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00:52
말세준비
1987. 4. 18. 새벽 <토>
본문: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지난밤에 사람이 추측할 수 없고 추론할 수 없고 다만 그 순서대로 일순서를 하게 되면 이순서가 필연적으로 하게 되고 이순서를 하게 되면 삼순서가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그 필연성을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자의 그 신앙 행위는 거개가 다 필연성입니다. 하나 하면 둘 하게 되고 둘 하면 셋 하게 되고 자꾸 이렇게 되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 믿으면 둘 믿게 되고 또 셋 믿게 되고 자꾸 이래 되고 그러면 하나 안 믿으면, 일호를 믿지 안하면은 이호는 절대 알지도 못하고 이루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 그 순서적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욕심쟁이는 그것을 실행하지 안하고 자기가 무엇을 해 보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책상 위에서 제가 일생 동안을 성경 연구한다고 하지마는 그 사람은 안된 방편을 쓰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진리는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제까지 참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다 실행하는 무식한 사람 가운데서 다 나왔지 유식한 학자들은 어지럽게만 했지 진리를 바로 찾은 사람들은 많지를 못합니다, 있기는 있지마는.
있는 그 사람들은 또 다 학자라는 그 위치에서도 자기네들이 아는 대로 실행하고 실행한 가운데서 또 깨닫게 되니까 그것을 발표하는 데가 또 무식한 사람보다 유식한 사람이 발표를 더 잘하기 때문에 더 유능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자기가 행하지 안하고 무엇을 알아보겠다 하는 자들은 다 헛된 길을 걸어서 인본주의가 다 나왔지 신본주의는 나오지 안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자기가 신앙 생활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을 뭘 보아서 자기가 알 것이냐? 열매를 보아서 알도록 그 방편을 취해야 된다. 열매가 바로 되면은 그 위에 나무가 바로 된 것이고, 감이 열면 ‘감나무가 바로 심겨져 있다’ 자기는 감나무 심은 줄 알았는데 밤이 열리면 ‘이거는 감나무가 아니고 밤나무다.’ “나무를 모르거든 그 열매를 보아 알라” 이랬어.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 나무를 모르거는 열매를 보아 알라.”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모르는데 열매 보니까 그거 무슨 나무로구나 알 수 있고 또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다. “열매를 보아서 알라” 그 결과를 보아서 알 수가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랬는데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 요구돼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이 이루어짐으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 이루어짐으로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뭐인가? 그는 자기 세상이 고독해지고 쓸쓸해지고 땅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나 의지할 것이나 바라볼 것이 없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것밖에는 바라볼 게 없어,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것.
왜? 어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은 모든 것 다 해결짓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것만 보자.’ 그러면 주님이 어서 오시면 모든 것이 다 되어지기 때문에 그날을 바랄 수밖에 없고 그라다 보니까 자기의 모든 마음은 그리 기울어져서 간절히 그날에 대한 것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요는 지금 거룩한 행실 이것이 문제인데 거룩한 행실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이 거룩한 행실인가? 구별을 해 가지고 참에 도달한 행실을 가리켜서 거룩한 행실이라 말합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은 참이라는 완전이라는 거기에 도달하는데 도달하는 모든 순서 과정을 다 합해서 말할 때에 거룩이라 이렇게 말하고 또 경건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에게 대해서, 행위에 대해서 물론 행위도 경건하다 하지마는 그 사람이 되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거룩은 행실 되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경건은 사람 되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물론 경건한 행위도 있지마는 경건은 사람을 주로 해서, 거룩한 행위를 하면은 경건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이래서 거룩한 행실로 인하여 경건한 사람이 되어지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날 재림의 날, 이 모든 심판의 날이 자기에게 그것만 소망하게 된다. 심판의 날만 소망하게 되고 또 거기에 모든 마음이 다 기울어지게 된다 하는 것인데, 거룩한 행실은 어떤 건고 하니 참에게 도달하는 것, 참에게 도달하는 것, 완전에 도달하는 것, 옳은 것에 도달하는 것, 그러면 이것이 거룩한 행실이오. 경건은 하나님에게 도달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 경건이요 거룩은 진리와 결합되어지는 것이 거룩입니다.
진리와 결합되는 것이 거룩이요 경건은 이것이 이제 거룩을 이루어 가지고 가면 나중에 경건이라,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이렇게 결합이 되어지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생활 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먼저 진리와 나와 하나가 돼야 되고 또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와 나와 하나되어지는 데는 어떻게 하면 진리와 나와의 하나되어지는가? 요것을 지금 오늘 아침에 말할라고 합니다.
진리와 나와 하나가 되어지는 데는 그것은 양심을 써야 됩니다. 양심을 쓰지 안하면은 진리와 자기와는 하나가 안 됩니다. 왜? 자기의 생각이나, 소원이나, 마음이나, 계획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욕심이나, 기쁨이나 뭐 이런 데에는 이 미혹의 잡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니까 미혹의 잡것들 이런 것들을 다 제해야 바른 길 가지 미혹의 잡것의 갈래길이 뭐 수백 수천이 그 사람의 지식이 넓으면 넓을수록이 미혹과 갈래길이 많습니다. 또 그 사람의 신앙이 장성하면 장성할수록이 시야가 넓기 때문에 그 잡것들이 더 많이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잡것을 헤쳐서, 거룩이라 하는 건 잡것을 헤치는 것이오. 이건 이래 구별해 아니다 아니다, 자꾸 아니다 헤쳐 나가는 것인데, 헤쳐 나가는데 아니라는 것을 알라고 하면은 어찌 알아야 되느냐? 알라 하는 것은 양심을 써야 알지 그리 안 하면 양심을 안 쓰면 모릅니다.
양심이 뭐인데? 양심을 성경에 가리켜서 눈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몸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다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것처럼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의 마음먹는 것이 전부 어두워지고 마음에 눈이 밝으면 그의 마음먹는 것이 다 밝아진다.
이래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빛이 어둡다 하는 그 빛이라 하는 것은 곧 우리 자연의 빛 우리 인간 자체의 빛을 말합니다.
인간 자체의 빛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무슨 빛이 있느냐? 인간에게는 빛은 없는 것입니다. 빛은 없는데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빛입니다.
“너희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빛이 어두우면 얼마나 그 어두움이 크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네게 이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하는 반사 작용을 하는 그 기관이 절단나면 너는 빛을 받아서 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 그 어두운 것이 얼마나 어둡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반사기라, 반사의 기관이라. 빛을 받아서, 마치 지금 햇빛이 돋았을 때에, 해가 빛을 가지고 있는데 그 빛을 여기 거울을 가지고 이래 거석하면 이 거울이 그 햇빛을 받아 가지고 반사해서 저리 비추지 않습니까? 만일 제가 여게 이 등이라도 이 밝은 등을 이래 가리키면 이래 면경 말이요, 거울 가지고 그 빛을 받아 가지고 이래 거석하면 저 뒤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 눈에 대면은 그 눈이 거석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난하느라고, 언제 내가 설교하며 보니까 뭣이 눈을 부셔서 거석해.
그거 또 어데 봤는지 모르겠어. 보니까 조그만한 아이가 말이요, 요만한 거울 가지고 요래 딱 비취니까 요래 비춰지거든. 반사가 되거든. 반사가 되니까 그래 내 눈에 딱 대이니 내가 부셔서 안 되겠다 말이오. 그게 반사하는 것입니다. 빛을 반사하는 것.
그러면 우리 속에는 빛은 없는데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의 반사를 받느냐 하면은 지식의 반사를 받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교인은 불교인의 양심이 되고, 또 유교인은 유교인의 양심이 되고, 또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양심이 되고, 기독자는 또 기독자의 그 양심이 됩니다.
그러면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이냐 하면은 자기가 인정하고 있는 지식, 자기가 ‘이것은 옳다’ 인정하고 있는 그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성경에 보면은 양심이 화인맞았다. 화인맞았다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도장을 꾹 찍었으면, 이렇게 무슨 계약이나 써놓고 도장을 꾹 찍었으면 그 계약에 대해서는 도장 주인이 그 계약에 대해서 주인입니다. 책임을 집니다.
그러면 이 증서를 써놓고 도장을 찍었으면, 그 도장 찍었으면 그 증서는 누구의 증서입니까? 누구의 증서가 돼? ○? 도장 주인의 증서라, 도장 주인의 증서.
양심이 화인맞았다 그말은 양심에 주인이 생겼다 그말입니다. 양심에 주인이 생겼다 말은 그것은 못쓸 양심이 됐다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 화인맞은 자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에 주인이 생기면 양심이 못쓸 양심이 되는 것이오.
양심이라 하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세계에 신학자들 가운데에 양심관이 각각 다릅니다. 양심관이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인적 요소가 아니라 신적 요소라, 양심은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했다.’ 그렇게 신적 요소로 보는 그런 양심관도 있습니다. 왜? 그거는 진실되게 양심의 활동하는 작용을 보니까 ‘이건 사람의 요소가 아니다. 그건 신적 요소다.’ 이래서 제가 한국에 온 선교사 쳐놓고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 중에서 내가 본 사람 가운데서는 스톡 박사라 하는 그분이 칼빈신학교 윤리학 박사인데 그 사람이 제일 와서 진리를 바르게 좁게 증거했습니다. 그때 뭐 일시에 야단이 났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그런데 그분은 양심관이 어쨌느냐 하면은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 있는 중보자다, 이러기 때문에 신적 요소도 아니고 인적 요소도 아니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그런 기관이요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봅디다.
그래서 그분이 보는 대로 말하면 그건 인적 요소가 아니라 그렇게 보는데 인적 요소는 인적 요소입니다. 너무 신비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인간의 요소가 아니라 그렇게 본 것이지 실은 인적 요소는 인적 요소입니다.
인적 요소기 때문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네 빛이라고 말했어. 네 빛이라고 말한 그것은 사람의 빛이라고 말한 것인데 사람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빛이 없는데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작용하는, 반사하는 그 작용을 하고 있는 그런 지체라 그런 기관이라 그말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은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그것이 세례요한이지 세례요한은 세상에 온 빛이 아니라. 자기가 밝히 말합니다.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신데 나는 빛이 아니고 그 빛을 받아서 증거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했어.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라” 하는 그 빛에 대해서 모두 해석하는 것이 세상에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는 줄 알지마는 빛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빛은 없습니다.
없는데 “너희는 세상 빛이라” 그말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반사하는 것이 기독자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게 양심인데 어떻게 무슨 빛을 받는가? 그 지식의 빛을 받습니다. 이래서 불교인은 불교 지식의 빛을 받으니까 불교 지식에 불교인들이 이게, 빛이라 말은 깨끗하고 좋다 옳다 하는 것인데 불교인들은 자기네들의 불경 이것이 옳고 바르고 참된 진리라 하기 때문이 그들의 빛이 따로 있어.
불교의 불교인이 말하는 빛이 있고, 유교인이 말하는 빛이 있고, 사회주의가 말하는 빛이 있고, 공산주의가 말하는 빛이 있고, 민주주의가 말하는 빛이 있고 이러는데 이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오해를 해 가지고, ‘민주주의는 이거 순전한 기독교라’ 그거는, 그것 때문에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민주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가 기독교지 민주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독재주의.
강제주의는 아닙니다. 강제주의라 하는 것은 강제로 그걸 꼭 자기 사상에 주장에 끌어다가 강제로 하는 그게 강제주의인데 강제주의 아니고 독재주의라. 꼭 타협이 없이 혼자 자기 주장을 그대로 세워 나가는 이게 독재주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자라 그말은 독재주의자라 그말입니다. 이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도 하면, 언제 제가 한번 신학교 가 가지고 고려신학교 가 가지고 그때에 선거, 이 대통령 선거 때에 막 모두 다 ‘요번에 이 대통령이 선거에 안 되면 우리 교회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는 안 된다. 이러기 때문에 요번에는 꼭 이 대통령이 선거돼야 된다.’ 이래 가지고 전부 교회마다 강단마다 이 운동하기를 권찰 집사들은 전부 전도하는 책가방 속에다가 전부 이 대통령 선거 운동하는, 뭐꼬? 뭐라 하요, 그걸? 운동지 뭐라 하노, 그거? 멧시지라 하나 뭐라 해? 선거 운동하는 거? 종이쪼가리 요런 거 박아 가지고 나가지 않아? 팜프렛트인가 나는 그거, ‘어쨌든간에 그것을 전부 책가방에 다 넣어 가지고 전도하러 가는 척해 가지고 가서 집집마다 다 전해라.’ 그렇게 됐었습니다. 온 한국 교회는 다 그래 돼 버렸어. 그것도 큰 죄를 지었다 그말이오.
그래 가 가지고 저는 그때 이 고신하고 이래 가지고 있을 때라. 이래 가지고 있을 때인데 나는 참 뭐 아이들이 개밥에 뭐 꿀밤 돌린다 하더니마는 이 뺑뺑 돌려 가지고, 그래 나는 나 혼자만 고독하게 몰려 가지고 있는 판인데 그래도 더러, 왜 그런 말 하다가 자꾸 돌리는데 가서 보니까 그 말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래 그때는 배수윤 목사님이 거기 속해 있고 나는 거기서 그 인도로 내가 거기 가서 그냥 있었습니다. 있는데 뭐 아주 돌려 가지고 뭐 괴물로 이래 보고 있어요.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주 모아 가지고 ‘이번에는 꼭 이승만 대통령이 지금 당선이 돼야 된다.’ 그때 세 차례째인가 네 차례째인가 당선됐어. 그때 당선해 가지고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거게서 중간에서 데모 일어나 가지고 하야되고 말았어. 그때 그러니까 더 이분이 돼야 된다 하는데 나는 그때 가 가지고 ‘여러분들이 이거 하는 일이 우리 한국 교회를 망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둥그러이 이래 가지고, 그만 그래 놓으니까 자꾸 저거와 반대라 말이오.
‘왜? 이번에 이 대통령이 다시ㅡ삼선인가 얼마인가 되는데ㅡ요번에 대통령이 되면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기독교는 정 적이 됩니다. 또 하나님하고도 적이 됩니다. 기독교가 진리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 예수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지 이승만 대통령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입니까? 완전히 이거는 음행 음행 흉측한 신앙 음행입니다.’ 이래 놔 버렸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만 그 자리가 막 옥신각신 ‘요번에 그래 어짜든가 이래 하자.’ 한 덩어리가 돼 이래 하는데 그말 한 마디가 나가니까 마치 채소가 이들이들 자라 올라오는데 팔팔 끓는 물 찌뜨려 버리면 다 푹 자부라지는 것 모양으로 그만 그 꼬라지 됐어. 그래 놓으니까 ‘조거는 언제든지 저렇다.’ 요래 가지고 그랬습니다.
그래 내가 그때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강하게 말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거라.
왜? 그 선거 운동 전부 다 이라는데 그 반대하면 이 정권에서 대번에 모가지 날아가는 일이지마는 그래도 내가 강하게 말했다 말이오. 강하게 말하니까 뭐 옳은 말인데 어짤 것이요? 다 푹 쭈그러졌습니다. 쭈그러지고.
이랬는데, 내가 무슨 말 하다가 그말이 나왔노? 민주주의. 그래서 민주주의는 기독교주의인 줄 알고 공산주의는 하나님과 대립되고 이런 것인 줄 알기 때문에 해방 후에 내가 거창서 개명 있다가 읍을 내려오니까 그때 ○○○목사님이 그 교회 시무할 때입니다. 할 때인데, 그래 내려오니까 모두 ‘자, 우리도 건국 도상에서 지금 어짜든지 우리가 힘을 써서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된다.’ 이래 가지고 모두 다 야단을 지겼어. 그래 가지고 그때에 부산서는 교회들이 모두 대창을 만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전부 그라고 서울서는 또 십자가군을 만들어 가지고 그때 건국할라고 애를 썼어.
여러분들도 지금 벌써 사십 년이가, 해방이? 해방 몇해지? 사십여 년이 됐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라.
그래 가지고 그 운동을 하고 교회들마다 다 ‘우리가 아무래도 민주주의를 세워야 되겠다’ 이라면서 민주주의는 기독교주의고 공산주의는 무신론주의고 이렇게 했는데 공산주의가 무신론주의라 말은 그거 맞지마는 민주주의가 처리할 때에 ‘요래야 내게 물질적인 이건이 생기나 또 물질적인 손해가 생기나?’ 그러면 물질 이해를 위주로 중심으로 해서 그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양심은 무슨 화인을 맞았습니까? 물질의 화인을 맞았습니다. 알겠습니까? 또 요 사람은 자기 모든 걸 저런 걸 할 때에 자기는 공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공부하는 그걸 위주로 해 가지고 그래 택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요라면 내가 공부길이 열리겠느냐 조래야 공부길이 열리나?’ 자기는 공부길 그거 하나만 연구해서 공부길 열리기 위해서, 열기 위해서 자기의, 여자라면 정조도 팔고 또 남자라면 자기 명예도 지위도 인격도 팔고 자존심도 팔고 모두 다 지금 공부하기만 위주해 가지고 날뛰면 그 사람의 양심은 무슨 양심입니까? 무슨 인 맞았습니까? 지식의 인을 맞았어. 지식의 욕심. 지식의 탐심의 인을 맞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또 이것도 저것도 무슨 일이든지 ‘요래야 내가 정권을 잡겠나 조래야 정권을 잡겠나?’ 모든 범사를 자기 정권 잡는 데에 유리하도록만 해 가지고 그와 같이 지금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라면 그 사람의 양심은 무슨 화인을 맞았습니까? 정권 화인 맞았어.
내가 언제 내가 그걸 한번 그렇게 한번 생각했어. 모두 다 우리 나라도 지금 앞으로 정권을 누가 거머쥐나? 좀 이렇게 지금 하고 있는 인물을 한 댓 인물을 이렇게 내가 봤는데 거게 대해서 어떤 사람은 거게 보면 아주 그 야욕주의자가 있고, 야욕주의. 뭐라 하든지 자기 욕심만 채우는 그걸 가리켜서 야욕주의라, 사욕주의자나 야욕주의나 같은 겁니다.
야욕주의자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게서 인기주의가 있고, 그저 어짜든지 일이야 되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이, 이래야 다른 사람이 나를 많이 찬성할까 저래야 찬성할까?’ 인기주의 그런 인기주의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거게서 그저 말하자면 그래도 ‘옳은 것을 해 보자’ 이래 가지고 건설주의자들이 있고, 내가 그때 몇몇을 했는데 지금 갑자기 생각 안 납니다. 다섯을 말했는데, 그래도 현정권이 제일 낫습니다. 알겠습니까? ‘저 백 목사는 여당이다.’ 내가 여당이 아니라 정평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대통령이 잘했습니다. 뭐라고 쌓아도 잘했어. 이승만 대통령이 잘했는데 박 대통령이 잘했습니다. 그때 모두 다 그 전부 박 대통령과 다 적이 됐었어. 적이 됐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부부가 다 우리 나라를 위해서 생명 바쳤기 때문에 다 국부요 국모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라는 데 대해서 막 원수가 된 그런 사람들 많아, 내가 그말 한다고. 그게 정평입니다, 정평이오.
또 그다음에○대통령도 잘했습니다. 박 대통령 이는 좀 적극성 있게 건설을 해서 대립이 많이 생겼고 이 사람은 인화적으로 하면서 슬기롭게 해서 아주 우리 나라를 굉장히 많이 성장을 시킨 사람이라.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미혹을 받고 침노받지 안해.
그분이 조금 실수한 것은 자기는 하지 안했는데 자기 부인이 들어 가지고 공연히 이거 금융기관에 뭐 잘못해 가지고 조금 말썽이 났는데 그거는 뭐 그런 일 할라 하면 그 옆에 가족, 속한 가족들이 공연히 월권을 쓰고 남용한다 말이오.
나도 내가 뭐 교회 목사지마는 우리 가족들은 공연히 가족들이라 하면 가족들의 그 말 하는 데에서 권위가 있어지고, 권위가 있어지는데 권위 요맨치 권위를 쓰면은 뒤에 돌아서 놓고 요래 놓고는 ‘그게 다 틀렸다. 이게 틀리지 안했나?’ 이래 가지고 욕은 이만치 얻어먹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걸 못쓰구로 해.
욕은 이만치 얻어먹는다 말이오.
그거 그런데 하물며 정권을 잡았는데 자기 모든 친척들이 와 가지고 공연히, 저거가 알아 기요. 친척들이 와 가지고 이래 ‘이거 돈 얼마 주십시오. 얼마 달라.’ `이 사람이 바로 영부인하고 지금 하나가 돼 가지고 있으니 이거 거절하면 내가 모가지 달아난다’ 하니까 제가 알아서 백지 돈 많이 줘 가지고 그때 돈 많이 절단났어. 그거 뭐인지 알고 있어? 그거 뭐이지? ○○○ 사건인가 그거 나는 그런 말만 들었어, ○○○사건. 인제 그게 그렇지 그분 잘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지혜가 있어. 능한 사람이라.
이번에 지금 말하기를 이라니까 ○○○씨는 ‘다시 장기 정권을 지금 꿈꾸고 장기 정권 운동을 하고 있다.’ 이라는데 그분은 말하기를 ‘나는 정권을 완전히 잘 평화적으로 이양할라고 하고 있는데 이양하는 데에는 내가 이와 같이 애써 해 놓은 걸 도둑놈에게 내 줄 수는 없고 이걸 어짜든지 잘 보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줘야 되겠는데 그것을 지금 내가 수립하느라고 내가 애를 쓰는 것이지 다른 건 아니다’ 이랬는데 암만 해 봐야 저거끼리 싸움만 붙고 이래 쌓아니까 안 되니까 ‘이제는 그거 다 치워버리고 개인 이익을 치워버리고 내 소신대로 해 가지고 이제 정권 이양하고 나가겠다.’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어. 그 사람 정권 다시 안 잡습니다. 안 잡소,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만치만 했지 더 하면 거게서 별별 다 흠점 실수 날 것이기 때문에 그만치만 자기 하고 또 나도 그만치 됐으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뭣 때문에 그 사람이 자살 행위를 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 지혜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지금 가질지 몰라. 지금 야단을 지기는데 뭐 나라야 어찌 되든지 백성이야 어찌 되든지 국가야 손해가 되든지 말든지 자기 정권만 잡기 위해 가지고 정권 위주로 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언제 ○추기경이라고 천주교 뭐 추기경이라 하는 그 사람이,○ 무슨 씨? ○○○.
그랬는데 그분이 있다가 ‘정권에 야욕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말 했는데 그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뭐이냐? 양심이 무슨 인을 맞았어요? 정권의 인을 맞은 사람이라, 정권 인을 맞은 사람.
또 저 사람은 그 사람하고는 지금 원수가 하나 있어. 미친 사람이 원수가 있습니다. 미친 사람은 뭐이 미친 사람이냐? 제일 좋아하는 사람 있고,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 있고, 제일 위하는 사람 있고 이 셋이 뚜렷한 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 비정상의 사람으로 봐야 돼요. 그러면 거게 따라서 다 움직이거든.
정상의 사람은 그런 게 없어. 행동이 나쁘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행동 나쁘면 ‘그 나쁘다’ 미워지고, 또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행동 좋으면 ‘좋은 사람이라.' 이렇게 나가는 양심이 살아. 양심이 죽은 사람은 다 비정상의 미치괭이입니다.
이렇게, 내가 또 뭣 말하다 이랬지? 화인맞은 거. 인제 모두 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사이 나쁜 거, 그 사람하고는 지금 앙숙간 원수가 하나 있다 말이오.
원수가 하나 있으면 무엇이든지 닥치면 그 원수풀이 하는 데에 원수 복수하는 그것이 중심이 돼 가지고 전부 복수적으로 모든 것을 견해하고 판단한다 말이오.
그거는 원수의 화인을 맞은 사람입니다.
돈에 화인맞은 사람, 또 이 사람은 지금 뭘 사업을 한다고 막 시작해 놓으니까 일편단심이 사업 그거 하나 성공할라고 애를 쓰니까 모든 대하는 비판과 평가 전체가 그 사업 위주로 모든, 사업 위주 사업 본위로 이렇게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획해. 그 사람은 무슨 인 맞은 사람이요? 사업 인을 맞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뭐 아무것도 가족밖에는 몰라. 가족 위주라. 가족 화인, 돈 화인, 애정 화인, 미인 화인, 명예 화인, 지위 화인, 제 욕심 화인, 제 주관 화인 이게 다, 양심이, 양심이 자기가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에 일꾼이 돼 가지고 지식에 지배를 받아서 자기가 제일 옳다고 인정하는 그 지식에 속해서, 옳다고 인정하는 그 지식에 속해 가지고 자기 모가지가 달아나도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에 지배받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그 사람의 양심입니다. 알겠습니까? 양심인데 이러니까 양심은 종류가 많이 있는데 죽은 양심들이 많고 산 양심은 하나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죽은 양심들이 많고 산 양심은 하나뿐이라 말은 무슨 말이겠요, ○○○조사님? 녜, 다른 지식은 다 죽었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에 지배받는 양심은 산 양심이요 그 외에 땅위에 수많은 지식들에 지배받는 거는 다 죽은 양심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양심은 어떤 것에 속해도 안 됩니다. 붙으면 안 돼. 양심이 어데 붙으면 대번 썩어버렸어. 양심이 어데든지 붙지 안하고 양심은 아무데도 속하지 안하고 드부렁드부렁 떠돌아 다니면서 어짜든지, 그 드부렁드부렁 떠돌아 다니는데 이 양심이 뭣을 따라서 움직입니까? 옳다 인정하는 지식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 지식이 옳다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교 지식에 따라서 움직이고 기독자는 기독교의 지식이 옳다 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지식을 따라서 움직이고 이렇기 때문에 양심이 다르다 그말이오.
이래서, 이 거룩한 행실을 할라고 하면은 양심을 써야 되는데 양심 안 쓰면 헛일입니다. 양심은 뭐입니까? 양심은 어떤 게 양심입니까? 양심이라 하는 건 그것만 해요. 기독자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옳다 참되다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정하기 때문에 뭐 자기에게 목이 끊어지든지, 사업이 절단나든지, 욕을 얻어먹든지, 실패가 되든지, 옥에 갇히든지 어짜든지 자기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옳다 참되다 인정하기 때문에 요 말씀에 지배받는 그것이 기독자의 양심입니다.
그저 뭐라 하든지 ‘보자, 성경이 뭐라고 말했노? 성경에 뭐라고 말했노?’ 이 성경 지식대로 할라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마음이 정결하다 말은 양심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하나님 볼 수 있다 그말이오. “마음이 정결한 자는” 그말은 양심 있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다.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간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이 하나님과 접선할 수 있는 우리에게 기관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에게 영육이 있는데 육에 대해서 제일 명철하고 육에 대해서 제일 옳고 바른, 육에 대해서, 육은 심신이 육인데 육에 대해서 옳고 바른 빛, 우리 육에 빛이 뭐이 빛입니까? 요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요 주석을, 잘 모른다 그말이오. 주석에 다 없어. 여러분들이 배운 이걸 단단히 알고 있어야 되지,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알려 줘 가지고 지금 가르치고 있어.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 없어. 주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대로 내가 그대로 말했는데 뒤에 성경 상고해 보니까 맞았어.
이 심신의, 심신 중에 제일 옳고 바른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빛이라, 네게 있는 빛이라, 네 빛이라.” 네 빛이라 했는데 네 빛이 무엇인가? 네 빛은 그 사람의 양심입니다. 양심인데 이 빛이 어두우면 양심이, 양심이 어두워지면 양심이 어떻게 어두워집니까? 양심은 어떻게 어두워지지요? 화인으로 어두워져요. 양심에 주인이 생겨버렸어. 양심을 뭣이 점령해서 그만 양심이 그 점령이 돼서 그것의 것이 돼 버렸어.
그것의 것이 돼 버렸으면 이 양심 쓸모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양심이 독자적인 기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어. 완전히 뺏겨버리고 말았어.
그러니 완전히 변질이 돼 버렸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다만 기독자의 양심은 신구약 성경 말씀에게만 지배를 받는 그 양심이 산 양심이지 성경에 지배받지 않는 것, ‘이럴 때는 내가 이라다가는 내가 목숨 끊어지겠다.’ 공산주의들이 와 가지고 이 독침 가지고 ‘이놈, 죽인다. 함부래 너 죽일 터이니까 네가 지금 예수 안 믿겠다 해라.’ 그리 안 하면 ‘너를 죽이겠으니까 네가 이거 나쁜 일 이거 심부름해라. 네가 사람 죽이는 요 심부름 해라.’ 이래 성경에 위반되는 일을 시킬 때에 죽일라고 위협하니까 그때 목숨 뺏기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요라는 게 옳다’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성경에 삐뚤어진 걸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양심은 무슨 화인 맞았어? 무슨 화인 맞았소? 뭐라 하노? 그것은 생명 애착의 인을 맞았습니다. 알겠습니까? 생명 애착의 인을 맞은 사람이라. 이러기 때문에 그 양심은 쓸모 있어요 없어요? 못 써요, 그런 거 뭐. 다 못 써요. 다시 그걸 이제 거기서 새로 예수님의 피의 공로에 거석해 가지고 영감으로 지지고 이래 가지고 새로 재조를, 개조를 만들어야 되지 그대로는 못 쓰는 거라.
이러니까 아무데도 속하지 아니한 다만 신구약 성경 요 진리에 속한 것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요렇게 말합니다. 요것은 진리와 요렇게 결합되는 거요.
신앙 양심.
하나님과 자기가 성경대로 할라 하는 그것은 양심이요, 또 자기는 하나님과 결합해서 하나님하고 하나로 움직이겠다 하는 그것은 뭐이냐? 영감입니다, 영감.
영감이요 신앙 양심이오.
이런데 우리가 요 양심이 없으면 안 돼. 양심을 자꾸 길러야 돼요.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 “내가 마음에 붙들려서 예루살렘에서 나를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지마는 나는 예루살렘을 안 갈 수가 없다. 내가 마음에 매인바 돼 가지고 예루살렘을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하는 그 마음은 무슨 마음은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이요?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마음에 붙들려서 “예루살렘이 죽일라고 나를 지금 기다리고 있지마는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너희들은 나를 붙들고 그 가면 죽으니까 가지 말라고 눈물 흘리면서 이렇게 하지마는 나는 내 마음에 매인 바 되어서 내가 가지 안할 수가 없다.” 그 마음은 무슨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까? 그게 자유하는 양심을 말한 거라, 자유하는 양심.
자유하는 양심을, 양심에 붙들렸기 때문에 이제 거게 가면 죽는 줄 알지마는 이 양심이 생명 애착의 양심이 되지 안하고 이 양심은 산 양심이기 때문에 거기 가면 죽어도 ‘요게 기독자로서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라니까 자유하는 양심이라.
이렇게 자기가 평소에 양심을 길러서 자꾸 양심을 길러 가지고 양심에 삐뚤어지면 죽었으면 죽었고 뭐 장사가 사업이 뭣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양심을 어길 수 없는 그렇게 양심을 길러야 기독자의 신앙이 되는 것이지 양심 기르지 안하고 형편 따라서 환경 따라서 이렇게 팔방미인으로 하는 그자는 암만 수고해도 저는 헛됩니다. 헛돼요. 헛됩니다. 구원은 이루어지지 안해. 기독자의 구원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양심을 가지지 안하면은 하나님과 접선이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거룩한 행실 하는 데는 양심을 길러야 돼. 이러니까 양심 기르는 독촉이 모든 게 불탈 터이니까, 모든 게 다 불타버리고 모든 형체가 불타버려. 뭐 ○ 뭐꼬?너 이름이 뭐야,○○○선생? ○○이. ○○이도 그때 미남이 바짝 타서 잿덩이가 돼 버릴란지? 그때 미남이 뻔들뻔들한 미남으로 그대로 있을란지? 이제 모든 형체가 다 불타 버리는데 그때 타지 안하는 것은 의만 타지 안합니다. 알겠습니까? 의를 만든 거는 타지 안해요.
이렇게 모든 것이 풀어진다는 걸 이것을 자꾸 해. ‘모든 것이 다 녹아진다, 모든 것이 확 풀려서 아무 이 형체 저 형체 천태만상이 하나도 없이 다 풀려서 아무것도 없어져 버린다.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다 덮고 가루었지만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걸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필연적으로 뭐이 생긴다 했어? 필연적으로 뭐 생깁니까? ○○○? 모든 것이 헛되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 이라니까 무엇이 끊어집니까? 간부가 죽어버렸습니다. 간부가 죽어버렸어, 간부가.
또 찬란스럽게 꾸며 가지고 있는 음녀가 죽어버렸어. 알겠습니까? 음녀 간부 죽었다 말 알겠소? 간부 죽으면 뭐이 죽었다 말이요? 간부 죽었다 말은 뭐이 죽었다 말이야? 세상이 죽어 버렸어. 음녀가 죽었다 말은 뭐이 죽었다 말이요? 저 우리 장로님들, 알고 있는가 모르겠어. 음녀가 죽었다 말은 뭐이 죽었다 말이요? 자, ○○○장로님? 욕심? 저○집사님 대답해 봐. 예? 세상 문화? 세상 문화. 장로님은 저 ○집사님한테 아직도 배워야 돼. 앞서 가야 돼. 아직도 배워야 돼. 세상 문화거든.
그 말이 대답이 맞아. 세상 문화야. 이제 간부가 죽어버렸어. 왜? 그거 좋아서 야단들인데 이 보니까 오늘 그 모든 게 다 불타서 형체도 없어지고 모든 거 체질이 다 녹아져 버리고 모든 일이 다 환하게 정상적으로 다 드러나 버릴 터이니까 전부 수치될 것뿐이지 아무 미혹이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거 수습이 지금 문제라.
이제 간부 죽었지 음녀 죽었지 이 미혹이 없어지니까 뭣이 깨진 턱입니까? 뭐이 깨졌습니까? ○○○목사님? 소망이 깨졌어. 소망이 깨졌고, 또? 또 뭐이 깨졌어?○조사? 선악과가 깨졌어. 녜, 선악과 그 말도 모두 맞아. 소망이 깨졌다 선악과가 깨졌다, 미혹이 깨졌다 그말이요, 선악과 깨졌다 말은.
또 뭐이야? 또○○교회? 뭐이 깨졌어? 간부 음녀가 깨졌어. ○선생? 잘 모르겠어? ○○○?○집사?○○○? ○○○? 장벽이 무너졌어, 장벽이! 주님하고 나하고 사이에 장벽이, 철판 장벽이 꽉 막혀 있었는데 이 음녀 또 간부 이게 들어서 주님하고 나하고 요 사이가 딱 벌어져 가지고 지금 빽 돌아서서 주님이 돌아서니까 분하기만, 분하기만 하고 있는데 이걸 다 이제는 간부도 다 내던져 버리고 음녀도 다 내던져 버리니까 이제는 주님하고 나하고 장벽이 무너졌어.
이것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라, 휘장. 휘장이 쭉 째져버렸어.
알겠습니까? 휘장이 쭉 째져버렸어. 이 답이 맞아요? 왜 한 자리 배우는데 이렇게 틀리는가? 그게 신앙의 정도라. 그게 성화의 정도.
그 장벽이 무너지니까 뭐이 보이요? 무엇이 돼? 장벽이 무너지니까 주님의 빛이 오지. 주님의 빛이 오니까 자기가 밝아져요. 자기가 밝아져요. 자기가 밝아지고 보니까 뭐 생겨요? 밝아지고 보니까 여게는 아무것도 붙일 게 없고 밝아지고 보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써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소망이 생겨졌다 말이오. 소망이 생겨져. 이래 가지고 자꾸 신앙 생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안 쓰면 헛일입니다. 오늘 아침에 결론적으로는 양심 안 쓰면 헛일이오. 양심은 뭐이 양심인가? 자기가 신구약 성경 진리를 참되다 인정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요 성경 지식에게만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이지 성경 지식 말고 자기는 생명 애착의 욕심이, 생명 애착욕이든지 물욕이든지 명예욕이든지 지위욕이든지 권세욕이든지 무슨 애정욕이든지 무슨 감정이든지 그 무슨 복수성이든지 어떤 것에게 독침에게 지배를 받든지 뭐 받든지 그거는 화인맞은 죽은 양심이라. 화인맞은 양심이라.
양심이 화인맞았으면 주인이 생겼다 말이오. 알아듣겠소? 알겠어? 화인맞았다 말은 양심에 주인이 생겼다 말이오. 양심에 주인이 생겼어. 양심은 주인이 없어요.
양심은 자기가 주인입니까? 자기 위주, 자기 양심은 자기 위주로 자기 본위로 자기 유익하도록 자기 중심으로 그 모든 걸 비판하면 그 양심은 좋은 양심입니까 화인맞았습니까? 무슨 화인 맞았소? 자기라는 화인 맞았어. 못쓰는 거라.
이러기 때문에 양심을 자꾸 기르고 길러서, 조그만한 양심을 써 기르고 기르고 양심을 기르고, 양심을 보호하고, 양심을 가꿔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 다 거리끼지 안하고 어떤 거 할라 할지라도 요 말씀에게 지배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강건한 장성한 양심을 길러 가지고 한 것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은 나를 울고 아시아에서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고이래 하고 있지마는 내 마음에 매인 바 되어 나는 안 갈 수 없다.” 그 마음, 자기는 죽는 곳이라도 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영감이 가야 된다 하면은 안 갈 수 없는 그것이 신앙 양심이라 말이오. 양심이 없는 자는 기독자 생활 못 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암만 해 봤자 그저 그냥 세월만 지내 보내고 출물꾼만 되지 아무 소용이 없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