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58명이나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칼빈 중상모략에 대한 반론

 

  선지자선교회

코람데오닷컴 승인 2016.10.12 00:39

  

                                  

Paul Jang 목사.jpg

Paul Jang 목사(미주총신대학교 교수)

 

이글은 칼빈에 대한 오해들이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코닷의 애독자인 미주총신대학교 장바울 교수가 보내온 글이다. '칼빈을 바울사도 다음으로 위대한 종으로 알았는데 인터넷에 보니 수많은 사람을 참살한 살인자라는 글을 접하면서 마음에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질문하는 것이라면서 보내온 한 목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장 교수는 고신대학교에서 1년 수학한 인연으로 고신교회와 코닷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왔다. -편집장 주

 

 

<소개>

 

PROFILE: REV. PAUL B. JANG/ 장바울 목사 (Th.M, D.Min, Ph.D in Theology)

 

[SCHOOLS ATTENDED] (학력)

 

* Dan Kook University in Seoul Korea (Dept. of English Literature)

 

* Ko Shin University in South Korea (Completed one year)

 

* Chong Shin University in South Korea (Graduation)

 

* LTS in U.S.A (M.Div: Thesis on the Systematic Theology)

 

* CTS in U.S.A (M.Div Intensive Course at CTS in Grand Rapids)

 

* ITS in U.S.A (Th.M: Systematic & Contemporary Theology)

 

* RTS in U.S.A (D.Min: Church Growth/Discipleship Training)

 

* FTS in U.S.A (Th.D: Systematic Theology, Ph.D in Theology)

 

) 미주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Calvin에 관한 질문: 칼빈이 58명이나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 목사님 바쁘실 텐데 질문을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수년전부터 바울 사도 다음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하던 칼빈의 목회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인구 13,000명 정도 되는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사형시킨 58명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인구 비율로 따질 때 엄청난 수효의 사람을 처형한 것입니다 그것도 정말 이단이어서 사형시킨 것은 당시 천주교에서 사형시킨 일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자기가 말하는 교리가 맞지 않는다고... 교수형 참수형 등 혹은 자기 말을 거역한다고 쇠꼬챙이를 달구어서 혀를 잘라 버리는 것 같은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OOO 목사 드림

 

칼빈의 만행 [기독교인은 잘못 알고 있다] 모든 것 (웃음, 혐오, 슬픔, 심심)

 

 

2013/02/11 19:21

 

 

http://blog.naver.com/wjo0103/100179272110

 

 

OOO 목사님

 

 

목사님이 접한 정보가 사이버(Cyber) 공간인 것 같은데, 사이버 공간에는 좋은 정보보다 나쁜 정보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돌아다닙니다. 이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 특히 오늘날로 말하자면, 안티기독교인들이나 칼빈의 교리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의 글들입니다.

 

 

칼빈에 관한 견해

 

칼빈에 관한 역사적 평가는 수세기를 지내오면서 수없이 많은 연구논문들을 통하여 발표되었습니다. 이 논문들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째가 개혁주의(Reformed) 입장인데, 이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둘째가 비 개혁주의(Liberalism, 당시로는 Exiled Libertines) 입장으로 칼빈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셋째는 중도적인 입장으로 되도록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려는 입장입니다. 이들 중에는 양쪽의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특히 개혁주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평가가 눈길을 끕니다. 물론, 결론은 칼빈의 판정승을 선언하는 편으로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칼빈은 워낙 위대한 인물이라 단세포적인 존재로 보면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누구나(바울까지도) 약점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잡고 쓰셨다는 부분을 좀 더 집중적으로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칼빈에 대한 평가는 몇 마디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요새 OOO 목사님은 기독교강요를 편집하면서 칼빈을 사도들과 같이 위대한 사람(바울같이)으로 믿고 있습니다. 칼빈의 장점에 심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티기독교인들은 칼빈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 루터, 오늘날 한경직 목사님, 옥한흠 목사님 등등 훌륭한 주의 종들까지도 모두 지옥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사이버 공간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이 사이버 공간에 난무하는 비 진리인 어둠의 영인 공중권세의 활동입니다.

 

칼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몇 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조명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었는가? 즉 하나님의 역사적 통치사역의 성격입니다. 하나님의 주권행사가 제네바 시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 당시 제네바 종교개혁을 통하여 사회까지 개혁되었는데 이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곧 존 칼빈입니다. 그는 오로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제네바 전체 영역에 행사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톨릭 퇴출과 이단 정죄), 정치(의회에 영향), 경제(오늘날 미국의 FDA의 탄생원인 제공)등 사회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개혁된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어떤 학자들은 신정정치(The Theocratic Kingdom of God)가 실현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둘째로 올바른 역사의식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제네바시의 시대적 환경, 즉 그 당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 사회에 흐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주류를 파악해야 합니다. 과거사를 현재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모든 역사, 말하자면, 왕정시대의 삼국시대, 고려, 이조시대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재세례파의 주장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중세역사는 사라져야 합니다. 물론 가톨릭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재세례파는 비본질적인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개혁의 본질을 망각한 경거망동의 행동으로 그 당시 개혁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들을 순교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 당시의 역사적 이념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교리의 싸움이었습니다.

 

 

올바른 개혁주의란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정확하게 해석하고, 이렇게 해석된 말씀의 원리에 의해 평가하여 잘 못된 것을 수정하고 좋은 것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개혁의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이미 실현된 사건들이고, 이 역사적 사건들의 단편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연속성(continuity)과 불연속성(discontinuity)의 역사관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에 과거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당시의 단편 잣대와 연속된 연결 잣대로 이해하여 그 가치를 평가하고 현재의 역사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칼빈의 사상과 그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핵심적인 사상은 하나님 중심사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오리엔트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매달려 오로지 그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이해 (understanding)도 하나님 중심의 절대주권 사상에 의하여 해석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중심의 말씀을 붙들고 개혁운동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도 그렇게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낙심치 않고, 낙심할 때는 주위의 동역 자들과 시민들의 권고로 다시 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루터가 하나님의 손에 강하게 붙들려서 종교개혁의 사명을 감당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단 시비가 벌어진 것이며, 이단 정죄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이단 정죄에 앞장서다 보니 결국 58명의 처형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받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칼빈의 제네바 개혁과 이단으로 정죄되어 처형된 사건들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양서 한 권을 소개하겠습니다. Ronald S. Wallace가 저술한 [Calvin, Geneva and the Reformation]이라는 책입니다. 부제는 (A Study of Calvin as Social Worker, Churchman, Pastor, and Theologian)입니다. 이 책에는 제1The Reformer and his City, 2Churchman and Pastor, 3The Theologian으로 되어 있어서 칼빈의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책 중에 제1부의 소제로 Rumours, Slanders and Cases라는 부분을 참고하면 좋을 것입니다. 즉 칼빈에 대한 루머와 중상모략과 그 케이스들을 다룬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목사님이 의문을 갖게 된 것들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업적에 대한 명성이 제네바에 퍼져나가게 되자. 그에 대한 루머가 특히 에피큐리안들과 같은, 추방된 자유방임(방탕)적 기독교 행동주의자들과 칼빈에 대항했던 지방 목사들에 의하여 베른(Bern) 주위에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구실은 칼빈이 장관에게 아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난이 쏟아지자 칼빈은 펜대를 놓지 않고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에게 특별히 대부분의 루머를 조작하고 그를 괴롭힌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Sebastian CastellioJerome Bolsec과 저 유명한 Michael Servetus입니다.

 

먼저 칼빈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Castellio는 개혁자 칼빈의 집에 잠시 머물었는데, 한 프랑스의 마담이 그 집에 거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칼빈이 자기를 모욕한다고 생각했고, 칼빈이 잘해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파렐의 추천으로 사립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청을 했으나, 솔로몬의 아가서가 음탕하기 때문에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신조에서 (주께서)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 때문에 칼빈에게 신뢰를 잃어 거부당한 것입니다. 그 후에 Servetus의 사형소식을 듣고 칼빈을, 특히 칼빈의 예정론교리를 맹렬하게 공격했으며, 이를 인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로 고생했고, 도적이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종국에 가서는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그를 순교자로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의 후반의 반역은 제네바 개혁자에게 있어서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칼빈과 전혀 다른 일을 했던 Jerome Bolsec은 개혁신앙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예정론 문제에 관한 것 외에 대부분 칼빈의 교리를 존중했습니다. 예정론에 있어서, 어떻게 사람이 나기도 전에 운명이 결정되며,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주피터(Jupiter)와 같이, 그리고 악의 기원과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칼빈을 반대했습니다. 예정론 교리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칼빈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어거스틴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오도했습니다. 칼빈이 교회에 도착할 때 볼섹이 자신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Bolsec은 곧 제네바 시로부터 자신이 추방될 것을 감지했습니다. 시정 당국은 Bolsec을 감옥에 가두고, 이 문제에 대하여 칼빈의 자문과 이웃 주에 있는 목사들의 자문을 들었습니다. 주위 목사들은 Bolsec의 사상이 페스트와 같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해가 될 것이라고 하며 그를 추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주민들은 Bolsec 보다 Calvin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Calvin이 죽은 후에 Bolsec은 칼빈의 생애를 출간했는데, 칼빈의 생애가 고통과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염려하여 그런 중상과 모략들이 다른 한편 로마 가톨릭교회에 심각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Michael Servetus에 관한 루머입니다. 실제로 Servetus는 기독교 신론에 있어서 근본 교리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삼위일체(Trinity) 교리와 기독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다가 시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되어 화형을 당한 인물로, 지금까지 뜨거운 이슈 중에 하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Servetus는 상당한 식견을 가진 학자로 개중에는 그 학자의 죽음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칼빈은 Servetus가 화형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당시 그는 화형당하는 장소에 가지도 않았으며, 파렐은 그 광경을 보고 말없이 그곳을 떠나 칼빈을 방문하지도 않고 Neuchatel로 갔다고 합니다.

 

 

Servetus는 그가 제네바에 도착한 이튿날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칼빈은 그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찬 가운데, 예비 심리가 이루어졌으며, 제네바 당국자들은 첫 공판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공소는 Libertine 당의 한 사람인 Claude Rigot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칼빈은 주요한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증언은 날카로운 비난이었으며, 때로는 개인적인 배음(overtone)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격정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근거로 칼빈을 반대하는 한 두 사람은 Servetus에 대한 처결에 실망을 했습니다. 참으로 칼빈은 시의회에 화형이 아닌 좀 더 자비로운 형을 내려줄 것을 호소했으나, 의회에서 이러한 이단들을 취급하는 관례를 바꿀 수는 없다는 이유로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된 후, 칼빈은 제네바에서 집행된 것, 그 당시 세계가 사형수에게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러한 극단적인 광신적 행동을 자행한 것에 대해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칼빈 자신도 승인하지 않았지만, 화형까지도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며, 결국 국제적 인정을 받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관하여 믿지 않았으며, 칼빈과 베자가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그토록 노력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03년에 개혁교회의 한 위원회가 Servetus가 죽은 장소에 화강암 기념비를 세웠는데, 거기에 기록하기를 그의 세기에 있었던 한 잘못을 비난하고 종교개혁과 복음의 참된 원리에 따라 양심의 자유를 믿는 신자들을 견고케 하는, 존경하고 고마운 우리의 위대한 개혁자, 칼빈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여기에 이 속죄의 기념비를 세웠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총체적인 평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세 케이스가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을 반대하여 칼빈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거론했습니다. 이들 중에 Castellio는 칼빈의 개혁운동을 반대하다가 굶어죽었고, Bolsec은 추방되었으며, Servetus는 화형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원인들이 얽혀 있다는 말씀입니다.

 

 

(1)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제네바의 사회구조와 교회구조,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개혁사상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제네바는 처음에 가톨릭교회가 주도하다가 개혁의 물결에 의하여 가톨릭이 물러나고 개혁교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 정점에 칼빈이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의 사상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그의 개혁의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국가(제네바 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관료에 들어갔고, 뿐만 아니라 목사회가 시의회의 자문역할을 하게 되어 정교가 밀착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 특히 시의회에 대한 칼빈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중대한 일들에 관해서 시의회는 칼빈의 자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물론 칼빈은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지만, 이 두 기관은 분리되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시에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개혁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회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고 자문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자문의 영향력이 막강하여 시의회의 결정을 좌우할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제네바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시 행정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시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3) 구조적으로 교회와 정치가 분리는 되어 있지만, 워낙 하나님의 주권사상의 영향이 강해서 시의 모든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다보니, 시 행정관이나 법관들이 칼빈의 정신에 따라 시정을 이끌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개혁교리가 시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교회의 교리에 어긋날 경우에 정죄가 되며, 극단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면 시의 사법에 의하여 처형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역사상으로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법집행에 의하여 처형이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와 교회가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다른 면에서 조명해야 할 것은 칼빈은 우리 일반 성직자와 달리 시대의 사명을 받은 자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런 개혁사명이 아니었다면, 적극적으로 이단정죄에 뛰어들지도 아니 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마다 이러한 사명을 띤 종들이 나타나서 속사도 시대부터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처형하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불신자들 특히 세상 권세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도 자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예로 프랑스의 루이스 XIV세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유그노(Huguenots) 파의 학살 사건과 재세례파의 처형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케이스마다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5)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이 처형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판단하다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을 하나님의 사냥개”(God's bloodhound)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그 당시 정신적, 구조적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잘못은 시대의 잘못이었다.”(His mistake was the mistake of the age)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같으면 삼위일체를 부인했다고 해서 사형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달랐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게다가 칼빈의 신학적, 개혁적인 판단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그 처형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호소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Servetus가 사형당하는 시간에 칼빈은 무릎을 꿇고자신을 사로잡아 오는 착잡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Servetus가 신학적 토론을 위하여 파리에서 칼빈을 만나자고 약속해서 칼빈은 나갔으나 Servetus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7) 사형당하기 전에 Servetus는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 전적으로 망가진 한 사람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불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켰는지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거기에 위안은 없었습니다. Servetus는 몇 주 동안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도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의 최후의 부르짖음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의 아들 예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화형도, 파웰의 간청이 무엇도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단들을 청산하는 방법으로서 화형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마지막 그 시간의 운명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정리해보면, 몇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

 

2) 칼빈의 신학과 개혁사상

3) 이단에 대한 역사적 시대적 정의

4) 사형집행에 대한 방법의 재고

5) 셀베투스의 죄상에 대한 조명

6) 올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조명

7) 정교분리 원칙과 상호관계에 대한 고찰

8) 정확한 개혁주의 입장의 올바른 평가

 

 

[결론]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 시대에 희생된 58명에 대한 평가에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역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이 견해는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무조건 칼빈의 잘못으로 칼빈의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만행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칼빈의 신학적, 신앙적 독선이 빚어낸 결과이며,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비기독교적으로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그러고도 기독교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온건파들은 셀베투스에 대한 동정입니다. 칼빈의 처사에도 일리는 있지만 죄에 대한 형량과 그 방법이 너무나 가혹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만한 것으로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이 문제는 앞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볼 때에 그들은 처벌받아 마땅하며, 처형은 그 당시 시의회 법에 따른 것이지 교회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 경제 등이 밀착되어 있는 사회 시스템으로 인하여 내려진 결론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적으로 교회법에 의하여 내려진 이단정죄가,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정치제도와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이단을 당시의 정치법에 따라 집행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칼빈의 종교적 이단 정죄가 있었지만, 시법에 정해진 법에 따라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칼빈의 관용의 호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서는 이단에 대한 시법의 관례를 포기할 수 없고, 이단에 대해서는 시법에 의하여 엄벌하는 것이 일벌백개의 취지에도 맞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거의 정교일치의 체제가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칼빈이 신학적으로 정죄한 이단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인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결행되었다는 것이 칼빈에게는 그의 루머의 함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형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결국 칼빈은 이단을 정죄했다가 일부의 반대파들에 의해서 극악한 살인죄인의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칼빈은 어느 법에도 저촉되는 직접적인 범죄자가 아니고, 혐의자도 아니며, 단지 신학적으로 이단정죄에 대한 증인으로 출석했을 뿐, 처결은 시 사법당국에서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 증인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증인이 위증을 할 시에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혐의자나 범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시당국의 가혹한 처형을 막지 못한 것이 칼빈에게 있어서는 도의적인 책임이 있을는지 모르나, 자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한다고 한 것이 일부에게나마 오명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감정이 상했더라도 명색이 하나님의 종으로 명망 있는 크리스천이 직접적으로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잠들어 말이 없으니, 역사적인 자료에 의존하여 칼빈의 심정을 짐작할 뿐, 칼빈에 대한 진실은 종말에 주님의 심판대에서 밝혀지리라고 믿습니다.

 

 

장바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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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세계침례교회의 역사와 한국침례교회의 역사 선지자 2016.01.16
56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 선지자 2016.01.10
55 평양신학교 file 선지자 2015.12.14
54 한상동 출옥 70주년, 역사적 의미와 과제 선지자 2015.08.25
53 1906' 아주사거리부흥운동 선지자 2015.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