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하나님의 목적

 

1981. 2. 22. 주일오후

 

본문:창세기 37장 5절∼11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창세기 42장 6절∼10절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요셉이 17세 때 꾼 꿈이 30세 되던 해에 이루어졌는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나타나는 어떤 일이든지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과거사와 같이 그렇게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지나간 일을 기록해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된 대로 다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알리신 때는 17세 때였지만 그에게 대해서  이런 경영을 시간을 따라서 예정하신 대로 이루어 나가시는 것은 영원  전부터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요셉에게 형제들이 땅에 머리가 닿기까지 절하리라고 보이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과,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야곱의 열 한 아들들이 애굽에서 요셉에게 은혜를  입고 요셉을 존대하게 되기까지에 여러 순서가 있었던 것을 오전에 잠깐  증거했습니다.

기록된 것을 몇 가지로 추상해보면 형제간에 상당한 애로가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고 또 객지 생활 사회 생활하는 가운데도 별별 굴곡이 있었던 것도 추상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한 순서라도 빠져서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목표를 정해놓고 인도하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크게 말하면 무궁한 하늘나라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두시고  세상에서 이런 순서 저런 순서로 인도하시는 중에 잠깐 휴식도 주시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시려고 우뚝우뚝 솟은 다행스럽고 행복스러운 일도 순서에 다  정하시고,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구비 구비도 다 정해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서 확정해야 하겠습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당신 혼자만  계셨는데 완전하신 당신이 어떤 것에게 충격이나 피동받지 않고 홀로 자존하신  당신이 당신의 본성인 그 사랑으로 사랑이 발동해 가지고, 또 당신 홀로의 기쁨은  온전한 기쁨이요 참 영원한 기쁨인데 당신 한 분의 이 기쁨으로, 또 당신의 뜻은  영원하고 완전한 뜻인데 당신 혼자의 뜻대로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이 목적은 누구의 뜻도 가담되지를 않았고 또 누가 권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당신 혼자의 기쁨으로 시작했고 또 성경에 말하기를 당신의 본성인 사랑이 이  일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영원 전 정하신 목적인데 이것은 당신의 자존의  사랑으로, 자존의 기쁨으로, 자존의 온전한 단독의 뜻으로 정해진 목적인데, 이  목적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때도 아무것도 없을 때인데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혼자 그 전지한 지혜로 영원을 예정했습니다. 이 예정은  천년만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끝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영원 무궁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우리의 영생도 당신의 예정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니  이 예정은 끝이 없는데, 끝없는 이 예정을 단시에 당신의 의지 안에서 영원을  예정하셨습니다.

또 예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되 영계와 영계의 모든 것을 예정대로 당신  혼자 창조했습니다. 20세기 과학이 별에서 별을 건너간다고 자랑하고 큰소리  치지만 이 넓은 우주를 당신 혼자 예정하신 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주에 별별  것들이 많지만 그것도 전부 당신 혼자 만드셨습니다. 또 만들어 놓은 것을  오늘까지 보존하시며 운영하시는 것도 당신이 혼자 하십니다.

이렇게 주권의 지혜로 예정하시고, 주권의 능력으로 성취하시고, 주권의 섭리로  재창조도 하시고, 이렇게 저렇게 둘을 셋으로 합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시면서  각종 각양의 섭리를 이루셔 가지고 오늘까지 역사하시는데, 과학자들이 별별  참람된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 심판 받을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사 6천 년밖에는 안됐는데 그들은 별별 것으로 증명하면서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증명이 진화론인데 그것도 다 깨지고 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몇억억만 년이 됐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성경대로  6천년 미만인 것을 믿습니다.

6천년 역사에 이루어진 모든 것은 주님 혼자 주권하셔서 이것도 이용하시고  저것도 이용하시는데, 부분적으로 보면 이런 저런 것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  면에서 당신이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것을 주권 능력으로 창조하시고 또 주권  지능의 섭리로 운영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가? 당신의 목적 곧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로서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과 꼭 같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얻어 가지고 모든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시은의  위치를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시려고 모든 것을 일으키시고 심지어 우리들에게 미리 약속을  선포하시고 피조물 되어 오셔서 대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정죄된 죄는 당신이  무한하신 지혜로 정하신 무한한 율법 온전한 율법에 정죄됐기 때문에 무한한  정죄요, 무한한 정죄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망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무한한 율법의 정죄를 받아 무한한 사망을 당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무한한 당신이 무한한 대가를 내셔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구속을 입혀주셨습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로 영원히 무한히 죽은 우리에게 무한한 대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의 결합을 주시고, 유한한 우리에게 이 구원이 이루어져서 당신이  목적하신 대로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가  되도록 하시는 일이니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하기를 이 일은 인간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다만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도록 하시려고 찾아와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이 구원을 보증했다는 것은  성령이 책임졌다는 말인데, 성령님과 진리 이 두 보증자가 우리에게 이 일을  이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에도 말씀하시기를 ‘성령과 물과 피가 이 일을 이루고 있다’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구원 역사를 책임진 하나님이요, 물은 하나님의 뜻인 진리 말씀을  상징한 것입니다. 또 피가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설정한 대속의 공로를  말씀한 것이니 곧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 화친된 새생명의 대속을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무한한 당신의 뜻과 능력과 사랑과 희생으로  택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니 정죄할 자가 있겠느냐 했습니다.

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적된 택한 자 너희들을 완성하시려고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희생의 제물로 주신 분이 어떻게 은사로 다른 피조물을 너희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했습니다.

또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피조물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대속하시려고  우리의 형을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가 순종해야 될 것을 당신이 대신해서  죽기까지 순종을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과 진리와 원수된 것을 화목케 하시려고  화목 제물로 당신을 다 바쳐 죽으셨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또 대속해 놓은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당신이 친히 사람으로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의 거리끼는 그 형체를, 무한한 분이  유한한 것 속에서 유한한 것을 붙들고 일하려고 하니까 그 기막힘이 한이 없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원히 무한한 분이 유한한 것을 입었고, 창조주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처럼 되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부활뿐만 아니라 또  아버지 우편에 앉아서 계속 기도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환난이냐 곤고냐 핍박이냐 기근이냐 적신이냐 위험이냐  칼날이랴, 세상에 어떤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있겠느냐? 높음이냐 깊음이냐 이제 것이냐 장래 것이냐  능력이냐 천사냐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대해서 큰 소망을 가지시고 큰 자본을 투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놓지를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그 한 토막, 열 일곱 살 때 꾸게 한 그 꿈이 서른 살에 이루어진  것은 무엇이냐? 그대로 이루어진 데는 한 순서라도 빠지지 않아야 그 노정이  구비가 됩니다. 이걸 모르면 요셉에게 닥친 일은 참 별스러운 일이요, 하나님  섬기는 자에게 당하지 않아야 할 일이 당했다 해서 원망 불평 의심 별별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미리 보여준 것을 순서대로 걸어가니까, ‘요리 가라 조리 가라,  동으로 가라 서로 가라, 냇물을 건너라!’ 뭘 어떻게 하라고 하든지 그대로  가니까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만일 그 노정대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요셉이 당한 일을 이해 못하더라도 그 순서를 거쳐 가지고  도달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그때 기록을 보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는 모르나 당신의  목적이 있고 순서가 있어서 당신의 최종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데, 에베소  1장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시려는 것을 목적의 일부분으로  말씀했습니다.

영광의 찬미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진 걸 보고 ‘아, 하나님은 장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완전이시다, 하나님은 참  희생이시다, 하나님은 자비시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아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영광과 덕으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또 당신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를 당신의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정의 기업이 무엇이냐?’ 하는 말은 ‘그 가정은 무얼 뜯어먹고  사느냐?’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 가정의 생계는 유리 공장에 매였다, 그 사람들의 기업은 목축에 매였다, 그  사람의 기업은 상점이다 할 때, 그 가정의 전 생계는 그 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업만 보고 살고 그 업에만 주력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기업이라고 에베소 1장에 말씀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할 일은 우리만이 당신의 할 일이요, 하나님이 사시는 것은 우리로  말미암아서만 산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작은 상점을 가진 가정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 가족들의 경영이나 계산이나 소망이나 노력은 그 상점에 기울이게 됩니다. 왜?  거기서 먹고 살 것이 나오고 필요한 것이 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기업이라고 에베소1장에 말씀해놨습니다.

그러면 전지 전능자 하나님 당신의 목적이 우리요, 당신의 기업이 우리들이니  우리를 보아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며 능력 있는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능대로 하나님의 본질 본성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꼭  같은 온전한 자로 만들어진 우리를 보고 ‘야, 하나님 참 재주 있다. 능력 있다.

사랑 있다. 자비 있다. 정확하다. 진실하다. 의롭다. 공의롭다.’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보이지 않는 당신의 완전을 우리가 완전이 되어진 것을 인해서 하나님의  완전을 나타내는 이것이 당신의 일거리요,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니다.

피조물에 대해서 우리를 어떤 자로 만드시는가?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진  우리는 어떤 자인가? ‘영광과 덕으로 불렀다’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이  우리가 저희들에게 함을 인해서 ‘그는 참 존귀하다. 그는 참 자비하다. 그는 참  봉사다. 사랑이다.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모든  만물이 감탄해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다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우리에게 ‘덕봤다, 덕봤다, 덕봤다.’ 할 수 있는 덕  보이는 자, 덕을 입히는 자,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 돌릴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시고, 또 하나님께 대해서는 하나님의 솜씨가 어떻다는 것, 하나님 본체가  어떻다는 것, 보이지 않는 당신을 만들어진 우리를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 당신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전부는 당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것들인데, 하나님이 우리 일생에 대해서 아무 계획 없이 하시겠습니까? 우리  일생을 가는 대로 갈팡질팡하도록 두시겠습니까?  일시에 영원 무궁을 예정하신 이분의 목적이 우리들인데 우리에게 대해서 아무  계획 없이, 예정이 없이 아무렇게나 가는 대로 가다 보니까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도록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때가 찬 경륜을  따라서 예정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도 장소도 어김없이 그대로 딱  예정대로 이루어나가십니다.

그러기에 요셉에 대한 짤막한 한 토막의 순서를 보면 형제들이 원수를 삼아  가지고 죽이려 할 때 어떻게 어떻게 돼 가지고 안 죽었는데, 그렇게 불행스런  가정불화라는 순서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행복, 비록 땅위에 있는 행복이요  큰 행복은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 되겠습니까?  또 돈에 팔린 종은 죽여도 상관없는 천물인데 종으로 팔려간 그 순서가 어떻게  행복을 찾아가는 순서가 되겠습니까? 거기서 또 억울하게 감옥까지 들어가서  죄인으로 매장된 그 불행이 어떻게 총리대신이 되는 행복을 찾아가는 순서의  길이 되겠습니까?  참으로 험하기 짝이 없고, 불행하기 짝이 없고, 안 망했다 할 수 없는 순서지만 그  순서는 틀림없이 행복이 열리는 나무의 뿌리요 둥치요 가지입니다. 맺어진 결과와  그 결과를 찾아가는 순서는 너무도 판이했는데 결과가 좋으면 순서도 좋아야 할  것이지만 순서는 불행 중에 불행이었으나 그 결과는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큰 계획을 가지셨으니  당신의 목적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택한 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계획이  없겠습니까? 순서가 없겠습니까? 모든 순서는 다 그대로 정해져있지 정해지지  않은 순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데 사람들은 제 맘 짚어 남의 말 하듯이 자기가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살면서 갈팡질팡하니까 하나님도 그런 줄 알고 ‘모든 일이 의외에 닥쳤다, 안  닥쳐도 될 수 있는 일인데 닥쳤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후택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이 타락이 됐기 때문에, ‘아이구 안됐다.’ 해서 그 속에서  택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을  표준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모든 면의 순서를 다 정하셨다는 것을 의심치 맙시다.

어떤 순서가 일시적으로 인간 면으로 봐서 불행해도 불행으로 생각지 말고,  행복해도 행복으로 생각지 말고, 모든 순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절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순서요, 쓴 것이나 단 것이나  모든 순서는 반드시 우리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순서로 닥치도록 하셨다는 것을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인간 면에서 ‘나쁘다, 좋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형제간에 충돌이 나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좋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순서로 하셨으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행복을 찾아가는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불행하다고 보는 것은 내용이나 계획이나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요, 그것이 무엇을 조성하고 이루어 나가는 순서인지 이해 못하고  단편적으로 속단하기 때문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은 다 일반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런 순서든지 저런 순서든지 요셉이  행복을 찾아가는데 의심할 것 없이 필요한 순서지만,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  행복에 도달하려면 요셉이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그것을 여기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집에서 살 때 그렇게 언어가 불뚝불뚝하면서 불평하는 형제들은  험한 사람들입니다. 걸핏하면 소나 양도 힘들이지 않고 잡아서 가죽을 훌떡  벗기고 날것으로 먹는 목축업자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강퍅하고 불량한  사람들입니다.

첩첩 산중에 자기를 미워하는 형제들만 소복하게 모여 있는데 찾아가면 ‘저  놈이 온다. 됐다. 오늘은 죽여 버리자.’ 하는 그런 형제들인 줄 몰랐겠습니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알지만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알리라고 하는 것을 알리지 않을 수 없어서 꿈도  알렸던 것이고 또 아버지가 형들이 양 먹이는 곳에 가서 형편이 어떤지 보고  오라고 하는 것은 형제들에게 맞아 죽는 일인 줄 알지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서 갔던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갔다가는 맞아죽습니다.’ 하고  거역했더라면 그 일이 안 됐을 것 아닙니까?  또 찾아가서 그렇게 됐기 때문에 이스마엘 자손이 마침 지나가는 길거리에 딱  만났는데 그게 하나님의 예정의 순서라 말이오.

또 보디발 집에 종으로 팔려가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됐을 때 자기 집으로  살며시 도망쳤더라도 헛일 아니겠습니까?  또 보디발의 아내가 그렇게 간청할 때 젊은 마음으로 그만 죄를 범했더라도 다  헛일이 됐을 것 아니겠습니까? 또 억울하게 됐다고 해서 이의를 달고 감옥에  투옥되지 않으려고 시비하는 날이면 결국은 사건이 드러나니까 보디발이 아내고  요셉이고 다 죽이지 살려 둘 리가 없다 말이오.

또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이 약속을 하고도 2년 동안이나 말없이  지나갔는데, 그때 요셉이 자유로이 활동할 때니까 도망했더라면 헛일이 되고 말  것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걸어가는 순서 순서마다 없어서는 안 될, 목적을 향해서 가는 데  필요한 순서였던 것을 우리가 의심할 수 없이 확정이 됩니다.

그러면 확정된 순서를 걸어갈 때 요셉에게 있어서 위험천만한 일은  무엇이었겠으며 또 든든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뿐입니다. 요셉도  자유성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영감대로 할 수도 있고, 자기를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길을 가기 쉬운 순서가 많았지만 자기를 따라 걸어간 일은 없었고 하나님을  따라서 걸어갔기 때문에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까지 됐고, 총리대신이 됨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멸망시키지 않고 어려움에서 구출하게 됐고, 애굽에서  4백 년 동안 온갖 수양을 시키고 많은 민족으로 번식이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만났던 순서는 측량하지 못할 순서들이었지만 그 순서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없어서 안 될 순서임에 틀림없고, 그 순서에서 인간 면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면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기능 면으로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능력 면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기능 면으로 하면 망하는 길이요 성공이 없는 길이요, 하나님의  기능을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인본으로 생각했더라면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니까 인간 면으로 생각해 가지고  갔더라면 탈선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 편으로 갔기 때문에  탈선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형식계시로 된 이 역사적인 사실을 문서로 기록해서 주신 것은 역사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도리로 보이기 위함입니다. 오전에 구원 도리로  보여 주시는 네 가지를 말했는데 그 중에 하나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순서가  그대로 정해진 것입니다.

요셉에게 절하게 된 것도 그런 순서가 아니면 그렇게 됐겠습니까? 이 순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흉년도 만들고, 풍년도 만들고, 이스마엘 족속이  오고 가고, 장사꾼이 오고, 또 구덩이 있는 근방으로 갔고… 이렇게 우주 전체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다 집중 집결이 되고 운영이 되고 이용이  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기까지 요셉이 만일 탈선의 길, 하나님을 범하는 길을 걸었다면  자기 행복이 결정된 그 길은 탈선되고 맙니다. 요셉으로서는 하나님 편을  생각하면서 죄짓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가는 것 하나로서 하나님의 목적은  달성이 됐고 자기에게 정해진 행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목적하신 이 구원을 향해서 걸어갈 때 짧은 토막도 있고 긴  토막도 있는데 왜 그런 토막 토막에서 신기한 꼴을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다 맡기고  따라가면 하나님이 정하신 행복의 순서로 갈 수가 있지만, 어기기 때문에 행복인  줄 안 그 순서도 결국은 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유한한 자유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원대한 목표를 향해서 갈 때 토막토막 숨쉴 곳도 있고, 모든  사람이 영광으로 아는 그런 자랑할 만한 순서도 있고, 한없이 고생하는 순서도  있는데 어떤 순서에서라도 죄짓지 않고 나가기만 하면 고생의 순서가 칭찬과  영광이 되고, 행복의 순서가 외식하는 자들에게 부러움이 되는 별별 오묘의  일들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닥치는 어떤 일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은 주먹으로 반석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닥쳐오는 순서를 불만 불평하면 심판 받습니다. 어떤  순서든지 하나님이 나나 자연이나 인간을 통해서 만드신 것이요, 내가 죄를  지었든지 의를 행했든지 어쨌든지 내게 닥친 순서는 없으면 안 될 순서라는 것을  첫째로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는 내게 행복과 불행을 이루는 순서가 되는 것인데, 이 순서에서  내가 자유의사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면 행복이 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나 자기를 따라가면 불행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한 토막 한 토막 당한 순서를  의로 걸어가고 또 어떤 사람은 불의와 죄로 걸어가는데 마지막 목적에 도달했을  때 한 사람은 의로써 의의 결과를 맺는 의에 도달해서 생명을 맺게 되고, 한  사람은 죄의 결과를 맺는 죄에 도달해서 사망을 맺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유의사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지 우리 앞에 당하는 이런 저런  순서가 우리를 불행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 줄 확실히 잡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어떤 순서든지 내게 필요한 순서인데 그 순서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순서로 인해서 죄를 지으면 그 토막에서 멸망으로  한 걸음 나가게 되고, 의를 행하면 생명과 구원으로 한 걸음씩 나가게 됩니다.

어떻게 행복스러운 순서라고 해도 반드시 거기에는 우리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는 죄와 의가 있기 때문에 천하에 제일 불행스러운 순서라고 해도 거기에서  의를 택할 수 있고 죄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의를 택하면 행복의 순서가 되고 죄를 택하면 불행의 순서가 되는  것이지 그 순서가 불행과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데서 행불행의 순서가 되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앞길이 다 정해져 있는데, 다만 그 길을 걸을 때 자기로  걸어가느냐, 하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걸어가느냐? 자율로 걸어가느냐,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걸어가느냐? 사욕으로 걸어가느냐, 성령의 소욕으로  걸어가느냐? 제 힘으로 걸어가느냐, 하나님을 힘입어서 걸어가느냐? 땅의 것을  소망하고 걸어가느냐,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걸어가느냐? 자기를 위해서  걸어가느냐, 하나님을 위해서 걸어가느냐?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 자기 길은 변동하지 못합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주신 자유로 선택해서 걸어가게 하실 때 자기를 따라서  멸망으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따라서 구원으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궁극적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에서 결정이 되어 가지고  의인 되어 구원 얻고 죄인 되어 멸망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위에서 보면  사람의 자유 의사의 선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광대한 뜻을 깨닫게 되면 의의 걸음을 걸어가더라도 교만할  수 없고, 죄의 걸음을 걷는 자를 멸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기를 깨달아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 타락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승리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요, 승리할 그 마음이요 행동이지 하나님을  버려두고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멸망의 걸음입니다.

오전 말씀처럼 껍데기는 참혹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는 표리가 아주 다릅니다.

요셉이 걷는 걸음의 껍데기는 참혹했으나 속에는 넘치는 위로가 있었으니 이것이  신앙 걸음입니다. 오늘도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꼭 물질을 줘서 그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세상과 세상에 일을 줘서  기쁘게 하는 그런 유한한 분이 아닙니다. 물질에 빈곤함을 당해도 그 사람이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느끼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에게는 있습니다.

죽음을 당해서 고통하는 사람을 살려줘서 그 사람을 행복되게 할 수 그런 유한한  능력만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오. 몇 배 더 참혹한 죽음이 그에게 닥쳐도 그  사람이 기쁘고 즐겁고 견딜 수 없는 행복과 평강과 쾌락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피동되어 행복과 불행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껍데기야 어떻게 되든지 그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맹이는  얼마든지 행복스럽게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당했지만 첩첩 산중에 다녀오라고 할  때 아무런 염려나 의심없이 ‘예,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갔습니다. 찾아가면  당장 죽일 것 같은 형제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억억만 배도 더 강한 세력이 자기  안에서 위로를 주니까 속으로는 코방귀를 뀌고 있습니다. 비웃고 있소. 형제들이  뭐라고 한다 해도 우습습니다.

전능자가 함께 계시고, 전능자가 말하라 해서 했고, 전능자가 꿈을 줘서 말했고,  전능자가 동행하는 것이 믿어지는데 형제들의 집중 사격이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신앙 걸음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저 사람 위험 천만하다. 저 사람 참 슬퍼서 낙망 절망 중에  있을 것이다.’ 아니오.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위로가 속에 있는 것을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언제든지, 고통도 심하지마는 하나님의 위로는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고도 넘침이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집에 종으로 팔려갈 때 비참했지만 하나님이 같이 하시니까 그  집에서 요셉을 정금같이 귀중히 여겼습니다. 종으로 팔려간 그 껍데기 속에  하나님이 같이 하시니까 그렇게 존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감옥에 죄수로 들어갔지만 감옥에서도 그만 그에게 전권을 맡기니까 껍데기는  죄수인데 속으로는 옥사장이 됐습니다.

이렇게 겉은 비참하지만 속은 그가 형제의 악을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 실수하기  쉬운 것을 이해하고, 인간의 악독도 이해하고, 시기도 이해하고, 질투도 이해하고,  감정도 이해하고, 모든 인간들의 실수도 감옥에서 이해하고, 그 모든 젊은  사람들의 정욕도 이해했습니다.

또 감옥에서도 2년이나 말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무심하다 할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미리 계획해서 모든 기후를 조절해서 풍년과 흉년을 폭발시키듯이  조성해 가지고 ‘요이 땡!’ 하는 그때에 바로에게 꿈꾸도록 하시고, 그 꿈에  해석에 대해서 술 맡은 관원으로 말하게 해서 바로 앞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요렇게 물 샐 틈 없이 역사하고 계시지만 겉으로 보면 무심하게 요셉을  버린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시고 그와 같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을 요셉이 알았으면 옥중에 가는 것도 그는 참 낙관이  되어졌을 것이고 감사와 기쁨이 되어졌을 것이요, 어디서든지 소망이 넘쳤을 것  아닙니까? 요셉의 간 걸음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꼭 죽음에서 살려 주시는 것 가지고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죽음에서도 죽음이 행복스러워서 인간 죽음 쳐놓고 최고의  고통의 죽음을 원하고 원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를 본위로 삼고 자기를 기준해서  성경을 오해 곡해를 하지 말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든든히 믿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이렇게 상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놀랄 때 놀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조급할 때에 조급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절망할 수 있을 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온유했고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고 민망스러웠지 아무런 조급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과 하나님이 그에게 영감시킨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신청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백 세에 얻은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해도  고통이 되지 않고 도리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이삭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재가 될 터인데 재가 사람이 되어서 아이 낳는 것을 보겠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지식이 나왔고, 인간을 초월한  광대한 사람이 됐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평강을 누렸던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한창 세월이 났을 때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도 요셉은  거기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쭐해지지를 않았습니다. 내리 읽어보면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이리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하셨다.’ 했습니다.

또 마지막에 아버지가 늙어서 쪼그라졌을 때 피난 온 사람들이니까 허무하지만  그 아버지 임종시에 아들 둘을 데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주신 그 축복이 계대되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또 요셉 자신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도 자기 해골을 가나안으로 옮겨 달라고  자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한 번도 땅의 것에 소망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에 소망을 뒀습니다. 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련성, 그  목표를 향해서 가는 걸 알기 때문에 애굽의 이런 것 저런 것도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을 이루어 가는 데 필요한 한 이용물들이요, 한 순서요, 한 작용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판정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라는 보따리 속에 파묻히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렇게 하나님께 피동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을 떠날 때 자기 동족이  애굽에서 나갈 것을 예언을 했습니다. 인간이 미래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미래사를 말한 그대로 맞았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하나님을 상대하고 살았기 때문에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예언한 그것이 그대로 딱딱 맞았습니다.

인간이 미래사를 어찌 압니까? 하나님으로 연결되니까 시간과 공간에 아무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로써 능히 될 수 있는 초인간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기도) 극히 유한한 저희들이 무한한 소망의 이 구원을, 무한의 인도로 경영으로 무한의  은혜로 이루어 가는 이 구원을 저희들에게 이런 방편 저런 방편 모두가 다  멸망될 방편이요 주님에게 한 자욱 한 자욱 따라가는 이 걸음은 짧고 좁은 것  같으나 마침내 주의 광대하신 무한의 구원 계획과 승리에 다 명중되는 요 간략한  첩경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의심치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로  성화되고 감동으로 행동이 변화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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