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준비

 

1987. 7. 22. 새벽 <수>

 

본문:베드로후서 3장 5절∼14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니리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이것을 바라보나니’ 하는 그말은 이것을 소망하니 그말입니다. 이것을 바라고 사니 말입니다.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번 주간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우리가 후회할 것이 없이 준비하기로 그렇게 하나님이 작정시켜 주셔서 이 면에 대해서 힘쓰고 있는 주간입니다.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면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영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공간적인 이 우주를 말합니다. 우주와 이 지구는 다 불타서 지금과 같은 모든 종류와 모양과 그 광채 색깔들이 다 없어집니다. 전부 원소화됩니다.

전도서에 “땅은 영원히 있다” 하니까 이 말씀과는 어찌 되는가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땅은 영원히 있다 그말은 이 땅이 영원히 있는 게 아니고 원소는 영원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 불사를 때에 뭘로 사르는가? 사르는 불이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그때 불은 하나님의 진리의 불이요 영감의 불입니다.

지금은 영감과 진리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이나 그런 것 있는 것을 태우지 아니하시고 자꾸만 피하십니다. 직접으로 상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타서 멸해질 그런 요소들은 진리도 영감도 피해서 직접 접하지 안하고 그저 간접으로 이렇게 접하고 있습니다.

영감은 곧 하나님이시요 진리는 하나님의 뜻인 것인데 그 진리도 독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구에서 공부할 때에 그 깨닫게 하는 다 놀라서, 깨달아 가지고 놀란 그 깨달음을 가진 것은 자기네들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하던 새로운 깨달음과 또 깨달음의 충격이 강했던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 공부를 할 때에 그러면 우리에게 이 깨닫게 해 주시는 이 역사가 몇 순서를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오느냐 하는 것을 공부할 때에 일곱 가지 순서를 통해 가지고 온다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다음에 진리, 그다음에는 우리 중생된 영은 깨끗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언제나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된 것은 어떻게 죽은 것이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피공로로 하나님의 공심판에도 통과했고,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완전히 분리돼서 해방된 완전한 깨끗한 자입니다. 깨끗게 한 것이 예수님의 피공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공로를 인해서 우리의 영은 깨끗해졌습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님의 피공로를 완전히 입었고, 입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이 심신입니다.

심신이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지를 못하고 지금 입어가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 우리의 심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 영육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같이 우리 이 심신으로 된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 그리스도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생하는 생활 하라.’ 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도 진리도 우리에게 직접 닿지를 아니하고 그 사이에는 중생된 우리 영이 그 사이에 중보가 돼 가지고서 하나 그 방어가 돼 가지고 있고, 이제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우리의 양심, 양심이 접하게 됩니다.

양심은 중생된 영과 그렇게 아주 이질적의 것이 아니고 거의 동질의 것이지마는 우리 속에 각양 모든 육체의 소욕이라든지 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한 습성, 악습이라는 것은 옛사람의 생활한, 생활해 가지고 주 모은 것을 가리켜서, 연습한 것을 가리켜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습관이라, 연습이라, 습성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그런 것은 직접 접촉이 안 됩니다.

이래 가지고 간접으로 접촉하고 영을 통해서, 우리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 양심에 겨우 접하다가 우리 양심이 접해서 양심이 멸망하지 안할 수 있는 그런 데 있을 때에는 성령이 진리와 함께 우리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양심에게 접하고 또 신앙 양심이 그러면 그 하나가 됐을 때는 신앙 양심은 내나 그것은 육체의 요소기 때문에 신앙 양심이 또 우리의 이성 판단, 모든 것을 이래 이성으로 판단하는 그 이성 판단에게 겨우 전달해 가지고 이성 판단이 그렇게 환영을 하고 그렇게 하면 그다음에는 육의 요소인 양심과 이성 판단이 모든 그 지각이라는 마음을 통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있는 나쁜 요소를 하나씩 자꾸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나쁘다, 이런 욕심은 나쁘다, 이런 뜻은 나쁘다, 이런 감정은 틀렸다, 이런 정서는 틀렸다, 이런 취미는 틀렸다.’ 이렇게 틀린 것을 하나씩 자꾸 지적해서 고치게 됩니다.

고치게 되는데 그 고치는 역사가 그대로 있을 때, 할 때에는 있지마는 어떨 때에는 역항을 해 가지고서 고치지 안하고 도리어 그 속에 순전히 죄악된 그런 요소가 발동을 해 가지고서 그만 아주 발동을 해 가지고, 그래서 하나 예를 든다고 하면은 성경에 “여인은 육십 세 이내 되거들랑 교회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라, 뭐 직책 있는 명부에 올리지 말아라. 왜? 남편 없는 그런 과부로 여자 혼자 독신 생활 하는 사람은 육십 세 이내의 자는 이름을 기록하지 말아라. 왜? 그 사람이 나중에 정욕이 불일듯 할 때에는 돌발해 가지고서 그리스도와 관계가 변동될지 모르니까 변동되면은 하나님에게 욕이 돌아가고 안 되니까 아예 기록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한 거와 같이 돌발이 됩니다.

아주 예수님을 잘믿는 것같이 믿다가도, 마귀란 놈은 잘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육적 요소에 어떤 관계나 혈육 관계나 어떤 사람은 자기, 아주 진리를 좋아하고 이래 했는데 자기 사위에게 나쁜 점이 있어서 그 사위를 내가 있다가서 ‘네가 그래 가지고는 앞으로 목회자가 안 된다. 그걸 고쳐라 하니까.’ 그만 그 사위가 고치라는 말을 달게 받지 안하고 그것을 싫어해 가지고서 이래 반대하니까 반대하는 그 영향이 자기 아내에게로 가 가지고 아내가 또 자기 친정 어머니에게로 가 가지고 이래서 저거 장모까지 쭉 갈라져 가지고서 그래 되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해 됐습니다. ‘네가 시작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육체로 마치니 네게 있는 육체의 소욕의 그 세력이 강해서 너는 진리를 배반하고 이제 육체에 속했으니까 네가 육을 따라서 얼마든지 살아봐라.’ 여기 서부교회 교인 아닙니다. 저 ○○○교회 교인인가, 지금 거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마는 얼마 동안 가 가지고 머물러 가지고 이래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안 됐으니까 뒤에는 돌아왔다는 그런 말 내가 듣기는 들었지마는 그뒤에는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이래서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가지고서 영감과 진리가, 실은 영감과 진리는 소멸하는 불입니다. 영감과 진리는 소멸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모든 불의를 소멸하고 불의가 그 앞에 용납지를 못합니다.

혹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바리새인은 자기는 의인이라 이라니까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했고 세리는 죄인이라고 그렇게 머리 들지 못하고 하니까 오히려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 그렇게 하는 그런 말씀들을 잘못 깨닫고 ‘하나님은 의인보다 죄인을 사랑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미워하는 것은 아직까지 제가 고쳐 나가는 데 있어서 고쳐 있는 그것은 보지 말고 고쳐야 할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고쳐야 할 것은 생각지 안하고 벌써 고친 것 그것조차도 만족을 하고 그거 벌써 나타내서 자랑하고 보니까 고친 것까지도 더러워지는 형편에 있고 고치는 형편에 있지 않는 그것을 미워하시고, 세리는 비록 그보다 나쁘지마는 고칠라는 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칠라는 것을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벌써 고쳐 놓은 것까지 버려서 못쓰게 되는, 점점 나빠지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얼마나 미워하시느냐?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해서도 죄인을 멸할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라. 그러면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우리에게 있는 죄인을 완전히 멸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성화시키려는 그것이 하나님이시지 죄인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죄인을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은 어떻게 해서 지금 용납하시느냐? 용납하시는 것은 이 죄인이 회개해서 고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의인이 될 그 희망을 가지시고 소망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멸하실 하나님으로 접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접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꾸 옛사람을 죽이고 이럴 때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다가 우리가 진리와 영감에 접촉이 안 될, 진리와 영감을 접하면 우리가 소멸될 수 있는, 진리와 영감을 접하면 소멸될 수 있는 그 마음으로 돌변될 때에는, 돌변될 때에는 진리와 성령은 재빨리 우리 마음에서 떠나십니다. 만일 안 떠나면 우리가 소멸돼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떠나 가지고 그러면 어데 계시느냐? 떠나 가지고, 우리를 떠나는데 우리를 떠나되 우리 영 안에 계십니다. 우리 영은 깨끗해졌기 때문에 영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 이질이 아니니까 계실수록 영은 좋아지지 영이 나빠지지 않기 때문에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몸은 그것이 우리 중생된 영을 통해서 진리와 영감이 이렇게 우리를 성화시켜서 우리 속에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으로 감염되어 있는, 우리의 심신은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깨끗한 것인데, 하나님이 지어 놓으시고 선하다 깨끗하다 했는데 여게 나쁜 것이 감염돼 가지고 있습니다.

물들어 가지고 있듯이 그렇게 감염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금 탈색시키는 역사를 할 때에 이 심신이 탈색받기를 원할 때에는 계속 탈색을 시켜 주십니다.

탈색시키는 걸 원하다가 탈색하는 것을 싫어하고 오히려 악령 악성으로 더불어 더 짙어지게 감염되기를 원하면 옛사람으로 이 심신이 완전히 돌변될 때에는 그때에는 진리와 영감은 떠나버립니다. 빨리 떠납니다. 안 떠나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떠나면 그때는 떠나고 우리 중생된 영은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떠나지 안하고 접합니다. 접하면 이 중생된 영은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해서 끌려 돌아다니면서 고통당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로마서 7장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나에게 다른 세력이 하나 있어 가지고서 곧 그 세력이 어데 있느냐?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세력으로서 그 세력이 있어 가지고서 원치 안 하는 데로 끌고 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그 누가 그 탄식하느냐 하면 중생된 영이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된 영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그 심신을 태울 만한 그런 성결은 아닙니다. 태울 만한 그런 성결은 아니고 그저 대립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과 우리의 심신은 성화된 것은 하나이고 성화되지 않은 것은 대립으로써 마찰이 됩니다. 마찰되나마 그 대립이 아주 소멸할 만한 그런 마찰은 안 되지마는 진리와 영감은 불의는 즉시 소멸됩니다. 불의는 소멸되고 불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이 진리와 영감이, 예수님의 피공로는 완전히 대속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공로의 이 대속을 통해 가지고서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들,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들에게 이 진리와 영감이 오셔서 성화 운동을 다시, 성화라 말은 다시 살린다는 말이요 중생이란 말 한가지인데, 성화 운동을 하고 계시고 만일 예수님의 피가 없는 사람에게는 지금 진리와 영감은 가지를 안합니다. 만일 가면 소멸돼 버립니다.

이러니 진리와 영감이 참고 기다리시고 이렇게 해 나가다가 언제 진리와 영감이 모든 불신자 불택자들에게 가느냐 하면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뭐 성화시키려고 해서 성화될 것은 됐고 안 될 것은 강퍅해서 안 되고 요것이 판정났을 때에는 그때에는 예수님의 피공로도 영감도 진리도 직접 이 세상에 닿아서 세상에 닿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소멸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불로써 소멸한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해 둔다”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진리인데 우리는 이 책을 접하기는 쉽고, 책을 접하기는 쉽고, 이 책 속에 논리로 정리되어 있는 이 말은 접하기 쉽고, 지식은 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을 접하는 것과 지식을 접하는 것과 진리를 접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래서 옛날 예수님 초림하셨을 때에 그들이 구약 성경 말씀은 접했지마는 그들이 말씀 안에 있는 진리는 접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이신 주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했는데 진리가 오는데 진리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이신 주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그때 다 모른 게 아니고 또 아는 사람은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어떤 사람은 이 책만 접한 사람, 여게 있는 그 말로 되어 있는 이 말만 접한 사람, 이 지식만 접하는 사람, 지식을 접하는 그 안에 영감을 받아 가지고 영감의 도움을 입어 가지고 진리를 접할 때에는 자기 속에 죄가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를 접할 때에는 가슴을 치면서 울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집회 때에 참석하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은 그럴 때는 계속적으로 진리가 역사하기 때문에 옛사람의 세력은 차차 차차 약해져서 악령 악성 악습이라는 악의 세력이 차차 차차 흐려지고 약해지고 이제 하나님 중심인 선의 세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이 뭐인데? 피와 성령과 진리가 선인데 이 세력이 강해지니까 그때는 차차 차차 성화 운동이 되어져서 이것이 심신이 멸망하지 않고 심신이 구원의 효력을 입어 가지고서 조금씩 자꾸 이제 성화돼 나가고 변화돼 나가기 때문에 그 집회에 참석을 시킬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 그 집회에 참석했을 때에 신앙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임하면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이 임할 때에 양식이 돼서 기쁘고 즐겁습니다. 아주 그 말씀이 기쁘고 즐거운 사람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접할 때에 뭐인가도 몰라도 자기 속에서 반발심이 나오는 사람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발심이 나오는 사람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반발심보다도 그 말씀이 미워서 견디지 못해서 심지어 말씀을 증거하는 그 강사까지도 미워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사람 됩니다.

그게 누구냐? 그게 내나 벗겨져 나가고 쫓겨 나가야 될 악령 악성 악습이라는 순전히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들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같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어떤 사람은 그 말이 들리지 안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반발심이 나오고 하는 그것은 뭐이냐? 우리의 심신 속에 죄악에 있는 그 두께, 죄악에 있는 그 강도가 짙은, 아주 짙은 그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의 작용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에 우리가 자꾸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우리가 기도를 하고 이래서 진리와 영감으로 자꾸 내게 진리와 영감에 배치되는 이런 것이 하나씩 둘씩 자꾸 이렇게 자꾸 제거돼 나갑니다. 하나씩 둘씩 제거돼 나가면 그 사람을 세상 사람이 만날 때에는 ‘아, 이 사람이 바보가 됐다’ 이럴 것입니다. `바보가 됐다.' 왜 바보가 됐다? 과거에는 자기의 아주 자존심이나 또 자기의 모든 이해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고 누구보다도 거게 대해서 재빠르고 강한 사람인데 이 사람 보니까 자존심도 어째 그만 흐리브리 이래져 버렸지 자기 주장인 이해도 흐려져버렸지, 이라니까 실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것이 차차 빈약해져 가지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볼 때에는 옛날 그걸 보고 똑똑하다고 그 사람을 쓰기도 하고 상대도 했는데 그 사람이 흐리멍덩하게 죽어져 갑니다. 이러니 ‘이 사람 이거 교회 다니더니만 아주 그 사람 버렸대, 그만. 바보가 됐대.’ 이래 됩니다.

‘바보가 됐대’ 이런데, 이제 하늘에 속한 사람이 그 사람을 접할 때 ‘그 사람이 아주 참 은혜를 많이 받았어. 그 사람이 아주 변화가 됐어. 옛사람이 변화가 됐어.’ 이래 됩니다. 그보다도 더 된 사람은 이제 변화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닮아가고 싶다. 나도 그 사람 따라가고 싶다.’ 이렇게 돼서 자꾸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마련해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는다고 하면은 여게 대해서 자기의 그 공포가 없을 수 없고, 이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아무 공포심이 없는 것은 강퍅해서 완전히 그거는 그 심신에 악령 악성 악습으로 전체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조그만한 뭐 하나 지진만 나도 다 두려워하고 그 태풍 와도 놀라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뭐 우주와 영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타는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두려움의 실상을, 실상을 느끼는 그 도수가 그것이 뭐이냐? 느끼는 도수가 그 사람이 심령의 눈이 밝은 도수입니다. 하나도 거기 대해서 뭐 그런 얘기삼아 듣는 그 사람은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거기 대해서 실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완전한 영감으로 됐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우주가 불탈 때 그때의 느끼는 것과 지금 느끼는 것과 느낌이 조금도 차이점이 없는 그 사람이 이제 온전한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은 일편단심 거게 대해만 준비하지 뭐 땅에 있는 것 대해서 준비할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거기 대해서 준비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네가 준비할라면 일해야 된다’ 하면 일하고, `네가 그걸 준비할라고 하면은 너는 이런 말은 안 해야 된다’ 하니까 안 하고, ‘너는 또 이런 일은 해야 된다. 이런 수고와 봉사는 해야 된다.’ 전부 그 준비로 모든 언행심사의 움직임이 움직이지 그 준비가 아닌 일은 하나도 안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이 불로 올 말씀, 불로 올 말씀 이 말씀을 지금 그렇다 해 가지고서 이 불로 올 말씀과 자기와의 하나가 되지, 동질이 되지 안해 가지고 있고 불로 올 말씀과 자기와의 이질, 본질이 다르다, 다를 이자 이질, 이질되어 있는 것이 자꾸 이것이 견디지를 못해서 마음에 고통스럽고 견디지를 못해서 그걸 고치고 나니까 그면에 상대하는 그 진리와 영감에는 하나가 되고 대립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대립이 되지 안하고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해서 차차 차차 이 소멸할 불로, 소멸할 불로 오는 이 진리와 영감에게, 그때 소멸되면 멸망돼 버리고 맙니다. 그때 소멸이 되면 멸망되고 말고 그때에 소멸되지 안하고, 지금 소멸되지 아니하고 중생된 영을 통해서 이 간간접으로 이 성경 또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오는 것은 우리에게 간간접으로 우리에게 당하는 것이라.

우리가 이 뭐 냄비에나 이런 거 무엇을, 요새는 냄비 그런 거는 다 손잡이가 있어 그렇지만 손잡이가 있는 것은 이 손잡이, 손잡이 있으니까 이 손잡이 가지고 들면은 괜찮지요. 그러나 만일 손잡이가 없는 걸 손으로 들면 손 그만 데여버립니다. 안 그렇습니까? 데이니까 이 손잡이가 있으면 좀 머니까 벌써 오는 동안에 열이 차차 차차 식어서 여기 손 쥐는 데는 손으로 쥐어도 손이 데이지 안하지마는 가까이 가면 데인다 말이오. 이러니까 손잡이가 없을 때에는 부득이 옆에 뭐 깨끗한 종이든지 베쪼가리든지 이걸 가지고 이래 싸 가지고 이래 들면 괜찮지 않습니까? 이라면 안 뜨겁고 손이 안 데인다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 진리와 영감이 우리에게 그 사이에 종이나 뭘 가지고서 우리에게 접하는 거와 같이, 이 냄비가 내 손에, 뜨거운 냄비가 내 손에 종이 한 꺼풀 두 꺼풀, 되게 뜨거우면 여남은 꺼풀 해 가지고 이래 싸야 될 것이고 또 조그매 뜨거운 거는 한 두 꺼풀 해야 될 것이고 아주 좀 덜 뜨거운 것은 한 꺼풀만 해 가지고 들어도 괜찮을 것이고 아주, 뜨겁기는 뜨겁지마는 그 안 싸도 될 만한 거는 이제 손으로 뻐뜩 해 가지고 이래 하면 된다 말이오. 오래 있으면 데이지만 퍼뜩 해 나오니까 시간이 짧으니까 그거 열도의 피해를 입는 것이 적다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자꾸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피공로가 와서 자꾸 우리를 치료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영감과 진리에 배치되는 것을 자기가 능동적으로, 배치되는 것을 자기가 자원하는 믿음으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믿으라 할 때에 인정하라 할 때에 인정하고 요대로 살아라 할 때에 살고 하는 그것이 믿음인데 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악령 악성 악습의 이 모든 것을 감염된 것을 차차 벗게 되면은, 죽기 전에 벗게 되면은 그것이 영생이 되고, 죽기 전에 벗게 되면 영생되고 그것이 이 불에 타서 죽어버리면 살지 못합니다.

영원히 멸망받습니다. 이 말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이 심신의 이 모든 것을, 심신의 이 모든 정력을, 마음의 정력, 몸의 정력, 정력이라 말은 거게 정기 정자, 쌀 미옆에 푸를 청한 정기 정자, 그 정력이 그것이 그 정력이 불타지 안하고 정력이 이제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감염할 때에 진리화, 영감화, 그 정력이 진리화 영감화되면은 영생됩니다. 그러면 진리화 영감화됐으니까, 진리화 영감화됐으니까 예수님의 피화돼 가지고서 열한 가지 구속화됐습니다.

구속화됐으면은 구속화된 이것은 이 진리와 영감과, 이거 하나님의 심판인데.

진리와 영감의 하나님의 심판의 이 소멸하는 불이 올 때에 그러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진리화 영감화된 그 성화된 것이라고 하면은 이 소멸하는 불로 올 때에 이 불과 동질입니까 이질입니까, 저 ○○집사?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소멸하는 불로 오는데 그 불로 오는데 자기에게 심신의 이 정력이, 심신의 정력이 진리화 영감화돼서 성화된 그것은 소멸하는 불로 올 때 이 불하고 동질입니까 이질입니까, 저 ○○집사? 동질이요 이질이요, 그 뒤에 ○조사? 이질입니까? 또 ○○○집사? 동질이라, 이질이라, 하나는 대답 못 하고.

자, 그라면 동질이 맞습니까 이질이 맞습니까? 이질이 맞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동질이 맞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동질이 맞아. 이거야. 뭐 조사면 소용 있는가? 소용 없어, 안 돼. 그렇기 때문에 한 자리에 말을 들어도 달리 들린다 말이오.

이러니까 오늘에 이 불로 소멸하기 전에, 소멸하기 전에 소멸하지 안할, 진리의 불 영감의 불이 오는데 진리와 영감과 동질되도록 어서 동질화돼라. 그러면 우리는 동질될 수 있는 것인데 악령 악성 악습에 이 감염돼 가지고 있으니까, 감염돼 가지고 있으니까 오면은 타버리는데 이 색깔만 자꾸 벗어버리면 된다 말이오.

그러기에 옛사람을 벗으라 하는 것은 이질되는 것을 다 벗고 이제 동질화돼라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필연적이요. 필연적이기 때문에 이 뭐 불심판 오는 것이 이상한 뭣이 오는 게 아니고 이거는 필연적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질 가지고 물리에 맞춰서 뭐 되는 것을 물리대로 되는 것을 과학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이, 이게 뭐이냐? 사람을 조성하는 과학입니다. 이게 이것은 물질 과학이 아니고 사람 과학입니다. 알겠습니까? 물질 과학이 아니고 사람 과학이오. 영 과학이요, 마음 과학이요, 몸 과학이요, 인격 과학입니다. 인격이 이 이치를 가지고서 만들어서 이와같이 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의 과학이란 그런 것은 그것이 다 변동될 수도 있고 또 그게 자꾸 변동됩니다. 왜? 물질이라 하는 그것은 그 원 본질과 본성이 이리 저리 자꾸 변화될 수가 있지마는, 있지마는 이 진리는 변화될 수 없어. 그러기 때문에 “진동될 것들을 다 폐하고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에 힘쓰자” 하는 그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 중에도 이 세상 물리 과학은 변동될 수 있는 변할 수 있는 것들이요, 우리의 하나님의 신성을 따라서 인격되는 것, 신성 따른 인격되는 이 과학은 영원히 변동되지 않습니다. 변동되지 안하기 때문에 조성된 것도 변동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들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알아야 되고 하는데 이 썩을 것만 자꾸 생각해. 여기만 지금 와도 만일 이런 말씀 가지고 말하면은 여게 참석 안 한 사람 다 불타 버리고 말 거라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안 왔으면 이거 모르는 사람은 또 요면에 대해서 모르니까 그면 다 불타 버리고 말 거라 말이오.

그러면 제가 준비한 것이 뭐인가? 노아 홍수에 다 침몰돼서 멸망받은 그거 외에 딴게 뭐 있어? 그와 꼭 같은 것이라 그말이요, 지금. 같은 것인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도무지 사람들이 예사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똑똑히 보면은 신구약 성경에 말씀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이 거의 전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런, 하나님이 계시하지 안하고 자기 주관으로, 어떤 자들 여기 교회 와 가지고 예수를 신앙 열심히 믿는다고 나는 묘하게 믿는 것 같았는데 ‘저게 자기 주관으로 믿나 저게 주관이 죽어지고 지금 객관화 말하자면 진리화 영감화 예수님의 대속화되나 저게 제대로 저래 믿는 것이가? 그 묘한데 뭐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끄트머리 돌아가 보니까 꿈 따라가 가지고, 꿈을 따라가고, 꿈. 꿈 따라가고, 그 꿈과 제 꿈이 같거든. 그 사람도 꿈을 주장하고 저도 꿈을 주장하니까 꿈하고 같다 말이오. 네까짓 게 꿈을 가지고서 암만 해야 꿈 전체에 속해도 꿈 그게 불탈 것이다. 꿈 그게 불탈 것이라 말이오.

성경에 말하기를 말세가 되면은 거짓 선지자들이 와 가지고 꿈을 꾼 거 가지고 와 ‘나는 이런 꿈을 꿨다. 이렇다.’ “꿈 얘기 하는 그걸 듣는 그거는, 그는 거짓 선지자라. 내 말이 아니라.”고 하지마는 하나님 말씀을 그래도 ‘네 꿈이 맞다. 네 꿈은 맞다.’ 성경이 암만 말해도 안 믿습니다. 성경이 말해도 안 믿고 성경에 그 성경에 대한 것이 꿈이 꾸여야 꿈을 믿습니다. 성경도 꿈을 통해 와야 믿는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마귀에게 전부 속한 것인데 그런 인간이 여기 우리 교회에 몇이 있어. 꿈을 주장해 가지고 자꾸 미혹 운동이 지금 일고 있다 그거요. 그게 뭐이야? 자기 속에 강한 자기 주관 그게 들어서 자기를 망치고 마는 것이라. 그거 공명심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데는 분석해 보면 별 일이 많이 있어. 명예심으로 사는 것, 공로심으로 사는 것, 인기주의로 사는 것, 무슨 어떤 욕심이 동기돼 가지고, 동기와 목적이 다르고 방편만 같지. 방편만 같지마는 동기와 목적이 다르니까 결과가 달라.

동으로 가는 사람이나 서로 가는 사람이나, 동으로 가는 사람이나 서로 가는 사람이나 동기가 다르지, 자기는 같이 나섰는데. ‘나는 서로 갈라고 나섰다’ 그러면 동기가 서쪽을 향하고 간다 말이오. 목적은 서쪽 갈 것이고 하나는 동쪽 가는 것이라.

둘이 나서 가지고 걸어가는데 걸어가는 걸음을 볼 때에 ‘저거 틀렸다.’ `뭐이 틀렸노?' `그 사람은 지금 향방이 틀리지 안했느냐? 목적이 틀렸고, 목적이 틀렸고 동기가 틀렸다.’ ‘공연히 티 잡을라고. 그 사람도 걸어가는 것 보니까 오른발 떼놓고 왼발 떼놓고 오른발 떼놓고 왼발 떼놓고 자꾸 그래 가는데 내나 이 사람도 오른발 떼놓고 왼발 떼놓고 그래 가네.’ 그러면 오른발 떼놓고 왼발 떼 놨는데 그거는 같습니까 안 같습니까? 그거는 뭐이요, 그게? 그거는 방편이라.

방편이야 인본주의나 신본주의나 방편은 같지. 그러나 동기와 향방이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에 종착하는 그곳이 다르다 그거요.

예수 믿는 자는 어찌 됐든간에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예심이나 공명심이나 자기 주관심이나 자존심이나, 어떤 내가 장로 말하기를 ‘장로님 하나 고칠 것 있는데 그거 고쳐야 됩니다. 그게 들어서 왕이 돼 가지고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입니까?’ `가르쳐 주면 고칠랍니까?' `예, 고치겠습니다.' `장로님은 자존심 그게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닌데 그 자존심이 들어서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자존심 때문에 하기 싫은 말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하기 싫은 일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자기 왕이기 때문에 자존심 그놈이 원수 중에 원수인데 그놈을 죽이지 안하고 그놈 따라 사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니까 ‘예, 참 그래요. 나는 자존심에 걸리는 거는 못해요.’ 이래 죽었으면 죽었지 자존심에 걸리는 것은 못 한답니다. 그게 내나 이 세상에 유교적인 모든, 유교적인 신앙이오. 불교적인 신앙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네들 말대로 불을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에 이 새벽기도 안 나온 그 사람들이 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암만 전도해서 많이 나와봤자 그거 출물꾼이나 되지 소용 없어. 그것들이 와 가지고서 연보 내니까 뭐 집이나 사고 뭐 그런 거 출물이나 하지 딴거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

그러니까 나면서 앉은뱅이를 메어다가 놓은 것은 구걸하면 둘이 갈라먹을라고 메어다 놓는다 말이오. 메어다 놓는데 그게 여러 해 됐지마는 성전에는 근방에 가지도 못하고 항상 구걸하는 데만 욕심 내. 예수를 믿을수록이 지혜가 생겨서, 예수를 믿을수록이 지혜가 생겨 가지고 ‘요라면 내게 유익하나 저라면 유익하나?’ 어찌 됐는가 예수를 믿어갈수록 이기주의의 지혜는 어떻게 많은지? 그래 놓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흉측합니다. 물건 사러 가거든 예수 믿는 집에 가지 말라고요. 나는 가지 말라 해요. 예수 믿는 간판 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으로 간판붙여 가지고 덕볼라고 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제가 희생할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믿는 집에 가면 좀 더 싸게 사겠지’ 그놈도 도둑놈, `내가 예수 믿는 간판 붙여 놓으면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내게 와서 많이 물건 많이 팔아 줄 거다’ 그 사람도 도둑놈, ‘예수 믿는 집이니까 어라 뭐 내가 속아도 믿는 사람에게 속으면 내가 손해가도 이익은 거게 있을 것 아니가?’ 자기가 손해보기 위해서 가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이제 괜찮은 사람이라.

그것도 뭐 그래 좋다고는 하지 못해. 이 물건은 시장 전체가 다 시장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만 거석하면 다른 친하지 못하구로? 어떤 사람이든지 시장에는 시장 전체를 보고서 거기 가서 자기는 속지 말고 정당한 가격 주고서, 또 그 사람에게 깍쟁이 같은 소리 듣지 말고.

백 원짜리를 백 원 주고 사면서도 깍쟁이 소리 듣는 사람도 있고, 또 백 원짜리를 백 원 주고 사면서도 ‘그 사람은 뭐 물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예 그 사람한테는 허튼 소리 하면 안 된다.’ 인격을 보이고 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요 사람은 백 원 받아도 얼마는 유익이 있을 것인데’ 그걸 딱 말해 안 줄라 하면 ‘그라면 마십시오.’ 김현봉 목사님은 시장에 가 가지고서 깎는 일이 없어. 깎는 일이 없어. ‘안 깎으니까 나도 안 깎는 게 아마 성자 생활인갑다.’ 안 깎을라 하면 제까짓 놈이 돈이 얼마나 많은데? ‘저 사람 안 깎으니 달라 하는 대로 준다.’ 십 원짜리 이백 원 달라 하니 이백 원 주고, 제까짓 게 그런 돈이 있어? 나중에 마지막에는 다 망해 먹고 말지.

이러니까 그분은 시장에 가면 그런 거 있으면 하나 살라 하면 여러 집을 돌아다녀. 여게도 가만히 가서 구경하고 저게도 가만히 구경하고 ‘저 얼마 하는 것은 저거 어누리해 가지고 얼마 달라 하고 얼마면 팔고 그러니까 아마 좀’ 그라면 그래 다녀도 지혜가 있으니까 보면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조거 그라면 원가는 얼마인데 제가 운반하는 그 수고가 들었고 또 앉아서 또 기다리고 있는 수고가 있고 이러니까 얼마는 이익을 붙여 줘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딱 안다 말이오.

그 딱 계산해 가지고 ‘이거 얼마입니까?’ 이라면, `얼마입니다.’ ‘이 얼마에 팔면 안 됩니까?' 이래. `얼마에 팔면 안 됩니까?' 이러면 엔간히 많이 줄라 한다 말이오. 다 줄라 한다 말이오. 이익이 됐다 말이오. 벌써 그만하면 이익을 봤다 말이오. ‘아, 예. 그래 가지고 안 됩니다.’ 그만 거짓말 해 재껴. ‘그래 가지고는 이거 원가가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이렇기 때문에 이거 지금 그라면 나는 손해가서 안 됩니다.’ ‘아이구 그렇습니까? 손해가면 안 되지요.' 떠나간다 말이오.

떠나가면 ‘아이고, 오시이소. 오시이소. 그래라도 가지고 가이소.’ 그거 또 그래 가지고 가니까 떡 갔다 말이오. 가니까 ‘뭐 손해가지마는 점잖은 어른이 왔는데 그뭐 그렇게 가져가십시오.’ ‘아이구 내가 점잔 내가 물건 사는 데 거게 팔아먹을 사람 아닙니다. 점잖해서 주는 거 나는 안 합니다. 자기가 손해 안 가고 이익이 되거든 주고 유익이 안 되거든 주지 마십시오.’ 그 거짓부리 말이요, 그 물건 하나 사는 데도 거짓부리 전부 다 깨뜨려 다 박살내 버린다 말이오.

아예 오면은 그만 ‘오십니까?’ 이래 먼저 와서 이라면 인사하고 이래도 `예' `뭐 사러 오셨습니까?’ ‘나 좀 볼 일이 왔습니다.' 그 집에 있는 물건 사고 안 가요. 양사방, 대번 갔다가는 대번 가 모르면 허튼 소리 할 것이거든. 양사방 다 돌아 가지고서 이제 어느 집에 가 가지고, 물건 똑똑히 알고 금을 알고 난 다음에 가 가지고야 허튼 소리 안 한다 말이오. 이렇게까지 자기를 조심해서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이것이 다 성화되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동일한” 꼭 같은 “말씀의 불로 소멸한다” 이번에는 말씀의 불로 소멸해요, 말씀의 불로. “동일한 말씀의 불로 소멸한다” 이제 이걸 ‘노아 홍수 때에 그때도 내나 물로 심판한다 하는 그 말씀같이 지금 불로 소멸한다는 그 말씀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말씀 영감과 진리의 불로 소멸한다 그말이오. 요거 또 사이비한 것으로 지금, 여러분들이 배우고 가면 ‘목사님은 원어를 몰라서 이 해석을 틀려. 해석을 이렇다.’ 하면은 여러분들이 또 꾀여 간다 그말이오.

오늘에, 그때 말씀의 불이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로 소멸하기 때문에 오늘에 영감과 진리에 배치되고 이질되는 걸 다 고쳐서 동질을 만들어라 하는 요것이 바른 깨달음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집회에 사용할 상이 필요한 분은 지금 주문하면은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가격은 얼마인지 모르고? 주문이 많으면 싸고 그렇답니다. 그래도 대략 그게, 대략 그래도 이거 말해야지 범벅, 암만 그렇지마는 상 만드는 데 상 한개에 지금 억만 원이라 하면 여기 살 사람 하나도 없을 겁니다. 이 상 한개 억만 원 하면 하나도 없을 거라. 상 한개에 천 원이다 하면 지금 살 사람 꽉 찼을 것이오. 대략 이거 견적을 받아 가지고 그래 해야 되지 이래 광고하는 건 광고가 아니라. 어? 그렇게, 견적을 대략 가격을 대략 거석해 가지고 해야 이 주문할 사람 있지 이 말 듣고는 주문을 못 한다 그말이오.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회개에 스무 가지 요거 공과를 잘 외워 가지고 가르치도록 그렇게 합시다.

요번 주간은 예수님의 재림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요번 주간에 우리가 강조 주간으로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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