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2:49
말세 구원 준비
본문 : 벧후3:6-14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 생활 속에는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처지에서 어떤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안 믿는 때에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보고 살던 것과 같이 그렇게만 살면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살림을 살든지, 뭐 큰 일, 작은 일, 복잡한 일, 뭐 어떤 종류의 일, 또 어떤 처지, 또 어떤 때, 무슨 생활을 하든지 우리는 그 생활 속에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우리 생활이 알속 있는 생활이 되고 외식 생활이 안 됩니다.
종자가 좋아도 밭이 없으면 그 종자가 성숙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모든 각종의 생활하는 것은 거룩을 이루는 밭과 같이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바로 아는 것이 되겠습니다.
자기가 공부를 해도 그러하고, 장사를 해도 그러하고, 또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러하고, 존영한 일을 만나도 그러합니다. 자기의 현상 생활 속에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실은 무엇을 하는가? 거룩한 행실은 경건을 이 룹니다. 거룩한 행실이라는 그 밭에서 경건이라는 그 생물이 조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과 경건 그 둘만 남겨두고 모든 것은 다 불살라 버 련니다. 택한 자의 생활이든지 불택자의 생활이든지 거룩과 경건 그것만 남겨두고 나머지기는 다 불살라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것 위해서 지었고 또 지은 것이 실패된 이것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 부활시키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서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심판을 거쳐 무궁세계에서는 거룩한 행실을 다 입고 다닙니다. 거룩한 행실은 그때에 영광 있는 의복이 되어 의복처럼 입고 다니고 이 거룩한 행실이 없는 사람은 벌거벗은 것과 같은 그런 부끄러움을 입고 다니게 됩니다.
또 거룩한 행실이 만들어 놓은 경건은 그 나라에서 하나님,에게 수 종드는 하늘나라의 일꾼들입니다. 하늘나라는 경건이 일합니다. 경건의 양이 크면 큰 일을 맡아야 되고 경건의 양이 적고 작으면 적고 작은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데서 무슨 생활 할지라도 자기가 그 생활 속에 거룩한 행실이 거게서 이루어지고 성장되지 못하면 자기의 세상 생활은 다 죽은 생활이요 아무런 성과 없는 생활이 됩니다.
거룩한 행위에서 경건이라는 경건이 조성됩니다. 경건이 조성되면 이는 죽을 때에도 죽지 않습니다. 또 무궁세계에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 외에 것은 모조리 다 불로 소멸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이 거룩한 행실은 신구약 성경 이 도리를, 도리라 말은 인생이 살아가는 인생길이라 그말입니다. 도리라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람의 길이라 그말을 가리켜서 도리라, 도의 이치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도리로 주신 우리의 이 거룩한 행실에 대한 유일한 법칙, 또 경건에 대한 유일한 법칙으로 주신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지식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가르치고 있고 또 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경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지식이라 그렇게 할 수 있고,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과 구속을 우리에게 바로 가르칩니다. 대속이라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형 대행 대화친을 말하고, 또 예수님의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대속을 입힌 우리들에게 입혀 준 이 대속을 실질적으로 우리가 입어서 그 대속의 공로의 혜택을 실상으로 우리가 가져 누리도록 하는 역사가 구속 역사입니다. 구속 역사는 "성령과 물과 피가 역사한다" 그랬습니다. 성령과 진리와 주의 공로가 역사를 합니다.
그런고로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이 대속과 구속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은 이 소개하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의 이 구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 거룩한 행실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생활에서라도 거룩한 행실이 그 속에 있어야 된다 그말은 신구약 성경이 소개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 로를 자기가 깨닫고 이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입고 또 이 대속의 공로치 그 효력을 자기가 세상에서 나타내는 그것이 거룩한 행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떤 그 생활에서라도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된다. 거룩한 행실을 하려고 하면 그 유일한 법칙은 무엇인가? 그 법칙은 신구약 성 경이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일, 곧 거룩한 행실을 이루는 일 그 일은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성경이 가르쳤는가? 간단하게, 첫째로 인류 시조의 범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의 멸망 가운데에 영원히 빠져 있는 우리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첫째 윤곽적 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그 무신론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 자연주의자 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자연히 생겼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고 '영원 자존자가 모든 것을 창조하셔서 조물주가 있고 또 거게서 지음받은 피조물들이 있다.' 피조물인 우리 시조가 조물주를 거슬려서 범죄함으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 속에서 영원히 그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들이다. 여게서 구출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상 에서 있는 걸 다 하나님의 그 부요도 다, 몸과 생명을 다 바쳐 완전히 죽기까지 하셔서 영원한 지옥의 멸망에서 구출하시는 이 공로를 베푸셨다.
조물주를 거슬림으로 죽었던 그 죽음을 구출하는 데는 조물주에게 복종으로 구출하는 방편을 삼아 가지고 구출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해서 구출하셨다.
그러면 이렇게 구출하실 때에 그 구출하신 것을 강령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구출했느냐? 첫째는 절대자이신 이 주권자 주재자 이 완전자와 완전히 원수되어 그 사이에 장벽이 가려져 있는 이 장벽을 틔우고 그 멸망에서 구출을 해 완전자와 연결되는 그 공로를 설정했으니 그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멸망받은 자의 사이에 무엇이 가려져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 멸망 가운데에 머물게 됐는가? 그것은 첫째로 죄값이다.
그러면 죄는 어떤 죄인가? 그 가려져 있는 그 잘못은 세 가지다. 세 가지 그 잘못을 해결지워서 틔운 것을 가리켜서 사죄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가려진 그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죄와, 또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야 될 것이 자율대로 주관대로 자주장으로 산 그 불의와 또 하나님과 대립이 된, 하나님을 배반한,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과의 이 세 가지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가로막혀 있었다.
이것을 하나님이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지으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가려져 성소에는 들어갈 수 있지마는 지성소에는 일 년 일 차씩만 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는 그 휘장 안에는 지성소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손을 대지 안하고 저절로 그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그것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이 세 가지 죄악이 다 해결됐다 하는 것을 계시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형하신 것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잘못된 것을 대형했습니다.
이것은 다 거역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비로소 이 대형이 됐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복종으로 죽은 이것이 이제 대형이 돼서 사죄가 됐고, 또 칭의는 이제는 대형으로 다 불의의 이 장벽은 헐렸지마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과 연결돼서 하나님에게 인도받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피동되는 이것이 시작돼야 되는데 이것을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당신이 오만 율법의 요구에 순종을 다 하시고 순종하는 것으로서 끝을 마쳐서 칭의의 공로를 베푸셨다.
또, 사죄는 됐고,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피동은 할 수 있게 됐고, 이 렇지마는 하나님과 직접 신인 이 교제의 연결은 안 됐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데까지 저주 원수의 취급으로 아버지가 저주하시고 윈수로 이렇게 취급을 해도 주님은 아버지에게 한번도 불목을 가지지 안하고 화목을 하는 그 화목을 할 때에 아버지는 물리쳐서 화쪽을 이루지 못하게 온갖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숨이 탈칵 끊어졌지 화목으로 숨을 끊치고 화목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것으로써 비로소 화목 제물이 되어서 화친의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이래 가지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예수님이 상속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다 상속받을 수 있도록 이 지극히 큰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이요 구속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실은 어떤게 거룩한 행실이냐? 예수님의 대속 공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완전히 입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피와 살을 그 인격의 양식, 사상의 양식, 인질의 양식, 속성의 양식을 삼아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의 사랑과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입혀 주신 이 대속과 이것을 인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활동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강해지고, 이것으로 인해서 점점 견고해지고 성장되는 그것이 피와 살을 먹고 자라는 자다. 이것은 전부 다 영생이다.
그러기에 어떤 현실 속에서라도 거룩이 있어야 된다.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된다. 거룩한 행실이 있다니? 거룩한 행실은 주님의 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룩을 노력하는 것이요 피 안에 들어갔으면 거룩이 돼 버렸다, 거룩한 행실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그 행동 가운데라도 거룩한 행실이 알맹이가 돼야 된다.
네가 공부를 하든지 무슨 정치를 사업을 뭐 예술을 뭣을 하든지 가정을 이루든지 어쨌든지 네 언행심사에 어떤 현실에서라도 네가 행동할 때 네가 생활할 때는 그 행동은 밭과 같고 그 행동에는 거룩이라는 그 거룩이 움싹 나 가지고서 그 거룩이 성장돼야 한다.
그 거룩이 성장돼야 하다니? 예수님의 피의 구속을 네가 완전히 입는 일 돼야 한다 그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속을 입는 데에는 어떻게 입나? 그 입는 데는 외부적으로 '나는 피조물인데, 조물주에게 지음받은 피조물인데 피조물인 우리 시조가 조물주를 거슬려 범죄함으로 영원한 사망의 지옥의 것이 됐다. 마귀의 것이 됐다.' 이것을 네가 먼저 생각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의 시발이다. 이것이 주님의 구속을 네가 생각하는 시발이다.
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대속하셨다' 그러면 안 된다. 너는 피조물이요 조물주가 있는데 피조물인 너거 선조가 조물주에게 거슬려 어기고 대적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시킨 자는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돼 가지고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에 형벌의 멸망을 받게 된 우리 선조요 곧 내다.
그것을 네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이것을 먼저 네가 생각하고 알아라.
여게서 하나님이신 주님이 너를 구속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나를 여게서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다 내어 놓 으시고 피조물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시고 모든 내 대신의 이 세 가지 형벌을 이것을 받으시되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받으셨다.' 요것을 네가 네 양심으로 생각해라.
그러면 이런 조물주를 반한 피조물로 영원한 멸망 가운데에 악령으로 더불어 같이 빠져 있는데 악령이 시켜서 그랬으니까 악령 지도받았기 때문에 악령의 종이 되고 악령은 이겼고 악령은 왕이 됐습니다.
이런 여게서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모든 부요를 다 내어놓으 시고 성경에 '그는 근본 부요하시더니 너희들을 위해 가난해지셨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아무것도 없고 제일 가련한 인간, 제일 인간 중에는 제일 가련한 인간으로서 돼서 인자 됐다, 인자가 됐다.
인자라는 그 뜻은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약하고 불쌍하고 제일 가치 없는 인간을 가리켜서 인간의 제일 가치 없는 그 면을 가리켜 인자라 그리 말합니다.
구약에는 인자라 말이 많이 있고 신약에는 인자라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인자라는 뜻은 그겁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지극히 크고 높으신 분이 인자 되셨다. 인자 되셔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위해서 대형을 하시되 죽음으로 대형을 하셨다. 대행을 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내가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대행을 하셨다.
죽어도 하나님으로 더불어 어떤 일이 있어도 불 목을 가지지 안하고 하나님은 불목하려고 버려서 저주까지 하고 뭐 십자가에 못박고 이렇게까지 하지마는 주님은 아버지에게 대해서 화 목을 놓지 안하고 화목을 거머쥐고 화목에 전심 전부 세포 하나도 불목이 없이 화목에 전체가 돼 가지고서 끝을 마쳤다.
이것으로써 이제 화목 제물로서 화목의 공로를 베푸셨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무슨 일 하든지 '조물주와 피조물이 있다. 피조 물인 우리 선조가 조물주를 거슬려서 마귀에게 꼬여 조물주를 거슬려 가지고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져 있었다. 여게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어떻게 낮아지시고 어떻게 가난해지고 어떤 고난 당해 가지고 대속을 하셨다.' 요것을 네가 공부하면서도 요것을 생각하고, 일하면서도 요것을 생 각하고 어떤 사업을 하면서도 요것을 생각해서 '내가 어데까지 낮아 져도 다시는 주님의 대속을 벗을 수 없다. 어데까지 가난해도 벗을 수 없다. 어떤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당해도 당신이 입척 주신 이 삼대의 대속을 벗을 수 없다.' 그러면 네가 공부하면 공부하는 거게서 이 거룩한 행실 곧 예수님의 피 속으로 이 들어가는, 피 속에 들어가서 완전히 피의 것이 되는 것,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이 되는 것, 주님의 구속을 입은 자가 되는 것 다시는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넣을 수 없는 자가 되는 것.
이 일이 공부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사업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이런 저런 모든 네 각양의 생활 가운데에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안하면 너는 외식이요 너는 껍데기 생활을 한다.
가만히 얄아서 방 안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라 하니까 쉬운데 내가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라 하니까 힘듭니다. 사업을 하면서 입을라 하니까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저런 사업을 하면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기가 힘드는데 그 사업을 하는 그 사업으로 인해서 대속은 입게 되지 사업이 아니면 대속을 입지 못합니다.
왜? 내가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할 때는 '나는 주의 것이라. 다시는 주님을 거슬리지 안하고 죄 없이 주님에게 피동으로 살겠다.' 가만히 있으면서 뭐 몇십 번이라도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단 어떤 활동이든지 활동을 딱 하려고 하니까 세상이 들어서 이 거룩한 행실을 못 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입지 못하게 합니다. 못 하게 하고 나는 입을라 하고 못 하게 하고 입을라 하니까 거게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것은 내가 싸워서 이김으로써만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지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데에는 나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같은 뽀스라기 십자가라도 십자가를 져서 그 대속을 입었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대속을 못 입었습니다. 그런고로 거거서 실상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됩니다.
혼자 방 안에서 가만히 앉으면 말뿐이지 실상은 못 입는데 자기의 이런 저런 모든 주위, 환경, 그런 형편, 사정, 활동, 생애, 거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라 하니까 못 입게 하고 나는 입을라 하고 이럼으로 인해서 진짜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됐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됐다. 그 활동이 없이는 예수님의 대속이 입는다는 것도 힘이 안 들고, 입는다고 입었다 했는데 입혀지지를 안하고 또 뉘가 못 입게 하는 것도 없고 이러니까 말뿐이지 실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실상은 네 사업 활동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거게서 거룩한 행실, 곧 거룩한 행실은 구별하는 행실인데, 구별하는 행실은 첫째 구별이 뭣이냐? 세상 사람들은 '우리 저절로 생겼는데' 첫째 구별은 '조물주 피조물이 있다. 우리는 조물주를 거슬려서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졌다. 멸망 가운데 빠진 것을 주님이 구속하시려고 사람되어 하나님이 오셨다. 여기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공로를 베풀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하는 이것을 자꾸 세상이 안 그렇다 해도 '그렇지 않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 세상이 다 '거짓말이다.' 이래도 말씀을 법칙삼아 가지고 구별하고 구별하고 따지고 따져서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딱 입는 요것을 네가 현실에서 해라.
그러면 현실에, 이 현실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이 현실,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예수님의 대속 입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현실은 쌓아 뒀다.
이거는 불탈 것인데, 불탈 것인데 경건치 아니한 자의 멸망을 이루 기까지 간수해 두고 경건한 자는 경건과 구원을 이루기까지 간수해 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생활은 경건 불경건, 구원 멸망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을 쌓아 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네 마음대로 사용해라. 네 마음대로 거머쥐고 주고 놓고 뭐 당기고 어짜든지 이 세상 이것을 한 번에 안 되면 몇백 면 몇천 번을 거머쥐고 연습을 해서라도 기어코 구원과 경건을 달성 시키라.
그러면 여게서는 이것 저것을 거머쥐고 연습도 하고 또 재독도 해 보고 또 다시 재연습도 하고 자꾸 연습해 가지고 이것 이루라고 이 세상을 예수님의 재림 날까지 보존해 두신 것인데 이것은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끌어 모으고 강하고 뭐 크고 많아지고 하면 이것이 저 할 일인 줄 알아서 하는 것은 다 이는 다 소경이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제가 해 놓고 계산을 댈 때에 수지 계산을 댈 때에 '오늘은 돈이 얼마나 들어왔나? 한 지위가 올라갔나? 뭐 몇 사람이 나를 환영을 하나? 무슨 내 욕심이 달성했나?' 이런 것으로 계산을 하니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표준해 가지고 계산하는 것은 그게 다 오산이다.
모든 세상살이를 이 세상살이 가운데서 네가 피 속으로 들어간 거 룩한 그 행위, 경건을 만드는 방편을 네가 얼마나 썼나? 그 가운데서 경건을 얼마나 조성됐나? 이것은 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 우리 죽는 날, 또 부홰하는 날, 심판하는 날, 심판해 가지고 영원 무궁한 갚음을 받는다, 너는 이렇게 했으니까 자. 열 고을을 받아라. 너는 이랬으니까 다섯 고을을 받아라. 주지 안했습니까? 그것 인제 갚음을 받는 날 그 날, 그 날에 수입이 어찌 됐는고 그것 계산해서'오늘은 그 날 수입이 있나 어쨌나?' '돈 오늘 수입 안 했나?' '야! 돈 수입이 어데 우리 수입이가?' '오늘은 어쨌나? 이 지위가 한 층 올라갔다.' '야, 그게 우리 수입이가?' '오늘은 생활하는 가운데에 거룩한 생활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속으로 들어간 생활은 없습니다. 조물주 피조물도 깜깜 잊어 버렸고, 인류 조상과 우리와의 타락도 잊어버렸고, 지옥의 형벌도 잊 어버 렸고,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것도 잊어버렸고, 죽기까지 하셔서 대속하신 것도 잊어버렸고, 죄도 사죄도, 칭의도 불의도, 하나님과 동 행도, 화친도 원수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오늘은 죽은 생활이다. 오늘은 죽은 생활이다 오늘 생활은 죽은 생활이다.' 거머쥐고 그 난에 돌뱅이를 막 치고 치고 또 치면서 '오늘은 영이다, 오늘은 영이다, 오늘운 죽은 생활이다, 오늘은 영이다, 아무 수입 없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여게서 거룩한 행실을 네가 현실에서 만들어라. 네가 공부를 암만 해도 공부 그것만 오늘은 일등을 했다, 그게 아니다. 공부야 일등을 했든지 꼼뱅이 했든지 공부 거게서 네가 거룩을 만들어야 된다.
공부에서 일등하는 것도 '내가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 걸 보는데 내가 구속받은 자가 꼼뱅이가 되면 예수 믿는 걸 다 바보되고 공부도 못 한다. 예배당에 보내지 마라 할 터이니까 할 수 없어 이거는 간접적으로라도 내가 이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루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주님이 나를 피로 구속하셔서 세상에 빛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법칙에 삐뚤어짐이 없게 하셨고,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게 하셨으니 전지 에게 피동되고 전능에게 피동되는 내가 능치 못할 게 없고 모든 것 다 알게 될 터인데' 그분에게 접견되어 그분이 주신 종명, 그분이 주는 지혜, 그분이 주는 능력, 그분에게서 오는 인격, 그분에게서 오는 사상, 그분에게서 오는 자존심, 그분에게서 오는 의지, 그분에게서 오는 모든 양심, 이것을 가지고 네가 간접이든지 직접이든지 거룩한 행실이 아니면 너는 죽은 생활이다. 거룩한 행실을 해라.
그래 가지고 주님의 피 안으로 들어가서 사죄를 입고, 칭의를 입고, 화친의 새생명을 입으면 이제 너와 하나님과의 결합이 되어진다. 네가, 이 세상이 없으면 안 되는데 거게서 예수님이 주신 거룩한 행실을 네가 안 버리려고, 예수님이 주신 구별하고 구별해서 '요러면 사이비한 죄다. 요러면 죄 같아도 의가 된다. 요러면 하나님을 배신이다.' 모든 것을 자꾸 구별 구별해서, 죄에 대해서 구별하고, '하나님 말씀에 요러면 위반되나 안 되나?' 말씀에 위반되나 안 되나 그것을 구별하고, '요러면 말씀에 위반되나 안 되나?' 그게 사죄에 대한 양식입니다. 사죄를 벗지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나 안 되나 그것을 살피는 것이 거룩한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지 안하면 사죄를 벗지 안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게 피동되고, 피동되다 보니까 나중에 성신의 감동에 피동되면 그게 의가 됐습니다.
그걸 할라 하면 자기 현생활에 많은 마찰이 오고 많은 분쟁이 옵니다. 많은 마찰이 오고 많은 애로가 있고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이래도 사죄와 칭의를 벗어놓지 안하고 그래도 다니엘 모양으로, '그만 기도 안 한다고 해라.' 하나님을 배반치 못하는 것, 하나님 배반하라고 요 거룩을 입는 것이 예수님의 구속을 입는 것인데 요랄라 하니까 어떻게 많은 애로가 오는지? 애로가 있어서 '죽어도 내가 하나님을 이제는 배반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신 화친을 이절 내가 다시는 내어주지 못한다. 이 칭의를 내어주지 못한다. 이 사죄를 내어주지 못한다.' 이러면서 그럴 때에, 세상이 그럴 때에 세상을 버리고, 그럴 때에 자기 몸을 버리고, 그럴 때에 생명을 내버리고, 소유보다 하나님을, 모든 자기의 몸보다 하나님을, 자기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요러는 가운데에서 경건이 됩 니다. 요러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되어 고런 가운데서 경건이 이루어집니다.
경건은 어떤 게 경건인고 하니 경건은 영원 자존자, 절대자, 창조주, 주재자, 주권자, 이분은 한 분뿐이신데 이분, 이분 한 분에게 가서 연 결을 하고 이분 한 분에게 속하려고, 이분 한 분에게 연결이 돼 가지고서 거게 연결이 돼 가지고 거게서 오는 것만 받고, 나는 내 모든 것은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섬기고, 요 관계를 맺을라 하니까 돈이 방 해를 하고, 상관이 방해를 하고, 호주가 방해를 하고, 친구가 방해를 하고, 사업이 방해를 하고, 자기 몸뜻이가 방해를 하고 자기 속에 정욕이 방해를 하고, 오만 세상이 방해를 하고 다 해도 그 방해에게 방 해받지 아니하고, 고럴 때에 고 방해받지 안하고, 평소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주를 사랑합니다.' 이래 쌓아도 주님과 이게 한뼘도 가까와지지를 안하는데, 주님과 가까와질라 하니 '네 이놈, 직장을 내가 당장 모가지를 날릴 거다.' 직장을 모가지를 날 려도 주님을 배반치 안하고 주님의 사죄와 칭의를 입고 손해를 봐도 안 내놓으니까 그 손해본 그게 십자의 손해입니다. 손해를 봐도 안 내놓으니까 안 내놓는 그걸 통해서 아버지와 한뻠씩 쑥쑥 가까와지고, 한 발도 가까와지고, 어떤 때는 생명 내놓으면 그만 한 십 리고 백 리고 딱 가까와져 버립니다.
이러니까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안 하고 자기를 내놔 가지고 내놨을 때에 나라에서 다 죽인다 해도 죽으면 죽지 뭐 아무리 일본 그 부장들이 와 가지고서 '그러면 사형이다' 이러며 아무리 한다 해도 하거나 말거나 주님의 계명 어기지 안하고 6.25 때도 그라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어떻게 돼도 주님을 내놓지 아니하는 그런 것으로서 주님과 가까와지고 그만 딱 붙어지고 주님 안으로 썩 들어가고 주님은 그를 통해서 "나는 네 하나님 너는 내 백성, 너는 내 몸 나는 네 머리" 이렇게 그런 걸로 가까워지니 십자가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그겁니다 자기가 먼저 손 해보고 희생함으로써, 뭣 때문에 손해 봐? 주님의 구속을 손해 안 볼라 하니까 그것 손해봐야 돼. 주님을 안 내 줄라 하니까 모든 걸 내 줘야돼. 그것이 모든 것 다 팔아 가지고서 밭을 산 것과 같다는 비유에 그 비유입니다.
이러니까 그런 가운데에서 경건이 됐습니다. 경건이 됐다 말은 절 대자인 한 분에게 내가 딱 들어붙어 버렷습니다. 한 분에게 딱 들어 붙어서 나는 몸도 그분 위하여, 소유도 그분 위하여, 말도 그분 위하여, 생명도 그분 위하여, 내 전부는 마음 다하고, 성품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목숨 다해서 그분, 또 내게 있는 것은 그분에게 받은 것, 내게서 나가는 것은 그분의 말, 그분의 것, 이것만이 나가는 이것이 경건한 행동이요, 그분으로 향하여 들어붙는 것이 경건을 이루는 컷 이요, 경건한 행동은 들어붙은 것이 들어붙는 효과를 들어붙은 것을 이 세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니 그게 뭐이냐? 세상의 빛이라,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 그것이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생활에서 생활 속에 거룩이 있어야 됩 니다. 모든 생활 속에 거룩이 있어야 되고 그 거룩으로 경건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밭이 없으면 이 현상 세계가 없으면 거룩이 성장 못 되고, 거룩이 없으면 경건이 이루어지지를 못합니다. 경건이 이루어지지를 못하면 하늘나라에 가서는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과 경건뿐입니다. 거룩은 무궁세계에 우리가 입고 다닐 의복이오. 어떤 사람은 거룩 한 줄기밖에 없습니다, 한 오 랭이밖에 없어.
이러니까 온 몸뜻이는 뺄가벗었는데 실나끈 한 개만 당이고 다닙니다. 실나끈 한 개만 떡 댕기고 이러고 다녀.
어떤 사람은 무궁세계 갔는데 세마포 옷으로서 자잔한 세마포 옷을 가지고서 해 입고 참 다니는데 이것은 성경에 말하기를 "성도의 거룩한 행실이라" 이 세마포 읏은 성도의 거룩한 행실이라 이랬습니다.
거룩은 남아 있는데 그것은 무궁세계에 입고 다닐 영광의 옷이오. 경건은 무궁세계에 하나님과 나와 피조물과 그 사이 중보돼 가지고 하나님도 만족하고 피조물도 만족하고 나는 그 사이에 중보에서 무한한 하나님에게 얼마든지 받고 원하는 피조물에게 얼마든지 주고 모든 피조물들이 많이 받았다고 감사하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 것을 갖다 피조물에게 주고 하는 이것이 거 룩한 제사장이라.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뭐 하려고 그것 해? "주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 날 뭐 하려고? 그 날에는 거룩과 경건뿐이다. 그날에는 거룩과 경건뿐 이다.
그러니까 그 날에 가 가지고는 사람들이 다 거룩을 탐을 내고 경건을 탐을 내지마는 아무 소용이 없다. 소용이 없으니까 네가 그 날에, 그 날에 보배로운 경건을, 그 날에 아름다운 의복인 거룩을 오늘에 해라. 오늘에 해라.
그러기 때문에 네 부러운 것도, 소원하는 것도, 네 욕심도, 네 계획도, 목적도 경영도 전부 그 날의 것을 오늘에 지금 조성해라.
그러면 오늘에 네가 생활하는 모든 생활은 어떻게 네가 평가할 것 이냐? 오늘에 있는 것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이 현상 세계의 썩을 것으로서 네가 평가하지 말고 오늘 네 생활이 그 날에 그 수입이 어찌 됐느냐? 그 날에 성공이 어쩌 됐느냐? 그 날에 보배가 오늘에 어찌 됐느냐? 그 날의 것이 오늘에 이루어졌는가 그것을 네가 계산해 가지고서 그로써 수지 계산을 네가 계산해라.
그것이 정확한 결산이다 하는 것입니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없어지지 많는 말씀 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꾀우면 허둥지둥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북라 하든지 우리는 두 주먹 거머쥐고 어떤 현실에서라도, 어떤 현실 이라도 거룩 없으면 죽습니다. 거룩 없다니? 어떤 현실에서라도 '조물주 있다. 첫째 조물주 있다.' 어떤 현실이라도 '조물주 있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분에 거슬려 가지고 인생이 죽었다. 그분에 거슬리면 죽는다. 거슬려 죽은 것을 예수님쎄서 오셔서 다시 재연결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다. 얼마나 힘들여 베푸셨느냐? 모든 부요 다 내놓고 모든 고난 모든 가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이렇게 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이제는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어데꺄지 가도 네가 벗어놓지 않겠다. 내가 주의 피를 기념하겠다. 사죄 받은 것을 기념하겠다.
어데서든지,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 나는 다시는 죄 없는 자다.' 죄 없는 자로 천하가 와서 죄를 덮어 씌워도 훌훌 다 벗겨지고 천하가 해도 너는 죄 없는 자로, 천하가 다 달라들어서 너는 불의의 자로 '네 맘대로 살아라. 국가대로 살아라.
민족대로 살아라. 문화대로 살아라. 시대대로 살아라. 공산주 의대로 살아라.
어째 살아라.' 해도 너는 하나님에게 피동된 의로 사는 그 의를 벗지 말아라.
너는 어데서든지 하나님과 화친한 걸 벗지 말아라. 이러면 이런 가운데서 경건이 이루어진다.
이제 둘이 '보자' 세상이 있다가 '너, 나를 영접 안 하면 대번 죽는다. 내 말을 안 들으면 너 사자구덩이 들어간다. 내 말 들어라.' 하나님께서 '네가 다리오 말 들으려면 다리오 말을 듣고 내 말 들으려면 내 말 들어라. 내 말 들으면 사자구덩이 들어가고 다리오 말 들으면 살아는데 어짤래? '어림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큰 힘 들여 나를 구속했 는데 내가 살기 위해서 기도 안 한다 하겠습니까? 사자구덩이 들어 가도 당신 것 안 들어가도 당신 것, 또 모든 생명의 주권이 당신에게 있기 때문에 사자구덩이 들어가도 어림도 없습니다.
나는 기도 합니다.' "아멘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 이것으로써 경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러기에 우리 현실 현실에서는 하나님과 이 세상 둘을 보고서 지금 누구것이 되느냐? 그걸 가리키기를 묘사하기를 그래 놨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고 하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두 남자가 이래 가기고 이래 거석하는데 요리 기울어지나 요리 기울어지나 하는데 딱 배반하고서 하나님께로 딱 들어붙는 것 그 이상 기분 좋은 일이 없어. 하나님이 그 이상 친근한 일이 없어. 그런고로 우리의 매 시간 매 현실은 이렇게 조물주와 이 주권자 주재자 이분과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분을 배반하고 썩은 데로 넘어가는 이 일이 이루어지니까 어떻게 현실을 깨어 있지 안할 수 있겠습니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을 지웁시다. '나는 아무리 총망 중에라도 거룩 없는 생활 하지 않겠다.
거룩 없는 생활 않겠다. 거룩 없는 공부, 거룩 없는 사업, 거룩 없는 정치, 거룩 없는 예술, 거룩 없는 문화 건설, 거룩 없는 뭐 먹기도 마시는 것도 입는 것도 거룩 없는 것은 나는 안 하겠다. 뭣이든지 세상 생활 속에는 거룩이라는 알맹이를 나는 알차게 마련하겠다.' 이 거룩을 마련하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피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의 피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경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냐 세 상이냐 둘 중에 어느 것, 차지할래?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이것입니다. 이거는 시기 속에 있소, 시기. 이 시기 속에 있는 이런 아주 예민하고 날카로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