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6:37
재림준비
1987. 7. 24. 밤 <금>
본문:베드로후서 3장 6절∼14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서부교회서는 지난 주일로부터 계속 항상 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번 주간은 불심판 가지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하는 주간으로 정하고 우리는 일 주간 내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됐는지 그것을 잘 스스로 시험해서 준비에 이르지 못한 이런 일이 없도록 서로 서로 깨우쳐서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노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모아 가지고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주를 모아 가지고 심판을 면하는 게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질된 것은 다 구원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질된 것, 거룩과 경건과 이질된 것은 다 불살라지고 맙니다.
이번 준비는 거룩과 경건이 불심판을 면하는 준비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듣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섞여 있는 데서 또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 흠없는 온전에 이르는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교훈해 주시고 또 약속으로 계약 선포를 해 주시고 우리에게 미리 모든 것을 예고해서 준비시켜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과 자기의 모든 지식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또 모든 소망이라든지 그런 것이 이 말씀과 대조해 가지고 말씀과 삐뚤어진 것을 전부 정리 정돈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번 이 불심판 면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위반됨이 없이 다 모든 것을 정리 정돈을 해서 하나님의 이 모든 교훈과 계약과 예고의 말씀과 이질됨이 없이 다 준비됐다 할지라도 경건은 그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순전히 하나님을 위하는 것 또 성경 말씀대로 된 것 이 두 가지가 이 불심판을 면하고 불심판에서 구원 얻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심판이 어떤 심판인가? 이 불심판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해 뒀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 그러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 또 진리는 소멸하는 불이라, 영감도 소멸하는 불이라, 하나님이,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이 불로 우리에게 계시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도 지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영은 벌써 예수님의 구속과 영감과 진리와 하나가 됐고 우리 심신은 지금 아주 다른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동질화시킬라고 애쓰는 것이 지금 구속 운동인 것입니다.
지금은 동질화시킬라고 이렇게 애를 쓰시다가 우리 영 안에 계시는 이 세 능력이, 이 세 능력은 우리의 생명인데,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은 피와 성령과 진리의 그 능력이 우리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영 안에 계시다가 우리 마음으로 건너와서 우리 마음을 이 동질화시킬라고 애를 쓰다가 우리 마음이나 몸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악령과 악성과 악습을 끌어들이면 즉시 우리의 생명인 이 세 능력은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떠나게 되는 그 이유는 만일 그때 떠나지 안하면 우리에게 모든 불의는 진리와 만나면 소멸됩니다. 영감과 만나도 소멸됩니다.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죄를 용납지 않습니다. 죄는 당하면 그만 타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이 심신이 진리화 영감화 예수님의 구속화 이 성화도 되지 아니하고 잘못하면 서로 대립되는 이 입장에 있으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피의 능력과, 피는 깨끗하고 영감도 진리도 다 깨끗한데 이 깨끗한 능력이 떠나지 안하면 더러운 우리의 이 심신의 죄악은 소멸되고 맙니다.
마치 빛이 오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즉시 소멸되는 거와같이 우리 심신이 악령화 악성화 악습화돼 가지고 있는 깜깜 어두운 이 삐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 이렇게 같이 접하게 되면 즉시 소멸되기 때문에 그럴 때는 재빨리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도 영감도 진리도 우리를 떠나 버립니다.
안 떠나면 우리 심신이 멸망받기 때문에 떠납니다.
그러면 떠나 가지고 우리 영 안에 머물러 계시다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 영을 통해서, 또 환경과 주위의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실라고 한 이 모든 자연 만물을 통해서, 우리 중생된 영을 앞장세워 가지고 우리 마음의 제일 빛이 되는, 마음 중에는 제일 깨끗한, 육 가운데서는 제일 깨끗한 양심을 손잡을라고 애를 쓰다가 손을 잡게 되면은 이 세 능력이 우리 마음에 건너옵니다.
마음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그말은 주님은 우리의 이 심신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는 말은 너희 심신은 나를 통해서 나의 도움을 입어 가지고 너희들에게 목적이요 너희들의 소망이 되어 있는 그 모든 소망 구원을 다 이루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우리가 혹 진리를 깨달을라고 합니다. 진리를 가까이 접할라고 애를 쓰고, 진리를 접할라고 애를 쓰고 또 영감을 우리가 만나서 접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애를 쓰는 그거는 뭐 애쓰나 안 쓰나 진리도 우리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 땅위에 오셔 가지고 계시고, 또 영감도 우리와 접하기 위해서 땅위에 와서 계시고, 또 예수님의 피공로도 우리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설정하셨기 때문에 우리 이 심신에 들어오기를 밤낮 노력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대속의 은혜를,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달아서 예수님의 대속에게 자기 심신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모자라서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뭐 자기에게 사소한 어려움만치도 그렇게 어려움도 느끼지 안하고 또 사소한 유익보다도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지 안하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와 거리가 멀어 그렇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 진리를 깨달아서 그 진리를 위하여 자기 모든 걸 바치기도 하고, 또 진리를 힘입어서 뭐 불구덩이도 사자도 그런 것도 두려워하지 안하고, 어떤 큰 대국이라도 대국의 정권도 두려워하지 안하고, 참 맹수와 같은 혹독한 공산주의 같은 그런 것도 두려워하지 안하고 이렇게 투쟁해 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이 진리를 믿는 믿음이 없어서 이 진리가 어떤 유력한 그런 학자의 말, 또 이 세상에 무슨 도덕가의 말, 또 궤변쟁이 말 그런 말만치도 그렇게 가치 있게 권위 있게 여기지 안하는 그런 사람도 있고, 또 영감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영감과 진리와 예수님의 피공로가 우리와의 거리가 멀고 가깝게 접하지 못하는가 하면 그것은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심신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으면, 우리는 완전한 죄인이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으면 우리는 빛인 진리와 빛이신 영감과 빛이신 이 예수님의 대속과 생명이 우리 심신에 와도 우리 심신이 녹지 않습니다. 우리 심신이 거게 죽지 않습니다.
안 죽으니까 그 성화 운동을 하다가 우리가 악령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 중심으로 되면은 자기 부인했던 자기를 도로 찾고 또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그 모든 소원 생각 관련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주장할 때에는 예수님의 대속은 그만 멀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라면 그때에는 예수님의 생명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우리 안에 계시게 되면 우리 심신은 성화되지도 못하고 바짝 타 버리고 맙니다. 완전히 타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해 가십니다. 가시다가 또 기회를 마련해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성령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생명을 영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연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의 심신과 같이 그렇게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있기 때문에 이 대속과 영감과 진리가 오면 확 불이 타 버리기 때문에 할 수 없어 피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영감을 원해도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안하면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피하십니다. 그 마귀에게 뭐 지거나 뭐 어데 두려움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하십니다.
이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정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사람이 판정이 나고 ‘이거는 아무리 해도 안 듣는다’ 또 `이거는 심판으로 멸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경건 운동, 심판 운동.
경건 운동이 곧 심판 운동입니다. 경건은 구원되는 것이요 심판은 구원되지 안하는 것을 멸하는 운동인데 이것이 끝나면 이제 그때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나타나면 이 대속의 공로에 배치되는 것은, 주님이 대속하신 것은 이 죄를 미워하시고 사망을 미워하시고 마귀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와 사망과 마귀의 것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그렇게 미워하십니다.
당신이 죽어도 이거는 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이신데 이제 와 가지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남아서 다 쓰지 못할 것은 예수님의 피가 오면 전멸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시록에 보면은 “바위야 내 위에 덮어서 어린양을 보지 않구로 해 달라” 지금은 예수님의 대속이 그렇게 기쁘고 즐겁고 우리가 만만하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이 심판의 대속으로 올 때에는 모든 인간이나 만물이 어린양의 낯이 제일 두렵습니다.
어린양의 낯이 제일 무섭고 두렵고 또 그다음에는 영감이 두렵고 무섭고 진리가 두렵고 무섭습니다. 왜? 진리 아닌 거는 다 태워버립니다. 영감과 배치되는 건 다 태워버립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적이 되는 거는 태우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영감을 구하고 진리를 구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구하고 이라니까 이 예수님의 대속이라든지 영감이라든지 진리는 이거는 무골호인처럼, 무골호인처럼 ‘이거는 아무리 만만하게 해도 배척을 해도 괜찮고 관계 없다’ 이리 돼서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죄를 멸하고 마귀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는 그 유일한 능력을 가지신 대속의 공로입니다. 또 영감도 죄와 사망과 마귀를 멸합니다. 또 진리도 그러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뭘로 태우느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님의 피공로와 진리와 영감 이 셋이 선포해 놓은 그대로 이 셋의 본질과 본성의 이 지극히 큰 능력이 그런 것들을 다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준비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느냐? 오늘의 준비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과 이질되는 것을 자꾸 고쳐야 됩니다.
이질되는 것을 이걸 이질되는 것을 지금은 고쳐서 동질화할 수 있고 이 지금 동질화하지 안하고 남은 것은 완전히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질된 것을 동질화하고 영감과 이질되고 이성되는 것을 동성 동질이 되도록 이렇게 노력을 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배치되는 것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일치되도록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예수님의 대속 공로 안에 들어가 버리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대속 안에 들어가면 영감 안에 들어간 것이요 진리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에 장자 재앙에 그 문지방에 양피를 뿌려 가지고 그 피 안에 있는 것은 다 멸망하지 안하고 구원 얻은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안에 있는 것은 전멸 재앙에서 구원 얻고 그 나머지기는 다 전멸된다 하는 것을 하나의 예표요 하나의 모형적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직도 모르면 그렇지마는. 장자 재앙을 전멸 재앙이라 하는 것을 그것을 이해를 못 해 가지고 ‘장자만 바치라 했는데 그 차자가 어찌 거기 소멸되는가?’ 이래 말했는데, 그 장자 재앙으로서는 장자만 바치는 게 아니고 차자와 전부 다 바쳐서 전체를 다 바쳐 가지고 주님의 것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오늘 준비 하는 데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상고해 가지고 이 말씀과 이질되는 것은 다 그것은 고쳐서 동질화하는 것이 그것이 불을 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뭐이 재림하는가?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옵니다. 영감과 진리가 나타나 가지고 이제 멸합니다. 영감과 진리의 본질과 본성이 거게 배치되는 것은 다 소멸시켜 버립니다.
이러니까 모든 만물이 이렇게 인간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기 때문에 더러워진 것은 다 태워버리고 원소는 그것은 더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원소로 돌아가 가지고 다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에 이 준비하는 데는 그저 별스런 준비 없습니다. 이 말씀이 불을 사룹니다. 동일한 말씀이 불을 사른다 했어.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 말을 혹 해석하기를 말씀하신 그 약속하신 선포한 그대로 사른다. 녜, 그대로 사르는데 이 말씀이 불사릅니다. 영감이 불사릅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이 불사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이 죄와 사망과 마귀가 완전히 원수되기 때문에 그것을 다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오늘에 준비하는 것은 이 거룩과 경건 외에는 준비가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와 대조해서 이질되는 것을 동질화시키는 그것이 거룩이요 아무리 거룩이 됐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자존하신 하나님 한 분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위하는 경건이 아니면 또 소멸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두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것을 뭐 이런 설명은 벌써 새벽마다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혹 처음으로 온 분이 있는가 해서 해석하는 것이지 이 해석은 필요가 없습니다. 해석은 필요 없고 단지 이제 우리는 이 구원 준비가 되고 있나 안 되고 있나 하는 그 문제가 중대한 문제입니다.
노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일백이십 년으로 정하고 홍수로 심판할 터이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배 준비 하라’ 이렇게 말씀했을 때에 하나님이 홍수로 온 세계를 전멸하시겠다고 하는 이 말씀을, 이 말씀을 믿기를 주먹만치 믿었으면 그 사람은 주먹만한 걱정이 생겼을 것이라. 만일 그 사람이 이 홍수 멸망이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 집채만치 그 사람이 그 하나님 말씀을 믿었으면 그 사람 속에는 걱정이 집채만한 걱정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은 믿기를 이 천하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안하고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신다 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제일 두렵고 걱정이 돼서 온 세상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안할 만치 그렇게 크고 뜨거운 걱정이 됐다고 하면 그 사람의 전심 전력은 방주 모우는 데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주간 동안 벌써 이 준비를 했는데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불심판 가지고 오십니다.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것은 불심판 그 불은 뭐인가? 그 불은, 불은 곧 하나님과 동질이요 진리와 동질이요 대속과 동질입니다. 곧 하나님시요 영감이시요 진리시요 예수님의 대속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이질되는 것은 소멸되고 이와 동질되는 것은 하나님도 진리도 예수님의 대속도 자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때가 가장 완성이요 이제 충만해지고 행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그때는 다 불탑니다. 뭐 산도, 들도, 이 지구도, 또 이 공중에 있는 거 달도 해도 별도, 항성만 해도 십억만 항성이라고 하고 뭐 위성이니 유성이니 말하면 말할 수 없지마는, 이거 지구 땅덩어리 같은 그런 것은 이 우주 안에 억억억억 만도 더 됩니다. 이게 다 싹 타립니다. 타 가지고 완전히 원소화됩니다.
왜? 그것이 그 중에 지구 땅덩어리는 조그만한 것이니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지마는 이 우주에는 지구 땅덩어리가 제일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택한 자들을 지구 땅덩어리에 두고 이 택한 자들의 이 구원을 위해서 우주와 영계를 다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이게 제일 큽니다.
이래서 형체가 커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당신이 적용하시기를 제일 귀중히 적용했는데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주도 다 타락됐습니다. 영계는 타락되지 안했지마는 이 우주는 인간 타락에 정죄를 다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더러워짐으로서 우주가 더러워졌고 또 예수님이 이제 대속하심으로서 우주를 깨끗게 하기 위해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데 지금 깨끗게 하실 때 깨끗게 되는 것은 이것은 의로서 영원히 남고 나머지기는 다 원소돼 가지고 재창조 할 때 다 재제조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자꾸 우리가 느껴야 됩니다. 사람이 그 마음으로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면은 거게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자꾸 마음이 기울어지고 진상대로 큰 걸 큰 것으로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그 실상에 일치가 되는 그런 실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의 작용이요 몸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꾸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이 우주는 불탄다’ 그러면 자기 혼자 자문 자답 해 봅니다. 자문 자답 해 봅니다. ‘타면 그러면 저 구덕산은 어찌 될까? 그것도 불탄다. 영도는 어찌 될까? 영도 섬도 불탄다.
소련은? 소련도 불탄다. 한국은? 한국도 불탄다. 미국은? 미국도 불탄다. 그러면 달은? 달도 불탄다. 해도 불탄다. 이 불타는 게 어찌 될까?’ 이것을 자꾸 우리가 생각하고 생각해서,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냐?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냐?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진다 말은 이 하늘은 이 우주에 지구 땅덩어리 외에 것 모든 것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 그것은 이 지구 땅덩어리 위에 있는 이런 것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것을 자꾸 이렇게 생각하고 또 하나님 앞에 그때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에 타서 모든 그 형체와 종류와 색깔이 다 없어지고, 형체와 종류와 색깔이 다 없어지고 모든 것이 다 한덩어리가 돼서 이렇게 체질로 원소로 녹아지는 그때에, ‘그때에 내가 보고 두려워할 그 두려움을 지금 가지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꾸 기도해야 됩니다.
이 설교하는 데도 여게 앉은 사람 가운데서 그런 사람 많습니다. ‘나도 저렇게 저 말을 할 수 있다. 얼마든지 해서 교인들에게 좀 위협도 주고 또 교인들에게 그렇게 좀 기합도 주고 또 교인들이 그와같이 듣도록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 실상은 제가 여기 대해서 하나도 믿지 않는 그자가 있습니다. 옛날 노아 때도 그랬습니다. 노아 때도 그 모르는 것 아니오. 다 알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나 노아가 증거하는 것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무시했는데, 제일 복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불탈 때에 그때에 그 실상을 자기가 만나 가지고 두려울 그 두려움에 그때의 실감, 그때 두려운 그 실감, 그 실감이 오늘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됩니다.
그저 그냥 지내가면서 말만 들어 가지고 ‘나도 저렇게 말하는데 저기 좀 말 좀 더 첨부해 가지고 더 위협도 줄 수 있고 더 기합도 줄 수 있다’ 그거는 망합니다. 그자는 망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자기가 생각하기를 ‘그때 이렇게 불타면 얼마나 무섭겠나? 요새 뭐 홍수가, 홍수 난리 났다고서 떠들어 쌓는데 이 홍수난 것만치 그렇게 무섭겠나?’ 예수님의 불심판을 자꾸 느껴서 불심판에 대한 실감을 느낀 사람은, 실감을 느낀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이 불심판밖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불심판 외에 두려울 것은 나라가 망한다, 전쟁이 온다, 뭐 공산주의다 그까짓 것은 아무 두렵지 않습니다. 이 불심판의 두려움을 자기가 겪고 겪고 느껴서 실감으로 가진 사람은 땅위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심판 그 두려움을 실감으로 자꾸 느낄라고 기도하고 ‘주님이여, 그때에 두려움을 느끼는 그 느낌을 지금 느껴야지 그때 가 느끼면 뭐 때는 지나갔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금 그때의 느낌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어떤 사람은 그때 느낌을 실감으로 느껴 가지고 자기의 모든 생애가 전부 거기 다 기울어지고 있는데 왜 나는 거기 대해서 그렇게 예사로 들리고 크게 들리지 않습니까?’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시험해 가지고 거짓부리라는 걸 알아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누가 그걸 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기가 자꾸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한 마을이 탈 때에, 마을이 탔다. 이거 뭐 홍수에 침몰돼 가지고 뭣이 어찌됐다.’ 노아 홍수를 믿음으로 실감을 느껴 본 사람은 세계가 물에 잠긴다 할지라도 그건 꼼짝도 안 합니다. 그저 죽으면 죽지 거게 대해서 두려움이 하나도 없어. 왜?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을 봤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두렵게 여지기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불심판을 맞이할 이 준비로서 불심판에 멸망받지 안할 준비를 할라고 하는 우리들이 이 불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그 실상을 십분지 일을 느끼면은 십분지 일이 준비될 것이고, 백분지 일이 느끼면 백분지 일이 준비될 것이고, 십의 십이 백의 백이 다 그 두려움을 느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백의 준비했을 것이고 만점의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는 오늘에 거게 대해서 이 두려움의 실감을 어느 정도 네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자기 준비의 여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뭐 공산주의가 오는 전쟁, 전쟁 해 봐야 전쟁 그거는 뭣이 크게 두렵습니까? 전쟁 두려운 것은 이 불심판, 오는 불심판에 백분지 일의 두려움도 안 됩니다. 천분의 일의 두려움도 안 됩니다.
이 두려움이 자기에게 실감되어서 자기는 그만 이 불심판에 대한 근심 걱정이 자기에게 꽉 채이고 보니까 아무것도 걱정되는 게 없습니다. 이 불심판 이것 하나만이 걱정이고 근심이고 두렵지 그 외에 것은 하나도 생각도 안 하고 느껴지지도 안하고 그런 걸 말해 봤자 그런 거는 그거는 귓전에 들어오지를 안합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그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은 이 불심판에 다 집결됐고 집중됐기 때문에, 집중됐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전심 전력은 이 불심판 준비하는 데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유일한 방편으로 변할 수 없는 방편으로 정해 놨기 때문에 하든지 못 하든지 이 거룩과 경건 이 불심판 피난하는 이 준비 여기에 자기 힘 있는 대로는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불심판이 온다 해도 오늘 이 시간에 ‘돈이 내게 얼마 쥐인다. 이 뭐 지위니 권세 문제가 있다. 이 출세 문제가 있다. 이 공명 문제가 있다.’ 이거 다 뒤로 두고서 그렇게 한 자는 이 불심판을 완전히 업신여기는 자고 거짓되이 여기는 자기 때문에 그자는 완전히 전멸될 자입니다.
오늘에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나 이 불심판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완전 멸망자입니다. 회개하면 되지마는 회개할 때까지 완전 멸망자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의 재림의 불심판, 이 불심판을 믿나 안 믿나? 정말로 믿나 안 믿나? 믿는 증거가 뭐이며 안 믿는 증거가 뭐입니까? 믿는 증거는 이보다 더 큰 일이 없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내게는 걱정되는 일이 없고 더 두려운 일이 없고 더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요, 또 ‘그렇다 하는데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있다 하니 좀 께꾸름하네’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조그매 믿는 사람이요, ‘그까짓 거 있다 하거나 말거나 뭐 거짓말 그런 말이야 누가 말 못 해? 거짓말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자는 이 불심판을 아주 부인하고 무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회개가 되기 전에는 멸망의 자리에서 옮겨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무를 모르거든 그 열매를 보아서 알라고 하는 말씀대로 우리가 일주일 내 지금 노력하는 건 그것입니다. 나는 이 불심판의 이 두려움을, 우주가 전부 다 불로 다 타서 원소화되어지는 이 무서운 불심판에 대해서 자기가 믿는지 안 믿는지 그것을 스스로 확정을 지우십시오.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 없어, 뭐. 제가 확정지워야 되지 다른 사람이 말한다고 됩니까? 암만 말해 봤자 뭐 이래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이상 더 말할 수 없어.
예수님도 이래 말했어, 뭐 더 말한 것 없어.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불심판으로 인한 내가 걱정이 어느 정도 되며 근심이 어느 정도 되며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있는가 그것을 봐서 믿고 안 믿는 그것을 자기가 판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그러면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데 믿는다 말입니까? 아니오. 어리석소. 노아 때와 인자의 임함과 꼭 같다 했습니다.
내가 그 불심판 내가 두려워한다. 걱정이 된다. 참말로 두려워하고 걱정이 되나 안 되나, 참말로 진짜 걱정이 되고 진짜 두려움이 되느냐? 그러면 그 불심판에 대한 실감을 느끼는 그 실감의 실감이라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부리인지, 그 실감이라는 것이 실지의 실감에 대해서 만분의 일이 되는지 백분지 일이 되는지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뭘로 알 수 있습니까? 두려움으로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자기 두려움은, 또 속기 쉽습니다. ‘나는 여게 대해서 두려워한다.’ 그러면 두려워하는지 안 두려워하는지 이것은 뭘 보고 알겠습니까? 두렵고 걱정이 되면 필연적으로, 이 면하는 길은 두 길밖에 없으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예고한 말씀을 믿고 보니 그는 방주 만드는 데다 전심 전력이라.
뭐 농사 짓는 것도 ‘이거 굶어서는 못 하겠으니까 아무나따나 좀 뭐 심어 가지고 근근히 지금 근근히 조반석죽이나 하고 배 모우자.’ 그러면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배 모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딴게 없어. 전부 간접으로 배 모우고 직접으로 배 모우지 배 모우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고 전심 전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예수님의 이 재림에 대한 그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자기가 가진 것만치 거게 대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 준비하는 것은 거룩과 경건인데 ‘나도 거룩과 경건을 준비 한다.’ 이 거룩은 하나님 말씀과 대조해서 배치되는 것을 자기가 일치시킬라고 하는 것인데 이래서 그것은 뭐 찾습니다.
저도 오늘 종일 그것 찾다 왔습니다. 나 이 설교 준비 하지 안해. 오늘 저녁에 그것 찾다 왔어. 천막에서 그것 찾다 왔어.
‘주님과 주님의 말씀과 나와 다른 게 뭐입니까? 배치되는 게 뭐입니까?’ 자기 신앙 지식 가진 대로는 범위넓게 이렇게 저렇게 이면으로 저면으로 자꾸 이렇게 훑어서 이래 찾고 이렇게 하는데 이것도 속기 쉬워.
‘나도 거룩과 경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내가 전심 전력을 기울인다.’ 그러면 거룩과 경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심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뭘 보고 압니까? 그것은 뭘 보고 압니까? 몇 가지를 보고 압니까, 손가락으로? 저게는 몇 가지를 보고 압니까, 몇 가지? 다섯 가지요? 두 가지 든 사람은 손 들어 봐, 두 가지? 두 가지라, 두 가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 두 가지라.
예수님의 재림이 기달펴져. 예수님의 재림 안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안 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기달펴. 어서 오시기가 기다려져. ‘나는 아주 예수님의 재림이 오면 다 불탈 터인데 내가 좋아하는 이것도 저것도 다 불탈 터인데 재림이 좀 한 이십 년만 있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스무 살 먹으니까 그래도 인생이 났다가 뭐 결혼 생활해 가지고 한 오십이나 지나봐야지 삼십 년만 있다 왔으면 좋겠다. 사십 년 있다 왔으면 좋겠다.’ 이리 되는 사람이 다인데, ‘주님의 재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본다” 말은 소망한다 말인데 바라본다 말은 그 소망이 예수님의 재림밖에는 소망이 없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사모도 간절도 예수님의 재림, 재림이 뭐인데? 오면 불타버리고 마는데. 불타는데. 거게만 사모와 간절과 기달피는 것은 거게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고대가에서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 이 손양원 목사님 지은 노래인데 다른 사람은 그거 몰라요. 그만한 신앙 정도에 좀 가까이 가야지.
울기는 뭐할라고 찔찔 울어?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왜? 거룩과 경건을 마련할라고 하면 세상은 ‘빈들판에서’ 쓸쓸한 세상이 됩니다.
왜? 거룩과, 가족에도, 가족에도 거룩을 다 태워버리고 거룩을 없애버리고 마구 혼합 혼돈시켜서 마구잡이로 살라 하면은 막 좋아하고 물고 빨고 좋아하던 사람도 거룩으로 살라 하면은 냉정해집니다. 나는 그 사람 암만 친하지마는, 친할라고 하지마는 거룩으로 하나님의 진리대로 친해야 되고 영감대로 친할라 하니까 진리 영감 할라 하니까 이 세상은 진리와 영감과 다 적입니다. 어두운 세상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자기가 거룩과 경건을 준비할라 하니까 자연히 이 세상에는 외로워. 그러기 때문에 빈들판이라. 거게 대해서도 많은 비유를 들어서 말을 했습니다. 인제 더 할 필요가 없어.
내가 거룩과 경건이 유일한 준비인데 거룩과 경건을 준비 했나 안 했나? 거룩과 경견이 준비됐나 안 됐나, 그 거룩과 경건이 준비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은 몇 가지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저게도 손가락으로? 아는 체해도 몰라! 오늘이라도 불타면 다 땅에 떨어져 버려! 불에 타버려, 다 오그라져 버려! 뭐 살아 있는 줄 알아요, 알기를? 어림도 없어. 아직까지 거리가 멀어.
다 불탈 요소만 가지고 지금, 여러분들이 땅에 것만 기뻐하지, 땅의 것 뭐? 죄악만 기뻐하지 죄 아닌 건 기뻐하기 싫어요, 다. 죄만 기뻐하지. 그런 거 다 불타 버려.
둘을 보아서 알아. 거룩과 경건이 준비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은 둘을 보아서 알아요. 거룩을 준비했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은 쓸쓸한 빈들판이 되고 자연히 외롭고 서럽고 이라니까 눈물밖에 나는 게 없어. 세상에는 외롭고 쓸쓸하니 눈물나지, 주님 생각하니까, 주님 생각하니 그분밖에 바랄 분이 없고 그분밖에 반가운 분이 없으니까 주님 생각하니까 눈물나지. 이게 필연적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고대해지고 또 내 전마음은 주님의 재림에 거기 가서 있게 되는 것은, 왜? 거룩과 경건을 준비하고 보니까 땅의 준비는 하나도 정붙일 것 없고 땅의 준비는 하나도 없고 전부 주님 만날 그 준비만 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거기 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분이 와야 좋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는 필연적이오.
과거에 6 5전에 보니까 공비 왔던 사람이 지하운동 하면서 공비 와서 지하운동 하다가서 이제는 공산주의로 통일되면 참 한 때를 만나리라 하고서 오만 것을 참고 견디면서 이렇게 준비하다가 준비하니까 그저 밤이나 낮이나 이렇게 그저, 다리, 아랫도리가 썩었어. 보면 뭐 발이 다 썩어버렸어. 겨울에 안 들킬라고 그 물로 도랑으로 가 가지고 뭐 그래도 연명하고 이래 가지고 이래 살다 보니까.
이래도 공산주의 통일되면 그때 한번 볼 거라고 그 소망으로 되니까, 그분들은 이제 6 5가 터져 가지고 인민군들이 점령해서 내려온다 하니까 그 산에서 뭐 오는데 전부 몽달발이라. 이 전부 아래 썩어서 다 이래 돼. 몽달발 이래 가지고도 막 기뻐 못 견뎌서 뛰고 굴리고 이래 와. 왜? 자기 일생 동안 노력한 것이 그 공산주의 통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자기 전력이 거기 기울었기 때문에 소망이 거기 있을 수밖에 없어.
거룩과 경건을 위해서 전심 전력을 다 기울였으니까 예수님의 재림밖에는 기다릴 게 없고, 재림밖에는 소망이 없고, 재림밖에는 고대하는 게 없고, 재림밖에는 사모할 게 없어. 이게 필연적으로 돼야 거룩과 경건을 준비한 거라. 거룩과 경건 준비하면 필연적으로 돼요.
가정에서라도 거룩한 행실을 할라 하면은 거룩한 행실을 할라고 하고 거룩을 준비할라 하면은 가정에서도 오만 조롱, 오만 천대, 오만 멸시, 오만 속 다 썩어.
오만 박해 다 당해. 그래도 주님, 구름타고 오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준비하는 사람은 땅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어서 주님이 오시면 주님하고 같이 살고 싶지. 거룩을 준비하고 경건을 준비하면 필연적으로 그게 된다 그말이오.
이게 다 필연적이오.
그러면 이렇게 내가 그러면 필연적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고대하고 ‘이게 바로 됐나 안 됐나? 거룩 경건 준비가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은 그 시금석이 뭐인가? 그 표시판이 뭐인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되는 그것이 표시판이다.
‘나도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돼진다. 사모돼지는 이거는 그러면 이거 사모되는 이거는 진짜가 가짜가? 이거 사모되는 것이 바로됐나 안 됐나 그게 문제다.’ 그것은 뭐인가? 그것도 둘이라.
내 기쁨과 근심, 기쁨과 근심이 다 거게 있어. 내 기쁨과 근심이 거게 있어. 다른 거는 암만 해도 그 근심될 게 하나도 없어. 전부 근심하는 것도 ‘그게 잘못됐나?’ 근심도 거게 있고, 또 기쁨도 땅에 것 무슨 일이든지 아무 기쁨이 없어. 기쁨도 거게 있고, 기쁨도 거게 있고 근심도 거게 있어. 또 내가 고치는 것도 거게 있고 지금 다시 고친 것도 거게 있고 열심히 건설하는 것도 거게 있어.
자기의 열심히 고치는 것이나 다시 마련하는 것이나 열심히 노력하는 노력도 다 거게 있고 내 기뻐하고 슬퍼하는 내 마음도 거게 있고 이 두 가지가 거게 있으면 하지마는, 내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한다고 이렇게 하기는 하지마는 실은 내 기쁨이 땅에 있고 내 근심이 땅에 있고 ‘요게 잘못됐나 조게 잘못됐나?’ 뭐 잘못되는 걸 지금 심사해 가지고 ‘요게 잘못됐다’ 잘못된 것을 찾는 것이 거게 있지 안하고 땅에 있고, `내가 요것을 고쳐 한번 해 봐야 되겠다’ 하는 것이 땅에 있으면 가짜야.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의 불심판을 믿으면, 믿으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옵니다. 믿으면 믿는 것만치 두려움이 옵니다. 두려움이 오면, 사람은 두려움 피할라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두려움이 오면 그 두려움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두려움이 오면 자기 전심 전력은 피난할라고 거룩과 경건을 마련하는 데 기울일 수밖에 없어.
거룩과 경건이 마련됐나 안 됐나 그것의 표시는 뭘로 가지고 알 것이냐?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그거는 뭘로 알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 고대하고 간절히 사모되는 것이 거게 있는 두 가지고, 간절히 사모하고 고대하는 것이 주님의 재림에 있으면 ‘그게 바로 됐나 안 됐나? 참말로 있나 없나? 거짓부리로 내가 나한테 속아 가지고 백지 있는 줄로 알고 있는가 참 있나?’ 그거는 내 심신의 노력이 거게 기울어지고 내 심신의 노력이, 마음의 근심이나 기쁨이 거게 기울어지고 내 몸이 기울어지고, 심신의 노력이, 심신의 노력이 다 거게 기울어져 있으면 진짜고 기울어져 있지 안하면 다 스스로 속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에게 속는 이런 것을 오늘 심사해 가지고 아무래도 요번 주간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을 우리가 준비할 대로 준비하고 이래 가지고 요번 주간에 준비하기를 원만히 시작한 사람은 앞으로 자꾸 준비가 돼 나갈 것이고 이렇츰 강조하는 데에 시시하게 여기고 그래 지나가는 자는 다시 그런 기회가 올란지 의문입니다.
광고합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빼지 맙시다. 새벽기도 빠지지 말고 계속해 나오십시오. 강퍅, 자기 강퍅을 버리고 어짜든지 새벽기도 나오면 여게 대해서 마음이 변화되고 이 새벽기도 안 나오는 그런 사람은 땅에 것만 보고 있지만 오늘이라도 구름타고 오시고 불타 버리면 그만이지 뭐 여러분들 뭐 본 게 뭐 있소, 있기를? 지하철 공사 위해서도 우리가 기도합시다.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실지라도 이거 만일 예배당 이거 무너져 버리면 그거 언제 한다 하면 이 재림 준비를 못 해.
그러기 때문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절제한다 말은 모든 것을 조절해서 허비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하나도 물샐틈 없이 한다 그말이오. 잘못하면 허비하고 낭비하면 헛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서 막을 것도 이거 만일 무너져 놓으면 언제 예배당 짓는다 하다 보면은 예수님의 재림 준비도 하지도 못하고 분주해 가지고 그만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기도해야 되고.
또 요새는 내가 오늘 들었는데 이 장마철에 뭐 모든 질병들이 많이 유행한다 하고 있는데 지금 장질부사가 한창이랍니다. 장질부사는 염병입니다, 옛날말로 염병. 장질부사는 하나 앓으면 그 가족이 있는 대로 다 앓습니다, 주의 못 하면.
저는 개명교회 있을 때에 장질부사 한 사람이 앓았는데, 사랑이니까. 사랑이니까 한 사람이 장질부사 앓은 데에 우리가 위생 주의한다고서 그 위생을 하고서 삼가 멀리 하고 이라면은 사랑이 아니라고 해 가지고 하나 이제 장질부사 앓았는 데 가 가지고 밤새도록 가 가지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뭐 그저, 또 그 사람 먹는 것 내가 안 먹으면 그거 저 병들까 싶어 이러니까 사랑이 아니라고 이래 가지고 같이 먹고 이래 가지고 교인이 그때에 처음에 세운 교인이니까 마흔두 명인가 됐는데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전부 장질부사 다 했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맨 뒤에 제가 했습니다. 맨 뒤에 제가 했는데 저 할 때에 똑 넉 달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주의해야 돼요.
주의해서, 그것은 다른 게 없습니다. 어짜든지 날 것 안 먹어야 됩니다. 뭐 요새 지금 이 장마철이 지나가고 며칠 있으면 햇빛나면 새로 채소나 가지고 햇빛에 소독된 거는 괜찮지만 지금 채소 안 먹는 게 좋습니다. 장질부사 걸려 가지고 병들어서 죽든지 고생하는 것 요량하면은 안 먹는 게 나아요. 아예 과일도 먹지 말고 채소도 먹지 말고 뭐이든지 삶아 먹고 끓여 먹으면 그만 문제 없습니다.
그저 거기서 생것 먹는데 다 전염되는 것이니까 생거는 전혀 먹지 마십시오. 한 달 동안 채소 안 먹어봤자 죽지 안하지만 그거 한번 걸려 놓으면 잘못하면 그뭐 반 년 나갑니다.
그라고 하나가 걸렸으면 그게 사랑이기 때문에 꼭 위생 주의를 해 가지고 하나만 걸렸지 두 사람에게 건너가지 안하도록 그리 하는 것이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데 무식한 사람들은 자기가 걸렸으면, 자기 걸렸으면 다른 사람 모두 다 걸리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걸렸으면 내가 걸렸는데 다른 사람이 내 먹던 것 안 먹으면은 ‘병 걸릴까 싶어서 안 먹는가?’ 이래 가지고 섭섭해 하니까 이걸 또 먹어야 된다 그말이오. 그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자기 하나는 걸렸지만 다른 사람은 안 걸려야 될 것 아닙니까? 요새 지금 그것이 심해서 뭐 입원을 많이 하고 있다 말 들었습니다. 앞으로 지금 심해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이거 뭐, 뭣 때문에 재앙, 이게 재앙입니다.
깨달아야 돼. 재앙이라, 재앙. 배부르고 등따시고 자유 있고 하니까 하나님 앞에 망령을 부리면 하나님이 벌 주시면 망해요. 그까짓 거 인간들이 무슨 힘이 있어, 있기를? 이거 공연한 게 아니야, 이거.
여러분들 세계 뉴스를 보십시오. 그 나라에 ‘저런 죄가 있기 때문에 저 나라 친다’ 하고 나면 얼마 안 가서 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저 지방을 친다’ 하면 얼마 안 가 쳐 버립니다.
그런고로 그런 것도 조심해서 어짜든지 요번에 거창집회 가는 데에 뭐 저만 가고 싶으면 가고 돈 있으면 될 줄 압니까? 안 돼. 하나님이 허락해 줘야 돼.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건강이 있어야 되고, 자유가 있어야 되고, 또 모든 가고 싶은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뭐 경제 같은 거 이런 거 있어야 되니까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지 많이 안 하면 안 됩니다.
십 분 기도 후에 재독이 있을 것입니다.
남구역장은 다 보고서를 다 내고 가도록 하십시오. 구역장들 보고서 안 내는 것은 일을 안 했으면 안 한 보고라도 내야지. 내야 이거는 가짜 일꾼이다 하는 것을 부끄러워야, 부끄러움 누가 당합니까? 가짜 일꾼이라고 그렇게 수치를 당하면 그 수치 당하는 것이 옛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옛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옛사람 그놈은 죽여야 되지 안해요? 그놈 부끄러움 봐야 그놈이 없어지고 녹아지지.
또 거창집회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특별히 강사 목사 위해서 기도 많이 하고 왕복 통행 위해서 기도 많이 하십시오. 왜? 기도 많이 하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많이 주시고,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 내가 거창 가서 집회 할 때 설교할라고 설교 준비하겠다 하는 그 마음은 아직까지 한번도 먹어본 일 없어.
한번도 먹어본 일 없어. 그때 당신이 뭐 주시는 대로 하고 주시면 주실 것이고 그렇지 나는 준비도 할 자격도 없어.
이러니까 어짜든지 요번 주간이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확고 부동한 발족을 해야 됩니다. 확고 부동한 발족으로 요 걸음으로 또박또박 걸어가겠다고 확정해 놓고서 그대로 걸어가요. 변동 없는, 그거는 작정돼야 돼.
완성은 주님 재림 때까지 완성해야 되지마는 우리가 이리저리 허탕 걸음 걷지 말고 곧은 길을 택해 가지고 우리는 그대로 뿍뿍 변동 없이 걸어가기를 시발하는 요 주간이 돼야 할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강퍅하면 안 됩니다. 강퍅하면 자기만 속고 자기만 망합니다. 강퍅하면 안 됩니다.
완패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불에 대해서 실감을 우리가 느껴야 됩니다.
모든 전부가 거기 기울어질 만치 실감을 가져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