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의 철학사상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때에 이르면 중국은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만주족은 그들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기 시작한다. 그 방편으로 그들은 전국 각지의 서적을 모으게 하고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총서를 편집하게 한다. 이 총서가 유명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이다. 또 한편으로 송명 시대의 이학은 말류로 흐르면서 본래의 모습과 멀어지게 된다. 독서는 하지 않고 근거 없는 논쟁만 일삼으면서 위진남북조 시대의 청담 사상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청대의 철학은 다시 선진 시대로 돌아가 문헌적인 근거를 찾아 분석하는 데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되자 학문은 당연히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기보다는 기존의 학문, 특히 경학과 사학을 중심으로 하여 한 분야를 고증하고 종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선지자선교회
이런 학문적 기류는 경세치용의 실학사상을 낳게 한다. 경세치용(經世致用)이란 학문이 실제로 정치를 영도할 수 있는 실학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학과 사학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이론이다. 학문의 기초는 폭넓은 독서인 박학(博學)에 있다. 경서는 경세의 기본적인 길을 제시한 것이고 사서는 그 실제적인 운용, 전개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경세치용의 학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박학을 통해 얻어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실증적인 연구가 중요하다.
이렇게 하여 청대의 학술은 경세치용을 담보하는 고증학으로 발전되어 갔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대동(戴侗), 대진(戴震) 등이 있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양세계의 본격적인 충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사상계는 전통사상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한다.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무술정변(1898) 등을 거치면서 '중학위체(中學爲體), 서학위용(西學爲用, 중국의 학문을 바탕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수용한다)' 등의 사상도 출현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