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이전의 중국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하여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자연숭배사상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이 자연숭배사상은 이후 조상숭배사상으로 이어졌다. 주나라 때에는 재산이 상속되고 선양(禪讓)되던 왕위가 자식에게 세습됨으로써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고의 인격신으로 여겼던 '천(天)', '천제(天帝)'가 왕위를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는 '천명비상(天命靡常)'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이런 천명사상은 서주 말년에 이르면 흔들리게 되고, 중민의식이 대두된다. 이것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정분리의 사회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어 감을 나타낸다.
선지자선교회
예를 들어 『좌전』에는 "민(民)은 신(神)의 주인이다. 이 때문에 성왕은 먼저 백성들의 일을 이룬 뒤에 신에 힘을 바친다", "내가 들으니 나라가 흥하려면 민에게 듣고 망하려면 신에게 들을 것이다. 신은 총명하고 정직하며 한결같은 것이로되 사람에 의하여 행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천자, 제후, 경대부, 사의 세습적 계급제도가 흔들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공교육에만 의존하였던 당시 사회에는 사 계급(游士)에 의한 사교육이 활성화된다. 이런 사교육의 발달로 여러 사람들이 나타나,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저렇게 해야 한다는 각자의 주장(上說下敎)을 내놓게 된다.
이렇게 하여 여러 학파가 자신들의 사상을 다투어 주장하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들의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는데, 바로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학파들이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이나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실천방법은 달랐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학파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유가(儒家)를 살펴보면 유가는 공자(孔子)에서 시작된다. 공자는 처음에는 창고관리인, 가축관리인으로 지내다가 후에 노나라에서 사공(司空)·사구(司寇)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에게는 3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72명이 육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라는 책에서 공자는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고, 그 실천방법으로 '충서(忠恕)'를 주장하였다. 그 뒤를 이은 대표적인 사상가가 맹자와 순자이다. 맹자(孟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제자의 제자)이다. 맹자의 사상은 『맹자』라는 책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는 '인의'를 도덕의 근본으로 삼고 인간은 동물과 다른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자(荀子)는 조(趙)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다. 순자는 '인간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은 악하므로 '예악'에 의해 인간을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와 장자이다. 노자(老子)의 사상은 '있는 그대로의 그러함(자연)'이라는 것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위)'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유가의 도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절대적인 진리인 '도'는 우주만물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정치적 처세술을 주장하였다. 장자(莊子)도 노자처럼 '무위자연', '소요(인생을 초월하여 자연에 소요함)'를 주장하였으나 노자의 주장이 사회적인 측면으로 기운 것과는 달리 그의 주장은 개인적인 측면으로 기울었다.
묵가(墨家)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묵적(墨翟)이다. 그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수레를 만드는 업에 종사하였으며 목연(木鳶, 나무로 만든 연)도 제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가가 귀족들의 예악상장(禮樂喪葬)을 옹호함으로써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그 재산을 축내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그리하여 유가가 주장했던 '인(차등애)'을 비판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하였다. 묵적은 선진 철학자들 가운데 사회문제 해결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도덕에 있어 노동을 매우 중시하여, '노동에 참가한 사람이 그 생산물을 가질 수 있다(與其勞, 獲其實)'고 주장하면서 노동생산(富)을 통한 '이(利)'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묵가의 최고 덕목은 '겸상애(兼相愛)'이지만 이 이론의 근거는 '상교리(相交利)'임을 알 수 있다.
명가(名家)는 명실(名實)문제를 주 탐구대상으로 삼았던 학파이다. 명가뿐만 아니라 선진제자의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이 문제를 사회윤리 혹은 현실정치와 결부시켜 다루었다. 예를 들어 기존세력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은 명을 중시하여 舊'名'으로써 新'實'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와 반대로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은 새로 나타난 실을 중시하며 실이 바뀌어졌으므로 명도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가의 정명(正名)사상이 전자의 입장이라면 묵가는 후자의 입장이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로 사회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명과 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중기 이후에 이르러 명실문제에 관한 토론이 점차 발전하여 독립적 영역을 형성하게 되고 사회정치의 측면으로부터 점차 지식론과 논리학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명사와 개념문제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나게 되고 이들에 의해 명가라는 학파가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孔孫龍)이 있는데, 공손룡의 백마비마설(白馬非馬說)이 이 학파의 학설을 대신한다.
법가(法家)는 순자의 영향을 받아 상앙, 신도, 신불해를 거쳐 한비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한비(韓非)는 한국(韓國)의 몰락귀족출신으로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의 제자였다. 그는 『한비자』를 지어 법가 학설을 종합하였는데, 그의 법치설은 순자의 성악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천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순자가 인간의 악한 부분을 예와 악으로써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한비자는 이런 윤리적 교화로는 불충분하므로 법률로써 제재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앙이 법(法)을 강조하고, 신도는 세(勢)를 강조하고 신불해가 술(術)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한비는 법(법령), 술(신하에 대한 통치자의 인사능력 및 통치술), 세(통치권력)를 서로 결합시켜 법치사상을 종합적으로 체계화시켰다. 한비에 따르면 법은 반드시 명문화되어 공포되어야 하며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표준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법을 잘 지키면 상이 있어야 하며 법을 위반하면 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군주가 백성을 통치하려면 법 이외에 술이 있어야 하고 이 술만으로는 부족하니 세, 즉 강력한 통치권력이 있어야 하고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