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12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것
1981. 1. 9. 새벽 (금)
본문:요한계시록 18장 1절∼3절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2절 끝에 “큰 성 바벨론이여” 이 바벨론이라 말은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해서 분개한 일이 가장 많았습니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기구를 다 훔쳐가고 하나님 백성들을 다 포로로 잡아가고 참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한 그것을 인해서 바벨론에 붙이기는 붙였지마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한 데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아팠다 말입니다.
자기의 자녀가 이것이 도무지 고치지를 안하니까 이것을 부득이 해서 이놈은 좀 고생을 시켜야 되겠다고서 어데다가 경관에게나 어데 말해 가지고 보냈다 그거요. 보냈는데, 보내 가지고서 거기 가서 일을 시키는데 고생을 많이 하니까 그놈이 사람이 돼 가지고서 돌아왔지마는 그래도 그 고생시킨 거기에서 아주 잔인하게 참 모질밧게 그것을 미워서 해친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유익이 됐지마는 부모의 마음으로서는 아프다 그 말입니다. 또 거기서 그런 가운데서도 ‘누가 나를 거기 가니까 후대를 해 줍디다’할 때는 감사함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이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노엽게 해서 하나님이 분개해서 바벨론에게 붙이기는 붙였지마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해서 잔인하게 한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맺혔다 그 말입니다. 이래서 분개해서 멸망할 세상을 바벨론에다가 비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이여” 거기 보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몇 번이나 말씀했습니다.
이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미워하시고 세상에다 대고 분을 푸시는가? 거기에 보면 “귀신의 처소와” 귀신의 처소, 이 귀신의 처소는 믿는 사람들이, 이 귀신은 사귀를 말합니다.
이 귀신 중에도 아주 저급의 귀신, 이것도 악령에 속한 것인데 타락한 천사 중에도 제일저급의 낮은 것 아주 참 사람으로 말하면 아주 타락하고 무식하고 아주 형편없는 것 모양으로 이 귀신은 아주 저급의 영인데 저급의 이 귀신의 충격을 받아 가지고서 그 마음이 아주 죄를 지어도 무슨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간사한 간사의 귀신, 또 외식의 귀신, 거짓말의 귀신, 변동의 귀신, 또 이간의 귀신, 시기 질투의 귀신, 뭐 거짓말의 귀신, 무엇을 그저 음식 한 그릇에도 그만 팔려지고 이렇게 조렇게 도무지 그 인품이라는 인품을 믿을 수 없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귀신에 충격을 받아 가지고 세상 사람이 볼 때도 그것은 도무지 사람으로 상대할 수 없을 만한 그렇게 아주 허무하고 야비하고 가볍고 날리고 변동 많은 그런 사람이 되어진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개하시고 포부가 있다 그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을, 아파서 이래 세상에 대해서 복수를 하시면서 이제 너희가 세상이 설쳐라 하시면서 이 귀신들만 가득히 채워 놓습니다. 지금은 귀신들이 있지마는 성령님이 오시고 또 성도들이 있어서 이 귀신의 행위가 많이 제재를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귀신만 세상에 가뜩 채워 놓습니다. 우리가 이런 성구를 볼 때에 우리가 너무 가치 없는 허무한 사람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져 움직이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람에 나는 갈대와 같이 이렇게 되는 사람,
또 그 다음에 “더러운 영의 모인 곳” 더러운 영의 모인 것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은 무엇을 하는고 하니, 영이라는 여기에는 악령을 말합니다. 악령 가운데도 성경에 보면은 사탄이라고 말하고, 악령이라고 말하고, 또 붉은 용이라고 말하고, 용이라고 말하고 배암이라고 말했는데 이 귀신은 배암을 가리켜 말합니다. 귀신은 배암 종류. 이렇게 조렇게 휘떡거리며 사람을 미혹시키고 꾀우고 하는 그런 것, 이 더러운 것은 뭘 가리켜 더럽다고 했는고 하니 구속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대속해 주신 이것만 생각하고 주님이 이렇게 큰 고난 당해 가지고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기 때문에 죄짓지 않는 이것만 가지고 살아야 될 터인데, 인간이 이 죄짓지 않는 사죄받은 이것만 사모하고 살아야 될 터인데 이 사죄받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사죄를 잊어버리고 범죄하는 이것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칭의를 입혀 주셨는데 이 칭의를 버리는 것이 이것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서 결합이 됐는데 하나님과 화친된 결합된 결합을 이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이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은 천사처럼 그럴 수는 없지마는 그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노여워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모인 곳이라” 이것은 그 사람이 이렇게 야비하고, 얍삭하고, 가볍고, 참 너무 사람이 측량 못 할 만치 그렇게 그런 인간은 아니지마는 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은 범죄해도 굵닥하게 범죄한다 그 말입니다.
무슨, 예수님의 구속을 버리고 민족주의자가 된다든지, 애국자가 된다든지, 그리 안 하면 문화 건설에 이제 공로자가 되겠다든지, 또 노벨상을 받는 이런 사람이 된다든지, 무슨 사업가가 된다든지 이렇게 참 세상 사람이 봐도 ‘그 사람은 참 위대한 사람이라’ 할 만한 그러한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세상이 볼 때에 위대하다고 존경할 만한 그런 미혹받은 그런 생애로 인해서 예수님의 구속을 잊어버린 그것을 가리켜서 더러운 영에 미혹받아 가지고 한 여기에 하나님이 마음이 아파서 “더러운 영의 모인 곳이 됐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이 그저 돈 몇푼에, 자기 사소한 감정에, 또 조그만한 무슨 욕심에, 사건이런 것으로 인해서 흔들려지는 그런 사람은 귀신에 접해 가지고 주님을 노엽게 하고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고, 또 세상에서 굵닥굵닥한, 세상이 존경하고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대학에 총장 노릇 하느라고 구속을 버렸고, 어떤 사람은 대정치가 노릇 하느라고, 애민족자 노릇 하느라고, 애국자 노릇 하느라고, 문화 건설하느라고, 자기는 참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큰 사업을 하는 그 사업주 노릇 하느라고, 그런 것 때문에 주님의 구속을 버린 그것을 가리켜서 더러운 영에 미혹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 분개해서 더러운 영 이것으로써 세상에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또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각종 더럽고’ 이것으로 인해서 구속을 버렸고, 저것으로 인해서 구속을 버렸고, 자기 욕심이 달성 못 했다고 구속 버리고, 자기 욕심 때문에 구속 버리고, 어떤 감정 때문에, 누구에게 애매한 소리 들었다고, 억울하다고, 또 손해갔다고, 자기에게 무슨 고생을 당해서 그 사람은 무엇이 일이 잘 안 되니까, 어쨌든지 죽어도 살아도 주님의 구속을 위해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 이 구속을 이런 것 저런 것으로 인해서 버린 것이 많기 때문에 각종 더럽다 이래 말합니다.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인 곳이다” 가증하다. 가증한 것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고 하니 자기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권리도 없으면서 공연히 있는 척하는 것 그것이 다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참 기술이 좋습니다. 이분만 있으면 우리나라에는 농사 짓는 데 대해서는 부족할 것이 없고 이분만 있으면 매년 풍년이 들 수 있겠다.’ 하면서 그 사람을 모십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이 자기가 농업에 대한 아주 훌륭한 지식이 있으니까 그런 박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가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만한 실력이 있습니다. 무엇이요, 그것이? 그 소리를 믿는 사람이 듣고 ‘내가 그만한 실력이 있지’ 생각하는 그것이 가증스러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만일, 다니엘은 꿈 해몽을 잘 했습니다. 요셉도 꿈 해몽을 잘했습니다. 그 요셉에게 ‘요셉이는 꿈 해몽을 잘 한다’ 이래 가지고서 `내가 들으니까 요셉이가 꿈 해몽을 잘 한다 하는데 이 꿈을 해몽을 할 수가 있느냐?’ 할 때 요셉이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해몽을 할 아무 그런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알려 주시면 내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가증한 사람이 안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증한 사람이. 하나님이 알려 줘야 되지 제가 단독이 알 수 있습니까? 다니엘에게도 느부갓네살 왕이 말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가증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일 ‘이것 한 달 후에 뭣하고 뭣하고’ 그것을 자기가 계획을 합니다.
계획은 할 수 있습니다. 경영은 할 수 있습니다. 경영을 하면서 ‘이것은 내가 한 달 후에 꼭 하지.’ 하면 그것이 가증입니다. 저는 내일 죽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면, 말은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대로는 한번 해 보지요’ 하는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이 나를 그때 살려 주시면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살려 주시지 안하면 나는 그 일 할 수 없습니다.’ 이 가증을 면하려고, 가증성을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증스러운 것. 자기가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다는 그것이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고로 각종 더럽고 각종 가증한 일 우리가 이것으로써 주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의 구속 잊어버리고 하루 동안 살았고, 조것 때문에 구속 잊어버리고 한 시간 살았고, 이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결합된 여기 대해서 이것을 이것 때문에 잊어버리고 살고 저것 때문에 잊어버리고 살 때마다 주님은 마음이 아파서 우리의 구원 안 되는 거기에도 기가 막혀서 구원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마는 구원 안 되게 된 그때에 남은 거기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것을 보면은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이 가증에 대해서, 이렇게 ‘내가 일 년을 유하며 뭐 하겠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할 것이어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너희들이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는도다” 이 말은 제가 할 수 없는 것이 할 수 있는 척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만 살렸지 우리가 지금 여기 나가다가 만일 어떤 일이 있으면 우리가 몰사할런지도 모른다 그 말입니다.
“가증한 새의 모인 곳이 되었도다” 새 “새 모인 곳이 되었도다” 새에 대해서, 새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이 마음이 많이 섭섭하시고 분해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라 말은 정처가 없이 기회주의자라 그 말입니다. 형편 되는대로 돌아다녀, 형편 되는 대로. 이런 형편 되면 이런 행동하고 저런 형편 되면 저런 행동하고,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해서 좋으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 좋으면 저렇게, 새떼같은, 정처가 없는, 기회 되는 대로 형편 되는 대로 말하는 기회주의자, 새떼, 새의 성격, 새와 같은 이런 행동, 정처가 없는 것.
이래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은 그 비유에서 상대하기를 겨자씨 나무와 새떼를 말했습니다. 겨자씨가 작은 것이지마는 그것이 자라서 나무같이 되니까 모든 새떼들이 와서 거기 깃들여 앉았다가 소리만 나면 훅 날아가고 하는 그 비유를 했습니다.
그 겨자씨는 뭘 말하는 것이냐? 믿는 사람이 아무리 그것이 못나고 소자라도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뿌리를 박고 요동치 안하는 그 인격을 가리켜서 겨자씨로 말하고 새떼는, 아무리 새야 그보다 크지 않습니까? 날래지마는 그 뭉텅이들이 와 가지고 거기 앉았다가 또 날아갔다가, 와 가지고 괴롭히는 것, 이 세상은 그래도 겨자씨 모양으로 신앙을 지키고 인격을 지키고 지조를 지키고 있는 그 한 못난 사람 그것 때문에 새떼같은 그 가정이 유지되고,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새떼같은 그 교회들이 유지됩니다. 공산주의들이 오면은 확 다 날아가 버리고 하나도 없습니다. 신사참배가 오면 다 날아가고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못나도 그것이 신앙 지조를 지키고 죽었으면 죽었지 신앙의 지조를 요동치 않는 그것을 가리켜서 겨자씨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새의 모인 곳이 되었도다” 새와 같은 이런 인품, 이런 행위 여기에 대해서 마음이 아프신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고,‘자, 내가 그러면 귀신 놀음을 얼마나 귀신 노릇을 내가 얼마나 했노? 내가 더러운 영의 노릇을 얼마나 했노? 각종 더러운 것을 내가 얼마나 했노? 각종 가증스러운 행위를 얼마나 했노? 내가 새떼 노릇을 얼마나 했노?’ 하는 그것을 미리 알아서 회개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도, 멸망하기 전에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는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면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회개할 때에 그때에 이용된 그 만물도 복이 있습니다.
그 음행, 그러면 물건 때문에, 사람 때문에, 가정 때문에, 말 때문에, 부부 때문에, 친구 때문에, 자기 몸 때문에, 평안 때문에, 목숨 때문에, 어떤 이 세상 권력가 때문에, 직장 때문에, 이제 뭐 때문에든지 하나님에게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될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안하고 이 신앙의 절개를 세상 그 무엇에게 팔고 빼앗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말하면 이것이오. 하나님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안하고, 뜻을 기울이지 안하고, 정성을 기울이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정성과 마음을 기울여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우리 가정을 축복하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모시고 가정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고, 행복된 가정을 만들 수 있는데 그 가정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시고 가정을 잘 행복되게 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다가는 ‘네가 가정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느냐?’ 해서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에 하나님이 딱 그런 형편을 만듭니다.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가정을 돌보지 안하고 가정이 절단나는 그런 일이 되겠고 또 가정을 돌보려 하면 하나님을 버려야 되는, 배반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야 되는 일이 되고 그런 외통목에 딱 몰아붙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내가 가정을 내가 귀엽게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 세상 빛이 되고 해서 이랬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버리고야 내가 가정을 취할 것이 뭐 있습니까? 어림이나 있습니까?’ 하고 가정을 턱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너는 가정이 우상되어 있지 아니하구나.
가정이 네 간부가 되어 있지 안하고 가정을 내가 주시는 선물로 네가 받아 가지고 누리고 있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 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니까 이삭을 귀엽게 기릅니다.
기르는 것은 아브라함은 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이삭을 통해서 만민이 구원 얻는 구세주가 이를 통해서 나려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을 이 잘 길러야 되겠다.’ 이렇게 아껴 기릅니다. 기르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기르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야, 백 세에 얻은 독자니까 자정(子情)이라는 것은 다 뜨거운 것인데 이삭을 나보다 더 사랑하고 이삭에게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있지 않느냐? 이삭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시험해서 ‘아브라함아,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모리아 산에 가 가지고 번제로 드리라.’이랬더니 아브라함이 마음이 걱정이 됩니다. 자, 걱정이 됐으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하나님에게 마음을 나눈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외통으로 바친 것입니까? 걱정되면 어찌 됩니까? 뭣입니까? 나눈 것입니다.
이랬는데 걱정 안 하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 원하신다 하니까 원하시는 그 마음이 어떻게 좋은지 밤에 잠을 안 자고 그 산에 나무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이 번제로 드릴까?’ 해서 밤새껏 해서 나무를 패 가지고서 그 짐승에게다 싣고 이래 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이라. 그래도 끝이 아직까지 안 났으니까 어떨지 모른다 그 말입니다.
모리아 산에 가 가지고서, 산 밑에 가 가지고 종들이 가면은 이제 번제로 드리려 하면 방해할 터이니까 종들 다 떼놓고 부자 이렇게 올라가면서, 이삭이 묻기를 ‘제물은 어데 있습니까?’ `제물은 하나님이 예비할 것이다.’ 그것 자기 말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 놓고 가 가지고서 ‘하나님이 너를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어째야 되겠노?’ ‘번제로 드리십시오. 나도 기쁩니다.’ 이삭도 기뻐하거든.
그래 묶어 가지고, 나중에 번제로 드릴 때 발동하면은 안 될 터이니까 똘똘 묶어 가지고 제단 위에 놓고 지금 칼을 들어서 치려고 이래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활동계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에 칼로 때려도 딱 중단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때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가 이삭에 대해서 손도 대지 말아라. 해하지 말아라. 네 뒤에 제물이 있으니까 그 제물을 드리라.’(창22:11) 하시고 난 다음에 ‘이제야, 아브라함 네가 나를 모든 것보다 두려워하고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이삭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섬기는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이삭을 사랑한 줄을 알았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삭에게 만민의 구주의 조상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여기 음행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에게 인격과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서 일편단심, 하나님이 이렇게 구속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가 사업을 하는 것이 이것이 망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고 복음이 가리워질 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 위해서 사업도 열심히 하고, 하다가 좀 쉴 것도 피곤하면 손님에게 이와 같이 불친절하게 해 줄 것도 ‘이러다가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안하고 복음이 가뤄질 터이니까’ 자기가 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이렇게 하기 싫은 것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참 하나님을 생각하고 분한 것도 참고 억울한 것도 참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손해가는 것도 참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것 저것을 하는 이 사람이 이것이 구속받은 자로서 마땅한데, 이 세상 무엇에게 마음을 기울여 그것 때문에, 그만 그것 좋으니까 거기에 마음 기울여 하나님 잊어버리고, 제 마음에 맞은 사업이 있으니까 하나님 그만 잘 계십시오 하고서 그만 거기에 마음 기울어져 버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까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그리 옮겨지고, 좋은 직장이 있으니까, 좋은 사업이 있으니까, 두려운 것이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무엇으로써든지 하나님에게 기울일 마음과 정성 일편단심 하나님을 향할 이 마음이 다른 데에 옮겨진 이것을 가리켜서 음행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이것입니다.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 진노의 포도주라 그 말은 사람을 자극시키는 이 말, 사람을 이런 말로 자극시켜서 범죄케 하고 저런 말로 자극시켜 범죄케 하고, 사람에게 이런 말 저런 말로 가지고서 이런 교훈 저런 교훈, 공산주의는 그 사상 철학, 또 불교 이런 것이 다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꾀워서 하나님을 향할 사람을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향하게 하는, 이 모든 이종교의 그 모든 경들이, 이종교의 경들이 그것이 다 음행의 포도주, 하나님에게 향할 것을 다른 것에게 그 마음을 옮겨가도록 하는 음행의 포도주, 모든 이종교 그 사상이 다 음행의 포도주요, 철학이, 이 세상 문화가, 어제 종교인들을 이 정치가들이 갖다 데려다 놓고서 담화 를 하는데 ‘아무래도 이것 참 종교에 대해서 종교가 우리 국가에 대해서 공헌이 큰데 이 공헌에 대해서 한번 말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목사도 왔고 중도 왔고 다 왔는데, 공헌이 큰 것을 말을 하고, ‘그러면 이렇게 종교의 활동이라 하는 것이 정치에 중대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종교가 이렇게 어떻게 좀 종교와 종교가 마찰되지 안하고 이것이 좀 융화가 되고 단합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니까, 이제 목사가 떡 나와 가지고서 ‘이 모두 종교가 그저 무슨 천국 천국 주여 주여 이래 하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성을 알고, 또 이 윤리성을 알고, 이 모든 이 세상 문화성을 알아 가지고서 이 종교와 서로 손을 잡고 융화를 해야 되겠고’ 불교도 그렇고, 전부 다 말하니까 마지막은 종교 통일이오.
‘종교는 종교하고 한덩어리 되고’ ‘종교하고만 한덩이리 돼 되겠습니까? 종교하고 이 세상하고 한덩어리가 돼야 우리가 강하고 잘살 것 아닙니까?’ 하는 그것이 목사가 하는 말이요 중이 하는 말이라. 중도 가짜중이요 목사도 가짜 목사입니다.
숯은 검어야 되고 눈은 희어야 되는 것처럼 기독교는 기독교대로의 교리와 신조가 있으니까 그대로 해야 되고, 불교는 또 불교 저거대로 교리와 신조가 있으니까 그대로 하고, 그것을 생명처럼 아끼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위반된 것을 하지 안하니 그들이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양심 생활을 하고 도덕 생활하는 것인데, 껍데기 이 사회성과 도덕성은 그것은 서로 조화가 맞는 대로 맞지마는 그들의 특성인 교리와 신조 그것을 까뭉개서 하나되면은 그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믿는 교리와 신조를 다 종교 통일을 해서 이래 해 놓으면 그 사람이 뭣 때문에 양심을 지킬 것 있으며 뭣 때문에 그 사람이 희생해서 꽃을 피게 할 것이냐 말이요? 그건 안 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 음행의 포도주에 도취된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음행의 포도주 여기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7장에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이런 것으로 취하게 만들어 가지고 영감과 이 진리대로 사는 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 이런 모든 사상, 주의, 교훈 그런 것들을 말합니다. 공산주의, 유물주의, 무신론주의 그것도 다 음행의 포도주요.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 섬기지 못하고 거기에 기울어지도록 유혹시키는 포도주입니다.
이런 것을 죽기 전에, 예수님 재림 전에 우리가 어쩌든지 깨끗하게 회개한 사람이 이 사람이 복있습니다. 오늘이 끝일런지 내일이 끝일런지 모르는데 세상에서 하나님을, 지금은 하나님이 천대를 받습니다. 천대를 받아도 참고 있소. 지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천대하는데 참 지금은 조그만한 것 가지고도 하나님을 사귈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기회요. 하나님이 그것을 영원한 세계로 복수하시고 보상하십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