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15:33
주의 날 받는 권능
1987. 6. 8. 새벽 <월>
본문:요한계시록 1장 9절∼20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어제 우리가 주일에 대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요 곧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심히 범위가 넓은데 그저 대충 듣고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살라고 애를 쓰면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알려 주실 것입니다.
이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또 말씀대로 살고 또 예수님을 구주되신 것을 말로 전하고 또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이런 증거 생활을 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그말은 사도 요한이나 우리나 별 차이 없는 꼭 같은 사람이라 하는 것을 나타내서 “나는 너희 형제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그러면 예수님이 땅위에서 환난당하신 것이 뭣 때문에 당하셨느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음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했습니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니 빛으로 사실라고 하니까 환난이 됐습니다. 세상은 순전히 마귀화되고 하나님의 교회까지 다 마귀화되어 있는 그 세상에 천국인 주님이 오셔 가지고서 말씀하시니까 말씀도 그들에게 거리낌이 되고 모든 생활도 거리낌이 되고 행동도 다 거리낌이 됐던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그러면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또 하나님의 나라 준비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 나라 준비로 이렇게 살라고 사도 요한이 했고 또 “참음에 동참한 자라” 이러니까 예수님이 참고 견디신 거와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참았다. 그러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예수님이 생애하심같이 생애하심으로 사도 요한이 세상에서 핍박당했다 그것을 여기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러면 예수님을 구주라는 증거할 뿐 아니라 자기 생활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생활을 했고 또 입으로 예수님의 이 복음을 전함을 인해 가지고 모든 교회들에게 배척당해 가지고 밧모라는 그 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밧모라는 그 섬으로 귀양을 가 가지고 거게서 지금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뭐 배도 없으니까 나올 수도 없고 딱 그래 놓고서 거게서 그저 뭐 굶어죽든지 어짜든지 괴롭게 그렇게 그만 귀양살이를, 감옥살이 한가지라. 그렇게 보내 가지고서 거기 있었습니다.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그러면 주의 날이라 말은 내나 주일을 말하는데 주일을 주의 날이라, 주의 날이라.
그러면 주의 날이라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주님의 날이라 그말인데 그 말을 똑똑히 새기면 이 주일날은 주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 역사를 하는 날이라, 구주의 날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하시는 날이라 그렇게 이 뜻을 깨달으면 잘 됩니다. 주의 날이라.
이 주일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일요일날 새벽까지 그 고난을 당하셨고 또 그다음에 삼 일이 되는 그 일요일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주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그 모든 대속의 공로와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대속의 공로 이 두 대속의 공로가 일치되어서 하나되는 그 역사를 일으키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그러면 이 주일날인데 왜 주일날이라 했는가? 이는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되신 이 구주의 구원 은혜를 주시는 날이라 그말입니다, 이 주일이라는 것은.
그런데 안식교에서는 그들은 안식일이라 하는 껍데기만 보고서 이래 가지고 하고 이 주의 날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사활로 그 구원 역사가 일치되어서 거게서 폭발되는 이 은혜 역사를 주의 날, 우리의 구주의 날, 구주가 되시는 날, 구주의 은혜를 주시는 날 이랬는데 이 주일날을 그 사람들이 지키지 안하기 때문에 이 주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 깨닫는 것은 전부 비성경적으로 깨달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교에서는 사람의 영을 부인합니다. 영을 육체의 힘이라 하고 육체의 생명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이라 해서 영을 부인하고 그저 ‘그 영이라는 말은 생명이라,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으면, 죽었다가 육체가 살아나는 그것이 곧 구원이라, 이러기 때문에 살아나 가지고 어찌되느냐? 요한계시 7장에 십사만 사천 인은 하늘나라 구원을 얻어서 벌써 그 숫자는 차 버렸고 남은 우리들에게는 지금 남아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밑에 보니까 흰옷 입은 무리들이 있는데 수를 셀 수 없을 만치 많더라. 그 십사만 사천 인은 하늘나라 구원 얻었고 남은 무리들은 땅 구원을 얻는데 이것은 다 죽은 자들이 육체로 살아나 가지고서 천 년 동안 지금 살 것이다.’ 그러면 안식교 소망은 천 년 사는 그 소망입니다. 육신 소망이요 천국은 없습니다. 또 그들은 영이 없습니다.
이거는 주의 날에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기로 정한 날인데 이 주의 날을 지키지 안하니까 그는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이 구주의 은혜를 그들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깨달음이 자꾸 모두가 다 꺼꾸로 나가 가지고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전부 구약적입니다.
구약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들이 지키는 그것을 끌어다가서 이래 지켜야 된다 이랬는데 성경에는 “그런 것은 다 앞으로 닥칠 참 것의 그림자라” 또 “이런 것은 다 폐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 아주 우리에게 참 경고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라고 하면은 사도들 가운데도 신앙이 제일 깊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기록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고서 ‘요한복음이 제일 세밀하고 깊은 뜻을 말했다. 이러니까 제일 처음에는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그다음에는 마태복음 기록하고 그다음에는 누가복음 기록했고 그다음에는 요한복음 기록해서 요한복음이 제일 사복음 중에는 구비하고 더 깊은 도리를 말해 놨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도 진화의 종교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거게다 근거를 두고 그들이 말합니다. 그만치 사도 요한은 신앙이 독특했습니다.
이래 전설에 말 들으면은 사도 요한을 박해해서 잡아서 가마에다가 기름을 붓고서 기름을 팔팔 끓는 그 기름 가마 속에다가 사도 요한을 잡아넣었는데 넣어 가지고서 지금 죽일라고 그렇게 잡아 넣어 놨는데 거게서 죽지 안하고 나중에 아무 상하지 안하고 나왔다 하는 그것이 성경에는 기록돼 있지 안해도 전설에 있어서 그것이 모두 다 전설이 돼 가지고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내 뒤에서” 그러면 사도 요한 앞에서 성신의 감동이 아니라 뒤에서 옵니다. 성신의 감동이 뒤에서 옵니다.
뒤에서 온다는 요것을 뭘로 표시하느냐? 이제까지 이 주일을 당하기 전에 사도 요한이 성신의 감화에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지마는 이 주일을 닥치기 전에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것은 자기 앞에 있어 지금 받아 가지고 지금 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나가고 있는데 이 주일날 은혜는 자기가 이제까지 받지 못한 은혜, 아직까지 받지 못한 자기와 반대되어 있는 은혜, 반대되어 있는 은혜, 자기 뒤에니까 반대되어 있는 은혜, 그러면 이제까지 받지 못한 새 영감을 받은 것을 여게서 나타냅니다.
자기 앞에서 나는 소리라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그 소리에 조금 더 명확하든지 권위 있는 소리든지 이럴 터인데 “내 뒤에서 나는 소리라, 큰 소리라.” 성령의 감동으로 큰 소리가 나는데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몸을 돌이켜, 빽 돌아서 가지고, 뒤에서 말하니까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이래 돌이키니까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이거는 교회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가 밧모섬에 들어가기 전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성령 생활을 했는데 밧모섬에 거게 가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에 주일날을 당해 가지고 그가 영감을 받았는데 이제까지 받지 못한 자기의 정반대의 영감이더라.
자기가 이제까지 경험하고 체험한 영감이 아니고 그 경험하고 체험한 영감의 정반대인 평생 처음 받는 그런 영감을 받았는데 그 영감을 받아서 그 영감이 자기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 때문에 알아볼라고 돌이킬 때에, 돌아설 때에, 그 영감을 따라서 돌아설 때에, 그러면 영감을 받을라고 향하여 자기가 돌이킬 때에, 회개할 때에, 회개할 때에 그다음에 보여진 것이 일곱 금촛대가 보였고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보였어.
그분이 뭐 일생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했는데 밧모섬 그날 눈이 열리고 음성을 듣고서 하나님의 교회를 봤는데 그날 본 하나님의 교회는 평생 보지 못한 교회를 봤습니다.
어떻게 봤느냐?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제까지 교회는 귀한 것이라 인간이 교회로 인해서 구원 얻는다고 그렇게 믿고 왔고 영감으로 받아왔지마는 교회가 이 세상에 금촛대라, 세상에 빛은 교회밖에 없고 교회만이 깨끗한 것이 없고 교회만이 영원한 것이 없는 것인 것을 봤다. 이제 교회관이 아주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가 교회관이 아주 달라지고 “촛대 사이에” 촛대 그 교회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러면 그때에 인자같은 이라 말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인자라 말은 아주 사람 중에는 제일 말자, 제일 천물, 제일 가난하고 무능한 것, 아주 제일, 제일 천한 사람을 가리켜서 구약에 인자라 내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는 가장 인간 중에 무지 무능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물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인자라 이래 말했는데 신약에는 인자라 말이 몇 번 있는데, “인자를 아느냐” 이 인자라 말은 이래서 하나님이 근본 부요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내놓으심으로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그 부요를 다 내놓음으로써 가난해지고 무능해지고 천물, 암만 사람이 거석해도 그래도 아야 소리도 하지마는 예수님께서는 아야 소리도 한 마디 하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유로 이래 언행심사 하는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는 인간 중에 제일 자유 없는 사람이요, 제일 약한 사람이요, 제일 천한 사람이요, 제일 천대와 모욕을 받은 사람된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인자가 되신 것을, 밧모섬에 가기 전에 사도 요한이가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주님이 자기 위해서 낮아지시고 천해지시고 그렇게 고난당하신 걸 알았지마는 밧모섬에 가 가지고서 성신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 이제는 교회관도 새로와졌고 예수관도 새로와졌습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인자고 또,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 말이오. 인자라 말은 천한 인간을 가리켜서 인자라 합니다.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것은 대제사장을, 대제사장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는 것을 가리켜 보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이제까지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말도 증거했고 했지마는 주일날 만나 가지고 대제사장이라는 이 대제사장이신 것을 자기가 영감받아서 새로 봤습니다.
이거 다 해석할라면 시간 많기 때문에.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연단한 빛난 주석같고” 이 표시를 이라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연단 뭐,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연단받으시고 고난받으시고 또 그분은 얼마나 성결하다, 털이 양털같고 눈과 같다 말은 그분에게 속한 것은 전부가 다 성결 성결하다 그것을 이 다른 말로 표시를 못해 이런 말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 장중에 잡으시고 계시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
“별이 있고 그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더라” 그러면 예수님을 이 영감받아 가지고 보니까 자기는 주를 위해서 일생 동안 충성했기 때문에 참 주님에게 대해서 흡족한 충성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영감받아서 깨닫고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것을 보니 도무지 낯을 들 수 없게 너무 부끄럽고 너무 미안스러워서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같이 부시더라” 주님의 얼굴이 부셔서 잘 보지 못한 걸 말합니다.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만 너무 예수님을 영감받아서 발견하고 보니까 이제까지는 사도 요한이가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줄 알고 예수님의 품 안에 기대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이렇게 제일 만만하게 지냈는데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일날 다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까 기가 막혀서 놀랐습니다. 기가 막혀서 놀라고 그만 기절해서 그 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으로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내가 산 자라 그전에 죽었었노라” 네가 지금 나를 지금 보고 놀라서 기절하지마는 네가 나한테 품에 앉기고 기대고 이렇게 만만하게 지낸 그때 내가 내나 지금 내다. 네 눈이 어두워서 그때는 나를 못 보기 때문에 만만해졌고 이랬지마는 이제 지금 네가 보니까 또 그만 별스러운 주님으로 너와 거리 먼 줄로 알고 이렇게 두려워하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때도 내나 내가 그때도 지금 내요 또 네가 앞으로, 앞으로 차차 성령에 충만함이 되면은 충만함을 받을수록이 너와 나와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과 네가 죽도록 충성하고도 마음에 그 충성하고 이만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안했느냐 기쁘게 하지 안했느냐 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양심에 가책이 되던지 마치 해가 힘있게 비추어서 부셔서, 주님의 얼굴을 부셔서 볼 수 없는 그 정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은 주님과 가까운 것을 알고 이렇지마는 하늘나라 갈수록이 점점 주님과 거리 먼 것을 깨닫게 되고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인 것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저도 제일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얼마나 생각했던지 ‘뭐 주님이 천국에서는 내가 없으면 당신이 제일 기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제일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고 주님이 또 나를 제일 사랑하는 줄로 이렇게 알고 그래서 그때에 저는 내게 대한 것은 기도하지 안했습니다.
아이들이 혹 아프면은 황보 기 장로님이 오셔 가지고서 ‘기도하면 낫습니다.’ 할 때 나는 그 말을 우스꽝스레 들었습니다. 왜 우스꽝스레 들었느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기도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가지고 자꾸 뭐 구하기 전에 자꾸 주시고 계실 건데 뭘 달라고 그렇게 뭐 할 게 뭐 있느냐?’ 사랑받는 외동아들은 자꾸 안 먹을라 해도 자꾸 먹으라고 애를 먹이고 이런데 ‘이거 뭐 먹구로 주십시오’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아주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지금은 이래 차차 차차 예수님을 발견하고 보니까 예수님 앞에 그저 머리를 들지 못하겠고 또 예수님과 나와는 너무 거리 멀어서 당신은 내게 하신 어린아이고 또 신앙 지킨 것도 신앙에 어린아이고 이래 놓으니까 손 목사님을 높이 들어서 올렸습니다.
이랬는데 그때는 뭐 부흥사 많았지마는 모두 다 신사참배 하니까 그까짓 거는 다 정조 판 잡년 한가지니까 그까짓 걸 누가 그뭐 알아 줍니까? 이라니까 그때는 감옥에서 나온 하나님의 종들 또 신사참배 안 하고 돌아다니는, 돌아다니면서 증거하고 감옥에도 가지 안하고 대항해서 싸운 종들 이런 종들만이 세월이 났습니다.
나도 그때는 신사참배 안 했다고, 내가 집사입니다, 그때까지. 내가 전도사 노릇 안 할라고 내가 해서 집사인데 집사지마는 뭐 집회를 어떻게 청하든지 계속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했었습니다. 그거는 왜정 말년 신사참배가 높이 들어 준 거라.
이래서 손 목사님을 어떻게 그 모두 다 소문을 듣고 유명해 놨는지 그래서 손 목사님을 모두 교회서 ‘이 손양원 목사님 오시니까 이제 마중 나가야 되겠다’고 마중을 나가 보니까 손 목사님이 오면은, 소문 듣기에는 그 큰 어른이니까 아주 버틀이 좋고 아주 얼굴이 좀 뚜렷할 줄 알고 왔는데 보니까 암만 봐야 그런 사람은 안 와. 그런 사람은 안 와서 ‘이거 이상하다’ 지금같이 전화가 없어요, 그때는 . 전화가 없으니까 전화도 할 수 없고, 그뭐 해방 직후에 전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전화 있는 건 저거 정치로 쓰기나 하지. 이래 놓으니까 할 수 없어서 그래 교회 왔었는데, 모두 탄식하고 이라니까 그 시간이 되니까 뭣이 하나 올라서는데 똑 조막만한 게 올라서니까 ‘저게 뭐인고? 야, 저 뭐 강단에 저런 사람이 올라서노? 저거 내려오라 해라. 가서 좀.’ 내려오라 하니까 내가 손 목사님이라고 이래서, 그래 사람들이 하도 너무 작아서 놀라고 또 못나서 놀랬고, 이랬는데 설교를 하는데 어떻게 그 소리가 큰지 그만 소리가 커서 놀랬고 또 나중에 거기 그만 녹아버렸어, 다. 은혜가 많아서 놀랐고. 그래 작아 놀랐고 소리 커서 놀랐고 은혜 많아 놀랐고 그래 손 목사님을 보고서 세 번을 놀랐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고적해진 거와 마찬가지로 이 사도 요한도 신앙 생활 할라 하니까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조롱받아 가지고 견디지 못해서 그만 저 밧모섬으로 귀양을 보냈어. 그 사람들이 ‘밧모섬에 갖다 붙여야 이게 우리 가운데 나와 가지고 자꾸 쓸데 없는 소리 해 가지고서 우리를 괴롭히지 안하지.’ 이러니까 죽일 수는 없고 밧모섬에 갖다 놓고, 배만 없애버리면 못 나오니까.
그런데 그 밧모섬이 얼마나 큰 섬인지 저도 아직까지 거게 대해서는 좀 알아보지를 안했었습니다. 그만 밧모섬에 갇혔다 이래만 생각했어.
이러니까 밧모섬에 갇혔으니 그분은 거게서 그저 다른 걸 생각지 안하고 주님밖에는 생각할 게 없고, 뭐 심방할 것도 없고 전도할 것도 없으니까 주님 생각하고 기도나 하지 딴거는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 사도 요한이 주일을 만났을 때에 평생 받지 못한 성령의 감동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까 그 신령한 눈이 뜨이고 보니까 예수도 달리 보였고 교회도 달리 보였고 예수님의 대속의 그 사랑도 달리 보였고 또 자기도 자신도 달리 보였어.
그러니까 자꾸 보니까 감동받아 보니까 예수님은 한없이 커져서 해와 같이 빛나고 높이 보였고 자기는 한없는 죄인으로 보였기 때문에 자기가 꺼꾸러져서 그 앞에 죽는 자와 같이 됐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이 온 것만치, 감화를 받은 것만치 주님은 크게 보이고 자기는 작게 보이고 주님이 하시는 일이 환하게 보이니까 자기가 자랑하고 한 교만한 그런 것이 아주 수치스러운 그런 일이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데 사도 요한이가 어떻게 해서 이 평소에 받지 못한 영감을 밧모섬에서 받았는가? 어떻게 해서 그날 주일날, 왜 평생 받지 못한 영감, 그 영감이 왔는데 자기 앞에서 오지 안하고 지금 상대하고 있는 영감, 상대하고 있는 영감이 아니고 자기는 상대하지 못한 자기 뒤에서 오는 영감이라. 이제까지 상대 못 한 영감이라 그말이오. 상대 못 한 영감을 받아서 그 영감 받고 보니까 예수님도, 교회도, 예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행하신 것도, 자기가 주님에게 대해서 말한 것도 전부 기가 막혀서 죽을 일이라. 그러니까 그만 죽은 자와 같이 돼 버렸어.
그러니까 주님이 위로를 하시면서 ‘내가 너 처음에 만나서 네가 나한테 그렇게 아주 뭐 만만스럽게 네 동무처럼 여긴 그때 내나 지금 내나 내나 한가지다. 네가 그때는 내게 대해서 그렇게 버르징이 없이 만만스럽게 이래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이랬는데 그때 너와 지금 너는 많이 차이가 있어서 많이 그래도 예수님에게 대해서 겸손하고 어북 체면이 있고 도리를 지키고 그런데 내가 너를 지금 어떻게 하겠느냐? 이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면서 위로를 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할라 하는 것은 어제 말하기를 주일날 모든 이 권능을 받았습니다.
주일날 권능을 받았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말만 찰찰 꾸며 가지고서 아름다운 말 좋은 말 사람들에게 뭐 이 수사나 꾸며 가지고서 이와 같이 내가 전하지 안했다.
요새는 설교하는 사람들이 ‘설교하는 데는 요렇게 말 요래 써야 되고 또 행동 요래 가지고서 이래 하다가 요럴 때는 주먹을 한번 쾅 뚜드리고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 하고 또 하고’ 하는, 그걸 전부 그 형식과 그 제도를 다 공부를 해 가지고 이라는데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너거 볼 때에 약한 것과 두려워하는 것과 떠는 것밖에는 본 것이 없을 것이라, 예수님을 보고 사니까,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앞에서 사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도 바울이 저거 병신이가 등신이가 못났나 저렇큼 간도 작으나?’ 그거야 왜? 주님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바울은 주님을 보고 주님 앞에서 사니까 어찌 됐는간에 큰소리도 한번도 못하고 꽥 소리도 못하고, 마치 그라면 그 쥐가 고양이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꼼짝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보이지 안하니까 모두 잘난 사람이고 다 떳떳하지마는 바울은 그래. ‘내가 너희들 앞에 얼마나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느냐? 그걸 너희들이 봤느냐?’ “떨었노라 내 말과”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내가 말하고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안하고” 말로만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하지 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라니까 이 바울은 전할 때에 어짜든지 말을 아름답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설복이나 정복이나 뭐 이해시킬라는 데 거게 욕망을 두지 안하고 어짜든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옳게 바르게 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설교에 동행해 가지고 당신의 능력이 나타나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려는 그것을 바울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능력을 주일날 받는다고 했는데 그 주일날 이 능력을 받아서 이 사도 바울이 밧모섬에서 이제까지 받지 못한 능력을 새 능력을 받은 것처럼, 앞에서 말했으면 지금 성신의 감화를 상대하고 있는, 자기가 상대하는 성신의 감화가 아니고 이제까지 상대 못한 성신의 감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 뒤에서 소리가 나는데 그 뒤에서 나는 나팔같은 소리를 듣고서 이제 놀라서 그 알아볼라고 돌이킬 때에” 돌아서니까, 이 영감이 뒤에서 왔는데 영감을 향해 돌아서니까 이 영감이 지금 영감과 반대되어 있습니까 영감과 이제 상대하게 됐습니까? 영감과 상대하게 됐어. 영감과 상대하게 됐다 말이오. 상대하게 됐어.
이러니까 그때에 이 사도 요한이 영감받은 영감은 이제까지 받지 못한 큰 영감을 받아 가지고서 영감받고 보니까 모든 만 가지가 다 눈이 열리고 나니까 다 달리 보였어. 달리 보이니까 자기에 대해서는 아주 사도 요한이라고 뭐 기름 가마에 들어가도 죽지 안하고 이러니까 자기는 믿음으로 아주 훌륭한 줄 알았는데 눈이 뜨여 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든지 주님은 햇빛같이 부셔서,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해.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한다 말은 광채난다 말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양심에 거리껴 양심에 부끄러워서 자책이 되니까 주님의 얼굴이 마음에 부셔서 보지를 못하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만 죽기까지 됐어.
이랬는데 이분이 어떻게 해서 주일날 이런 은혜를 받았느냐? 받은 것은 예수의 이름과 그 증거를 위해서 밧모섬에 갇혔던 그것이 그 평소에 받지 못한 영감을 받은 그 원인이었습니다, 원인.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 위해서 살므로 인해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대로 삶을 인해서, 삶을 인해서 말이요, 삶을 인해서, 삶을 인해서 세상에서 외로와졌어. 세상에서 고독해졌어. 알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주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고 주님의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참 신앙 생활 하니까 세상에서 동지가 차차 차차 없어져. 자기와 동지가 없어져.
없어지고서 외로와지고 이라니까 그뭐 주님의 말씀대로 삶을 인해서 이 세상 일반 교회와 자꾸 멀어지는, 속화된 교회, 자기가 멀라 하는 게 아니라 자꾸 이것을 바로 살고 바로 말하니까 거리가 멀다 말이오. 대번에 말하면 대번 딱 들어붙고 친밀할 줄 알지요. 그거야 말 한 마디만 하면 당장에 친할 줄 알지마는 그말 하면은 주님이 노여워하기 때문에 그말 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하면은 세상에서 외로와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외로와진다. 또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다.
이래서 차차 차차 이 세상이 멀어지고 교계와 멀어지는, 주님과 주님의 이 도리를 인해서 자꾸 이 세상과 멀어지는, 멀어지는 이런 신앙 생활 함으로 인해서 고독을 당하는 고독해지는 이것이,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주일 준비다 그걸 여기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내가 말할라고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기에 이 주일을 맞이할 때에 자기가, 어제 그거 토요일날 오후부터는 준비한다 하는데 준비하는 그것은, 준비하는 그것은 그저 여러가지 뭐 이 모든 사무나 이런 지장이나 몸이나 의복이나 그런 것을 다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다 주일 지키도록 준비를 하지마는 자기가 일주간내 신앙 생활을 하는데, 신앙 생활을 하는데 주일날 은혜받는 그 준비는 일주일내 신앙 생활 하는 가운데에 뭣이 주일날 이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그 준비가 됐습니까? 준비가 됐습니까? 뭣이 그 준비가 됐지? 저 ○○○교회서 온 저 청년 뭣이 그 준비가 됐지? 고독해지는 그게 준비가 됐다 말이오, 고독해지는 것. 저 눈을 뜨였어. 눈이 가만히 보니까, 눈을 떠서 가만히 보니까. 나는 그거 좀 ○○○교회서 그래 오고 이래서 저거 양성원에 공부 시킬 게 아니라 저거 좀 뭐 하는 것이 조금 정신이 이상자 비슷하다 이래서 지금 양성원 공부 시킬까 말까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진리를 깨닫는 눈이 떴어. 이래 놓으니까 모든 게 좀 보기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니까 자꾸 마찰이 왔다 말이오.
그래,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삶을 인해서 이 세상과, 세상을 배척해 멀어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라 하니까 세상하고 자연히 멀어지고 또 신앙 하는 교인들과도 자꾸 멀어지고, 이 모든 세상과 모든 불의와 죄악에서 자꾸 이렇게 좀 멀어지는, 멀어지는 생활, 마귀와 죄와 사망과 이런 이 세상으로 더불어 멀어지는 생활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까와지는 생활 요 생활 하는 요것이, 같은 사람이요 같이 주일날을 만나지마는 자기 엿새 동안 생활한 것이 이제 답하는 대로 ‘고독이라’ 하는 거와 같이 자기 모든 생활이 이 속화 생활에서 자꾸 거룩하게 구별되고 구별돼 가지고서 자기가 점점 세상과는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요 생활 하는 요것이 주일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요 원인이라 그말이오. 요걸 내가 오늘 아침에 지금 말하기 위해서 그랍니다.
어떤 사람은 엿새 동안 이 세상하고 단짝이 돼 가지고서ㅡ저 뒤에 저기 있는 사람 내 눈에 잘 안 보이는데, ○○○선생? 왔나? 손 들어 봐. 아니가? 꼭 그 얼굴 같다.
그러면 다섯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한 사람은 세상하고 하나가 돼 가지고서 일주일내 살았고,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라 하니까 이 세상에 막 죄짓고 다니는 그 사람하고는 좀 멀어졌고, 또 한 사람은 어북 죄짓는 것하고는 하나 안 되고서 세상하고 같이 사는 사람하고도 멀어졌고, 또 이 사람은 어북 예수 잘 믿는다 하는 사람들하고도 같이가 안 되고 조금 그것보다는 좀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세상과 멀어졌고, 이래서 세상에서 제일 멀어졌고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과 그 다섯 중에서 제일 멀고 세상과 가까운 사람 있고 이래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있는데, 같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일을 맞이했으면 주일날 예수님의 사활의 구원을 달성시키는 그 실력이 되는 능력을 주일날 받는데 그 능력이 뭐이냐 하면 내나 성신의 감동의 능력인데 이러니까 사도 요한이 이렇게 이 감화를 받기 전과 이후와 그가 주님에게 대한 것과 세상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것과 의에 대해서 생활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저쪽에 대답해 봐.
같겠어 다르겠어? 밧모섬에서 이 영감을 만나기 전과 그후와 이제 세상에 대한 생활이나 주님에게 대한 생활이나 모든 생활이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모르겠어? 저게 뭐 ○집사님? 자기에게 대해서도 다르고 주님에게 대해서도 다르고 세상에 대해서 다르고, 세상에 죄에 대해서는 거리가 더 멀어질 것이고 또 자기에게 대해서는 단속이 더 강해질 것이고 또 주님에게 대해서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자꾸 숙어지게 될 것이고,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