는 것이 됩니다.
왜? 영감대로 하는 것은 고거 바로 옳게 참되게 하기 때문에 없을 때에 없게 하고 있을 때에 있게 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외에는, 영감과 진리대로 움직이는 그 움직임 외에는 인간을 위하는 움직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 봐요. 있는 가.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속이고 속는 것이라, 속이고 속는 것이라, 다른 사람을 속이고 속는 것이라.’ 이랬어. 남을 속이고 속는 것이라. 이 범위를 눈이 어두워서 범위 좁게 봐 그렇지 범위를 넓게 잡으면 전부 남 속이고 남에게 속고, 속이고 속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는 것을 디모데후서 3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또 세째로는 뭐 했습니까? 녜, 세째로는 그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하나님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서 목사가 돼 가지고 수십 년 목회해도 설교 들어 보면 ‘저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다.
만난 사람이다.’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인간의 무슨 감정이니 뭐이니 이런 거 가지고 꽁하고 항상 남의 욕이나 할 줄 알고 하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 못 만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심판 만난 사람은 그런 일을 못 합니다.
공연히 제것이 아니라고 남의 것이라고 옳은 것도 정죄하고, 또 저거 교파 것이 아니라고 욕이나 하는 그 사람은 예수를 암만 믿어 목사 장로가 돼도 예수를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심판도 보지 못한 사람이요, 진리도 보지 못한 사람이요, 중생은 됐는지 몰라도 옛사람으로 살지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그 사람을 하나님 만나게 하는 그 일을 하지 안했으면 그것은 내나 출물꾼 만드는 데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만났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게 했어.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 시편 73편에 말하지 안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모든 것이 다 뒤집어져 버립니다. 하나님 만나면 인간 지식이 완전히 그거는 속이는 지식 속는 지식 마귀의 지식이요,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라 하는 것을 하나님 만난 사람이라야 알지 그전에는 암만 들어도 입술뿐이지 속으로 확실히 믿어지지 안하고 인정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네째로는 뭐 했소? 예? 네째로는 과거에는 병신으로 그와같이 구걸하고 있으니까 항상 불만 불평 비관 원망 낙망 시비 이런 그 고통이 그 마음 가운데 가득이 찼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기 전,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여러분들이 그걸 몰라서 경험이 없어서 그래요. 뭐 세상 것을 잡기까지는 ‘이것만 잡으면 나는 소원 성취됐기 때문에 만족하겠다’ 뭣이든지 어리석은 자야 잡아 보라. 잡아 보라. 잡아 보고 난 다음에는 후회입니다. 잡아 보고 난 다음에는 그것이 만족이 없어.
어떤 미인을 보고서 ‘요 미인을 내 아내 삼으면, 요 미남을 내 남편 삼았으면,’ 고것도 그렇습니다. 미남 미인 남편 삼고 난 다음에는 그 암만 삼아 봐도 자기에게 삼기 전에 그렇게 소욕하고 그렇게 원하던 그 만족이 없습니다. 그 자꾸 불만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 결말은 다 만족하지 안하고 다 무엇인가 또 그거 외에, 이거 가지고만 나는 이것만 하면 고만 만족할 줄 알았는데 아니라. 이제 또 만족한 게 뭐인가? 또 찾아가 자기가 만족이 없으니까 불만이라 만족을 찾다가 죽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좀 생각해 봐요.
자기가 정권 잡은 사람은 이만 하면, ‘정권 잡은 저 사람은 만족할 거다’ 아니야. 잡고 난 다음에는 그것 가지고 또 만족이 안 돼 뭐인가 만족을 찾다가 잡을라고 하다가 못 잡고 마지막에는 낙망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 그 말이오.
이랬는데 자, 그때에 수백 명이 거기 있었는지 수십 명이 있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 명 이상은 있었을 것입니다. 수십 명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 수십 명 가운데에 제일 기쁘고 만족하고, 기쁘고 만족하고 평안하고 소망이 넘친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제일 기뻤겠습니까? 누가 제일 소망이 컸겠습니까? 누가 제일 감사했겠습니까? 누가 제일 희망이 컸겠습니까? 내나 나면서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 이제 그 성한 사람으로 나은 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준 사람은 그 사람은 인간 가운데에 가장 행복감을 가지고 만족과 쾌락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만들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뭐입니까? 녜? 다섯째로는 뭐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아, 저거 저런 자식 낳으면 참 낳을까 겁이 난다.’ 이래 가지고 요새는 모두 아이 배고 난 다음에는 약도 못 먹는답니다. 아이 배고 난 다음에 약 먹으면 그 기형짜리 낳는다고 이래 가지고 한약방이 그만 세월이 안 나요. 아이 배고 난 다음에 약을 먹으면 좀 강건해진다고 보약도 먹이고, 또 해산할 때에 순산도 하게 한다고 이랬는데 그 약을 아무도 안 써요, 어째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 그러면 약 먹으면 기형아 낳는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 배고 난 다음에 비타민도 먹지 마라 기형아 낳는다.’ 이래 가지고 뭐 모두 다 기형아 낳기를 원치 안하고 다 그래 쌓는데 그 병신 보고서 다 비참하게 여기지 안했겠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천하게 여겼습니다. 천대해. 그렇지 안해요 그거? 나면서 앉은뱅이 모든 사람이 천하게 여기지 안했습니까? 천하게 여긴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거게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제일 인기가 집중되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어디로 갔으며 모든 사람한테 제일 인기 집중이 누가 됐습니까? 누구입니까? 그 사람에게 인기는 다 집중되고 말았어. 모두가 다 ‘아,’ 모든 사람이 다 그만 보고서 다 놀랬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소유시켜 주면 이 다섯 가지를 이웃에게 준다 그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다섯 가지를 줄 수 있어. 그 외에는 주지 못해.
그러면 다섯 가지를 다른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 하나 가지고 줬는데 또 자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은 죽자껏 메어다 놓고 뭐 그거 뭐 야단을 지겼지마는 그 사람은 베드로의 사람이 됐어. 이제 베드로의 사람인데 베드로의 사람에서 뺏아아가지 못해요. 빼앗아가지 못해요.
○○○요거 여러분들 요 간단 명료한 데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베드로는,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사람이 됐어. 이러기 때문에 “시몬아 네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 이게 사람 취하는 방법이라. 사람 취하니까 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이 있는데, 로마에 베드로전이 있는데 베드로전에 베드로 동상이 있는데 동상 그거는 이 천주교에서 만들었어요. 베드로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에 베드로 발꿈치가 그저 사람이 애를 써서 그래 좀 날뛰면은 그발꿈치가 입에 대일듯 하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베드로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걸 입으로 핥았든지 빤들빤들해요.
요새 위생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입에 댔으면 더럽다고 그럴 건데 더럽고 어짜고 거기 간 사람은 다 베드로의 발꿈치를 핥아서 지금 빤들빤들 하답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은지 오래 됐어요. 그럴 거야.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손 양원 목사님이 그때 순교할 때에 뭐 내가 여기 말을 들으니까 거기 총 맞아서 나온 그 상처에 마구 서로 거기 입을 대고 입 맞출라고 야단을 지겼다고 하는 그런 말 들었습니다. 그게 다 본능적으로 영감으로 그래 돼, 영감으로, 영감으로, 뭐 외식이 아니고 영감으로 그렇게 되는 거라, 영감으로, 성신의 감동으로.
그렇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어찌 됐습니까? 모든 사람이 거게 있는 사람 가운데에 ‘저는 천사가 저게 뮈꼬? 저 뭣한 사람이고?’ 이래 가지고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하면서, 저는 천사같이 이거 무슨 하나님같이 이렇게 이래 되고 보니까 아무래도 이 영광을 자기가 받아 안 될 터이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주목하고 나에게 자꾸 영광을 돌리느냐. 내 개인의 경건이나 권능으로써 한 줄로 아느냐? 아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신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 하나님의 동등될 것이고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마는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워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한 이거 때문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났고 요 복종해, 죽기까지 복종한 이 복종하신 신인양성일위를 영화롭게 해서 이게, 이런 날 때부터 된 병자가 나았다. 이렇게 원죄와 본죄로 죽었던 수억억억도 넘은 모든 성도들이, 원죄와 본죄로 죽은 자들이 다 피와 성령과 이 진리로 다 중생됐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 됐는데 하나만 잠깐 더 말해 주고 말겠습니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그러면 여러분들 이 이름이라는 그것은 사죄 운동, 칭의 운동, 화친 운동, 또 영감대로 순종하는 운동, 진리대로 순종하는 운동,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확실히 믿는 이 운동, 확실히 의심 없이 확실히 믿는 운동, 이 확실히 믿으면서 이 영감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이 운동, 이 운동은 돈도 되고 지위도 되고 권세도 되고 영광도 되고 존귀도 되고 금생에 모든 성공도 되고 내세에 성공도 되고 다 됩니다, 이 운동은.
우리가 이 운동을 하지 안하고 요행심과 그 모든 복술을 써서 그렇지 자기가 ‘나는 이거 진리대로 살겠다, 영감대로 살겠다, 나는 사죄받았기 때문에 사죄를 떠나지 않는다, 칭의를 받았으니 칭의를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는 배반치 않겠다.’ 요 다섯 가지 운동만 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병신이라도 존귀한 사람 되고 또 어떻게 악인이라도 의인될 수 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존귀한 사람 됩니다!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요걸 믿으십시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