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6 05:12
세계침례교회 역사와
한국침례교회를 논하라
Ⅰ. 서론
침례는 적어도 2세기경부터 사용된 세례이 한 방법으로, 이 방법에 의할 경우 침례 후보자의 신체의 일부는 몸의 나머지 부분에 솓아부는 세례수 속에 잠기게 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이러한 의식은 동방교회에서 발견된다.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까지도 침례의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1960년대말에 전세계에 있는 침례교도의 수가 2,800만인데, 이중 2,450만명의 신자가 미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교파의 수는 크게 4개, 작게는 27개로 구분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4개의 교단은 미국남침례교 총회(Southerm Baptist Convention), 미국통합침례교(National Bapist Convention U.SA. Inc), 미국침례교협의회(Nationl Batist Convention of America), 그리고 미국침례회(America Bationt Convention)이다. 이들 4개의 교단이 미국 침례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침례교의 역사는 그 시작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따고 할 수 있겠지만 발전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고 또한 한국침례교회의 역사도 미국침례교회의 발전과 선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세계침례교회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한국침례교회의 시작과 발전을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서 한국침례교회의 새로운 발전과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보려고 한다.
Ⅱ. 침례교의 기원
침례교도(Baptists)들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과 기본적인 신앙을 같이 하는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챤들이다. 오직 물을 뿌리거나 부음으로 세례를 주는 것보다는 침례로만 침례를 베풀 것을 주장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침례교도들은 침례요한과 사도들의 시대 이랠 침례교회가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 왔다고 믿고 있다. 다른 이들은 자기들의 기원을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재침례파운동(16세기의 급진적인 개신교운동)에 까지 소급시키기도 한다. 재침례파의 영향에 대한 평가가 제각기 다르기는 하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영어를 상요하는 교파로서의 침례교가 회중교회의 분파인 17세기 청교도주의(영국국교회로부터 로마카톨릭의잔재를 「정화」하려는 교회개혁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데에 일치한다.
초기 침례교도들의 삶에는 두가지의 주요 흐름이 있었다. 그 하나는 「특수침례교도」(The Perticular Baptists)로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 속죄론을 주장하며 칼빈주의적인 경항이 강하다.
다른 하나는 「일반침례교도」로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일반속죄론을 주장하며 아르미니우스의 보다 온건한 칼빈주의를 대표한다 .
이 두 개의 흐름은 또한 그들의 기원문제와 고나련된 교인 자격의 차이에 의하여 구별된다. 일반침례교도들이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서 유래한 반면, 특수침례교도들은 배분리주의자들의 독립교회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분리주의 자들과 비분리주의 자들은 양자가 공히 회중교회주의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륙은 재침례주의자들이 영국의 침례교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대한 증거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특수침례교도들이 침례교전통의 주류를 대표하였지만 활동은 일반침례교도들이 먼저 하였다. 1608년에 종교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링컨셔지방의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은 피난처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일부는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인 존스미드(John Smyth)를 목사로 청빙하여 암스테르담에 정착했고, 다른 일부는 존 로비슨의 지도하에 라이든으로 옮겨 갓다. 교인 자격의 의미한 관한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침례문제가 대두되자, 스미드는 만일 “사도적인 교회 조직이 성도들로만 구성된다”는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침례는 신자들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신약성서의 초대교회들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에서 유아침례를 지지하는 구절을 전혀 발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미는 「The Character of the Beast」(1609)라는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같은 해에 그는 침례교회형성에 가담한 36명과 자신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그것을 행동화하였다.
특수침례교도는 1616년에 헨리제이콥(Henry Jacob) 이 런던을 관류하는 템즈강 맞은 편 사우드워크에 설립했던 비분리주의자들의 교회에서 유래했다. 1638년에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존스필즈버리(John Spilsbury)의 주도하에 첫 번째 특수침례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탈퇴하였다.
1640-60년의 20년동안 초기 침례교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왜냐하면 침례교 목사들은 청교도 지도자인 크롬웰 군대의 야영지에서 많은 신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급성장은 특수침례교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일반침례교들은 실제로 퀘이커 교도들에게 많은 신자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1660년에 스튜어트가 왕정을 복고한 이후에 양 집단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689년 관용령이 발표되기까지는 지하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관용령은 포괄적인 영국교회의 이념을 포기하고 「비국도들」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예배장소를 허락하였다.
1770년에는 웨슬리 신학을 신봉하는 일반침례교연맹이 결성되었고, 1세기후인 1891년에 그것은 특별침례교와 연합하여 영국과 아일랜드의 침례교연맹을 구성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침례교는 다른 비국교도들의 교회와 더불어 영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미국에까지 그 세력이 뻗쳐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4) 20세기의 상황
1900년 이후 침례교도들은 몇몇 새로운 침례교 그룹을 형성하게 만들었던 신학적인 논쟁들 때문에 진통을 겪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의 이러한 진통은 교회조직의 문제와 신조채택의 문제들 때문이었다.
침례교가 20세기에는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침례교 세계연매의 활동은 활발해졌다. 19세기는 침례교가 선교에 매우 열중하던 시기였다. 침례교의 아시아 선교는 인도에 있던 캐리, 버마의 있는 저드슨, 그리고 중국에 있는 리처드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1960년 말에는 아시아, 특히 인도, 버마, 한국, 중국본토 등에 거의 100만명의 침례교 신도들을 갖게 되었다.
Ⅲ. 한국침례교회의 역사
1. 초기의 역사
한국침례교의 역사는 1889년에 한국에 온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펜윅(Malcolm C.Fenwick, 1863-1935)과 더불어 시작한다. 펜윅선교사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는 「침례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10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황해도 소래에 가서 일하다.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그는 북침례교의 목사인 고든(A.S.Gordon)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으며 그가 경영하던 보스턴 선교훈련학교에도 참석했다. 펜윅 선교사가 침례교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 시기였다. 1894년에 그는 한국순회선교회(The Corea Itinerant Mission)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펜윅 선교사가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한 뒤 얼마후에 고든 목사교회의 집사인 딩(Thing)은 엘라 딩 기념선교회를 조직하고 풀링(E.C.Pauling) 선교사 부처를 19\895년에 한국에 파송했다. 1896년에 이 선교회는 스테드만(F.W.Wteadman) 선교사부처와 2명의여선교사를 다시 파송했다. 이들이 충남 공주, 강경지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선교회는 자금난으로 1900년 이전에 스테드만 선교사를 제외한 모든 선교사가 귀국하고 말았다. 1902년에 스테드만 선교사도 일본으로 옮겨가자 이 선교회는 모든 사업을 원산에서 일하고 있던 펜윅선교사에게 이양하고 말았다.
원산에서 자리를 잡은 펜윅선교사는 다른 교파의 선교회의 손이 닿지 않는 지역에다 복음전의 터젼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손수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동역할 사역자를 가르치고 같이 생활하며 훈련하였다. 1901년에 공주의 엘라 딩 기념 선교회를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선교회와 병합하자 펜윅은 효과적인 사업을 위한 조직의 필요에 직면했다.
1) 대한기독교회의 조직
펜윅은 자신이 양성한 문서순회전도사를 각처에 파송하여 개인전도와 순회선교를 실시했다. 그 결실로 31개 교회가 개척되자 교단조직의 필요을 느껴 1906년에 충남의 강경에 모든 동역자와 교인들을 모아 대화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여 46개조로 된 회칙을 만들었다.
대한기독교회의 조직은 철저한 권체제였다. 교단은 펜윅선교사를 수반으로 한 하나의 교회로 조직되어 전교인은 그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산하의 모든 직분은 그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신앙의 근간은 침례교의 신앙이었으며 성령의 인도하는 신약성서적 회중사상은 강화하였으나 개교회의 자치권은 없었다.
일제통치아래서 대한기독교회는 몇차례의 교단 명칭 변겅이 있었다. 1921년에는 「동아기독교회」로 변경 되었으며, 1933년에는 다시 「동아기독대」로 바뀌었으다가 1940년에는 이 교단의 통칭인 「동아기독교」로 변경되었다.
1890년에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가 교계 예양협정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활하자. 펜윅선교사는 기왕에 다른 교단의 손이 미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목적하였으므로 대한기독교회의 터전을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고지역으로 설정하고 그 지역에 산재한 한국동포들에게 주력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는데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보안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수명의 교단 지도자가 투옥되고, 1944년에는 강압적으로 교단해체령을 내리고 교회건물은 폐쇄시키고 재산을 압류하여 국방헌금으로 강제헌납시키고 말았다.
2) 교단의 재건기(1945-48)
1945년의 조국광복은 한민족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계에 새로운 삶의 소망과 빛을 주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다시 직면했다. 더구나 만주, 시베리아, 몽고 및 북한지역이 있었던 교회들이 대부분이었던 본 교단은 1946년의 북한공산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38선 이북의 교회인 만주, 간도, 시베리아의 모든 교회를 일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1946S년에 남한에 남아있던 그나마의교단 지도자들이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충청남도 칠산이었다. 이때 노재헌목사를 대회의 감목으로 추대하고 9월에 제36회 대회회를 강경에서 가지게 되었다. 이대회는 「동아기독교」의 체제를 총회제로 바꾸었으며 임원들의 명칭도 변경케 되었다. 감목제도를 회중제도로, 감목은 총회장으로, 안사를 목사로 감노를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집사로 명칭을 각기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교역자도 종전의 파송제에서 청빙제로 하고 총회의 회비분담금은 구역에서 각각 조달키로 하였다.
1948년에 동아기독교는 38회 총회를 경북점촌에서 개최하였고 교단의 위상을 새롭게 하는 결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미국 남침례회와 제휴룰 맺게 된 것이다.
3) 명칭의 변경(1949-50)
1949년에 제 39회 총회가 충남 강경에도 다시 개최된다. 이때 미국남침례회 외국선교부의 동양총무인 코우던(B.J.Cauthen)박사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그 총회에 참석해서 「동아기독교회」의 교리와 여러 신앙행습들이 남침례교회와 유사함을 확인케 되었던 것이다. 이를 건의하게 되어 「동아기독교회」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케 되었다. 이것이 본교단의 교단으로서의 조직적 시발점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50년에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 에버내티(J.A.Abernathy)가 내한하여 본격적인 남침례교 선교사업이 본교단의 협조하에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4) 6·25의 위기(1950-1958)
1950년 에버태티선교사 부부의 내한과 선교사업으로 전도의 황금기를 맞았던 본교단은 그러나 또한번의 시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38선 이북의 교회들을 잃어버리는 아픔숙에서 다시한번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침례교의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한국에 파송된 남침례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자신들의 안녕은 돌보지 않고 고통받는 한국민의 어려움을 도왔다. 의료와 구호, 그리고 고아원운영 등을 통하여 많은 선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데 이때에 침례병원이 곣곳에 세워져서 많은 의료와 구호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때에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과 혼란이 있었으니 그것은 타교단 목사들의 대거 침례교 유입과 이에 따른 정체성의 문제가 교리적 혼란이 침례교의 성장을 정체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52년42회 총회가 충남 칠산에서 개되었다. 이때 총회는 규약을 개정했는데 연맹총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국여전도회(W.M.U)를 조직하고, 1953년에는 대전성경학원을 개설하였으며 1954년에 문교부의 인간를 받아 침례회신학교로 승격시켰고, 1953년 그해에 소년회(B.A), 소년회(G.A) 및 신훈회(B.TU)를 조직함으로써 미국남침례교회의 제반 기관 조직이 본 침례교단에 유입하게 된다. 1955년에는 총회 기관지「침례회보」가 발간하게 되었다.
펜윅선교사의 신앙지도와 교육의 영향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남침레교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더 많은 신앙교육과 신학수업을 받게 되어 교단저긍로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미국선교사들의 시행착오와 교단지도자들의 독단등은 분쟁의 불씨를 많이 남겨 놓았지만 타교단의 관계에서 위상을 같이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게 된 시기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펜윅선교사의 신앙지도자와 교육의 영향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남침레교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더 많은 신앙교육과 신학수업을 받게되어 교단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미국선교사들의 시행착오와 교단지도자들의 독단등은 분쟁의 불씨를 많이 남겨 놓았지만 타교단과의 관계에서 위상을 같이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게된 시기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5) 총회의 분열기(1959-68)
1960년대는 침레교단이 또다른 시련을 맞이하는 때였다. 지도자들간의 반목과 불화는 교단정치에 악영향을 끼쳐 결국 한국총회와 선교회간의문제가 생겨 결국 총회느느 두 개로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1959년 3월 17일에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실행위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을 두러싸고 양분되었으며 3월 18일의 한미연석회의에서는 선교부측에서 총회의 전도부장을 불신임 결의함으로써 총회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두 개의 분열총회가 충남 대전과 경북 포항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이른바 대전 총회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장일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지도자와 타교단에서 들어온 전입교역자들이 주측을 이루고 있었다.
1959년 5월 25일에 경북 포항 침례교회에서 개최된 포항총회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 교단의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대개가 남침례교회와 교단이 체휴하기 전에 펜윅 선교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자라온 동아 기독교의 지도자들로서 교단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선교부와는 흔히 대립적 입장을 가졌었다. 결국 선교부가 대전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총회와 협동하게 되자 포항총회측은 대전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총회와 협동하게 되자 포항총회측은 대전총회와 선교부의 주동인물을 불신임결의함으로 교단은 두 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향후 9년간의 교단 분열을 한국침례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한국침례교가 침례교 본연의 신앙원리와 이상에 투철한 교회발전과 신앙정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역사의한 변천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한국침례회 연맹시기(1968-현재)
1960년대부터 성령과 은사운동이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전개되고 1960년대 후반부터 영적부흥운동이 불붙기 시작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케 되었다.
1968년 4월 16일은 다시한번 교단화합이 일어난 감격의 날인데, 9년동안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포항측)과 기독교대한침례회 연맹(대전측)으로 나뉘어졌던 동교단이 합동총회를 개최하고 새출발을 다짐했던 것이다. 1970년대를 내다보면서 분열세대는 지나고 화합의 젊은 세대가 등장케 된 것이다.
1969년 연례총회에서는 선교회의 주선으로 세계적인 성막가 크라우드레아 박사가 개회식을 겸한 음악회를 가짐으로 은혜로운 합동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도관석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고 침례신학대학출신들이 대거 등장케되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Ⅳ. 결론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계속된 이러한 훈련프로그램과 캠페인은 총회분열기간동안 총회안에 깊이 침투되었던 제반 비침례교적인 요소들을 제거시키는 데에는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1968년의 교단 통합, 참신한 젊은 지도자들의 대거 등장, 전국적인 훈련프로그램과 캠페인등은 1970년대의 교단발전과 번영을 위한 새전기를 마련케 되었다. 교단의 통합과 더불어 전개된 1970년대의 한국침례회 연맹총회는 이처럼 한구사회에서 침례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틀을 다지는데 심혈을 쏟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교단은 정비되고 참신한 새인재가 계속 공급되고 있으며, 총회와 선교부가 마려한 제반기관과 프로그램은 일할 수 있는 여건과 방편을 마련해 주엇다. 1960년대부터 전개되 개교회와 교역자들의 영적각성운동, 1970년대부터 비롯된 신학대학출신의 젊은 일꾼들의 대거등장, 이 기간에 교회진흥원에서 발간한 교회학교공과 등, 각종자료의활용, 그리고 교회성장을 위한 각종 강습회와 훈련캠페인은 등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침례교회 성장의 기틀과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1976년부터 한국침례회 연맹의 교단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로 변경되었다.
한국땅에 들어온 침례교회는 기틀이 완전히 다져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다져나고 있다. 그들의 신앙과 행습, 교회행정과 조직, 교단의 사업과 정치, 이 모든면에서 한국침례교회는 신약성서 교회의 모본을 향하여 기틀을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의 위대한 도약과 발전이 낳을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한국의 침례교회들은 해마다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되는 침례받은 성도의 수를 더해가고 있으며, 또한 2000년을 향하여 세계선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매진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1. 침례회 진흥원, 「세계침례교회사」, 서울:침례교연합회, 1990.
2. 기독교대백과사전 편찬위원회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아가페출 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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