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주의 - 김효성목사님
선지자선교회
<제목차례>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개념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신조 1
신복음주의--중립주의 2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 7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14
근본주의의 지도력 18
배교의 악
이단과 배교(背敎) 9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10
배교의 길 12
속임: '무엇이 쥐를 죽였는가?' 11
옛 복음과 새 복음 13
관용의 잘못
관용에 관하여 2
잘못된 관용 5
오류와의 연합--희미한 빛 5
순결을 희생한 평화 7
관용이 타협이 될 때 8
불관용(不寬容)은 관용되지 않는다 11
관용은 이제 중립성을 의미한다 12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관용해야 하는가? 20
극단적 중립 21
오류는 지적되어야
침묵의 죄 2
현대 교회 문제들은 지적되어야 함 3
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가? 8
오류를 취급하기를 지체치 말라 5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 15
왜 그렇게 부정적인가? 20
진리를 위해 싸우라 16
공적인 오류는 공적으로 교정되어야 함 17
인기 있는 저자들의 에큐메니칼 정신 6
오류를 반대하지 않는 자들의 변명 16
헌트와 모리스의 '타협'을 경고함 19
전투성과 분리
공적으로 타협하는 형제들로부터의 분리 6
거대함이 복 받은 표시는 아님 14
스펄젼의 성경적 분리에 대한 사상 15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17
천주교인들에게 전도해야 하는가? 17
다리들을 불태우고 벽들을 쌓기 10
분리에 있어서 극단적 태도를 피하라 7
전투성 안에서 비열함을 피하라 18
감리교회의 보수주의자들 4
참된 예배 20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개념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신조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1.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2.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3.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4.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 삼위일체의 교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
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5.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
고 애쓰는 자.
6.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ecclesiastical) 부인과, 오류와의 타
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7.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1976년,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들(World Congresses of Fundamentalists)
우리는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들이 선언한 위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것은 성경적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의 기본적 윤곽을 포함한다. 또 오늘날의 배교적이고 타협적인 상황을 인식할 때, '배교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입장의 천명은 성경적으로 완전히 옳다. 성경은 이단과 오류로부터의 분리를 명백히 가르쳤다(롬 16:17; 살후 3:6, 14). 그러므로 세계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은 바로 순수한 보수 신앙의 입장인 것이다. *
신복음주의--중립주의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 신학교의 데오도르 슈브케겔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으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했다". 그런데 오늘날 보수적 교회들 안에 신복음주의 정신이 너무 많다.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여러 표준들에 적응시킴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신하였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을 '바리새인들,' '사랑 없는 자들',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 등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성공하기 위해 배교적 교회와 협력하여 일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無誤), 진화론, 심지어 교회의 사명을 재검토하는데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만이 오늘과 내일의 일들을 위해 충족하다고 가르치는 신실한 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침례교회 세계 선교회 선교사인 로코 피서치아(Rocco Piserchia)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의 근본주의는 성경적 분리의 교리와 실천으로 정의된다. 대체로 말해, 보수적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는 분리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근본주의는 복음주의보다 윤리적, 교회적 (혹은 교리적) 분리에 대한 좀더 엄격한 견해를 주장한다. 보수적 복음주의적 진영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배교자들과 로마 천주교인들로부터의 분리를 실천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아무도 죄악된 교리나 죄악된 행위를 고집하는 동료 신자들로부터의 분리를 실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어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잘못된 교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가르침으로써 그것을 반대하기를 원하지만, 잘못된 교리를 고집하는 동료 신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분리하기를 원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역사는 분리의 근본주의적 견해를 변호하였다. 즉 어떤 교리적 입장도 분리의 실천 없이는 계속 유지될 수 없다. . . . 1950년경에 시작된 신복음주의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사회적 양심과 사회적 행동들을 근본주의의 보수적 신학과 결합시키려 했던 신학적 운동이었다. 신복음주의는 그 지성적 건립자들이 자유주의의 사회적 행동들이자유주의 신학의 직접적 결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치명적 잘못이 있었다. '사회 복음'이라는 표현은 이 복음이 신약성경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신복음주의는 개신교 배교자들로부터의 분리를 강하게 거부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교회적 분리의 교리와 실천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동은 신복음주의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 뿐만 아니라 또한 1세대의 신복음주의자 편에서의 성경적 분리의 거부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실용주의(實用主義)에 근거한 것이다."
근본주의의 지도력
미국 디트로이트 침례교 신학교의 롤랜드 맥퀸(Rolland McCune)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십년 혹은 이십년 사이에 근본주의의 어떤 인정된 지도자들의 은퇴나 죽음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그들의 위치를 대신할 지도력의 쇠퇴가 왔다. 더 최근의 세대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면에서 일종의 공백을 경험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후의 근본주의 지도력의 후예들은 덜 강력하고 덜 확정적이며, 덜 전투적이고, 논쟁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려는 마음이 덜하다. 어떤 이는 신복음주의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근본주의 선배들 사이에 어떤 거리를 두기를 열망한다. 다른 이들은, 아직 '상황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선포하기는 하지만, 더 조용하게 또다른 한 방향으로 가버린다."
배교의 악
이단과 배교(背敎)
밀톤 죤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교(背敎)는 진리의 거부이며, 이단(異端)은 진리의 왜곡이다. 그 둘 중에, 이단은 여러 면에서 더 위험하다. . . . 왜냐하면 그것은 탐지하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단은 그 본질상 배교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위조품이 진짜에 더 가깝게 될수록, 그것은 더 교활하게 된다. 참된 신자는 배교를 받아들이도록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단의 위협에 굴복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치 않은 이단을 거절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신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딛 3:10).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다음의 내용은 위와 같은 제목의 질문에 대한 클레이 나털(Clay Nuttal)의 글에서 발취한 것이다. 역사는 배교(背敎)가 한 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자유주의로부터 오직 두 명의 목사의 거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첫번째 목사는 그 교회를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배교로 인도한다.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들을 확인하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길에 있는 자들은 친구들로부터의 경고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와 같이 배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 인도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들의 교단이 장소적 천국과 지옥 혹은 불이 없다고 하는 자유주의 교리들을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라도 그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충성된 경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거짓 교리를 취급하고 있기보다는 개인적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이 없다' '천박한 정신을 가졌다'고 부른다. 사람이 어떻게 배교에 도달하는가? 사사기 2:10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배교의 길
종교적 연합의 역사에서 결코 어떤 단체도 배교나 현대주의나 자유주의로부터 나온 적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그리로 돌아가지 않은 적이 없다. 어떤 단체들은 좀더 시간이 걸렸고 다른 단체들은 그 과정에 있을 것이지만, 역사적 기록이 증거하는 바는, 한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옛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거나 지연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것은 또한 교육기관들과 선교회들과 교회들에서도 그러하다. 그들의 운명의 씨앗들은 자유주의로부터의 그들의 출생 속에 존재하는 것이 나타난다. "다리들을 불태우며 벽들을 세움"이라는 이전의 글에서, 나는 안전의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돌아감을 허용하는 것은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 기구적 유대 관계도 계속되도록 남겨질 수 없다. 영원히 자유주의를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부수고 불태우는' 방침, 즉 돌아갈 모든 가능한 수단을 파괴하는 방침을 추구해야 한다. 배교를 떠날 단순한 벙법은 없다. 1920년대의 옛 자유주의와 배교를 떠날 때, 복음주의자들은 이 시험들에 실패했다. 그들의 '포용주의'의 방침은 현대주의적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도록 기존하는 다리들을 남겨두었다. 슬프게도, '분리주의자들'이라고 조롱을 받았던 어떤 단체들은 자유주의로 돌아갈 다리들을 재건립하고 있다. 그들의 오류는 단절했어야 할 유대 관계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데 있었다. 이것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의 이스라엘의 큰 죄이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진멸하고 쫓아내지 못했고 불순종의 댓가를 지불했다. 이 다리들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로 나아가게 하였다. 역사 기록이 증거하는 바는,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그것을 뒤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남침례교단을 돌아감의 예로 사용하지 말라. 그 교단은 이상의 원리의 아주 좋은 예이다. 비록 약간의 지연이 일어났지만, 그 열차는 배교와 불신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러분이 불신앙자들을 '자유주의자들'로, 자유주의자들을 '온건한 자들'(moderates)로, 또는 온건한 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부를 때, 어떤 이들은 속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한 때 배교로부터 나왔으나 지금 오랫토록 그것을 관용해온 자들의 두려운 종착지는 숨겨지지 않을 것이다.
속임: '무엇이 쥐를 죽였는가?'
쥐를 죽인 것은 98퍼센트짜리의 햄버거이었다. 오직 혼합물의 2퍼센트만 독약이었지만 쥐는 죽었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흔히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여 있을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효력이 있으려면, 속임수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심지어 미혹의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다(사 8:20).
옛 복음과 새 복음
개리 길레이 목사는 말하기를, 새 복음은 결함이 있는 철학(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중시함)과 잘못된 방법론(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몰려 따라감)에 기초하며 그것은 결국 자기 존중(self-esteem)과 개인적 성취의 변이된 복음으로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옛 복음은 노하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으나, 새 복음은 상처 입은 우리에 관한 것이다. 옛 복음은 죄에 관한 것이었으나, 새 복음은 필요한 것들에 관한 것이다. 옛 복음은 의(義)에 대한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이었으나, 새 복음은 성취에 대한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이다. 옛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거슬리는 것이지만, 새 복음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새 복음에 모여들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실제로 구원을 받고 있는지는 매우 의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교회들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변질된 치유적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의 어리석은 것을 전파함으로써 죄인들에게 바른 해답이 되는 용기이다.
관용의 잘못
관용에 관하여
토저(A. W. Tozer)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오늘날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하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한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잘못된 관용
G. 캠벨 몰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습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습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들이 신학적, 윤리적으로 혼란하고, '잘못된 관용과 타협'이 많은 시대가 있었을까? 참으로 성도들에게 분별력과 신실함이 요구된다.
오류와의 연합--희미한 빛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 의무가 있다. 즉 '땅의 소금'이 되는 것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낙태, 동성애, 음란물, 그리고 다른 악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로 하여금 천주교인들과 힘을 합치기를 원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연합할 수 있지만,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종교적 방식으로 함께 행진하고 사역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함으로써 우리의 '빛'의 역할을 절충하고 혼란케 하는 댓가를 치루면서 '소금'의 역할을 강화시키려는 위험을 본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스펄젼은 말하기를,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그 오류에 대한 어떤 성공적 저항을 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했다. '신학적 차이점들을 제쳐놓고' 거짓 복음을 조장하는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 예배할 때,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위는 '빛을 말 아래 감추는' 격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명령하신다(고후 6:14-17).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을 강화시키기 위해 빛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순결을 희생한 평화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컬[교회연합]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나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관용이 타협이 될 때
테리 아놀드(Terry Arnold)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그것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이제 덕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
불관용(不寬容)은 관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불관용의 사람은 관용될 수 없는 유일한 종류이다. 즉 만일 그가 '우익'(右翼)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은 너무 정신적으로 병적이어서) 발언이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미국의 공중 위생국 장관인 데이빗 샛처(David Satcher)는 미국인 전체 중 22퍼센트가 어떤 특정한 때에 '진단할 수 있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생애 중 어느 때에 . . . 정신적 질병을 앓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야구 선수는 그의 정치적으로 부정확한 견해들 때문에 상담을 받아야 하지만, 브레이브즈(the Braves)의 소유주(좌익파 테드 터너)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증오의 발언'을 사용하며, '관용' 경찰의 감수성 훈련 상담을 피할 수 있다. 기이해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관용은 이제 중립성을 의미한다
다원주의는 강요된 중립성이 되었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생각도 표현해서는 안된다. 어떤 목사는 예배하는 이들에게 구도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성경책들을 교회에 가져오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것은 전도를 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많은 죄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 청년'을 포함하여) 많은 선교단체들은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험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회심자들이 그들의 문화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옛날의 종교적 신념들과 행위들을 지니도록 허용된다. 와이 더블유 에이 엠(YWAM)은 이런 관념을 '메시아를 믿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실험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관용해야 하는가?
"경찰이 범죄를 관용해야 하는가, 의사들이 질병을 관용해야 하는가, 법관들이 거짓 증언을 관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기타 다른 맥락에서는 미치광이짓일 관용이 영적 문제들에서는 명령된다"
극단적 중립
우리는 극단적 오른편과 극단적 왼편에 관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극단적으로 거짓되고 극단적으로 불순종적이며 극단적으로 위험하다고 폭로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극단적 중립이다. 예전에 W. B. 라일리 박사는 말하기를, "중도적 사람은 20세기의 신학적 위협이다"고 하였다. 진리와 오류[선과 악]간의 싸움에서 중립성은 덕이 아니다"고 했다.
오류는 지적되어야
침묵의 죄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침묵하는 파수꾼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그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현대 교회 문제들은 지적되어야 함
미국의 한 보수적 교단(GARBC)이 인준한 침례교 성경 대학 및 신학교의 교장인 밀로 톰슨 박사가 그 교단의 최근 연례 대회에서 캘버리 컨텐더 같은 현대 교회 문제들을 지적하는 소식지들을 '(남들을 중상이나 하는) 문제의 종이들'(scandal sheets)이라고 표현하고 그것들을 목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거기에 대하여, 캘버리 컨텐더 편집자 제리 허프만(Jerry Huffman) 씨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 . . . 우리는 보도되고 있는 '타협'이 그것을 보도하는 것보다 '목욕'시킬 필요가 더 있다고 느껴야 한다. 보기를 원치 않는 자들처럼 눈 먼 자들은 없다! 그렇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속임을 피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을 보도하거나 폭로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종이'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수치스런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근본주의자들'[보수주의자들]이 신복음주의의 궤도 안으로 집단적으로 변절하는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강단 교류를 한다. 이런 류의 타협이야말로 20세기 말의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우리는 심지어 개인적 조롱을 직면할지라도 계속 진리를 위해 서서 이러한 '문제들'의 나타남들을 보도할 것이다."
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가?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둘을 항상 분리시킬 수 없다. 밴가드(Vanguard) 1999년 6월호의 한 글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1.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바울은 긍정적으로 사역들을 추천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고, 부정적으로 사역들을 경고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딤전 1장; 딤후 4장). 요한도 또한 구체적이었다(요삼 9, 10).
2.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를 기뻐한다면(예를 들어, 루터와 스펄전과 웨슬리의 전기들),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논리일관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정당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여러분이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는[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딤후 4:15).
3.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실제적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보다 설교자들[유명한 인물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들어야 한다.]
4.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역사적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흔히 더 중요하게 보인다.
오류를 취급하기를 지체치 말라
촬스 스펄젼은 이렇게 말했다: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습니다. 그 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Battle for the Bible in the 21th Centu- ry)은 미국의 R. L. 히머스 2세(Hymers, Jr.) 박사가 쓴 최근의 책의 제목이다. 미국의 보수적 남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은 남침례교단의 지배를 위한 싸움은 끝났고 그들이 이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가? 그들이 이겼는가? 히머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쓴다(35쪽):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서는 남침례교단을 구하기 위한 싸움이 아직 끝나기에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확실히, 교단의 지도층과 6개의 남침례교단 신학교들에서 성경에 관한 보수적 입장을 향해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것은 그 조류가 남침례교단의 교회들과 교단적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단 안에 54개의 자유주의적 학교들이 있고 단지 12,748명의 학생들을 가진 6개의 보수적 학교들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같은 시간에 113,581명의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남침례교단의 학생들의 90퍼센트는 자유주의 학교 기관들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숫자들의 정확한 해석에 대해 변론할지도 모르겠으나, 여러분은 지적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책은 60개의 학교들의 이름과 학생수를 열거한다. 히머스는 머서 대학교 총장 R. 커비 갓세이 같은 어떤 남침례교단의 대학교의 총장들의 극단적 자유주의 사상들을 인용 열거한다. 그는 페이지 페터슨과 폴 프레슬러 판사가 성경 무오성을 위한 초기의 투쟁을 인도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프레슬러 판사가 최근의 책에서 성경 무오성의 싸움에서 해롤드 린젤이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는 언급을 생략하였고 또 빌 포웰의 주요 저작을 비평하였음을 꾸짖었다. . . . 데이빗 비일 박사는 말하기를, 이 책은 구체적으로는 남침례교단 내의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좀더 넓은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적 문제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진술"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가?
여러분은 어떤 잘못된 교리나 교사나 타협적 지도자에 관해 사람들을 경고하려고 애쓸 때 "왜 그렇게 항상 부정적인가?"라는 말을 들었다. . . .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너무 부정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로 그 말로 여러분을 향해 부정적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너무 부정적이고 사랑이 없다고 우리를 말로 찢고 빻으면서 우리에게 심히 부정적이고 사랑이 없었을 때 우리는 흔히 놀라운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거나 그의 말을 들었다. . . . 한밤 중에 이웃의 집에 불이 났을 때 그를 깨우는 것이 너무 부정적이고 사랑이 없는 일인가? 어떤 이는 우리에게 양을 삼키려는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을 향해 부정적이지 말라고 하지만, 그들 자신은 양무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신실한 '경고자들'에게 부정적이려 한다.
진리를 위해 싸우라
"만일 우리가 단기간의 영향을 위해 오늘 진리를 희생한다면, 우리는 내일 우리의 행위가 어떠할지 보증할 수 없을 것이다. 싸워야 할 날이 연기될 때 싸울 의지가 우리에게서 떠날지도 모른다".
공적인 오류는 공적으로 교정되어야 함
데이브 헌트는 독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 . . 그것은 '잘못들'을 지적하는 문제가 아니고 비성경적 교리와 행위를 교정하는 문제이다. 공적으로 가르쳐진 교리적 오류는 그것으로 잘못 인도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사실, 교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모든 가르침의 주된 목적이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목적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3:16). 참으로 22권의 서신들의 대부분은 교정에 관한 것이다! 잘못된 것에 관해 경고함이 없이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의로 교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딤후 4:2). 그리고 책망과 교정은 잘못된 말을 한 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미완성적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인기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참되게 행하고 있는가? 그것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기를 원치 아니하는' 이유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교회 안에 없는 한 주된 요소이지 않겠는가?".
인기 있는 저자들의 에큐메니칼 정신
마크 시드웰은 그의 저서 나누는 선(The Dividing Line)에서 제리 팔웰과 잭 반 임페의 신근본주의'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또 성경 무오성을 옹호하며(린젤l), 신학적 타협에 항거하며(쉐퍼, 웰즈) 은사주의에 대해(죤 매카더) 그리고 카톨릭 교회에 대해(스프라울) 경고하는 인기 있는 [신]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근본주의자들이 그들의 비평서들을 읽고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이 저자들이 여전히 분리에 관해서는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바르게 썼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과 잘못된 실천의 관용을 용납하고 촉진하는 기관들과 연맹들의 그물망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어떤 위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근본주의적 그리고 비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된다고 추정하는 것이 신근본주의적 오류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일치의 근거는 오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와 성경적 실천에 대한 공통적 신념이어야 한다."
오류를 반대하지 않는 자들의 변명
"오류와 대결치 않는 것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설명은 가혹한 전투성이 유익보다 더 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너무 자주 신앙에 손상을 준 귀에 거슬리는 논쟁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빌리 그레이엄 박사는 흔히 '근본주의자들'을 이런 잘못 때문에 비난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바가 무시되었다는 사실이 오류에 대한 그것의 명령들이 순종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아니다. 어떤 이들이 이 명령들을 논쟁적 정신으로 따랐다는 것이 다른 이들이 그것들을 전혀 따르지 않아야 할 구실은 아니다. 오류에 대한 성경적 싸움은 사랑과 완전히 조화된다. 참으로 그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을 위한 사랑이다. 믿음을 위해 싸우라는 명령은 어떤 이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폐기되지는 않는다."
헌트와 모리스의 '타협'을 경고함
파운데이션지 7-8월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창조 연구소의 설립자인 헨리 모리스와 베레아의 외침(Berean Call)지의 편집자인 데이브 헌트가 최근에 '만세(萬世)의 지혜' 사경회에 갈보리 채플 설립자 척 스미스와 연합하였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은 실망을 주는 일이다." 여러 해 동안 모리스와 헌트의 유익한 경고의 사역들을 언급하면서, 그 글은 "이 슬픈 타협은 갈보리 채플 운동의 은사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노력들에 신임을 빌려준다"고 말했다. 파운데이션지는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방언과 다른 계시적 은사들을 포용하고 은사주의와 신복음주의 진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척 스미스와 함께 사역적 노력에 연합했을 때 타협이 일어났다고 했다. 헌트와 모리스는 성경적 분리 외의 다른 거의 모든 영역들에서는 탁월한 분별력을 보인다.
전투성과 분리
공적으로 타협하는 형제들로부터의 분리
마크 시드웰은 나누는 선: 성경적 분리를 이해하고 적용하기라는 그의 새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背敎)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그가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만일 성경으로부터 적절히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 의해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충성된 목사는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체하고 또 아마 어느 정도 그러할지라도 그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이것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입장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불행스럽다. 우리가 오직 입장에만 집중하고 성경적 불순종이나 타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촉진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촉진하고 있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해야만 한다."
거대함이 복 받은 표시는 아님
존 E. 애쉬브룩, "신복음주의의 불문의 기본적 전제들 중의 하나는 거대함이 복의 표시이며 타협이 성장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을 위해 원리를 희생하는 전략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아니고 오직 사탄의 전략이다. 타협을 성장 전략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근본주의의 다른 장점은 일반 대중과 다르다는 데 있다."
스펄젼의 성경적 분리에 대한 사상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성공적으로 대항할 힘을 잃게 할 것이다." "우리의 엄숙한 확신은, 진정한 영적 교제가 있을 수 없는 곳에는 교제가 있는 것 같은 모양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알려진 치명적 오류와의 교제는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류가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숙고할 것도 없이 그 단체와 즉시 관계를 끊었다. 그 때 이후 나의 조언은 '그들로 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항거도 알려진 악으로부터의 명백한 분리와 비교할 만한 것은 없다고 느꼈다." "나는 나의 증언을 무의미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신앙으로부터 탈선하는 자들과 또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끊었다." "어떤 댓가를 치룬다 할지라도, 자신들을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분리시키는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우리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배교적인 교회연합가들은 "만일 우리가 양우리를 넓히고 양이든 늑대든 다 청하여 들어오게 하면, 우리의 문제들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타협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양우리를 넓히고 거기에 든 자가 양인지 늑대인지 판단치 말라. 단지 그들을 다 사랑하라"고 말한다. 반성경적인 은사주의자들은 "양우리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양이든 염소이든 단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라"고 말한다.
천주교인들에게 전도해야 하는가?
미국의 성경장로교회 65회 대회는 위의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우리가 천주교인들에게 전도해야 하는지 어떤지에 대해 혼란과 점증적인 무관심이 있어 왔다. 촬스 콜슨과 J. I. 패커 같은 유명한 신복음주의 대변인들은 개신교인들이 신학의 많은 영역에서 천주교인들과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ECT I과 II의 대표자로 자처하는 이들은 칭의(稱義)의 영역에서 천주교 신학과 절충하였으나, 천주교회는 그 전통적 교훈을 떠나지 않았고 종교개혁 진리들에 더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의 현대의 요리문답에 나와 있는 천주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여전히 트렌트 회의 오류들 그대로이다. 성경을 믿는 영혼을 지옥불로 위협했던 16세기의 정죄와 저주 때문데 천주교 국가들에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화형을 당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들이 천주교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메시지가 필요한 잃어버린 죄인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선언한다. 천주교회 안에 믿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자들은 그 적그리스도적 체제에서 나오라고 초청을 받아야 한다.
다리들을 불태우고 벽들을 쌓기
오늘날은 타협의 시대이다. 명료성을 위한 단순함보다 혼란을 위한 복잡함이 있다. 오늘날은 다리 놓기와 수용(受容)의 시대이며, 어떤 벽들은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믿는 '옛 방호물'에 대한 격렬한 반작용의 시대이다. 어떤 이들은 믿기를 배교가 멀리 떨어진 다리인 한 진정한 위협은 없다고 한다. 나는 목회하는 어떤 친구들이, 우리는 '옛자유주의'를 두려워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힘 없는 흔적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충돌을 옛문제로 보았다. 지금 그들 중 다수가 자유주의적 교리를 그들 속에 품었거나 그것에 대해 그들의 눈을 닫았다. 이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들은 배교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 . . 그 대답은 참으로 매우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을 돌아가게 허용할 다리들을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 다리들의 일부를 황폐케 했으나, 지금 그것들은 재건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건립된 어떤 벽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벽들은 인기가 없고 '에큐메니컬 복음주의'에 장애물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벽들은 미움을 받고 조롱을 받고 멸시를 받는다. 다리들은 '신자유주의'를 옛자유주의와 똑같은 파멸로 인도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다.
분리에 있어서 극단적 태도를 피하라
분리에는 항상 극단적 태도의 위험이 있다. 개인적 해석들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건전한 성경적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거의 그 자체를 위해 분리가 행해진다. 마크 시드웰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쓰면서 죤 에쉬브룩의 다음의 말을 인용한다: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전투성 안에서 비열함을 피하라
펀더멘탈 다이제스트지 2001년 7-8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싸우는 근본주의자들은 전투적이면서 비열함이 없이 적절한 입장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중대한 싸움들에서, 우리는 때때로 사랑하는 형제들과 친구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그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항상 우리의 용감한 입장 때문이고 우리의 잔인한 성향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또한 죤 브로크(John Brock) 박사는 프론틀라인(Frontline)지 7-8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적 침례교 설교자들과 사람들은 불친절하거나 생각이 없거나 사랑이 없거나 율법주의자들이지 않다. 그것은, 근본주의 입장을 가지는 소수의 사람들이 감정의 절제가 없거나 불친절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성경적 교훈[분리의 원리]을 포기하게 만드는 마귀의 거짓말이다."
감리교회의 보수주의자들
미국의 감리교회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더 이상 [연합 감리교회]의 회원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월드지 1998년 7월 25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신자들은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을 긍정하지 않는 자들과 영적 동반자들일 수 없다," "우리는 본교단에서 연합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열에 대한 존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되어 있다: "불경건과 배교가 우세한 교회들 안에서, 분열의 악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에게 있다."
최근의 논쟁의 많은 부분은 연합 감리교회의 목사 지미 크리치의 최근의 두 여성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언약' 결합 의식의 집례와, 미국 뉴욕시의 악명 높은 리버사이드 교회의 '동성연애자 주일' 예배에서의 그의 '설교' 때문에 기인하였다.
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기념 연합 감리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즈는 자기의 정박소는 '해방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해방의 신학이란 민중들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이요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일파이다.] 그는 말하기를, "규칙들과 교리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30년 이상 동안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결합 언약 의식을 집행해 왔다고 했다.
이런 배교적 교단 안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뿐이다. 그들은 저런 자유주의자들을 축출하고 교단을 정화시키든지, 아니면 그 교단을 떠나 새로 건전한 교단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 아무런 조처 없이 그런 교단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주께 대한 불성실이요 악에 대한 타협에 불과하다.
참된 예배
다음의 내용은 아서 핑크(Arthur W. Pink)의 요한복음 강해 중 요한복음 4:23에 대한 주석이다: "오늘날 '예배'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많은 뜻이 영적이기보다 육신적이고, 내면적이고 경건하기보다 외형적이고 구경거리적이다. 예배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드리는 것이며, 육신과 그것의 감각을 끄는 모든 것은 참된 예배를 손상시킨다. 예배는 눈이나 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즉 새 본성으로 드리는 것이다. 오 우리가 얼마나 멀리 정로에서 떠났는지! 현대적 '예배'는 주로 육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고안된다: 즉 그것은 아름다운 주위 환경과 감각적인 음악과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가진 '밝고 매력적인 예배'이다.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인가! 찬양대는 누구에게 노래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인가? . . . 노래의 매력이 '설교의 어리석음'을 대치하였다. 그러나 음악이 잘못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재능을 주지 않으셨는가? 물론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비평하는 것은, 육신적이고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전문적이며 구경거리적인 교회 합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단순히 육체적 감각으로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