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3:51
자신을 시험하라-믿음에 있는 것
1986. 10. 20. 새벽(월)
분문: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광고부터 먼저 합니다.
예배 끝난 뒤에 나가면서 종전같이 교회 주변을 청소를 하고 가도록 합시다. 그럴 때에 언제든지 조심해서 덕이 되도록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반항하지 않도록 그렇게 합시다.
내가 저아레 어떤 사람 만났는데 주변 청소하는 걸 안 믿는 사람인데 말하니까 한 사람은 또 있다가 ‘뭐 제집 제 쓰는데 뭐 따져?’ 그렇게 반항하는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봤습니다. 이러니까 조심해서 안 하고 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덕도 안 되고 반항할 것입니다.
‘뭐 청소한다고 안면 방해로 다른 사람 잠도 못 자구로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이래 할 터이니까 아주 조심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범사에 벌벌 떨어서 뭐 아주 그만 간이 작고 벌벌 떤 그런 생활을 일생을 했다 이랬습니다.
또 그러고 둘째는 예배드릴 때에 앞자리 앉을라고 하는 것 좋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앞자리 와 가지고 앉는 것이야 그거는 좋지마는 자기는 볼일 본다든지 또 뒤에 오고 앞에 올 수 없다든지 하면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잡아 달라 해 가지고 인제, 뒤에 오는 사람이 뭐 신앙 있는 사람 같으면 뭐 상관이 없지마는 앞자리가 비었으니까 뒤에 오니까 아이들이 떠들어 쌓아서 말도 잘 들리지를 안하니까 앞자리 좀 가 볼까 해서 오니까 그만 그 자리 잡아 놨다고 아주 그만 박대를 하고 이라니까 그래 삐꿔서 안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삐꿔서 다른 교회로 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교회는 도무지 나이 많은 사람이 가도 젊은그 반사들인지 모르겠어요.젊은 사람들이 앉아 가지고 자리는 비었는데 안 비껴 주고 뭐 아주 그렇다고. 그런 교회가 어데 있느냐고, 은혜가 있다 해서 갔더니마는 그래 그만 안 간다고,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전도를 가니까 우리는 서부교회 안 가고 딴데 간다고 그라는 사람들이 몇 사람 봤다 말하고, 또 우리 교인 가운데도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사람 대우를 안하고 그렇게 한다고 이래서 삐꿔 가지고 안 나와서 그 인도하는 사람이 한 달인가 두 달인가 빌기를 얼마나 빌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나와서 지금 교인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의 구원에 거리끼지 않도록 어짜든지 우리가 참 조심하고 이렇게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라고 하루 삼십 분씩 모든 장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잃지 말고 기도를 하도록 합시다.
여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이 도리 신구약 성경 말씀을 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있는가, 또 하나씩 아는 대로 요대로 확실히 믿는 그 확신을 가질라고 애를 쓰는 일이 있는가,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아는 대로 실행을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있는가 그말입니다.
“믿음에 있는가” 하나님의 도리를 알려고 애를 쓰고, 아는 대로는 ‘이 사실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일이니 요대로 행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행할라고 애를 쓰는지? 아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인데 신구약 성경 말씀에는 뭣을 가르쳤느냐 하면 첫째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분은 그분이 얼마나 큰 분인가? 어떤 분인가?’ 그분을 아는 지식이 자꾸 자라가고 있는지? 자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이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또 ‘하나님이 어떻게 두려운 분이라’ 하나님 두려움을 알라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내가 믿는가? 바라보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소망이 뭣뭣인지 생각해 보는가? 하늘의 소망과 이 땅의 것들과 이래 비교도 해 보는가? 그런 것이 다 성경이 그런 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두려우심, 하나님의 주권하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에서 창조하셨고 지금도 관리하시고 지금도 모든 것을 다 심판을 해서 행한 대로 다 보응을 하시는 이 세밀하신 하나님,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이 오래 참으시면서도 노여워하시면 결단코 놓지 안하고 그 노에 대한 보응을 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이 사람에게 대해 어떻게 행사하시는가? 해서, 하나님은 참 믿을 만한 분이며, 두려운 분이며,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에게 맡겨 놓고 자기는 그저 의지하고 뿍뿍 순종하면 되겠다 하는 이런 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이 자꾸 자라가고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기가 기를라고 애를 쓰고 있는지? 그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러면 이 세상에는 악령이 있다고 하는데 마귀란 놈이 과연 있는가? 그걸 성경에서 봐서 마귀를 알게 되고 마귀는 어떻게 인간에게 이렇게 유혹을 주고 있으며 작용을 하고 있는가? 이래서, ‘아, 요게 마귀 작용이로구나.
요게 우리 아버지가 지금 마귀 말을 하고 있다, 우리 목사님이 마귀 말을 하고 있다, 우리 권사님이 마귀 말을 하고 있다.’ 뭐 위의 사람은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 ‘마귀 말 하고 있다.’ ‘이거는 우리 남편이 마귀 말을 하고 있다, 이거는 우리 아내가 마귀 말을 하고 있다, 조그만한 어린 거 이것이 마귀 말 하고 있네.’ 이래 마귀가 모든 피조물은 다 전부 이용합니다. 그거 얼마 전에 배웠지요? 마귀가 이용하는 것은 뭣만 이용하느냐? 모든 피조물을 다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용해서 성도를 시험하도록 하고 성도는 그 시험을 이길라고 하는 데에서 자꾸 믿음이 자가라고 인격이 자라가고 완전을 이루어 가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래서, 또 이제 성경이 ‘이 세상은 무엇이라. 세상에는 어떤 유혹이 있는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자꾸 자라가고 있나? 세상을 보는 것이 차차, 아는 것이 자라가고 있나? 그러면, 세상과 멀어지고 있나 가까와지고 있나? 세상을 바로 성경대로 평가하고 있나 세상을 안 믿는 사람들이 평가하는 대로 그대로 평가하고 있나?’ 이런 걸 자꾸 살펴본다 말이오.
그러면 나는, ‘지난 달보다 이 달에는 하나님과 멀어졌나 가까와졌나? 세상과 멀어졌나 가까와졌나?’ 내가 내 자신을 볼 때에 ‘모든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또 인간에 대해서나, 마귀에 대해서나, 모든 소망에, 영광이니 모든 가치에 대해서나 이런 것이 자꾸 새로와지고 더 깨달아지고 고쳐지고 자꾸 이와 같이 되고 있나? 점점 타락하고 있나?’ 자기가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확실히 알 수가 있어요.
이래서, 자기가 이 모든 아는 가운데에서, 마귀가 가르친 것을 알면 자꾸 마귀화됩니다. 행동이 마귀화되고, 하나님이 가르치는 지식으로 점점 이 지식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고 점점 세밀해지면은, 하나님의 진리를 세밀히 아는 것만치 그 행동은 세밀하고 자기 행동을 세밀히 조사합니다. 세밀성이 다르면 세밀히 조사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세밀성이 없는 사람은 ‘공연히 트집 잡는다, 공연히 지나치다.’ 그렇게 이해를 못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이, 모든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하나님 말씀으로 자라가고 있는지 하나님 말씀은 멀어지고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들이 말하는 그런 것으로만 자꾸 더 자라고 강해지는가? 그러면, 여러분들 학교서 배우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 그 지식이 자라갑니까 배암이 가르치는 지식이 자라가고 있습니까? 배암이 가르치는 지식이 자꾸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걸 이래 말하는 것이 지금 아직까지 통일이 안 돼 그렇지 앞으로는 ‘이 세상 지식이 배암에서 나온 지식이라’ 배암의 지식과 하나님 지식이라 반대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을 이제, 모든 세계 사람들이 나무에 높이 달아 가지고 죽여 버릴 것입니다. 왜? 저희들의 적이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아무리 그라고 싶지만, 마귀란 놈이 그라고 싶고 마귀는 알고 있지마는 하나님이 허락지 안하기 때문에 그 일이 되지 안하고 지금 가르치고 이러고 있지마는 앞으로는 그리 됩니다. 예사로운 말이 아니라.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쉬운 말이 아니고 앞으로 그런 말들이 다 책임이 되어지고 거게 대해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세메스로 법궤를 끌고 가는 그 암소가 벧세메스에 도달해 가지고 그 수레를, 끌고 간 그 구루마 말이요. 이 구루마를 패 가지고 나무를 만들어 가지고 그 소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은 그것이 오늘 곧 우리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는 거,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의 법도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그것 때문에 순교당하는 것입니다. 그뭐 애국하다가 순교당하고 뭐 이 세상에 하는 거 그런 게 순교가 아니오. 여기 순교자라 하는 거 모두 세상에서 날뛰다가 정치가로 죽임 당한 것 많고, 사상가로 죽임 당한 것 많고, 반공으로 죽임 당한 거 많고, 6 5 때는. 그런 거 많아도 하나님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그렇게 당한 그게 정말 순교인데 그 순교자들은 많지를 못합니다.
그전에는, 해방 직후에 순교자 유가족 취급을 누가 했느냐 하면은 ○○○목사님과 ○○○권사님과 둘이 우리 전국에 있는 순교자 가족을 취급을 했었습니다. 그때 내가 말하기를 ‘순교자 유가족이라 하지마는 순교자가 얼마나 되던가?’ 별로이 많지를 못합니다. 그거 모두 다 죄짓다가 죽어도, 예수 믿다 죽으면 공산주의에 죽으면 다 그만 순교자라 하는데 그게, 주님과 진리 위해 죽은 것이 순교자지 그런 것이 순교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자꾸 학교 공부 이런 거 하는 것은 그것을 하면은, 왜 음행의 포도주냐? 하나님하고 하나된 것을 하나님과 멀어지고 이 세상하고 가까이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 본남편 하나님되는, 본남편이라 말은 나를 책임졌다 말이오. 여기 남편이라 하면 남녀 동침하는, 죄악되는 육체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그게 아니고, 실은 부부라 하는 건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 그게 남편으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전부 책임지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책임질 수 있지 누가 책임질 수 있소? 부모도 책임 못 지요. 부모도 낳아 놓고 그날 죽을란지 내일 죽을란지 또 아무리 밥을 먹여주고 싶지마는 못 먹이게 하면 가난해 가지고 밥도 못 먹일란지 죽도 못 먹일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하나님에게 다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하나님만이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점점 버리고 책임지지 못할 이 피조물, 세상에 있는, 마귀가 움직이는 그런 것들만 자꾸 나를 책임질 줄 알고 그것만 더 믿고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모든 그런 것들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걸 뭘 보고 아느냐? 아는 것은, 국민학교 입학 안 한 것이 국민학교 입학하고 나면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또 중학교 가면 더 멀어지지, 고등학교 가면 더 멀어지지, 대학 가면 더 멀어지지, 또 이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세상을 맛보고 접하면은 하나님과 더 멀어지지. 그러니까 음행의 포도주라 그거요.
얼마나, 평생 예수 믿어도 음행의 포도주가 뭐인지 그것을 한번 들어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를 믿되, 옛날은 바리새 교인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소망을, 죽은 후 소망을 바라는 것이 바리새 교인들이고 사두개교라 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이 세상에서 있는 그 소망만을 가지고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사두개교라 합니다. 오늘도 여호와의 증인이나 뭐 안식교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 소망은 없고 땅에 있는 소망입니다.
이래서, 여호와의 증인에도 구원 얻을 사람은 십사만사천 인이다. 다 땅의 부활은 얻는다. 십사면사천이 몇 사람 됩니까, 어데? 십사만사천 인만 하늘나라에 부활하고 나머지기는 땅 부활해서 땅에 소망이다. 땅의 소망으로 천 년 동안, 장가가고 시집가고 해 가지고 천 년 동안 사는 그 소망으로 믿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도 그러하고 안식교도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독교와 반대되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자기 지식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식, 산 지식, 살리는 지식, 완전한 지식 이 지식으로 자기 지식이 자라가는지? 이 지식은 버려 버리고 땅에 있는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 마귀의 지식, 세상 지식, 이런 것으로만 자꾸 자라가고 있는가? 그것도 자기가 봐야 됩니다. “믿음에 있는가 없는가” 그말은 내가 하나님의 지식만이 긍정하고 인정하고 확신하는 이게 자라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지식은 모르고 세상 지식만 자라가는지? 제가 그때 여게, ○○○라 하는 여성도가 하나 있었는데 세례를 받을라고, 세례 받을라고 왔어. 세례를 받을라고 와서, 우리 교회 나왔어요. 나와서 내가 묻기를, ‘성경을 얼마나 봤느냐?’ 하니까, 그때 고졸 했는데, 지금은 고졸 많지마는 그때 고졸했으면은 상당히 고등 지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랬는데, 성경 얼마나 봤느냐 하니까 그저 신약 성경 몇 장 봤다 해. 몇 장 봤다고. 그러면 ‘소설은 몇 종류나 봤느냐?’ 소설은 본 종류가 소설 쳐놓고 안 본 종류가 없어. ‘또 그라면 문학집은?’ 문학집도 많이 봤어. 내가 어떻게 부애가 나 ‘너는 지옥을 가야 된다. 네가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냐? 세례 못 준다.’ 쫓아보내 버렸어. ‘세례 못 준다’ 쫓아보내 버렸어. 그라니까, 세례를 안 줬어요. ‘너 세례 받을 터이면 신구약 성경을 다 한번 읽고 오너라’ 이랬어.
그 사람 부자라요. 그때 부자고 인물도 잘났고, 아주 부자고 인물도 잘났습니다.
자기 남편은 여기 부산서 큰 술도가 하고 있어요. 이랬는데, 돈도 많고 이러니까 연보도 많이 하는 사람이오. 그래 야단을 쳤더니마는 삐꿔서 여기 ○○교회 갔어요. ○○○교회 가 가지고 세례를 받았어요.
어째 서울 갔다 오다가 찻간에서 만났어. 와 가지고 뭘 대접을 하고 와 가지고 말하기를 ‘목사님 그때 나를 살려 줬습니다. 그 말씀 듣고 난 다음에 그때 어떻게 마음에 섭섭한지 내가 ○○교회로 옮겨 가지고 그만 거기서 집사도 하고 무슨 중직을 맡아 놓으니까 옮기지는 못해도 그라고 난 다음에 내가 성경을 봤고 지금 우리 ○○교회는’, 그때 ○○○목사 있을 때인데 어떤 부흥사가 와 가지고 성령 받았다 하면서 마구 죄 내놓으라고 사람들을 뚜드려서 이라는데, 목사가 교인들을 막 뚜드려 대고 또 사모님이 뚜드려 대고 전도 부인이 뚜드려대고 하는데, ‘그 뚜드려 대는데 맞아 보니까 그래 어느 매가 제일 아프더노?’ 이래 내가 물으니까 전도 부인이 제일 사정없이 때려 제일 아프고 사모님 때리는 게 좀 덜 아프고, 목사님 때리는 게 제일 안 아프더라고 그렇게 말해요. 그라면서 웃으면서 그거 자기가 감탄을 하고 그렇게 말합디다.
성경 지식을 자꾸 알지 않고 모두 예수 믿는 사람이 테레비나 이런 거 세상 소식이나 이런 데 대해서 그저 안 빠질라고 애를 쓰고 신문 보는 거 잡지 보고 이런 거 보지마는 하나님의 말씀 읽지 않는 그게 믿음이 없는 거라 말이오.
“네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네 자신을 시험해 봐라.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과 모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모든 피조물, 사람, 세상, 마귀, 이 세상 생활, 하늘나라 소망, 여게 대해서 하나님의 지식으로 내가 자라가고 있나? 내가 하나님의 지식은 멸시하고 이 세상 지식으로 자라가고 있나? 내가 하나님의 지식을 아는 것뿐 아니라 그대로 내가 행동이 내가 변화되어 가느냐, 내 마음이 전보다 차차 변화돼 가나,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이 변화돼 가나, 생각이 변화돼 가나, 소원이 변화돼 가나, 모든 평가가 변화돼 가나, 내 욕심이 변화 돼 가나, 성질이 변화돼 가나, 내 행동이 변화돼 가나, 자기가 그걸 살피는 것이 그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보자’ 내가 요새 양산동 기도원에 가는데, 오늘부터 양성원 성경 공부가 제 책임입니다. 그래 나는 오늘 아침에는 지금 아침에 바로 갑니다. 가는데, 양산동 가도 그저 잘못하면 양산동, 집에 있다가 한번 뭐 다른 데는 이래 관광 갈라 하면 안 되겠고 기도하러 가는 척 하고 이래 가 가지고 모든 풍경이나 산경이나 모두 한번 보고 바람이나 쐬고, 그라면 자연 보고 안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렇게 해 가지고 도리어 방종한 사람 만들기 쉽다 그말이오. 또 뭐 밤에 산에 기도한다고 산에서 혼자 아니고 여럿이 있으면서 거기서 해 놓으면 그것도 또 재미도 있고 이래 가지고 그래 되면은 나중에 산구석에 제가 암만 있어도 망하고 만다 그거요.
우리가 ‘내가 믿음에 있나 안 있나? 내가 믿음에 있나 안 있나?’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나는 이런 자이다.’ 네가 어떻게 지금 신앙 생활 하고 네 실상이 어떻게 되어 가지고 있다는 걸 네가 똑똑히 발견하고 이런 자라는 것을 네가 알고, 내가 지식이 자꾸 고쳐져 나가고, 또 내 마음이나 모든 소망이나 무엇이든지 고쳐져 나가고, 내 행동이 고쳐져 나가고 내 모든 생활이 고쳐져 나가야 하나님이 내게 징계하는 것도 고쳐져 나갈 것이고, 저주하는 것도 고쳐져 나갈 것이고, 축복도 고쳐져 작은 축복이 큰 축복 되고 자꾸 이래 돼지지 내가 고치지 않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자꾸, 그렇게 한다고만 고쳐지겠습니까? 이래서, 신명기 28장에도 보면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면 다 이루어지리라” 말했습니다. 치우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산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가 그만 산에 와 있으니까 다 잊어버려 버린다 말이오. 그 사람 치우친 사람이오.
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 맡은 구역이면 구역, 자기 맡은 직장이면 직장, 자기 맡은 교회면 교회, 자기가 이 세상에서 맡아 가지고 일하는 자기 의무, 책임, 자기 분담한 여게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몸은 산에 가 있을 때에는 여게 마음이 있어.
여게 마음이 있으니까 거게서 여기 것을 해서, 오지는 못해도 거게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다 이렇게 하고 준비하고 나니까 이제 기도가 끝나면 요이 땡 막 가고 싶어 이래 있다가 와 가지고는 자기 의무와 책임에 어서 분발해서 하니까 못 한 것을 그보다도 몇 배를 더 합니다, 헛일 안 하고서. 하나님이 지능을 줘 가지고 하게 되지 또 헛일 안 하지 이라니까 모든 심방하는 것이나 목회 더 하고 관심이 더 있다 말이오.
더 있지, 또 여게서 일할 때는 그만 이것만 보고 일하는 사람은 또 헛일이라.
여게서 일할 때는 ‘이거 주님 만난 그것이 그립다. 산에 가니까 좀 마음 안정이 되고 정돈이 되고서 진리가 좀 고조되고 이렇게 돼졌는데 여기 이거 하다 보니까 자꾸 그만 이것만 보고 이라니까 하나님과 연결이 자꾸 멀어진다, 진리를 깨달음이 자꾸 둔해진다.’ 이러니까 여기 일은 해도 또 마음이 거기 있다 말이오. 어서 일해 놓고 또 그리 달아납니다. 달아나 가지고 또 거기 가 가지고서는, 또 거기 가 가지고서는 또 거기 가서는 기도하면 또 여기 오고, 이렇게 하는 이게 다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거.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하려 가면 ‘나. 나.’ 이래 가지고 자기 속에 요런 못된 생각 하나 있으면 그걸 달성할라고 가서 기도하면서 그게 배나 지옥의 자식이 돼 가지고 옵니다. 배나 강퍅해 가지고 오고, 배나 욕심쟁이가 돼 가지고, 배나 자기 마음은 이기주의 그런 사람 됩니다.
세상에 사람이 어디 징그러운 것이 뭐이 징그러운 것이냐? 그 동리에든지 어디 가 보면, 그 동리에 가서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을 만나 보니까 그 동리 사람이 만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을 위하는 거,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만 그 동리가 정이 딱 들어붙습니다. 여러분은 안 그렇습디까? 정이 들어붙습니다.
만나 보니까, 냉정스럽게 저만 알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 만나보면 ‘이 동리는 다 그런가?’ 그만 그 동리에 정이 딱 떨어집니다.
다, 가정에도 가면 그렇고, 동리도 가면 그렇고, 무슨 단체도 가면 그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남 모르고 저만 아는 그것보다도 더 냉정스러운 거, 더 무서운 거, 더 징그러운 거, 더 흉한 거 없어. 거게는 사람이 자꾸 피할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로 치우치고, 어떤 사람은 또 자기는 모르고 남에게로 치우칩니다. 남에게 치우치면, 남을 위해서는, ‘저거 남에게는 자꾸 그와같이 하면서 저거 살림살이도 모르고 남의 일만 자꾸 돕고 있다.’ 이러니까, 제것이 안 돼지고 나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본보고 따라올 게 없다 말이오.
남에게로 치우쳐도 안 되고 자기에게로 치우쳐도 안 되고, 또 세상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하늘나라로 치우쳐도 안 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치우치면 안 돼요.
이래서, 어짜든지 가면, 첫째는 자기 아는 것이 변화가 돼지고, 자기 마음이나 행동이 변화가 돼지고, 모든 사람 관계가 다 변화가 돼져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변한 걸 봐야 된다 말이오. 다른 사람이 변한 걸 봐 다른 사람이 감화받도록 변화가 돼져야 돼.
그러고 나서, 암만 그래도 소용 없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서, 암만 그래도. 내가 그랬어. 어떤 사람 보고서. ‘너 암만 기도한다고 뭐 떠들어 쌓아 봤자 뭐, 너 하는 그거야 누가 못 하겠노? 사람 하는 거야 누가 못 하겠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하나님이 ‘됐다’ 하고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응해 주시는 그게 있어야 된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응해 주시는 게 있어야 되지, 인간이야 제가 제 일 누가 못 합니까? 제 일 할 수 있지.
인간의 하는 일은 제가 힘쓰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너 하는 일에 찬성해서 응원을 해 주고 협조를 해 주고 하나님이 너에게 기적과 축복을 주는 게 있는가 보자.’ 그래 나는 그거 보고 어떤 사람에게 그말 했어. ‘너 암만 산에 가서 기도한다고 해도 너 구역 식구 마음도 변화되지 안하지 식구도 늘지 안하지 또 모두가 다 깜깜하지. 보니까, 하나님의 성신의 감화가 너 하는 일을 찬성한다고 하면은 너 하는 일에 하나님이 협조할 터인데’ 안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나를 존대히 여기는 거, 후대하게 여기는 거, 또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변해지는 거,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인간이 하는 일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게 대해서 있나 이걸 봐야 됩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과 나와의 어떻게 지금 발라져 가고 있느냐? 또 내라는 사람이 성경 말씀으로 인해서 어떻게 내가 달라져 가고 있느냐? 내 생활이 어떻게 달라져 가고 있느냐? 그것까지는 우리 사람이 할 수 있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보고 자꾸 기도하고 이래 가지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게 해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진짜 가짜는 뭘 봐야 됩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에 대해서 표시판이 뭣이지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게 표시판이 뭐입니까? 내가 예수를 바로 믿는지 잘못 믿는지 삐뚤어졌는지 하는 거 그거 표시판은 뭐이요? 예수 믿는 그 표시판이 뭐이라 했지요? 표시판이 자기의 세상살이라고, 세상살이. 자기 몸이나 직업이나 생활이나 인간 대우나 모두 세상살이가 예수 믿는 표시판으로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저 뒤에 남 보고, 남 드는 거 보고 든다. 표시판이라.
이 표시판이 바로 돼야 된다 말이오.
이 성령,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를 내가 상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아는 대로 “네가 너를 시험해 봐라” 그러면 자기가 변화가 되나 안 되나 이것 보고, 자기 변화가 돼 가지고 행동이 변화가 됐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다른 사람이 몰라요. 잘못 믿어 가지고 미신같이 그와같이 되는 것인지? 거게 잘하고 못하는 것의 정확한 표시판이 뭐입니까? 크게 한번 모두 한소리로. 정확한 표시판이 뭐입니까? 똑똑히 말해. 정확한 표시판은 그 사람의 세상 형편입니다.
알겠습니까? 세상 형편에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게 표시가 나와야 된다 그말이오.
예수님을 바로 믿는 그 표시판은 뭣인가? 한목 대답해 봐. 표시판은 무엇입니까? 저 뒤에, 표시판은 무엇입니까? 세상살이라, 세상살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