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15:25
주아위사 아주위사
1989. 7. 16. 주일새벽.
본문: 사도행전 21장 12절∼14절.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또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영감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가는데 이제까지 바울에게 은혜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어짤 수 없어서 서로 이렇게 작별해 보내는데 거게 선지자가 와 가지고 말하기를 '이번에 예루살렘에 바울이 가면 거게서 이렇게 결박을 당해 가지고 큰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유대교에 선봉장으로 섰던 아주 열심 있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유대교를 배신하고 개종을 해서 예수교를 믿는다는 그 말이 들려졌고 또 각처에서 전한다고 이라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그 모든 유대인들이 단합해 가지고 지금 사도 바울을 어데서든지 붙들면 잡아 죽이라는 그런 명령을 내리고 모두 지금 수사를 펴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이랬는데 유대교에 근거지가 되고 중앙이 되는, 서울되는 그 예루살렘에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는 '지게 가서 전해라. 거게 가서 네가 복음을 전해라.' 이렇게 영감을 받아 가지고 전해야 되겠는데 또 예루살렘에서는 그런 큰 박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에 자기네들 믿는 도에 위반될 때에는 사람 죽이는 것을 그것을 의로 생각합니다. 또 자신들도 주님의 도를 위해서는 어기면 죽을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좀 열정 있고 극단적인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바울이 이번에 가면은 지금 생명이 위험하겠다, 바울 자신 죽는 것보다도 그분이 죽으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를 배우는데 큰 지장 있겠다 해서 모두 다 울고 뭐 단합해 가지고 못 가도록 이렇게 했습니다.
그라니까 바울이 지금 하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왜 나를 울면서 이래 붙들어서 내 마음을 괴롭지 하느냐? 나는 나 위해서 하나님되신 하나님이 나 대신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에게 구원 입혀 주신 이 주님 위해서 나는 몇 번이든지 고난당하고 죽고 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알고 예루살렘에 그런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줄 나도 알지마는 나는 벌써 그곳에 가 가지고 주를 위해서 많은 고난도 당하고 죽을 것까지 다 각오했다.' 이렇게 하면서 만류하는 말을 듣지 안하니까 그제야 그들이 말하기를 '암만 말해야 안 듣겠으니 이제는 뭐 하나님의 뜻대로 되도록 하나님께 맡겨 놓고 기도나 하자' 그라고 작별하는 장면을 지금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원한 멸망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지위도 생명도 다 바쳐서 구원을 해 주셨으니 이 구원을 받은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서 내게 있는 것 다 바치는 것이 마땅하고 내 몸도 생명도 바치는 것이 마땅한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언제든지 주를 위해서 수고를 하되 그저 죽음 없는 수고는 해서는 안 되겠고 충성 없는 수고는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음으로써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나도 크나 작으나 주를 위하는 일이라면 아 일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죽어 나를 구원하신 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요 또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 구원을 받은 내가 주님의 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를 위하는 일은 언제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와 생명을 바쳐 놓은 그 일이 아니면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사소한 일이라도 그 사소한 일에 뭐 생명을 내댄다면 그거는 자살 아닙니까? 이래도 우리의 구속의 이 성질상 나는 주님이 모든 소유와 생명을 나를 사랑함으로써 바쳐서 나에게 구원을 주신 이 구원을 받은 내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는 일이니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바치고 생명을 바치는 그 일로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할 때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치는 이 마음과 각오와, 이 마음과 각오와 이 성질과 이런 정신으로 이렇게 해서 그 일을 하다가 자기 소유가 만일 다 절단나는 그런 경우가 되면은, 이런 것을 다 희생하지 안하고 이런 것을 손해보지 안하고 지금 주를 섬길 수 있는 이런 일이라고 생각해으면 자기 손해갈 알이 뷜으면 중단할 것입니다. 자기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님 섬기는 일이라고 하면 자기 소유나 자기의 몸이나 생명을 다 바쳐서 하는 것이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깨달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는 것이, 이것을 다 바쳐야 나를 구원하신 주님 섬기는 데에 정상의 일이 되지 만일 이런 것 남겨 두고 이런 걸, 그 일에 다 바쳐지는 일이 되지 안할지라도 자기는 다 바칠 각오 가지고 하니까 하다가 다 바치게 될 때에는 아예 다 바칠 각오 가지고 했기 때문에 다 바쳐지는 것이 무슨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그렇게 무슨 변동이나 중단이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주님을 위하는 일이요 또 주님이 원하시는 주의 일이라면, 주님을 행하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을 위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은 우리는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언제든지 이거는 바쳐 놓고 일해야 되지 바치지 안하고 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다가 바쳐지는 일이 없어도 바치지 않고 일하는 것은 그거는 성질상 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말은 '네가 이 충성을 하다가 죽을 때까지 네가 충성하라' '충성하다가 죽어라'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일을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죽음으로 충성하라. 그러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친 충성을 해라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은 뭐 대수롭지 않는 일이라도 일을 시작하다가 그 일을 시작해서 처음에는 그렇게 힘들 일이 아닌데 가다가 보면 그 일이 나중에는 자기의 소유가 다 절단나는 그런 형편에 도달할 때도 있고 자기 몸이 절단나는 그런 형편에 도달되는 때도 있고 자기의 생명이 다 바쳐져야 되는 그런 형편에 도달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바로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주를 위해서 시작하는 일이라면 주를 위해서 하는 그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을 하다보니까 자기 소유가 다 절단나게 되고 또 자기 몸이나 생명이 다 절단나게 된다고 해서 그 알에 대해서 조그마치라도 주저를 하거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런 형편이 되면은 더 다른 사람 보기에도 똑똑하게 뚜렷하게 그 일을 더 굳게 잡고 그 일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신 이 구원에 붙들리지 안하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니 나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주님을 어떻게 위해야 되겠다는 이것을 깨달아서 나를 구속하신 주님을 인하여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이 구원하신 이 구원에 감사하는 그 사은의 생활로 이렇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소유를 다 바쳐서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이 이래 가지고 나를 구원하신 이분을 대우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기도 이 세 가지를 바쳐서 대접하지 안하는 것이라면, '주님이 이렇게 큰 걸 다 바쳐서 대접했는데 내가 이 대접하는 거는 얼마짜리를 대접해야 되겠다. 내게 조금 수고가 되는 정도로 대접하겠다. 수고되는 정도지 만일 고난이 되면은 나는 할 수 없다. 고난이 되는 정도지 죽음이 오면은 할 수 없다.' 하는 그렇게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구원하신 이 사실을 깨닫고 이 사랑에 붙들려서 감격해서 주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다가 처음에 시작할 때에 아주 힘 안 드는 일로 시작이 되면은 그 일을 하다가 힘드는 일이 되면 차차 가라앉습니다. 마지막에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다 들어서 다 바쳐져야 될 그런 때 되면은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데에 올 때에 '주님이 나 위해 죽었으니 나도 주를 위해 죽고, 주님 나 위해서 가난해졌으니 나도 주를 위해서 가난해지고 주님은 나 위해서 몸이 다 절단났으니 나도 주를 위해서 몸 바치는 게 마땅하다' 이것을 깨닫고 이 본질과 이 성질로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중단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종덕 목사님이 시를 지어서 언제 말하는데 그 시가 '주 아위사(主我爲死)했으니'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으니, '아 주위사(我主爲死)라' 나도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하는 그것이, 시를 지어서 언제 한번 공부 시간에 말해 주는 것을 저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웅천은 주기철 목사님 모교입니다. 웅천에 제가 집회하러 가니까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니까 나무 판자, 커다란 나무 판자에게다 큰 글을 썼는데 거게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은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그렇게 쓰여 가지고 있습디다.
그래 내가 그것을 보고 '이것이 누가 이렇게 썼으며 이거 무슨 뜻이냐?' 이라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거기에 평신도로 지낼 때에, 제일 처음에 예수 믿어서 평신도로 지낼 때에 그분이 쓴 글인데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서 죽겠노라 하는 그것을 써서 하도 간이 좋아서 그것을 우리 교회서 보존하고 이래 있습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과연 주를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말은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소유보다 몸이 귀한 것이고 몸보다,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바쳐서 충성하라 그말은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 그거 다 포함해서, 왜? 소유보다는 몸이 귀하고 몸보다는 생명이 귀하기 때문에 제일 귀한 생명까지 바쳐서 충성하라 했기 때문에 그런 건 다 그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래서, 언제든지 우리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그 일은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 그렇게 세 가지를 다해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나도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아예 이 세 가지를 다 바치는 그 마음을 가지고, 그 성질을 가지고, 그 뜻을 가지고, 그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이렇게 위하는, 충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충성하는 그 일은 가다가 몸이 어찌 된다고, 소유가 어찌 된다고, 생명이 어찌 된다고 변동되거나 중단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OOO조사님이 설교할 때에 '처음 사랑을 잊었도다 사랑으로 하지 안하면 안 된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인하여 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좋은 말씀을 증거를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셔 가지고 나를 구원하셨으니 이 사랑을 깨닫고 나도 크나 작으나 모든 일을 그 사랑을 인해서 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본질과 본성과 같이 나도 주를 위해서 하는 일이면 크고 작은 일에 그 본질과 본성 속에 알맹이가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알맹이가 있는 그것이 아니면 어떤 일을 해도 당신은 받지를 안하시고 필요가 없고 그것을 안 하면은 주님과 자기와에 끊어졌다, 그렇게 에베소 교회는 모든 일이 구비해도 끊어졌다 이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행하는 일이라면은 크고 작고간에 이 세 가지는 다 바쳐서 나를 구원하신 그분을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이 세 가지가 속에 들어 있는 그 행위로써 섬겨야 되지 주님은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는 모든 그 행위로 나를 위랬는데 나는 그런 것 들지 안하고 그냥 그저 가면적으로 무슨 물질이나 좀 희생하고 좀 수고나 하는 정도의 그런 걸 가지고 당신을 대접할라고 달라든다는 것은 당신에게 모욕이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 자는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아홉 가지인가 몇 가지인가 훌륭한 일이 있어도 다 소용이 없다 했어. '네가 어데서 끊어진 걸 알아라. 회개치 안하면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깨닫고 보면 주님 위하는 일이 아니면 할 일이 없고 또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는 주의 심부름이 아니면 할 일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면 우리는 할 일 없고, 할 수 없고!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주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면 할 일도 없고 할 수가 없고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는 그 명령 아니면 우리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지금 당신이 주력하고 있는 그 일이 아니면 할 일이 없습니다. 가치적으로도 그 외에 거는 다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의 그 대속하신 사랑과 나와에 연결돼서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해 가지고 뭣을 나에게 줘서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이 구원받은 나는 당신의 것이 됐기 때문에 이렇게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그를 사랑해서 당신이 나를 구원한 것처럼 나도 합당한, 정상적인 흠과 점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는, 거게 합당한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대속에 합당한 신앙 생활.
그래서, 오늘은 주일인데 이 비가 오는 것, '비가 오니까 이 학생들이 못 나오겠으니 이거 참 문제다' 하는 그것 생각조차 우리는 더러운 생각입니다. 왜? 썩어질 학교 그런 것도 갈 때 비가 오거나 뭐 춥거나 눈이 오거나 상관이 없는데 영생의 구원을 가졌고 어데 그만 못해? 그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됩니다! 이거는 다 영생하지만 오늘이라도 구름 타고 오시면 오늘이라도 그 사람 개인 생명이 끊어지면 아무 소용없어 그것 다.
죽은 것 썩은 것 가치 없는 것 그 일 위해서도 하는데 하나님이 이 생명까지 바쳐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이 구원을 상대하는 구원의 대상이 되어지는 이 행를 한다고 하면서 뭐 비 온다고 그와같이 되고 뭐 어렵다고 하는 그것은 더럽고 밉고 추하고 말이지 가증스러운 일이오.
아주 거게 대해서는 우리가 아주 말할 수 없는 밉고, 이 참 그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지만 이 행위는 참 가증스러운 행위다. 우리 자체도 주님을 위하는 일에 무슨 생명이 거리킨다고, 무슨 소유에 거리낌이 된다고, 자기의 몸에 거리낌이 된다고 주님 섬기는 일에 대해서 변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신사참배가 오든지 안 오든지 주를 위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나 위해서 이렇게 하셨는데 내가 주를 위하는 일인데 이 일을 어떻게, 이 일에 대해서 뭐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그런 것에 털끝만치라도 제재를 받을 수가 았느냐?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주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고 황송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내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다른 사람 보면 어리석다 하지마는 뿍뿍, 간 커 그런 게 아니라. 간이 커 그런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크신 이 구원의 본질과 본성을 생각할 때에 내가 그분을 상대하는 일을 그분이 나를 어떻게 상대한 그 이를 따라서 내가 그분을 상대해야 되지 그분은 나를 전부를 다 기울여 상대했는데 나는 껍데기 가지고 그렇게 상대해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조? 그 사람은 있는 걸 다해서 생명을 다 바쳐서 나를 구원했는데 나는 그분을 대접할 때 이해를 따지고 '손해가 많이 가니 돈이 많이 드니 안 되겠다, 힘이 많이 드니 안 되겠다.' 이렇게 내가 제한한다 하는 것은 그분이 몰라 그렇지 그분을 생각할 때는 내 양심상 부끄럽고 죄송하고 할 수 없는 그런 일이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비가 오고 어렵고 또 무슨 학교 무슨 일아 있고 이럴 때에 그 학생들에게는 그런 것을 다 발표는 못 하지마는 우리 중심에서는 '네가 어떤 구원을 얻었고 어떤 구원은 주신 어떤 분을 네가 섬기는 일인데 네가 이런 것만치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이런 데 붙들리고 제재를 받고 있느냐?' 하는 그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그 울분한 일이 우리 속에 생겨나야 됩니다.
'이거 비가 오는데 야 가겠느냐?' 가 아니라! 그 학생에게 말은 그래 해도 우리 속에는 '네가 지금 어떤 구원을 받고 어떤 주님을 어떻게 네가 섬기는 것인데 네가 뭐 비온다고? 학교는 그러면서?' 말은 못 해도 그럴 때에 그 참 그런 것을 박살내서 불에 태워 죽여 버리고 아주 없애 버리도록 그래 분할 만치 그런 속에 우리가 깨달음이 있어 가지고, 가야 됩니다. 우리 자신들은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남에게 대해서도 '비가 오니까 이거 참 오늘은 이거 오기가 곤란스럽겠다' 하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구원하신 그 주님을 우리가 섬기는 일인데 어떻게 섬겨야 마땅하느냐? 그게 뭐 비가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며 또 어려움이 문제가 있을 것입니까? 또 우리도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이 일도 해야 주를 위하고 직장 생활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안 하면 주를 위함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것이지 그 직장 생활 하다가 주일을 지켜서 이렇게 복음 위해서 사는 일이라면 우리도 암만 힘이 자기 힘에 천분지 일의 힘이 든다 할지라도 자기로서는 준비하는 것은 생명까지 다 바쳐서 생명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 일은 조금마치라도 지체되거나 조그마치나 변동될 수 없다는 이런 속에 깨달음으로 이런 각오로 가지고 우리가 주를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대속에 대해서 흠과 점과 주름잡힘이 없이 하여 구름 타고 오실 때에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맞이하게 하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이러니까 우리가 오늘도 가면서, 심방하러 가면서 '이는 주님이, 인간 구원에 다 바친 주님이 제일, 나를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나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고, 하나님 자녀를 되게 하셨고, 이 모든 심판을 면하여 하신 이 주님이 나에게 큰 구원을 주셨으니 이 큰 구원에 팔린 내다,' 이 큰 구원을 받은 내기 때문에 나는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고 주님이 또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인간 구원을 제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이 일을 하니,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니 얼마나 기쁘냐? 이 기쁨을 가지고 해야 될 것이고, 또 이는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셔 하셨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아예 이 세 가지 자본을 딱 내놓고 각오하고 내가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조그만한 사소한 신앙 생활 하는 것도 이 신앙 생활에는 소유를 다 바쳐 놓고 하는 생활이요 몸도 생명도 바쳐 놓은 생활이기 때문에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마는 그 일이 가다가 보면은 나중에는 생명 안 내놓으면 그 길을 갈 수 없는 일이고 자기 소유나 몸이나 다 절단나지 안하면 가지 못할 그런 때라도 그 관계가 없어.
그리 되거나 말거나 가는 그 걸음은 그대로 일관해서 이와 같이 가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저거 미련타 보이지마는 신앙의 사람은 속에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된 관계 그 계산이 있고 서로 그분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생명이 어떻게 된다고 그거 주저하거나 지체하거나 그럴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 일은 주님 위하는 일이지마는 생명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거는 야 이거는 안 되겠다.' 주춤하고 '생명 문제니 이거는 주님 위하는 일 이지마는 여게까지야 내가 투자할 수가 있겠느냐? 내가 좀 힘든 거는 그렇지마는 내가 무슨 소유에 사업에 손해보기까지 하면서 무슨 이걸 할 수가 있겠느냐? 사업에 손해 안 보고 그런 정도 내에서 하는 것이지 주님 위하는 일이라고 내 사업이 영업이 절단나는데, 영업이 절단나는데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마음을 주님을 상대해 가질 수 없는 그것이 신앙의 마음이요 신앙 양심입니다.
이러다가 생명 문제가 돼도 '주님이 어떻게 해 가지고 어떤 구원을 주신 구원을 받았는데 주님 위하는 일에 이 생명 문제가 걸려 있다고 여게서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주춤한 그것을 생각해 보면 가증스럽고 자기에게 대해서 얼마나 자책이 되고 그 일을 가질 수 없고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신앙 일관으로 생명이 막아도 상관 없고 뿍, 그러면 그 일이 얼마나 큰데? 그 일이 큰 게 아니라 주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데 대해서 자기 생명을 바쳐서 하지 안 할 수 없는 주님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죽도록 충성하라 하는 것은 '네가 이래 충성하다가 마지막에 죽어라.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 그말 아니오. '죽도록 충성하라' 하는 건 '네가 벌써 죽음을 다 바쳐 가지고 생명을 바친 충성을 해라. 생명 바친 충성해라, 소유 바친 성을 해라' 하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심방을 가면서 언제나 어데서든지, 심방하러를 가든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할 때 말 한 마디를 해도 자기가 주를 위한다는 그 생각을 가지고 해야 될 것이고 주를 위해서 서로 전도하고 심방하고 이래 할 때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개적으로 뭐 사적 일을 하든지 공적 일을 하든지 일할 때에 주를 위하는 일이라면 거게서 무엇을 각오해야 되겠소? '죽도록 충성' 주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신 걸 생각하고 나도 그 본질과 본성적인 주를 위하는 생애가 돼야 되지 그게 속에 들어 있지 않는 그것은 다 껍데기요. 어떻게 주님이 생명까치 바쳐 내게 주신 그분에게 나는, 껍데기야 모르지요. 사람들은 알맹이를 모르니까 껍데기 속에는 보면은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담겨 있지 안한 그런 걸 가지고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주님에게 대해서는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3장에 '이제 대속하신 주님에게 대해서 흠과 점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이 주를 섬겨서 구름 타고 오실 때에도 아무 염려 없는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맞이하도록 그렇게 하라' 하는 그런 권고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 무슨 일 하든지, 언제 뭐 심방할 때만 그런 게 아니고 심방 아니고 다른 것 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저 무슨 일을 하든지 '이는 나는 주를 위한 일이다. 이거 나는.' 누가복음 9장에 보십시오. '아버지 장사하게 해 주십시오.' '못 한다.' '가족을 작별하게 해 주십시오.' '못 한다. 너는 이 큰 구속을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너는 그렇게 인간 중요한 일이지만 너는 자유가 없다.' 이렇게 딱 붙들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주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위했는가? 나도 그래 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주님이 나를 위한, 내가 주를 위하는 것이라면 주님은 나를 위한 그 위함에, 다해도 나는 피조물이요 당신은 하나님이시니까 그거는 대상이 될 수 없지마는 그래도 본질과 본성적으로는 대상이 돼야 안 되겠습니까? 주를 위하는 일이라는 거,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 요것을 생각하고 거게서 각오도 있어야 되겠고 거게서 밑천이 있어야 되겠고 거게서 나오는 힘을 가지고 일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뭐 비오는 데 무슨 제제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감옥에 재제가 되고, 환난에 제제가 되고, 자기에게 어려움이 온다고 거기 대해서 막혀진다면 다 껍데기 외식이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진정 나를 섬기나 안 섬기나 그걸 당신이 그 진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이런 저런 환경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대속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이 신앙 생활 해 나가는 걸음은 그게 양심을 쓰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 생활이 가다가 제재나 중단이나 변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출발하기 전에 기도하고 우리 속에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해야 되겠습니다. 생명 바친 일, 몸 바친 일, 소유 바친 일, 이것으로 끝나, 바울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죽으니까 가지 마라, 죽으니까 가지 마십시오' 이라니까 '나는 벌써 감옥에 갇힐 것 매맞을 것, 주님 나 위해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도 주를 위해서 하는 게 마땅한 줄 알기 때문에 다 죽을 것 각오하고 가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그것을 20장에 보면은 자기 마음에 붙들려서 안 올라가고는 못 된다 했습니다.
그게 뭐이냐? 신앙 양심이라. 주님이 나를 대속하신 그 대속을 생각하는 그 신앙 양심이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래서 지금 어린이들에게 인간 농사짓는 것을 이거 가르치는 것이 이번에 몇 주일째입니까? 사주째면 이제 한 주 더 하게 될란지 공과가 새로 나올란지 모르는데 이거 인간 농사짓는다는 걸 그들에게 평생 한번 더 돌아올란지 안 올란지 모릅니다. 이거 한번 잘못 가르쳐 놓으면 그들에게 될 구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